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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창세기 강해 (326) “도단에서 흐르는 섭리” 창세기 37:12-17 강래성 목사 #창세기 #개혁교회 #에덴개혁장로교회

에덴개혁장로교회49:50

Transcription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37장 12절로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떼를 칠 때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 하겠나이다."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아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헤브론에 있었던 요셉이 아버지의 명을 받고 세겜에 갑니다. 예. 그곳에서 형들이 이제 다른 곳으로 옮겼죠. 그곳이 도단입니다. 그래서 도단까지 가서 형들을 만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약 80km, 또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20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어떤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는지를 오늘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토록 하겠습니다. 12절 본문을 한번 볼까요? 이렇게 시작되죠.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그의 형들은 요셉의 형들을 말해요. 그러니까 이 본문의 초점이, 본문의 중심은 요셉에게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그 관점에서 오늘의 이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다. 그리고 요셉의 눈에서, 시각에서 오늘의 본문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요셉이 지금 가게 되는 곳이 세겜이죠. 세겜은 어떤 곳이에요? 한마디로 인간들의 욕망이 죄의 증거로 이렇게 드러나지는 곳이 세겜입니다. 그곳에서 디나 사건이 있었죠. 그 세겜의 그런 문화, 또 그런 화려함, 안정적임을 쫓아갔던 디나. 그리고 그곳에서 참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당하고, 그리고 그 형제들이, 오빠들이죠. 세겜에 있는 모든 장정들을 할례라는 것을 통해서 다 죽이게 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곳입니다. 또 야곱은 이곳에 그 땅을 사 놨죠. 백 크시타. 그러니까 한 크시타가 양 한 마리 값이니까 양 100마리의 값을 주고 세겜 땅을 사 놓은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러니까 온갖 인간의 군상들이 다 뭉쳐져서 욕망이 가득한, 곧 인간의 계획과 또 인간의 원함이 추구되어지는 장소가 바로 이 세겜이었습니다. 이곳에 지금 요셉이 보내지는 것이죠.

오늘 본문 13절도 볼까요? "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 하겠나이다.'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성경은요, 이렇게 시작을 해요. 야곱이 요셉에게라고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또 14절에도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그에게 이르되. 그러니까 지금 이 헤브론에서 세겜으로, 또 세겜에서 나중에 도단까지 가는 이 일은요, 야곱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금 이 일이 있어진다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언약적 의미에서, 그러니까 또 아버지죠. 야곱도 아버지예요. 그런데 인간적 아버지의 명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이라는 표현 자체를 통해서 바로 예, 하나님 아버지의 보냄을 받는 그런 의미를 두고 있고 하나님 아버지의 일하심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여기 13절에 보면요. 우리가 이 언약의 관점에서 너무너무 중요한 단어가 있어요. 13절에 보면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이 "내가 그리하겠나이다"라는 것은 우리 구원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게 이제 히브리 단어로 '흰내니'라는 뜻이에요. 이 말은 정확하게 직역을 하면요, 히브리 원어 그대로 직역하면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 말을 누가 쓰냐면 아브라함이 써요. 창세기 22장 1절에 모리아산으로 그 이삭 번제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흰내니, 내가 여기 있습니다." 또 모세가 똑같이 이 단어를 인해서 소명을 받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사무엘이 그렇고요. 이사야서 6장에 이사야가 그렇습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다 이 '흰내니'를 통해서 보여 주는 것은요, 그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적 모습이에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내가 그리하겠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그 순종의 길을 가는 그 그림자들로 지금 이렇게 설명되는 거예요. "내가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지금 누구로서 벌어질 일을 지금 앞서 지금 겪고 있는 거예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실 그 일을 지금 요셉이 그대로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설명을 하는 거예요. "흰내니, 제가 가겠습니다." 이런 걸 놓치면 안 돼요. 그래서 이 구약의 말씀을 그대로 신약은 그것을 성취하고 증거합니다.

