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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우리들 스스로가 좋은 날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법정스님인생법문

BBS 인생법문43:35

Transcription

7세기 대승불교의 큰 스승인 시티 데바라는 분이 있습니다. 시티 데바는 인도 분인데, 한문으로는 적천(積天)이라 고요. 적자는 쌓을 적자, 하늘 천자, 적천이라 그럽니다.

이 시티 데바 스님의 법문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또한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이익에 헌신한다. 그대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여기서 지적한 '남'이라는 것은 전혀 나와 상관 있는 타인이 아니라, 또 다른 내 자신입니다. 보다 큰 자기 자신이에요.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이익에, 남을 남의 이익에 헌신한다. 그대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그는 어떻게 보살행을 할 것인가를 두고 보리행이라는 그 그런 저서를 남습니다. 이 보리행 원래 산티 데바 이분은 남인도 남쪽 인도 남인도 한 왕국의 왕자였습니다. 어느 날 꿈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돼요. 문수보살이 "왕의 자리는 지옥과 같다"는 말을 듣고 왕의 계승에 의의를 느낍니다.

마침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될 전날 밤, 왕궁을 몰래 빠져나와서 나란다 사에 가서 출가하게 돼요. 인도 불교 역사를 보면은 부처님을 비롯해서 왕자들이 가끔 그렇게 왕의 계승권을 버리고 출가하는 그런 사례가 있는데, 이 시티 데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보리행로에 보면은 이 보리심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마음, 즉 발보리심. 보리심을 일으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심 실천하는 마음이다. 하나는 발보리심이고, 다른 하나는 행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이 할 때 자비심이 말하는 자비심 막연한 막연히 자비심이 아니라, 하나는 발보리심,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거고, 하나는 그 보리심을 행하는 거라는 겁니다.

5월 계제 여왕이라죠. 이달 들어서 길상사에서는 일요일마다 연거푸 이런 큰 집회가 열립니다. 오늘은 그 결제 하 결제 날이라서 올 사람만 뜨내기들이 오지 않고 올 사람들만 이제 오는 그런 날입니다. 이 절의 전속 배우인 저도 그때마다 출연을 해요. 지겹지 않으세요? 오마다 요일까지 연속도 아닌 3회 연속해서 계속해서 한다니까. 아침 나오면서 이게 무슨 짓이지, 뭐 중노릇 이런 건가, 뭐 이런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이 절이 절이 일이 많아요. 크고 작은 절들이 일이 많다고. 뭐 일을 벌려야 절이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은, 조용히 좀 있고 싶은데 가만히 있도록 놔두지 않잖아요. 이게 사바세계 구조입니다. 이 길상사 같은 경우는 큰 생사를 치를 때마다 그 보현의 보살님들과 관음의 보살님들, 또 거사님들이 거사님들이 수가 많습니다. 그중에도 후원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보살님들의 노고가 너무 큽니다.

흔히 그 생사 대사를 말하는데, 그보다 더 절실하고 현실적인 문제는 식사 대사예요. 먹는 게 큽니다. 큰 일이에요. 식사 대사가 곧 생사 대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저도 혼자 살면서 혼자 살면서 제일 머리 아프고 큰 일이 먹는 일이에요. 이게 적은 일이 아니라니까요. 뭐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식구들을 위해서 대중들을 위해서 수고를 해야 돼요. 아무 보상도 없이. 이걸 어떤 신학자들은 그림자 노동이라고 그래요. 그림자 노동, 뒤에서 그림자처럼 묵묵히 일하는 그런 노동이라는 거예요.

이 말없이 실천하며 내색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살아 있는 보살의 실체를 대한 듯한 그런 느낌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입으로만 말로만 뭐 보살이 어떻고 부처가 어떻고 떠벌이지만, 실제 후원에서 그렇게 많은 대중들의 음식을 준비하는 분들은 묵묵히 스스로가 보살님을 그렇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종교가 무엇인지, 불교의 본질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종교의 본질은 공허한 이론에 결코 있지 않습니다. 무슨 팔만대장경 조사 어록 기원 다 공허한 이론에 불과해요. 내 그 소리가 그 소리예요. 불교는 발보리심부터 시작합니다. 발보리심부터 출발해서 행보리심, 보리심으로 회귀하여 개체에서 출발해서 전체에 이르는 길입니다.

