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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숨을 깊이 들이시고 천천히 내셔 보세요.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은 무엇과 실름하고 있나요? 어쩌면 혼자라는 사무치는 외로움, 자식 걱정에 밤잠 설치는 불안감 혹은 문득 떠오르는 지난 세월의 후회와 싸우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왜 나는 이래도 약한가? 이 마음을 없애야. 그렇게 애쓰면 애쓸수록 그 감정들은 마치 깊은 숲속의 안개처럼 더욱 짙어지고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 버립니다. 마치 끝없는 어둠 속에서 그림자와 씨름하는 것과 같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도망치려 해도 그림자는 늘 뒤따라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이 그림자, 부처님께서 번뇌라고 부르신 모든 마음의 얽매인들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는 지혜를 함께 나눠 볼 겁니다.
이 영상을 끝까지 함께 해 주신 분들께는 마음의 고통을 덜어내고 일상 속에서 잔잔한 행복을 찾는 작은 지혜의 씨앗을 선물해 드릴 테니 잠시 모든 실름을 내려놓고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이 번뇌란 대체 무엇일까요? 불교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게 하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번뇌라고 부릅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 질투, 교만, 의심. 마치 뿌리 깊은 잡초처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죠. 이 여섯 가지 독은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흔들고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 때 이런 번뇌들은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는 듯합니다. 지난 젊은 날에 찬란했던 기억과 현재의 쓸쓸함을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문득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놀라운 진실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번뇌를 없애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번뇌를 소멸시켜라. 번뇌와 싸워 이겨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마음은 법을 앞세우고, 마음이 주인이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법경의 첫 구절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번뇌도 마음에서 일어나고, 그 번뇌를 없애려는 집착 또한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없애려 했었던 번뇌, 그 번뇌를 없애려는 바로 그 마음 자체가 또 다른 번뇌가 아닐까요?
이 진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과 싸웁니다. "이렇게 외로워하면 안 되는데,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지만 마음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죠. 오히려 외로움은 더 깊어지고, 그 외로움과 싸우는 데서 오는 피로감은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에 더욱 무거운 짐이 됩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그림자와 씨름하는 노인처럼, 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과 끝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전쟁은 누가 시작했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걸까요? 과연 이 전쟁의 끝에는 평화가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번뇌는 단순히 불쾌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묶는 밧줄과 같고, 흐르는 강물에 떠다니는 부유물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밧줄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부유물을 건져내려 애쓰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밧줄은 더 단단히 옥죄고, 부유물은 끊임없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자책하게 됩니다. "내가 이 나이에 이것 하나 극복하지 못하다니." 하는 생각에 한숨만 깊어지죠.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처럼 번뇌와 실름하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2500여 년 전 인도의 보드가야에서 시다르타 태자께서는 보리수 아래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여섯 해 동안의 고행 끝에 그는 마침내 중도의 길을 찾아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죠. 그 평화롭고 고요한 순간, 마라가 나타났습니다. 마라는 불교에서 말하는 단순한 악마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 번뇌의 화신, 즉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 의심, 교만, 그리고 나태함 같은 부정적인 마음의 에너지들이 형상화된 존재입니다. 마라는 시다르타에게 온갖 유혹과 공포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내 욕망을 자극하고, 무시무시한 군대를 보내 두려움을 일으켰습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깨달음을 얻으려 하느냐? 넌 아직 부족해. 포기하고 돌아가라." 마라의 목소리는 우리가 매일 우리 자신에게서 듣는 그 목소리와 똑같습니다. "난 부족해. 난 실패할 거야. 난 사랑받지 못할 거야." 내면의 비판, 자기 의심, 그리고 끝없는 불안. 이 모든 것이 마라의 속삭임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글을 듣고 계시는 어르신들도 이런 마라의 속삭임을 자주 들으실 겁니다. "나이들은 뭐 하나. 젊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자식들에게 집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바로 우리 마음속 마라의 장난입니다. 이 속삭임들은 우리의 활력을 앗아가고 삶의 의미를 희미하게 만들죠.
우리는 이 마라의 목소리와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시다르타 태자는 마라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칼을 들지도, 주문을 외우지도,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고요히 앉아 마라를 응시했습니다. 마치 오랜 벗을 마주하듯, 그저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안다." 말하여, 그리고 오른손을 땅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항마지인, 악마를 항복시키는 손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력으로 마라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땅을 가리키며 "이 땅이 나의 증인이다"라고 선언하는 것, 즉 자신의 수행과 발언이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마라는 사라졌습니다.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으로서 사라진 것입니다. 시다르타 태자는 그날 밤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셨으니라. 번뇌는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 본질을 알아차리는 순간 힘을 잃는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 주신 것이죠. 우리의 외로움도, 불안도, 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과 싸우려 들수록 더 강해지지만, 그저 고요히 바라보고 그 본질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그날 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침내 집을 짓는 자를 보았다. 너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 모든 들보는 부러지고, 지붕의 마루대는 무너졌도다. 내 마음은 무에 이르렀으니, 모든 가래의 소멸을 이루었도다." 여기서 집을 짓는 자는 바로 번뇌를 의미합니다. 번뇌는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집을 짓습니다. 과거에 아쉬운 기억들로 벽을 세우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지붕을 얹고, 현재의 집착으로 방을 확장하며 우리를 그 안에 가둡니다. 노년의 삶에서 이 번뇌의 집은 더욱 견고하고,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집을 부수었다거나 없앴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알아차렸다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번뇌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번뇌는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에만 우리를 지배하고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는 그림자가 무서운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밝은 빛을 비추면 그것이 그저 형상일 뿐임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노년에 우리는 종종 "내 마음이 왜 이럴까?" 하고 자책하며 이 마음의 그림자들과 홀로 싸우려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그 그림자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저 깨어 있는 의식의 빛을 비추어 그 그림자의 본질을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참으로 복잡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번뇌가 문을 두드립니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잘 나가는 거 같은데." 이런 생각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판하고 조급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명상 앱을 켜고 좋은 글을 읽자."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 조급해지고 더 불안해집니다. 마음을 억지로 바꾸려 할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 강하게 저항하는 듯합니다. 마치 억지로 잡초를 뽑으려다 오히려 뿌리까지 뽑지 못해 더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번뇌를 없애려는 바로 그 마음 자체가 또 다른 번뇌기 때문입니다. "나는 평온해야 해. 나는 화내면 안 돼. 나는 완벽해." 이런 생각들은 또 다른 종류의 집착을 만들어냅니다.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이런 강박적인 기대들이 오히려 우리를 더 지치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죠. 특히 젊은 시절에는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번뇌들이 나이가 들어 힘이 빠지고 외로워질수록 더욱 무겁게 다가와 우리를 짓누르는 듯합니다. 그때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이 싸움이 나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는가?
