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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무엇을 붙잡고 계신가요?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잃고 싶지 않은 무언가일까요? 우리는 평생을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리고 얻은 것을 지키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색브리공, 공부리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물질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다. 이 짧은 구절 속에 우리가 평생 찾아 헤매는 깨달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손에 준 모든 것이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요. 그런데도 우리는 왜 계속해서 붙잡으려 하는 걸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기 전 시다르타 태자였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왕궁의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름다운 궁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권력과 부, 그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군궐 밖으로 나가신 태자는 네 가지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 그리고 수행자. 그 순간 태자는 깨달으셨습니다.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결국 무상함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요. 젊음도 건강도 심지어 생명조차 영원하지 않다는 진리 앞에서 태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만 이런 고통을 겪는 건 아닐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로병사 즉 태어남, 늙음, 병들 죽음은 모든 존재가 겪는 고통이라고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슬픔. 이 이 모든 것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인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부처님께서는 그 원인을 집착해서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실체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붙잡으려 할 때 고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관자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을 건넜다. 여기서 온이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색, 수, 상, 행, 식, 즉 물질, 느낌, 생각, 의지, 인식이 그것입니다. 관세음 보살께서는 이 다섯 가지가 모두 공하다는 것을 즉 실체가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당신이 어렸을 때의 몸과 지금의 몸은 같은 몸인가요? 세포는 계속해서 죽고 다시 태어납니다. 7년이 지나면 우리 몸의 세포는 거의 다 바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당신은 7년 전에 당신과 같은 사람일까요? 다른 사람일까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10초 후에도 똑같이 붙잡고 있을 수 있나요? 생각은 구름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나의 생각이라고 여기며 그것에 집착합니다.
선불교의 위대한 스승이셨던 임재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얼핏 듣기에 충격적인 이 말씀은 사실 가장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이라는 개념조차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라는 이름, 깨달음이라는 개념, 심지어 진리라는 단어조차도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모든 개념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습니다.
색즉 시공, 공즉 시색. 이 말씀을 처음 들으면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상이고 의미 없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꽃은 피었다 지고 그것이 꽃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꽃이 지기 때문이 아니라 꽃이 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용수보살께서 중간 사상을 통해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인연에 따라 사라집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앉아 있는 의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의자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그 나무는 땅에서 자랐으며 그 땅은 수많은 원소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의자를 만든 사람, 나무를 베어온 사람, 그 모든 인연이 모여 지금 의자라는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자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의자는 그저 의자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부르는 것일 뿐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며 존재합니다. 당신도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몸을 받았고 음식으로부터 생명을 이어가며 공기로부터 숨을 심니다. 당신을 가르쳐 준 스승들, 당신을 사랑해 준 사람들, 심지어 당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까지도 모두가 지금의 당신을 만든 인연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나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무아, 즉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진리로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나라는 게 없다면 그럼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무한은 당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고정된 나가 없다는 것은 당신이 얼마든지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실수가 당신을 영원히 정의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고통이 당신의 전부가 아닙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과거 신가득, 현재 신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마음은 매순간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마저도 생각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있는 걸까요? 실체 없는 생각의 그림자를 붙잡고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조주 스님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수행자가 물었습니다. 걔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무라는 한 글자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있다 없다를 떠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걔에게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분별적인 사고 자체를 끊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늘 이것인가 저것인가? 옳은가 그른가 있는가 없는가로 세상을 나눕니다. 하지만 진리는 그런 분별을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색즉시공의 가르침은 바로 이것입니다. 물질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라는 것은 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있다와 없다로 나누는 순간 우리는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장미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 공기, 흙, 물, 그리고 그것을 보는 당신의 마음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장미에서 흙을 빼면 장미가 자랄 수 없고 햇빛을 빼면 꽃을 피울 수 없으며 당신의 마음이 없다면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찍일체 일체일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입니다. 작은 먼지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겨 있고 한 순간의 깨달음이 영업의 시간을 초월합니다. 당신이 지금이 순간 느끼는 작은 기쁨, 작은 평화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깨달음은 저 멀리 히말라야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밖을 향해 달려갑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행복할 것 같고 더 좋은 집에 살아야 평화로울 것 같으며 더 좋은 직장에 다녀야 만족할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가래 즉 목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막에서 신기루를 쫓아가는 것과 같다고요. 아무리 달려가도 물은 없습니다. 행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달마 대사께서 중국에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양무제가 물었습니다. 저는 저를 짓고 경전을 베기며 수많은 공덕을 쌓았는데 제게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공덕이 없습니다. 양무제는 놀랐습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공덕이 없다니요. 달마 대사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공덕을 바라고 행한 일은 진정한 공덕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복을 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한 공덕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 청정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색즉시공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채득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도 공입니다. 이 말이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그 사람이 공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 사람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습을 투사하고 우리의 기대를 강요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도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잡는 이 순간, 친구와 차를 마시는 이 순간, 아이의 웃음을 보는 이 순간, 이 모든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이 무한히 소중한 것입니다.
팅탄한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는 설거지만 하라. 이 이 간단한 말씀 속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이미 마음은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합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보며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으로 현재를 놓칩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정도 중에 정이 있습니다. 바른 알아차림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을 또렷이 아는 것입니다. 화가 날 때 아,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슬플 때 지금 내가 슬픔을 느끼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알아차림 속에서 우리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정도 공입니다. 화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하늘에 구름이 떠가듯 마음의 감정이 떠갑니다. 구름이 하늘을 더럽히지 않듯 감정은 당신의 본성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당신의 본성은 언제나 청정합니다. 다만 번뇌의 구름이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육조해는 스님께서 깨달으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이 일겠는가? 우리의 본성은 원래부터 깨끗합니다. 닦아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깨끗한 것을 가렸던 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집착을 내려놓고 분별심을 내려놓고 나라는 관념을 내려놓을 때 본래의 맑은 마음이 드러납니다.
색즉 시공, 공즉 시색. 이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해 줍니다. 하나는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공하니 붙잡으려 하지 마십시오. 다른 하나는 세상을 부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이 곧 색이니 일상의 모든 순간이 수행이고 깨달음의 기회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하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산은 그저 산이 아니고 물은 그저 물이 아닙니다. 산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고 물 한 방울에 모든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깊이 깨달으면 산은 여전히 산이고 물은 여전히 물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산과 물을 보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통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고통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파도는 일렁이지만 바다의 깊은 곳은 언제나 고유합니다. 당신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은 지금의 고통도 영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새벽은 반드시 옵니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봄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색즉시공의 지혜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적극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모든 것이 공하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금이 순간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실패도 공입니다. 성공해도 좋습니다. 성공도 공입니다. 중요한 것은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좋은 일이 생겨도 교만하지 않고 나쁜 일이 생겨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흘러가도록 내버려둡니다. 강물이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듯 우리도 삶의 장애물을 만나면 유연하게 대응합니다. 강물은 바위와 싸우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길을 갈 뿐입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의 호흡을 느껴 보십시오. 들숨과 날숨 그 사이에 짧은 멈춤. 호흡도 공입니다. 잡을 수 없고 저장할 수 없으며 다만 지금이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하지만 그 호흡이 당신을 살아 있게 합니다. 공하기에 생명이 흐르고 무상하기에 변화가 가능하며 실체가 없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립니다.