배움의 과정을 세 가지로 나누는데, 문사수(聞思修)를 문자, 생각 사자, 닦을 수자. 어떤 가르침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생각하면서 몸소 그렇게 실천하는 거, 몸소 그렇게 닦아가는 것이 배움의 과정이에요. 다음이 곧 그러한 실천이 곧 행보리심, 보리심을 행하는 겁니다. 닦을 수자, 행할 행자. 수행이라는 건 뭡니까? 한마디로 해서 보살행이요.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제 수행이고 보살행위입니다. 한마디로 불교의 수행은 행보리심이 바로 이것이 보살 보살행위입니다. 행의 궁극적인 종점이 곧 깨달음이요. 그래서 신해행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믿고 또 이해하고 그렇게 행하고, 그 행의 결과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깨닫고 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완성이 곧 깨달음을 명심해야 됩니다. 깨닫고 나서 뭐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완성이 곧 깨달음입니다. 그러니까 행 속에 이미 깨달음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과일의 씨앗이 들어 있듯이에.

뭐 상징적인 이야기지만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보십시오. 보살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보면은 사람 몸만 받는 게 아니라 짐승 몸을 받고 뭐 여러 가지 윤회를 하면서 이웃을 위해서 중생계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는가 하는 보살행의 이야기들이 과거. 뭐 인행 시. 요즘은 그런 문서들을 보기가 어려운데, 50년 전 저희들이 처음 절에 들어왔을 때 절에서 놔두는 책이 팔상록 혹은 십지인행. 팔상록과 십지인행록이에요. 이것 무슨 소린가 하면은 부처님의 전생이 전생에 어떤 보살을 했던가, 보살행을 어떻게 행했던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그런 내용들이 내용들을 이루어졌습니다. 처음 절에 들어온 사람들은 믿기지 않아요. 그 숫자도 그렇고, 또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져서 믿기지 않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이야기죠.

깨닫고 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결과가 깨달음에 이른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부처님의 일생을 팔상, 여덟 가지로 나누는 그런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모셔놓는 데를 팔상전이라고 그래요. 그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폭의 그림으로 이제 그려놓은 거예요. 전통적으로 이제 부처님이 생애를 얘기할 때 상으로 나눕니다. 근데 가장 중요한 사건인 성도상이 없다고요. 부처님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성도상이 없어요.

뭐 잘 아시다시피 첫째 도솔내의상, 도솔천에서 이제 흰 코끼리를 타고 이제 엄마 태몽에 들어가잖아요. 도솔내의상. 비람강생상, 룸비니에서 탄생하죠. 4월 첫 발일. 또 생로병사, 유라는 사문유관상에 있고. 다음이 이제 유성출가, 왕궁을 넘어서 출가한 상입니다. 그다음에 설산수도상이에요. 설산수도상. 다음이 수화악마상, 보리수 아래에서 이제 여러 악마들을 항복받는 그런 수행상이죠. 수화악마상. 다음에 반드시 성도상이 나와야 되는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성도상. 수화악마상 다음에 노원정보상, 노원사에서 설법하는 거,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열반, 쌍림 열반상이 나오지 않습니까?

어째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성도상이 빠졌을까, 이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행과 그 항마, 설산수도상 혹은 수화악마상 수행과 항마 속에 이미 깨달음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로 성도사를 넣을 필요가 없는 거죠. 왜냐하면 본래 성불이기 때문에. 본래 성불이기 때문에 본래 선물인데 왜 다시 하는가? 오염되기 때문에.

흔히들 내가 아직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남을 제도할 수 있는가, 이런 소리를 선가에서 흔히 합니다. 내가 아직 눈을 뜨지 못했는데 어떻게 남을 눈뜨게 하는가, 이런 가설에 속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영원히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기심이기 때문에, 자기만을 생각이기 때문에.