히브리서 10장을 가 보시면 7절이죠. "이에 내가 말하기를" 예수님이에요.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그대로 행하십니다. 요한복음 6절에서도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지금 오늘 이 창세기의 본문에서 보면요, 그냥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그러니까 평범한 심부름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출발점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라 역사 속에서 순종하는 그 섭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14절 다시 볼까요?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요셉이 세겜으로 가니라." 요셉은 이 세겜으로 가는 이 길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가는 길입니다. 지금 이 세겜은요, 불과 한 2, 3년 전에 이미 세겜 전쟁이 있었던 곳이에요. 그러니까 그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 있는 장정들을 다 죽인 것이 불과 2, 3년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위험하죠. 그리고 이미 요셉은 압니다.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있다는 것을. 예. 그런데 가죠. 이건 마치 예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왔을 때 영접하지 않고, 또 가룟 유다가 그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실 때 "내려와 봐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봐라. 그러면 믿겠다." 조롱과 수치를.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모르시지 않아요. 아십니다. 그런데 그 멸시와 위험과 버려짐과 배신의 그 길을 지금 가는 거죠. 그 장면입니다.

15절부터 볼까요?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아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가서 도단에서 그를 만나니라." 여기 어떤 사람의 도움의 의미가 무엇을 말할까요? 예. 이 어떤 사람이 형들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단으로 가자라는 말을 듣고 지금 요셉에게 도단으로 그들이 갔다고 알려주죠. 그리고 요셉을 도단으로 가게끔 합니다.

여러분, 세겜에서 이 도단으로 가는 이 길은 그냥 단순한 길이 아니에요. 요셉이 아버지의 그런 심부름을 따라서 그냥 의무감과 책임감이라면 그냥 세겜에서 "없어요. 갔더니 그 없더라고. 못 찾겠어요."라고 돌아오면 돼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해 주죠. 도단으로 갔다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또 다시 도단까지 찾아갑니다. 근데 이 길은 세겜에서 도단으로 가는 이 길은요, 예정된 길이에요. 하나님의 계획된 길이고 어떤 사람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를 그 길로 안내하는 거죠. 마치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의 시험 가운데 이끌어 갖다 놓듯이 안내하시죠. 왜 예정된 길이냐? 왜 그것이 계획된 길이냐? 왜 있어진 일로 간 것이냐라고 할 때요, 그 도단은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서 구덩이에 던져지게 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또 그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는 장소가 바로 이 도단이에요. 그래서 예정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이스라엘에는 야곱도 있고 또 요셉의 형제들이죠. 이 열한 형제들이 야곱과 열한 형제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미리 작정해 놓으신 길이죠. 이것을 우리는 물론 신학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다'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셨고 그 뜻을 창조 세계 속에서, 역사와 시간 속에서 그 뜻을 경륜을 펼쳐내시는 것, 이루어내시는 것, 하나님이 한 걸음 한 걸음 이끄시는 것, 보이지 않죠. 그러나 예정된 하나님의 길입니다. 지금 그 길로 가게 된 거죠.

그래서 여러분, 요셉은 우리가 기억할 때 꿈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 아닙니다. 요셉은요, 또한 성공의 사람도 아니에요.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할 때요, 요셉은 섭리의 사람이에요. 이 섭리 속에서 보여주는 의도가 요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은 섭리의 인생이고 이 섭리의 인생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은 왜 중요하냐? 예, 저와 여러분의 성도의 인생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한마디로 뭐냐? 성공의 인생이 아니에요. 성도의 인생은 섭리의 인생입니다.

