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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말씀] 반야심경, 공(空)을 알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ㅣ반야심경으로 집착 내려놓기ㅣ색즉시공 공즉지색ㅣ부처님말씀ㅣ마음공부

불교믿음1:18:01

Transcription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요? 분명 나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하고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잃을까 봐 불안하고 사랑받지 못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을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손에 쥔 것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경험, 붙잡으려 할수록 더 멀어지는 경험, 채우려 할수록 더 비어가는 경험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2500년 전 부처님께서는 이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꿰뚫어 보셨고 그 해답을 단자에 담아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불교의 5천 경전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바로 이 경전이 될 것이며, 스님들께서 매일 독송하시는 경전도 바로 이것입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한 글자로 요약됩니다. 바로 '공(空)' 빌 공자입니다. '공'이라는 이 한 글자 안에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었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담겨 있었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방법이 담겨 있었습니다. 공을 알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공을 알면 집착할 것이 없어지고, 집착이 없어지면 고통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가장 빠른 길이고, 오늘 여러분께 그 길을 안내해 드리려 합니다.

혹시 지금 무언가를 붙잡고 계신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이 있으실 수 있고,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잊지 못하는 것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일 수도 있고, 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일 수도 있으며,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원망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우신지 압니다. 내려놓으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들리시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이 끝나면 조금은 달라지실 것이며, 붙잡고 있던 손의 힘이 조금은 풀어지실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어려운 경전이 아닙니다. 260자밖에 되지 않아서 누구나 외울 수 있는 분량이고, 아이도 읽을 수 있는 짧은 경전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경전 안에 불교의 모든 진리가 응축되어 있었으며, 마치 씨앗 하나에 거대한 나무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씨앗 하나를 떠올려 보십시오. 손톱만 한 작은 씨앗인데 그 안에 뿌리가 담겨 있고, 줄기가 담겨 있으며, 잎과 꽃과 열매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씨앗만 보면 알 수 없지만, 땅에 심고 물을 주면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펼쳐지게 됩니다. 반야심경도 이와 같습니다. 260자라는 작은 씨앗 안에 깨달음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고, 이 경전을 마음에 심고 사유하면 그 안에 있던 지혜가 피어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이 씨앗을 심어 드리겠습니다.

공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을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오해하시며, 텅 빈 것, 존재하지 않는 것,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공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 따라 흩어지며,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생긴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공의 참뜻입니다.

구름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늘에 구름이 떠 있을 때 우리는 구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구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다에서 물이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었고,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 차가운 공기를 만나 구름이 된 것입니다. 구름은 물이 모습을 바꾼 것이지,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구름이 사라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가 되어 내리는 것이며, 비는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되어 다시 증발합니다. 구름은 생겨난 적도 없고, 사라진 적도 없으며, 다만 모습을 바꾸어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공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몸은 부모님에게서 왔고, 부모님의 몸은 조부모님에게서 왔으며, 거슬러 올라가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땅에서 자란 것이고, 땅은 햇빛과 비와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우리 몸 안에는 온 우주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나는, 부모 없이 태어난 나는 없고, 공기 없이 숨 쉬는 나는 없으며, 물과 음식 없이 살아가는 나는 없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고, 그 인연이 흩어지면 나도 흩어지게 되니, 고정된 나라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아이고, 이것이 공입니다.

이것을 알면 집착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 것, 내 사람, 내 생각, 내 감정. 이렇게 나라는 것을 중심으로 붙잡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것 자체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면, 내 것이라는 것도 성립하지 않게 됩니다. 바람을 손으로 움켜쥘 수 없듯이, 실체가 없는 것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손만 아플 뿐이며, 놓으면 오히려 바람이 손을 감싸게 됩니다.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붙잡지 않고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을 붙잡으려 하면 관계가 질식하게 되고, 놓아주면 오히려 가까워지게 됩니다. 꽃을 붙잡으면 꽃이 시들지만, 물을 주고 햇빛을 주면 꽃이 스스로 피어나게 됩니다. 공을 안다는 것은 이런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는 관자재보살이 등장합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며, 중생의 고통을 살피시고 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 보살님께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온(五蘊)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시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온이란 우리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색, 수, 상, 행, 식. 이 다섯 가지가 모여 나라는 것을 이루고 있는데, 관자재보살께서 보시니 이 다섯 가지가 모두 공하였던 것입니다. 공하다는 것을 알았더니 고통에서 벗어나셨으며, 고통의 원인은 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감정이 나라고 생각하고, 이 생각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몸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고 느끼고, 감정이 상하면 내가 상했다고 느끼며, 생각이 부정당하면 내가 부정당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구름이 흩어져도 하늘은 그대로이듯, 몸과 감정과 생각이 변해도 그것을 보고 있는 무언가는 변하지 않습니다.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져도 바다는 그대로이듯, 온갖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져도 그 바탕은 고요합니다. 반야심경은 그 바탕을 보게 해주는 경전이며,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바다로 살게 해주는 경전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금 파도 속에 계신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방향을 잃으셨을 수도 있고, 생각의 파도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공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파도도 지나갈 것이며, 이 감정도 변할 것이고, 이 생각도 흩어질 것입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지금의 고통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의 '반야'는 지혜라는 뜻이고, '심경'은 핵심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반야심경은 지혜의 핵심을 담은 경전이라는 의미이며, 그 지혜란 바로 공의 지혜입니다. 공을 아는 것이 반야이고, 반야를 통해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 바라밀다입니다. 피안이란 저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차안이고, 건너가야 할 곳이 피안입니다. 차안은 고통의 세계이고, 피안은 해탈의 세계이니, 반야심경은 고통의 이쪽에서 해탈의 저쪽으로 건너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경전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공을 알고 나면 차안과 피안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가 곧 저기이고, 저기가 곧 여기이며, 건너갈 곳이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번뇌가 곧 보리이고, 생사가 곧 열반이라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렵게 들리실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바로 싹이 나지 않듯이, 가르침도 마음에 떨어지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들으신 말씀이 마음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가, 어느 순간 싹을 틔우게 될 것이며, 그때 '아, 이것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실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그 씨앗을 심는 시간입니다.

