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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혹시 거울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 본 적 있으신가요? 저 사람은 왜 나보다 예쁠까? 저 사람은 왜 나보다 성공했을까?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끊임없이 나를 생각합니다. 나의 외모, 나의 능력, 나의 성취, 나의 행복.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나를 위해 이렇게 많은 시간을 쏟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고통스러울까요?
2600년 전 부처님께서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 존자가 스승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생각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이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시며 아난다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그대가 보고 있는 이 몸뚱이를 한번 살펴보아라. 머리카락, 손톱, 피부, 뼈, 살. 이 모든 것이 그대라고 생각하는가?"
안난다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들은 모두 변합니다. 제 머리카락은 자라고 빠지며 피부는 늙고 뼈는 약해집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영원한 '나'일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난다요. 그대의 느낌은 어떠한가?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 이런 감정들이 그대 자신인가?"
아난다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감정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아침에 기뻤던 마음이 저녁에는 슬프고, 어제 사랑했던 것을 오늘은 미워합니다. 변하는 것이 어찌 영원한 '나'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더욱 깊은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난다여. 그대의 생각과 의식은 어떠한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그대의 생각. 그것이 그대 자신인가?"
안난다는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생각도 순간순간 변합니다. 지금 일어난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새로운 생각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 또한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바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색(色)은 무상(無常)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며, 괴로운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自我)가 아니다.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또한 그러하니라."
우리가 '나'라고 믿는 모든 것, 몸과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의식이 다섯 가지를 불교에서는 오온(五蘊)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오온은 모두 무상합니다. 순간순간 변하고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집니다. 변하는 것을 어떻게 영원한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한번 돌아봅시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우리는 주름 하나, 뱃살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내 몸이 예전 같지 않아." 회사의 출근에서는 동료의 승진 소식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왜 나는 아직도 이 자리에 있을까?" 퇴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삶과 나의 평범한 일상을 비교합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행복해 보일까?"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도 오늘 했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곱씹으며 후회합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는 이렇게 하루 종일 '나'라는 감옥 속에 갇혀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봅시다.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고 지키려 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이 '나'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잠시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마치 여러 부품이 모여 자동차가 되는 것처럼, 오온이 모여 '나'라는 착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잠시 우리 몸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의 세포들은 죽고 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피부 세포는 약 2주마다 완전히 교체되고, 적혈구는 120일마다 새것으로 바뀝니다. 7년이 지나면 우리 몸의 거의 모든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교체됩니다. 그렇다면 7년 전에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같은 사람일까요?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완전히 달라졌는데,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요?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전 당신이 좋아했던 음악, 좋아했던 음식, 좋아했던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도 똑같이 좋아하시나요? 아마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겁니다. 당신의 가치관도, 꿈도, 성격도 변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10년 전에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같은 사람일까요? 마음도 끊임없이 변하는데,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매우 명확하게 보셨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들의 흐름일 뿐입니다. 마치 강물을 보며 "이것이 강이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강물은 매 순간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의 강물과 1초 후의 강물은 이미 다른 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강이라고 부르며 마치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나'에 집착할까요? 그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라는 확고한 존재가 없다면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나'라는 정체성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닐까? 이런 두려움이 우리를 '나'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나'를 증명하려 합니다. 더 좋은 학벌, 더 높은 직위, 더 많은 돈, 더 아름다운 외모. 이 모든 것이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몸부림입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불안이 서려 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행복하지 않습니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압박감, 언젠가 이 모든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저를 짓누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잔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여, 그대가 가진 것들을 한번 살펴보아라. 그대의 학벌은 그대인가? 그대의 직위는 그대인가? 그대의 재산은 그대인가?"
