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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말씀] 육조단경,무념 무상 무주 불가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 40년 설법의 핵심 | 불교 명상 | 마음공부 | 석가모니 말씀

불교믿음1:36:38

Transcription

오늘 밤 여러분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 합니다. 1300년 전 중국 남쪽 변방에 가난한 나무꾼이 살고 있었으며 그는 글자를 한 자도 읽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모시며 나무를 해다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중국 불교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니 그가 바로 육조 해능 대사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일까? 글자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있었을까? 오늘 밤 그 비밀이 여러분께 전해집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나는 배운 것이 없어서 안 된다고 느끼셨을 수 있고, 나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낮추셨을 수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뒤쳐진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우셨던 적도 있으셨을 것이며,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해 오늘 밤 이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 안에는 부처와 똑같은 성품이 빛나고 있으니, 다만 그것을 모르고 계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이 어떤 상태에 계시든 상관없으며, 학력이 높든 낮든 괜찮고, 나이가 많든 적든 괜찮습니다. 그저 편안히 누워 계시면 되니, 오늘 밤만큼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은 해능 대사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입니다. 그런데 이 경전에는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으니, 부처님이 아닌 분의 말씀에 경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경전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해능 대사의 가르침이 깊고 넓다는 뜻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버금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경전 안에는 깨달음의 비밀이 담겨 있었고, 수행의 핵심이 담겨 있었으며, 삶을 바꾸는 지혜가 고스란이 담겨 있었습니다. 130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 경전 앞에서 눈을 떴으니, 막혀 있던 마음이 뚫리고 어두웠던 길이 환해지는 경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분들이 어렵게 생각하시며, 수십 년을 수행해야 하고 경전을 줄줄 외워야 한다고 여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은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도노라 부릅니다. 점점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눈이 뜨이는 것이며, 마치 캄캄한 방에 불을 켜는 것과 같습니다. 불을 켜기 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불을 켜는 순간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니, 천년 동안 어두웠던 방이라 해도 불을 켜면 단박에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오랜 세월 번뇌에 가려져 있었다 하더라도 눈을 뜨는 순간 단박에 밝아지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이미 부처가 있습니다. 이것이 육조단경의 핵심 가르침이며, 견성성불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 본성을 보면 그것이 곧 부처라는 뜻이니, 부처를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처가 계시며, 다만 번뇌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에 가린 해를 떠올려 보십시오. 구름이 해를 가렸다고 해서 해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으니, 다만 구름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구름이 거치면 해가 다시 나타나는데, 사실 해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불성도 이와 같으니, 번뇌라는 구름에 가려져 있을 뿐부터 빛나고 있었고 지금도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해능 대사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이 진리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638년 영남 지방에서 태어나셨으니, 당시 영남은 중국의 변방이었고 오랑캐의 땅이라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해능 대사가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단둘이 남겨져 몹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나무를 해다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셨고, 학교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 글을 배우지 못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장 낮은 곳에 계셨던 것이니, 신분도 낮고 학식도 없으며 재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분이 중국 선종의 6대 조사가 되셨으니, 세상의 기준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24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여느 때처럼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러 가셨는데, 나무를 사간 손님의 집 앞을 지나다가 누군가 경전 읽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금강경의 한 구절이었으니, "응무소주의 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한 구절을 듣는 순간 해능 대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열렸습니다. 마치 먼 곳에서 고향의 노래를 듣는 것 같았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을 문득 떠올린 것 같았으며, 어두운 방에 빛이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글자를 몰랐기에 경전을 읽지 못하셨고, 스승에게 배운 적도 없으셨으며, 절에서 수행한 적도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한 구절을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열린 것이니, 깨달음이 글자에 있지 않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조단경이 전하는 첫 번째 희망이며, 배움이 없어도 깨달을 수 있고 어떤 조건도 깨달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그 경전을 읽던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금강경이라 하며, 기주 황매산에 계신 오조 홍인 대사께서 늘 이 경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해능 대사께서는 큰 결심을 하셨으니, 황매산으로 가서 홍인 대사를 뵙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생계를 마련하고 황매산을 향해 길을 떠나셨는데, 영남에서 황매산까지는 천리가 넘는 길이었습니다. 험한 산을 넘고 거센 강을 건너 마침내 황매산에 도착하셨으니, 진리를 향한 간절함이 그 발걸음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홍인 대사를 뵙고 큰 절을 올린 후 해능 대사께서 여쭈었습니다. "저는 영남에서 온 백성이옵니다. 부처가 되고자 하여 왔사옵니다." 홍인 대사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대는 영남 사람이니 오랑캐로다.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이 물음에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남쪽과 북쪽이 있사오나, 불성에는 어찌 남북이 있겠사옵니까?" 이 대답을 들은 홍인 대사께서는 속으로 크게 놀라셨습니다. 글자도 모르는 시골 청년이 불성의 평등함을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시고 방학관으로 가서 일이나 하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해능 대사께서는 방학관에서 쌀을 찧고 나무를 패는 일을 하게 되셨습니다. 몸이 가벼워 디딜 방아를 밟을 때 허리에 돌을 매달아야 하였고, 여덟 달 동안 이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처럼 보였을 것이나, 해능 대사께서는 이 속에서도 마음 공부를 놓지 않으셨으니, 일이 곧 수행이었고 방학간이 곧 도량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가 있으나, 해능 대사께서는 보여 주셨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마음만 바로 하면 그곳이 수행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특별한 곳에 가야만 수행이 되는 것이 아니며, 지금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에서 마음을 닦을 수 있으니, 이것이 육조단경이 전하는 희망입니다.

오늘 밤 이 시간이 여러분께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기셨던 분들께는 희망이 되기를 바라며, 깨달음이 멀게만 느껴지셨던 분들께는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해능 대사의 삶이 보여주듯이, 누구나 깨달을 수 있으니 여러분도 예외가 아닙니다. 편안히 누워 계십시오. 깊이 숨을 들이시고 내쉬어 보시며 마음의 긴장을 내려놓으십시오. 오늘 하루 겪으셨던 일들을 잠시 잊으시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직 해능 대사의 가르침에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육조단경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1300년 전 한 나무꾼이 걸었던 깨달음의 길을 이제 여러분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태어나신 곳은 영남 신주였으니, 지금의 광동성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638년 당나라 태종 시절의 일이었으며, 당시 영남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서 문화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로 여겨지던 땅이었습니다. 중원 사람들은 이곳을 오랑캐의 땅이라 부르며 낮추어 보았고,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 또한 천시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해능 대사의 아버지 노행도는 본래 범양 사람으로서 벼슬을 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죄를 얻어 영남으로 유배되셨으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신 것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새 삶을 시작해야 하였고, 그곳에서 이씨 부인을 만나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고달팠으나, 두 분은 서로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셨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태어나시던 날 밤에 신비로운 일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으며, 밤새도록 그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새벽녘에는 두 스님이 찾아와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셨으니, 해능이라 하였습니다. '해'는 중생에게 법을 베푸는 것이요, '능'은 불사를 능히 해낸다는 뜻이라 하셨습니다. 이름 속에 이미 장차 이루실 일이 담겨 있었던 셈이니, 참으로 깊은 인연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세 살이 되시던 해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어린 나이에 가장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홀로 남으신 어머니께서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의 집으로 이사하셨고, 그곳에서 힘겹게 살아가셨습니다. 집안은 몹이 가난하였으며, 끼니를 잊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어린 나이부터 산에 가서 나무를 하셨습니다. 아침 일찍 산에 올라 나무를 베고 저녁때가 되어 시장에 내다 파셨으니, 그 돈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셨습니다. 어린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셨으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셨고, 오직 어머니를 모시는 효심 하나로 하루하루를 견디셨습니다. 학교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 글을 배우지 못하셨으며,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급한 삶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변방의 가난한 나무꾼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고, 배움도 없고 재산도 없으며 신분도 낮았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니, 해능 대사의 마음속에는 범상치 않은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2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나무를 하고 시장에 파는 일상이 반복되었으며,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24살이 되던 해에 해능 대사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일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참으로 작은 우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나무를 해서 시장에 가져가 팔았는데, 나무를 사간 손님이 있었습니다. 그 손님의 집까지 나무를 져다주고 돈을 받아 나오는 길이었으니,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안에서 누군가 경전을 읽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 한 구절이 귀전을 스치는 순간, 해능 대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 있었고,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마침내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림이 일어났으며, 해능 대사께서는 그 자리에 멈춰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셨습니다.