반야 심경의 가르침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색즉 시공, 공즉 시색. 이 이 여덟 글자 속에 모든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이 글자들도 곧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당신의 마음속에 씨앗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 씨앗이 언젠가 싹을 띄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당신이 앉아 있는이 자리에 있습니다. 집착을 내려놓는 순간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분별심을 내려놓는 순간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나라는 관념을 내려놓는 순간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종기하다. 이 말씀은 교만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다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가장 평등한 선언입니다. 당신도 부처입니다. 다만 그것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색즉시공의 지혜로 세상을 바라볼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마침 햇살도 새소리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모두가 부처님의 설법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눈 있는 자는 보며 마음 있는 자는 깨닫습니다. 지금이 순간도 부처님께서는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듣고 계신가요? 집착을 내려놓으십시오. 그것이 첫걸음입니다. 손에 것을 놓으면 비로소 손이 자유로워집니다. 마음에 쌓인 것을 비우면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원래 당신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색즉 시공, 공즉 시색. 이 진리를 가슴에 새기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십시오. 집착할 때는 이 말씀을 떠올리고 놓아 보십시오. 분노가 일어날 때는 이 말씀을 떠올리고 관찰해 보십시오. 슬픔이 밀려올 때는 이 말씀을 떠올리고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성가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평상심이 도다. 특별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 잘 때 자고 걸을 때 걷는 것 그것이 바로 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온갖 생각에 빠져 있고 걸으면서도 마음은 다른 곳을 헤니다. 지금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느 수행자가 조주 스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뜰 앞에 잔나무이라. 수행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외물로서 사람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조주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외물로서 가르치지 않노라. 그럼 부처란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잔나무이라. 무슨 뜻일까요?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부처라는 것입니다. 뜰 앞에 잔나무도 부처이고 길가의 돌멩이도 부처이며 지금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부처입니다. 다만 분별하는 마음이 그것을 가릴 뿐입니다. 이것은 잔나무이고 저것은 부처다라고 나누는 순간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이고 이것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이 물음을 끝없이 파고듭니다.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답을 내려놓기 위해서입니다.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온몸으로 깨닫는 진리. 그것이 바로 견성입니다.
성철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너무나 단순한 이 말씀이 사실은 가장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수행하기 전에는 산을 산으로만 보고 물을 물로만 봅니다. 수행하는 중에는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것이 공하고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깨달으면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것이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입니다. 산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산은 여전히 거기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산에 대한 집착, 분별, 망상이 사라집니다. 그때 비로소 산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산이 말을 하고 물이 설법하며 돌멩이가 미소짓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마경에는 유마사라는 제가 수행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유마사께서 병이 드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문병을 가라고 하셨지만 아무도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유마거사의 지혜가 너무 깊어서 제자들이 감히 대화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수보살께서 가셨고 유마사와 깊은 법문을 나누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유마거사께서는 침묵으로 답하셨습니다. 불리법문, 즉 둘이 아닌 법문을 설하라는 요청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침묵이 바로 가장 완벽한 설법이었습니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 말로 하면 이미 진리가 아닌 것. 그것을 침묵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색즉시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을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하는 순간 이미 진리에서 벗어납니다. 진리는 체험되어야 합니다. 책을 100권 읽는 것보다 한번 호흡을 온전히 관찰하는 것이 더 깊은 깨달음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몸을 느껴 보십시오. 발이 땅에 닿은 느낌, 의자에 앉은 엉덩이의 감촉, 공기가 피부를 스치는 느낌. 이 모든 감각을 있는 그대로 느껴 보십시오.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말고 다만 느끼기만 하십시오. 그 순간 당신은 생각의 세계에서 벗어나 존재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마음 챙김 즉 사띠는 이렇게 간단합니다. 복잡한 이론이 필요 없습니다. 지금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걸으면서 지금 나는 걷고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숨쉬면서 지금 나는 숨 쉬고 있다라고 알아차립니다. 화가 나면 지금 나는 화가 났다라고 알아차립니다. 이 알아차림 속에는 판단이 없습니다. 화를 내는 것이 나쁘다고 자책하지 않습니다. 다만 관찰할 뿐입니다. 지금 내 가슴이 뜨거워지고 주먹이 저절로 지어지며 얼굴이 화끈거리는구나. 이렇게 감정을 관찰하면 신기하게도 그 감정이 점점 약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정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화가 났다가 아니라 화라는 감정이 일어났다입니다. 이 작은 차이가 엄청난 자유를 가져옵니다. 화는 내가 아닙니다. 화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듯 화도 마음을 지나갑니다.
법정 스님께서는 무소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이 있어도 집에 얽매이지 않고 돈이 있어도 돈에 얽매이지 않으며 사람이 있어도 사람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누이되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새는 나무 위에 앉아 있지만 나무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려도 새는 다른 가지로 날아가면 됩니다. 우리도 그렇게 가볍게 살 수 있습니다.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든 유연하게 흘러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책임하게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집착이 없을 때 우리는 더 온전히 책임질 수 있습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과정에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더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보살의 길이 바로 그렇습니다.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동시에 중생도 공하고 구제도 공하다는 것을 압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보살이 중생이 있다. 수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보살이 아니니라. 중생을 구제하되 중생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선행을 하되 선행했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주상보시입니다. 머무는 바 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베풀면서도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저 사람이 받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으며 이런 것을 베풀었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능 소중 즉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는 물건이 세 가지가 모두 공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베풀까요? 베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비는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애써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그러한 것입니다. 꽃이 향기를 퍼뜨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듯 깨달은이는 자비를 베풀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원유 대사께서는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으셨습니다. 어느 날 밤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너무나 달콤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보니 그것은 해골의 고인물이었습니다. 순간 구역질이 났고 그 순간 깨달으셨습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 어젯밤에는 달콤했던 물이 오늘 아침에는 역겨운 물이 되었습니다. 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한 것은 마음입니다. 좋고 나쁨, 아름답고 추함. 이 이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분별입니다. 세상은 본래 선도 악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선악을 만들어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행운으로 볼 수도 있고 불행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비가 오면 농부는 기뻐하고 소풍 가려던 아이는 슬퍼합니다. 같은 비인데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장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변방에 사는 노인이 말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이 위로했지만 노인은 이것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어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그 말이 좋은 말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축하했지만 노인은 이것이 화가 될지 누가 알겠어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지만 노인은 이것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어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전쟁이 일어나 젊은이들이 모두 징집되었지만 아들은 다리가 부러져 전쟁에 나가지 않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새옹지아 변방에 늙은이의 말이라는이 고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화와 복은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행이 미래의 행운이 될 수 있고 지금의 행운이 미래의 불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일에 너무 들뜨지 말고 나쁜 일에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고행도 극단이고 쾌락도 극단입니다. 너무 긴장해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해도 안 됩니다. 비파줄처럼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적당한 긴장 그것이 중도입니다. 참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집착해도 괴롭고 너무 무관심해도 공허합니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관여하되 집착하지 않는 것,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도의 지혜입니다.