젊은이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하지만 이것들을 잃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미소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착각이니라. 그대는 원래부터 학벌도 직위도 재산도 아니었느니라. 그런데 그대는 그것들이 '나'라고 착각했고, 그래서 그것들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겪는 고통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착각하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집착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변하거나 사라질 때 우리는 고통받습니다. 외모는 늙어가고, 능력은 쇠퇴하고, 지위는 내려가고, 재산은 사라집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마치 '나' 자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원래 '나'라는 것은 없었다고. 우리가 '나'라고 집착했던 것들은 모두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하다고.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미모로 주목받으며 자랐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감탄했고, 그녀 역시 자신의 아름다움에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나는 아름답다. 이것이 나의 가치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도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녀는 절망했습니다. "내가 사라지고 있다. 나의 가치가 없어지고 있다." 그녀는 온갖 화장품을 바르고 성형 수술까지 고려했지만,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한 스님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나서 물었습니다. "보살님, 아름다움이 사라지면 당신도 사라지는 것입니까?"
그녀는 울먹이며 대답했습니다. "스님, 저는 평생 아름다움이 저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사라지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스님은 잔잔하게 말했습니다. "보살님, 당신은 원래부터 아름다움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잠시 당신의 몸에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마치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처럼, 그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그 아름다움이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우리는 각자 무언가의 '나'를 투영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에, 어떤 사람은 성취에, 어떤 사람은 관계에 '나'를 투영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흔들릴 때 우리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나'가 아니라고. 그것들은 모두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들이라고.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은 한 남성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20년 동안 그 회사에서 일했고 자신의 직함과 역할에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나는 회사의 부장이다."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누구인가? 나는 이제 무엇인가?" 그의 아내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잖아요. 무엇이 달라졌나요?" 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여전히 자신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자아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내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변하는 것에 '나'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몸도, 마음도, 관계도, 상황도,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하지 않는 '나'를 찾으려 하고, 그래서 고통받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수행자여, 불타는 집에 있는 사람을 보라. 그는 집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집안의 가구들을 꼭 붙잡고 있느니라. '이 가구는 내 것이다. 저 그림은 내 것이다. 이것들을 놓을 수 없다'고 하면서 결국 그는 집과 함께 불타고 마느니라. 어리석지 않은가? 집이 무너지고 있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와야 하느니라."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이 몸과 마음은 무너지고 있는 집입니다. 순간순간 변하고 결국 소멸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안에서 '나'와 '내 것'을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어느 부유한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재산을 모으는 데 몰두했습니다. "이 돈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 이 재산이 나의 가치를 증명할 것이다." 그는 돈을 세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고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행복해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병이 찾아왔고, 그는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임종의 순간 그는 자신의 창고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평생 모은 이 재산을 이제 하나도 가져갈 수 없구나." 그제야 그는 깨달았습니다. 재산은 결코 '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자신이 평생 집착했던 것은 사실 한 번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몸도 빌린 것이요, 재산도 잠시 맡은 것이요, 심지어 생각조차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들을 '나'와 '내 것'이라 여기며 집착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모든 괴로움의 뿔이니라."
우리는 매일 SNS를 열어 봅니다.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삶을 보며 우리는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성공했고, 저 사람은 나보다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우울해집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비교하고 있는 '나'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나'는 실체가 없습니다. 단지 오온이 모여 만들어낸 임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실체가 없는 '나'를 역시 실체가 없는 다른 '나'와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자와 그림자를 비교하며 괴로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명확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한 젊은 수행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나'가 없다면 누가 고통받고 누가 깨달음을 얻습니까? 만약 자아가 없다면 수행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잔잔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수행자여, 고통이 있을 뿐 행위가 있을 뿐 행위자는 없으며, 열반이 있을 뿐 열반에 드는 자는 없느니라. 마치 강물이 흐르되 흐르는 주체가 따로 없는 것처럼, 모든 현상은 그저 일어날 뿐이니라."
