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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여러분은 [음악] 혹시 인생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순간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그 마지막 선택의 순간 말입니다.
[음악]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 [음악] 인도 북부의 작은 마을 보드가야에서 한 수행자가 바로 그런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시따르타, 훗날 부처님이라 불리게 될 그분이었습니다. 그날 밤 [음악] 보리수 아래에서 벌어진 일은 단순한 한 사람의 깨달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내면의 전쟁이었고 동시에 [음악] 가장 고유한 승리였습니다.
시따르타는 29세에 왕궁을 떠났습니다. 생로병사라는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그 어떤 부귀영화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왕자의 지위를, 사랑하는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을,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성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6년이라는 시간 동안 >> [음악] >> 온갖 고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숲속에서 명상의 스승들을 찾아가 배웠고 고행림에서 극단적인 금욕 수행을 했습니다. 하루에 쌀 한 톨로 연명하며 뼈와 가죽만 남을 정도로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고행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몸은 쇠약해졌지만 [음악] 마음의 번뇌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고행은 또 다른 집착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쾌락에 빠지는 것도 고통에 자신을 가두는 것도 모두 극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따르타는 고행을 멈추고 내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한 뒤 수자타라는 여인이 올린 유미죽을 받아먹었습니다.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는 그를 보고 타락했다며 [음악] 등을 돌렸습니다.
이제 시따르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왕궁도, 수행자 동료들도, 그 어떤 것도 그의 곁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보리수 한 그루를 발견했습니다. 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앉으며 시따르타는 이렇게 서원했습니다. 불본행직경에는 이 순간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악] 내가 만약 이 자리에서 일체 번뇌를 끊지 못하고 무상각을 이루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몸이 마르고 살이 썩어 없어질지언정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것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의 마지막 선언이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자의 절대적인 [음악] 결단이었습니다.
시따르타가 보리수 아래 앉자 주변은 고요해졌습니다.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멈춘 듯했습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습니다. 호흡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들숨과 날숨이 코끝을 스치는 감각을, 배가 오르내리는 움직임을,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렸고 감정이 흘러가면 그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집착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으며 다만 관찰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따르타의 마음은 점점 더 깊은 고요함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산매의 경지였습니다.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흔들림이 없는 상태. 그 고요함 속에서 마음의 본질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마라, 곧 악마라 불리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마라는 우리가 상상하는 뿔 달린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마라는 바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번뇌의 화신이었습니다. 욕망, 두려움, 분노, 의심, 교만, 모든 것이 마라였습니다. 마라는 언제나 우리가 진실을 보려고 할 때,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갈 [음악] 때 그 순간에 나타납니다.
마라는 시따르타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시따르타여, 그만 일어나거라. 그대는 이미 충분히 노력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라. 부드러운 목소리였습니다. 친절하고 합리적으로 들렸습니다. 그대에게는 왕국이 기다리고 있다. 그대의 백성들이, 그대의 가족이 그대를 필요로 한다. 이 고독한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음악] 차라리 돌아가서 선한 왕이 되어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마라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훌륭한 왕이 되어 많은 사람을 돕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요? 하지만 시따르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선한 왕이 되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을 돕는다 해도 생로병사의 근본적인 고통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진정한 자유는 외부의 조건을 바꾸는데 있지 않고 마음의 본질을 꿰뚫는데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따르타는 침묵으로 답했습니다.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관찰하며 마라의 말을 바람처럼 흘려보냈습니다. 마라의 첫 번째 공격은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마라는 다른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이번에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시따르타여, 그대는 지금 무모한 일을 하고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려 한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대는 왕자도 아니고 수행자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그대를 따르던 동료들도 이미 떠났다. [음악] 그대는 혼자다. 완전히 혼자다. 두려움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그 목소리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고독에 대한 두려움, 무의미함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은 우리를 익숙한 것에 붙들어 매고 변화를 두려워하게 만들며 진실을 외면하게 합니다. 하지만 시따르타는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것이 없는 자에게 두려움은 힘을 잃습니다. 그는 고요히 앉아 두려움을 바라보았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일어나고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마치 하늘의 구름처럼 두려움도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마라는 점점 더 초조해졌습니다.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의심이었습니다. 시따르타여, 그대가 찾는 깨달음이란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가? 수많은 성인과 현자들도 찾지 못한 것을 그대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그대는 헛된 환상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대의 6년이라는 세월이, 그 모든 고행이 결국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의심은 가장 교묘한 마라의 무기입니다. 의심은 우리의 확신을 흔들고 우리가 걷는 길의 의미를 의문에 빠뜨리며 우리를 멈추게 만듭니다. 의심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정말 이게 맞는 길일까?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의미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살고 있는데 나만 이상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시따르타는 의심 역시 하나의 생각일 뿐임을 알았습니다. 생각은 마음속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입니다. 그것에 붙들리지 않고 다만 지켜볼 때 [음악] 생각은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시따르타는 의심이라는 생각을 바라보며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의심 너머에 있는 깊은 확신을, 마음 깊은 곳에서 올려오는 진실의 울림을 느꼈습니다.