어느 날 한 젊은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매일 명상하고 계율을 지키지만, 여전히 번뇌가 일어납니다. 제가 수행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자유로운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비구여, 연못에 연꽃이 피어 있다고 상상해 보아라.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꽃은 물 위로 피어나 아름답고 깨끗하다. 연꽃은 진흙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흙이 있기에 연꽃이 피어날 수 있다." 번뇌도 마찬가지입니다. 번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연꽃의 비유는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 삶의 진흙탕, 즉 온갖 번뇌와 고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깊이를 이해하고 진정한 연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죠. 힘들고 괴로운 순간들을 회피하려 할수록 우리는 삶에 중요한 가르침을 놓치게 됩니다. 오히려 그 고통과 번뇌 속에서 피어나는 지혜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연꽃입니다.
제자는 여전히 의아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우리는 번뇌를 그냥 방치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방치하는 것이 아니다. 관찰하는 것이다. 번뇌가 일어날 때 '아, 지금 내 마음에 화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려라. 번뇌와 싸우지 말고, 번뇌를 억누르지 말고, 번뇌를 따라가지도 말라. 다만 그것을 바라보아라. 마치 하늘을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듯이.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지만, 하늘은 구름에 물들지 않는다. 번뇌가 마음을 지나가지만, 깨어 있는 마음은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핵심입니다. 번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께도 번뇌의 씨앗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번뇌를 알아차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알아차림, 바로 사띠가 모든 수행의 시작입니다. 젊은 시절에 우리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느라 이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간과하곤 합니다. 하지만 노년의 삶에서는 바로 이 순간을 온전히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평화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수행이 됩니다. 지나간 세월의 그림자에 갇히거나, 다가올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고요히 관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연꽃처럼 피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번뇌를 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번뇌는 적이 아닙니다. 번뇌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스승입니다. 우리가 화가 날 때, 그 화는 "지금 내 마음에 집착이 있구나" 하고 알려줍니다. 불안할 때, 그 불안은 "지금 내가 미래를 통제하려 하는구나" 하고 말해 줍니다. 질투가 일어날 때, 그 질투는 "지금 내가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있구나" 하고 속삭입니다. 이처럼 번뇌는 우리 마음이 보내는 중요한 신호입니다. 마음의 신호등과 같죠. 이 신호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면, 그것은 더욱 크게 울려 퍼지며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고요히 바라보면, 그것은 저절로 잠잠해집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이런 번뇌의 신호를 더욱 자주 접하게 됩니다. 몸에 불편함이 찾아오면은 "아, 나의 건강에 대한 집착이 강하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찾아오는 외로움에는 "나는 사람들과의 연결에 목말라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손자 손녀의 재롱을 보며 흐뭇하다가도 문득 찾아오는 아련한 슬픔에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의 진리를 지금 내가 느끼고 있구나 하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죠. 이처럼 번뇌는 우리에게 삶의 중요한 지혜를 가르쳐 주는 침묵의 스승입니다. 그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번뇌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번뇌가 일어나거든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하라. 번뇌가 머물거든 '편히 계십시오'라고 말하라. 번뇌가 떠나거든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배웅하라. 환대하되 집착하지 말라. 거부하되 싸우지 말라. 이것이 번뇌와 함께 사는 지혜이다." 이 말씀은 마치 오랜 벗을 대하듯 번뇌를 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외로움이 찾아오면은 "외로움이여, 오셨습니까?" 하고 문을 열어주고, 불안감이 마음을 덮으면 "불안이여, 잠시 편히 머무십시오" 하고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때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미련 없이 보내 주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어떤 번뇌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불안입니까? 분노입니까? 슬픔입니까? 아니면 사무치는 외로움입니까? 그것을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과 싸우지 마십시오. 다만 그것을 고요히 바라보십시오. "아, 지금 내 마음에 이런 것이 일어나고 있구나."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당신은 이미 번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습니다. 번뇌 속에 푹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 시작입니다. 마치 연못가에 앉아 연못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죠. 연못 속에 진흙과 물고기, 수초들이 그대로 있지만, 그대는 연못 속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계에서 다시 한번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마음은 법을 앞세우고, 마음이 주인이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더러운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리니, 마치 술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만약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르리니,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여기서 말하는 더러운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번뇌에 물든 마음일까요? 아닙니다. 번뇌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번뇌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화난 사람이야. 나는 불안한 사람이야. 나는 실패자야."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 번뇌 그 자체가 돼 버립니다.
하지만 깨끗한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번뇌가 전혀 없는 마음일까요? 그것 또한 아닙니다. 깨끗한 마음이란 번뇌를 알아차리고, 번뇌와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지금 내 마음에 화가 일어나고 있구나. 하지만 나는 화가 아니야. 지금 내 마음에 불안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지만 나는 불안이 아니야."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번뇌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정의하지 못합니다. 마치 거울에 먼지가 묻어 있어도 거울 자체가 먼지가 아니듯, 우리 마음속에 번뇌가 일어나도 우리의 본래 마음은 청정합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노년의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고통을 초월하는 지혜입니다. 어느 날 저녁, 한 청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번민이 서려 있었고, 눈빛에는 불안감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명상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물었죠. "무엇 때문에 명상을 배우고 싶습니까?"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불안하고, 화나고, 외롭습니다. 이 감정들을 없애고 싶습니다." 저는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주며 말했습니다. "감정을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감정은 구름과 같습니다. 구름이 하늘을 가리지만, 하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구름을 없애려 하지 말고 하늘을 보십시오." 청년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스님, 구름이 너무 두꺼워서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구름이 아무리 두꺼워도 하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이 구름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시야를 바꾸십시오. 구름을 보지 말고, 구름을 바라보는 그 의식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나이 들어 세파에 지친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오는 외로움, 아쉬움, 불안감 같은 감정의 구름들이 아무리 짙어도, 그 너머에는 항상 고요하고 맑은 본래의 마음, 즉 하늘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구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름을 바라보는 깨어 있는 의식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청년은 그날부터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번뇌가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앉아 있으면 온갖 잡념이 밀려왔죠.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하나? 시간 낭비 아닌가? 나는 명상에 소질이 없나 봐." 마치 홀로 앉아 있는 노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지난날의 회안과 미래에 대한 걱정처럼, 수많은 생각들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스님의 말을 떠올리며 그는 그 생각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지금 의심이 일어나는구나. 아, 지금 조급함이 일어나는구나. 아, 지금 자기 비판이 일어나는구나." 신기하게도 그렇게 알아차리자, 그 생각들은 힘을 잃었습니다. 여전히 생각은 일어났지만, 그는 더 이상 그 생각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파도를 바라보는 굳건한 바위처럼, 그는 번뇌를 바라보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몇 달 후, 청년은 다시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번뇌의 흔적이 있었지만, 눈빛은 전과 달리 평화로웠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저는 여전히 불안하고, 화나고, 외롭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당신은 이제 알았군요. 번뇌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만 그것을 관찰할 뿐이라는 것을." 청년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해방의 눈물이었습니다. 평생 자신을 괴롭혔던 것이 사실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그림자였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 어르신들도 이런 해방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세월의 짐을 내려놓고, 다가올 삶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번뇌는 사라지지 않지만, 더 이상 우리를 옥죄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번뇌는 무명에서 일어난다." 무명이란 밝음이 없는 상태, 즉 알아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번뇌에 휘둘리는 이유는 번뇌 자체 때문이 아니라, 번뇌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듯, 우리는 마음에서 일어난 감정들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나는 외로워, 나는 화났어, 나는 불행해." 이렇게 감정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순간, 우리는 무명의 어둠 속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밝음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밧줄이 밧줄로 보입니다. 번뇌가 번뇌로 보입니다. 그것은 '나'가 아니라 그저 마음에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마치 창 밖으로 비가 오는 것을 보지만, 내가 비 그 자체가 아닌 것처럼 말이죠. 비는 그저 날씨의 한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마음의 날씨일 뿐, 우리의 본질이 아닙니다.