경전 읽기를 마친 그 사람에게 해능 대사께서 다가가 여쭈었습니다. "지금 읽으신 것이 무슨 경전이며, 어디서 얻으셨나이까?" 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금강경이라 하는 경전이요. 기주 황매산에 계신 오조 홍인 대사께서 이 경전을 지니고 읽도록 권하시니, 누구든 금강경을 받아 지니면 견성불하리라 하셨소." 견성불이란 자기 본성을 보면 곧 부처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해능 대사께서는 가슴이 뛰기 시작하셨으니, 황매산으로 가서 홍인 대사를 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으니, 효심 깊은 해능 대사께서는 어머니 생각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셨습니다. 황매산까지는 천리가 넘는 먼 길이었고,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여정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해능 대사의 사정을 듣고는 은 열량을 내어주며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어머니를 모시게 하고, 그대는 황매산으로 가시오." 하였습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선뜻 도움을 주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그 돈으로 어머니의 의식주를 마련하고 이웃에게 어머니를 부탁드린 후, 마침내 황매산을 향해 길을 떠나셨습니다. 영남에서 황매산까지는 천리가 넘는 거리였습니다. 험한 산을 넘어야 하였고, 거센 강을 건너야 하였으며, 한 달이 넘게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께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으니, 마음속에 금강경의 그 구절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향한 갈망이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였으며, 마침내 황매산 동선사에 도착하셨습니다.

오조 홍인 대사를 뵙고 큰 절을 올린 후 해능 대사께서 여쭈었습니다. "저는 영남 신주에서 온 백성이옵니다. 오직 부처가 되고자 할뿐 다른 것은 구하지 않나이다." 홍인 대사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대는 영남 사람이라 하였으니, 오랑캐 땅에서 온 것이로다. 오랑캐가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당시 중원 사람들은 영남을 야만의 땅으로 여겼습니다. 그곳 사람들을 오랑캐라 불렀으니, 홍인 대사의 물음에는 시험하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남쪽과 북쪽이 있사오나, 불성에는 어찌 남북이 있겠사옵니까?" 이 대답을 들은 홍인 대사께서는 속으로 크게 놀라셨습니다. 글자도 모르는 시골 나무꾼이 불성의 평등함을 단번에 꿰뚫어보고 있었으니, 범상치 않은 근기임을 알아보셨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시고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오랑캐가 근성이 날카롭구나. 더 말하지 말고 방학관으로 가서 일이나 하거라."

이렇게 하여 해능 대사께서는 방학관에서 일하는 행자가 되셨습니다. 법을 배우러 천 리를 걸어왔건만, 경전 하나 배우지 못하고 쌀을 찧는 일을 맡게 되신 것이며,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허탕을 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께서는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맡은 일을 하셨으니, 낮에는 쌀을 찧고 밤에도 일손을 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몸이 가벼워 디딜 방아를 밟을 힘이 부족하였으므로 허리에 돌을 매달아 무게를 더하셨고, 그렇게 여덟 달을 보내셨습니다. 방학관에서의 여덟 달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쌀을 찧는 일을 하였으나, 안으로는 마음을 닦고 계셨으니, 일이 곧 수행이었고 방학간이 곧 도량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하는 일이 하찮게 느껴지고 내 자리가 보잘것 없어 보일 때도 있으실 것이며, 남들은 높은 곳에서 빛나는데 나만 낮은 곳에서 허덕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께서 보여 주신 것처럼, 어떤 자리에 있든 마음만 바로 하면 그곳이 수행처가 되니, 중요한 것은 바깥의 조건이 아니라 안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글자를 모르던 나무꾼이 천 리 길을 걸어 스승을 찾아왔고, 법문 한마디 듣지 못하고 방학관에서 일하면서도 마음 공부를 놓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구도자의 자세였으니, 해능 대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해능 대사와 홍인 대사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방학관에서 묵묵히 일하고 계시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홍인 대사께서 아무도 모르게 방학관을 찾아오셨으니, 해능 대사께서 쌀을 찧고 계신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셨습니다. 허리에 돌을 매달고 온 힘을 다해 디딜 방아를 밟는 모습이었으며, 그 눈빛은 맑고 고요하였습니다. 홍인 대사께서 쌀이 다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시기를, "쌀은 이미 이것싸오나 아직 키질을 하지 못하였나이다." 하셨습니다. 이 대화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쌀이 익었다는 것은 깨달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였고, 키질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스승의 인가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었습니다. 홍인 대사께서는 해능 대사의 대답을 들으시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홍인 대사께서 지팡이로 방앗간을 세 번 두드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씀 없이 돌아가셨으니,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께서는 그 뜻을 단번에 알아차리셨습니다. 세 번 두드린 것은 삼경, 즉 세 번째 시간에 찾아오라는 암호였던 것입니다.

그날 밤 삼경이 되자 해능 대사께서는 몰래 홍인 대사의 방장실을 찾아갔습니다. 홍인 대사께서는 이미 기다리고 계셨으며, 방문을 닫고 아무도 엿듣지 못하게 하신 후 금강경을 설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홍인 대사께서 금강경의 깊은 뜻을 하나하나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귀를 기울여 들으셨으니,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글자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곧바로 뜻을 깨달으실 수 있었습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 구절에 이르렀을 때 해능 대사께서는 크게 깨달으셨습니다. 시장에서 처음 들었던 바로 그 구절이었으니, 이제야 그 깊은 뜻이 온전히 열린 것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감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 알았으까?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 알았으까? 어찌 자성이 본래 부족함이 없는 줄 알았으까?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함이 없는 줄 알았으까? 어찌 자성이 능히 만법을 낳는 줄 알았으까?" 이것이 바로 견성이었습니다. 자기 본래의 성품을 보았으니, 그 성품이 본래 깨끗하고 생멸이 없으며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흔들림이 없으며 모든 법을 낳는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었습니다.