지장보살의 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다 건진 다음에 내가 성불하겠다, 이런 원을 세웠지요. 한 중생이라도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한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이런 소원이에요. 지장보살은 그와 같은 원 안에 이미 깨달음이 씨앗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 지장보살 같은 분을 비증보살, 비증보살이라고 징하, 징하지 않는 보살, 성부를 원하지 않는 보살이라고 비증보살이라고 그래요.

종교학자들은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얘기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가? 어느 날 갑자기 옵니까? 취임 없는 행의 축적이 마침내 눈을 뜨게 하는 겁니다. 이건 꽃이 피어난 소식과 같아요. 꽃이 어느 날 갑자기 피지 않습니다.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 그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 안으로 꽃을 이루기 위해서 무한한 노력들을 하지 않습니까? 꽃망울이 맺혔다 가도 한참 있다가 핀다고 갑자기 피는 게 아닙니다. 한 송이 꽃이 피기까지는 그와 같이 무한한 인고의 노력이 따릅니다.

한 인간이 형성되기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우는 무한한 정진이 필요한 거죠. 또 다른 표현을 하자면 본래 성불, 본래 다 갖추어진 거예요. 그건 왜 세삼스럽게 갖추기 노력하는가? 닦지 않으면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때문에 닦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잖아요.

불교 수행 차례를 흔히 신해행증이라고 그럽니다. 믿고 이해하고 행하고 또 증험. 여기서 행증가 다 완성이 있을 수 있지. 한 중생으로 있는 한 완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리 이상이지. 행의 구경이 곧 깨달음이라는 거. 이 말은 무슨 소린가 하면 수행의 끝이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다시 처음 얘기 시티 데바의 법문을 같이 암송해 보겠습니다. 저를 따라서 한번 하십시오. 소리 내서.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세상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에게 헌신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에게 헌신한다.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스스로 그 차이를."

이것이 내가 어리석은 사람인지 혹은 지혜로운 사람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그런 소식입니다. 이번 여름 안거 기간에 어떤 내가 어떤 보살행을 할 것인지 각자 오늘 이 자리에서 원들을 세우십시오. 목표를 설정해야 돼요. 크고 작건 간에 사소한 가정적인 일이건, 대사회적인 일이건, 혹은 이웃을 위한 일이건, 오늘 이 자리에서 결제날, 안거 결제날 각자 그 원을 세우세요. 내가 이 석 달 여름 석 달 동안 어떤 보행을 할 것인가, 어떻게 보리심을 행할 것인가 원들을 같이 세우십시오. 자기 자신이 생애에서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그런 여름이 여름을 스스로 우리가 만들어 가야 됩니다. 그런 좋은 여름이 되기를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

[음악]

희, 더 있게 잘 지내셨습니까? 네. 왜 더가 오죠? 그래, 더위도 이거 한때입니다. 이 비가 개이고 나면은 이 선선해질 거예요. 이런 더위도 우리가 지금 있기 때문에 느껴요. 우리가 살아 있지 않다면 이런 더위를 혹은 추위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더위라는 것은 이 계절적인 변화라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에게 베푸는 우주가 우주의 일종의 선물이라고, 우주의 어떤 은혜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날씨가 더워야 벼가 잘 자라요. 벼농사가 됩니다. 고온 다습해야 벼농사가 되지, 고온 다습하지 않고는 우리가 쌀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도 다 더울 만큼 더웠어요. 물론 이제 지구 온난화 뭐 이런 것 때문에 요즘은 더욱 그런 게 심해지고 있지만, 옛날에도 더울 만큼 더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제 이 뭐 신문 방송 뭐 신자들이 돼 가지고 거기서 오늘 뭐 불쾌지수가 얼마다, 또 이제 금년도 가장 무슨 시원한 날이다, 뭐 이런 보도를 하기 때문에 미리 미리 우리가 이제 더위를 앞당겨서 초대하게 돼요. 그 더위를 타지요.