이 밝음, 즉 알아차림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홀로 사는 노년의 삶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밝게 비추어 보는 것은 그 어떤 값비싼 보석보다 귀한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밝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특별한 수행이 필요합니까? 산속에 들어가 10년을 참선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숨을 들이시며 "나는 숨을 들이쉬고 있다"고 알아차리십시오. 숨을 내쉬며 "나는 숨을 내쉬고 있다"고 알아차리십시오. 걷고 있을 때는 "나는 걷고 있다"고 알아차리십시오. 밥을 먹을 때는 "나는 밥을 먹고 있다"고 알아차리십시오. 화가 나면 "지금 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알아차리십시오. 불안하면 "지금 불안이 일어나고 있다"고 알아차리십시오. 이것이 전부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잊지 않는 것이 어려울 뿐입니다. 우리는 금방 알아차림을 잊고 다시 번뇌 속으로 빠져듭니다. 지난 세월의 후회에 젖거나, 미래의 불확실성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잊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당신은 이미 깨어 있는 것입니다. 천 번 잊으면 천 번 다시 알아차리십시오. 만 번 잊으면 만 번 다시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이 수행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수행은 완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깨어남을 위한 것입니다. 매 순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노년의 삶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주리반이라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어리석어서 단 한 구절의 계송도 외우지 못했습니다. 다른 비구들이 그를 비웃었죠. "너는 출가할 자격이 없다. 돌아가라." 주리바는 절망하여 절을 떠나려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깊은 번뇌와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었겠죠. 그때 부처님께서 그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주리반이여, 너는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주리바는 놀라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무것도 외우지 못하는데 무슨 재능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빗자루를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빗자루로 매일 법당을 쓸 거라. 쓰면서 이렇게 말하거라. '티끌을 털어내고 때를 씻어낸다.' 이 한 구절만 기억하거라."
주리바는 매일 법당을 쓸며 그 구절을 되었습니다. "티끌을 털어내고 때를 씻어낸다." 처음에는 그저 말만 반복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마저도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털어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티끌을 털어내는 것이 아닌가? 때를 씻어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때를 씻어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마침내 그는 깨달았습니다. 번뇌가 곧 티끌이고, 무명이 곧 때로구나. 나는 매일 법당을 쓸며 내 마음도 쓸고 있었구나. 주리바는 그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학식이 깊거나 논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어려운 경전을 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빗자루로 바닥을 쓸면서 자신의 행위에 온전히 몰입하고 그 의미를 깊이 깨닫는 순수한 알아차림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깨달음은 특별한 지식이나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순수한 알아차림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주리반은 수많은 경전을 외우지 못했지만, 단 한 가지를 완전히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수행법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경전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지금이 순간을 알아차리십시오. 지금이 순간의 호흡을, 지금이 순간의 감정을, 지금이 순간의 생각을.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노년의 삶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가집니다. 하지만 주리반 비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깨달음에 있어 중요한 장애물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순간 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죠.
번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일도 불안은 찾아올 것이고, 화는 일어날 것이고, 슬픔은 밀려올 것입니다. 특히 홀로 사는 이들에게는 밤마다 외로움이 찾아와 마음을 잠식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압니다. 그것들은 '나'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들은 마음을 지나가는 구름일 뿐이라는 것을. 하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당신은 번뇌가 아닙니다. 당신은 번뇌를 관찰하는 의식입니다. 그 의식은 맑고 고요하며 무한합니다. 번뇌가 아무리 많아도 그 의식을 더럽힐 순 없습니다. 마치 하늘이 구름에 물들지 않듯이, 마치 거울이 비추는 대상에 물들지 않듯이, 당신의 본래 마음은 청정합니다. 다만 번뇌라는 구름이 일시적으로 가릴 뿐입니다. 구름을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구름은 저절로 지나갑니다. 다만 하늘을 보십시오. 당신의 본래 마음을 보십시오. 그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번뇌와의 싸움을 멈추는 것, 번뇌를 적으로 보지 않는 것, 번뇌를 알아차리고 관찰하고 함께 존재하는 것. 그것이 자유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지금 이 순간 숨을 한번 깊이 들이셔 보십시오. 그리고 천천히 내쉬십시오. 당신은 지금 살아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깨어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아침 홀로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에서도 이 알아차림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잔의 온기, 차의 향기, 목을 타고 넘어가는 부드러움. 이 모든 것을 오롯이 느끼는 순간, 당신의 마음은 현재에 머물게 됩니다. 지난밤의 외로움도, 다가올 하루의 걱정도 잠시 사라지고, 오직 차 한 잔의 평화만이 남게 되죠. 번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관찰할 뿐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하루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의 마음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 한 번의 알아차림이 천 가지 번뇌보다 더 강력합니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들여다본 적이 언제입니까?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며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산책길에, 점심 시간에, 저녁 식사를 하며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대부분의 시간 우리는 마음 밖에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계획하고,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합니다. 홀로 쉴 때면 이러한 생각의 흐름은 더욱 거세지곤 합니다. 하지만 정작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는 모릅니다. 마음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먼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관찰하지만, 정작 관찰하는 그 주체인 마음 자체는 보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열반에 드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원을 남기셨습니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라." (자등명 법등명 자명고 법명)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 정진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바로 관찰입니다. 사띠, 알아차림, 마음챙김, 깨어 있음. 그것이 자신을 등불로 삼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외부의 어떤 대상이나 존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빛, 즉 깨어 있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비추는 가르침인 것이죠.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몸을 몸으로 관찰하며, 느낌을 느낌으로 관찰하며, 마음을 마음으로 관찰하며, 법을 법으로 관찰한다." 이 한 구절이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입니다. 사념처, 즉 네 가지 관찰의 터전입니다. 몸, 느낌, 마음, 법. 이 네 가지를 관찰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시키고, 올바른 길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지름길은 없습니다. 신통력을 얻는 것도, 특별한 체험을 하는 것도, 경전을 많이 외우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관찰입니다. 지금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특히 나이 들어 몸과 마음의 변화가 크게 느껴질 때, 이 관찰 수행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변화하는 몸을 바라보고, 변해가는 마음의 느낌을 관찰하며, 그 모든 것이 '나'가 아님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노화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해탈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관찰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매일 많은 것을 봅니다. 길을 걷다가 나무를 보고, 사람들을 보고, 건물을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관찰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인식하는 것, 알아보는 것일 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찰은 다릅니다. 관찰은 대상과 하나되지 않으면서 대상을 명료하게 보는 것입니다. 거리를 두면서도 친밀하게 보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다. 마치 먼 산을 바라보듯, 혹은 거울이 대상을 비추듯 말이죠.