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힘이 세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수행도 그렇습니다. 하루에 10시간 앉는 것보다 매일 10분씩 꾸준히 앉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작은 실천이 쌓여서 큰 변화를 만듭니다. 지금 당장 깨달아야 한다는 조급함을 내려 놓으십시오. 깨달음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내려놓음의 결과입니다. 애쓸수록 멀어지고 놓아줄수록 가까워집니다.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미 완전합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마치 거지가 자신의 옷속에 보석이 꿰매어져 있는 줄 모르고 구걸하듯 우리는 자신 안에 부처의 성품이 있는 줄 모르고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니다. 법화경의 비유입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부자 친구 집에 갔다가 술의 취에 잠들었습니다. 친구는 그의 옷속에 갓비싼 보석을 넣어 주고 떠났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깨어나 다시 구걸하러 다녔습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친구를 만났을 때 친구가 옷속에 보석을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데 갖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도착했는데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부처인데 부처가 되려고 애습니다.
색즉 시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자유롭습니다. 다만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그 감옥의 문은 잠겨 있지 않습니다. 밀기만 하면 열립니다. 지금이 순간 모든 집착을 내려놓아 보십시오.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걱정도 현재의 불만도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그저 존재해 보십시오. 생각 없이 판단 없이 그저 있어 보십시오. 그 순간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평화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요. 행복이 무언가를 얻어야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을요. 깨달음이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이 순간이라는 것을요.
새벽 종소리가 울립니다. 맑고 청하한 그 소리가 산과들을 가로질러 퍼져 나갑니다. 종소리는 잠시 울렸다가 사라지지만 그 울림은 마음속에 남습니다. 색즉 시공, 공즉 시색. 모든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그 본질은 영원합니다. 당신의 호흡처럼 당신의 심장 박동처럼 이 진리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당신 안의 고유한 소리를, 당신 안의 깊은 평화를, 당신 안의 무한한 자이를. 그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 모습입니다. 집착으로 가려지지 않은 분별로 얼룩지 않은 순수하고 청정한 당신의 본성입니다. 그것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지금이 순간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원하고 계신가요? 더 나은 직장일까요? 더 많은 돈일까요? 아니면 더 깊은 깨달음일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으려 합니다. 심지어 깨달음마저도 얻어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무소 듣고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짧은 구절이 우리의 모든 노력을 무너뜨립니다. 아니 오히려 진정한 자유로 이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앉으셨을 때 일입니다. 6년 동안의 극심한 고행으로 몸은 앙상해졌고 뼈만 남았습니다. 하루에 쌀 한 깨 한 날로 염명하며 온갖 수행을 다 해 보셨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수자타라는 여인이 우유죽을 공양했고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셨습니다.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는 실망하며 떠나갔습니다. 시따르타가 타락했다. 쾌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 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셨습니다. 보행으로도 쾌락으로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얻으셨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얻은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깨달음은 어딘가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쌓 보냅니다. 지식을 쌓고 재산을 쌓고 경험을 쌓고 공덕을 쌌습니다. 더 많이 가질수록 행복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원하게 됩니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의 기쁨이 열배의 월급을 받을 때는 사라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가래라고 하셨습니다. 목마음입니다. 바닷물을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듯 욕망을 채울수록 더 큰 욕망이 생깁니다. 이것이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 집재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고 집착의 뿌리는 가래입니다. 얻고 싶은 마음. 그것이 모든 괴로움의 시작입니다.
어느 날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열반에 이르려는 마음을 버려라. 제자는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열반을 얻기 위해 출가했는데요.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얻으려는 마음이 열반에서 너를 가로막고 있느니라. 이것이 무소득의 역설입니다. 얻으려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얻습니다. 비우려 하지 않을 때 진정으로 채워집니다. 손을 쥐면 아무것도 담을 수 없지만 손을 펴면 온 세상을 담을 수 있습니다.
반야 심경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함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도 붙잡지 않고 나쁜 것도 밀어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흘러가게 됩니다. 강물을 보십시오. 강물은 아무것도 붙잡지 않습니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낭떨어지를 만나면 떨어지며 바다를 만나면 합쳐집니다. 강물은 바다에 도착하려고 서두르지 않습니다. 다만 흐를 뿐입니다. 그런데 결국 바다에 이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순간을 온전히 살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더 빨리 더 확실하게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성가에서는 이런 화두를 던집니다. 본래 무물. 본래 한 물건도 없다. 육조해는 스님의 깨달음을 담은 이 한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사실 본래부터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열반도 부처도 모두 이름일 뿐입니다.
신수 스님이 쓰신 계송이 있습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 일견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닦아야 한다. 공덕을 쌓아야 한다. 하지만 해능 스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도 또한 대가 아니니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 닦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럽혀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청정합니다. 거울에 먼지가 앉았다고 해서 거울 자체가 더러워진 것은 아닙니다. 먼지를 털어내면 거울은 여전히 박습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꾸 무언가를 더하려 합니다. 더 많은 명상, 더 많은 독경, 더 많은 수행. 하지만 진정한 수행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입니다. 집착을 빼고 욕망을 빼고 아집을 빼는 것입니다. 조각가 대리석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듯 우리도 불필요한 것들을 깎아내야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드상은 이미 돌에 있었다. 나는 다만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했을 뿐이다. 당신 안에 부처도 그렇습니다. 이미 거기 계십니다. 다만 번뇌라는 불필요한 돌덩이가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학기릭 위도일손 배움은 날마다 더해 가지만 돈은 날마다 덜어간다. 지식은 쌓는 것이지만 지혜는 비우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교만해지지만 비울수록 겸손해집니다. 어느 선사께서 제자를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제자가 찾아와 자신이 읽은 경전, 닦 수행에 대해 자랑했습니다. 선사께서는 묵묵히 차를 따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잔이 가득차도 계속 따르시자 차가 넘쳐 흘렀습니다. 제자가 놀라 말했습니다. 스님, 잔이 이미 가득찼습니다.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도 그와 같구나. 이미 가득차서 더 이상 담을 수가 없다. 초심 즉 처음 마음을 잃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초심은 비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어린아이는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놀 뿐입니다. 무엇을 성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아무 목적 없이 웃어본게 언제인가요? 성취를 위해서도 아니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웃음 자체를 위해 웃어본게 언제인가요? 우리는 모든 것의 목적을 부여합니다. 운동도 건강을 위해, 여행도 추억을 위해, 심지어 명상도 깨달음을 위해 합니다. 하지만 목적이 없을 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꽃은 왜 필까요? 열매를 맺기 위해 아닙니다. 꽃은 그저 핍니다. 피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새는 왜 노래할까요? 짝을 찾기 위해. 그것도 있지만 새는 그저 노래하고 싶어서 노래합니다.