반야심경 260자를 하나하나 풀어 가면서 공의 의미를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려운 불교 용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공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집착을 내려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방법을 몰랐을 뿐이고, 그 방법이 반야심경 안에 있습니다. 오늘 그 방법을 알게 되시면, 내일부터 조금씩 달라지실 것이며, 붙잡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손에서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고, 붙잡지 않고 함께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도 더 깊어지고, 관계도 더 편안해지며, 삶 전체가 여유로워지게 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반야심경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60자 안에 담긴 우주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 가면서, 공이 무엇인지, 왜 공을 알아야 하는지, 공을 알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 주십시오.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되고, 외우려고 힘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들으시면 되며, 마음에 닿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만 가져가시면 됩니다. 공의 세계가 열립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온(五蘊)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시고 일체의 고해를 건너셨느니라." 이것이 반야심경의 시작이며, 이 한 문장 안에 경전 전체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관세음보살님께서 깊은 수행을 하실 때 무엇을 보셨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나셨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여러분, 관세음보살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중생의 소리를 들으시고 고통에서 구해 주시는 분이시며, 자비의 화신으로 불리는 분이십니다. 그런 보살님께서도 수행을 하셨고, 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보살님께서 무엇을 깨달으셨는지, 그것이 바로 반야심경의 내용입니다.

'반야'라는 말은 지혜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냥 지혜가 아니라 특별한 지혜입니다. 세상의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반야가 아니고, 머리가 좋아서 계산을 잘하는 것이 반야가 아닙니다. 반야는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이며, 있는 그대로를 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내 생각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고, 내 감정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봅니다. 그래서 같은 것을 보아도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반야는 이 필터와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바라밀다'는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피안이란 저 언덕이고, 차안은 이 언덕이니, 고통의 이쪽에서 해탈의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다한 지혜를 통해 피안에 이르는 것이며, 깨달음의 지혜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심경'이라는 말은 핵심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심장이 몸의 중심이듯, 심경은 가르침의 중심이 되는 경전입니다. 반야심경은 반야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경전이며, 방대한 반야 경전을 260자로 압축한 것입니다. 반야 경전은 원래 매우 방대합니다. 대반야경은 600권에 달하고, 금강경도 반야경전의 일부입니다. 이 방대한 가르침을 가장 짧게 요약한 것이 반야심경이니, 260자 안에 600권의 정수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는 넓고 깊어서 그 끝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물 한 방울을 떠서 보면, 그 안에 바다의 성분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짠맛도 있고, 미네랄도 있고, 바다의 본질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도 이와 같습니다. 반야경이라는 바다에서 가장 정수만 뽑아낸 한 방울이며, 그 한 방울 안에 바다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260자를 이해하면 600권을 이해한 것과 같으며, 이것이 반야심경의 놀라운 점입니다.

이 경전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반야심경의 산스크리트어 원보는 인도에서 만들어졌고, 이것이 중국으로 전해져 한역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번역은 현장법사의 번역이며, 우리가 지금 읽는 반야심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때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 분입니다. 17년간 인도에 머물면서 불경을 공부하시고, 수많은 경전을 가지고 돌아오셨습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가 바로 이분을 모델로 한 것이며, 실제로 현장법사의 여정은 서유기보다 더 극적이었습니다.

현장법사께서 인도로 가시는 길에 사막을 건너야 했습니다. 물도 없고 길도 없는 사막에서 길을 잃으셨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셨습니다. 그때 반야심경을 외우셨다고 하며, 경전을 외우며 걸으셨고, 마침내 사막을 건너셨던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반야심경을 외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경전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힘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주고, 절망 앞에서 희망을 주는 경전이라는 의미입니다.

현장법사께서 번역하신 반야심경은 260자입니다. 이것을 약본이라 부르고, 더 긴 판본을 광본이라 부릅니다. 광본에는 부처님께서 삼매에 드신 상황이 나오고, 관자재보살께서 사리불에게 가르침을 전하시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약본인 260자 반야심경에는 부처님께서 등장하시지 않습니다. 관자재보살의 깨달음을 직접 전하는 형식이며,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는 주로 이 약본을 사용합니다.

반야심경이 왜 이토록 사랑받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짧기 때문입니다. 260자는 누구나 외울 수 있는 분량이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독송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읽고, 잠들기 전에 한 번 읽어도 몇 분이면 충분합니다. 둘째로 깊이입니다. 짧지만 얕지 않으며,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가 보입니다. 처음 읽을 때와 100번 읽었을 때가 다르고, 젊었을 때 읽은 것과 나이 들어 읽은 것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셋째로 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은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삶에 적용됩니다. 집착을 내려놓는 방법을 알려주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줍니다. 스님들께서 매일 반야심경을 독송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짧아서 매일 할 수 있고, 깊어서 매일 해도 새로우며, 실용적이어서 매일의 삶에 도움이 됩니다. 2500년간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 경전을 외우고 사유해 왔으며, 그 효험이 검증된 것입니다.