예를 들어 볼까요? 지금 당신이 화가 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아서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어. 용납할 수 없어. 나도 똑같이 되갚아 줘야겠어." 이것은 화와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화에 완전히 빠진 상태입니다. 나와 화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이 화 그 자체가 돼 버린 것이죠. 나이 들어 마음의 조절이 어려워질 때, 이런 감정에 휩쓸리는 경향은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관찰은 다릅니다. 화가 일어날 때 "아, 지금 내 마음에 화가 일어나고 있구나. 가슴이 뛰고 얼굴이 뜨거워지고 있구나.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보는 순간, 당신은 화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습니다. 화를 느끼고 있지만, 화가 되진 않았습니다. 화를 관찰하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화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마치 사나운 파도가 몰아쳐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는 등대처럼, 우리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중심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몸의 관찰입니다. "수행자는 숲속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조용한 곳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몸을 바르게 하고 마음 챙김을 앞에 두고, 마음 챙김으로 숨을 들이시고, 마음 챙김으로 숨을 내신다. 길게 들이실 때 나는 길게 들리신다고 분명히 안다. 길게 내실 때 나는 길게 내신다고 분명히 안다." 이것이 아나빠나사띠, 즉 안반수의 수행입니다.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수행이죠. 너무 단순해 보입니까? 하지만 이것만큼 심오한 수행도 없습니다. 숨은 항상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의 숨은 없고, 미래의 숨도 없습니다. 오직 이 순간의 숨만 있습니다. 그래서 숨을 관찰하는 것은 현재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마음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 숨을 들이시면서 알아차려 보십시오. "나는 지금 숨을 들이쉬고 있다." 숨을 내시면서 알아차려 보십시오. "나는 지금 숨을 내쉬고 있다." 단 몇 초만 이렇게 해도 당신은 느낄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생각이 잠잠해지는 것을, 현재 순간에 뿌리 내리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호흡에 대한 마음 챙김을 닦고 개발하면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신 그날 밤, 호흡 관찰로 시작하셨습니다. 보리수 아래 앉아 숨을 관찰하시며 마음을 고요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점차 깊은 선정에 들어가셨습니다.
나이 들어 몸이 전과 같지 않고 여기저기 아프고 불편할 때, 이 호흡 관찰은 더욱 큰 도움이 됩니다. 나쁜 부위에 집중하는 대신 호흡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치 험한 파도 속에서 닻을 내리듯, 호흡은 우리의 마음을 현재의 고요함에 붙들어 줍니다.
하지만 호흡 관찰은 시작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몸 전체를 관찰하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이 몸을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피부로 둘러싸인 온갖 부정한 것들로 가득 찬 것으로 관찰한다." 이것은 부정관, 불순물 관찰입니다. 몸이 궁극적으로는 더럽고 무상한 것임을 관찰하는 수행이죠. 우리는 몸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몸, 건강한 몸, 젊은 몸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노년에는 특히 젊음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몸의 노화에 대한 두려움이 커집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몸은 자연의 법칙을 따를 뿐입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이것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관찰할 때, 우리는 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몸이 '나'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약해져도, 그것은 나의 본질이 아니라 그저 육체라는 그릇의 변화일 뿐임을 아는 것이죠. 이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느낌의 관찰입니다. "수행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한다고 분명히 안다.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괴로운 느낌을 경험한다고 분명히 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한다고 분명히 안다." 느낌. 이것은 감정과는 다릅니다. 느낌은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모든 경험은 세 가지 느낌 중 하나를 동반합니다. 즐거움, 괴로움 또는 중립입니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에는 집착하고, 괴로운 느낌은 회피하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래, 즉 갈애입니다. 가래는 모든 고통의 근원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성제에서 가르치신 바로 그것이죠. 고통의 원인은 가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느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아, 지금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느낌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느낌은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느낌도 곧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도, "아, 지금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밀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이 느낌이 빨리 사라져야 해"라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은 모든 느낌은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괴로운 느낌도 곧 사라집니다.
