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ription
생로병사에 대한 법문을 여러 차례 들어서 이에 폭도 넓어지고 마음도 편해진 거 같아요. 특히 죽음도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을 늘 기억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가족이나 제게 의미 있는 분이 아프시거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마음이 복잡해지곤 합니다. 저의 갈망을 기도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괴로움에 빠져들곤 합니다. 수행적 관점에서 제가 어떤 관점을 놓치고 있는지요. 또 얼마나 수행이 깊어지면 이런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요.
>> 뭐 작은 물건 하나도 자기가 있던 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이제 섭섭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잘 분석해 보면 잃어버렸기 때문에 섭섭한 것이 아니고 그 물건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에 물이 있는데 이 물의 일부를 이쪽으로 내가 옮기면 이 빈자리가 있습니다. 이 빈자리에 다른 물이 와서 채워지게 된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면 이렇게 옮기게 되면 이 빈자리가 우리에게 약간의 허전함을 주는 거고요. 다른 것이 와서 이렇게 채워져 버리면 그다음에 없어져 버립니다. 집착이 크면 클수록 이 빈자리가 넓게 생기고 채워지는데 시간이 걸리게 된다. 뭐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인간은 그런 섭섭함 또는 그것이 크면 슬픔 더 크면 깊은 괴로움 이렇게까지 나아가겠죠. 우리 병이 감기 증상 뭐 폐렴 증상 뭐 이렇게 해서 이제 중병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그러나 대다수는 대다수는 시간이 흐르면 낫습니다. 즉 저절로 채워져서 시간이 흐르면 이게 낮게 되는데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게 그대로 있거나 오히려 더 악화됐다 그러면 이제 이거는 정신 치료에 속합니다. 그냥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뭐 헤어졌기 때문에가 아니고 이것은 질병에 속한다 그러면 이거는 이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요.
어, 그 집착의 강도, 정도에 따라서 고통이 커지고 그다음에 내가 정신적인 약함 뭐 질환까지는 아니지만은 그래도 약하다 하면 이 충격이 작은 것도 나한테는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제 병이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뭐 이 병은 약을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뭐 세월이 약이다. 시간이 흐르면 낫는다. 이렇게 보통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낫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리워하다가 못 견뎌서 자살을 하거나 따라 죽죠. 이렇게 되면 이제 열려다, 뭐 효자다 이렇게 표현하지만은 이제 현대 의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다 정신 질환이다. 편집된 상태. 마음이 한쪽으로 탁 필이 꽂혀 가지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제 우리 수행적 용어로 치면 사로잡힘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이제 스스로 죽는 이제 이런 경제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볼 수 있으니까 어 하물며 이제 나를 낳아 준 부모님 또는 내가 낳은 자식 또는 나와 함께 사는 부부 이런 경우 형제 이렇게 이제 인연이 오래된 사람 그중에도 또 더 좋아했던 관계 이럴 때 이럴 때일수록 고통이 크다는 거죠. 왜냐면 집착의 강도가 크기 때문에. 그래서 옛말에 이게 어느 정도로 심하냐 그러면 원수보다 더 고통이 크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원수를 만나가 죽거나 죽이는 이것보다 고통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겪는 고통이 더 크다. 어 그래서 애별리고가 원증 회고보다 먼저 들어오는 거예요. 음. 그러니까 미운 사람하고 만나는 것도 증심도 매우 고통이 크지만은 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 오히려 더 크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옛날부터 이거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제 전생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전생의 원수가 진 두 사람이 그 원한을 갖기 위해서 원수로 태어나 가지고 죽이고 죽는 걸로는 원수를 못 갚을 만큼 원한이 크다 하면 자식으로 태어나서 입에 넣어도 시 괜찮을 정도로 그렇게 효자 아들까지도 잘 낳고 공부도 잘하고 부모 말도 잘 듣고 그러다가 날 탁 죽어 버린다는 거. 그러면 그 부모가 평생 고통 속에 헤맨다. 그래서 이것이 원수가 없는 법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이 또 얘기 잘못 나가고 요것만 딱 잘라 가지고 또 어 사실이 다 이런 얘기가 있다 이 말이에요. 그 왜 이런 얘기가 있을까? 얼마나 그 애별리고의 고통이 크고 위로해도 안 되니까 이제 마지막 처방이 뭐다? 사실은 네가 보기에는 지금은 네 자식이지만은 진실을 보면 이건 자식이 아니라 뭐다? 원수다. 철천지 원수다. 그 원수가 풀어 지금 이렇게 한 행동이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어때요? 그 사로잡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막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겠느냐. 또 옛날 사람은 뭐든지 설명을 이렇게 해야 뭐 돈을 떼먹고 막 못 견디고 미워서 못 견딜 때 아 전생에 네가 그 사람 돈을 어 빌렸기 때문에 갚는 거다. 때문게 아니라 내가 갚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함으로 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얘기 때문에 이거는 사실이다, 거짓말이다의 이 문제가 아니라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이에요.