마라는 네 번째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는 욕망이었습니다. 갑자기 [음악] 시따르타 앞에 환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춤을 추며 그를 유혹했습니다. 맛있는 음식들이 펼쳐졌고 화려한 보석과 황금 보아가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권력의 상징들이, 명예와 찬가와 안락함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이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입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원합니다. 더 많은 것을, 더 좋은 것을, 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음악] 그리고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괴로워하고, 잠시 채워진다 해도 곧 다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 괴로워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가래라고 부르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갈구하듯 우리는 [음악]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시따르타는 이미 6년 전에 그 모든 것을 경험했습니다. 왕궁에서의 쾌락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이 결국 무상함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고 결국 [음악] 고통을 남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환영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실체 없는 허상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마치 신기루가 물이 아니듯 욕망이 약속하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마라는 점점 더 격렬해졌습니다. 다섯 번째 공격은 분노였습니다. 시따르타여, 그대는 교만하다. 그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대의 부모는 그대 때문에 고통받고 있고, 그대의 아내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눈물을 흘린다. 그대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자다. 분노와 죄책감이 뒤섞인 공격이었습니다. 마라는 이제 시따르타의 양심을 공격했습니다. 실제로 시따르타의 아버지 정반왕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고, 아내 [음악] 야소다라는 혼자 라훌라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따르타는 알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모든 중생을 사랑한다면 먼저 자신이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자신이 고통의 바다에 빠져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이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서 어떻게 다른 이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시따르타는 자비로 대응했습니다. 분노와 죄책감을 자비로 녹여냈습니다. 마라를 향해서도, 자신을 향해서도, 모든 존재를 향해서도 자비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이 자비의 마음은 분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갔습니다. 하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라는 여섯 번째, 일곱 [음악] 번째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나태함과 졸음이 시따르타를 엄습했습니다. 조금만 쉬어라.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시따르타는 정진으로 맞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노력으로, 깨어 있는 마음으로 졸음을 물리쳤습니다. 그다음은 회의와 냉소가 찾아왔습니다. 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인가? 결국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대 혼자 깨달음을 얻는다 한들 세상의 고통이 사라지는가? 하지만 시따르타는 알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깨달음이 파문처럼 퍼져나가 무수한 이들에게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한 등불이 켜지면 그 빛으로 천 개의 등불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음악] 마라의 여덟 번째 공격은 교만과 비교였습니다. 그대는 정말 위대하다. 그 누구도 그대처럼 수행하지 못했다. 그대는 [음악] 특별한 존재다. 이것은 칭찬으로 위장한 독이었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고 [음악] 남과 비교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남보다 낫다. [음악] 나는 특별하다. 나는 더 많이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은 또 다른 형태의 집착입니다. 시따르타는 이건 역시 알아차렸습니다. 자신을 높이는 것도, 자신을 낮추는 것도 모두 집착이라는 것을. 다만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그것이 중도임을 깨달았습니다.
