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ription
맑고 향기롭게
[음악]
옛날 그 어떤 스님이 한 산 중에서 큰 소나무의 판자를 걸어 놓고 그 위에 앉아서 좌선을 합니다. 머리를 하잖아요. 나이 많은 스님인데 소나무에 판자를 걸어 놓고 거기에 앉아서 좌선을 합니다. 그때 그 고래 그 지방장관, 말하면 주지사예요. 주지사가 스님의 명성을 듣고 어느 날 찾아갑니다.
소나무에 올려 앉아 있는 스님을 보고 그 주지사가 물어요. "스님은 어째서 그토록 위태로운 곳에 계십니까?" 그러자 그 스님의 답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는 든든한 반석과 같소. 나보다는 그대의 자리가 위태롭기 짝이 없소."
그러자 그 주지사가 말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땅을 딛고 있고, 이 지방의 지사로서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내 지배하에 있습니다. 이런 처지인데 어째서 제 자리를 위태롭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그 스님 말씀이에요. "비록 그 지위가 높다 할지라도 언제 어떤 일이 그대의 신상에 일어날지 알 수 없소. 거기에다 지금 그대의 마음은 마치 섭해 불이 붙은 것처럼 교만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지 않소. 이것을 위스럽다고 하지 않고 뭐라 하겠소."
이 말을 듣고 그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스님에게 비로소 믿음이 생겨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중한, 정중하게 절을 하고 나서 간절한 자기 평소 때 의문을 지녔던 말을 합니다. "스님, 어떤 것이 진짜 불법입니까?" 불교의 다닌 분들도 가끔 그런 의문이 생길 거예요. 도대체 진짜 불법이 뭘까.
스님 그 답이에요.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 두루 행하시오. 제악 막작 중선봉행입니다.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 두루 행하시오."
너무도 평범한 이 말에 그는 아주 크게 실망이에요. 큰스님한테도 대단한 소리를들을 줄 알았더니 눈이 번쩍 뜨기를 그런 소리를 하지 말고 착한 일도 행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 그거야 삼척 동자로서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래서 말로서야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다 아는 소리지요. 그러나 경륜과 학식이 풍부한 80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소. 나쁜 짓 하지 않고 다시 말하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착한 일을 행할 때 그 마음은 저절로 맑아집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게 되면 그 내 마음이 저절로 맑아져요. 또한 열린 그 마음이 착한 일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바탕은 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마음을 맑히는 일입니다. 마음을 맑히는 일이에요. 언제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느냐, 절에 다니는지가 또 얼마나 오래 되었느냐, 이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투명한가, 얼마나 열려 있는가, 이것이 문제예요. 이건 시간과 상관없습니다. 불교의 귀의한지가 어떤 신앙 세계에 귀한지가 오래됐다고 해서 마음이 더 투명하고 탁하고 그런 건 아닙니다. 어떤 신앙생활들이 그렇습니다. 불교만이 아니고 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면은 마음이 열리고 투명해야 돼요. 마음이 열려 있지 않고 투명하지 않으면 그 뭔가 문제가, 문제가 딴 데 있는 겁니다. 사실 공허하거든요.
많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많이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많이 알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거기에 걸려서 실제로 행하기 어려워요. 이론적으로 불교가 뭔지를 모른다 하더라도 자기 본심대로 착하게 남한테 해 끼치지 않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떳떳하게 살면 그게 바른 정진입니다. 흔히 절에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뭐 팔만대장이 어떻고 조사 의료 어떤 사람인데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런 소리 하는데 그런데 팔리지 마십시오. 하루하루 행할 수 있으면 됩니다.
아는 것이 너무 많으면 병이 돼요.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무학이라는 말이죠. 없을 못 자, 배울 학 자. 전혀 배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가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움의 걸리지 않는 상태,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예요. 근데 대개의 경우, 특히 학문을 하는 사람들, 학자들은 그 아는 것에 걸려요. 누가 무슨 소리 하고 누가 이런 학설을 얘기했고 잔뜩 인용만 하지 자기 소리는 없어요. 제대로 여유가 되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돼요. 알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거기에 걸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적게 알면서도 많이 행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를 듣고도 열을 행할 수 있다면 그런 바로 듣고 알아차린 사람입니다.