옛날 스님들 법문을 보면은 더위를 피하려면 더위 자체가 되라. 추위를 피하려면 추위 자체가 되라. 이런 소리는 무슨 소린가 하면은 우리가 덥고 춥고 느끼는 것은 한가한 사람들이에요. 일에 봐서 열중한 사람들은 더위를 모릅니다. 추위를 모릅니다. 모든 것은 한때입니다. 이 머지않아서 선들선들 가을 바람이 또 불어옵니다. 산에는 요즘 마타리꽃, 모란, 좁쌀 같은 마타리꽃이 피기 시작해요. 마타리꽃이 피기 시작하면은 어김없이 이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어옵니다.

오늘이 이제 여름 안거 해제 날입니다. 지난 90일 동안에 안거를 어떻게 보내 왔는지 각자 한번 살펴보십시오. 내가 90일 동안 아무개 아빠로서, 아무개 엄마로서 혹은 무슨 절 다니는 불자로서 어떤 업을 익히면서 살아왔는지 한번 점검해 보세요. 스스로 점수를 매겨 봐야 됩니다. 내가 지난 90일 안거 동안 과연 몇 점짜리 수행을 했는가 스스로 점수를 해보세요. 법의 나이를 보태 만한 그런 정진을 했는지 아닌지도 한번 살펴야 돼요.

그 여름 안거를 마치게 되면은 스님들은 이제 법납, 법납, 법의 나이예요. 육신의 나이가 아니고 법의 나이입니다. 법의 나이가 하나씩 쌓이게 돼요. 그것은 스님들만이 아니고 정진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나이 말고 내가 진짜 불자로서 수행자로서 법의 나이가 얼마만큼 축적되는 한번 되돌아봐야 돼요.

이 당말 오대 때 스님으로 운문 선사는 분이 운문 아주 큰 스님입니다. 운문선사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까지 살다 가신 분인데, 뭐 이분 운문강이라 해서 어록도 전해지고 많은 영향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그런 큰 스님이에요. 이분이 이제 오늘 같은 보름날 법회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 이전의 일은 더 묻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럼 오늘 이후에 오늘 이후 일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 보라는 겁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사는 그만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대중에서 아무 말이 없자 스님 자신이 "날마다 좋은 날이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1일시호일(一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 듣기 좋은 소리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좋은 날이란 귀합니다. 또 좋은 날이 우리들을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그 좋은 날을 만들어 가야 돼요. 혹시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그 나름의 까닭이 다 있을 거예요. 그 나름에 다 의미가 있다고. 왜 우리 집 안에 내 신변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걸 돌이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면 그만하면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그 이유를 알게 되면은 한 생각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언짢은 날이 언짢지 않는 날로 바뀔 수 있어요. 내 인생의 의미를 보다 알차게 하기 위해서 이런 일이 내게 닥쳤구나, 이렇게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 화낼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이런 일도 겪는다고 생각을 한다면은 역겨울 것 또한 않습니다. 그 모든 것에 다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상사를 이렇게 한 생각 돌이켜서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면 언짢은 날도 좋은 날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좋은 날이 어디 있어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스스로가 순간순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좋은 날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고속도로 게이트를 벗어나서 이제 서울을 내지 않습니까? 표받는 아가씨들이 가끔 "좋은 하루 되세요." 이런 인사를 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사람들은 하루에도 이제 수없이 그렇게 전해지겠지만, 듣는 쪽에서는 참 고마운 말이에요. 좋은 하루 되라는 거예요. 물론 이런 표현이 이제 서양에서 "Have a nice day" 뭐 이런 것이 이제 우리말을 옮겨져서 그렇게 됐겠지만, 어쨌든 간에 좋은 인사요, 하루 되라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중에 텐트 아래 또 법당에 앉아서 이렇게 지금 현재 이렇게 살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은 우리에게 가난함, 부자도, 사랑도, 미움도,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많고 적은 것에 대한 근심 걱정도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만은 우리에게 아무 걱정 근심이 없잖아요. 지금 우리는 이 순간 이렇게 살고 있다니까요. 아무 분별 없이, 아무 걱정 근심 없이 빗소리에 길을 기울이면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돼요. 우리 수행하는 게 뭡니까? 호흡지관 아이에요. 숨을 한번 내쉬다 들이마시지 못하면 그냥 굳어지지 않아요. 순간순간 우리가 숨을 쉬면서 산다는 게 아주 그 큰 귀중한 일이에요. 무심이 지나치고 말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일찍 우리가 같이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은 이 숨을 제대로 못 쉬어 가지고 우리하고 다른 세상에 지금 살고 있잖아요. 순간순간을 놓쳐서 안 됩니다. 걱정에서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순간보다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해서 또는 아직 오지 않는 이 다음에 대해서 벌써 생각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아무 걱정이 없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언제 어디서나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알차게 살 수 있어야 돼요.