홍인 대사께서는 해능 대사의 깨달음을 확인하시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한편 동선사에는 천여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로 알려진 사람이 바로 신수상자였으니, 그는 홍인 대사 문화에서 수십 년을 수행한 분이셨습니다. 박식이 깊었고 계율을 철저히 지켰으며, 모든 제자들이 그를 존경하였습니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뒷날 홍인 대사의 법을 이을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당연히 신수 상자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였으니, 그만큼 신수 상자의 덕망과 학식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방학관에서 쌀을 찧는 남쪽 오랑캐 행자를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인 대사께서 대중을 모아놓고 중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은 큰일이니라. 너희들은 온종일 복만 구하고 생사의 바다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 자성이 미혹하면 복으로 어찌 구제받겠느냐? 각자 돌아가서 지혜를 살펴볼지니, 청정한 마음을 보아 계송을 지어오라. 내가 보고 대의를 깨친 자가 있으면 의발을 전하여 육대 조사로 삼으리라."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습니다. 의발을 전한다는 것은 법을 이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었으니, 이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천여 명의 제자 가운데 누가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인지 모두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자들은 계송을 짓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니, 그 사람은 바로 신수상자였습니다. 제자들은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계송을 짓는다 한들 신수상자를 이길 수 없으니 무엇하러 고생하겠는가? 앞으로 신수 스님을 따르면 그만이다."

이렇게 하여 아무도 계송을 지어 올리지 않았으며, 모든 시선은 신수상자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신수상자 또한 자신이 계송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밤낮으로 고민하며 계송을 짓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수상자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만약 계송을 짓지 않으면 스승님께서 내 경지를 어찌 아시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계송을 지어 올리자니 법을 구하는 마음인지 조사의 자리를 탐하는 마음인지 스스로도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신수상자께서는 며칠을 고민하셨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뇌로 밤을 지세우기도 하였으며, 13번이나 계송을 지어 스승님 방 앞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온몸에 땀이 흐르고 마음이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신수상자께서 결심을 내리셨습니다. 스승님께 직접 드리지는 못하겠으나, 남쪽 행랑 벽에 계송을 써 놓기로 하신 것이었습니다. 만약 스승님께서 보시고 괜찮다 하시면 나아가 절을 하고, 그렇지 않다 하시면 헛되이 산중에서 세월만 보낸 것이니 무슨 면목으로 다른 사람들의 예경을 받겠는가 하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날 밤 삼경에 신수상자께서 아무도 모르게 남쪽 행랑으로 가셨습니다. 손에는 촛불을 들고 있었으며, 벽 앞에 서서 계송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이것이 신수상자의 계송이었습니다. 수행자의 몸은 깨달음의 나무와 같고,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끊임없이 닦고 또 닦아서 번뇌의 먼지가 묻지 않게 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점수의 가르침이 담겨 있었습니다. 계송을 쓴 후 신수 상자께서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도 그가 계송을 썼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며, 신수상자께서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셨습니다. 스승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실지 마음이 조마조마했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자 홍인 대사께서 남쪽 행랑에 오셨습니다. 원래 그곳에 그림을 그리려고 화공을 부르셨던 것인데, 벽에 쓰인 계송을 발견하시고는 화공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림은 그리지 않아도 되겠다. 이 계송을 두고 대중들이 읽고 외우게 하라. 이 계송대로 수행하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 칭찬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계송이라 생각하였으며, 밤낮으로 그 계송을 외우고 다녔습니다. 신수상자께서는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으로 기대를 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홍인 대사께서 몰래 신수 상자를 부르셨습니다. 방 안에 들어온 신수상자에게 홍인 대사께서 물으셨습니다. "계송이 내가 지은 것이냐?" 신수상자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예. 제가 지어싸옵니다. 감히 조사의 자리를 바라는 것은 아니오나, 스승님께서 자비로이 살펴보시어 제게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지 없는지 말씀해 주시옵소서."

홍인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은 이 계송은 아직 본성을 보지 못한 것이다. 문 앞에 이르기는 하였으나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였느니라. 이런 견해로는 무상보리를 얻을 수 없다. 무상보리를 얻으려면 마땅히 언화하여 자기 본심을 알아볼지니, 성품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음을 보아야 하느니라. 다시 가서 계송을 지어오라. 본성을 보았다면 의발을 전하리라." 신수상자께서는 물러나와 다시 계송을 지으려 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짓지 못하셨습니다. 마음이 황홀하여 걸음이 편치 않았고, 꿈속에서도 괴로워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수상자의 계송은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지런히 닦아 번뇌를 없애라는 가르침은 훌륭한 수행법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인 대사께서는 더 깊은 경지를 원하셨으니, 본래 깨끗한 성품을 직접 보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이제 방학관에서 쌀을 찧던 행자가 이 소식을 듣게 되니,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신수상자의 계송이 남쪽 행랑 벽에 걸린 후 며칠이 지났습니다. 온 절의 제자들이 그 계송을 외우고 다녔으며, 누구나 그 계송을 칭찬하였습니다. 방학관에서 쌀을 찧던 해능 대사께서도 제자들이 계송을 외우는 소리를 들으셨으니, 무슨 일인지 궁금하셨습니다. 마침 한 동자승이 방학관 앞을 지나가며 계송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그 동자승에게 여쭈었으니, 무엇을 외우고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동자승이 대답하기를, 행자는 모르시겠지만 스승님께서 대중에게 계송을 지어 오라 하셨는데, 신수 상자께서 계송을 지어 벽에 써 놓으셨으며, 스승님께서 크게 칭찬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그 계송의 내용을 물으셨습니다. 동자승이 계송을 읊어 주었으니,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그 계송을 듣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이 계송은 아직 본성을 보지 못한 것이로다. 나도 계송을 지어보리라."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글자를 모르셨으니 직접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자승에게 부탁하셨으니, 나를 그 계송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습니다. 동자승이 해능 대사를 남쪽 행랑으로 안내하였고, 해능 대사께서는 신수상자의 계송이 쓰인 벽 앞에서 절을 올리셨습니다.