관찰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느낌을 느끼되, 느낌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느낌이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느낌은 그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마치 하늘을 떠가는 구름처럼,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말이죠. 노년의 삶에서 우리는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나 중립적인 느낌을 더 자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몸의 아픔, 외로움, 무력감. 이 모든 괴로운 느낌들을 회피하려 할수록 그것들은 더욱 강하게 우리를 붙잡습니다. 하지만 이 느낌들을 고요히 관찰하고, 그것들이 '나'가 아님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그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저는 명상할 때 고통스러운 감각이 일어납니다. 다리가 절이고 허리가 아픕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비구여, 그 고통을 관찰하라. 고통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강한가? 약한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 제자는 명상 중에 다리의 통증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통증이 너무 강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노년에 우리는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리며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관찰하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통증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변했습니다. 때로는 강했다가, 때로는 약했다가, 때로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통증 그 자체와 통증에 대한 저항이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 통증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 통증이 사라져라는 저항이 고통을 폐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관찰하자 저항이 사라졌습니다. 통증은 여전히 있었지만,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제자는 부처님께 이것을 보고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미소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지구여, 너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고통과 괴로움은 다르다는 것을. 고통은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지만, 괴로움은 그 느낌에 대한 마음의 저항이다. 관찰을 통해 저항을 내려놓으면, 고통은 있어도 괴로움은 없다." 이것이 느낌 관찰의 힘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느낌을 경험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배고픔, 피로, 긴장, 안도, 즐거움, 실망. 이 모든 느낌을 관찰하십시오. "아, 그래. 지금 이런 느낌이 일어나고 있구나." 판단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회피하지 말고, 다만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느낌은 저절로 지나갑니다. 그리고 느낌이 '나'가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세 번째는 마음의 관찰입니다. "수행자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성냄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이것이 마음 관찰의 핵심입니다. 지금이 순간 내 마음의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마음 상태를 모릅니다. 화가 나 있으면서도 화가 났다는 것을 모릅니다. 불안해하면서도 불안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질투하면서도 질투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저 그 감정에 휩쓸려 말하고 행동하고 후회합니다. 특히 노년에는 고집이 강해지거나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는 경향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감정의 노예가 되곤 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관찰하면 이 패턴이 끊어집니다. 화가 일어나는 순간, "예, 지금 화가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 순간 화는 힘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화는 무의식적일 때만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빛이 비추어지면, 화는 그저 마음의 한 상태일 뿐임이 드러납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안굴리말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연쇄 살인범이었습니다. 스승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천 명을 죽이면 해탈한다고 믿었죠. 그는 이미 999명을 죽였고, 마지막 한 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가 있는 숲을 지나가셨습니다. 안굴리말라는 부처님을 죽이려 뒤쫓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달려도 부처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전력을 다해 달려도 부처님과의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것에 당황하고 좌절했습니다. 결국 그는 소리쳤습니다. "멈추시오. 수행자여." 부처님께서는 돌아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미 멈췄다. 하지만 너는 아직 멈추지 못했구나." 안굴리말라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당신은 걸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멈추었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존재를 해치는 것을 멈추었다. 하지만 너는 아직 멈추지 못했다. 나는 분노를 멈추었다. 하지만 너는 아직 멈추지 못했다. 나는 무명을 멈추었다. 하지만 너는 아직 멈추지 못했다."
그 순간 안굴리말라는 깨어났습니다. 그는 칼을 내려놓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흉악한 살인자가 수행자가 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보았다. 분노를 분노로 알아차렸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변화하기 시작했다." 안굴린말라는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탁발을 나가면은 사람들이 돌을 던졌습니다. "살인자야, 우리 마을에서 나가라." 어느 날 그는 온 몸에 피를 흘리며 돌아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잘 견디었다. 안굴리말라여, 너는 지금 과거의 업을 정화하고 있다." 안굴리말라는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돌을 맞을 때 저는 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화를 관찰합니다. '아, 지금 화가 일어나고 있구나.' 그러면 화는 사라지진 않지만 저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것이다. 그것이 관찰의 힘이다. 번뇌는 여전히 일어날 수 있지만, 관찰하는 순간 너는 그곳에 휘둘리지 않는다." 안굴리말라는 결국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연쇄 살인범에서 깨달은 성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관찰했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분노로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도 안굴리말라가 있습니다. 분노, 증오, 복수심. 이러한 감정들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관찰할 수는 있습니다. "아, 지금 내 안에 분노가 일어나고 있구나. 아, 지금 내 안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당신은 이미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의 잘못이나 아픔에 갇치지 않고, 지금이 순간의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법 DHA MMA 관찰입니다. 수행자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자신 안에 있을 때 다섯 가지 장애가 내 안에 있다고 분명히 안다. 장애가 자신 안에 없을 때 다섯 가지 장애가 내 안에 없다고 분명히 안다. 다섯 가지 장애란 감각적 욕망, 악의, 혼과 졸음, 들뜸과 후회, 의심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마음을 덮는 장애물입니다. 이것들이 있으면 마음은 명료하지 못합니다. 마치 맑은 거울 위에 뿌옇게 김이 서인 것과 같죠. 하지만 이것들을 관찰하면 그것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명상 중에 졸음이 올 수 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졸음과 싸웁니다. "졸면 안 돼. 깨어나."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긴장을 만듭니다. 대신 졸음을 관찰하십시오. "아, 지금 졸음이 일어나고 있구나. 몸이 무겁고 눈꺼풀이 감기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관찰하면 신기하게도 졸음이 약해집니다. 왜냐하면 관찰 자체가 깨어 있음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명상 중에 들뜸이 올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특히 외로움에 익숙한 노인들에게는 이런 마음의 방황이 잦을 수 있습니다. 이것도 관찰하십시오. "아, 지금 마음이 들떠 있구나. 과거의 일을 생각하고 있구나. 미래를 계획하고 있구나." 판단하지 말고 다만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은 마음은 저절로 고요해집니다.
법의 관찰에는 또한 사성제, 팔정도, 칠각지 등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상 속에서 관찰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일상 속에서 지금 내가 팔 정도를 실천하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내 말은 정어 정무인가? 내 행동은 정업 정무인가? 내 생계는 정명 정무인가? 이렇게 관찰하면 우리의 삶 전체가 수행이 됩니다.
나이들어 특별히 절에 기회가 적더라도 생활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실천하는 것은 그 어떤 수행보다 갑진 일입니다. 어느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주자와 어묵동정 신주도어 고어동징이 모두 선신이다. 걷고 서고 안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모든 순간이 수행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을 깨어서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홀로 생활하는 이들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많기에 이 모든 순간을 수행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청소를 할 때, 밥을 먹을 때, 텔레비전을 볼 때조차도 그 순간에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바로 선이 되는 것이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관찰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자극 속에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알림, 뉴스, 광고, 소셜 미디어 마음은 한시도 쉬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돕니다. 홀로 있어도 이 디지털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하고 비교하게 만듭니다. 이런 환경에서 관찰은 마음에 덫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방황하는 마음을 지금 여기로 데려오는 힘입니다. 배가 흔들릴 때 닻을 내리듯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관찰이라는 닻을 내려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은 첫 번째로 하는 일을 관찰해 보십시오. 스마트폰을 확인합니까? 그렇다면 아 나는 지금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십시오. 산책길에 나서면 주변을 관찰해 보십시오. 짜증이 일어납니까? 그렇다면은 아 지금 짜증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십시오. 어떤 일을 하던 중 스트레스를 받으면은 그것을 관찰해 보십시오. 아 지금 긴장하고 있구나. 어깨가 굳어지고 있구나.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관찰을 계속 하십시오. 피곤함, 허기, 외로움. 무엇이든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십시오.