이제 반야심경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260자를 크게 나누면 서분과 정종분과 유통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분은 서론이고, 정종분은 본론이며, 유통부는 결론입니다. 서분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五蘊)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시고 일체의 고해를 건너셨느니라." 이 부분입니다. 경전의 주인공과 상황을 소개하는 부분이며, 결론을 먼저 말해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정종부는 핵심 가르침을 펼치는 부분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부터 시작하여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무고진멸도, 무지역 무득"까지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공의 의미를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유통부는 반야바라밀다의 공덕을 찬탄하고 진언을 설하는 부분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진언이 경전의 마무리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구조를 외우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하나씩 풀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시게 될 것이며, 지금은 전체 지도를 보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온개공'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 이것이 관자재보살께서 보신 것이고, 이것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오온이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색, 수, 상, 행, 식이 다섯 가지를 온이라 부릅니다. 온이란 모임이라는 뜻이니, 다섯 가지 모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모여서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습니다.

색은 물질입니다. 우리 몸과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색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이 모든 것이 색에 해당합니다. 수는 느낌입니다. 좋다, 나쁘다, 편하다, 불편하다. 이런 감각적 느낌이 수입니다. 무언가를 접했을 때 드는 첫 번째 반응이며, 아직 생각이 개입하기 전에 순수한 느낌입니다. 상은 표상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상입니다. 이것은 꽃이다, 저것은 나무다. 이렇게 대상을 구별하고 이름 붙이는 작용입니다. 행은 의지 작용입니다. 무언가를 하려는 마음의 움직임이며,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든 정신 작용이 행에 포함됩니다. 식은 인식입니다. 알아차리는 작용이며, 앞에 네 가지를 종합하여 아는 것이 식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모여 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자재보살께서 보시니 이 다섯 가지가 모두 공하였고, 고정된 실체가 없었으며,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 따라 흩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공하고, 느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공하며, 인식하고 의지하고 아는 것 모두가 공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들로 이루어진 나라는 것도 공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아이고, 이것이 공의 지혜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들으시면 불안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없다니,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살아 있는 이 느낌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지, 존재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존재하고, 지금 이 말을 듣고 계십니다. 다만 그 존재가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강물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강물은 분명히 있으며,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물은 한 순간도 같은 물이 아니고, 계속 흘러가고 계속 새물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강물이 공하다는 것은 강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고정된 강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것은 분명히 있지만, 고정된 나는 없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고, 아침에 나와 저녁의 나가 다릅니다. 세포가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감정이 바뀌며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정된 내가 없으니 내 것이라 할 것도 없어지며, 잃어버릴 것이 사라지니 두려움도 함께 사라집니다. 붙잡을 대상 자체가 없으니 집착도 저절로 놓이게 됩니다. 관자재보살께서 오온이 공한 것을 보시고 일체의 고해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고해란 괴로움과 재앙이며, 모든 고통을 의미합니다. 공을 알았더니 고통에서 벗어나셨으며, 고통의 원인이 공을 모르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대부분 집착에서 옵니다. 내 것이라 붙잡으려 하고, 잃을까 봐 두려워하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애초에 내 것이라는 것이 없다면, 붙잡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며, 괴로울 것도 없습니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것을 알려주는 경전입니다. 공의 지혜를 통해 집착에서 벗어나고,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경전의 핵심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구절이 반야심경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며, 불교를 모르는 분들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아시는 분은 많지 않으며, 오늘 이 시간에 그 의미를 풀어 드리겠습니다.

먼저 '색(色)'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색은 물질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귀에 들리는 모든 것,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색입니다. 이 몸도 색이고, 저 산도 색이며, 하늘의 구름도 색입니다. 형태가 있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색에 해당합니다. 불교에서는 색을 오온의 첫 번째로 꼽습니다. 오온이란 나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이며, 색과 수와 상과 행과 식이 그것입니다. 앞서 간단히 말씀드렸지만, 이제 하나씩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색은 물질이라 하였고, 이것은 우리 몸과 외부 세계의 물질적인 것들을 포함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맞는 것, 혀로 맛보는 것, 몸으로 느끼는 것, 이 모든 감각의 대상이 색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한번 느껴 보십시오. 지금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느껴지실 것이며,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손끝에 감각, 발끝에 감각,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몸 전체가 색입니다. 우리는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며, 이 몸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고 느끼고, 이 몸이 늙으면 내가 늙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색이 공하다고. 이 물질이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하셨으며, 몸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고정 불변한 몸이 없다는 뜻이고, 이 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몸에서는 수많은 세포가 죽어가고, 새로운 세포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7년이 지나면 몸의 모든 세포가 바뀐다고 하니, 7년 전의 몸과 지금의 몸은 물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같은 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물의 비유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강물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순간도 같은 물이 아닙니다. 위에서 흘러온 물이 아래로 흘러가고, 또 새로운 물이 흘러옵니다. 강물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내용물은 계속 바뀌고 있으며, 우리 몸도 이와 같습니다. 색즉시공이란 이런 뜻입니다. 물질이 곧 공이라는 것은 물질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물처럼 보이지만 고정된 것이 아니고, 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과 같습니다.

공즉시색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공이 곧 물질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공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공하기 때문에 오히려 만물이 나타날 수 있으며,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빈 그릇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릇이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습니다. 물도 담을 수 있고, 밥도 담을 수 있으며, 비어 있음이 오히려 가능성인 것입니다. 이미 가득 차 있다면 아무것도 담을 수 없기에, 공이 곧 창조의 바탕이 됩니다.