장자는 소유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용지용. 쓸모 없음의 쓸모. 세상 사람들은 쓸모 있는 것만 귀하게 여기지만 진정으로 귀한 것은 쓸모 없는 것입니다. 큰 나무가 있는데 너무 비틀어져서 목재로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어지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나무 아래 사람들이 쉬고 새들이 둥지를 들고 여우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되려 하지 않고 그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공하려 하지 않고 그저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별해지려 하지 않고 그저 평범할 수 있습니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습니다. 특별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직 범부입니다. 진정으로 깨달은이는 다시 평범으로 돌아옵니다. 밥 먹고 일하고 자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임재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은 일상에 있으니 밥 먹고 차마시며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모두 도이니라. 특별한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하지 않게 사는 것. 그것이 가장 특별한 수행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특별해지려 합니다. 남들보다 더 깊이 깨닫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고 더 많은 신통력을 얻고 싶어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신통력을 보이는 것을 금하셨고 깨달음을 자랑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어느 수행자가 신통력을 얻어 강을 건너지 않고 물 위를 걸었습니다. 자랑스럽게 부처님께 보고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배사기 얼마였느냐? 한푼입니다. 그럼 내가 얻은 신통력은 한푼의 가치도 안 되는구나. 무소득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얻어도 그것에 집착하면 고통입니다. 아무리 높은 경지에 이르러도 그것을 자랑하면 이미 떨어진 것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향기가 저절로 퍼지듯 깨달은 이의 존재 자체가 설법입니다.
유마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유마사를 문병 가기를 꺼렸습니다. 사리불 존자도 목년 존자도 모두가 과거에 유마거사에게 한수 배운 경험이 있었습니다. 사립을 존자는 나무 아래에서 자선하고 있었는데 유마 거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선이 반드시 앉아 있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 일어나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모두 자선이니라. 앉아서 명상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걸으면서도 일하면서도 말하면서도 그 순간에 깨어 있으면 그것이 수행입니다. 형식에 갇치지 마십시오. 절에 가야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방석에 앉아야만 명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장 스님의 말씀처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밭을 갈고 일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걱정하여 도구를 숨겼지만 스님께서는 밥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일하는 것이 수행이고 수행이 일하는 것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선동일치 수행과 농사가 하나라는 이 정신이 한국 불교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땀을려 일하면서 번뇌를 씻고 정성껏 농사 지으며 마음을 닦습니다. 특별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이 바로 수행의 장이 됩니다.
이무소 듣고 얻을 것이 없기에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지킬 것이 없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을 것이 없기에 담대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 집착은 두 가지입니다. 가진 것에 대한 집착과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집착. 이미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아직 갖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할까 좁아심칩니다. 하지만 무소득의 지혜로 살면 이 두 가지 집착에서 모두 자유로워집니다. 가진 것을 소유하지 않고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무회 즉 걸림이 없는 상태입니다.
반야심경은 말합니다. 무게고 무유 공포 걸림이 없기에 공포가 없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죽음입니까? 죽음도 공이고 나도 공인데 누가 죽는단 말입니까?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지만 장자는 말했습니다. 아내는 원래 없었다가 생겨났고 이제 다시 없는 상태로 돌아갈 뿐이다. 사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러운 일인데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이것이 냉정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집착하지 않기에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소유하려 하지 않기에 온전히 존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우리는 울고 매달립니다. 가지 마. 나를 두고 어떻게 가?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놓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대의 길을 가시오. 나도 내 길을 가겠소. 칼릴 지브라는 결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사랑하되 사랑으로 얽매지 말라. 죽어봤되 다만 신께만 그 잔을 채우게 하라.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둘로 존재하면서 함께 있는 것입니다. 나무 두 구루가 서로 기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뿌리는 따로 있습니다. 각자의 가지는 각자의 방향으로 뻗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함께 숲을 이룹니다.
무소득의 지혜로 관계를 맺으면 모든 관계가 자유로워집니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친구와 친구, 서로에게 기대지만 의지하지 않고, 함께하지만 얽매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들 나홀라를 출가시키셨을 때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비난했습니다. 어찌 어린아들을 버리고 출가하시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라홀라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해탈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세속의 왕위가 아니라 법의 왕위를 물려 주신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식의 인생은 자식의 것입니다. 부모는 다만 잠시 길을 안내할 뿐입니다. 언젠가는 놓아 주어야 합니다. 칼릴 지브라시 자식에 관하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자식은 그대의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기 자신을 갈망하여 낳은 아들딸이다. 그들은 그대를 통해 왔지만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잠시 만났다가 헤어집니다. 영원한 만남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합니다. 무상함을 깨달으면 슬퍼질 것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무상함을 깨달으면 지금이 순간이 더욱 빛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무소 듣고 얻을 것이 없다는 이 진리가 사실은 모든 것을 얻는 길입니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이것이 진리의 본성입니다. 진리는 항상 역설적입니다. 노자는 말했습니다. 얻고자 하면 먼저 주어야 하고 강해지고자 하면 먼저 약해져야 한다. 세상의 논리와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도의 논리입니다. 씨앗은 땅에 떨어져 썩어야 싸이 납니다. 씨앗으로 남고 싶어 하면 영원히 씨앗일 뿐입니다. 자기를 내어 주어야 새생명이 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지금의 나를 고집하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나를 내려놓아야 새로운 나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에벌레가 나비가 되려면 에벌레인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무소득의 수행은 바로 이것입니다. 낡은 자아를 내려놓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좁은 자아에서 벗어나 우주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물방울이 바다로 돌아갈 때 물방울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물방울은 바다 전체가 됩니다. 작은 날을 내려놓으면 큰 날을 얻습니다. 유한한 존재에서 무한한 존재가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아래야식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는 모든 존재와 연결된 근원적 의식이 있습니다. 개별적인 자는 파도이고 아래 야식은 바다입니다. 파도는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바다는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사라짐입니다. 내가 없어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독립적인 나라는 것이 없었다면 사라질 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아의 가르침이 주는 위안입니다. 나라는 환상에서 깨어나면 죽음의 공포에서도 자유로워집니다. 물방울은 마를 수 있지만 물 자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형태는 변해도 본질은 영원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그렇습니다. 에너지는 창조되지도 소멸되지도 않습니다. 다만 형태를 바꿀 뿐입니다. 당신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먹는 밥은 햇빛이 형태를 바꾼 것입니다. 식물이 광합성으로 햇빛을 저장하고 당신이 그것을 먹어 에너지로 바꿉니다. 당신 안에서 빛나는 생명의 불꽃은 수십억년 전 별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소들은 모두 별이 죽으며 만들어진 것입니다. 칼세이거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별의 물질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우주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진리입니까? 당신은 우주의 일부가 아닙니다. 당신 자체가 우주입니다.
이무소 듣고 얻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주 전체를 담고 있는데 무엇을 더 얻겠습니까? 한송이 꽃에서 우주를 보고
아래 모래에서 영혼을 봅니다. 당신의 손바닥 안에 무한이 있고 시간 속에 영업이 담겨 있습니다. 선사들은 이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하지만 깊이 깨달으면 산은 여전히 산이고 물은 여전히 물이다. 달라진 것은 산과 물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눈입니다.