자비인이 사랑이 하는 말은 지극히 추상적인 표현이에요. 갈피라는 것은 자비가 어떤 사랑의 표현입니다. 만나는 세상에게 한결같이 친절하는 거예요. 만나는 대상이 한결같이 친절해야 됩니다. 이게 바로 자비예요. 밝은 표정과 따뜻한 말씨로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신앙인들의 화두가 되어야 돼요. 화두라고 그러니까 거창하게 조주스님 모자라든가 뭐 이모가라든가 이거보다도 만나는 이웃에게 따스하게, 따스한 말씨로 또 친절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화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덜 주지 않도록 너무 거칠고 살벌하고 시끄럽고 어둡습니다. 한마디로 불친절해요. 누군가에게 친절히 대하면은 내 마음이 열려서 따뜻해져요. 이건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겁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내 마음이 열려서 따뜻해진다니까요. 저쪽과 이쪽에 마음의 문이 열려 가지고 서로 어떤 친밀감을 갖게 돼요.
이런 말을 할 때 저는 늘 부끄러워요. 반전하겠는데 일반적으로 절은 불친절해요. 그렇죠? 절에 전화를 한번 걸어보세요. 어느 날 불순일해요. 몰라요. 절에 있는 신도들도 스님들 닮아서 그렇게 할 거 없이 무슨 커다란 걸리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불신자다고요. 이건 제 경험이에요. 오래전 80년대 일이에요. 지금도 제가 이 자리에서 소개할 정도로 저한테는 큰 교훈이었어요.
제가 미국 그 캘리포니아 주도인 그라멘토 그쪽에 가면 이제 미국 쌀들 많이 생산하는 것 아닙니까? 거기지 무슨 일로 어떤 신도하고 같이 갔었는데 신도가 아는 집이에요. 서울에서 나가 있는 우리 기업체 책임자예요. 낯선 집은 잘 안 가는데 하도 같이 가자고 그래서 따라갔는데 갔더니 그 안주인은 아주 반갑게 맞이하는데 조금 있다 바깥 주위에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는데 중에 하나 있으니까 완전히 그냥 떫은 표정이라 영 본체만체하고 그러더라고요. 난 또 그런 대접 받기는 처음이에요. 처음에는 약간 불쾌하더라고. 자기 집은 손님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냥 돌이켰어요. 내가 불이라며 살면서 얼마나 모질게 불친절하게 됐겠느냐. 오는 사람한테 못 해주고 그 높은 데까지 두 번 올 수건을 덜어주게 하기 위해서 인정사정신이나 쫓아내는 경우가 많단 말이에요. 아, 내가 그렇게 불친절하게 대했던이 과보다 그것을 나한테 깨우쳐 주기 위해서 이 주인이 이렇게 연출을 하는구나. 이렇게 속으로 생각이. 처음에는 약간 불쾌하려고 했는데 제가 그렇게 반성을 했어요.
가령 누가 나한테 그렇게 이제 불친절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일찍이 남한테 친절을 베풀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메아리가 오는 겁니다. 저는 그때 그 좋은 경험을 생각 경험으로 삼아 가지고 잘 안되지만 그들은 그렇게 지금은 또 그런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친절이고 불지로 할 해당이 없습니다. 거기는 혼자 사니까 될 수 있으면 친절하게 대해야겠다는 그런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소와 참선하고 기도하는 일도 물론 좋아요. 우리가 해야 하겠지만은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맑힐 수 있어야 됩니다. 마음을 그때그때 열어야 돼요. 마음이 열려야 갈등과 대립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열려라 갈등과 대립이 사라져서 하나를 이룰 수 있어요. 이것은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집안에 어떤 갈등이 있다면 서로가 이제 남편과 아내 쌓이건 또 가족들 부모와 자식 사이건 마음이 여지지 않은 상태예요. 뭔가 뒤틀려 가지고 그냥 건성으로 지내는 거예요. 물에 기름도듯이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서 마음을 맑히는 그런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뭐 평상심이 시도다. 평상 일상적인 그런 그 마음가짐이 바로 도우다. 도어가 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 순간순간 우리 마음 침이 바로 도다. 뭐 이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을 한번 가상해 보십시오. 이건 가상이에요. 우리가 불치의 병에 걸려서 앞으로 3년 밖에 더 못 살 거라는 선거를 받았다고 한번 가상해 보십시오. 물론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 장수합니다. 사람은 그 누가 되었던 언젠가이 몸으로 한 번은 반드시 죽어요. 이 일만은 확실합니다. 여기가 없습니다. 내가 3년 후에 죽는다면 나는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과제가 새롭게 대두될 겁니다. 그날은 내 섣달 그믐날은 아무도 기획할 수가 없습니다. 3년보다 더 빨리 닥칠 수도 있고 몇회 더 연장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날이 와요. 내 섣달 그믐날이 온다니까요. 이것이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한계 상황입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에요. 과일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살아있는 목숨 속에 죽음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한계 상황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우리가 참으로 자각한다면 인생에서 무엇이 보다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인지 스스로 판단이 있을 겁니다. 어떤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본질적인 일이고 한눈팔지 않아도 좋을 일지 스스로 판단이 있을 겁니다. 언제 어디서 그날이 그날을 맞이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한 번뿐인 인생을 후회 없이 살 수 있어야 됩니다.