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로의 얘기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위로라고 하는 효과가 있다 이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이걸 꼭 뭐 쓸데없이다 이렇게 부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게 진짜다 이러면 어떻게 되느냐? 많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그래서 소위 말하면 사회에서 말성을 런 종교들은 이렇게 위로의 언어를 이게 사실의 언어로 바꿈으로 해서 혹세무민하는 이런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것을 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좋은 방식이 내 생을 얘기하는 거예요. 이게 끝이 아니라 연결해서 생이 또 있다. 그런데 너희 사랑하는 사람은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갔다 이거. 그러니까 섭섭하긴 하지만 위로가 된다. 이거 좋은 것으로 갔다. 전당으로 갔다. 극락으로 갔다. 어 또 인도에서는 그 내생을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윤회로 설명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아무리 존데 가도 멀리 가고 다시 못 보는 거하고 돌아와서 다시 보는 거하고는 차원이 다르죠. 그러니까 이 윤회한다는 것이 내생 중에 가장 좋은 아이디어예요. 그러니까 종교하고 관계없이 서양 사람들도 이 윤회를 많이 받아들이는 이유가 또 우리가 안 받아들여도 말로 다음 생에 보자든지 다음 생에 갔겠다든지 이렇게 일상적인 언어로 쓰는 이유가 이것이 그래도 막 지금의 헤어짐은 어쩔 수 없지만은 헤어짐 중에서 가장 다시 만날 수 있는 어떤 그런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나 이것이 이제 진짜냐 가짜냐 이런 논쟁은 무의미하다. 진짜다 그러면 부작용이 발생하고 가짜다 그러면 위로의 방법이 없다. 어 그러면 불교는 이런 것을 진짜니 가짜니 이렇게 논하는 게 아니라 불교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즉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지에 이르 버리면 죽은 된 얘기는 필요가 없어진다. 이 이 괴로움, 슬픔, 두려움 이런 게 있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다 나오기 때문에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리면 니업의 경제를러면 이제 그런 얘기가 필요가 없다. 그 삶과 죽음을 하나의 현상으로 그냥 본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수행을 하면 그거는 어떤 이거는 파워 그러니까 시간은 얼마 걸리느냐 힘을 얼마나 쓰느냐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음 사로잡히면서 벗어나 버리면 즉시 벗어나지고 사로잡힘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시간하고 관계 없이 오래 갑니다. 허개하고 관계 없고 이것은 다 집착으로부터 발생하는 거다. 그러나 우리가 집착으로 발생한다고 의식은 알아도 우리의 깊은 마음 속에 있는 무의식은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법문을 듣고 생각으로는 아 집착이야 이러지만 마음에서는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해결이 안 된다. 이런 얘기.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이제 집착을 여겨야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더 하세요. 질문이 있으면.
>> 네. 제가 저기 그 명상을 요새 좀 많이 하는데요. 명상을 하면 굉장히 편해지고 차분해지고 이렇게 그 일상으로 다시 이제 돌아오고요. 그러나 이제 아프신 분이라 통화를 한다든지 뭐 여러 가지 일이 있으면 또다시 이렇게 되는데 그래도 수행을 하는 가운데서 제 마음에 이렇게 좀 평화가 있으려면 어떤 수행이 저한테 도움이 될까요?
그러니까 이게 여러분들은 늘 이게 어떤 수행이 도움이 되느냐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노력은 조금 하고 어떻게 이게 조금 노력해가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이 뭐냐 주식 투자하면 되느냐 금을 사는 게 낫냐 코인 사는 게 낫냐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금 생각하는 그 밑바닥에는 지장보살 부리는 게 낫냐? 관세보살 부린 게 나냐? 절에 다니는 게 낫냐? 교회 다니는 게 낫냐? 이거는 노력은 조금 하고 어떻게 결과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작고 머리를 쓰는 거다. 어떤 수행의 문제가 아니고 사로잡힘 붙잡고 있는 거를 놓아 버리면 염불를 해가 놓아 버리든 뭐 참선 해가 나와 버리든 뭐 그냥 깨달아 나와 버리든 나 버리면 해결이 되고 뭘 해도 안 나 버리면 해결이 안 되는 거기 때문에 뭘 하면 해결이 된다 이런 거는 굉장히 이 수행을 이런 어떤 기술적인 기능적인 이런 것으로 여러분들이 들이 보고 있다. 이런 얘기요. 마치 수학 뭐 공식처럼 1 + 1은 2다. 이런 관점에서 항상 사물을 보는 데서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명상을 하든 명상을 안 하든 그거하고 직접 관계 있는 게 아니고 이것이 우주적 시간에서 예를 들면 내가 과학자가 우주적 시간에서 늘 우주를 바라보고 있으면 지구에 거기 댓글보다도 적은 인간들이 붙어서 사는데 그중에 뭐 수명이라는 게 100년이라는 게 우주적 시간을 보면 찰라데 그 찰라 안에 4분 1 잘났나? 1분 잘랐나? 1 잘랐나 하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말이야. 하루살이가 오후 4시에 주거나 6시에 해 주거나 저녁 10시에 주거나 사람이 볼 때는 그냥 하룻뿐이에요. 하룻뿐. 그러니까 큰 눈으로 보면 그냥 지구이 사람이 많이 태어난다고 지구 무게가 무거워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죽는다고 지구가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지구에 있는 물질이 유전자의 조립에 의해서 생명으로 했다가 해체대가 내려갔다가 해체대다가 그러니까 그건 마치 큰 바다에 그냥 바람이 불 파가 출렁 출렁 출렁 출렁하는 거 같아. 그 세포 저 뭐요? 바다 하나하나를 보면 바다가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크게 생기고 작게 생고 이러지만 바다 전체를 보냐 그냥 보면 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불생불멸 그냥 물결이 출렁거린 거와 같은 거예요. 그래서 큰 눈으로 딱 보면 집착이 놓이고 하나만 딱 요렇게 집착돼 있던 걸 놓아 버리면 한 발 떨어지면 집착이 놓이는 거고 아이고 오른말하고 닦고 치면 뭐 부처님 아니라 누가 봐도 해결을 못 하는 거야. 또 물어.
>> 네. 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