그때 마침 강주 별가라는 관리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그에게 다가가 말씀하시기를, "저도 계송이 하나 있사오니, 글자를 모르는 까닭에 대신 써 주시겠나이까?" 하고 청하셨습니다. 별가가 놀라며 말하였습니다. "그대도 계송을 지었단 말이요? 이는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상보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낮은 사람이라 하여 업신여기지 마시오. 가장 낮은 사람에게 가장 높은 지혜가 있을 수 있고, 가장 높은 사람에게 지혜가 묻혀 있을 수도 있나이다." 별가가 그 말에 감탄하여 계송을 대신 써 주기로 하였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계송을 으셨으니, 별가가 그대로 벽에 써내려갔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가 묻으리요?" 이것이 바로 해능 대사의 계송이었습니다. 신수상자의 계송이 닦고 또 닦아 먼지를 없애라 하였다면, 해능 대사의 계송은 본래 먼지가 없는데 무엇을 닦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돈오와 점수의 차이였으니, 점진적으로 닦아 나가는 것과 본래 깨끗함을 직접 보는 것의 차이였습니다. 계송이 벽에 쓰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방학관에서 쌀이나 찧던 행자가 이런 계송을 지었다니 믿기 어려웠으며,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온 절 안에 퍼져나갔고, 모두가 남쪽 행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홍인 대사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시고 남쪽 행랑으로 오셨습니다. 해능 대사의 계송을 보시고는 속으로 크게 기뻐하셨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발을 벗어 계송을 지워 버리시며 말씀하셨으니, "이것도 역시 본성을 보지 못하였다." 하셨습니다. 왜 홍인 대사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해능 대사의 계송이 신수상자의 계송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지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여 명의 제자들이 모두 신수상자를 따르고 있었으니, 갑자기 방학간 행자가 더 뛰어나다고 하면 시기와 질투가 생겨 해능 대사에게 해를 끼칠 수 있었습니다. 홍인 대사께서는 해능 대사를 보호하시면서도 법을 전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겉으로는 계송을 지웠으나, 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내리셨으니, 해능 대사야말로 진정한 법기라는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그다음 날 홍인 대사께서 아무도 모르게 방학관으로 오셨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허리에 돌을 매달고 쌀을 찧고 계셨으니, 홍인 대사께서 그 모습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도를 구하는 사람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니라." 그리고는 지팡이로 방앗간을 세 번 두드리시고 가셨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그 뜻을 알아차리셨으니, 삼경에 방장실로 오라는 암호였습니다. 그날 밤 삼경이 되자 해능 대사께서는 몰래 홍인 대사의 방장실을 찾아갔습니다. 홍인 대사께서는 가사로 창문을 가리시어 밖에서 보이지 않게 하신 후 금강경을 설해 주셨습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구절에 이르렀을 때 해능 대사께서는 크게 깨달으셨으니, 일체 만법이 자성을 떠나지 않음을 깨치셨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감탄하여 여쭈었습니다. "어찌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 알았으까?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 알았으까? 어찌 자성이 본래 구족한 줄 알았으까? 어찌 자성이 본래 동요함이 없는 줄 알았으까? 어찌 자성이 능히 만법을 낳는 줄 알았으까?"

홍인 대사께서는 해능 대사의 깨달음을 확인하시고 의발을 전하셨습니다. 의발이란 조사의 가사와 바로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받는다는 것은 정법을 이었다는 증표였습니다. 달마대사로부터 시작하여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으로 이어져 온 법이 이제 해능 대사에게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홍인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제 육대 조사가 되었느니라. 이 의발을 잘 보호하여 법을 전하되 끊어지지 않게 하라. 그러나 지금 당장 떠나야 하느니라. 내가 의발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해치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빨리 남쪽으로 가거라."

홍인 대사께서는 해능 대사를 직접 구강역까지 배웅하셨습니다. 밤중에 몰래 길을 나서셨으니, 아무도 두 분이 떠나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구강역에 이르러 홍인 대사께서 해능 대사를 배에 태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어디로 가야 하오리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홍인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회에서 멈추고, 몽에서 숨어라." 이 말씀은 회직과 사회 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니, 그곳에서 때를 기다리라는 뜻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배에 오르자 홍인 대사께서 직접 노를 저어 주셨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승님께서는 앉으시고, 제가 노를 적겠나이다." 하셨습니다. 홍인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땅히 내가 너를 건네 주어야 하느니라."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미혹할 때는 스승이 건네 주시고, 깨달은 후에는 스스로 건너나이다. 건넨다는 것은 같으나 그 쓰임은 같지 않사옵니다. 해능은 변방에서 태어나 말에 사투리가 있사오나, 스승님께 법을 전해받았으니 이제 스스로 깨달았사옵니다. 마땅히 자기 성품으로 스스로 건너야 하옵니다."

홍인 대사께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다, 그러하니라. 이후로 불법이 너로 인하여 크게 행해지리라. 내가 떠난 후 3년이 지나면 내가 세상을 떠나리니, 너는 잘 가거라. 힘써 남쪽으로 가되 너무 빨리 설법하지 말라. 불법은 일어나기 어려우니라." 여러분,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 이별 장면입니다. 밤중에 강가에서 홍인 대사께서 직접 노를 저어 제자를 건네 주시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별의 슬픔보다 법이 이어진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 두 분 모두 담담한 얼굴로 헤어지셨습니다. 배가 강을 건너는 동안 홍인 대사께서는 강에 서서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셨습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마도 법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리라는 확신과 함께 깊은 안도감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이렇게 의발을 받아 육대 조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험난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뒤를 쫓아오는 추격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해능 대사께서 어떻게 추격을 피하고 숨어지내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홍인 대사와 헤어진 후 밤새 걸음을 재촉하셨습니다. 의발을 품에 안고 남쪽을 향해 걸으셨으니, 뒤를 돌아볼 결도 없었습니다. 새벽이 되어 동이 트기 시작하였고, 산길은 험하고 가팔랐습니다. 한편 동선사에서는 아침이 되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홍인 대사께서 의발을 남쪽 오랑캐 행자에게 전하셨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제자들이 크게 동요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당장 뒤를 쫓아가서 의발을 빼앗아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추격에 나선 사람이 바로 해명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사품 장군 출신으로서 출가하여 스님이 된 분이었으니, 성품이 거칠고 용맹하였습니다. 그는 수백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해능 대사의 뒤를 쫓았으며, 반드시 의발을 되찾아오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추격자들의 발걸음이 더 빨랐으니, 대유령이라는 고개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습니다. 해명이 홀로 앞서 달려오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뒤쳐지고 그만 먼저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의발을 바위 위에 올려 놓으시고 말씀하셨으니, "이 옷은 믿음의 표시일 뿐이거늘, 힘으로 다툴 것이 있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풀숲 속에 몸을 숨기셨습니다.

해명이 그곳에 도착하여 바위 위에 의발을 발견하였습니다. 기뻐하며 손을 뻗어 의발을 집어들려 하였으나,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의발이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 마치 산처럼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습니다. 해명이 온 힘을 다해 들어올리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으며, 두 손으로 잡아당겨도 의발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해명의 마음에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로다. 내가 잘못 생각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온몸이 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명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행자여, 나는 옷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법을 위해 왔나이다. 원컨대 법을 설해 주시옵소서."