아홉 번째 공격은 미묘했습니다. 마라는 [음악] 이제 영적인 자만심을 건드렸습니다. 그대는 이미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그만하고 가르침을 펼쳐라. 반쯤 깨달은 상태에서 멈추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따르타는 끝까지 가려 했습니다. 완전한 깨달음, 무상정각을 이루기 전까지는 결코 일어서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공격이었습니다. 마라는 모든 힘을 집중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리쳤습니다. 온갖 환영과 환청이 시따르타를 둘러쌌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시따르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거대한 산이 폭풍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듯 그는 고요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라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시따르타여, 그대가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누가 증명할 것인가? 그대의 증인은 누구인가? 이것은 마라의 가장 예리한 질문이었습니다.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누구도 대신 경험해 줄 수 없고 누구도 증명해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실임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시따르타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땅을 가리켰습니다. 항마지인, 마라를 항복시키는 [음악] 땅을 짚는 손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땅이 나의 증인이다. 이 말의 의미는 깊었습니다. 땅은 침묵하지만 모든 것을 품고 있습니다. 땅은 판단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지탱합니다. 시따르타가 이 [음악] 자리에 이르기까지 겪은 모든 과정을, 전생부터 이어져온 모든 수행을 땅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은 시따르타의 편에 섰습니다. 경전에는 땅의 여신이 나타나 증언했다고 [음악]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라는 패배했습니다. 더 이상 시따르타를 흔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음악] 마라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였습니다. 마라를 물리친 것은 외부의 적을 이긴 것이 아니라 [음악] 내면의 번뇌를 다스릴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였습니다.
밤은 더욱 [음악] 깊어졌고 시따르타는 더욱 깊은 산매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그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의식의 가장 미묘한 층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보리수 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렸고 별들이 하늘에서 빛났습니다. 그리고 [음악] 저 멀리 동쪽 하늘에서는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마라가 물러간 뒤 보리수 아래는 깊은 고요함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시따르타의 내면에서는 더욱 치열한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마음의 가장 깊은 층으로, 의식의 근원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외부의 적을 물리친 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진정한 적은 항상 우리 내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따르타는 산매를 더욱 깊이했습니다. 호흡을 관찰하던 마음이 이제 마음 자체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감정이 흐르는 것을 보고, 감각이 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뒤에 있는 무언가를, 관찰하는 그 자체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윗빠사나, 곧 통찰의 명상이었습니다.
중화암경에는 이 순간 마라의 군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훗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라여,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이요, 두 번째는 혐오이며, 세 번째는 굶주림과 갈증이요, 네 번째는 가래이며, 다섯 번째는 해태와 조름이요, 여섯 번째는 두려움이며, 일곱 번째는 의심이요, 여덟 번째는 위선과 왕고함이며, [음악] 아홉 번째는 이익과 명예와 칭찬과 명성이요, 열 번째는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김이니라. 이 이 열 가지 군대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힘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힘들입니다. 시따르타는 이제 이 [음악] 열 가지 힘을 하나하나 직면하고, 관통하고, 이해하고, 초월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군대인 욕망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미묘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만이 아니었습니다.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심지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욕망까지도 모두 욕망이었습니다. 시따르타는 이 모든 욕망의 뿌리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욕망은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불만족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상태가 불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갈구합니다. 시따르타는 욕망을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욕망과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욕망이라는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음악]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관찰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해도 욕망은 그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듯, 알아차림의 빛이 욕망을 비추자 욕망은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군대인 혐오가 나타났습니다. 혐오는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힘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밀어내려는 힘, 불쾌한 것을 피하려는 힘입니다. 고통스러운 감정, 불편한 생각, 받아들이기 싫은 진실을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혐오는 분노로, 거부로, 회피로 나타납니다. 시따르타는 [음악] 오랜 수행 동안 육체의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굶주림의 고통, 추위와 더위의 고통, 근육의 경련과 관절의 통증을 견뎌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음악] 고통 자체보다 더 큰 고통은 고통을 거부하는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이 [음악] 고통이 사라졌으면, 이 상황이 달라졌으면이라는 혐오의 마음이 [음악] 더 큰 괴로움을 만든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따르타는 혐오를 받아들였습니다. 혐오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았습니다. 아, 지금 혐오가 일어나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혐오와 자신 사이에 공간이 생겼습니다. 더 이상 혐오에 휩쓸리지 않고 혐오를 지켜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혐오 역시 하나의 현상일 뿐, 오고 가는 파도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군대는 굶주림과 갈증이었습니다. 시따르타는 6년간의 고행으로 육체적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마주한 것은 단순한 육체적 갈증만이 아니었습니다. 존재론적 갈증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목마름이었습니다. 인간은 의미를 갈구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가 있기를, 우리의 존재가 중요하기를, 우리의 고통이 헛되지 않기를 [음악] 바랍니다. 이 갈증은 때로 종교로, 때로 이념으로, 때로 성취로 채워지려 [음악]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이 근원적인 갈증을 완전히 채우지 못합니다. 시따르타는 이 갈증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갈증은 결핍에서 비롯됩니다.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 무언가가 채워져야 한다는 느낌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만약 처음부터 아무것도 결핍되지 [음악] 않았다면, 만약 우리가 본래 완전하다면? 시따르타는 이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네 번째 군대인 가래가 찾아왔습니다. 가래는 집착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 소유물에 대한 집착, 생각과 관념에 대한 집착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좋아한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집착입니다. 시따르타는 왕궁을 떠나올 때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왔습니다. 아버지, 아내, [음악] 갓 태어난 아들 라훌라를 뒤로 했습니다. 그 결정이 쉬웠을 리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따르타는 알았습니다. [음악] 진정한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는 것을. 집착은 상대를 소유하려 하고 통제하려 하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 곧 자비는 상대의 행복을 바라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시따르타는 [음악] 가래와 자비의 차이를 깊이 관찰했습니다. 가래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 내가 필요하다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자비는 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마음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고통과 자유를 가르는 경계였습니다.