섭리는요, 하나님의 큰 섭리는 보여져서 있는 게 아니에요. 안 보여요. 그리고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일어납니다. 안 보이는데 현실에서 증거돼요. 어렵죠?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장중에 붙드시고 성도에게 행하시는, 반드시 성도에게 있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일입니다. 로마서 8장을 보시면요,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게 나타나는데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전제 근거가 있어요. 누구에게만 일어나느냐? 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구원으로서의 소명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를 살려냈다. 중생케 됐다. 이게 부르심을 입게 되는 자는 누구냐? 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또 더 사랑하게 되는 자예요. 그런 사람을 우리는 성도라 그러죠. 교회인 겁니다. 교회인 성도에게만 있어지는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져요. 근데 그 합력하여 이루어지는 선을 그 앞서 뭐라고 돼 있냐면 '모든 것'이라고 돼 있어요. 다른 사본에는 '모든 것을'이라고 돼 있기도 해요. 근데 이 모든 것이 모든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은 뭐냐면 모든 것 속에서예요. 모든 것 속에서 누구에게만? 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또 사랑하게 되어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에게만 모든 것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납니다.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진대요.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요,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똑같이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공부를 또 못 하는 사람도 있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있고 돈을 못 버는 사람도 있고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데 교통 사고도 나고 암도 생기고 또 심지어 직분자인데 파산이라는 것을 겪게 되고, 뱅크럽이죠. 때론 정말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말조차 꺼낼 수 없는 일들을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발생합니다. "신자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이니까 절대 저 사람에게는 저런 일이 없어. 있으면 안 돼."라고 할 수 없는 정말 어디다 내놓을 수도 없는 일이 신자 가운데 벌어져요. 불신자에게도 벌어지죠. 근데 다른 게 있어요. 성도, 신자에게만 다른 일이 있어요. 똑같이 신자도 아플 수 있습니다. 공황장애가 올 수 있고요. 우울증이 있을 수 있는데, 우울증을 가졌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돼요. 왜요? 여기에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성도에게는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일이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불신자는 하나님 없는 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지 않은 자는요, 본인이 그 일을 통해서, 그 어려움을 겪는 그 일을 통해서 자수성가하려고 합니다. 극복하려고 해요. 그리고 안 되면 그것으로 자폭해 버려요. 자살을 한다거나. 근데요, 자살도 많은 사람이 시도합니다. 심지어 신자도 시도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신 자, 하나님이 그를 섭리 가운데 있는 자는요, 자살 시도를 해도 못 죽어요. 안 죽어요. 그렇다고 또 "시도할, 또 내가 성도인지 아닌지 한번 확인해 보라"는 건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똑같은 불행과 어려움을 겪는 그 속에서 불신자는 그걸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없어요. 만나지를 못해요. 신자는 그 낭망과 절망과 그 어두움과 깊은 눈물과 한숨 속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다고요. 그 절망의 끝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정말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이 합력하여 하시는 겁니다. 성도에게만 있는 특별한, 극히 제한적인, 있을 수 없는 일들인데 그 일들 속에서 어떤 일을 하세요? 그 위기 속에서 기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영접하게 되는 그 일을 하신다. 그래서 성도만이 이 환경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믿음입니다. 내가 만든 믿음은, 내가 착각하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은 이것을 못 봐요. 그런데 이 절박하고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 수조차도 없는 그런 한숨과 눈물이 바닥에서 이 너머의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그 하나님을 비로소 눈을 열어 보게 되는 것, 그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에요. 그래서 성도가 "나는 믿는다"라고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바라봅니다"라는 고백이에요.

오늘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그래서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가서 도단에서 그 형들을 만납니다." 이 도단은요, 히브리 단어로 도단입니다. 외우기 좋죠? 도단은 도단입니다. 뜻은 '두 개의 샘', '이중 샘', 예, 겉과 속이 있는 두 개의 우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도단이 갖고 있는 의미는 이런 거예요. 겉으로는 고난의 샘이죠. 이곳에서 요셉이 그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져요. 깊은 수렁에 빠져요. 기가 막힌 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고난의 샘이에요. 근데 속으로는 예, 섭리의 샘이죠. 여기서 이스라엘 곧 야곱과 또 나중에 70명이 내려와서 살게 되어지는 이 모든 애굽에서의 벌어지는 그 이스라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나라라는 그 놀라운 나라가 지금 이 도단에서 시작되잖아요. 무슨 일로 말미암아? 요셉 한 사람이 버려지고 팔려지고 그리고 묻혀져 버리는 이 기가 막힌 이 웅덩이, 도단이라는 곳에서 있어지잖아요. 그래서 도단은 두 얼굴을 갖고 있는 겁니다. 고난과 은혜, 죽음과 생명이 함께하고 있는 자리예요. 그게 도단입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강력하게, 안 보이는데 아주 강력하게 흐르고 있는 장소, 도단이에요. 우리는 한쪽 샘만 보죠.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망했고 아무것도 아닌 거 같고 나는 이 태평양까지 건너와서 이 미국 땅에서 이룬 것 없고 실패한 것만 보이는 도대체 내 인생은 무엇을 했나? 나는 무엇을 남겼나? 나는 떠날 때 내 인생에서 나는 뭘 건졌나?" 우리는 한숨과 실패와 낭망과 절망의 샘만 보죠. 그러나 하나님은요,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실패의 샘, 고난의 샘, 그 위기의 샘에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신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안 보인다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지 않은 것이 절대 아니에요.