중음신이란 말을 떠도는 넋들을 중음신이라고 그래요. 잘못 살아온 그 후회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하는 넋설이에요. 그래서 위령계를 지낸다, 49일 지낸다 하는 것은 그렇게 중음신을 처음도 하는 그런 제주요. 저래서 하는게 지금이 자리에서 그런 중음신은 있을 수 있어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자기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쏠려다니는 사람, 이건 앞으로 중심이 될 연습을 지금 하는 거예요. 자기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쏠려 다니는 사람, 이건 중음신을 지금 예비, 예비 중음신들입니다.
인생을 부질없는 일로써 낭비하지 마십시오. 한 생애가 결코 길지 않아요. 저도 늙어가는가 봐요. 물론 들어가야죠. 요즘은 거의 그런 걸 느껴요. 아, 내가 이상 하지가 이제 무슨 일을 할까. 내가 그동안에 죽는다면서 여기저기 신세를 많이 졌는데 금생에 하지가기 전에 이런 신세를 어떻게 어떤 식으로든지 갖고 가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주님께 들어요. 그래서 인간의 의무일 겁니다. 인간의 의무예요.
뭐 세천이 온다고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벌써 12월이라. 입동 어제 협동 겨울의 문턱이에요. 잠깐 이라니까요. 옛말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엄만 남아 생을 따른다. 이런게 이제 불교 기초 교린 기초학과 침을 해보면 법문이 나와요. 만반장 불고요 유유업 수생이다. 무슨 소린가 하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엄만 남아 생을 따른다. 엄만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에게나 이웃에게 빛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이 세상에 온 것은 저마다 한몫을 하기 위해서 왔어요. 공연이 엄마 배 아프게 해가지고 튀어나온 것도 아닙니다. 자, 이 세상에 한몫을 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 대지와 공기와 햇볕과 바람, 달과 별, 나무와 강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어 왔습니까? 얼마나 많은 보살핌을 입어봤어요. 그것도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무상으로 흙과 바람과 물과 공기와 햇볕, 달, 별, 아무 데이터도 치르지 않고 무상으로 큰 은혜를 입어왔습니다. 한순간도 없이 우리가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아주 귀중한 존재들이에요. 그리고 부모 형제와 스승과 친구들을부터 또 얼마나 많은 우리가 은혜를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까? 살아있는 동안 이런 은혜에 대해서 보답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몸담아 사는이 우주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이 우주는 무언가 틀에 박혀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정된 공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변광대하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무변관 끝없이 넓다는 거예요.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은이 세상이 좋은 기운으로 채워져서 살기가 좋아져요. 도리의 어긋난 나쁜 짓을 하면은 그 나쁜 기운 때문에 또한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이 세상에 좋은 기운으로 채워져서 좋은 에너지로 채워져서 살기가 좋아집니다. 반대로 나쁜 짓을 하게 되면 그 나쁜 기운 때문에 우리가 살기 어려워져요.