이렇게 하루 종일 관찰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아침에 관찰을 시작했다가 오전 중에 이미 잊어버립니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서야 아 오늘 관찰하기로 했는데 하고 기억합니다. 괜찮습니다. 기억한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천번 잊으면 천번 다시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수행입니다. 마치 아이가 걷는 법을 배우듯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를 반복하며 우리는 점차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팅탄한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호흡은 마음과 몸을 잇는 다리이다. 호흡으로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집. 현재 순간이 우리의 진정한 집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이 순간만이 진짜입니다. 노년의 삶에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회한이나 다가올 시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끊임없이 우리를 이 현재라는 집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하지만 관찰은 우리를 이 순간으로 데려옵니다. 불안하거나 외로울 때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해 보십시오. 들숨과 날숨을 따라 마음이 현재의 집에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를 쫓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말라.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현재의 법을 현재에 관찰하라. 흔들리지 않고 동요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법을 현재에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이 순간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입니다. 대, 생각, 감정, 감각, 소리, 냄새, 맛, 무엇이든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는 대로 관찰합니다. 집착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다만 봅니다. 이것이 위파사나 부위하파사나입니다. 통찰의 지혜,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윗빠 산하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 특징을 직접 체험합니다. 바로 무상무상 고구 무아 무어입니다.
무상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고는 집착하면 괴롭다는 뜻입니다. 무아는 고정된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철학적 이론이 아닙니다.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호흡을 관찰하면 무상을 봅니다. 들숨은 날숨이 되고 날숨은 다시 들숨이 됩니다. 끊임없이 변합니다. 감정을 관찰하면은 무상을 봅니다. 화가 났다가 잠잠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특히 기분이 좋았다가도 갑자기 외로움이 찾아오고 또다시 희망이 생기는 등 노년의 감정 기복은 무상에 좋은 예시가 됩니다. 생각을 관찰하면 무상을 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관찰하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은 변하는구나. 그렇다면 여기서 영원한 행복을 찾으려는 것은 헛된 일이구나. 이것이 고구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계속 관찰하면은 더 깊은 깨달음이 옵니다. 이 모든 것이 변한다면 여기에 변하지 않는 나가 있을까? 생각도 변하고 감정도 변하고 몸도 변하는데 무엇이 나인가? 이것이 무와 무어의 이해입니다. 나이들어 거울속 자신의 모습이 변하고 기억력이 흐려지고 건강의 예정 같지 않을 때 우리는 무아의 진리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없다니 그럼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무아는 공허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이다.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것은 너는 과거에 묶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는 내 순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너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이것이 관찰이 가져다 주는 궁극의 선물입니다. 자유. 번뇌로부터의 자유. 과거로부터의 자유. 고정된 정체성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이 자유 속에서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의 호흡을 관찰해 보십시오. 들숨을 느끼고 날숨을 느끼십시오. 단 세 번의 호흡만이라도 완전히 관찰해 보십시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판단하지도 분석하지도 바꾸려 하지도 마십시오. 다만 관찰하십시오. 그 세 번의 호흡 동안 당신은 완전히 현재에 있을 것입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지금이 순간 숨쉬는 당신만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관찰의 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개념 처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7년 동안 닦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결과 중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거나 또는 집착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면 불안과 부장고를 얻는다. 7년은 말할 것도 없고 6년, 5년, 4년, 3년, 2년 1년을 닦는 사람도 같은 결과를 얻는다. 1년은 말할 것도 없고 7개월, 6개월, 5개월, 4개월, 3개월, 2개월, 2개월 반개월을 닦는 사람도 같은 결과를 얻는다. 반개울은 말할 것도 없고 7일 동안만이네 가지 마음 챙김에 확립을 닦는 사람에게도 두 가지 결과 중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7일 단 일주일입니다. 일주일 동안 완전히 관찰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완전히 관찰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관찰은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지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의지와 꾸준함만 있으면 됩니다.
매일매 순간 관찰하십시오. 숨을 쉴 때 관찰하십시오. 걸을 때 관찰하십시오. 먹을 때 관찰하십시오. 말할 때 관찰하십시오. 환할 때 관찰하십시오. 기쁠 때도 관찰하십시오. 이처럼 노년의 일상 속 모든 순간을 관찰의 장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미 깨달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번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압니다. 번뇌를 관찰하는 방법을 번뇌와 함께 살되 번뇌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을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관찰, 마음을 보는 수행. 이것이 해탈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금이 순간부터 관찰을 시작하십시오. 당신의 삶 전체가 수행의 장이 될 것입니다. 홀로 있어 외롭고 지쳐 있을 때이 관찰 수행은 당신에게 가장 든든한 벗이 되어줄 것입니다. 자신 안에 이미 모든 지혜가 있음을 깨닫게 해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번뇌를 피하려고 보냈습니까? 이 이 감정만 사라지면 행복할 텐데이 상황만 벗어나면 평화로울 텐데 우리는 평생 번뇌 없는 삶을 꿈꿉니다. 고통 없는 세상, 갈등 없는 관계, 걱정 없는 미래.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놀라운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번뇌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 속에서 깨달음을 발견하라고 번뇌 그 자체가 진리를 깨닫는 중요한 기딤돌이 될 수 있다고 말이죠.
유마경 의모징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번뇌가 곧 보이요. 생사가 곧 열반이다. 번뇌즉보리 판노 잼프티. 생사적 열반 성수 성판. 처음이 말씀을 들으면 당혹스럽습니다. 번뇌가 어떻게 깨달음일 수 있습니까? 고통이 어떻게 헤타질 수 있습니까?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대성불교의 핵심입니다. 번뇌와 보리는 둘이 아닙니다. 생사와 열반도 둘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마치 같은 컵에 담긴 물이라도 목마른 이에게는 생명수이지만 이미 배부른 이에게는 그저 평범한 물일 뿐인 것과 같습니다.
어느 날 유마가사 위모 주수라는 제가자저가 병에 걸렸습니다. 소식을들은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문병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모두 주저했습니다. 왜냐면 유마사는 너무나 지혜로워서 과거의 제자들의 편한 견해를 모두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수보살 원수살이 찾아갔습니다. 문수보살이 물었습니다. 거사여 병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유마사가 대답했습니다. 일체중생이 병들었기에 나도 병들었습니다. 중생들이 번뇌에 시달리기에 나도 번뇌합니다. 만약 중생의 병이 다 나으면 나의 병도 나을 것입니다. 문수보살이 다시 물었습니다. 보살은 어떻게 병든 중생을 돌봐야 합니까? 유마사가 말했습니다. 병을 없애려 하지 말고 병을 통해 가르침을 주어야 합니다. 몸이 무상함을 설하되 몸을 싫어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이 있음을 설하되 열반을 탐내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대승 물교의 정신입니다. 번뇌를 회피하지 않고 번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중생과 함께 고통받으며 그 속에서 해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이들을 찾아오는 몸의 병고와 마음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이 유마사의 지혜를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이 병고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평화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죠.