열왕기하 6장을 보시면요, 이 도단이라는 장소가 성경에 세 번 나타나는데 또 한 번 나타나는 도단이라는 장소를 한번 보세요. 이 배경은 그렇습니다. 그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북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이렇게 침략해서 이렇게 정복하려고 할 때마다 아람의 계획을 이스라엘이 다 알아차리고 수비하고 방어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람 왕이 묻습니다. "아니 도대체 우리의 왜 기밀이 다 이렇게 노출이 되느냐? 왜 우리가 왜 자꾸만 전쟁에서 이렇게 패하게 되느냐?" 그러니까 그 아람 신하가 그러죠. "이스라엘에 선지자 엘리사가 있는데 그가 이미 자기 방에서 우리의 계획을 다 알고 있습니다. 다 들여다봅니다."라는 말을 해요. 이제 그 배경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에요. 보세요. "왕이 아람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기를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그니까 도단에 엘리사가 있습니다. 아람 왕은 이 도단에 있는 이 엘리사를 잡으려고 하는 거죠.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하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까?' 하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니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 사환, 엘리사의 사환이에요. 사환이 보니까 이제 아람 왕이 그 도단에 자기 병사들을 보내 가지고 보니까 너무나 많은 병사들이 이 엘리사를 잡으려고 온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사의 사환이 겁이 잔뜩 먹은 거죠. 그래서 "큰일 났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엘리사가 뭐래요? "걱정하지 말아라. 저들이 가지고 온 군대 수보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수가 더 많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구하여 그 사환의 눈을 열어보게 하죠. 그런데 보이지 않았던 불말과 불병거가 빽빽하게 자기 진영에, 엘리사의 진영에 있던 것을 보게 되는 거죠. 그래 도단입니다. 이곳이 도단. 도단은 어떤 곳이에요? 하나님의 군대가 안 보이지만 분명히 역사하고 함께하고 있는 곳이죠. 바로 이게 도단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안 보여요. 안 보인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죠. 그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 불말과 불병거로 함께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 장소, 도단입니다. 위기의 장소예요. 겉으로는 절대절명의 그런 숨 막히는 장소예요.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시다는 그 장소입니다.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과 함께하심을 보게 한 장소, 도단이에요.

사도행전 2장을 가 보면 이 도단이 우리에게 보다 확실하게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지, 뭘 말하고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사도행전 2장을 가 볼까요? 이 사도 베드로의 설교죠.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그는 예수님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죽였다. 그러나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나님이 미리 작정하신 그 길대로, 그 뜻대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어 준 바 되고 못 박혀 죽으십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길이에요. 십자가의 길이고요. 이게 도단의 길이고요. 이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못 박아 죽인 그 현장 속에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신 대로 이루어진 일이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하나님의 뜻에 성취가 있는 곳, 그 섭리가 벌어진 곳, 그게 십자가고요. 그 십자가로 가게 하는 그 길 속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에게 얼마든지 하는 일입니다. 어떤 일을 하시죠? 이 일이 벌어져요. "어찌 알고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구나. 하나님의 정하심,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는 이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그 일 속에 내가 이 일을 한 당사자구나."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섭리는 이겁니다. 우리를 이 땅에서 성공시키고 잘 먹고 잘 살고 그리고 우리를 부귀영화 만들어 주려고 우리를 이 태평양까지 건너와서 있게 하신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역사의 이 한 시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 내가 세상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어떠한 만큼 돈을 벌고 노년은 어떻게 돼 있고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 나구나라는 사실을 만나게 하는 거예요. 그게 도단으로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 구속의 길이에요.