이 가르침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평생 "내가 생각한다. 내가 느낀다. 내가 행동한다"고 믿으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관찰해 봅시다. 생각이 일어날 때 정말 내가 그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냥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일까요?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면, 당신이 의도적으로 그 생각을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까?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을 때 화가 일어납니다. 그 순간 당신은 "내가 화를 내야지"라고 결정한 후에 화를 낸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화가 일어난 것입니까? 대부분의 경우 감정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나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온은 무상(無常)이라. 몸은 나의 것이 아니요, 느낌도 나의 것이 아니며, 생각도 나의 것이 아니고, 의지도 나의 것이 아니며, 의식도 나의 것이 아니니라. 만약 이것들이 나의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늙지 않으려 해도 늙고, 병들지 않으려 해도 병들며, 슬프지 않으려 해도 슬프니라. 이것들을 어찌 나의 것이라 하겠는가?"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이 몸이 정말 '나'라면, 나는 이 몸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늙지 않게 할 수 있어야 하고, 병들지 않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마음이 정말 '나'라면, 나는 이 마음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프고 싶지 않으면 슬프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화내고 싶지 않으면 화내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무아(無我)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모든 것은 사실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것들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 사라집니다. 우리는 단지 그 과정을 지켜볼 뿐입니다.
밤 늦게 잠들기 전, 오늘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회사에서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 모든 순간순간, 정말 내가 그 일들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삶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일까요? 깊이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일들은 저절로 일어났습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피곤해서 쉬고, 즐거워서 웃고, 슬퍼서 울었습니다. 어디에 고정된 '나'가 있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진리를 깨달으셨을 때 완전한 자유를 얻으셨습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자 모든 괴로움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지킬 '나'가 없으니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증명할 '나'가 없으니 불안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채울 '나'가 없으니 욕망도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를 깨달은 자의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아를 '나'를 없애는 것, '나'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없다면 나는 그저 텅 빈 존재가 아닌가? 자아를 버린다면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는 결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무아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거짓된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진실한 존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인도의 한 왕이 그리스에서 온 현자 나가세나 존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밀린다왕이라 불렸고,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밀린다왕이 물었습니다. "존자시여, 당신은 무아를 가르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와 대화하고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만약 자아가 없다면 누가 생각하고 누가 말하고 누가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까?"
나가세나 존자는 잔잔하게 미소지며 반문했습니다. "대왕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이곳에 오셨습니까?"
밀린다왕이 대답했습니다. "물론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나가세나 존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수레라는 것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밀린다왕은 밖에 세워둔 수레를 가리켰습니다. 나가세나 존자는 수레에 다가가 바퀴를 만지며 물었습니다. "대왕이시여, 이 바퀴가 수레입니까?"
밀린다왕이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바퀴는 수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축이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이 몸체가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고삐가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나가세나 존자는 수레의 모든 부분을 하나하나 짚으며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대왕이시여, 바퀴도 수레가 아니고, 축도 수레가 아니며, 몸체도 수레가 아니고, 고삐도 수레가 아니라면, 도대체 수레는 어디에 있습니까?"
밀린다왕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이해했습니다. "존자시여, 수레는 이 모든 부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바퀴, 축, 몸체, 고삐가 특정한 방식으로 조합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수레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부분도 그 자체로 수레는 아닙니다."
나가세나 존자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훌륭하십니다. 대왕이시여. 나가세나라는 존재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몸,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이 모여 나가세나라고 불릴 뿐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나가세나는 아닙니다. 수레가 실제로 존재하지만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처럼, 나가세나도 존재하지만 고정된 자아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아의 본질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무아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존재가 고정되고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레가 여러 부품의 조합으로 존재하듯이, 우리도 여러 요소의 조합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요소들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바퀴가 닳고 축이 낡고 몸체가 손상되면 그것들을 교체합니다. 그렇게 부품이 모두 바뀌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같은 수레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존재도 이와 같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하여 생기심(生起心)하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정된 '나'라는 곳에 머물지 말고 자유롭게 마음을 내라는 뜻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저런 사람이다"라는 규정에 자신을 가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규정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자신을 화가로 규정하며 살았습니다. "나는 화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사고로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나는 이제 화가가 아니다. 화가가 아니라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 그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느꼈습니다.