해능 대사께서 풀숲에서 나오시어 바위 위에 단정히 앉으셨습니다. 해명이 절을 올리고 가르침을 청하였으니,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법을 위해 왔다 하였으니, 모든 인연을 놓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라. 내가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해명이 한참 동안 마음을 고요히 하였습니다. 모든 생각을 놓고 오직 가르침을 기다렸으니, 그 모습이 참으로 간절하였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때 어떤 것이 명상자의 본래 면목이냐?" 이 한마디에 해명이 크게 깨달았습니다. 선과 악을 나누기 이전의 자리,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본래 마음을 단번에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온몸에 땀이 흐르고 눈물이 솟아났으며, 해명이 감격하여 말하였습니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면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사옵니다. 제가 지금 행자 앞에서 본래 면목을 보았나이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그러하다면, 그대와 나는 함께 황매산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니라." 해명이 또 여쭈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황매산에 있었으나, 실로 자기 면목을 보지 못하였사옵니다. 이제 가르침을 받들어 마치 물을 마시고 스스로 차고 따뜻함을 아는 것과 같아오니, 지금 행자께서 바로 저의 스승이시옵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와 그대가 함께 황매산을 스승으로 삼을 것이니 잘 스스로 보호하라." 해명이 또 여쭈었습니다. "해명이 이제 어디로 가야 하오릴까?"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원(원주)에 이르거든 머무르고, 몽(몽주)에 이르거든 숨어라." 해명이 절을 하고 떠나갔습니다. 산을 내려가 뒤따라오던 무리들을 만났으니, 해명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저 위에 올라가 보았으나 자취가 없더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추격하던 무리들이 모두 돌아갔으며, 해능 대사께서는 위기를 넘기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에서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게 됩니다. 의발을 빼앗으려 칼을 품고 달려온 사람이 단 한 마디의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고 제자가 되어 돌아가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법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해명은 본래 거친 성품의 무인이었으나, 그 순간 마음의 눈이 열렸으며, 본래 면목을 보는 순간 모든 분노와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늘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이 사람은 착하고 저 사람은 악하다 하며 끊임없이 분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별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본래 면목이며 우리의 참된 성품입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위기를 넘긴 후에도 계속 남쪽으로 향하셨습니다. 홍인 대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회직과 사회 지역으로 가셨으니, 그곳에서 사냥꾼들 틈에 숨어 지내셨습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때를 기다리셨으며, 사냥꾼들이 잡아온 짐승들의 그물을 지켜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냥꾼들이 밥을 지을 때면 해능 대사께서는 채소를 고기 삼은 솥에 넣어 드셨습니다. 사람들이 물으면, "저는 고기 옆에 삶은 최소만 먹나이다." 하고 대답하셨으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수행자의 계율을 지키셨습니다. 이렇게 무려 16년의 세월을 숨어 지내셨으니, 그 인내와 기다림이 얼마나 깊었는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해능 대사께서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을 숨어 지내셨을까요? 홍인 대사께서 당부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바로 설법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스스로의 깨달음을 더욱 익히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해서 바로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숨어서 더욱 갈고 닦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해능 대사께서 보여 주신 삶의 지혜였습니다.

1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해능 대사께서는 무엇을 하셨을까요? 겉으로는 사냥꾼들과 함께 지내며 그물을 지키셨으나, 안으로는 끊임없이 마음을 살피고 깨달음을 익히셨습니다. 매 순간이 수행이었고 매 순간이 공부였으니,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의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해능 대사께서는 세상에 나오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광주 법성사라는 절로 가셨으니, 그곳에서 인종 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바람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두 스님이 논쟁을 버리고 있었으니,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였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 하였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나아가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 오직 그대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니라."

이 한마디에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궁금해하였으니, 인종 법사가 해능 대사를 윗자리로 모시고 깊은 뜻을 물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황매산의 법을 이은 육대 조사임을 밝히셨으며, 의발을 보여 주시어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16년의 은둔이 끝나고 해능 대사께서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인종 법사가 직접 삭발을 해 드렸으니, 이때 비로소 정식으로 출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후 조개산 보림사에 머무시며 40여 년간 법을 설하셨으니, 수많은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이제 해능 대사께서 설하신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인종 법사로부터 삭발을 받으신 후 정식으로 승려가 되셨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으신 때의 일이었으니, 24살에 황매산으로 떠나신 지 16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였습니다. 그동안 사냥꾼들 틈에 숨어 지내시며 때를 기다리셨고, 이제 비로소 세상에 법을 펼치실 때가 된 것이었습니다. 인종 법사께서 해능 대사의 깨달음을 확인하시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직접 삭발을 해 드린 후 제자의 예를 갖추어 가르침을 청하셨으니, 스승이 제자가 되고 제자가 스승이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 앞에서의 겸손이었으며, 깨달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법성사에 머무시다가 이음에 조개산 보림사로 가셨습니다. 보림사는 광동성 소주에 있는 절이었으니, 이곳에서 40여 년간 법을 설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나, 점차 소문이 퍼져나갔고 멀리서도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해능 대사의 가르침은 기존의 불교와 달랐습니다. 당시 북방에서는 신수 대사가 점수의 가르침을 펼치고 계셨으니, 끊임없이 닦고 또 닦아 점차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께서는 도노를 말씀하셨으니, 단번에 자기 본성을 보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단번에 깨달을 수 있습니까? 수행도 하지 않고 어찌 부처가 됩니까?"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본래 부처인데 무엇을 더 수행하겠느냐? 자기 성품이 본래 깨끗한데 무엇을 닦겠느냐? 다만 미혹하여 모를 뿐이니, 깨치면 곧 부처니라."

이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수행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본래 부처라는 말씀은 충격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으니, 마치 오랜 갈증이 단비를 만난 것과 같았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신분과 지위를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높은 벼슬아치가 찾아와도 똑같이 대하셨고, 가난한 농부가 찾아와도 똑같이 대하셨습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법을 설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불성의 차별이 없다는 가르침의 실천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찾아와 여쭈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묻는 그대가 부처이라." 스님이 다시 "무엇이 법입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의심하는 그 마음이 법이니라." 스님이 또 "무엇이 승가입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지금 내 말을 듣는 그것이 승간이라." 이처럼 해능 대사의 가르침은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를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마음에서 찾으라 하셨으며, 진리를 경전에서만 찾지 말고 자기 삶에서 찾으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수십 명이었던 것이 수백 명이 되었고, 나중에는 천 명이 넘는 제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으니, 훗날 각지로 흩어져 선종을 크게 일으키게 됩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정해진 의식이나 절차보다 마음의 깨달음을 중요하게 여기셨으며, 경전을 외우는 것보다 경전의 뜻을 깨닫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글자에 집착하면 오히려 진리에서 멀어진다고 하셨으니, 다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어느 날 법달이라는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법화경을 3천번이나 읽은 사람이었으니,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해능 대사를 뵙고 저를 올렸으나 머리가 땅에 닿지 않았으니, 교만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그대는 무엇을 익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법달이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법화경을 3천번 읽었나이다."

능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만 번을 읽었다 하여도 경의 뜻을 알아 스스로 교만하지 않았다면 나와 함께 도를 행할 만하거니, 지금 그대는 헛대히 공을 자랑하고 허물을 알지 못하는구나. 경을 읽어 무엇하겠느냐?"

법달이 이 말씀을 듣고 크게 부끄러워하였습니다. 3천번 경을 읽으면서도 경에 끌려다녔을 뿐, 경을 돌려쓰지 못하였음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법화경의 뜻을 설해 주시자, 법달이 크게 깨달아 눈물을 흘리며 감사드렸습니다.

이 일환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경전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뜻을 깨닫고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아무리 많이 배워도 교만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해능 대사의 가르침이 퍼져나가면서 남종선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북방의 신수 대사 가르침은 북종선이라 하였으니, 남과 북에서 각각 선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께서는 남과 북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며, 법에는 남북이 없고 사람에게만 남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도 해능 대사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측천무께서 사신을 보내어 군궐로 모셔오라 하셨으나, 해능 대사께서는 병을 핑계로 사용하셨습니다. 세속의 권력과 명예의 뜻이 없으셨으니, 오직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만 힘쓰셨습니다.