다섯 번째 군대는 해태와 졸음이었습니다. 긴 밤이 계속되면서 육체는 피로해졌습니다. 눈꺼풀이 무겁고 의식이 흐려지고 마음이 둔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 졸음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게으름, 정신적 나태함이기도 했습니다. 내일 다시 뭐, 조금만 쉬었다가, 이 정도면 충분해. 이런 마음이 바로 해태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이 해태의 군대와 매일 싸웁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은 마음, 해야 할 일을 미루는 마음, 편한 것만 찾는 마음입니다. 해태는 우리를 현재 상태에 머물게 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게 만들며 성장을 가로막습니다. 시따르타는 정진으로 맞았습니다. 정진은 올바른 방향으로의 꾸준한 노력입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도의 노력입니다. [음악] 시따르타는 6년간의 고행에서 배웠습니다. [음악] 너무 빡빡하게 당긴 현은 끊어지고, 너무 느슨한 현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악기의 현처럼 적절한 긴장이 필요합니다. 그는 깨어 있되 긴장하지 않고, 노력하되 집착하지 않으며 졸음을 물리쳤습니다.
여섯 번째 군대인 두려움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두려움은 더욱 깊고 [음악] 근원적이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성공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만약 [음악] 정말로 깨달음을 얻는다면, 만약 모든 것이 변한다면, 나라고 알던 그 존재가 사라진다면? 이것은 자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특히 근본적인 변화를, 정체성의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음악]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규정지은 그 틀이 깨지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비록 그 틀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해도 익숙한 것이기에 놓지 못합니다. 시따르타는 이 두려움의 핵심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두려움은 미래에서 옵니다. 만약한다면, 이 될지도 몰라라는 상상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호흡이 들고 나는 것을 느끼는 이 순간에는 오직 현재만 있습니다. 시따르타는 현재의 순간으로 돌아왔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지금 여기에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일곱 번째 군대는 의심이었습니다. 의심은 가장 교묘한 적입니다. 왜냐하면 의심은 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게 맞을까? 혹시 내가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길이 더 나은 것은 아닐까? 의심은 우리를 멈추게 하고 망설이게 하고 결단을 미루게 만듭니다. 불교에서는 의심을 다섯 가지 장애 중 하나로 봅니다. 의심은 마음을 덮어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의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건강한 의심과 파괴적인 의심입니다. 건강한 의심은 맹목적으로 믿지 않고 [음악] 직접 경험하고 탐구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파괴적인 의심은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시따르타는 자신의 경험을 믿기로 했습니다. 6년간의 수행으로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고행의 무익함도, 극단의 위험도, 중도의 가치도 모두 직접 체험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진리의 소리를 신뢰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음악] 경험에 기반한 확신이었습니다.
여덟 번째 군대는 위선과 왕고함이었습니다.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거룩한 척하면서 내면은 탐욕으로 가득한 것, 자비로운 척하면서 실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왕고함은 자기 생각에 집착하여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따르타는 철저한 정직함으로 자신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조금의 자기만족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왜 깨달음을 구하는가? 혹시 명예를 위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음악] 이런 숨겨진 동기들을 하나하나 드러내고 직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순수하게 진리 자체를 위해, 모든 중생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깨달음을 구한다는 서원만을 남겼습니다.