하나님의 섭리는요, 기억하세요.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 성도라면 반드시 도단으로 이끄십니다. 도단이 싫으면 성도이기를 원치 않으면 돼요. 내 인생에 도단이 있어져야 합니다. 왜요? 그 끔찍한 십자가, 그 흉악한 버려짐의 그 숨 막히는 그 도단으로 예수님이 가셨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 도단에서 예수님이 버려지고 배신당하고 죽임을 당하셨던, 하나님이 사람에게, 피조물에게 뺨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고, 이보다 더 큰 수치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지렁이로 한 30년 사세요. 그러면 그 수치를 감당할 수 있어요? 뭐 지렁이는 괜찮나? 바퀴벌레로 한번 살아 보실래요? 하나님이 바퀴벌레보다도 더 못한 신이 피조물의 자리가 된다. 벌거벗겨진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죽는데 그들에 의하여 못 박힘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한다. 그걸 다 알고도 그 길을 내려가신 그 예수님의 삶에 성도의 인생에 묶여지는 겁니다. 그 예수의 삶과 그 예수님에게 내가 함께 되어지는 일이 없다면 성도라고 감히 말해서 안 돼요.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냥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냥 캥거루 엄마 그 뱃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도단의 이 길을 같이 참여한다는 겁니다. 고난으로 보이는 위기와 격정의 그 길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샘이 준비되어 있고, 이곳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는 이것을 경험하게 되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내가 함께 묶여지는. 그래서 성도는 강력한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거고요.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당하고 두렵지 않은 겁니다. 죽음 앞에서조차도 너무나 기쁘고 환호하고 외치는 거예요. "죽음아, 너는 나를 어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는 너를 기다렸다." 여러분, 이게 성도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나의 삶, 도단은 어디인가요? 내가 가게 된 도단, 나의 도단은 무엇입니까? 이 자리에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부른 하나님의 귀한 자기 백성들 안에는요, 반드시 하나님이 이 도단을 허락하십니다. 죽지 않아요. 망하지 않아요. 끝나지 않아요. 그러나 이 도단을 통해서 반드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접하게 하십니다. 깊은 수렁에 갇혀 울부짖는 나의 도단. 좌우가 꽉 막혀서 이제 비로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게 된 도단. 자존심이 박살이 나고 깨져서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사람에게서의 관심과 인정을 외면하고 예수만 바라보게 된 도단. 피하고 싶지만 할 수만 있으면 원치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오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 자존자로 살려고 했던 우리 속에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는 것, 그 도단을 통해 예수님과 십자가를 우리 안에 우리 것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을 구원하는 도단이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로만 "믿습니다"라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그 믿음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진짜인 나의 믿음은요, 숨 막히는 나의 이 위기감 속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길을 걸으셨고 그리고 나를 섭리로 이 길 가운데 보호하시고 지키셔서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기필코 맛보게 하시는 인생. 십자가로 예수님은 끝난 게 아니라 그분이 다시 살아나셔서 그분이 우리를 영광 가운데 부르시는 그 승리 가운데 있는 것처럼 그런 거예요.