어느 수행자가 조동님께 물었습니다. 부처의 몸은 무엇입니까? 조동 스님께서 답하셨습니다. 3근 6일 1근이라. 3근은 6이고 1근은 1이다. 즉 3618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부처의 몸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이 평범한 산술과 같다는 것입니다. 신비하고 오묘한 것을 찾지 말고 지금 여기의 일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이 순간 숨 쉬고 있는이 자리에 있습니다. 당신의 호흡을 느껴 보십시오. 공기가 코를 통해 들어오고 패로 내려가고 다시 올라와 나갑니다. 이 단순한 과정이 얼마나 경의로운 일입니까? 당신이 숨 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몸은 저절로 숨을 십니다. 심장이 뛰려고 애쓰지 않아도 심장은 평생 쉬지 않고 un니다. 이것이 무의자연입니다. 애쓰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것. 노자는 이것을 무의무불이라고 했습니다. 하지 않음으로써 이루지 못함이 없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가장 깊은 진리입니다.
자연을 보십시오. 꽃은 피려고 애쓰지 않아도 핍니다. 새는 날려고 연습하지 않아도 납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려고 계획하지 않아도 흐릅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만 유독 애를 씁니다. 행복해지려고 성공하려고 깨달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하지만 애쓸수록 멀어집니다. 나비를 잡으려고 쫓아가면 날아가지만 가만히 있으면 날아와 이무소득의 수행도 그렇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려고 애쓰면 깨달음은 멀어집니다. 깨달음을 내려놓으면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아니 사실은 이미 깨달아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다만 그것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수행은 부처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본래 부처임을 기억하는 과정입니다. 거울을 닦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가린 먼지를 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수행이 필요할까요? 이미 깨달아 있다면 그냥 앉아서 놀면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많은 수행자들이 빠지는 함정입니다. 도노점수 단박에 깨닫지만 점차 닦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치로는 깨달았어도 습기는 남아 있습니다. 오랜 세월 쌓인 습관, 반복된 패턴, 깊이 박힌식. 이것들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치 아침 해가 떠올라도 땅의 서리가 천천히 녹듯이 수행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수행의 질이 달라집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행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드러내는 수행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매순간이 수행입니다. 설거지할 때, 걸을 때, 말할 때, 침묵할 때, 특별한 시간, 특별한 장소가 따로 없습니다. 지금이 순간이 가장 거룩한 순간이고 여기가 가장 신성한 장소입니다. 팅한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래는 이미 여기 있다. 미래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미래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을 온전히 사십시오. 지금이 쌓여서 미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심고 매일 땅을 파서 확인하면 씨앗은 자하지 못합니다. 그냥 물을 주고 기다리면 때가 되면 싸이 납니다. 수행도 그렇습니다. 조급하게 결과를 확인하려 하지 마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서두르지 말라. 서두르는 자는 이루지 못한다. 천천히 가는 것이 빨리 가는 것입니다. 깊이 가는 것이 멀리 가는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기의 우아를 기억하십니까? 빠른 토끼가지고 느린 거북이가 이겼습니다. 왜일까요? 거북이는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느려도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습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에 10시간 앉다가 지쳐서 그만두는 것보다 매일 10분씩 평생 하는 것이 낫습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룹니다. 작은 실천이 모여 큰 깨달음을 이룹니다.
이무소 듣고 얻을 것이 없다는이 진리를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매순간 기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는 기대를 내려놓으십시오. 일을 시작할 때 이번에는 성공해야 해라는 집착을 내려 놓으십시오. 사람을 만날 때이 사람이 나를 이해해 줬으면 하는 욕구를 내려놓으십시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습니다. 집착이 없으면 좌절도 없습니다. 욕구가 없으면 결핍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감각하게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느끼라는 것입니다. 기대라는 필터 없이 있는 그대로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비가 올 때 비가 오면 안 되는데라고 저항하지 마십시오. 그냥 비를 느끼십시오. 빗방울이 피부에 닿는 감촉, 비냄새, 빗소리 판단없이 경험하십시오. 이것이 수용입니다. 믿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고 그저 경험하는 것입니다. 수용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면 됩니다. 하지만 우산을 쓰면서도 비에 화내지 않습니다. 행동과 감정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의 정수입니다. 행동하되 집착하지 않고 경험하되 매달리지 않습니다.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물은 어떤 그릇에 담기든 그 모양이 됩니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그러집니다. 하지만 물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도 그렇게 유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되 본질은 지킵니다. 형식은 바뀌어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나무를 보십시오. 바람에 휘어지지만 부러지지 않습니다. 속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어 있기에 강합니다. 노자는 말했습니다. 최상에서는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물의 겸손함, 물의 유연함, 물의 무의자연. 이것이 도의 본성입니다.
얻으려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옵니다. 강요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애쓰지 않으면 노력 없이 성취됩니다. 정원사는 나무가 자라도록 애쓰지 않습니다. 그냥 물을 주고 햇빛이 들게 하고 해충을 막아 줄 뿐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잘합니다. 정원사는 다만 조건을 만들어 줄 뿐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깨달음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다만 깨달음이 드러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뿐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내려놓고 분별심을 놓습니다. 그러면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구름이 거치면 달이 보이듯 번뇌가 사라지면 지혜가 드러납니다.
이 무소 듣고이 세 글자를 가슴에 새기십시오. 얻을 것이 없다. 이 진리를 깊이 새기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자유로워집니다. 성공의 압박에서 자유롭고 실패의 두려움에서 자유롭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자신의 기대에서도 자유롭습니다. 새는 날개가 있어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이 없어서 납니다. 땅을 붙잡고 있으면 아무리 날개가 있어도 날 수 없습니다. 당신도 날 수 있습니다. 집착을 놓으면 날개가 펼쳐집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 가벼워집니다. 법정 스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텅 비워라 그러면 채워진다. 낮추어라 그러면 높아진다. 버려라 그러면 얻는다. 이것이 무소득의 역설입니다. 비우면 채워지고 낮추면 높아지고 버리면 얻습니다. 세상의 논리와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리의 논리입니다. 세상은 더하는 것을 가르치지만 진리는 빼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올라가라 하지만 진리는 내려가라 합니다. 세상은 얻으라 하지만 진리는 놓으라 합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세상의 길은 넓고 화려하지만 끝이 없습니다. 진리의 길은 좁고 평범하지만 자유로 이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을 보여 줄뿐 걷는 것은 너희의 몫이다. 아무도 대신 걸어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직접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이 길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이미이 길을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으며 앞으로도 걸을 것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온 우주가 당신과 함께 숨 쉬고 무수한 별들이 당신과 함께 빛나고 모든 존재가 당신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무소 듣고 얻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찾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순간 숨을 깊이 들이십시오. 그리고 천천히 내쉬십시오. 이 이 단순한 행위 속에 모든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들숨에 우주가 들어오고 날숨에 우주가 나갑니다. 당신은 우주와 하나입니다. 언제나 그래 왔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무소득의 지혜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십시오.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고 아무것도 버리려 하지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 지금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평범한이 순간입니다.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단순한이 호흡입니다. 이무소 듣고 얻을 것이 없기에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이를 것이 없기에 당신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될 것이 없기에 당신은 이미 완전합니다. 이것을 깊이 새기고 매순간 기억하십시오. 걸을 때, 앉을 때, 일할 때, 쉴 때. 항상이 진리와 함께 하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범부와 부처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하나도 아닙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하지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그 진리.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다음 호흡 속에, 당신의 다음 발걸음 속에, 당신의 다음 순간 속에 무소득의 길을 걸으십시오. 얻으려 하지 않는 그 길에서 당신은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도착하려 하지 않는 그 여정에서 당신은 이미 도착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피 안에 계신가요? 고통의 이쪽 언덕에 계신가요? 아니면 깨달음의 저쪽 언덕에 계신가요? 우리는 평생을 강을 건너려 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무명에서 깨달음으로 윤회에서 열반으로 하지만 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은 우리에게 놀라운 진리를 말해 줍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아.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함께 피안으로 가자 깨달음이여 이루어지다. 이 신비로운 주문 속에 모든 수행의 완성이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그날 새벽의 일입니다. 마지막 선정에서 깨어나신 부처님께서는 동쪽 하늘의 새별을 보시고 감탄하셨습니다. 기하고도 기하다. 모든 중생이 열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것만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깨닫지 못하는구나. 모든 존재가 이미 부처라는 선언입니다. 갈 곳이 없습니다.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여전히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이미 도착해 있지만 그것을 모르기에 여행을 떠납니다. 이미 부처이지만 그것을 잊었기에 수행합니다. 자리로 돌아가는 여정. 그것이 바로 수행의 길입니다.