좌선은 선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좌선은 모든 불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예요. 부처님에 앉아 있는 모습이에요. 또 모든 불자들의 기본적인 수행입니다. 좌선이라는 게 이와 같은 좌선은 세삼스럽게 깨닫기 위한 수행이 아닙니다. 깨닫기 위한 수행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커다란 안락의 법문이요, 커다한 기쁨의 법문이라고. 아무 잡념 없이 이렇게 부처님처럼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자체가 커다한대 안락의 법문이 아닙니까? 기쁨의 법문이요. 때 묻지 않는 청정 법신의 모습이에요.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좌선을 하는 것은 세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 좌선하는 것은 아닙니다. 좌선 그 자체가 커다란 법문이요, 기쁨의 법문입니다. 그럼 왜 애써서 정진하려고 하는가? 세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을, 본래의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좌선을 합니다. 수행을 합니다. 닦지 않고는 오염되기 때문에. 나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 복잡 미묘한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향상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은 퇴보합니다. 물들어요. 오염됩니다. 세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 본래의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정진하는 겁니다.

지난 여름 제 경험에 하면은 뭐 저뿐이 아니겠죠. 가장 보람 있고 즐거웠던 시간을 들려면 조석으로 아침 저녁으로 개울 소리에 길을 기울이면서 묵묵히 앉아 있던 그 시간이에요. 책 보고 무슨 밖에 나가서 일하고 하는 시간은 곁다리 곁다리에요.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뭐 개울가니까 개울 소리에 길을 맡기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 그때가 진짜 기뻐요. 이것은 선열 위식, 선의 기쁨으로서 이제 밥을 삼으라는 거예요. 선열의 식이에요. 불자들은 그런 수행을 꼭 안거 기간만이 아니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돼요. 그건 기본적인 불자의 자세예요. 그런 자기 충전을 통해서 이 험난한 세상을 무난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자 자기 충전이 자기 충전의 시간이 없으면은 늘 중생 노름 여기에 팔리고 저기에 휩쓸리고 갈팡질팡하게 돼요. 자기 충전의 시간은 곧 자기 중심의 시간이에요.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을 될 수 있으면 많이 가질수록 좋습니다.

노후 대책 세우셨어요? 노후 대책. 신문을 보면은 뭐 몇 억 있어야 뭐 노후 대책 어 된다, 무슨 뭐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 뭐 이따 소리들 하거든. 이런 숫자에 속지 마세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데 무슨 노후 대책이야. 순간에 사는 사람이 무슨 분 노후 대책이야. 그때 가서 지가 알아서 하도록 하면 나도 돼요. 살아 있는 인생은 숫자 놀음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인생은 숫자 놀음이 아니에요. 일 없는 사람들이 돈 많은 사람들이 이 뭐 노후 대책 몇십억 가지고 이제 어디 가서 한다고 뭐 이런 소리 하는데 그데 속지 마세요. 그런 돈도 없지만은 그 사회 현상을 보면 그런 맹점이 많아요. 그 자기 중심이 없는 사람들, 자기 탐구 없는 사람들은 그런 데들 팔려서 살잖아요. 아이고 나는 몇 억이 아니라면 몇천만도 없는데 이거 어떻게 노후를 지내냐 그래서 밤들을 못 자고 그러잖아요. 그 순간을 살 줄 안다면 많이 많은 돈이 없어도 노후를 제대로 보낼 수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이런 망상에서 벗어나야 돼요. 돈 가지고도 해결을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근데 우리는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그렇게 잘못 생각들 하지 않습니까? 그럼 돈 많은 사람 안 죽어야 되는데 돈 많은 사람도 죽잖아요.