돈 몇 푼 가지고 잘 사는 거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현실을 보십시오. 현재도 불안하고 미래도 불확실해요. 기상제회라든가 예측할 수 없는 돌발 사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와서 새삼스럽게 인류의 위기가 논의되고 있어요. 대망의 21세기에 와서 인류의 위기가 논의되고 있다고요. 그것도 세계적인 그 식량의 이대로 가면 몇 년 안되는 식량이 그걸 될 거라네요. 또 물과 공기의 위기, 또 자원과 에너지의 우리 생활과 직결된 그리고 환경과 조건들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위기의 본질은 결코 모자란 읽지 않습니다. 함부로 쏟아 함부로 쏟아 버린 낭비의 위기의 본질이 있어요. 이게 지구자원이 지금 모자라서 인류의 위기가 논의된 거 아닙니다. 지금껏 가지고도 충분하는데 지금 식으로 이렇게 탕진하기 시작하면 낭비하기 시작하면 고갈되고 만다는 거예요. 이것은 2, 30년 내에. 물론 이제 우리나라 같은 경우도 이제 선진국이 되면서 똑같은 소비 배산을 배우고 있는데 잘 산다는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소비를 하고 있잖아요. 전체 인류의 5분 일도 6분의 1도 못된 그런 소수들이 선진국들이 3분의 1을.
위기의 변질은 결코 모자람이 있지 않습니다. 낭비에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그동안 우리의 잘못 길들여진 이런 낭비를 줄여간다면 위기는 우리가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선 내 자신부터 우리 집안에서부터 우리 직장에서부터 시작해요. 시작해야 됩니다. 아이고, 나 하나쯤이야. 우리 집에서 이런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면 길이 없다고요. 남들은 다 그런다 하더라도 질서가 있어야 돼요. 그런 의지로서 살아간다면 우리가 능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 이런 상태대로 그냥 펑펑 쏟아 버리고 낭비하고 그런다면 길이 없다고요.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면은 미워하고 원망하는 그 어두운 기운이 내 자신을 감싸서 괴롭힙니다. 또 누군가를 사랑하고 따뜻하게 대하면 사람과 따뜻한 기운이 나를 감싸요. 나를 즐겁게 해요. 이와 같이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 업의 힘으로 음력으로 움직입니다.
제가 강원도로 간 뒤로는 신문도 안 보고 다른 방송 같은데 안 들어요. 들어가지는데 똑같은 소리고. 최근에 듣고 내가 깜짝 놀랐어요. 우리나라에서 그 기형아 출산율이 10%를 넘었다네요. 일본은 우리보다 더 심하대요. 그래서 새로 태어난 어린애들 열 사람 중에서 하나 둘은 기행하라는 거예요. 이건이 시대의 업보신이에요. 이것은 엄마들 산모들만 잘못이 아닙니다. 이 사회가 우리 환경이 신생아들이 온전하게 태어날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언가 이것은 암시에요. 이건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기왕 출산율은 근데 우리나라가 10% 넘어섰다 보도됐다는데 저는 최근 사람 그 자료를 받아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시 말해도 우리 미래 우리 자손들이라니까요. 미래의 우리들이에요.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가르칩니다. 법구경 맨 셔틀버리면 이런 개성이 나와요.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또 둘째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착한 마음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 마음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난다는 그겁니다. 마음이 근본이라는 거예요.
다시 법풍에서 이런 소리 합니다. 선한 일은 서둘러 행하고 악한 일에는 마음을 멀리하라. 선한 일을 하는데 게으르면 그의 마음은 벌써 악을 즐기고 있다. 선한 일은 서둘러 행하고 악한 일에는 마음을 멀리하라. 선한 일을 하는데 게으르면 그의 마음은 벌써 악을 즐기고 있다. 자금을 미루지 마세요. 그건 악을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겹겹으로 닦인 내 마음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마음이 열려야 이미 열려 있는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루어요. 내 마음이 활짝 열려야 이미 열린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룹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자신의 마음 상태를 스스로 살펴보세요. 내가 지금 마음이 열린 마음인지 닦인 마음인지 겹교로 다 깨가지고 건성으로 대화가 있는지 활짝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야 됩니다.
