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ription
[음악] 새벽이 깊어갈 무렵,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저 어둠 속에서 태양이 솟아오를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찬란한 아침 햇살도 언젠가는 저녁 놀이 되어 스러지고, 또다시 깊은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우리가 그토록 붙잡으려 했으는 행복이나 평화도 마치 아침 이슬처럼 더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요.
왜 우리는 해가 뜨거지는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사람과 이별이나 내 몸의 노화는 그토록 서러워할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오늘 이 고요한 시간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 깊은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 하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속 오랜 고통의 매듭이 한결 풀어지고 삶의 진짜 평화를 찾을 작은 지혜 하나를 선물 받으실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저의 이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시죠.
어느 고요한 새벽, 창밖을 바라봅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저편에서 서서히 붉은 기운이 스며들더니, 이내 찬란한 빛이 온 세상을 깨웁니다. 해가 뜨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경이롭고 아름답습니다. 고요하고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아름다운 해도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서쪽 하늘로 기울어집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위치입니다. 누구도 해가 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흘러갑니다. 봄이 오면은 온 세상에 꽃이 피어나고, 그 꽃들은 여름에 푸름을 지나 가을이 오면 [음악] 잎과 함께 고요히 땅으로 돌아갑니다. 이 또한 자연의 변함없는 이치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태어나고 자라고 쓰러지는 것을 반복합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매 순간 같은 물은 단 한 방울도 없습니다. 구름은 하늘을 떠다니지만 늘 같은 모양을 유지하는 법이 없습니다. 바람은 불어왔다 사라지지만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내 인생 또한 이 자연의 이치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만남이 있으면은 반드시 헤어짐이 찾아오고, 어렵게 얻은 것은 언젠가 반드시 잃게 되며,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는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되듯 우리 삶의 순리이자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숨을 쉬는 모든 것은 변하고, 흐르는 강물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며, 어제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릅니다. 이 당연한 변화의 흐름 속에 우리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해가 지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꽃이 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밤새 슬퍼하고, 젊고 건강했던 내 몸이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늙어가는 것을 보고는 깊은 탄식과 함께 포기합니다. 이 몸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한 송이 꽃과 같건만, 우리는 그 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손주가 어린 시절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걸음마를 배우고 서툰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고 글자를 배우는 하루하루의 변화가 그저 신기하고 기뻤습니다. 조그마한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 자체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근데 이제 아이는 다 자라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할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예전처럼 순진하게 웃지도 않습니다. 그런 모습에 우리는 문득 서운함을 느끼고 지난날의 아쉬움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닐까요? 아기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린아이는 변하여 청소년이 됩니다. 처음에는 그 변화를 기뻐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 변화를 슬퍼합니다. 같은 변화인데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반응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평생 함께 할 것 같았던 남편과의 관계도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해 갑니다. 함께 웃고 함께 꿈꾸고 함께 미래를 계획했던 그 시절과는 달리 대화는 줄어들고 관심사는 달라지고, 어느새 각자의 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 마음 한 구석에선 섭섭함이 피어나고 행복했던 예전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자식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인 양 엄마 아빠만 찾았습니다. 그런데 커가면서 친구가 더 중요해지고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해지고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이 더 중요해집니다. 이 또한 자식이 마땅히 겪어야 할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며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것이 당연한 위치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대리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키운 정이 그렇게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건강도 예외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아무리 무리해도 괜찮았습니다. 밤을 세워도 무거운 것을 들어도 힘든 일을 해도 끄떡없었던 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조그만 무리에도 며칠을 고생하고 계단을 오르면은 숨이 찹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은 여기저기 쑤시고 결립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변화입니다. 우리의 몸은 영원히 젊고 건강할 수 없다는 것을, 마치 낡아가는 낡은 옷처럼 서서히 변해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게 모았다가 쓰고 쓰고 나면 또다시 모아야 합니다. [음악] 돈이 많을 때는 잠시 안심했다가 돈이 줄어들면 불안해합니다. 재산은 끊임없이 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다시 생기는 오르내림을 반복합니다. 평생을 이렇게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명예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칭찬받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가 비난받을 때는 기분이 나쁩니다. 인정받을 때는 자신감이 생겼다가 무시당할 때는 자존심이 상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르내립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은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항상 뭔가 좋은 것을 붙잡으려 했고 나쁜 것을 피하려 했습니다. 얻으려 애쓰고 잃지 않으려 했으며 지키려 애쓰고 변하지 않으려 발버둥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결과는 늘 같습니다. 붙잡으려 할수록 시간은 흘러가고 지키려 할수록 모든 것은 변합니다. 마치 마른 모래를 움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힘껏 주면 줄수록 손가락 사이로 더 빠르게 빠져나갑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변하는 것을 붙잡으려 할수록 마음속 고통만 더 깊어지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살아야 할까요? 하지만 그것 또한 사람의 도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어찌 아무런 바람이나 희망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굶주리면 배부르기를 바라고 추우면 따뜻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깊이 고뇌하고 탐구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진 왕자로 사셨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찾지 못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왜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가? 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가? 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원치 않는 것을 겪는가? 이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왕자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셨습니다. 6년 동안 험난한 수행과 온갖 고행을 다하셨지만 진정한 답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죽음의 지경까지 갔지만 깨달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고행을 그만두시고 몸을 회복하신 후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깊은 명상에 드셨습니다. 그곳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깊이 관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5살의 나이에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은 결코 복잡하거나 신비로운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보신 결과였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법경이라는 경전에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을 깨달으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참으로 간단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말씀 속에 모든 고통의 해답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 진리를 우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입으로는 "그렇지, 변하는 게 당연하지" 하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행동은 마치 모든 것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떠오른 해를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하지만 그 해가 저녁에 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해가 뜨면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해가 지지 않기를 바라지 않으니 해가 져도 우리는 괴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헤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언가를 얻으면 언젠가 잃는 것이 당연한데도 우리는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젊으면 늙는 것이 당연한 순리인데도 우리는 늙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바로 이 바람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괴로운 이유는 특정 상황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을 대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해가 지는 것은 괜찮은데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은 괴로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해는 어떤 집착도 하지 않지만 사람에게는 깊은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집착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붙잡고 있으면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마음이 바로 집착입니다.
어린아이가 모래성을 쌓았습니다. 작은 손으로 열심히 흙을 나르고 다져서 예쁜 모래성을 만듭니다. 아이는 그 성을 보며 기뻐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파도가 밀려와 모래성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웁니다. 왜 울까요? 그 모래성이 무너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모래성은 본래 무너지게 되어 있는 존재인데도 아이는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모래성을 쌓았습니다. 재산, 명예, 지위, 그리고 소중한 관계들. 이것들을 쌓기 위해 평생을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시간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 파도 앞에서 우리가 쌓아올린 모든 것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괴로워합니다. 왜 괴로울까요? 우리의 모래성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 즉 변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고통의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변하지 않길 바라는 집착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요. 자바함경이라는 경전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색은 무상하고 수는 무상하며 상은 무상하고 행은 무상하며 식은 무상하다. 이것을 보는 사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움이 없다."