색부리공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고, 공부리색은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며, 물질과 공이 별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파도와 바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파도는 바다에서 일어나고, 바다로 돌아갑니다. 파도가 따로 있고, 바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파도가 곧 바다이고, 바다가 곧 파도입니다. 형상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질은 하나인 것이니, 색과 공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이제 나머지 네 가지 온을 살펴보겠습니다. 수는 느낌이고, 상은 인식이며, 행은 의지 작용이고, 식은 분별입니다. 수는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감각적 느낌을 말합니다. 무언가를 접했을 때 드는 첫 반응이니, 좋다, 나쁘다, 편하다, 불편하다, 즐겁다, 괴롭다 하는 느낌입니다. 아직 생각이 개입하기 전에 순수한 느낌이며, 이것도 공합니다. 여러분, 같은 음식을 먹어도 어제와 오늘의 느낌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배고플 때 먹으면 맛있고, 배부를 때 먹으면 맛이 없기에, 느낌이라는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조건에 따라 변하며, 그래서 수도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은 생각이라는 뜻이며, 대상을 인식하고 이름 붙이는 작용입니다. 이것은 꽃이다, 저것은 나무다. 이렇게 구별하고 분류하는 것이 상입니다.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를 해석하는 것이며, 이것도 공합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하게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서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재미있게 보입니다. 인식이라는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며, 관점에 따라 달라지고, 경험에 따라 변합니다.

행위란 만들어 짓는다는 뜻이며, 의지적인 정신 작용을 말합니다. 무언가를 하려는 마음, 결심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모든 작용이 행입니다. 업을 짓는 것도 행이고, 수행하는 것도 행이니, 마음의 능동적인 활동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의 의지도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어제는 이것을 하려 했다가, 오늘은 저것을 하려 하고, 아침에는 이렇게 결심했다가 저녁에는 저렇게 바뀌기도 합니다. 의지한 것도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며, 그래서 행도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식이란 분별한다는 뜻이며, 알아차리는 작용입니다.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이 안식이고, 귀로 듣고 아는 것이 이식이며, 코와 혀와 몸과 뜻으로 아는 것이 비식, 설식, 신식, 의식입니다. 이 여섯 가지 식이 대상을 분별하고 인식합니다. 식도 공합니다. 어릴 때 알던 것과 지금 아는 것이 다르고, 공부하기 전과 후가 다릅니다. 분별하는 마음도 변화하며, 깨달음을 얻으면 보는 것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고정된 앎이란 없기에 식도 공한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이 오온개공입니다. 관자재보살께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보신 것이 바로 이것이며, 이것을 보시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왜 온이 공하다는 것을 알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고통은 대부분 집착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 몸에 집착하고, 이 느낌에 집착하며, 이 생각에 집착하고, 이 의지에 집착하며, 이 앎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공하다면, 집착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손에 모래를 쥐어 보십시오. 꽉 주면 줄수록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붙잡으려 할수록 더 빠져나가니, 차라리 손을 펴면 모래가 손바닥 위에 머물게 됩니다. 집착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편안해지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반야심경은 계속해서 공의 의미를 펼쳐 나갑니다.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이라 하셨으며, 느낌도 공하고, 인식도 공하며, 의지도 공하고, 분별도 공합니다. 색에 대해 말한 것이 나머지 네 가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두 합하면 나라는 것 전체가 공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몸도 공하고, 마음도 공하니,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며, 고정된 내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지금 이 말을 듣고 계시고, 무언가를 느끼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며, 독립된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입니다. 수많은 인연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고, 그 인연이 변하면 나도 변하게 됩니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내가 없기에 고정된 내 것도 없고, 잃어버린 것도 없으며, 지킬 것도 없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사라지니 두려움도 사라지고, 집착의 대상이 사라지니 집착도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으며, 그것이 당연한 것이니 오랜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다르며, 아는 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반야심경을 읽고 외우고 사유하는 것은 이 앎을 깊게 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글자만 읽히다가, 점점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고, 의미가 보이다가 점점 삶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 그렇구나' 하고 체득하는 때가 오니, 그것이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오온이 공하다는 이 가르침을 마음에 담아 두십시오. 지금 당장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때가 되어야 싹이 나듯, 가르침도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색즉시공의 지혜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반야심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시제법 공상(是諸法 空相)"이라 하셨으며, 모든 존재는 공의 모습을 띄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공의 모습이란 무엇일까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하셨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공의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태어나고 죽고, 더럽고 깨끗하고, 늙고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의 눈으로 보면 그런 것이 없습니다. 본래 나지 않았기에 멸할 것도 없고, 본래 더러운 것이 없기에 깨끗해질 것도 없으며, 본래 늘어난 것이 없기에 줄어들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인지 쉽게 풀어 드리겠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나지 않고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태어나면 생이라 하고, 죽으면 멸이라 합니다. 생일을 축하하고, 죽음을 슬퍼하며, 생과 사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생이라는 것은 무에서 유가 나온 것이 아니며, 이미 있던 것들이 인연 따라 모인 것입니다. 멸이라는 것도 유에서 무가 된 것이 아니며, 모였던 것들이 인연 따라 흩어진 것입니다. 물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물이 얼면 얼음이 됩니다. 얼음이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물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형태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다시 물이 되고, 물이 증발하면 수증기가 됩니다.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리면 다시 물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무언가가 새로 생겨난 적이 있을까요? 무언가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있을까요?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며, 본질은 그대로입니다. 물이라는 본질은 나지도 않았고, 멸하지도 않았으며, 이것이 불생불멸입니다. 우리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무에서 온 것이 아니며, 부모님에게서 왔고, 부모님은 또 그 부모님에게서 왔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끝이 없기에, 생명이라는 흐름이 계속 이어져 온 것입니다. 죽는다고 생각하지만,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흙에서 풀이 자라며, 풀을 동물이 먹습니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꾸어 흐르니, 멸이라는 것도 사실은 변화일 뿐입니다. 이것을 알면 죽음이 덜 두려워집니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며,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평온하셨던 것도 이것을 아셨기 때문이며, 본래 난 적이 없기에 멸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것은 더럽다, 저것은 깨끗하다고 구별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고, 옳은 것과 그런 것을 가르며, 세상을 둘로 쪼개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본래 더럽고 깨끗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더럽다, 깨끗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붙인 이름이며, 대상 자체에 더러움이나 깨끗함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꽃이 피면 아름답다 하고, 꽃이 지면 시들었다 합니다. 그러나 꽃 자체는 그냥 피고 지는 것일 뿐이며, 아름다움이나 추함은 보는 사람의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떨어진 꽃잎이 땅에서 썩어 걸음이 되고, 그 걸음에서 새꽃이 피어나니, 어디까지가 아름답고 어디서부터 더러운 것일까요? 연꽃을 떠올려 보십시오.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습니다. 진흙이 없으면 연꽃도 없기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흙이 곧 연꽃의 바탕이며, 더러움이 곧 깨끗함의 바탕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번뇌가 있다고 더러운 것이 아니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깨끗해진 것이 아닙니다. 본래 더럽지 않았기에 깨끗해질 것도 없고,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알면 자신을 덜 미워하게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할까?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하며 자책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부족하거나 못난 것이 없으며, 그것은 마음이 붙인 이름일 뿐입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많으면 좋고, 적으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늘면 기뻐하고, 줄면 슬퍼하며, 건강이 늘면 안심하고, 줄면 걱정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본래 늘고 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쪽에서 줄면 저쪽에서 늘고, 여기서 사라지면 저기서 나타나니, 전체로 보면 늘지도 줄지도 않습니다. 바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에 물이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가면, 바다는 줄어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물이 비가 되어 다시 내리니, 전체로 보면 줄어든 것이 없습니다. 순환하고 있을 뿐이며, 형태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재산이 줄었다고 슬퍼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은 어디로 갔을까요? 누군가에게로 갔으며, 전체로 보면 줄어든 것이 없고, 내 것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와 남을 나누기 때문이며, 전체가 하나라는 것을 알면 줄어들 것도 없게 됩니다. 건강이 나빠졌다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젊음이 줄면 경험이 늘고, 체력이 줄면 지혜가 늘어납니다. 한쪽이 줄면 다른 쪽이 느는 것이며, 전체로 보면 균형이 맞아가고 있습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 세 가지가 공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생멸이 있고, 구정이 있고, 증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의 눈으로 보면 그런 것이 없습니다. 본래 고요하고, 본래 평등하며, 본래 원만한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영화를 볼 때 화면에서 온갖 일이 일어나며,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전쟁이 일어나고, 사랑이 피어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울고 웃습니다. 그러나 스크린 자체는 어떠한가요? 스크린은 변함이 없으며, 영상이 지나가도 스크린 자체는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이 이 스크린과 같습니다. 그 위로 생각이 지나가고, 감정이 지나가며, 온갖 일들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있는 본래 마음은 변함이 없기에, 이것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경지입니다.