아홉 번째 군대는 이익과 명예와 칭찬과 명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유혹입니다. 성공, 인정, 부, 명예를 향한 끝없는 추구입니다. 우리는 [음악]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 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합니다. 시따르타는 이미 왕자로서 이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부와 권력과 명예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불안하며,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아도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내면에서 나옵니다.
열 번째이자 마지막 [음악] 군대는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김이었습니다. 이것은 교만의 가장 깊은 층입니다. 나는 남보다 낫다. [음악] 나는 더 깨달았다. 나는 특별하다. 이런 생각은 너무나 미묘해서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수행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교만이 생깁니다. 나는 더 오래 명상했다. 나는 더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다. 나는 더 많이 안다. 시따르타는 이 마지막 적을 마주했습니다. 교만의 뿌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라는 관념입니다. 나는 누구다, 나는 무엇이다라는 생각 자체가 교만의 씨앗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규정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남과의 비교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시따르타는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이 질문을 끝까지 추적했습니다. 몸은 나인가? 아니다. 몸은 변한다. 어렸을 때 몸과 지금의 몸은 다르다. [음악] 감정은 나인가? 아니다. 감정도 오고 간다. 행복했다가 슬펐다가 한다. 생각은 나인가? 아니다. [음악] 생각도 끊임없이 변한다.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인가? 이 이 탐구는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시따르타는 의식의 [음악] 가장 깊은 층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고정된 나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오직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들의 흐름만이 있었습니다. 마치 강물처럼, 순간순간 새로운 물이 흐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강이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순간순간 변화하는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우리는 나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고정된 실체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깨달음이었습니다. 나라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개념이었습니다. 편의상 사용하는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순간 교만은 [음악]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높일 나도, 낮출 나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에 따라 서로 의존하며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시따르타는 마라의 열 가지 군대를 모두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적들을 물리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각각의 번뇌를 깊이 이해하고, 그 뿌리를 찾아내고,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욕망도, 혐오도, 두려움도, 교만도 모두 무명, 곧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음악]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밤은 이제 가장 깊은 시간에 접어들었습니다. 한밤이 지나 새벽을 향해 가는 그 시간이었습니다. 시따르타의 마음은 전에 없이 맑아졌습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뒤의 하늘처럼, 마라의 군대가 지나간 뒤 그의 마음은 투명하고 [음악] 고요했습니다. 이제 진정한 깨달음을 향한 마지막 여정이 시작될 준비가 되었습니다. 보리수 잎들이 [음악] 미풍에 살랑거렸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 [음악] 밝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동쪽 하늘에서는 새벽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어두운 밤이 지나고 빛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시따르타는 더욱 깊은 산매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음악] 그는 마음의 가장 깊은 비밀을, 존재의 궁극적 진실을 보려 하고 있었습니다.
마라의 군대를 모두 통과한 시따르타는 이제 의식의 가장 깊은 층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고요했지만 깨어 있었고, 고요했지만 [음악] 예리했습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의 물처럼, 그 표면에는 하늘과 별들이 완벽하게 비쳤습니다. 이제 그는 세 가지 명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명은 숙명통, 곧 과거생을 보는 지혜였습니다. 시따르타의 마음이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생의 기억을 넘어 전생의 기억이 펼쳐졌습니다. 한 생, 두 열 생, 백 생, 천 생이 지나갔습니다. 수많은 생애에서 그는 왕이었고, 거지였으며, 동물이었고, 신이었습니다. 태어나고 [음악]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무수히 반복했습니다. 사랑했고, 미워했으며, 기뻐했고,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기억의 회상이 아니었습니다. 시따르타는 각 생애에서 어떤 업을 지었는지, 그 업이 어떻게 다음 생으로 이어졌는지를 명확히 보았습니다. 탐욕으로 행한 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분노로 저지른 행동이 어떤 고통을 가져왔는지, 자비와 지혜로 실천한 선업이 어떤 복을 만들었는지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애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발견했습니다. 무명, 곧 진실을 모르는 무지가 모든 고통의 뿌리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죽음을 알면서도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소유한 것들이 영원히 [음악] 우리 것일 것처럼 집착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곁에 있을 것처럼 기대합니다. [음악] 하지만 시따르타는 수천 생이 걸친 삶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고,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첫 번째 밤의 초야가 지나갔습니다. 이제 중야가 시작되었습니다. 시따르타의 마음은 더욱 깊어졌고, 두 번째 명이 열렸습니다. 천안통, 곧 중생들의 생사를 보는 지혜였습니다. 시따르타의 의식이 확장되었습니다. 자신의 과거생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생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존재들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좋은 곳에 태어나고, 어떤 이는 괴로운 곳에 태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추한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음악]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고, 어떤 이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각자가 지은 업에 따라, 각자의 행위에 따라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선한 행위를 한 이는 좋은 결과를 받고, 악한 행위를 한 이는 괴로운 결과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업의 법칙, 인과의 법칙이었습니다.