하지만 한 스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보살님, 당신은 원래부터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상황에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화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스님, 제가 화가가 아니라면 저는 무엇입니까?"
스님은 잔잔하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입니다. 화가라는 이름표를 떼어내고 보면 여전히 당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신은 다른 많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왼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고정된 화가라는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규정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그 틀 안에 가둡니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면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실패자야"라고 생각하면 다시 일어설 힘을 잃습니다.
하지만 고정된 '나'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제 소심했던 사람도 오늘은 용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실패했던 사람도 내일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정된 자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緣起法)을 통해 이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모든 존재는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 변화하며 조건에 따라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도 수많은 조건들의 만남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존재하는 것은 수많은 조건들 덕분입니다. 부모님이 만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기가 없다면 당신은 숨을 쉴 수 없을 것입니다. 음식이 없다면 당신은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태양이 없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당신이라는 존재는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한 승녀가 산속 암자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직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했습니다. "나는 혼자서도 존재할 수 있다. 다른 누구도 필요 없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병에 걸렸습니다. 열이 나고 몸을 가누기 힘들었지만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습니다. 한 물 한 모음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자신이 입고 있는 옷, 머무르고 있는 암자, 심지어 수행하는 방법까지도 모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임을. "나는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구나. 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구나." 이것이 바로 연기법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존재합니다. 당신 안에 부모님이 있고, 스승이 있으며, 친구들이 있습니다. 당신 안에 농부가 있고, 요리사가 있으며, 건축가가 있습니다. 당신 안에 태양이 있고, 비가 있으며, 바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당신이라는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가 '남'일까요? 당신이 숨쉬는 공기는 나무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 공기가 당신의 폐로 들어가 혈액으로 흡수됩니다. 그렇다면 그 공기는 언제부터 '나'가 되는 것일까요? 당신이 먹는 음식은 원래 땅에서 자란 곡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위장에서 소화되어 영양분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음식은 언제부터 '나'가 되는 것일까요? 명확한 경계를 그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분리된 '나'와 '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한 어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았고, 자신을 바다와 별개의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바다는 바다, 나는 나다." 지만 어느 날 큰 폭풍이 왔고 그는 바다에 빠졌습니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의 염분 농도가 바닷물과 거의 같다는 것을. 자신이 먹는 물고기는 바다에서 왔고, 그 물고기를 먹은 자신도 결국 바다의 일부라는 것을. 생명이 처음 태어난 곳도 바다였고, 모든 생명체는 바다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나와 바다는 다른 것이 아니구나. 나는 바다에서 왔고, 바다와 함께 살며, 결국 바다로 돌아가는구나."
이렇게 깊이 들여다보면 독립적인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자유일까요? 고정된 '나'가 없다는 것이 왜 해방일까요? 그것은 바로 변화의 가능성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금 불행하다면, 그 불행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행을 느끼는 고정된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바뀌면 감정도 바뀝니다. 당신이 지금 실패했다면, 그 실패는 당신의 본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패한 고정된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바뀌면 결과도 바뀝니다. 당신이 지금 화가 났다면, 그 화는 곧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화내는 고정된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한 여성이 이혼 후 깊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그녀를 짓눌렀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이혼녀', '실패자'라는 정체성에 가두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한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고정된 자아는 없습니다.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은 이미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이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표는 진실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그녀는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혼녀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경험일 뿐이구나. 그것이 나의 본질은 아니구나. 나는 여전히 변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고,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구나." 그녀는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혼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매 순간 새로운 '나'로 태어나고 있구나."
이것이 바로 무아가 주는 자유입니다. 과거의 '나'에 묶이지 않고, 미래의 '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의 마음은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과거의 '나'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단지 기억 속에만 존재합니다. 미래의 '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상상 속에만 존재합니다. 현재의 '나'조차도 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도 계속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흘러가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정된 '나'를 만들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처럼,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가에 있습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는 물을 움켜 주려 합니다. "이 물이 나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물은 계속 빠져나갑니다. 아무리 세게 쥐어도 물은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괴로워합니다. "왜 내 것이 되지 않는 거지?" 그때 한 현자가 지나가다 그를 보고 말합니다. "강물을 손에 담으려 하지 말고, 그저 강물과 함께 흐르시오. 물을 소유하려 하지 말고, 물을 느끼시오. 물을 움켜주려 하지 말고, 물에 손을 담그시오."