여기서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불교 용어들이죠.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제가 쉬운 말로 풀어 드리겠습니다. 색(色)은 우리 몸과 세상의 모든 물질적인 존재들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이지요. 수(受)는 우리가 느끼는 감각, 즉 좋거나 싫거나 또는 좋지도 싫지도 않은 모든 느낌들을 말합니다. 상(想)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고 생각하는 모든 작용을 의미합니다. 행(行)은 마음이 움직여서 의지를 가지고 어떤 행위를 하거나 형성하는 모든 의지적인 작용을 말하고, 식(識)은 세상을 알아차리고 분별하는 의식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색, 수, 상, 행, 식에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무상무상(無常無常)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상이라는 말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지요. 우리의 몸도 끊임없이 변하고, 아픔이나 기쁨 같은 느낌도 계속 변하며, 떠오르는 생각도 늘 달라지고, 행동과 의식 또한 순간순간 변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무상함을 깊이 관찰하고 보는 사람은 집착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변하는 것을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소용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치 손으로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듯이, 변하는 것을 마음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해는 뜨고 지며, 꽃은 피고 집니다. 사랑하는 이는 만나고 헤어지며, 건강은 젊음에서 노년으로 변해 갑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순리이며 우리는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되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그 결과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할 일을 다 한 후에 그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립니다. 정성껏 물을 주고 돌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싹이 트고 열매를 맺는 것은 오직 우리 손에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날씨가 어떻고, 흙의 상태는 어떠하며, 씨앗 자체가 얼마나 건강한지 등 수많은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해에는 풍년이 될 수도 있고, 어떤 해에는 흉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보살피고 좋은 가르침을 주려 노력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할이자 책임입니다. 하지만 자식이 어떤 사람이 될지는 온전히 자식 자신의 몫입니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식 또한 독립된 한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식의 선택과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일도 그렇습니다. 맡은 일에 열심히 임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수많은 외부 조건에 달려 있습니다. 잘될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혀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금강경이라는 경전에는 부처님의 지혜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흐르는 물처럼, 불어오는 바람처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강물을 자세히 보십시오. 신기합니다. 굳건한 바위를 만나면 부딪히지 않고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낮은 곳을 만나면 망설임 없이 흘러갑니다. 막히면 고요히 고여 있다가 뚫리는 곳을 찾으면 다시 힘차게 흐릅니다. 억지로 무엇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갑니다. 그렇게 강물에는 아무런 갈등이나 고통이 없습니다.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쪽에서 불다가 저쪽에서 불고, 세차게 불다가도 어느새 약하게 스쳐 지나갑니다. 바람은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바람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살려고 하셨습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되 그 변화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그 결과에 매달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무언가에 집착하며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다. 나는 이래야만 한다. 나는 저것을 원한다."는 생각에 갇혀 살아왔습니다. 그러기에 갑자기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평생 오른손잡이로 살다가 갑자기 왼손으로 모든 것을 하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러한 우리의 어려움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가장 먼저 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 관찰, 관찰입니다. 우리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셨습니다. 변하는 것을 변한 것으로,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는 것으로 보라고 하셨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먼저 내 몸의 상태를 관찰해 보십시오. 어제와 같을까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어제는 몸이 가볍고 개운했는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무겁고 찌뿌둥할 수도 있습니다. 어제는 기분이 좋았는데 오늘은 이유 없이 우울할 수도 있습니다. 하루만 지나도 우리는 이렇게 변합니다.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맛을 봅니다. 어제는 맛있었던 반찬인데 오늘은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반찬인데 느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 몸의 상태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입맛이 변했고, 기분이 변했고, 몸의 컨디션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그렇습니다. 대화를 나눕니다. 어제는 그 사람이 그렇게 좋고 반가웠는데 오늘은 왠지 모르기 싫거나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도 느낌이 달라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상대방이 변했을 수도 있고, 내가 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둘 다 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일상 속에 모든 것을 면밀히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의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요.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채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다르고, 지금 이 순간의 나와 한 시간 후에 나도 다릅니다. 우리는 항상 매 순간 변합니다.
상응부 경전이라는 경전에는 부처님의 말씀이 또 있습니다. "과거에 나도 무상하고 현재의 나도 무상하며 미래에 나도 무상하다. 이것을 보는 사람은 나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과거의 나는 이미 지나가 없어졌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 젊은 시절의 나는 이제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현재 나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다음 순간이 되면은 또 다른 나로 변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어떤 모습의 나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진짜 나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찾아봐도 붙잡을 만한 고정된 나는 없습니다. 오직 순간순간 변해 가는 현상들만 있을 뿐입니다. 마치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매 순간 다른 물이 흐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강이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매 순간 변화하는 이 모든 현상들의 흐름을 우리는 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순간순간 변해 가는 현상들의 흐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나는 없으며, 오직 흐르는 과정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강을 보십시오. 분명 강이 있습니다. 하지만 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끊임없이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르는 물의 과정 그 자체입니다. 강물을 손으로 떠 보십시오. 손 안에서 금세 흘러내려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순간순간 변하는 수많은 경험들의 흐름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과정인 것이죠.
근데 우리는 이 흐름을 붙잡으려 합니다. 마치 흐르는 강물을 손으로 떠서 영원히 간직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셨습니다. 붙잡으려 하지 말고 흐르는 것을 흐르는 대로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집착이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정중히 여쭈었습니다. "태존이시여, 어떻게 해야 집착을 완전히 버릴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운 눈빛으로 제자를 바라보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니 그 어떤 것도 붙잡을 만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은 집착은 저절로 사라진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집착을 억지로 버리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 대신 집착할 만한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는다면, 집착은 마치 연기처럼 스르륵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멀리서 보면 분명 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목마른 여행자는 그 물을 마시기 위해 힘껏 달려갑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물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뜨거운 모래밭만 펼쳐져 있습니다. 그것은 신기루, 즉 환영이었을 뿐이지요. 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면 여행자는 더 이상 그곳에서 물을 찾지 않습니다. 목마름이 사라지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헛된 기대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멈추게 됩니다.
우리의 집착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뭔가 영원히 붙잡을 만한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착각합니다. "이것을 붙잡으면 영원히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하며 헛된 기대를 품고 쫓아갑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어떤 것도 영원히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쫓지 않게 됩니다. 집착은 저절로 그만두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이 고요한 시간,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려 합니다. 변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변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법을 배우려 합니다.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아침에 눈을 뜹니다. 창문으로 따스한 햇빛이 스며 들어옵니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몸을 일으키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밥을 먹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음악] 바로 이 일상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특별한 곳에 가지 않아도, 복잡한 수행을 하지 않아도, 그저 일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알아차린다면 진리가 저절로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걸을 때도, 앉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잠자리에 들 때도 항상 모든 순간을 관찰하고 알아차렸습니다. 숨을 쉬는 것을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숨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숨 또한 끊임없이 변합니다.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르고, 깊은 숨과 얕은 숨이 다릅니다. 빠른 숨과 느린 숨이 다릅니다. 매 순간 우리의 숨은 변합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생명 활동조차 무상무상(無常無常)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생각과 지금 이 순간의 생각이 다릅니다. 방금 전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도 다릅니다. 생각은 마치 물결처럼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마치 바닷가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이내 사라집니다. 그 어떤 생각도 영원히 붙잡을 수 없습니다.