시편 84편 보겠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복음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여기 말씀 보면요, 이러합니다. 여러분, 주의 제단은 번제단을 말하는 거예요.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번제단은 어떤 곳이죠? 짐승을 태워 죽이는 곳이죠. 예. 이미 죽은 짐승을 올려서 완전히 태우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이곳은 불길과 끌림과 있을 곳이 못 돼요. 그런데 뭐라고 돼 있어요? 그 번제단,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복음자리를 얻었답니다. 뜻하고 있는 게 이런 겁니다. 주의 제단, 주의 집에 사는 것이 이렇게 막 위기와 그리고 고통과 그런 속에서 참새도 제비도 복음자리와 새끼 둘 집을 짓는 그 모습은 이곳에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위로가 있다라는 설명이에요. 그 뜨거운 그곳에 어떻게 제비집이 있을 수 있고 참새가 거기에 집을 지을 수가 있냐고요. 그런데 그렇게 복음자리를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피를 흘리면서 타 들어가는 그 뜨거움 속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온의 대로가 구원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섭리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자가 복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눈물 골짜기로 지나가는데 거기에 어떤 많은 샘이 있을까요? 눈물의 샘이 있죠. 절망의 샘이 있죠. 그러나 그 샘 속에 그 샘만이 아니라 은혜의 샘, 회복의 샘, 기쁨의 샘, 찬양의 샘, 감사의 샘, 그리고 하나님의 그 승리의 샘 이런 것들이 그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는 그때 있고 다 하나님이 그곳에 이른 비로 그 샘의 물을 다 채워 주신답니다. 저와 여러분의 도단에도 예, 이렇게 이중 샘이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흘러왔고 지금도 흐르고 있고 앞으로도 흐를 겁니다. 아, 내게 어떤 고난이 올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주의 제단에 참새가 집을 짓고 제비가 새끼 둘 복음자리를 둘 수 있는 안전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이중 샘 속인 도단을 통해서, 도단으로 가고 있는 이 길 속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간 그 길을 실제와 인격으로 만나는 거예요. 뭐 성지순례 간다 해서 이스라엘 가서 골고다 길 그곳에 가서 그 십자가 길 걸은 것이 십자가의 길에 참여되는 게 아니에요. 진정한 내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무너지게 하고 좌우를 다 꽉 막게 한 그곳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 지옥과 같은 불타오르는 그 제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셨는지 그리고 나를 어디다가 지금 갖다 놨는지, 시온의 대로라고 하잖아요. 구원의 넓은 기쁨과 감격을 맛보면서 걷는 나의 눈물샘 곁에 하나님은 은혜의 샘을 같이 두셨습니다. 아, 여러분, 지금 도단에 있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목사님 설교는 왜 자꾸만 죄만 얘기하고 위로가 없습니까?" 그래서 지금 이제 위로 드리는 거예요. "이 제 설교에 위로가 없다"라는 말을 이제부터 하면 안 돼요. 도단에 있다면 예, 낙심하지 마세요. 고난과 아픔이 있는 그 이면에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영원 전부터 준비하셨던 그 구원을 지금 행하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구원이, 하나님이 결정하신 그 구원이 나의 틀림없는 구원으로 내가 인식하고 만나고 누리고 환호성치도록 하나님이 행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도단은 내 인생과 내 삶에 전부가 아닙니다. 예. 그 비로소 이 아픔과 슬픔이 있지만 이곳에 진정 그 아픔의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펼쳐지는 십자가가 있어지는 그런 곳이죠.

저와 여러분이 이 도단의 길, 십자가의 길, 이 길에 아무나 들어와지는 거 아닙니다. 이 예배당에도 누구나 몸은 올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영으로 살리우신 자들만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창조자시고 영광이시며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시며 나의 모든 것에 하나님은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드리는 것을 너무나 나는 행복합니다. 기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는 달라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이 요셉의 삶 속에 보여 주신 예수님의 이 삶에 요셉이 들어가서 그 삶을 산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들어가서 지금 우리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승리하고야 맙니다. 이 은혜의 영광이 여러분에게 함께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인생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 주시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우리를 불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우리를 높여 주셨는지요?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라는 이 믿음이 죽어서 단순히 좋은 천국에 간다라는 그런 기독교 신앙만을 이해해 왔던 것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 사람, 하나님과 교제하며 교통을 나누는 그 사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일까지 아끼지 않고 하셨는지 십자가를 바라보며 깊이 헤아립니다. 하나님이 땅에서 그 십자가의 도단의 길이 있었던 것처럼 그 예수님 안에 구원하고자 우리로 하여금 도단을 내어 주시고 도단의 인생을 살게 해 주신 은혜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단에서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십자가의 은혜를 또한 깊이 깨닫습니다. 주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당신의 귀한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도단의 섭리와 은혜가 넘쳐나게 하시고 이 땅에서 넉넉히 넉넉히 예수님이 이겨내신 것처럼 이겨내고 승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기쁨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