아제아제 가자. 가자. 이 이 첫 구절은 수행의 시작을 알립니다. 멈춰 있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지금 바로 걸음을 내디더라는 것입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입니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첫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영원히 도착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행자가 조주 스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조주 스님께서 답하셨습니다. 평상심이 도니라. 그렇다면 어디로 향해야 합니까? 향하려는 순간 이미 어긋나느니라. 돈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평범한이 마음이 도입니다. 하지만 깨닫지 못했을 때는 가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긴 여정을 떠나야 합니다.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돌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돌아온 집은 예전의 집이 아닙니다. 아니, 집은 그대로인데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집을 나가 박랑했습니다. 온갖 고생을 다하며 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 자기 집 앞에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초라해져서 감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지만 아들이 놀랄까 봐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먼저 하인으로 들어오게 하고 점차 신뢰를 쌓아가며 마침내 아들임을 밝혔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본래 부처의 자식이지만 그것을 잊고 헤매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돌며 온갖 고통을 겪지만 사실은 항상 아버지의 집 근처에 있었습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바라제 피안으로 가자. 두 번째 구절은 방향을 가르킵니다. 차 안에서 피 안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하지만 진정한 피안은 어디에 있을까요? 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사가 바로 열반이요 번뇌가 바로 보이니라. 생사와 열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안과 피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강을 건너려고 애쓰지만 사실 강은 없습니다. 있다고 생각하기에 강이 보일 뿐입니다. 파도를 보고 바다를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파도와 바다가 따로 있습니까? 파도는 바다이고 바다가 파도입니다. 생멸과 불멸도 그렇습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곧 생멸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생멸하는 현상 너머에 생멸하지 않는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일체유의법 여몽한 포형 여로여 응작여 모든 유의법은 꿈과 환상 같고 물거품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 같으며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보는 것 그것이 바로 피안입니다.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착각하면 고통입니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알면 자유입니다. 같은 현상을 보는데 보는 마음이 다릅니다. 차안과 피안의 차이는 바로이 마음의 차이입니다. 원요 대사께서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으셨을 때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참계심 만법 유식. 세 가지 세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인식이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마음이 정화되면 세상이 정토가 됩니다. 정토는 서방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깨끗하면이 땅이 곧 정토입니다. 유마경에서 부처님께서 발을 뒤으시자 이사바 세계가 보배 장엄으로 가득찬 정토로 변했습니다. 세계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청정한 마음으로 보니 원래 정토였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바라승아제 함께 피안으로 가자. 세 번째 구절은 함께함을 말합니다.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모두 함께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나만 깨달으면 그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함께 깨달아야 합니다. 보살의 서원이 그렇습니다. 중생이 다 제도되기 전에는 나도 성불하지 않으리라. 자비의 극치입니다. 자신의 해탈을 미루고 중생을 먼저 구제하겠다는 원력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깊은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나와 남이 따로 있습니까?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습니까?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존재의 고통은 모든 존재의 고통이고 한 존재의 기쁨은 모든 존재의 기쁨입니다. 인드라망의 비유가 있습니다. 우주는 거대한 그물이고 그물의 각 교차점에 보석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의 보석이 빛나면 그 빛이 다른 모든 보석에 반사됩니다. 모든 보석이 서로를 비추고 서로에게 비춰집니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입니다. 당신이 깨달으면 온 우주가 깨달습니다. 당신이 미소지으면 온 세상이 미소짓습니다. 당신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이고 당신의 자유가 세상의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수행은 이기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가장 이타적인 행위입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이 세상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아트마간디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변화가 되라.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세상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어찌 형제의 눈에 티끌을 보느냐? 자신의 큰 잘못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작은 잘못은 쉽게 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다릅니다. 남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봅니다. 남을 고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고칩니다.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키면 새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킵니다. 함께 가는 길은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길입니다. 앞선이는 뒤쳐진 일을 기다려 주고 뒤쳐진이는 앞선을 따라갑니다. 강한이는 약한이를 도와주고 약한이는 강한 이에게 배웁니다. 상호의존의 진리입니다. 아무도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꽃은 벌에게 꿀을 주고 벌은 꽃에게 꽃가루를 옮겨 줍니다. 나무는 새에게 집을 제공하고 새는 나무에게 씨앗을 퍼뜨려 줍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부가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목수가 없으면 살 곳이 없으며 의사가 없으면 건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 덕분에 살아갑니다. 아침에 입는 옷 한 벌에도 수십명의 손길이 닿았습니다. 목화를 기르고 씨을 뽑고 천을 짜고 옷을 만들고 운송하고 판매한 사람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연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혼자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존재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홀로 피 안에 갈 수는 없습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바라승아제 모두 함께 피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모지사바아 깨달음이여 이루어지이다. 마지막 구절은 완성을 선언합니다. 여정의 끝, 수행의 완성, 깨달음의 성취. 하지만이 완성은 어떤 완성일까요? 완성이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도착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 진정한 수행이 시작됩니다. 이것을 도노 점수라고 합니다. 단박에 깨달았지만 점차 닦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치로는 깨달았어도 오랜 습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의 본성은 밝지만 오랜 세월 쌓인 먼지가 있습니다. 한 번 닦는다고 모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닦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닦았다면 이제는 이미 가진 것을 드러내기 위해 닦습니다. 전에는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면 이제는 이미 도착해 있음을 확인합니다. 전에는 부족함을 채우려 했다면 이제는 완전함을 누립니다. 성가에서는 이것을 모구도 속 키우기에 비유합니다. 열단계의 그림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소를 찾고 발견하고 길들이고 집으로 데려옵니다. 여덟 번째 그림에서는 소도 사람도 모두 사라집니다. 아홉 번째 그림에서는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열 번째 그림에서는 저작거리로 나가 중생을 제도합니다. 깨달음의 완성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산속에 숨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초월하되 벗어나지 않고 해탈하되 떠나지 않습니다. 입전 수수 거리로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은이는 세상으로 돌아가 중생과 함께합니다. 술집에도 가고 시장에도 가며 사람들과 섞입니다. 하지만 물들지 않습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듯이 깨달은이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정화합니다. 영꽃이 더러운 물을 맑게 하듯 보살은 탁한 세상을 맑게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완성입니다. 자신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만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에도 45년간 중생을 제도하셨습니다. 편안히 열반에 드실 수도 있었지만 고통받는 중생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습니다. 자비심이 저절로 울어나온 것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성이 그러한 것입니다. 해가 빛을 내려고 애쓰지 않듯 깨달은이는 자비를 베풀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아. 이 이 진원을 외우면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힘은 주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미를 깊이 새기고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가자. 