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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고난 중에 기뻐하라고 이야기를 하면 많이 생각하는 것이 많은 걸 잃어버렸지만 남아 있는게 있으니까 기뻐하고 그리고 감사하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오른손 끊어지고 왼손 끊어지고 오른발 끊어지고 왼발 하나 남았는데 신앙인의 그 감사하는 긍정적인 모습이 새 지체가 끊어졌지만 남아 있는 왼쪽 다리를 인하서 감사하라. 저는 이것도 저에게는 불편했어요.
바울이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나는 지금 감옥에 있는게 너무너무 좋아서 나는이 감옥에 그냥 아주 살고 싶다 그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니거든요. 그는 상태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만족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제가 한번 그 어느 집회에서 이제 Q&A 시간이었는데 한 분이 저한테 어 질문을 하기를 고난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그니까 고난에 관해서 저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기는 했는데 그런데 어 그 질문을 받으면서 제가 좀 깊이 생각을 해 봤어요. 고난이라는게 도대체 뭘까? 뭐가 고난일까?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 고난의 정도, 고난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섣불리 고난에는 이렇게 대처하라. 아니면은 고난은 이런 것이다 하는 그 정의 혹은 그 노하우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각자가 경험하는 일들이 너무 다르거든요. 그렇게 다른 상황에서 어 너무 쉽게 그냥 너무 회결화시켜서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에 사실 고난이 무엇일까라는 그 질문 자체가 저에게는 굉장히 심오한 질문이기도 하고 굉장히 복잡한 질문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그냥 여러분들에게 저의 입장에서 제가 경험하고 있는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요. 제게 있어서 고난이란 결국 장애입니다. 음. 저는 고난 그러면 떠오르는 첫 번째 단어가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 그것이 저에게는 항상 고난이라는 말과 이렇게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아, 그러니까 이거는 저의 경험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거는 아니라서 그냥 제 이야기를 드린다고 생각하시고 이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는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 뭐 바꿔서 고난 중에 우리는 즐거워한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고난의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을 즐거워할까? 어떻게 즐거울 수 있을까? 우리가 즐거우려고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때로는 굉장히 억지스럽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 같아요.
바울이 말할 때 뭐 성경 전체가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너희는 기뻐하라. 염려하지 말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 이런 이야기들은 단순히 감정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그 감정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항상 기쁘고 또 좋은 어떤 심리적 상태 이것을 건강한 신앙인이거나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권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고난의 현실에서 그 고난 때문에 기뻐할 수는 극히 드니다. 거기에서 어떤 의미와 사명을 발견한다면 몰라도 사실은 고난은 굉장히 버거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사람들은 고난 중에 기뻐하라고 이야기를 하면 많이 생각하는 것이 어 남은 것들에 대한 고난이라고 생각을 해요. 이건 좀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걸 이야기하겠죠. 그래서 어 많은 걸 잃어버렸지만 그렇지만 남아 있는게 있으니까 그 남아 있는 것들로 인하여서 어 기뻐하고 그리고 감사하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근데 저는 이것도 저에게는 불편했어요.음 어 내게 있는 고난의 엄연한 현실이 있는데 그것을 다른 나머지 좋은 것들과를 생각하면서 기뻐할 수 있을까? 오른손 끊어지고 왼손 끊어지고 오른발 끊어지고 왼발 하나 남았는데 그런데 신앙인의 그 감사하는 긍정적인 모습이 새 지체가 끊어졌지만 남아 있는 왼쪽 다리를 인하서 감사하라. 그나마이 다리가 남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사업 다망했는데 그리고 정말로 처절하게 다 깨졌는데 그래도 내가 살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래도 내가 어 먹을 것이 있으니 감사합니다. 하지만은 잃어버린 그것들에 대한 상실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들로 인하여서 기뻐하기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을 감당할 수가 없죠.
저는 오히려 어 기뻐하라는 말의 의미가 남아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고 기뻐하라는 그러한 의미라고 보기는 어렵겠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이야기하기를 나는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얘기하고 내가 풍부에 처할 줄로 알고 비천에 처할 줄로 알고 배부름과 배고픔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으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걸 할 수 있다. 내게 능력 주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주시면 나는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얻어낼 수 있다는 이러한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자족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어 자족할 수 있는데 그 자족이라는 것은 그냥 그 다 잃어버린 상태에서 남아 있는 상태에 대한 그 만족을 의미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상태에 만족할 수가 없어요. 때로는 그 상태에 만족하고 있는 모습은 태만함과 게으음을 의미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현재의 상태 만족스러운가요? 저는 만족하지 못하거든요. 저는 지금 현재 저의 상태에 대해서 만족스럽지가 않아요. 항상 아쉬움이 있어요. 너무 아쉽기도 하고 어 너무 섭섭하기도 한 경우도 물론 있죠.