여러분, 해능 대사께서 16년이나 숨어 지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때가 되기 전에 나서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으니, 충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세상에 나오셨을 때 비로소 가르침이 널리 퍼질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지혜였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급하게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기 쉽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사냥꾼들 틈에서 그물을 지키며 16년을 보내셨으나, 그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있었기에 40여년간 법을 설하실 수 있었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실 수 있었습니다.

보림사에서의 해능 대사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침 저녁으로 제자들이 모여 가르침을 청하였고, 해능 대사께서는 자비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의 근기에 맞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부드럽게 말씀하셨고, 어떤 이에게는 호통을 치셨으니, 모두가 깨달음으로 이끄시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제 해능 대사께서 설하신 핵심 가르침인 도노와 견성불에 대해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도노와 견성 성불이 두 가지는 해능 대사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점수라 하여 차츰차츰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널리 퍼져 있었으니, 마치 거울에 묻은 먼지를 하나씩 털어내듯 오랜 수행을 통해 번뇌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신수 대사께서 설하신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께서는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래 깨끗한데 무엇을 닦겠느냐, 본래 먼지가 없는데 무엇을 털어내겠느냐?"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도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도노란 단박에 깨닫는다는 뜻이니, 점차적으로 닦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본래 면목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제자가 여쭈었습니다. "점수와 도노가 어떻게 다릅니까?"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법에는 돈점이 없으나 사람에게 이근과 둥근이 있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닦고 깨달은 사람은 단박에 깨치나니, 자기 본래 마음을 알고 자기 본래 성품을 보면 곧 차별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 자체에는 빠르고 느림이 없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마디에 깨닫고, 어떤 사람은 오랜 수행 끝에 깨닫지만, 깨달음 자체는 같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다면 본래 부처인데 왜 수행이 필요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의야하게 여겼으니, 이미 부처라면 그냥 있으면 되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하늘에 해가 있으나 구름이 가리면 해를 볼 수 없느니라. 그렇다고 해가 없어진 것이냐? 해는 본래 그 자리에 있으되 구름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니라. 구름이 거치면 해가 나타나되 해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해가 드러난 것이니라."

이 비유는 우리의 본성을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의 참된 성품은 본래 밝고 깨끗하나, 번뇌라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니 수행이란 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름을 걷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으니, 구름을 걷어내는 것조차도 본래 해가 있음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범수의 입장에서는 구름을 하나씩 걷어내야 해가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러나 도노의 입장에서는 먼저 해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해가 있다는 것을 알면 구름은 저절로 의미를 잃게 되니, 있어도 없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다만 이 마음을 쓰면 곧바로 성불하느니라." 자성이란 자기 본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니, 이 성품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더럽혀진 적이 없으니 닦을 것도 없고, 잃어버린 적이 없으니 찾을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 마음을 바르면 그것이 곧 부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견성불이란 바로 이것을 가르칩니다. 견성이란 성품을 본다는 뜻이요, 성불이란 부처가 된다는 뜻이니, 자기 본래 성품을 보면 그것이 곧 부처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밖에서 부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부처를 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제자가 또 여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본성을 볼 수 있습니까?"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보는 자가 누구냐? 바로 그것이 내 본성이니라."

이 대답은 참으로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만, 찾는 그 자체가 이미 본성의 작용이었습니다. 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나 눈 자신은 볼 수 없듯이, 본성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본성 자체는 대상화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본성을 보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본성을 놓치는 것이었으니, 찾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를 밖에서 구하지 말라. 밖에서 구하면 부처가 아니니라. 모든 법이 자성에서 나오니, 자성이 곧 부처니라."

많은 사람들이 부처를 먼 곳곳에서 찾습니다. 높은 산에 가야 부처를 만나고, 유명한 스승을 찾아가야 깨달음을 얻고, 수십 년을 수행해야 비로소 부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부처는 바로 지금 여기 자기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물을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며 평생을 보물 찾기에 바칩니다. 그러나 정작 보물은 그 사람의 집 마당에 묻혀 있었으니, 밖으로 나가느라 정작 가까운 곳을 살피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으니, 부처를 밖에서 찾느라 정작 자기 안에 부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성은 차별이 없으니, 다만 미혹과 깨달음이 다를 뿐이니라. 미혹하면 중생이요, 깨달으면 부처니라."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본성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미혹하느냐 깨닫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치 같은 금인데 반지가 되기도 하고 팔찌가 되기도 하지만, 금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중생의 마음도 부처의 마음도 본래 하나이니, 다만 깨달았느냐 미혹하였느냐의 차이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해능 대사께서 전하신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사실은 매우 단순한 진리이니,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므로 부족한 것이 없고 다만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수행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가림막을 치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을 믿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못 났다. 나는 아직 멀었다" 하는 생각을 내려놓고, 본래 갖추어진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의 첫걸음이니, 자기 안에 밝은 빛이 있음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본래 부처라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해가 있어도 구름에 가리면 보이지 않듯이, 본래 부처이지만 번뇌에 가리면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닦는다는 것이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아야 하니, 이 앎이 있고 없고가 천양지차였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앞생각이 미혹하면 범부요, 뒤생각이 깨달으면 부처이라. 앞생각이 경계에 집착하면 번뇌어, 뒤생각이 경계에서 벗어나면 보리니라."

이 말씀은 깨달음이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찰라 전에는 중생이었다가 찰라 후에는 부처가 될 수 있으니, 생각 하나 돌리는 것이 곧 깨달음이었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지 않으되, 깨닫고 미혹함에 따라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는 것이니, 깨달음은 바로 이 순간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무언가를 듣고 있고, 무언가를 느끼고 있으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여러분의 본래 마음이며, 바로 그것이 부처입니다. 밖에서 찾지 마시고 지금 여기에서 보십시오. 찾으려 하지 말고 다만 고요히 있어 보십시오. 그러면 본래 면목이 스스로 드러나리니, 이것이 바로 견성 성불입니다.

이제 해능 대사께서 설하신 문상 무주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문상 무주 이 세 가지는 해능 대사 수행법의 핵심이었습니다. 견성불이 깨달음의 목표라면, 무념 무상 무주는 그 깨달음을 일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으니, 이론과 실천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이 세 가지를 따로 떼어 설명하시지 않고 하나의 가르침으로 전하셨습니다.

먼저 무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념이란 글자 그대로 풀면 생각이 없다는 뜻이니,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신 무념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념이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되 생각에 물들지 않는 것이니라. 생각이 일어나되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으며, 생각이 지나가되 그 생각을 붙잡지 않는 것이니라."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맑은 거울 앞에 사람이 지나가면 거울의 그 모습이 비칩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나가고 나면 거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거울이 그 사람을 붙잡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하니, 생각이 오면 비추되 생각이 가면 놓아주는 것이 무념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생각에 끌려다닙니다. 좋은 생각이 나면 그것을 붙잡으려 하고, 나쁜 생각이 나면 그것을 밀어내려 합니다. 과거의 일을 후회하며 괴로워하고, 미래의 일을 걱정하며 불안해합니다. 이렇게 생각에 물들어 있으면 마음이 평안할 날이 없으니,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가게 됩니다.

무념의 수행은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생각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고, 다만 생각에 끌려가지 않으면 되니 생각이 일어나도 괜찮고 생각이 사라져도 괜찮습니다. 오직 그 생각에 물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 있어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과 같았습니다.