먼저 마음이 열려야 참선이고 기도하고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고는 제대로 안 됩니다. 제가 최근에 이제 나은 스님한테서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2년 전인가 자기 도반하고 싸웠대요. 뭐 무슨 일을 하다가 치고받고 하다가 이제 그때 뭐 이빨을 그냥 내 이빨을 두 개나 뽑은 놈이라고 말하지 선방에서 참선한 스님이에요. 그게 화두라고. 화두가 화두가 돼서 벌써 이미 지나간 과거사인데 내가 왜 스님들 이런 허물을 얘기하는가 하면 절에 다니는 신도도 마찬가지라니까. 절에 다니면서 기도하네 무슨 뭐 참사나 하면서도 마음이 그렇게 꼬여 가지고 참선 기도해봤자 아무 영감도 없습니다. 바르게 참선하고 기도하려고 우선 그 꼬인 마음부터 풀어야 돼요. 화해를 해야 돼요. 이웃과 같은 갈등이 있다면 그 짐부터 버려야 한다니까요.
내 마음이 열려야 거기에 된다. 부처님과 가르침이 부처님의 공덕이 나한테 그 전달이 됩니다. 바르게 기도하고 참선하고 염불하고 하기 전에 내 마음이 열린 마음인지 아닌지 혹은 이웃과 무슨 그 갈등이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점검을 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좀 개운치 않은데 그걸 풀어야 돼요.
무엇 때문에 절에 다닙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 다녀요? 한 생각이 우리를 착하게 더 만들고 악하게도 만듭니다. 그 한 생각이 선과 악의 갈림길입니다. 그러기 전에 항상 그 한 생각을 지켜보라는 거예요. 내 생각의 흐름을 지켜보라는 겁니다. 이것이 마음을 맑힌 기본적인 훈련이에요. 기본적인 정진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지켜보라는 것이에요. 스스로 물으라는 거예요.
내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내 이웃을 만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줘야 됩니다. 건성으로 듣지 마십시오. 이건 분명해요. 내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 혼자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나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된 존재이기 때문에 가족의 이론이고 그 조직체 이론이고 그 친구의 친구이기 때문에 그 남자의 아내고 그 여자의 남편이기 때문에 관계된 이웃이에요. 관계된 나라고 독립된 내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이 행복 먼저 내 이웃을 행복해 줘야 돼요. 내 마음이 활짝 열리려면 이웃의 마음이 열리도록 해줘야 한다니까요. 그래야 서로 메아리가 울리지요.
내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부문이나 불행은 언젠가 내가 남을 불행하게 만든 그 과보로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업의 율동이고 그 메아리에요.
끝으로 상부의 말씀이 있습니다. 절 익은 계획은 건성으로 하지 마세요. 습관적으로 다니지 마십시오. 종교는 습관성 의약품이 아닙니다. 제정신 똑바로 차리고 전이나 교회에 다니십시오. 진짜 절은 진짜 교회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어요. 그 마음속에서 친절과 사랑의 꽃을 피우십시오. 그 친절과 사랑으로 인해서 삶이 충만해집니다. 눈에 보이는 절이나 교회는 여러분들 그 마음속에 절로 그 마음속에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그 도리를 분명히 하십시오.
우리가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루에 한 가지라도 착한 일로써 남을 도울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날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삶에 가치와 의미가 실린 것입니다. 하찮은 악업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의 불티가 온 산을 다 태워요. 지난 봄에 강원도 산불을 보세요. 논두렁 좀 태우다가 바람이 부니까 온 산을 태우잖아요. 하나의 하찮은 아급이라고 해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또 조그만 선행 착한 일이라고 해서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겁니다. 방울 한 방울 한 방울 방울 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우고 강을 이루어요.
1959년 제가 얼마 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건데요. 1959년 티벳에서 80이 되면 노스님이 중국의 그 침략을 피해 가지고 히말라야를 넘어서 인도의 온 일이 있습니다. 80 먹은 노스님이 그 설산을 넘어서 인도로 비난해 왔어요. 이때 그 서방 기자들이 이제 깜짝 놀래가지고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흥분한 히말라야 설사를 넘어서 올 수 있었습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그 노스님 대답이에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우리가 사는 일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순간순간 한걸음 한걸음네 드리면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내딛느냐에 있습니다. 여기 오신 여러분들 저마다 지금 어디를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하루하루를 소모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오늘이 자리에서 만난 인연으로 우리들의 삶이 한층 마음 맑힌 일로 마음을 활짝 여는 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오늘 제 말씀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