그는 손을 펴고 강물에 담<0xEA><0xB0><0x81>니다. 강물은 그의 손을 스치며 흘러갑니다. 소유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습니다. 잡을 수는 없지만 함께할 수는 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자유구나."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나'를 움켜주려 할수록 고통만 커집니다. "나는 이래야 해. 나는 저래야 해." 이런 집착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나'를 놓아 버리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기쁨이 왔다가 가고, 슬픔이 왔다가 가고, 성공이 왔다가 가고, 실패가 왔다가 갑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 집착하는 고정된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청년이 부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아를 깨닫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무아는 너무 슬픈 가르침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젊은이여, 그대가 잃어버린다고 두려워하는 그 '나'는 원래부터 없었느니라. 그림자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과 같으니라. 그림자는 원래 실체가 없는데 무엇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냐? 오히려 그림자를 실체라고 착각하는 것을 놓아 버릴 때 진정한 빛을 보게 되느니라."
청년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저는 무엇입니까? 저는 누구입니까?"
부처님께서는 하늘을 가르치셨습니다. "저 하늘을 보아라. 하늘은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느니라. 구름이 지나가기도 하고 새가 날아가기도 하느니라. 하지만 하늘 자체는 구름도 아니고 새도 아니니라. 구름이 지나가도 하늘은 여전히 하늘이고, 새가 날아가도 하늘은 여전히 하늘이니라. 그대의 본성도 이와 같으니라. 감정이 지나가고 생각이 지나가고 경험이 지나가지만, 그대의 본성은 변하지 않느니라. 다만 그 본성은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니라."
이 가르침은 매우 심오합니다. 무아는 '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고정된 '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구름을 담을 수 있듯이, 우리도 모든 경험을 담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구름에 물들지 않듯이, 우리도 경험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쁨이 왔다가 가도 우리의 본성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슬픔이 왔다가 가도 우리의 본성은 평온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를 깨달은 자의 마음입니다.
어느 날 큰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집 안에 숨었습니다. "집이 무너지면 어떡하지? 재산을 잃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한 노승은 고요히 앉아 명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가 놀라 물었습니다. "스승님, 폭풍이 몰아치는데 두렵지 않으십니까?"
노승은 잔잔하게 대답했습니다. "폭풍은 오고 가는 것이니라. 내가 폭풍이 아닌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집이 무너져도 나는 여전히 여기 있고, 재산을 잃어도 나는 여전히 여기 있느니라. 잃어버릴 고정된 '나'가 없는데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무아가 주는 평화입니다. 고정된 '나'가 없으니 지킬 것도 없습니다. 지킬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두려울 것이 없으니 자유롭습니다. 자유로우니 평화롭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진리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움켜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외모, 당신의 학벌, 당신의 직위, 당신의 재산, 당신의 관계.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아 보세요. 그것들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여기 있습니다. 그것들은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당신이 잠시 경험하는 것들이었을 뿐입니다.
진정한 당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직접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고요히 앉아 숨을 들이시고 내쉬며 모든 생각을 놓아 버릴 때, 그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조차 사라질 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분인 사리불 존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사리불 존자는 부처님을 만나기 전 이미 인도에서 손꼽히는 학자였습니다. 25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의 지혜는 온 나라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명성에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나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아사지 존자를 만났습니다. 아사지 존자의 고유하고 평화로운 모습에 사리불은 물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누구이시며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아사지 존자는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제 스승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그분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모든 법(法)은 인연(因緣)에서 생겨나니, 여래(如來)께서 그 원인을 설하셨고, 그 소멸 또한 설하셨나이다."