다음으로 무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풀면 모양이 없다는 뜻이니, 이것 또한 오해하기 쉬운 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신 무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무상이란 모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라. 모양을 보되 모양에 얽매이지 않으며, 모양을 대하되 모양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니라."

세상에는 수많은 모양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있고 추한 것이 있으며, 크고 작은 것이 있고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우리는 이러한 모양들을 보면서 좋다 싫다 판단하고 갖고 싶다 버리고 싶다 욕심을 냅니다. 이것이 바로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니, 그로 인해 온갖 번뇌가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무상의 수행은 모양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꽃을 보면 꽃이라고 알되 꽃에 집착하지 않고, 돈을 보면 돈이라고 알되 돈에 얽매이지 않으며, 명예를 보면 명예라고 알되 명예에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모양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양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무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주란 머무음이 없다는 뜻이니, 어디에도 집착하여 머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주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에 머물지 않으며 미래에 머물지 않나니, 흘러가는 물처럼 어디에도 고이지 않는 것이니라."

흘러가는 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은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지나 바다로 흘러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채우며 계속해서 흘러가니,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무르지 않기에 썩지 않고, 고이지 않기에 맑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었다 하여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과거에 갇치게 되고, 나쁜 일이 있었다 하여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무주한 매 순간 새롭게 마음을 내는 것이니, 지나간 것은 흘려보내고 다가올 것은 기다리지 않으며, 오직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가르침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각에 물들지 않으니 무념이요,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니 무상이요,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니 무주입니다. 이 셋은 결국 하나의 가르침을 세 가지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집착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에서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생각을 합니다. 수많은 것을 보고 수많은 일을 겪습니다. 이때 무상 무주의 마음을 유지한다면 일상 자체가 수행이 되니, 특별히 산에 가거나 절에 가지 않아도 늘 수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화를 냈다고 합시다. 그 순간 나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때 무념의 마음이라면 화가 일어남을 알되 그 화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화를 억지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화가 일어남을 지켜보며 스스로 사그라지게 두는 것이며, 무상의 마음이라면 상대방의 화난 모습을 보되 그 모습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다 하고 고정시키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일 뿐이라고 알아차립니다. 무주의 마음이라면 그 일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일이 지나갔으면 흘려보내고 계속 곱씹으며 괴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념 무상 무주를 일상에 적용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되는 것은 아니니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나 방향을 알고 나아가면 언젠가는 도달하게 되니,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하되 집착하지 않고, 보되 얽매이지 않으며, 행하되 머물지 않으면 이것이 곧 해탈이니라." 해탈이란 무엇일까요? 해탈이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속박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오는 것이니, 마음을 바꾸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무념 무상 무주는 바로 그 마음을 바꾸는 방법이었으며,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행법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순간을 한번 느껴 보십시오. 숨이 들어오고 나가며, 소리가 들리고 사라집니다. 이 모든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붙잡을 것이 없고 밀어낼 것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놓아주면 되니, 이것이 바로 무념 무상 무주의 삶이었습니다.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애쓰지 않아도 되고 힘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면 되니, 이것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집착과 분별과 고정관념을 하나씩 내려놓으면 본래의 자유로운 마음이 드러나니, 그것이 바로 해탈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이 가르침을 40여년간 전하셨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이 가르침을 듣고 깨달았으며, 그 제자들이 또 제자를 기르며 법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해능 대사의 가르침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동아시아 불교의 가장 중요한 흐름이 되었습니다.

이제 해능 대사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신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성산보였습니다. 삼보란 부처와 법과 승가를 말하는 것이니, 불교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세 가지 보배였습니다. 그런데 해능 대사께서는 이 삼보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자성산보의 가르침이었으니 해능 대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성에 귀의하라.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 자성이 곧 부처여, 자성이 곧 법이며, 자성이 곧 승이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보통 부처님께 귀의한다 하면 절에 가서 불상 앞에 절을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법에 귀의한다 하면 경전을 외우고 공부하는 것을 떠올리며, 승가에 귀의한다 하면 스님들을 공경하고 따르는 것을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도 중요하지만, 해능 대사께서는 더 근본적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란 깨달은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이미 깨달음의 성품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자성불이었습니다. 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본래 진리와 다르지 않으니, 그것이 바로 자성법이었습니다. 승가란 화합하여 수행하는 무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 저절로 화합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자성승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귀의하라 함은 나쁜 마음과 질투와 아첨과 거짓과 교만과 삿된 견해를 없애는 것이니, 항상 자기 허물을 보고 남의 좋고 나쁨을 말하지 않는 것이 곧 자성의 귀함이니라." 이것이 바로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의 의미였습니다. 밖에서 찾지 않고 안에서 찾으며, 남을 탓하지 않고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스승이 대신 깨달아 줄 수 없고, 부처님이 대신 해탈시켜 줄 수 없으니, 오직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해탈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36대법을 설하셨습니다. 대법이란 상대되는 것이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니, 36쌍의 대법을 통해 중도의 지혜를 전하셨습니다. 어둠과 밝음이 서로 의지하고 있음과 없음이 서로 떠나지 않으며, 물질과 공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한쪽에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있다고 집착하면 집착에 빠지고, 없다고 집착하면 허무에 빠집니다. 밝은 것만 좋아하면 어두운 것을 싫어하게 되고, 좋은 것만 취하면 나쁜 것을 배척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 밝음과 어둠이 둘이 아니요,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니니, 이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도였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특별히 강조하신 것 중 하나가 정의쌍수였습니다. 정이란 선정을 말하고, 혜란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으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능 대사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정과 지혜가 본래 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식들아, 정과 해가 무엇인 줄 아느냐? 마치 등불과 빛과 같으니,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어둡느니라. 등불은 빛의 본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니, 이름은 비록 둘이나 본체는 하나니라. 정과 해도 이와 같으니라."

이 비유는 선정과 지혜의 관계를 잘 설명해 줍니다. 등불이 없으면 빛이 나올 수 없고, 빛이 없으면 등불의 의미가 없습니다. 등불과 빛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듯이, 선정과 지혜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으니, 선정 속에 지혜가 있고 지혜 속에 선정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선정과 지혜를 따로 닦으려 하였습니다. 어떤이는 고요히 앉아 마음을 비우는 것만 중요하다 하였고, 어떤이는 경전을 공부하여 지혜를 얻는 것만 중요하다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께서는 이 둘을 나누지 말라고 하셨으니, 선정 없는 지혜는 뿌리 없는 나무와 같고, 지혜 없는 선정은 빛 없는 등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자선에 대해서도 해능 대사께서는 독특한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좌선이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으니, 오래 앉아 있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좌란 무엇이며 선이란 무엇이냐? 이 법문에서 좌란 밖으로 모든 경계에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요, 선이란 안으로 본성이 어지럽지 않음을 보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좌선이란 몸을 안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안치는 것이었습니다. 밖으로 경계를 대하되 흔들리지 않으면 그것이 좌요, 안으로 본성이 고유하면 그것이 선이니, 반드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만 선이 아니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앉아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입을 열지 않으면서 이것이 자선이라 하나, 만약 이것이 옳다면 무정물도 선정을 얻었다 해야 하리라."