시따르타는 여기서 깊은 자비심을 느꼈습니다. 모든 중생이 무명에 쌓여 윤회의 바퀴를 돌고 있었습니다. [음악]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을, [음악]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고통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을 끊임없이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왜 이런 고통을 겪는지도 모른 채 같은 패턴을 [음악]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다바암경에는 부처님께서 훗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보았노라. 일체 중생이 본래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번뇌의 먼지에 덮여 있음을. 마치 영꽃이 진흙 속에 있으되 진흙에 물들지 않듯이, 모든 중생은 본래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 [음악] 불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명과 번뇌의 먼지가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시따르타는 이 진실을 보며 큰 자비심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하고 싶은 마음, 모든 존재가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알았습니다. 자신이 먼저 완전히 깨달아야만 다른 이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중야가 지나가고 후야가 시작되었습니다. [음악] 밤이 가장 깊고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어둠 속에서 가장 큰 빛이 태어나려 하고 있었습니다. 시따르타는 세 번째 명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누진통, 곧 모든 번뇌가 다한 지혜였습니다. 시따르타는 이제 [음악] 고통의 본질을 직접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몸의 감각을 관찰했습니다. 따뜻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시원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통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편안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마음의 상태를 관찰했습니다. 행복한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불행한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중립적인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 변하고 있었습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몸도, 나라고 여기는 마음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들의 흐름일 뿐이었습니다. 마치 불꽃이 순간순간 타오르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도 순간순간 생겨났다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시따르타는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는 [음악] 고통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관찰했습니다. 감각이 일어나면 그것에 대한 느낌이 생깁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음악] 또는 중립적인 느낌입니다. 그 느낌에서 가래가 생겨납니다. 즐거운 것은 계속되기를 바라고, 괴로운 것은 사라지기를 바라며, [음악] 중립적인 것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합니다. 이 가래에서 집착이 생기고, [음악] 집착에서 존재에 대한 집착이 생기며, 그것이 다시 태어남으로 이어지고, 태어남은 늙음과 죽음으로, 온갖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12연기의 법칙이었습니다. 무명에서 행이 생기고, 행에서 식이 생기며, 식에서 명색이 생기고, 명색에서 육입이 생기며, 육입에서 촉이 생기고, 촉에서 수가 생기며, 수에서 애가 생기고, [음악] 애에서 취가 생기며, 취에서 유가 생기고, 유에서 생이 생기며, 생에서 노사와 온갖 고통이 생깁니다. 시따르타는 이 연쇄를 거꾸로 추적했습니다. 만약 무명이 사라진다면,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라지고, 행이 사라지면 식이 사라지며, 식이 사라지면 명색이 사라지고, 명색이 사라지면 육입이 사라지며, 육입이 사라지면 촉이 사라지고, 촉이 사라지면 수가 사라지며, 수가 사라지면 애가 사라지고, 애가 사라지면 취가 사라지며, 취가 사라지면 유가 사라지고, 유가 사라지면 생이 사라지며, 생이 사라지면 노사와 온갖 고통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해탈의 길이었습니다. 고통의 소멸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무명을 없애는 것, 곧 진실을 보는 지혜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시따르타는 계속해서 관찰했습니다. 그는 사성제를 직접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고성제입니다. 삶에는 고통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태어남도 고통이고, [음악] 늙음도 고통이며, 병도 고통이고, 죽음도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고,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것도 [음악] 고통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입니다. 욕컨대 [음악] 집착하는 오온, 마음의 모든 현상이 고통입니다. 둘째, 집성제입니다.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진리입니다. [음악] 고통은 가래에서 생깁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가래, 존재에 대한 가래, 비존재에 대한 가래가 고통을 [음악]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괴로워하며, 잠시 채워진다 해도 곧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사라지면 다시 괴로워합니다. 셋째, 멸성제입니다. 고통의 소멸에 대한 진리입니다. 가래가 완전히 사라지면 고통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모든 번뇌가 꺼진 상태, 가래의 불길이 사라진 상태, [음악] 완전한 평화의 상태입니다. 넷째, 도성제입니다. 고통의 소멸로 가는 길에 대한 진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마음 챙김, [음악] 올바른 집중입니다.