이 짧은 계송을 듣는 순간, 사리불은 번개에 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평생 붙들고 있던 지식, 학문, 명성이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생겨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집착하는 '나' 역시 실체가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는 즉시 250명의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나아가 출가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사리불이여, 당신은 이미 위대한 학자였는데, 왜 모든 것을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사리불은 잔잔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들이 내 것이라는 착각을 내려놓았을 뿐입니다."
사리불 존자는 그 후 부처님의 곁에서 수행하며 지혜제일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지혜는 예전의 지식과는 달랐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아는 것에 집착했다면, 이제는 집착이 사라진 지혜였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질문하면 그는 막힘없이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대답한 후에는 그 지식을 움켜지지 않았습니다. 물이 흐르듯이 지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가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그를 칭찬해도 교만하지 않았고, 누군가 그를 비난해도 화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칭찬받을 '나'도 없고, 비난받을 '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제자인 목걸련 존자의 이야기도 들어봅시다. 목걸련 존자는 신통제일이라 불렸습니다. 하늘을 날고 땅속을 통과하며 먼 곳을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능력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존자시여, 당신의 신통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위대함이 아닙니까?"
목걸련 존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신통력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모여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마치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수행의 조건이 갖추어지니 신통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나뭇잎이 바람을 소유하지 않듯이, 나도 신통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를 깨달은 자의 삶입니다. 능력이 있어도 그것에 교만하지 않습니다. 명성이 있어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칭찬을 받아도 우쭐되지 않고, 비난을 받아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경험하되 그것에 '나'를 투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고, 자아가 아닌 것에 대한 집착도 없는 자, 집착이 없기에 번뇌도 없고, 번뇌가 없기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겨 봅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것은 "나는 훌륭하다. 나는 특별하다"는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아가 아닌 것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것은 "나는 형편 없다. 나는 쓸모 없다"는 생각도 없다는 뜻입니다. 높은 '나'도 없고, 낮은 '나'도 없습니다. 좋은 '나'도 없고, 나쁜 '나'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흐름이 있을 뿐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거울을 보며 "나는 늙었어. 나는 못생겼어"라는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을 알아차립니다. "아, 지금 자아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는구나. 이 몸은 나의 전부가 아니구나." 그리고 그 생각을 놓아 버립니다. 무리하게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흘러가도록 둡니다.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듯이, 생각도 마음을 지나가게 둡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와 부딪혔을 때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저 사람은 왜 조심하지 않는 거야?" 이때도 알아차립니다. "아, 지금 나는 화가 났구나. 하지만 이 화는 잠시 일어난 현상일 뿐이구나. 나는 화가 아니구나."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쉽니다. 화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화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도록 둡니다. 몇 번의 호흡 후에 화는 조용히 사라집니다. 마치 파도가 일었다가 스스로 가라앉듯이.
회사에서 동료가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질투심이 생깁니다. "왜 나는 안 되고 저 사람만 되는 거지?" 이때도 알아차립니다. "아, 지금 비교하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나는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구나. 그 사람의 길이 있고 나의 길이 있을 뿐이구나." 그리고 진심으로 동료의 승진을 축하합니다. 내 것을 빼앗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내 것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가족과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가 당신을 비난하는 말을 했을 때 자아가 상처받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거야." 하지만 이때 무아를 떠올립니다. "비난받을 고정된 '나'는 없구나. 배우자도 지금 감정적으로 힘든 상태일 뿐이구나. 이것은 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그저 힘듦의 표현이구나." 그러면 방어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라고 부드럽게 물을 수 있게 됩니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완벽주의자였고, 아내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왜 이것도 제대로 못 해?" 아내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습니다. "나는 정말 부족한 사람이구나." 두 사람 모두 괴로웠습니다. 남편은 완벽한 아내를 원했지만 얻을 수 없었고, 아내는 인정받고 싶었지만 받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한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무아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부족한 '나'도 완벽한 '나'도 모두 환상입니다." 아내는 천천히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비난하는 '나'는 애초에 없었구나. 완벽해야 한다는 기준도, 부족하다는 판단도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구나." 그날 이후 아내는 달라졌습니다. 남편이 비난해도 예전처럼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남편은 자신의 기준에 집착하고 있구나. 그것이 남편을 괴롭히고 있구나."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내가 상처받지 않으니 남편도 점점 비난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의 비난은 아내의 반응을 먹고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가 가져오는 관계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면, 상대방의 자아 집착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화를 내도 그것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칭찬해도 그것에 도취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직장인이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며칠 밤을 세워가며 완벽한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꼭 인정받아야 해." 하지만 프레젠테이션 당일, 상사는 그의 자료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했습니다. "이건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예전의 그였다면 깊은 좌절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노력했는데, 나는 실패자구나."