감정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아침에는 기분이 좋았다가 점심 때는 사소한 일로 짜증이 났고, 저녁에는 온몸이 피곤함에 지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의 감정은 바뀝니다. 그 어떤 감정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기쁨도 잠시이고, 슬픔도 잠시입니다. 화도 잠시이고, 평온함 또한 잠시입니다.
중화암경이라는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감정을 화살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화살을 쏘았다. 그 화살은 공중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날아간다. 우리의 감정도 그와 같다.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머무르지 않는다." 화살을 쏘면은 화살은 공중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가다가 결국 땅에 떨어집니다. 우리의 감정도 이와 같습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감정이 일어납니다. 계속 변하며 어느 한 곳에 멈춰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감정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까요? 좋은 감정이 일어나면 그 감정을 붙잡으려 애씁니다. 계속 이 기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 감정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반대로 나쁜 감정이 일어나면은 그 감정을 밀어내려 애씁니다. 이 감정이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저항합니다. 이는 마치 날아가는 화살을 손으로 붙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며 오히려 스스로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 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스러운 손주가 놀러 왔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이의 웃음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그 모습만 보아도 행복으로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손주가 집으로 돌아가면 갑자기 집안이 고요해지고 마음 한편이 허전해집니다. 아까 느꼈던 그 행복감이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이미 지나간 순간을 붙잡으려 하는 마음, 변해 버린 상황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시간은 쉴 새 없이 흐르고 순간은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옛날 사진 첩을 꺼내어 젊었을 때 사진을 봅니다. "아, 그때가 좋았지. 몸도 건강했고 힘도 넘쳤고 꿈도 많았는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합니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 다음 달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내년에는 또 어떤 어려움이 닥칠까?" 걱정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평화를 잃게 될 뿐이지요.
부처님께서는 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를 쫓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라. 흔들리지 말고 지혜롭게 살라."
과거를 쫓지 말라는 것은 지나간 일에 매달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좋았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후회스러운 나쁜 과거에 얽매여 현재의 삶을 망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돌이킬 수 없습니다.
미래를 바라지 말라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일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미래가 이렇게 돼야만 해.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 하고 바라면서 현재를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머물지 말고 미래에 빠지지 말고 오직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우리가 살아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밥을 먹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합니다. 어제 있었던 불쾌한 일을 떠올리며 누군가 나에게 했던 말에 다시금 화를 내기도 하고, 혹은 내일 해야 할 일들을 미리 걱정하며 마음속이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도 정작 맛은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걷는 동안에도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느라 바쁩니다. 지금 발이 땅에 닿는 느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감촉, 들려오는 새소리 같은 현재의 경험을 놓치고 맙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죠.
이렇게 살다 보니 우리에게는 지금이라는 순간이 부재합니다. 항상 과거와 미래 속에 살고 있을 뿐, 소중한 현재라는 순간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립니다. 살아 있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현재에 머무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를 우리는 마음챙김(마인드풀니스)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걸을 때는 "걷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며,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구나" 하고 아는 것입니다.
사티파타나경이라는 경전에는 이 마음챙김에 대해 아주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수행자는 걸을 때 나는 걷고 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린다. 설 때 나는 서 있다고 알아차린다. 앉을 때 나는 앉아 있다고 알아차린다. 누울 때 나는 눕고 있다고 알아차린다." 참으로 간단한 가르침이지요. 특별한 수행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그냥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면서도 항상 다른 생각을 합니다.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걸으면서 전화 통화를 하고, 누워서 잠 못 이루며 걱정합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이죠. 자, 지금 이 순간 잠시 멈추고 한번 해 보십시오. 지금 저의 이 이야기를 정말로 듣고 있는지 알아차려 보십시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지, 다른 곳으로 마음이 달아나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십시오. 아마도 마음속에는 "오늘 저녁 메뉴는 뭘 할까? 내일 병원에 가야 하나? 손주에게 전해야 하는데" 같은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합니다. 마치 원숭이가 나뭇가지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원숭이 마음 또는 산란한 마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이 산란한 마음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이 마음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고요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러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요? 억지로 생각을 멈추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각을 억지로 멈추려 하면 더 많은 생각들이 마치 반항하듯이 솟아오릅니다. 그저 지켜보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 생각에 대해 좋고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고, 그 생각을 붙잡지도 않고, 그저 보는 것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십시오. 구름은 하늘에서 생겨났다가 이내에 사라집니다. 우리는 구름을 보지만 그 구름을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바라봅니다. 우리의 생각도 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화가 일어났다고 해 봅시다. "아, 지금 내 안에 화가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 화를 억지로 없애려 하지도 않고, 그 화에 휩쓸려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화가 있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그러면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았는데도 그 화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저 알아차리기만 해도 감정의 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슬픔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유, 지금 슬픔이 올라왔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슬픔에 깊이 빠져들지도 않고, 슬픔을 거하려 애쓰지도 않습니다. 그저 슬픔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슬픔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지고, 그 슬픔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기쁨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기쁨이 일어났을 때 "아, 기쁨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 기쁨을 영원히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쁨 또한 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을 마음껏 누리되 그 기쁨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기쁨이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놓아둡니다.
이렇게 감정을 대하면 우리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것이죠. 좋은 감정이 와도 너무 들뜨지 않고, 나쁜 감정이 와도 너무 가라앉지 않습니다. 항상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평등심(平等心)이라고 합니다. 평등심이란 무관심이 아닙니다.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느끼는 것은 느끼되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경험하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마치 연못 위에 떠 있는 오리와 같습니다. 오리는 물 위에 떠 있지만 물에 젖지 않습니다. 깃털이 물을 튕겨내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희로애락 속에 살지만 세상의 번뇌에 물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경험하지만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느끼지만 휘둘리지 않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정한 삶의 방식입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하면 세상의 번뇌에 물들지 않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연꽃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연꽃을 보아라.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은 그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진흙의 영양분을 받아 아름다운 꽃을 피워 물 위로 깨끗하게 솟아오른다. 수행자도 그와 같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번뇌에 물들지 않고 마음의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
연꽃을 보십시오. 그토록 아름답고 깨끗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랍니다. 진흙의 영양분을 받아 자라지만은 결코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고 오직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물 위로 당당히 솟아오릅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온갖 좋고 나쁜 일들을 겪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 번뇌에 물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직접 보여 주셨고 수많은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따라 그렇게 살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바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진실, 즉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깊이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도 변하고 나쁜 것도 변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진실을 깊이 깨달으면 모든 집착이 저절로 사라집니다.