반야심경은 계속해서 공의 의미를 펼쳐 나갑니다. "시고공중 무색수상행식(是故空中無色受想行識)"이라 하셨으며, 이런 까닭에 공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앞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셨는데, 이제는 공 가운데 색이 없다고 하십니다. 모순처럼 들리실 수 있지만, 모순이 아닙니다. 색즉시공은 색을 통해 공을 보는 것이고, 공중무색은 공의 입장에서 색을 보는 것입니다. 바다와 파도의 비유로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파도가 곧 바다라는 것은 색즉시공입니다. 파도를 보면서 이것이 바다의 일부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현상을 통해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파도가 없습니다. 바다 전체로 보면 파도라고 따로 떼어낼 것이 없기에, 모두가 바다일 뿐입니다. 이것이 공중무색이며, 본질의 입장에서 현상을 보는 것입니다. 둘 다 맞는 말씀입니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뿐이며, 진리는 하나입니다. 현상도 부정하지 않고, 본질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둘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공 가운데는 색수상행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다섯 가지 요소가 공의 눈으로 보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몸도 따로 없고, 느낌도 따로 없으며, 인식도 의지도 분별도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공이라는 바다에서 일어난 파도일 뿐이며,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파도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체험하면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나라고 붙잡을 것이 없기에, 나를 지키려는 긴장도 풀어지며, 방어하고 공격하는 마음도 쉬어지게 됩니다. 편안해지는 것이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지혜가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반야심경의 이 구절은 무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눈도 없고, 귀도 없으며, 코도 혀도 몸도 뜻도 없다고 하시며, 빛깔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냄새도 맛도 촉감도 법도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정말로 눈이 없다는 말일까요? 분명히 우리에게는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있고, 들리는 것이 있는데, 없다고 하시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없다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앞서 배운 공의 의미가 여기에도 적용되며, 눈이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고, 색이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안이비설신의를 육근이라 부릅니다. 육근은 감각 기관을 뜻하니,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라는 의미입니다. 눈은 보는 기관이고, 귀는 듣는 기관이며, 코는 냄새 맞는 기관이고, 혀는 맛보는 기관입니다. 몸은 촉감을 느끼는 기관이고, 뜻은 생각하는 기관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을 육진이라 부릅니다. 진은 대상을 뜻하니, 여섯 가지 감각 대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색은 눈으로 보는 대상이고, 성은 귀로 듣는 대상이며, 향은 코로 맞는 대상이고, 미는 혀로 맛보는 대상입니다. 촉은 몸으로 느끼는 대상이고, 법은 뜻으로 생각하는 대상입니다.