지금 바로 걸음을 내디드십시오.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부터 수행해야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오는 것은 항상 오늘입니다. 지금이 순간 호흡을 의식하십시오. 지금이 순간 마음을 관찰하십시오. 지금이 순간 자비심을 일으키십시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거창한 것이 필요 없습니다. 특별한 장소도 특별한 시간도 필요 없습니다. 지금 여기이 순간이 가장 완벽한 수행의 시간이고 장소입니다. 걸으면서 수행하고 앉아서 수행하며 일하면서 수행하고 쉬면서 수행합니다. 말할 때도 수행이고 침묵할 때도 수행입니다. 깨어 있을 때도 수행이고 잠들 때도 수행입니다. 생활이 곧 선이고 선이 곧 생활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이것을 생활선이라고 합니다. 성철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생활이 바로 신성한 것이니 따로 구할 것이 없다. 밥 먹고 일하고 자는 것. 이 평범한 일상이 바로 신성한 수행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범한 일상이 신성해질 수 있을까요? 마음가짐의 차이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하면 모든 것이 수행이 됩니다. 차 한잔을 마시더라도 온전히 차를 마시십시오. 향을 막고 온도를 느끼고 맛을 응미하십시오.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이 순간 차 마시는이 경험에 완전히 빠져 드십시오. 그것이 바로 일산매입니다. 한 가지 맛에 몰입하는 산매입니다. 무엇을 하든 그것에 온전히 집중하십시오. 설거지를 할 때도 걸레지를 할 때도 빨래를 할 때도 그 일에 온전히 몰입하십시오. 빨리 끝내고 다른 일을 해야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과거에 부처님을 모셨던 스님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부처님을 모실 때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스님이 답했습니다. 밥 짓고 빨래했지. 그럼 부처님께서 특별한 가르침을 주셨습니까? 밥 짓고 빨래하라고 하셨지. 평범함 속에 비범함입니다. 특별함을 추구하지 말고 평범함을 깊이 살아가십시오. 그 속에 모든 진리가 있습니다.
아제아재 계속 나아가십시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길을 잃어도 다시 찾으십시오. 완벽하려 하지 마십시오. 완벽함은 환상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불안전함이 아름답습니다. 깨진 그릇을 금으로 이어붙이는 일본의 킨츠기처럼 우리의 상처와 결점이 우리를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실수했다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실수는 배움의 기회입니다.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면 그곳이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자는 일어설 필요가 없지만 넘어진 자는 반드시 일어서야 한다.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어진 채로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라제 피안을 향해 계속 나아가십시오. 때로는 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어둠속을 걷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걸으십시오. 동굴속을 걷다 보면 처음에는 치흙 같은 어둠입니다. 하지만 눈이 적응하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계속 걷다 보면 멀리서 빛이 보입니다. 출구의 빛입니다. 수행의 길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캄캄합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하다 보면 조금씩 밝아집니다. 어느 순간 빛을 봅니다. 견성 본성을 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찰라이지만 영원히 남습니다. 한번 본 것은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본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다릅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계속 수행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을 삶으로 옮겨야 합니다. 깨달은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바라승아 함께 가십시오. 혼자서는 멀리 갈 수 없습니다. 함께하면 더 멀리, 더 깊이 갈 수 있습니다. 상가, 즉 수행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혼자 수행하면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함께 수행하면 서로 격려하고 북돋아 줍니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세웁니다. 한 사람이 길을 잃으면 다른 사람이 방향을 알려 줍니다. 한 사람이 좌절하면 다른 사람이 희망을 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삼보를 말씀하셨습니다. 불법 승 부처님과 가르침과 수행 공동체이 세 가지가 모두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길을 보여 주시고 법은 가는 방법을 알려 주며 승은 함께 가는 동반자입니다.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여정은 어려워집니다. 혼자서 깨달을 수는 있지만 혼자서 계속 나아가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고독한 수행자의 이미지가 있지만 진정한 수행자는 고립되지 않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세상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산속의 수행자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지어준 옷을 입고 누군가 만든 그릇을 쓰며 누군가 공양한 음식을 먹습니다.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모지사바아 이루어지이다. 이 말은 기원이자 선언입니다. 깨달음이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이미 이루어졌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가야 할 길이 있지만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수행해야 하지만 이미 부처입니다. 이 역설를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의 핵심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지금이 순간에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신 불가득, 현재 신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매순간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행하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깨달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이 물음을 깊이 파고 들면 결국 아무도 없습니다. 고정된 나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없지만이 순간의 경험은 생생합니다. 자는 환상이지만 삶은 실제합니다. 이 미묘한 균형을 이해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생겨난다고도 할 수 없고 사라진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중론에서 용수보살께서는 팔부를 말씀하셨습니다.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끊어지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모든 극단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양극단 사이에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의 모두 초월한 곳에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곳, 생각으로 가다올 수 없는 그곳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그곳 화두를 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곳 이것이 무엇인가? 대답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하지만 그 물음과 함께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물음이 사라지고 닭도 사라지며 물음을 던진 자마저 사라집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경험해야만 압니다. 마치 물의 맛을 말로 설명할 수 없듯이 깨달음도 말로 전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영꽃을 드셨을 때 대중은 침묵했지만 가섭 존자만 미소 지으셨습니다. 이심전심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것입니다.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선의 전통이 그렇게 이어져 왔습니다. 이심전심 불림 문자 글자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경전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경전은 손가락이고 진리는 달입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봐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손가락이 없으면 어디를 봐야 할지 모릅니다. 경전은 길잡이입니다. 지도입니다. 하지만 지도가 영토는 아닙니다. 지도를 보고 직접가 봐야 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아. 이 진원 속에 모든 수행의 길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가는 것, 방향, 함께함, 그리고 완성. 하지만 진언을 100번, 천번, 만 번 외운다고 해서 저절로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진원의 의미를 새기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함께 가라고 하면 함께 가며 이루라고 하면 이루어야 합니다. 실천 없는 신앙은 공허합니다. 깨달음 없는 수행은 맹목입니다. 잡이 없는 지혜는 냉정합니다. 지혜 없는 자비는 맹목입니다. 지혜와 자비이 두 날개로 날아야 합니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 없습니다. 지혜로 진리를 보고 자비로 중생을 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관음 소리를 관찰한다. 중생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즉시 구제하러 갑니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으로 모든 방향의 중생을 구제합니다. 우리도 작은 관세음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귀기울이고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동하는 것입니다.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외로운 이웃에게 말을 건네고 힘든 친구에게 위로의 손을 내밀고 길잃은 이에게 방향을 알려 주는 것. 이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보살의 실천입니다. 지장보살의 서원을 기억하십시오. 지옥이 비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으리라. 가장 고통받는 존재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겠다는 원력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편안한 곳에 머물지 않고 필요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 곳, 고통이 있는 곳, 어둠이 있는 곳, 촛불 하나가 어둠을 밝히듯 작은 실천 하나가 세상을 바꿉니다.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 하나가 시작입니다. 간뒤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바다는 물방울의 집합이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바다를 이룹니다. 당신의 작은 실천이 큰 변화를 만듭니다.