좋은 일이 생겨 기쁠 때도 우리는 이 기쁨 또한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너무 들뜨거나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그 기쁨을 마음껏 즐기되 그 기쁨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나쁜 일이 생겨 괴로울 때도 우리는 이 고통 또한 영원하지 않고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너무 절망하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고통을 견디되 그 고통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습니다.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수많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합니다. 좋은 것도 언젠가 지나가고 나쁜 것도 언젠가 지나갑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날씨를 보십시오. 오늘은 맑고 햇빛이 좋습니다. 하지만 내일은 비가 올 수도 있고, 모래는 다시 맑아질 수도 있습니다. 날씨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우리는 맑은 날씨를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은 좋고 평온할 수 있지만 내일은 갑작스러운 어려움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래는 또다시 나아질 수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합니다. 좋은 날을 영원히 붙잡을 수도 없고, 힘든 날 또한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무상의 진리를 깊이 이해한다면은 우리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집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너무 자만하지 않고, 나쁜 일이 있을 때도 지나치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을 변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흐르는 것을 흐르는 대로 놓아둡니다. 마치 강물이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고, 낮은 곳을 만나면 채워지듯, 자연의 순리대로 우리의 마음도 유연하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자바함경에는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사라지는 것을 붙잡을 수 없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일어남에 기뻐하지 않고 사라짐에 슬퍼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나이가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만남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인연의 조건이 갖추면 모든 것은 저절로 일어납니다. 또한 여름이 지나가는 것을 붙잡을 수 없고, 젊음이 흘러가는 것을 붙잡을 수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인연의 조건이 다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이러한 진리를 깊이 아는 사람은 무엇인가가 새롭게 일어난다고 해서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어난 것도 언젠가 반드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엇인가가 사라진다고 해서 지나치게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사라진 것은 이미 지나갔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다시 한번 깊이 관찰해 봅시다. 봄이 오면은 온 세상에 꽃이 피어나고 생명이 약동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봄을 영원히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봄이 지나면 뜨거운 태양 아래 여름이 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오면 온 세상이 푸른 생동감으로 가득찹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름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여름이 지나면 풍요로운 가을이 올 것입니다. 가을이 오면 곡식이 익고 열매가 물을 익어 풍성함을 선물합니다. 하지만 가을 또한 지나가면 매서운 바람과 함께 고요한 겨울이 올 것을 압니다. 겨울이 오면은 모든 것이 춥고 고요하게 잠듭니다. 하지만 겨울 또한 영원하지 않으며 다시 봄이 올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렇게 계절은 끊임없이 돌고 돕니다. 우리는 각 계절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즐기지만 어느 한 계절에도 집착하여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계절이 다 그 나름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봄에 화려한 꽃도 좋고, 여름에 푸른 초목도 좋고, 가을에 풍성한 열매도 좋으며, 겨울의 고요함도 좋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모든 순간이 좋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삶의 각 시기가 모두 그 나름의 소중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음의 활력과 꿈도 좋고, 중년의 성숙함과 책임감도 좋으며, 노년의 깊은 지혜와 평온함도 좋습니다. 그 어떤 시기에도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모든 시기가 소중하고 좋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젊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하고, 어른이 되면 순수했던 젊음이 그리워집니다. 중년이 되면 다시금 뜨거웠던 청춘을 그리워하고, 노년이 되면 지난날의 모든 것이 그리워집니다.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살지 못하고 다른 때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통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온전히 있지 못하고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끝없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갈애(渴愛)라고 하셨습니다. 즉 목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목마름,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구. 이것이 바로 우리를 괴롭게 하는 주된 원인입니다. 아무리 많이 얻어도 진정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무리 채워도 마음속은 다시 비어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고 시원함에 만족합니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목이 마릅니다. 또 물을 마시면 또 시원하고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목이 마릅니다. 이 목마름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물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욕구 또한 이와 같습니다. 무언가를 어렵게 얻으면은 잠시 만족합니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잠시 후 우리는 또 다른 무언가를 원하게 됩니다. 또 그것을 얻으면 잠시 만족하지만 곧 또 다른 욕구가 고개를 듭니다.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바닥 없는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평생을 계속해서 무언가를 얻고 채우려 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을 예로 들어봅시다. "100만 원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100만 원을 벌었습니다. 잠시 기뻤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1천만 원만 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열심히 노력해서 1천만 원을 벌었습니다. 또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내 "이러고는 있어야 마음이 편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이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명예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싶습니다. 조금 인정받으니 좋았습니다. 하지만 곧 더 많이 인정받고 싶어집니다. 더 많이 인정받으니 또 [음악] 좋았지만 이내 더 큰 명예를 갈구하게 됩니다. 끝이 없습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은 우리는 평생을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항상 무언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마음속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래. 즉 끝없는 목마름의 고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가래의 불꽃을 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끝없는 욕구에 불을 끈다면은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욕구의 불을 끌 수 있을까요? 욕구를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없애려 하면은 오히려 욕구가 더 강하게 반항하며 솟아오릅니다. 그저 욕구가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욕구가 어떻게 일어났다가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지켜봅니다.
욕구 또한 감정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밥을 먹으면은 그 욕구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지고 또다시 먹고 싶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욕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욕구는 없습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벌고 싶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돈을 벌면 그 욕구는 잠시 채워집니다. 하지만 돈을 쓰면 다시 돈을 벌고 싶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처럼 욕구는 계속해서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단 한 번 채운다고 그래서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욕구의 본질을 깊이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욕구를 채워서는 욕구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요. 욕구를 채우면 잠시 만족하지만 곧 다시 새로운 욕구가 일어난다는 것을요. 결국 욕구를 계속해서 채우리하며 살아가는 것은 끝없는 절대로 끝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욕구와 다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욕구를 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욕구를 없애려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욕구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욕구가 일어나는 것을 보되 그 욕구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배가 고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신체의 반응입니다. 먹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습니다. 하지만 먹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은 인내심을 가지고 참습니다. 배고픔이라는 욕구에 휩쓸려 과도하게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돈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이 또한 현실적인 필요입니다. 필요한만큼 벌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돈이라는 욕구에 완전히 휘둘려 돈이 전부인 것처럼 살지는 않습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살면 욕구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의 종이 됩니다. 욕구가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구를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욕구가 존재하되 그 욕구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욕구에 노예가 되지 마라. 욕구를 다스리는 주인이 되어라. 그러면 자유롭다.