부처님께서 연꽃의 비율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립니다. 만약 연꽃이 진흙을 거부한다면 연꽃은 피어날 수 없습니다. 맑은 물, 깨끗한 땅에서는 오히려 연꽃이 자라지 않습니다. 연꽃은 진흙이 필요합니다. 더러운 진흙, 닭한 물. 그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고 마침내 물 위로 피어올라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그 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고 향기롭고 찬란합니다. 하지만 진흙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기구들이여 연꽃이 물에서 태어나 물 위로 피어오르듯 열라도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을 뛰어넘어 머문다. 그러나 연꽃이 물과 진흙을 떠나 있을 수 없듯 중생을 떠나 있지 않다. 이것이 깨달은 자의 삶입니다. 세상 속에 있으되 세상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번뇌 속에 있을 때 번뇌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노년의 삶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번뇌들을 마치 연꽃의 진흙처럼 받아들이는 것. 그 속에서 나의 마음에 연꽃을 피워 올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수행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번뇌 속에서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첫째, 번뇌를 스승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번뇌를 적으로 봅니다. 없애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번뇌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화가 날 때 그 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있다. 지금 내 기대가 현실과 어긋나고 있다. 지금 내가 통제하려 하고 있다. 노년의 삶에서 놓아야 할 것들이 많아질 때 우리는 이러한 집착과 기대 때문에 더욱 화를 내기 쉽습니다. 불안할 때 그 불안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미래에 매달리고 있다. 지금 내가 현재 순간을 놓치고 있다. 지금 내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슬플 때 그 슬픔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무언가를 놓아야 할 때다. 지금 내가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다. 지금 내가 무상을 직면하고 있다.
번내는 신호입니다. 우리 마음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면은 우리는 배울 기회를 놓칩니다. 하지만이 신호를 귀담아 듣고 관찰하고 이해하면 번뇌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 됩니다. 선불교회 조사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조주선사 저조우 젠시를 찾아왔습니다. 스님, 저는 수행하면 할수록 번뇌가 더 많아지는 거 같습니다. 이것이 정상입니까? 조주선가 물었습니다. 번뇌가 많아진다는 것을 어떻게 하는가? 수행자가 대답했습니다. 명상할 때 온갖 잠념이 일어납니다. 화도 나고 욕심도 생기고 의심도 듭니다. 조주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번뇌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네가 번뇌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는 번뇌가 있어도 보지 못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먼지가 가득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제 수행이라는 빛이 들어오니 먼지가 보이는 것이다. 먼지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청소할 수 있지 않은가? 수행자는 깊이 절하며 물러갔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통찰입니다. 번뇌를 본다는 것은 이미 번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번뇌가 문제가 아니라 번뇌를 보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나이들어 마음의 어둠이 짙어질 때 그 어둠 속에서 번뇌라는 먼지들이 더욱 분명히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비로소 마음을 청소할 때가 되었다는 희망의 신호인 것입니다.
둘째, 번뇌를 변화의 에너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계승 불교에서는 번뇌 직불이 환노준푸디라고 합니다. 번뇌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번뇌의 에너지를 전환하는 것입니다. 분노의 에너지는 매우 강력합니다. 이 에너지를 파괴적으로 사용하면은 자신과 타인을 해칩니다. 하지만이 에너지를 건설적으로 사용하면 불리에 맞서고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의 불공평함에 대한 분노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는 열정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욕망의 에너지도 강력합니다. 이 에너지를 탐욕으로 사용하면 끝없는 갈증에 시달립니다. 하지만이 에너지를 열정으로 전환하면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가령 홀로 사는 이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의 깊은 연결을 추구하는 따뜻한 자비심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의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에너지에 압도되면 움어들고 도피합니다. 하지만이 에너지를 각성의 신호로 받아들이면 더욱 깨어 있게 되고 조심스럽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갈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전식 득지 젠시 더즈라고 합니다. 식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의식 무의식을 전환하여 지혜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억압이 아닙니다. 번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성화시키는 것입니다. 마치 석탄이 압력을 받아 다이아몬드가 되듯이 마치 포도가 발효되어 와인이 되듯이 번뇌는 깨달음의 원재료입니다. 흙속의 진흙이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는데 필요한 영양분인 것처럼 말이죠.
어느 날 밀라레파 밀라레파 존자에게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화를 너무 많이 냅니다. 어떻게 화를 없앨 수 있습니까? 밀라파 존재가 말했습니다. 화를 없애려 하지 말라. 화를 관찰하라. 화의 본성을 보라. 화가 어디에서 오는가? 화는 어디에 머무는가? 화는 어디로 가는가? 제자는 며칠 동안 화를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말했습니다. 스승님,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화를 찾아보니 화가 없었습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자세히 보니 그저 에너지의 움직임일 뿐이었습니다. 그 에너지는 본래 중립적이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화라고 이름 붙인 것뿐이었습니다. 밀라레파 존자가 미소지며 말했습니다. 그것이다. 번뇌의 본성을 보면은 번뇌는 공콩하다. 공하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고정된 본질이 없다는 뜻이다. 본질이 없기에 그것은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다. 화는 지혜가 될 수 있고 욕심은 자비가 될 수 있고 어리석음은 깨달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공성시의 이해입니다. 모든 것은 고정되 있지 않습니다. 번뇌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변화 가능합니다. 전환 가능합니다.
노년의 삶에서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라는 절망감에 갇칠 때 우리는이 공성의 지혜를 되새겨야 합니다. 나의 번뇌도 나의 한계도 고정된 것이 아니며 언제든 새로운 가능성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말입니다.
셋째, 번뇌를 통해 자비를 키우는 것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번뇌의 세계에 머니다. 이것을 유루요로에 처하되 유루에 물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모든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 열반에만 머은다면 중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생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자신의 번뇌를 완전히 끊지 않고 중생과 함께 머니다. 이것이 대성불교의 위대한 서원입니다. 중생이 다 제도되기 전에는 나도 열반에 들지 않겠다. 지장보살 디산 부사의 서원이죠. 지옥이 비지 않으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살은 번뇌가 본래 공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있어도 그것에 물들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생과 함께 고통받으면서도 그 고통에 압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 중생을 더욱 이해하고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번뇌를 경험하면서 다른 사람의 번뇌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화낼 때를 알기에 화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불안할 때를 알기에 불안한 사람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외로울 때를 알기에 외로운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번뇌는 우리를 연결합니다.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달입니다. 만약 우리가 완벽하고 번뇌 없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단절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불완전하고 번뇌 많게 서로 이해하고 도울 수 있습니다. 홀로 사는 노인들은 종종 자신의 나약함과 불완전함 때문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곤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나약함과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비심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작은 어려움에 나의 경험을 비추어 보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 그것이 바로 번뇌 속에서 피어나는 자비의 연꽃입니다.