육근이 육진을 만나면 인식이 일어납니다. 눈이 색을 만나면 보게 되고, 귀가 소리를 만나면 듣게 됩니다. 이 만남에서 육식이 일어나니, 안식과 이식과 비식과 설식과 신식과 의식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육근도 없고, 육진도 없다고 하셨으며, 감각 기관도 고정된 실체가 없고, 감각 대상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눈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눈이 있어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눈만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빛이 있어야 하고, 대상이 있어야 하며, 뇌가 정보를 처리해야 합니다. 눈이라고 따로 떼어 놓으면 볼 수 없기에, 봄이라는 작용은 수많은 조건이 모여야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 자체도 변합니다. 어릴 때의 눈과 지금의 눈이 다르고, 오늘의 눈과 내일의 눈이 다릅니다. 세포가 바뀌고, 기능이 바뀌며, 고정된 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눈이 없다고 하시는 것이며, 고정된 실체로서의 눈이 없다는 뜻입니다.

색도 마찬가지입니다. 빨간 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빨강이라는 것은 빛의 파장이 눈에 닿아 꽃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며, 보는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조명이 바뀌면 색이 달라지고, 눈의 상태에 따라 색이 달라지니, 고정된 색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진짜라고 믿습니다. 눈에 보이니까 있는 것이고, 귀에 들리니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감각과 대상 자체가 공하다고 하셨으며,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꿈을 생각해 보십시오. 꿈속에서도 보고 듣고 느낍니다. 꿈속에서는 그것이 진짜라고 믿으며, 기뻐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깨어나면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깨어 있는 지금의 경험도 이와 다르지 않을 수 있으며,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인연 따라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반야심경은 계속해서 무의 세계를 펼쳐 나갑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乃至無意識界)"라 하셨으며, 눈의 세계도 없고, 의식의 세계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안계부터 의식계까지를 18계라 부릅니다. 육근과 육진과 육식을 합한 것이며, 우리 경험 세계의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없다고 하시니, 경험 세계 전체가 공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기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인연 따라 변한다는 뜻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행동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고정된 것이 없기에 바꿀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인연으로 만들어졌지만, 지금부터의 인연을 바꾸면 미래의 나도 바뀝니다. 공이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하고,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또한 "무무명 역무무명진(無無明 亦無無明盡)"이라 하셨습니다.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음도 없다는 뜻이며, 이것은 12연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12연기란 무명에서 시작하여 행, 식, 명색, 육입, 수, 애, 취, 유, 생, 노사로 이어지는 12가지 연결 고리를 말합니다. 무명 때문에 행이 있고, 행 때문에 식이 있으며,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무명이란 박지 못함이며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공을 모르고 무아를 모르며,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무명에서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고 부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반야 심경에서는 무명도 없다고 하십니다. 무명이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원래 밝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본래 깨달아 있는데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어두운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있을 뿐입니다.

무명이 없기에 무명이 다음도 없습니다. 무명이 본래 없으니 없앤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으며, 이것이 대승불교의 깊은 가르침입니다. 번뇌가 본래 없으니 번뇌를 끊을 것도 없고, 미혹이 본래 없으니 깨달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지 문사 영문사지니라 하셨으며, 늙음과 죽음도 없고 늙음과 죽음이 다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12연기의 마지막인 노사까지도 공하며,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몸은 늙고 몸은 죽습니다. 그러나 늙고 죽는 것이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변화의 과정일 뿐입니다. 앞서 불생불멸에서 배운 것처럼 형태가 바뀌는 것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심경은 이어서 무고진멸도라 하셨습니다. 고집멸도가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사성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성제란 부처님께서 처음 깨달음을 얻으시고 설하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고성제는 삶이 고통이라는 진리이고, 집성제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이라는 진리입니다. 멸성제는 고통이 소멸할 수 있다는 진리이고, 도성제는 고통을 소멸하는 길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이 사성제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며, 초기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도 없다고 하시니 무슨 뜻일까요? 고집멸도가 없다는 것은 고집멸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집멸도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며, 가르침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땜목의 비유를 드신 적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땜목을 만들었으면, 강을 건 후에는 땜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땜목을 지고 다니면 오히려 짐이 되니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침을 통해 깨달으면 가르침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성제를 알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성제에 집착하면 또 다른 속박이 됩니다. 고통이 있다고 붙잡으면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깨달음이 있다고 붙잡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에서 무고진멸도라 하신 것이며, 가르침마저도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반야심경은 무지역 무득이라 하셨습니다. 지혜도 없고 어둠도 없다는 뜻입니다. 무지라니, 반야심경이 지혜를 말하는 경전인데 지혜도 없다고 하시니 모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혜는 어리석음과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어리석음이 있어야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어야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무명도 없다고 하셨으며, 어리석음이 없으면 지혜도 없게 됩니다. 본래 어리석지 않기에 지혜로워질 것도 없습니다.

눈을 감고 있다가 뜨면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밝은 것을 보게 될 뿐이듯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원래 깨달아 있음을 알게 될 뿐입니다. 무득은 어둠이 없다는 뜻입니다. 수행을 해서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며,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니 얻을 것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바라밀다의 궁극적 경지입니다. 얻을 것이 없기에 바랄 것도 없고, 바랄 것이 없기에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모든 집착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본래의 자유가 드러나니, 이것이 열반이며 이것이 해탈입니다.