욕구의 노예로 사는 사람은 욕구가 시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욕구가 이것을 원하면 맹목적으로 쫓아가고 저것을 원하면 또다시 맹목적으로 쫓아갑니다. 평생을 욕구를 쫓아다니느라 바쁘고 지칩니다. 이러한 삶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욕구의 주인은 다릅니다. 그는 욕구가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보고 욕구의 본질을 이해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욕구는 적절히 채웁니다. 하지만 불필요한 욕구는 과감히 내려놓습니다. 욕구에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새벽 공기가 차갑고 고요합니다. 온 세상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간. 우리는 이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를 깊이 돌아봅니다.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이 질문은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정작 답하기는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름이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지어 주신 이름. 평생을 이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정말 나일까요?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내가 바뀌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름은 그저 나를 부르는 소리일 뿐이며 나를 가르치는 하나의 표식일 뿐입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이 몸이 나일까요? 하지만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린 시절의 몸과 지금의 몸은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우리 몸의 세포들은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7년마다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7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일까요?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 이 생각이 나일까요? 하지만 생각 또한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다르고 젊었을 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만약 생각이 나라면 생각이 바뀔 때마다 나도 바뀌는 것일까요?
우리는 느낌을 경험합니다. 그럼 이 느낌이 나일까요? 하지만 느낌 또한 순간순간 바뀝니다. 기쁨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슬픔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만약 느낌이 나라면 우리는 순간순간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따져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나라고 부를 만한 고정된 실체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몸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느낌도 변합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디에 존재할까요?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질문을 깊이 탐구하셨습니다. 나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나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면밀히 관찰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셨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수많은 조건들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요.
상응부 경전에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몸을 보라. 그것이 나인가? 느낌을 보라. 그것이 나인가? 생각을 보라. 그것이 나인가? 의지를 보라. 그것이 나인가? 의식을 보라. 그것이 나인가? 이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 어떻게 나일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라는 것이 정말 있는지 직접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내 몸을 보십시오. 이 몸이 나일까요? 몸은 늙고 병들고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늙지 않으려 해도 늙고 아프지 않으려 해도 아픕니다. 만약 이 몸이 진정 내 것이라면은 내 마음대로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느낌을 보십시오. 이 느낌이 나일까요? 느낌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기쁨이 일어나지도 않고 원치 않는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행복한 느낌을 계속 느끼고 싶어도 어느새 사라지고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싶지 않아도 불쑥 일어납니다. 느낌 또한 내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보십시오. 이 생각이 나일까요?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온갖 생각들이 멈추지 않아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생각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생각을 멈추고 싶을 때 언제든지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보십시오. 이 의지가 나일까요? 의지 또한 변합니다. 아침에는 오늘은 꼭 운동해야지 하고 결심했지만은 저녁에는 피곤해서 내일 하지 뭐 하고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어제는 다시는 화내지 않으리라 하고 다짐했지만 오늘도 또다시 화를 내고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의지조차도 온전히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을 보십시오. 이 의식이 나일까요? 의식 또한 변합니다. 깨어 있을 때의 의식과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의 의식이 다릅니다. 꿈을 꿀 때의 의식도 다릅니다. 깊은 잠에 빠지면 의식이 거의 없어집니다. 만약 의식이 나라면 잠들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일까요?
이렇게 자세히 살펴보면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몸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고 의식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은 아예 없는 것일까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경험은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을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경험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그 경험을 하는 고정된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경험은 있지만 그 경험을 하는 경험자는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흐름은 있지만 그 흐름을 만들어내는 흐르는 실체는 없다는 것이지요.
다시 강물을 생각해 봅시다. 강물이 흐릅니다. 분명 강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강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물이 흐르는 현상 그 자체입니다. 예. 물을 떠낸다고 해서 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물이 끊임없이 흘러들어 강을 채웁니다. 강이란 고정된 강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물이 흐르는 과정입니다. 우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순간순간 새로운 경험들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을 우리는 편의상 나라고 부를 뿐입니다. 마치 강물의 흐름을 강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촛불을 보십시오. 촛불이 활활 타고 있습니다. 이 촛불은 한 시간 전에 타던 촛불과 같을까요? 분명 다릅니다. 한 시간 전에 타던 촛불은 이미 다 타 버렸고 지금은 새로운 초농이 녹아 새로운 불꽃을 태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같은 촛불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도 이와 같습니다. 어제 나와 오늘의 나는 몸도 바뀌었고 생각도 바뀌었고 느낌도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는 인과 관계라는 연속성이 존재합니다. 어제의 행동이 오늘의 결과를 만들고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나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같은 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무아(無我)라고 하셨습니다.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나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직 순간순간 변해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 무아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굳게 믿고 살아왔습니다. 나를 지키고 나를 키우고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라는 실체가 없다고 하니 혼란스럽고 마치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또다시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나라는 것이 없다면 누가 수행합니까? 누가 깨달음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자비롭게 대답하셨습니다. 수행은 있지만 수행자는 없다. 깨달음은 있지만은 깨달은 자는 없다. 마치 비가 내리지만 비를 내리는 주체가 따로 없는 것과 같다.
비가 내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내리는 현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비를 내리게 하는 주체가 따로 있을까요? 없습니다. 온도, 기압, 습도 등 수많은 자연적인 조건들이 모여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 조건들이 사라지면 비도 그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주체 없이 조건에 의해 일어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하는 현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노력하고 관찰하고 깨닫는 과정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행을 하는 고정된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이해, 바른 노력, 바른 환경 등 여러 가지 조건들이 모여서 수행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걷는 행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걷는 자가 따로 있을까요? 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다리가 움직이고 팔이 흔들리고 몸의 균형이 유지됩니다. 여러 부분들이 조화롭게 움직여서 걷는 행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걷는 자가 따로 있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한다고 해 봅시다. 생각이 일어납니다. 생각하는 현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자가 따로 있을까요? 뇌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뇌세포들이 활동하고 신경들이 연결되고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들이 모여서 생각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자가 따로 있어서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깊이 들여다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저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정된 주체 없이 일어나는 과정일 뿐입니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일어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사라집니다. 배가 고프면은 먹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피곤하면 자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나를 집어넣습니다. 내가 배고프다. 내가 먹고 싶다. 내가 피곤하다. 내가 자고 싶다. 이렇게 모든 경험에 나라는 주체를 붙입니다. 마치 나라는 고정된 주체가 있어서 이 모든 것을 경험한다고 착각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실체가 없는 나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 나를 지키려 하고 그 나를 키우려 하며 그 나를 위해 살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모든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중앙경에는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에 집착이 생긴다. 내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에 괴로움이 생긴다.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면은 집착도 사라지고 괴로움도 사라진다.
나라는 생각. 이것이 바로 모든 문제의 뿌리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면은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뒷따라 일어납니다. 나에게 좋은 것을 원하고 나에게 나쁜 것은 피하려 합니다. 나를 높이려 하고 나를 낮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 이것 또한 큰 문제입니다. 내 가족, 내 재산, 내 명예, 내 생각 이렇게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듭니다. 내 것이 잘되면은 기뻐하고 내 것이 안 되면 괴로워합니다. 내 것을 지키려 애쓰고 내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합니다.