시따르타는 이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경전에서 읽은 것도 아니고, 스승에게 들은 것도 아니며, [음악] 상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직접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시따르타의 마음은 전에 없이 맑고 밝았습니다. 마치 수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 같은 빛이 그의 내면에서 빛났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새벽별이 떠올랐습니다. 금성이 [음악]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시따르타가 눈을 떠서 그 별을 보는 순간 마지막 무명의 장막이 거쳤습니다. [음악]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우주의 모든 법칙이, 존재의 모든 비밀이, 마음의 모든 작용이 한 순간에 드러났습니다. [음악] 깨달음이었습니다. 완전한 깨달음, 안역따라 삼막삼보리, 곧 위없는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시따르타는 더 이상 시따르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부처, 곧 깨어난 자가 되었습니다. 경전에는 이 순간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음악]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생사의 윤회 속에서 [음악] 집을 짓는 자를 찾아 헤맸으나 만나지 못했고, 거듭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었노라. 집짓는 자여, 이제 [음악] 그대를 보았노라.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 그대의 석가래는 모두 부러지고, 대들보는 무너졌으며, [음악] 내 마음은 무위에 이르렀으니, 모든 가래가 다했도다. 집을 짓는 자란 바로 가래를 의미합니다. 가래가 생사의 집을 짓고 우리를 윤회 속에 가두어둡니다. 하지만 이제 부처님은 그 가래를 완전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가래의 뿌리를 뽑아 버리셨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짓지 않으며, 더 이상 생사의 바퀴를 돌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 7일 동안 앉아 계셨습니다. 그 깨달음의 환희를, 해탈의 평화를 만끽하셨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셨습니다. 이 이 법은 깊고 미묘하여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오직 고요하고 미묘하며 사유를 넘어서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알 수 있도다. 그러나 중생들은 집착을 즐기고 [음악] 집착에 빠져 있으니, 이들이 어찌 연기의 법칙을 볼 수 있겠는가? 부처님은 처음의 가르침을 펼칠까 말까 망설이셨습니다. 너무나 깊은 진리를 어떻게 말로 전할 수 있을까요? 언어는 한계가 있고, 개념은 진실을 완전히 담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것이지, 설명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마라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마라는 이번에는 다르게 말했습니다. 부처여, 이제 그대는 열반에 드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이 법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르침을 펼치려 애쓰지 마시고, 그냥 열반에 드십시오. 이것은 마라의 마지막 유혹이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세상을 등지고 홀로 열반의 평화를 누리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가르침을 펼치지 않으신다면 수많은 중생이 여전히 어둠 속에서 고통받을 [음악]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답하셨습니다. 악마여, 나는 그대를 보았노라. 이 이 말씀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마라를 알아차리셨습니다. 마라의 정체를, 마라의 의도를, 마라의 본질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림만으로도 마라는 힘을 잃습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을 관찰하셨습니다. 그리고 보셨습니다. 눈에 먼지가 조금만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음악]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마치 연못의 연꽃들처럼, 어떤 연꽃은 물속 깊이 있고, 어떤 연꽃은 물 표면에 있으며, 어떤 연꽃은 막 피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햇빛이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을 위해 가르침을 펼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먼저 다섯 비구를 찾아가셨습니다. 함께 고행하다가 자신을 [음악] 떠났던 그 다섯 수행자들입니다.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그들을 만나 첫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전 법륜, 첫 번째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셨고, 팔정도를 가르치셨으며, 중도의 길을 밝히셨습니다. 다섯 비구는 깨달음을 얻었고, 최초의 승가가 탄생했습니다. 이로써 불, 법, 승, 삼보가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점차 퍼져나갔습니다. 왕족도, 상인도, 농부도, 창녀도, 도둑도 [음악]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신분과 상관없이, 성별과 상관없이,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이가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보편적이고, 깨달음의 가능성도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고, 무수한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훗날 아시아 전체로,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2600년 전에 역사일 뿐일까요? 아니면 지금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사실 마라는 지금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할 때, 그것이 마라의 해태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고 싶어 할 때, 그것이 마라의 욕망입니다.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며 새로운 시도를 피할 때, 그것이 마라의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남과 비교하며 [음악]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때, 그것이 마라의 교만입니다.