요즘 세상에서는 입만 열면 너나없이 하나같이 경제 경제 경제 촬영만 합니다. 뭐 정치꾼들이 아니고 기어 소시민 할 것 없이 다 이제 경제 타령하지 않아요.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데 경제적인 문제는 필수적입니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럼 경제가 다인가? 가진 것만큼 우리는 행복한가? 스스로 물어보세요. 10년 20년 전에 비해서 우리 가진 것이 훨씬 많아요. 소득도 많고 건강 상태도 좋고. 그만큼 그런 마음의 안정이라는가 평안한가 이 말이에요.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더 행복할까요? 행복의 문제는 이 소유하고 그렇게 밀착되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우리보다 훨씬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물질적으로는 우리보다 가난할지 우리보다 훨씬 더 밝고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 제 경제 하니까 모두가 이제 죽는 신용을 하고 움츠러들 보는데 그런데서 벗어나야 됩니다. 늘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은 거기서 헤어날 길이 없어요. 우리가 10년 20년 전 연탄 되고 쌀 몇 대 바까지 가지고 고맙게 생각하던 이런 시절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많이 가졌지만 그때만큼 그렇게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행복해 할지도 모르고 만족할지도 모릅니다.

뭐 여행해 보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저기 히말라야 티베트 네팔 같은데 산동네가 보면은 진짜 뭐 우리보다 우리하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너무 가난하게 살아요. 뭐 네팔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그러지. 그런데 그 사람들 눈빛 보면 눈이 그렇게 맑더라. 그렇게 친절하고 그렇게 밝아요. 우리보다 훨씬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활기차게 건강하게 밝게 살아요. 우리가 참으로 걱정해야 할 일은 경제보다는 날로 황폐되어 가는 인간성입니다. 진짜 우리가 걱정해야 될 것은 경제 수치 이런 것이 아니라 날로 그 형편 없어지는 아주 황폐해 가는 인간성이라는. 사람이 사람 속에 살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지 않아요. 걸면 죽이고 돈 몇 푼에 그냥 남을 죽이고 태연하게 생각하고 갈수록 이렇게 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경제보다도 황폐되어 가는 인간 인간이에요. 내 자신의 문제예요. 우리들 자신의 문제라니까. 황폐된 인간들에게는 많이 가질수록 더 해롭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환경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모자라고 아쉬운 것을 채우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길 줄도 알아야 돼요. 우리가 즐긴다는 것, 돈만 가지고 즐기는 것 아닙니다. 아주 조촐하고 사소한 것 가지고도 얼마든지 얼마든지 우리가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 선인들의 안빈낙도 정신이 있잖습니까. 안빈낙도. 넉넉지 못한 생활 환경에서도 찌들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는 그런 인생관. 그게 우리 선인들이 지녔던 처세운이에요.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는 훨씬 이건 갑비싼. 맑은 가난.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청빈. 이것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귀한 거예요. 고귀하고 값진 겁니다. 우리가 살 줄을 알면 적게 가지고도 얼마든지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살 줄 모르게 되면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무가치하게 인생을 낭비하게 돼요.

노후에 대한 불안을 미리 가불해서 쓰지 마십시오. 뭐 한강 사람님이 그런 걸 걱정하는 거예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을 맑은 정신을 지니고 인생을 관조하면서 구경하듯이 그렇게 살 줄 알아야 돼요. 그래야 지혜롭고 조철한 노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현자경이이야. 형장이 중부 경전에 중부 중앙아에 나온 경전 가운데 하나인데, 이리야 경장이 현경. 하룻밤 현자 이 현장에서 이렇게 합니다. "과거를 따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과거를 따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는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있을 때 그의 안색은 생기에 빛난다.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는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있을 때 그의 안색은 생기에 빛난다. 분수 바깥 것을 탐내어 구하고 지나간 과거사 슬퍼할 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꺾인 갈대처럼 시든다.

이런 법문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들으십시오.

"과거를 따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는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있을 때 그의 안색은 생기에 빛난다. 분수 바깥 것을 탐내어 구하고 지나간 과거사를 슬퍼할 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꺾인 갈대처럼 시든다."

날마다 좋은 날 이루십시오. 예,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