사랑스러운 손주를 보십시오.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내 손주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걱정이 시작됩니다. 내 손주가 아프면 어쩌나 내 손주가 다치면 어쩌나 끊임없이 걱정합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재산을 보십시오. 평생을 힘들게 모은 돈입니다. 내 돈이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불안이 시작됩니다. 내 돈이 줄어들까 봐 걱정하고 내 돈을 잃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오래 살아온 집을 보십시오. 내 집이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집착이 시작됩니다. 내 집이 낡아가는 것이 걱정되고 내 집을 떠나야 할 때면 슬퍼합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생각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내 의견, 내 관점, 내 신념 이런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 했습니다. 누가 내 생각과 다르게 말하면 기분이 나쁘고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하면 화가 납니다. 생각마저 내 것으로 만들어서 집착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내 것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집착이 사라지고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갑자기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누가 사는 것인가? 내 것을 내려놓으면 무엇으로 사는 것인가? 같은 깊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의문을 이해하시고 천천히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관찰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스스로 관찰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내 몸을 보고 느낌을 보고 생각을 보고 의지를 보고 의식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 중에서 과연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내 몸을 관찰해 보십시오. 이 몸이 과연 나일까요? 이 몸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음식을 먹고 자랐고 공기로 숨 쉬며 살아갑니다. 이 몸은 수많은 조건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습니다.
내 생각을 관찰해 보십시오. 이 생각이 과연 나일까요? 생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우리가 듣고 보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부터 옵니다. 부모님께 배운 것, 학교에서 배운 것, 사회에서 경험한 것 이런 수많은 정보들이 모여서 생각이 됩니다. 내가 온전히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내 느낌을 관찰해 보십시오. 이 느낌이 과연 나일까요? 느낌은 외부의 조건이나 내 몸의 상태에 따라 일어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은 기쁨이 일어나고 나쁜 일이 생기면은 슬픔이 일어납니다. 내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갖추어지면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깊이 관찰하다 보면은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정말로 없다는 것을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요. 고정된 주체 없이 일어나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요.
처음에는 이 진실이 두렵고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다니 그럼 나는 무엇인가 하는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면밀히 관찰하다 보면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도 삶은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을요. 오히려 나라는 집착이 사라지니 마음이 훨씬 더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십시오. 새는 내가 날아야 해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납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타고 기류가 바뀌면 방향을 바꿉니다.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날아갑니다. 새에게는 나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새는 자유롭습니다.
물이 흐르는 것을 보십시오. 물은 내가 흘러야 해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바위를 만나면 부드럽게 돌아가고 낮은 곳을 만나면 망설임 없이 흘러갑니다. 물에게는 나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물은 자유롭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일어나는 대로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려 하지 않고 억지로 무언가를 지키려 하지 않고 그저 흐른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미소지며 대답하셨습니다. 오히려 더 잘 살아갈 수 있다. 나를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이 없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고 나를 키워야 한다는 끝없는 욕심이 없으니 마음이 평화롭다.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평생토록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나를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 때문입니다. 내 체면을 지켜야 하고 내 자존심을 지켜야 하며 내 명예와 내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끊임없이 지켜야 할 것이 너무도 많으니 우리의 어깨는 항상 무겁습니다.
또한 나를 키워야 한다는 끝없는 욕심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인정받아야 하고 더 성공해야 하며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쳐 있고 아무리 얻어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강박도 있습니다. 나에게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하고 나에게 나쁜 것은 피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고민해야 하니 마음은 늘 불안하고 결정은 어렵습니다.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은 바로 나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그 나를 지키고 키우고 위해 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라는 것이 애초에 없다면 어떨까요? 지킬 나가 없으니 부담이 사라지고 마음이 가볍습니다. 키울 나가 없으니 욕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위할 나가 없으니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여행자처럼 우리는 가볍고 평화로우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묵묵히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면 진심으로 만납니다. 밥을 먹을 때는 그저 밥을 먹을 뿐 특별히 나를 위한다는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맡은 일이 잘되면 기쁩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 잘돼야 한다는 집착이 없습니다. 그저 일이 잘돼서 기쁠 뿐입니다.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아쉽습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안 되면 안 된다는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저 안 되어서 아쉬울 뿐입니다.
사람을 만납니다. 좋은 사람이면 반갑고 기쁩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 좋아야 한다는 욕심이 없습니다. 그저 좋아서 반가울 뿐입니다. 혹 불편한 사람이면은 불편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싫으면 안 된다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저 불편한 감정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렇게 살면 삶의 모든 것이 가벼워집니다. 나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나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 없이도 삶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흘러갑니다.
금강경에는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수명이라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이 네 가지 생각이 없으면 진정한 보살이다.
나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은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남이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은 나와 남을 나누는 경계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은 모든 존재를 똑같이 소중하게 보는 마음입니다. 수명이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깨달으면 진정한 보살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살이란 남을 돕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서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을까요? 오히려 나라는 생각이 없어야 비로소 진정으로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우리는 결국 나를 위해 돕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돕고 내가 공덕을 쌓으려고 돕습니다. 내가 인정받으려고 돕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위한 조건부적인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그저 돕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있으니 돕는 것입니다. 내가 도와서 무엇을 얻겠다는 생각 없이 그저 순수하게 돕습니다. 자연스럽게 돕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도움입니다.
해가 뜨는 것을 보십시오. 해는 누구를 위해 뜰까요? 아무도 위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뜹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가 햇빛을 받습니다. 좋은 사람도 받고 나쁜 사람도 받습니다. 부자도 받고 가난한 사람도 받습니다. 차별 없이 모든 것을 비춥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보십시오. 비는 누구를 위해 내릴까요? 아무도 위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내립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가 비를 맞습니다. 큰 나무도 맞고 작은 풀도 맞습니다. 높은 것도 맞고 낮은 것도 맞습니다. 차별 없이 모든 것을 적십니다.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이렇게 됩니다.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존재를 똑같이 대합니다. 내 편. 내 편이 없습니다. 내 것, 내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존재로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비입니다.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방안을 따뜻하게 채웁니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어제와 같은 하루 같지만 사실은 완전히 새로운 하루입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오늘은 우리가 처음 맞이하는 날입니다. 이 순간은 다시는 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무상(無常), 무아(無我) 이 두 가지 깊은 진리를 이제 우리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머리로 이론을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이 시간에는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감사입니다. 오늘도 눈을 뜰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젯밤 깊은 잠에 들면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깨어났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숨을 쉽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몸을 일으킵니다. 내 몸이 움직입니다. 다리가 움직이고 팔이 움직입니다. 이것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어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세수를 합니다. 수도꼭지를 틀면 깨끗한 물이 시원하게 나옵니다. 이것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깨끗한 물이 없어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깨끗한 물을 마음껏 쓸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하나 감사하는 마음을 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수많은 조건과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금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법경에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건강이 최고의 재산이다. 만족이 최고의 부이다. 믿음이 최고의 친구이다. 열반이 최고의 행복이다.