하지만 그는 무아를 떠올렸습니다. "이 프레젠테이션은 나의 전부가 아니구나. 실패한 '나'라는 것도 없고, 성공한 '나'라는 것도 없구나. 단지 이번 시도가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했을 뿐이구나." 그는 침착하게 물었습니다.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피드백을 받아 자료를 수정했습니다. 자아가 상처받지 않았기에 건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무아를 채득하면 실패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패할 고정된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업가 큰 사업 실패를 겪었습니다. 수억 원의 빚을 치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했습니다. 예전의 그였다면 자살까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무아의 가르침을 기억했습니다. "성공한 '나'도 없었고, 실패한 '나'도 없구나. 돈을 가진 '나'도 환상이었고, 돈을 잃은 '나'도 환상이구나. 나는 여전히 여기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구나." 그는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작은 일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자아의 무게가 없었기에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남들의 시선도 신경 쓰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평가받을 '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아를 채득하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한 노승이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슬퍼하며 물었습니다. "스승님, 두렵지 않으십니까?"
노승은 평온하게 대답했습니다. "무엇이 두렵겠느냐? 죽을 '나'라는 것이 원래 없었는데. 이 몸은 잠시 빌린 것이고, 이제 돌려줄 시간이 왔을 뿐이니라. 마치 여관에서 하룻밤 묻고 떠나는 것과 같으니라. 여관을 떠난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이냐?"
제자들은 여전히 슬펐지만, 스승의 평온함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스승님은 정말 자유로우시구나. 죽음조차 스승님을 괴롭히지 못하는구나." 이것이 바로 무아가 주는 궁극의 자유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을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몸은 사라지지만 우리가 집착하던 그 '나'는 원래부터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잃어버린다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모든 것은 흐름일 뿐이니라. 강물이 바다에 이르렀을 때, 강물이 사라진 것이냐, 아니면 바다가 된 것이냐? 집착하는 자는 강물이 사라졌다고 슬퍼하지만, 깨달은 자는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고 기뻐하느니라."
무아를 깨달으면 자비심도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나'와 '남'의 경계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당신 안에 나의 부모가 있고, 나의 스승이 있으며, 나의 친구가 있습니다. 당신 안에 햇빛이 있고, 비가 있으며, 땅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되면, 모든 존재가 소중해집니다. 누군가를 해치는 것은 나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수행자가 길을 가다가 다친 새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새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치료해 주었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저 새를 돕습니까? 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이익이 됩니까?"
수행자는 잔잔하게 대답했습니다. "저 새와 나는 다르지 않습니다. 저 새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저 새의 생명은 나의 생명입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는데 어찌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무아에서 피어나는 자비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 다른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무아를 수행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매 순간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숨을 쉴 때 "내가 숨을 쉰다"가 아니라, "숨이 들어오고 나간다"고 관찰합니다. 걸을 때 "내가 걷는다"가 아니라, "걷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관찰합니다.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한다"가 아니라, "생각이 일어난다"고 관찰합니다. 감정이 일어날 때 "내가 화났다"가 아니라, "화라는 감정이 일어났다"고 관찰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려울 것입니다. 평생 '나'를 주어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연습하다 보면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깊은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나'라는 무게가 사라진 가벼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10분이면 충분합니다. 고요히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관찰합니다. 들숨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날숨이 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옵니다. 나는 명상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내려놓습니다. 그저 앉아 있음, 숨 쉬고 있음. 이것만 있을 뿐입니다.