이 말씀은 참으로 통쾌합니다.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자선이라면 돌과 나무도 선정을 얻었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좌선의 핵심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으니, 앉아 있어도 마음이 흔들리면 진정한 자선이 아니고 걸어다녀도 마음이 고유하면 진정한 자선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자유를 줍니다. 반드시 절에 가야만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시간을 내어 앉아야만 선정에 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면서도 수행할 수 있고, 걸으면서도 선정에 들 수 있으니, 일상생활 전체가 수행의 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또한 일행산매를 말씀하셨습니다. 일행산매란 행주자와 어느 때나 한결같이 고든 마음을 행하는 것이니, 걷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고든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 마음이 도량이요, 고 마음이 정토이라. 마음이 굽으면 말로만 곧다 해도 소용이 없고, 마음이 고으면 형식에 구해받지 않아도 이미 도에 들어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마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겉으로 아무리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도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마음이 바르면 이미 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해능 대사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면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부처를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안에서 찾으며, 법을 경전에서만 찾지 말고 자기 마음에서 찾으며, 수행을 특별한 형식에서 찾지 말고 일상의 매 순간에서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귀의하고 스스로 깨달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책임과 동시에 큰 희망을 줍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으니 스스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책임이 있고,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성품을 갖추고 있으니 희망이 있습니다. 높고 낮음이 없고 귀하고 천함이 없으니, 오직 깨닫느냐 미혹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40여년간 전하시다가 입적하셨습니다. 입적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당부를 하셨으니, "슬퍼하지 말라. 내가 간다고 하여 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자성에 귀하면 언제나 스승이 함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제 육조단경의 마무리와 함께 이 가르침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76세가 되시던 해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열반이 가까워졌음을 아시고 마지막 법문을 설하시려는 것이었으니,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대사의 말씀을 기다렸으니 이윽고 해능 대사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선지식들아, 각자 자리에 앉으라. 내가 너희들과 작별하려 하느니라."

제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여쭈었습니다. "스승님께서 떠나시면 저희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오리까?"

해능 대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자성에 의지하라. 내가 있을 때도 자성에 의지해야 했고, 내가 없어도 자성에 의지해야 하느니라. 자성 밖에서 스승을 찾으면 그것은 진정한 스승이 아니니라."

제자들이 또 여쭈었습니다. "스승님께서 가신 후에 어떻게 수행해야 하오릴까?"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도 함께 수행하되, 내가 있을 때와 다름없이 하라. 만약 내가 세상에 있다 하여도 그대들이 가르침을 어기면 내가 있어도 소용이 없느니라."

이렇게 마지막 당부를 하시고 해능 대사께서는 고요히 앉으신 채 입적하셨습니다. 713년 8월 3일의 일이었습니다. 보림사에서 40여년간 법을 설하신 끝에 열반에 드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슬피 울었으나,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자성에 의지하여 법을 이어나갔습니다.

여러분, 이제 오늘 밤 한 여정을 돌아볼 시간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1300년 전 중국 남쪽 변방에 글자 한자 모르는 가난한 나무꾼이 살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가 위대한 선종의 조사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답을 찾았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영남 지방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나무를 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가셨습니다. 그를 배울 기회도 없었고 절에 갈 여유도 없었으니, 세상 기준으로 보면 그 어떤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24살 되던 해 시장에서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마음이 열렸으며, 천리 길을 걸어 황매산으로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오조홍인 대사 문화에서 8개월간 쌀을 지으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방앗간 행자로 지내셨으니, 그때까지도 아무도 그가 법을 이을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송 한 수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며,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가 묻으리요" 하셨으니, 이 계송이 바로 견성의 증거였습니다. 홍인 대사께서는 이 계송을 보시고 의발을 전하셨으며, 해능 대사께서는 밤중에 몰래 떠나야 했습니다. 뒤를 쫓아온 추격자 해명 앞에서 해능 대사께서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하셨고, 이 한마디에 해명이 깨달았습니다.

이후 16년간 사냥꾼들 틈에 숨어지내시다가, 때가 되어 법사에서 모습을 드러내셨으니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 오직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하신 그 말씀으로 온 세상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보림사에서 40여년간 설법하시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셨습니다. 본호와 견성 성부를 가르치셨으니, 단박에 자기 본성을 보면 그것이 곧 부처라 하셨고, 무념무상 무주를 설하시어 생각에 물들지 않고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수행법을 전하셨습니다. 자성산보를 말씀하시어 부처와 법과 승가가 밖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다고 하셨으며, 자선의 참뜻을 밝히시어 앉아 있는 것이 선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한 것이 선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글자 한자 모르던 나무꾼이 어떻게 육조가 될 수 있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깨달음은 글자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글자를 하나도 몰라도 마음으로 깨치면 그것이 진정한 앎이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는 글자에 가려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곧바로 진리를 보실 수 있었으니, 글자를 모른다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나는 배운 것이 없다. 나는 수행한 적이 없다. 나는 절에 다닌 적이 없다" 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해능 대사의 삶이 보여주듯이 깨달음에는 조건이 없었습니다. 학력도 필요 없고, 신분도 필요 없으며, 특별한 능력도 필요 없으니, 오직 자기 본성을 보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이 영상을 듣고 계신 여러분 안에 이미 부처가 있습니다. 해능 대사께서 말씀하셨듯이, 자성은 본래 청정하고, 자성은 본래 생멸이 없으며, 자성은 본래 구족하고, 자성은 본래 동요함이 없으며, 자성은 능히 만법을 낳습니다. 이것은 해능 대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고, 여러분의 본성이 본래 흔들림이 없으니, 다만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밤 육조 단경을 함께 읽으며 해능 대사의 삶과 가르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할 차례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에 끌려가지 말고, 무언가를 보면 그것에 집착하지 말며, 어떤 일을 겪으면 거기에 머물지 마십시오.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고 자기 안에서 부처를 보시며, 특별한 곳에서 수행하려 하지 말고 일상의 매 순간을 수행으로 삼으십시오.

힘든 하루를 보내셨을 수도 있고, 마음이 지쳐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구름이 해를 가린다 해도 해가 없어진 것이 아니듯이, 번뇌가 마음을 덮는다 해도 여러분의 본성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으니, 지금 당장 그것이 보이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있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구름이 거치고 해가 드러나듯, 본래 면목이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밤의 공덕을 회양합니다. 오늘 이 영상을 듣는 모든 분들께 평안이 깃들기를 발원하며, 삶의 무게에 지친 분들께 위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괴로운 분들, 남을 용서하지 못해 힘든 분들, 과거에 붙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분들, 미래가 두려워 잠들지 못하는 분들 모두에게 해능 대사의 가르침이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래 부처인 줄 알면서도 중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그 앎 하나만으로도 삶은 달라집니다.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고, 지쳐도 다시 걸을 수 있으니,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믿고 오늘 하루도 견뎌내신 여러분께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긴 시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영상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리며, 알림 설정까지 해 두시면 다음 영상도 놓치지 않고 만나실 수 있습니다. 댓글로 견성 두 글자 남겨 주시면 여러분의 본성이 환히 드러나는 인연이 되기를 발원하겠습니다. 다음 영상에서 또 다른 경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밤도 평안히 주무시고 내일도 좋은 하루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육조의능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