부처님께서는 건강이 최고의 재산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몸이 아프면은 그 많은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아파야 비로소 건강의 가치를 깨닫게 되죠. 그러니 건강할 때 몸이 움직일 수 있음에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만족이 최고의 부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마음속에 만족이 없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과 다름 없습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조금밖에 없어도 그 안에 만족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부자입니다. 만족은 재산의 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바로 만족입니다.
우리는 종종 없는 것의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 하며 항상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지금 있는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이 있어서 세상을 볼 수 있고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입이 있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습니까?
집이 있어서 비바람을 피하고 추위를 막을 수 있으며 편안히 쉴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집 없이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밥을 먹을 수 있어서 배고프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가족이 있어서 외롭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홀로 사는 사람들이 많고 의지할 것 없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이렇게 있는 것들을 세어 보면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없는 것에만 시선을 고정하여 불만족스러워합니다. 있는 것을 보면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합니다. 밥을 먹을 때 그저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먹습니다. 밥알 하나하나를 씹으면서 깊이 생각합니다. 이 밥알이 어떻게 내 식탁까지 왔을까?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따스한 햇빛이 비추고 단비가 내렸습니다. 농부는 김을 매고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가을에는 힘들게 거두어드리고 도정을 하고 운반하여 시장에서 우리가 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밥을 지어 비로소 내 입에 들어왔습니다. 이 밥알이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갔습니까? 농부의 땀, 햇빛의 은혜, 비의 자비, 땅의 힘 모든 인연들이 모여서 비로소 이 밥알이 되었습니다.
반찬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치 한 점 속에도 배추를 키운 농부, 소금을 만든 사람, 고추를 따고 양념을 만든 사람, 그리고 김치를 담근 사람의 노력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음식이 이와 같습니다. 수많은 인연이 모여서 비로소 이 한 끼 식사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알면 우리는 함부로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고 소중히 여겨 먹습니다. 음식물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밥알 한 알, 반찬 한 점이 모두 소중한 생명이고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양(供養)입니다. 그저 배를 채우기에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절에서는 공양을 하기 전에 오관기(五觀記)를 외웁니다. 다섯 가지를 생각한다는 뜻이지요. 첫째,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를 생각합니다. 많은 인연의 결실임을 알아차립니다. 둘째, 내가 이것을 받을 만한가를 생각합니다. 과연 나는 이 음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오늘 하루 무엇을 했으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는가 하고 스스로를 반성합니다. 셋째, 마음의 허물을 막기 위해 받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맛있는 것에 탐하지 않고 그저 내 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만큼만 받습니다. 넷째, 몸을 유지하기 위해 받습니다. 즐기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먹는 것입니다. 다섯째, 도달을 이루기 위해 받습니다. 이 몸을 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남을 돕고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이 음식을 받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먹으면 식사 한 끼가 곧 수행이 됩니다. 그저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감사하고 반성하며 더 나은 삶을 다짐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니 하루에 세 번씩 수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를 합니다. 그릇을 씻을 때도 마음 챙김으로 합니다. 그저 빨리 끝내려 하지 않고 천천히 합니다. 손 끝에 닿는 물의 감촉을 느끼고 그릇이 깨끗해지는 것을 바라봅니다. 손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알아차립니다. 이처럼 우리 일상의 모든 행위가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밥 먹는 것, 설거지 하는 것, 걷는 것, 앉는 것, 무엇을 하든지 알아차리며 하면은 그것이 곧 수행입니다.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일상 그 자체가 수행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걸을 때 걷는 줄 알고 설 때 서 있는 줄 알고 앉을 때 앉아 있는 줄 알고 누울 때 누워 있는 줄 안다면 그 사람은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다. 굳이 특별히 절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특별한 자세를 하고 가부좌를 틀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일상의 모든 순간을 알아차리며 살면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온전히 알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동네를 산책할 때 천천히 걷습니다. 발이 땅에 닿는 감촉을 느낍니다. 왼발, 오른발, 발걸음 하나하나를 알아차립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살에 스치는 것을 느끼고 새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를 듣습니다. 그저 걷는 것에 집중합니다. 걷는 동안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생각하거나 어제 있었던 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걷다 보면은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생각이 줄어들고 지금이 순간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게 됩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이 순간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명상입니다.
앉아서 하는 명상도 좋습니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좋습니다. 편안하게 앉습니다. 등을 곧게 펴고 눈을 지긋이 감습니다. 그리고는 숨을 관찰합니다. 들이시는 숨, 내쉬는 숨. 그저 지켜봅니다. 명상 중에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생각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 지금 생각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부드럽게 숨으로 돌아옵니다. 생각이 또 일어나면 또 알아차리고 다시 숨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처음에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산만하게 느껴지고 집중이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평생을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생각이 멈추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저 꾸준히 계속 연습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변화가 찾아옵니다. 생각이 줄어들고 마음이 고요해지며 내면의 평온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선정(禪定)이며 삼매(三昧)입니다.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루 10분이면 충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10분 또는 저녁에 잠자리 들기 전에 10분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큰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꾸준함입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도 매일 명상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매일 명상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명상은 우리의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방을 매일 청소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매일 닦아 줘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최선을 다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만큼 하고 노력할 수 있는만큼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잘되면은 기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결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해서만이 아니라 수많은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서 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아쉽습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습니다. 조건이 맞지 않아서 안 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고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마라. 결과가 행위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통합니다. 과정에 충실하되 결과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농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농부는 최선을 다해 농사를 짓습니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맵니다. 하지만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날씨, 해충 등 농부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외부 요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농부는 그 결과를 모르지만 매년 최선을 다해 농사를 짓습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과정에는 충실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과정에 충실하고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부자든 가난하든 모든 존재를 똑같이 존중합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사람이 나처럼 고통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싫어합니다. 나와 다를 바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처럼 저 사람도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고 싶은 것처럼 저 사람도 행복하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고 싶은 것처럼 저 사람도 인정받고 싶을 것이고 내가 사랑받고 싶은 것처럼 저 사람도 사랑받고 싶을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습니다.
이러한 진실을 깊이 이해하면은 우리는 그 누구도 미워할 수 없습니다. 혹이 나쁘게 행동한다 해도 그 행동 또한 깊은 마음속 고통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괴로우니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진정으로 평화로웠다면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배가 아파서 밤새도록 울고 보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아이에게 화를 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가엽게 여기고 안쓰러워하며 아이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을 것입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나쁘게 행동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가엽게 여기고 자비로운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자비 수행입니다.
자비 수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기르는 수행이죠. 조용히 앉아서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반복해서 되뇌어 봅니다.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보냅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평화롭기를, 내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가엽게 여깁니다. 나도 참 힘들었고 나도 참 많이 고통받았지 하고 나 자신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냅니다.
그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냅니다. 가족, 친구, 나에게 소중한 모든 사람들을 떠올리며 당신이 행복하기를, 당신이 평화롭기를, 당신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하고 마음속으로 되냅니다.