식사할 때도 무아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입에 넣기 전에 잠시 멈춥니다. 이 음식이 내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연이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씨앗을 심은 농부, 햇빛, 빛, 땅, 수확한 사람, 운반한 사람, 조리한 사람. 수많은 존재들의 노력이 이 한 끼 식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천천히 감사하며 음식을 먹습니다.
내가 먹는다가 아니라 먹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관찰하며 대화할 때도 무아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즉시 반응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는 저렇게 느껴라는 반응을 잠시 멈춥니다. 그저 듣습니다. 상대방의 말 속에 담긴 고통, 기쁨, 두려움, 희망을 느낍니다. 그러면 더 깊은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다아가 끼어들지 않으니 진정한 만남이 일어납니다.
일할 때도 무아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해야 해. 내가 성공해야 해라는 집착을 내려놓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과정 자체를 온전히 경험합니다. 그러면 일이 놀이가 됩니다.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흐르는 창조가 됩니다.
한 도예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명작을 만들어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나는 위대한 예술가가 될 거야. 하지만 이런 집착 때문에 오히려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손이 떨리고 마음이 조급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는 포기했습니다. 더 이상 명작을 만들려 하지 않겠어. 그냥 흙을 만지는 이 순간을 즐기겠어. 그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손이 저절로 움직이며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의 작품은 오히려 그때부터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집착이 사라지자 진정한 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가 가져오는 창조성입니다.
내가 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면 삶 자체가 저절로 흐릅니다. 마치 강물이 장애물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돌아가듯이 무아의 삶은 저항 없이 흐릅니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고 기회가 오면 받아들이며 어려움이 오면 견딥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나를 투영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에 묶이지 않고 미래의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손자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곧 죽을 텐데 할머니가 죽으면 내가 슬플까 봐 걱정이구나. 손자는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제가 배웠어요. 할머니는 이 몸이 아니라고요. 할머니는 제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고 지혜이며 따뜻함이라고요. 그것은 할머니의 몸이 사라져도 계속 제 안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 할머니는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미소지었습니다. 내가 정말 깨달았구나. 이것이 바로 무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몸과 마음에 한정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 안에 존재합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베푼 친절, 나눈 미소, 전한 지혜 이 모든 것이 계속 세상에 남아 흐릅니다. 파도는 사라져도 바다는 남듯이 당신이라는 현상은 변해도 당신의 영향은 계속됩니다.
지금 이 순간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봅시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 하지 마세요. 그저 느껴 보세요.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끼고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몸의 감각을 느껴봅니다.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고 감정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봅니다. 이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말로 표현하려 하지 마세요. 그저 그것과 함께 있으세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정의할 수 없는 것, 잡을 수 없는 것,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고정되지 않았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 변화하기에 영원한 것. 이것이 바로 당신의 본성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 자유를 맛보기를 바라셨습니다.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존재의 광활함을 경험하기를 작은 나에 갇히지 않고 모든 것과 하나 됨을 느끼기를 두려움 없이 집착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이것이 바로 무아를 깨달은 자의 삶입니다.
오늘부터 한 가지만 실천해 봅시다. 하루에 한 번 잠시 멈춰서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부드럽게 놓아 봅시다. 억지로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손을 펴고 흘러가도록 둡니다. 매일 조금씩 놓는 연습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자아에 집착하며 살아왔기에 그것을 놓기가 두려울 뿐입니다. 하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길은 열립니다. 어둠 속에서도 한 발짝 내디면 그다음 발걸음이 보이듯이 지금 이 순간 그 첫걸음을 내디어 봅시다. 나라는 무거운 짐을 조금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봅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입니다.
무아를 깨달은 자의 삶. 그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