아재아재 지금 바로 시작하십시오.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십시오.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리면 영원히 시작하지 못합니다.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시작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걸으면서 길이 만들어집니다. 안토니오 마차도의 시처럼 나그네요. 길은 없다. 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 정해진 길이 없습니다.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길이 있고 조사들의 길이 있으며 당신의 길이 있습니다. 남의 길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영감을 받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길은 스스로 걸어야 합니다. 당신만의 방식으로 수행하십시오. 당신만의 속도로 나아가십시오. 비교하지 마십시오. 남이 빨리 간다고 초조해 할 필요 없습니다. 경주가 아닙니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시간표가 있습니다. 어떤 꽃은 봄에 피고 어떤 꽃은 여름에 피며 어떤 꽃은 가을에 un니다. 모두 다 아름답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때에 꽃 피울 것입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하지만 게으르지도 마십시오. 꾸준히 성실히 진실하게 걸어가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라제 방향을 잃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수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잠깐의 즐거움, 순간의 만족, 덧덮는 쾌락 이런 것들이 우리를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하지만 깊은 기쁨은 다릅니다. 표면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내면에서 울어나는 평화입니다. 순간의 흥분이 아니라 지속되는 고요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다 합쳐도 열반의 즐거움의 16분의도 미치지 못한다. 진정한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외부 조건이 좋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해서 행복한 것입니다. 많이 가져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이 없어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밖에서 행복을 찾지 않습니다. 안에서 평화를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지 않습니다. 진흙에서 피어나되 진흙에 물들지 않습니다. 입세와 출세의 조아입니다. 세상에 들어가되 세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되 휘둘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살의 길입니다. 속세를 떠나지 않으면서 속세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중생과 함께하되 중생의 번뇌에 빠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중심을 잡으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명상이 그 중심을 잡아줍니다. 매일 자신과 만나는 시간,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이것이 중심을 잡아줍니다. 아침에 일어나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밤에 자기전 명상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십시오. 하루 중 틈틈히 호흡을 관찰하십시오. 이런 작은 실천이 쌓여서 삶이 변합니다. 갑자기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깨어나는 것입니다.
바라승아, 혼자 가지 마십시오. 함께 가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당신 옆에도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함께 걸으십시오. 가족이 그렇고 친구가 그렇고 직장 동료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짐을지고 걷고 있습니다. 서로 도우며 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당신이 도움을 주고 때로는 당신이 도움을 받습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순환합니다. 강물이 흐르듯 주고받으며 흘러갑니다. 집착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베푼 것을 기억하지 마십시오. 받은 것은 감사히 여기되 갚아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마십시오. 은혜를 다음 사람에게 전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페이포어드 은혜를 앞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내게 베푼 사람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의가 순환합니다.
모지사바아 이루어지이다. 당신의 수행이 완성되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의 깨달음이 성취되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본래 부처입니다. 다만 그것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이 진리를 매순간 기억하십시오. 힘들 때, 지칠 때, 좌절할 때 나는 본래 부처다라고 상기하십시오. 이것이 교만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특별합니다. 길가의 돌멩이도 부처이고 하늘의 구름도 부처이며 우는 아이도 부처입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모든 것이 종기에 보입니다. 하차는 것이 없습니다. 낙엽 하나도 경의롭고 빗방울 하나도 신비롭습니다. 평범한 것들이 비범해 보입니다. 이것이 깨달은 눈으로 보는 세상입니다. 특별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특별합니다.
아야심경의 마지막이 신성한 진언은 우리를 부릅니다. 가자 지금 바로 피안으로 함께 완성을 향해. 하지만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밖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깊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가장 조용한 곳, 가장 고유한 곳, 그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그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동굴 깊은 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듯 마음 깊은 곳에 깨달음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들어가십시오. 어둠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빛납니다. 고요 속에서 소리가 더 또렷합니다. 비움 속에서 충만함이 드러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아. 이 이 진원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조용히 외우십시오. 소리내어 외워도 좋고 마음속으로 외워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깊이 새기는 것입니다. 가는 것, 방향, 함께함, 완성. 이네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매일 조금씩 나아가고 올바른 방향을 유지하며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 이미 완성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반야심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최후의 가르침입니다. 색즉시공으로 집착을 내려놓고 무소득으로 얻으려는 마음을 비우며 이제 아제아제로 실제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론에서 실천으로 깨달음에서 삶으로 지혜에서 자비로 이것이 완성입니다.
부처님께서 임멸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 말씀으로 45년간의 설법을 마무리하셨습니다. 무상함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사는 것. 이것이 불교의 핵심입니다.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가장 적극적인 긍정주의입니다. 지금이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에 온전히 살아야 합니다.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지금이 호흡을 느끼십시오. 지금이 마음을 관찰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피안입니다. 피안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이 순간이 피아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아 가자 가자 피 안으로 가자 함께 피 안으로 가자 깨달음이여 이루어지다. 이 진원과 함께 당신의 여정이 계속되기를 기원합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길을 잃어도 다시 찾으며 어두워도 계속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함께하십니다. 과거에 모든 수행자들이 함께하고 현재의 모든 동반자들이 함께하며 미래의 모든 구도자들이 함께합니다. 하나의 큰 강물처럼 우리는 모두 같은 바다를 향해 흘러갑니다. 개별적인 물방울이지만 결국 하나의 물입니다. 그 하나됨을 느끼십시오.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십시오. 모든 것과 하나되어 있음을 체험하십시오. 그것이 피안입니다. 그것이 열반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다음 호흡 속에, 당신의 다음 걸음 속에, 당신의 다음 순간 속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당신이서 있는이 자리가 피안입니다. 당신이 숨쉬는이 순간이 열반입니다. 당신이 걷는이 길이 보리도입니다. 더 이상 찾아 헤매지 마십시오.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더 이상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이미 그러합니다. 반야심경의 지혜를 가슴에 품고 오늘을 살아가십시오. 색즉시공의 지혜로 집착을 놓고 무소득의 마음으로 욕심을 비우며 아재아재의 정신으로 꾸준히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 당신은 미소짓게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찾던 것이 바로 여기 있었음을 애써 얻으려던 것을 이미 가지고 있었음을 되려던 것이 본래부터 그러왔음을 깨닫고 그 미소가 바로 부처님의 미소입니다. 들고 빙글에 웃으신 그 미소. 말없이 모든 것을 전하는 그 미소. 당신도 그렇게 웃을 날이 올 것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암아미타불 관세음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