그다음으로는 중립적인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냅니다.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가게 주인, 버스 기사, 이름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도 행복하기를, 당신도 평화롭기를 하고 마음을 보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어려운 단계일 수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에게도 자비를 보냅니다. 당신도 행복하기를, 당신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비록 어렵지만 끊임없이 연습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존재에게 자비를 보냅니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모든 존재가 평화롭기를, 모든 존재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보냅니다.
이렇게 매일 조금씩 자비 수행을 연습하다 보면 우리의 마음이 점차 부드러워집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줄어들고 분노가 사그라듭니다. 자비로운 마음이 점점 커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모든 존재가 소중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바함정경에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는다. 오직 사랑으로만 풀린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다. 누군가 나를 해쳤을 때 우리는 화가 나고 복수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수하면 어떻게 될까요? 상대방 또한 다시 복수하려 들 것입니다. 원한이 원한을 낳고 미움이 미움을 낳는 끝없는 악순환이 이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대하면 다릅니다. 미워하지 않고 용서합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마음도 변할 수 있습니다. 경직되었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미안함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작은 일부터 연습합니다. 큰 원한은 아직 어려워도 작은 불편함이나 서운함은 먼저 내려놓는 연습을 합니다. 조금씩 연습하다 보면은 언젠가는 큰 원한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저녁이 되면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조용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잘한 것이 있다면은 기뻐합니다. 하지만 교만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겸허히 반성합니다. 하지만 자책하지 않습니다. 그저 알아차리고 내일은 더 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오늘 하루 감사했던 일들을 세워 봅니다. 밥을 먹을 수 있어서 두 발로 걸을 수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이 순간 숨을 쉬고 있어서 작은 것부터 세워 봅니다. 세다 보면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내일은 더 알아차리며 살겠다. 더 감사하며 살겠다. 더 자비롭게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듭니다. 잠들기 전에 다시 한번 짧게 명상합니다. 숨을 관찰하고 온몸의 긴장을 풀어 이완합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다고 나 자신에게 따뜻하게 말해 줍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평화롭기를 바라면서 잠이 듭니다.
이렇게 살면은 하루하루가 곧 수행입니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일상 자체가 수행의 길입니다. 알아차리며 사는 것, 감사하며 사는 것, 자비롭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삶입니다.
무상, 무아. 이 두 가지 깊은 진리를 항상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모든 것은 태어난다.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일어난다. 이 진실을 깊이 알고 살면은 우리의 집착이 줄어듭니다. 집착이 줄어들면은 고통 또한 줄어듭니다. 고통이 줄어들면 마음속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좋은 일이 생겨도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되 영원히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나쁜 일이 생겨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 고통 또한 언젠가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어려움을 견디되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남도 인연의 시작이고 헤어짐도 인연의 끝입니다. 만났을 때는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헤어질 때는 미련 없이 보냅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모든 만남은 일시적이고 모든 관계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재산도 그렇습니다. 돈이 있을 땐 감사하고 돈이 없을 때는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돈은 마치 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들어왔다가 나가고 모았다가 갑니다. 흐르는 물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면 괴롭습니다. 그저 흐르게 두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명예도 그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면 고맙지만 인정받지 못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명예 또한 끊임없이 변합니다. 오늘 칭찬 받았다 해도 내일은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할 때는 그 건강에 감사하고 아플 때는 그 아픔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우리 몸 또한 끊임없이 변합니다. 젊을 때는 건강하고 활기차지만 늙으면 약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이 순리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순리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언젠가 죽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 누구도 피해할 수 없습니다. 두려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죠?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선하게 지혜롭게 살려 노력하고 죽음을 맞이할 때에는 담담하고 평화롭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제자들이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슬퍼하지 마라.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하다. 만난 것은 반드시 헤어지고 생긴 것은 반드시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변치 않는 진리다. 이 진리를 너희는 받아들여라.
가장 위대하신 부처님께서도 육신을 놓으셨습니다. 우리 또한 언젠가는 이 몸을 놓을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순간을 온 마음 다해 소중히 여깁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알아차리며 삽니다. 감사하며 삽니다. 그리고 사랑하며 삽니다.
하루가 끝나갑니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살아냈음에 감사합니다. 내일 아침 해가 다시 뜰 것입니다. 새로운 하루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그때도 이렇게 알아차리며 감사하며 자비롭게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이 긴 시간 동안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무상과 무아, 이 두 가지 깊은 진리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어쩌면 어려운 이야기였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상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좋은 것도 변하고 나쁜 것도 변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고 집착이 사라지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순간순간 변해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나를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집니다. 이 두 가지 진리, 무상과 무화를 제대로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고통이 줄어들고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평생을 이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깨우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깨우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만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노력하면 깨우칠 수 있습니다. 다만 매일 조금씩 관찰하고 알아차리고 실천하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감사하십시오.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하루를 시작하면서 다짐하십시오. 오늘은 더 알아차리며 살겠다고, 더 감사하며 살겠다고, 더 자비롭게 살겠다고 다짐하십시오.
일상생활을 살면서 모든 것을 관찰하십시오. 몸이 변하고 느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는 것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흐르고 모든 것이 지나가는 것을 보십시오. 그 어떤 것도 영원히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십시오.
나를 찾아보십시오. 정말로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는지 찾아보십시오. 몸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느낌도 변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천천히 관찰하십시오. 억지로 답을 만들려 하지 마시고 그저 있는 그대로 오십시오.
매일 조금씩이라도 명상하십시오. 단 10분이면 됩니다. 편안하게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십시오. 생각이 일어나면 알아차리고 다시 숨으로 돌아오십시오. 매일 꾸준히 하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변화가 올 것입니다.
자비를 기르십시오. 나 자신에게도 자비롭게 대하고 다른 모든 존재에게도 자비롭게 대하십시오. 모든 존재는 고통받는 존재이며 모든 존재는 행복을 원합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면은 그 누구도 미워할 수 없고 오직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하며 사십시오. 지금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없는 것을 바라지 말고 지금 가진 것을 보십시오. 감사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숨 쉴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집착을 내려 놓으십시오. 좋은 것이 와도 붙잡지 마시고 나쁜 것이 와도 밀어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흘러갑니다. 그저 흐르는 대로 두십시오. 강물처럼 흐르게 두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입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과정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이십시오. 잘되면 감사하고 뜻대로 안 되면은 다시 노력하면 됩니다. 결과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나머지는 자연의 섭리에 맡기십시오.
저녁에는 하루를 돌아보십시오. 오늘 하루 무엇을 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십시오. 잘하는 것은 기뻐하고 부족했던 것은 반성하십시오. 그리고 내일은 더 잘하겠다고 다짐하십시오.
잠들기 전에 모든 존재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나만 행복하기를 바라지 마시고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시오. 나만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마시고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십시오.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면은 어느새 여러분의 삶은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고통이 줄어들어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벼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져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사람의 고통도 똑같고 고통의 원인도 똑같으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또한 똑같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