부처님이 [음악] 보리수 아래에서 마라와 싸운 것처럼, 우리도 매일 우리 내면에 마라와 싸우고 있습니다. 싸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마라와 싸운 것이 아니라 마라를 알아차렸습니다. "악마여, 나는 그대를 보았노라." 이 이 알아차림이 핵심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의 욕망을, 두려움을, 분노를, 교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 지금 내 안에서 욕망이 일어나고 있구나. 아, 지금 두려움이 나를 움직이고 있구나. 아, 지금 분노가 치밀어 오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알아차림과 그 대상 사이에 공간이 생깁니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은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지금 여기에서 [음악] 일상의 매 순간에 일어납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회의 중에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땅을 짚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항마지인, 마라를 항복시키는 손의 형상입니다. 땅은 항상 우리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땅은 판단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며,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지합니다. [음악] 우리의 마음도 본래 그러합니다. 땅처럼 넓고, 하늘처럼 광대하며,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번뇌의 구름이 본래의 맑은 하늘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구름은 하늘이 아닙니다. 아무리 구름이 많아도 하늘은 여전히 맑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특별한 능력을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빼는 것이었습니다. 집착을, 욕망을, 두려움을, 교만을 하나하나 내려놓았을 때 본래의 맑은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할 때, 과거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오직 지금만을 살 때, 그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느니라.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 이 말씀은 지금도 우리에게 울려옵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우리의 몸도, 마음도, 관계도, 상황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찾는 것이 수행입니다.
보리수 아래. 그날 밤 부처님이 마라를 이긴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음악] 혼자만의 해탈을 위해 앉아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모든 존재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우리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보리수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는 마라와 마주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욕망이 우리를 유혹하고, 두려움이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며, 분노가 우리를 휘두르고, 교만이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순간들 말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라에게 휩쓸 것인가, 아니면 [음악] 마라를 알아차릴 것인가? 반응할 것인가, 아니면 관찰할 것인가? 자동적으로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의식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팔정도는 [음악] 26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생각하며, 올바르게 말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며 올바르게 살아가고 올바르게 노력하며 올바르게 마음을 챙기고 [음악] 올바르게 집중하는 것. 이것은 특정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음악]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에 이르는 보편적인 길입니다.
새벽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부처님이 깨달으셨듯이 우리도 일상의 작은 순간들에서 깨달음을 [음악]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순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순간, 사랑하는 이의 미소를 보는 순간이 모든 순간이 깨달음의 기회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경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부처님의 [음악]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습니다. 깨어 있으라. 과거의 후회에 잠기지 말고 미래의 걱정에 빠지지 말며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 몸에서 무슨 감각이 느껴지는지, 내 마음에 어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리며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챙김입니다.
마음챙김은 특별한 기술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지금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으며 바꾸려 하지 않고 그저보는 것입니다. 말하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욕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음악] 그것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알아차리고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음악] 부처님께서 악마여 나는 그대를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우리 내면의 마라를 볼 수 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변화가 시작됩니다. 어둠 속에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듯 알아차림의 빛이 번뇌를 비추면 번뇌는 [음악]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보리수 아래 그날 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음악]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자신의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습니다. 자신의 마라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당신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가르침을 듣고 있는 당신이 바로 그 수행자입니다. 당신의 내면에도 부처의 본성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개발하고 완성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 다른 누가 대신 깨달아 줄 수 없습니다. 스승도 부처님도 신도 대신 깨달아 줄 수 없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등불입니다.
[음악] 깨달음의 그 순간 새벽별이 떠오를 때 부처님께서 느끼셨던 그 평화와 자유를 우리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호흡 한 호흡, 한 순간 한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걸으신 길이고 우리가 걸어갈 길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밝히고 [음악]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