이제 제가 이제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까 그런지는 모르지만 요즘은 걷는게 조금씩 더 불편해져요. 서 있는 것도 불편해지고 걷는 것도 불편하죠. 아,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지켜 주셔서 내가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이미 저는 인정하고 그리고 나는 비록 약하지만 그렇지만 강함이 되시는 하나님 의지하고 제가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그런데도 제가 경험하는이 불편함들을 때문에 저는 너무너무 힘들어서 아쉬워요. 그래서 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그이 소망이랄까요? 아니면 바람이 있다면 뭐 크게 욕심은 없는데 그냥 조금만 더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지금보다 조금만 더 건강했으면 좋겠다는게 제가 가지고 있는 아쉬움이죠.
저는 미국에서 이제 은퇴를 했기 때문에 어이 연금을 받으면서 살아요. 그니까 한 달에 한 번씩 연금을 받을 때마다 연금이 들어온다는 것이 고마운데 늘 마음속에 드는 생각은 조금만 더 주지. 마음이 조금만 더 주면 내가 사는게 좀 편안해질 텐데 아마 우리 많은 분들이 지금 현재 상태에 만족할 수 없을걸요.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공부를 조금만 더 잘했으면 좋겠고 내 주고 환경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나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내 수입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괜찮았으면 좋겠고 내 건강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았으면 좋겠다 하는 그러한 아쉬움들이 있죠.
그런데 바울이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나는 지금 감옥에 있는게 너무너무 좋아서 나는이 감옥에 그냥 아주 살고 싶다 그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니거든요. 그는 상태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만족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가 원했던 것은 그 편지에서도 빌립보서도 그가 고백하는 것처럼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바울이 제일 원했던 건 이제 육체를 떠나서 천국 가는 거예요. 이제 그만으면 좋겠다. 그게 제일 원했던 거고 그리고 그가 두 번째로 원했던 것은 혹시 하나님이 또 살려 주신다면 가서 너희들 좀 보고 싶다. 그게 원했던 거죠.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내가 지금이 감옥에 있어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다면 나는 그 하나님의 다스림에 만족하겠다는 그러한 의미가 자족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환난 중에 우리가 즐거워한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아, 여기에 즐거워한다는이 단어가 사실은 그 로마서 5장에서 한 번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평소에 그가 기쁨이나 즐거움을 말할 때는 사용하지 않던 단어인데 거기에서 그 단어를 사용했는데 아마이 단어의 의미를 잘 어이 녹여서 우리 개혁 개정 성경에서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라고 번역이 됐는데 그런데 새 번역을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번역이 됐어요. 환난 중에도 인정한다. 그러한 의미라고 번역이 된 거죠. 그니까 저는 그 번역이 조금 더 정확하고 더 의미를 풍성하게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즐거움이라는 단어는 왠지 자꾸만 감정적인 단어인 거 같고 뭔가 우리의 어떤 느낌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말은 내가 비록 이런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나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너의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형편없니? 넌 왜 이렇게 꼬였니? 왜 이렇게 사는게 벅니라고 사람들이 묻고 비웃고 조롱할 때 그때 나는 그래도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심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그 말이 자랑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는 자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어 결국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내가 인정하겠다 하는 그러한 의미라고 우리가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당한 가지고 있는 그 장애의 경험 가운데서 난 이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지도 모르겠고 왜 하나님이 이런 장애를 나에게 주셨는지 그 이유도 나는 알 수가 없지만 그렇지만 내가이 장애 가운데 하나님을 인정하겠다. 즐거워한다는 말의 의미가 내가 인정하겠다고 이야기한다면 이것도 하나님의 그 선하신 손안에 있음을 내가 인정하겠다라는 그러한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제 경우에 있어서 장애가 고난인 이유가 있다면 이건 저의 경우니까 모든 경우에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제 경우에 있어서 장애가 고난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장애가 가져다 주는 불편함 때문이 아닙니다. 장애가 가져다는 불편함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비교 때문이에요. 음. 어 뭐 불편하죠. 하지만 그래서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런데 내 장애로 인해서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단지 불편함 때문이 아니라 비교 때문에 아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걷는게 좀 불편하지만요. 어 저에게 있어서 진짜로 불편한 건 걷지 못하는게 아닙니다. 저에게 진짜로 불편한 건 잘 걷지 못하는게 아니라 제가 날 수 없다는 거예요. 아, 제가 날 수만 있다면 정말 사는게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제가 날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제가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삶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라서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하나가 있다면 아무도 못 날기 때문이에요. 아마 한 두 명만 날면 그다음에 모든 사람들은 불행해질 겁니다. 왜 나는 날지 못할까라는 생각. 끊임없는 비교에 의해서 우리의 고난이 자꾸 증폭되는 것을 우리는 느끼죠.
불편해요. 가난은 불편하죠. 어떤 철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부자가 있다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어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불편함들, 부족함들 뭐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막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들은 아닌데 그런데 계속되는 그 비교 가운데 인간의 그 존재의 의미를 그 다른 사람과의 경쟁 비교에 의해서 찾아내려고 하는 이러한 그 인생의 절망 상태. 실전주의 철학자들은 그러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비관적으로 그리고 염세적으로 설명을 했는데 바로 모든 불행은 이러한 비교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보는 거죠.
만일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그 몫이 무엇이든 나는 그것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그냥 이게 내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인정하고 살아내겠다. 아마도 그 말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환난 중에 즐거워함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