무의 세계가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무소득,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신무가, 무가해,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반야심경의 이 구절은 보살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람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으며, 뒤바뀐 꿈과 같은 생각을 멀리 여의여 구경에 열반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 왜 이토록 중요할까요? 우리의 고통은 대부분 무언가를 얻으려는 데서 옵니다. 돈을 얻으려 하고, 명예를 얻으려 하며, 사랑을 얻으려 하고, 인정을 얻으려 합니다. 얻지 못하면 괴로워하고, 얻어도 이를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본래 얻을 것이 없다면 어떨까요? 처음부터 얻을 것이 없으니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애씀이 없으니 괴로움도 없습니다. 이를 것도 없기에 두려움도 없고, 마음이 걸림없이 자유로워집니다.

신무가란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가란 덮고 막는다는 뜻이니, 마음을 덮고 막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은 온갖 것에 걸려 있습니다. 과거의 후회에 걸려 있고, 미래의 걱정에 걸려 있으며, 남의 시선에 걸려 있고, 내 욕심에 걸려 있습니다. 이 걸림들이 사라지면 마음이 확 트입니다. 하늘의 구름이 거치면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마음에 걸림이 거치면 본래의 맑은 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아야의 지혜는 이 걸림을 걷어내는 지혜이며, 공을 아는 것이 걸림을 걷어내는 방법입니다.

무유공포란 두려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두려워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거절을 두려워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들이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걸림이 없으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무언가를 잃을까 봐 생기는 것인데, 잃을 것이 없기에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기에 본래 태어난 적이 없는 것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습니까?

원리전도몽상이란 뒤바뀐 꿈 같은 생각을 멀리 여인다는 뜻입니다. 전도란 뒤집어졌다는 뜻이고, 몽상이란 꿈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뒤집어서 보고 있으며, 꿈을 꾸면서 꿈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도이며, 괴로운 것을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도이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 네 가지 전도를 사전도라 부르니, 중생이 고통받는 근본 원인입니다. 반야의 지혜로 이 전도를 바로잡으면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 보고, 무아인 것을 무아 보며, 고통인 것을 고통이라 보고, 부정한 것을 부정하다 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전도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구경열반이란 궁극적인 열반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걸림을 벗고, 모든 두려움을 벗으며, 모든 전도몽상을 벗으면 도달하는 경지가 구경열반입니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최종 목적지이며, 본래의 자리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이어서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십니다. 삼세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며, 재불이란 모든 부처님입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현재의 모든 부처님도,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모두 반야바라밀다로 깨달으셨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만 반야바라밀다로 깨달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도 반야바람밀다로 깨달을 수 있으며, 이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공을 알고 집착을 내려놓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반야심경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안욕따라 삼막볼이란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보다 더 높은 깨달음이 없기에 위없이 높고, 치우치지 않기에 바르며, 완전하니 보리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바로 이것이고, 우리가 목표로 삼는 것도 이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이제 진원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고집안야 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주 능제일체고 진실 부어라 하셨습니다. 반야바람밀다가 큰 신비한 주문이고, 큰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고, 비할 데 없는 주문이니, 능히 일체의 고통을 없애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문이란 진언이며, 만트라라고도 합니다. 소리의 힘으로 마음을 집중하고 진리와 합의하는 수행법이며, 불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진언을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반야심경의 진원은 특별한 힘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현장 법사께서 사막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진원을 외우셨고,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 진원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보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알.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노니, 곧 주문을 설하여 말하노라 하시고 진언을 말씀하십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이것이 반야심경의 진원입니다.

가고 가서 피 안으로 가고, 피안으로 완전히 가서 깨달음이여, 추원하노라. 아제는 가다라는 뜻에 산스크리트어 가태에서 왔습니다. 바라아제는 피안으로 간다는 뜻이고, 바라승아제는 피안으로 완전히 간다는 뜻입니다. 모지는 깨달음이며, 사바아는 추원하노라 또는 이루어지이다라는 뜻입니다.

가고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며, 고통의 이 언덕에서 해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차 안에서 피안으로, 번뇌에서 보리로, 생사에서 열반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배웠듯이 차안과 피안이 둘이 아닙니다. 건너갈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여기가 곧 저기입니다. 그렇다면 가고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고 간다는 것은 마음의 전환입니다. 몸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바뀌는 것이며,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세상인데 공의 눈으로 보면 다르게 보이니, 그것이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있는 그 자리가 피안입니다.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으며,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집착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보면 바로 이곳이 정토이고, 바로 이 몸이 부처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이 진원을 외우실 때 그 의미를 새겨 보십시오. 나는 지금 건너가고 있다. 집착의 이쪽에서 자유의 저쪽으로 건너가고 있다. 완전히 건너가서 깨달음에 이르리라. 이렇게 마음에 새기시면서 외워 보십시오. 진는 소리의 힘입니다. 뜻을 모르고 외워도 힘이 있지만, 뜻을 알고 외우면 힘이 더해집니다.

반야심경의 진원은 260자 전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것이니, 이 진원 하나에 반야심경의 모든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260자 전체를 외우기 어려우시면 이 진원만 외우셔도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 번, 잠들기 전에 세 번, 마음이 흔들릴 때 세 번. 이렇게 외우시면 마음이 가라앉고 지혜가 밝아집니다.

진원의 힘은 반복에서 옵니다. 한 번 외워서 달라지기 어렵지만, 100번, 천 번, 만 번 외우면 마음에 스며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입으로 외우고, 나중에는 마음으로 외우며, 마지막에는 삶 자체가 진언이 됩니다. 반야심경 전체의 가르침이 이 진원으로 모아집니다.

오늘이 시간을 통해 반야심경의 세계를 함께 걸어왔습니다. 260자라는 짧은 경전 안에 얼마나 깊은 지혜가 담겨 있는지 살펴보았으며, 공이라는 한 글자가 어떻게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처음 이 여정을 시작할 때 던졌던 질문을 기억하시는지요?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요?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질문에 답이 보이기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마음이 무거운 것은 붙잡고 있기 때문이며,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 붙잡고, 이를까 봐 두려워하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붙잡고 있는 그것들이 본래 공하다면 어떨까요? 붙잡을 것이 없기에 붙잡는 손을 펴도 되고, 손을 펴면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온이 공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색, 수상행식. 이 다섯 가지가 나를 이루고 있지만,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몸도 변하고, 느낌도 변하며, 생각도 변하고, 의지도 변하며, 앙도 변합니다. 변하는 것에 집착하면 고통이 오고,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평화가 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배웠습니다.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둘이 아닙니다. 파도와 바다가 둘이 아니듯,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니며, 이것을 알면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중불감을 배웠습니다. 공의 모습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습니다. 본래 고유하고, 본래 평등하며, 본래 원만한 것이 우리의 참 모습입니다.

무의 세계를 배웠습니다. 육군도 없고, 육진도 없으며, 12연기도 없고, 사성제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어둠도 없는 경지입니다. 모든 것이 공하기에 붙잡을 것이 없고, 붙잡을 것이 없기에 자유롭습니다.

무소득의 경지를 배웠습니다. 얻을 것이 없기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기에 구경의 열반에 이릅니다. 모든 부처님이 이 반야바라밀다로 깨달으셨으며, 우리도 이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이 진원 하나에 반야심경 전체가 담겨 있으며, 가고 가서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르침을 어떻게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집착이 일어날 때 공을 떠올려 보십시오. 내 것이라 붙잡고 싶을 때, 이를까 봐 두려울 때,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날 때,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정말 고정된 것인가? 이것이 정말 나의 것인가? 이것이 정말 변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물으시면 집착의 손나기가 조금씩 풀어집니다.

둘째로, 생각에 휩쓸릴 때 바다를 떠올려 보십시오. 생각은 파도와 같아서 일어났다 사라지며, 감정도 파도와 같아서 밀려왔다 물러갑니다. 파도에 휩쓸리지 말고 바다로 계십시오. 생각과 감정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시되, 그것에 끌려다니지 마십시오.

셋째로, 힘들 때 무상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의 고통이 영원한 것이 아니며, 지금의 슬픔도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밤이 아무리 길어도 새벽은 오게 되어 있으며, 무상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고정된 것이 없기에 바뀔 수 있고, 바뀔 수 있기에 나아질 수 있습니다.

넷째로, 매일 반야 심경을 읽어 보십시오. 260자밖에 되지 않기에 몇 분이면 충분합니다. 처음에는 소리내어 읽고, 익숙해지면 외워 보십시오. 외운 후에는 뜻을 새기며 읽고, 뜻을 알게 되면 삶에서 실천해 보십시오.

다섯째로, 진원을 생활하십시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출퇴근길에, 잠들기 전에, 마음이 흔들릴 때 이 진원을 외워 보십시오. 소리의 힘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반복의 힘이 지혜를 심어 줍니다.

반야 심경은 한 번 읽고 끝나는 경전이 아닙니다. 평생 읽고, 평생 새기며, 평생 실천해야 하는 경전입니다.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가 보이고, 살아갈수록 깊은 지혜가 드러납니다. 처음 읽을 때는 글자만 읽히다가, 두 번째 읽을 때는 뜻이 보이기 시작하며, 세 번째 읽을 때는 삶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100번 읽고 천 번 읽으면 어느 순간 몸으로 알게 되니, 그것이 채득이고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이미 반야의 지혜가 있습니다.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본래 깨달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여러분이 다르지 않기에, 부처님도 본래 우리와 같은 분이셨고 다만 먼저 깨달으셨을 뿐이며, 우리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공을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그 의미가 조금은 다가오셨을 것입니다. 공을 알면 잃을 것이 없기에 두렵지 않고, 얻을 것이 없기에 바랄 것이 없으며, 바랄 것이 없기에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흐르는 대로 함께 흐르면, 그것이 반야의 삶입니다.

이제 오늘의 가르침을 회양하겠습니다. 오늘 이 법문을 듣고 얻은 공덕을 나만 가지지 않겠습니다. 온 세상 모든 중생과 함께 나누겠으며, 이 공덕이 고통받는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무거운 분들이 가벼워지기를 바라며, 집착의 매인 분들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에 떠는 분들이 평화를 찾기를 바라고, 슬픔에 잠긴 분들이 위로를 받기를 바랍니다. 먼저 떠나신 분들께도 이 공덕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부모님과 조상님들께서 좋은 곳에 나시기를 바라며, 인연 있는 모든 이들이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원컨대 이 공덕으로 모든 중생과 함께 반야의 지혜를 이루어지이다.

오늘 긴 시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야심경 260자의 바다는 넓고 깊으며, 오늘 들으신 것은 그 바다의 한 모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한 모음 안에도 바다 전체가 담겨 있으며, 일체다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가르침이 여러분의 삶에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내일 아침 눈을 뜨실 때 공을 떠올려 보시고, 집착이 일어날 때 놓아 보십시오. 작은 실천이 모여 큰 변화가 되니, 오늘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오늘 이 법문이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를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이 가르침을 만날 수 있도록 주변에 나누어 주시면, 그것이 또 하나의 공덕이 됩니다. 아직 구독을 하지 않으셨다면 구독과 알림 설정을 부탁드리며, 다음 영상에서 또 다른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아래 댓글란에 공이라고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공 한 글자가 모여 큰 원력이 되니, 서로를 비추며 함께 빛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피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반야심경의 지혜가 여러분의 삶을 밝히시기를 바라며, 오늘도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공의 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