어느날 관세현보살 임 부사께서 수행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한 중생이 고통 속에서 관세훈 보살을 불렀습니다. 관세현보살님, 저를이 고통에서 구해 주십시오. 관세보살께서는 즉시 그 중생에게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보살께서는 그 중생의 고통을 없애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옆에 함께 앉으셨습니다. 중생이 물었습니다. 보살님, 왜 저의 고통을 없애 주지 않으십니까? 관세보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은 진정한 구제가 아니다. 고통과 함께 있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진정한 구제이다. 내가네 고통을 없애 준다면은 너는 또 다른 고통이 올 때 나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고통과 함께 있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너는 스스로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살께서는 그 중생과 함께 앉아 고통을 관찰하셨습니다. 이 고통을 느껴보라. 어디에 있는가? 얼마나 강한가? 변하는가? 중생은 처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직면했습니다. 피하지 않고 억누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았습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통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것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은 그저 감각이었습니다. 강렬한 감각이지만 그것뿐이었습니다. 중생은 깨달았습니다.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구나.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 문제였구나. 관세보살께서 미소 지으셨습니다. 이제 너는 자유롭다. 이것이 진정한 자비입니다.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고통받을 때 그 고통을 없애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함께 있어 주십시오. 함께 그 고통을 관찰하십시오. 지금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요? 그 감정은 몸에 어디에서 느껴지나요? 그 감정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함께 듣고 함께 느끼십시오. 이것이 잡입니다. 특히 홀로 지내며 마음의 병을 앓는 이웃들이 있다면 그들의 옆에 함께 앉아 말없이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타인을 돕는 것을 넘어 우리 자신의 마음속 자비심을 키우고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넷째, 평상심, 빙상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선불교에서는 평상심도 빙상신다라고 합니다. 평상은 마음이 곧 도라는 뜻입니다. 평상심이란 무엇입니까? 특별하지 않은 마음입니다. 번뇌도 있고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는 보통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저항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다만 흐르도록 두는 마음입니다.
노년의 삶은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와 어려움이 찾아올 때이 평상심은 우리를 흔들림 없이 지탱해 주는 중요한 힘이 됩니다. 조주 선사에게 어느 날 한 수행자가 물었습니다. 스님, 도란 무엇입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했습니다. 평상심이 도이니라. 수행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까? 조주 선사가 말했습니다. 나아가려 하면 곧 어긋난다. 수행자가 또 물었습니다. 나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도인 줄 알 수 있습니까? 조주선사가 말했습니다. 돈은 아는 데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데도 속하지 않는다. 아는 것은 허망한 깨달음이요. 모르는 것은 무기 무기다. 만약 진실로 의심없는 도에 이른다면 호공처럼 맑고 텅 비어 있을 것이니 어찌 억지로 옳다 그러다 할 수 있겠는가?
평상심 그것은 허공과 같습니다. 구름이 지나가도 허공은 변하지 않습니다. 새가 날아가도 허공은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번뇌가 일어나도 평상심은 흔들지 않습니다. 기쁨이 와도 평상심은 들뜨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이처럼 허공처럼 텅비고 맑은 마음 상태야말로 우리가 노년의 삶에서 찾아야 할 궁극적인 평화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평화 말이죠.
현대로 사는 우리에게 평상심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극받고 흥분하고 불안해합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에게 특별한 삶을 요구합니다. 더 성공해야 해. 더 행복해야 해. 더 완벽해야 해. 특히 외로움에 지친 노년 층에게는 이런 사회적 압박이 더욱 크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성취와 현재를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쉽죠. 하지만 평상심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이대로 괜찮아. 특별할 필요 없어. 완벽할 필요 없어. 지금이 순간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포기도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수용입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번뇌도 불완전함도 약함도 모두 포함해서 그리고이 수용 속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저항이 멈추면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집착이 사라지면은 창조성이 변어납니다. 형상심 속에서 비범함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내면의 무한한 잠재력을 깨울 수 있습니다.
다섯째, 일상을 수행의 장으로 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산속에 들어가야 하고 절에 가야 하고 명상실에 앉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수행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설거지할 때, 걸을 때, 일할 때, 대화할 때 모든 순간이 수행입니다. 특히 홀로 생활하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을 소중한 수행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팅탄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 설거지를 해야 한다. 설거지를 하면서 내일 일을 걱정하거나 어제 일을 후회해서는 안 된다. 설거지를 하면서 설거지만 하라 그러면 설거지가 수행이 된다. 너무 단순해 보입니까? 하지만 이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곳에 있습니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저기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내일 회의를 생각하고 걸으면서 어제 실수를 후회하고 밥을 먹으면서 스마트폰을 봅니다. 우리는 거의 현재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에 있을 때 모든 것이 변합니다. 설거지가 명상이 됩니다. 그릇의 촉감, 물의 온도, 비누거품의 향기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번뇌가 사라집니다. 왜냐면 번뇌는 과거나 미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순간에는 번뇌가 없습니다. 지금이 순간 숨을 쉬고 바닥을 딛고 주변 소리를 듣는 이 순간에는 번뇌가 없습니다. 번뇌는 우리가이 순간을 떠날 때만 생깁니다. 그래서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 가장 위대한 수행입니다.
임재선사 죄지센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법은 따로 애쓸 일이 없다. 다만 평상 무사하여 똥 누고 오줌 누고 오집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 자면 그만이다. 이것이 선의 정수입니다. 특별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상을 그대로 살되 깨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 지력이 새하고 몸이 불편해지더라도 이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깨어 있는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은 일어나는 것을 느끼십시오. 이불의 감촉, 방의의 온도, 몸의 무게, 양치질을 하면은 양치질을 느끼십시오. 칫솔의 움직임, 치약의 맛, 물의 시원함, 산책길에 걸으면 걷는 것을 느끼십시오. 발이 땅에 닿는 감각,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느낌, 주변의 소리들. 일할 때도 먹을 때도 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십시오. 판단하지 말고 분석하지 말고 비교하지 말고 다만 경험하십시오. 이것이 수행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면 삶 전체가 변합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번뇌가 일어나도 아, 번뇌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그리고 계속 현재 순간으로 돌아옵니다. 숨으로 몸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로 이것이 번뇌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입니다. 번뇌를 피하지 않고 번뇌 속에서 살되 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현재의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연습을 통해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법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이 연꽃잎에 머물지 않고 연꽃에 물이 닿지 않듯이 성자 성전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물들지 않는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번뇌도 보고 기쁨도 보고 슬픔도 봅니다. 화도 느끼고 욕심도 느끼고 어리석음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마치 하늘을 떠가는 구름처럼 마치 물 위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물방울처럼 그리고이 깨달음 속에서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어느 날 육조 해능대사 료두 회논다스에게 한 수행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대사님 깨달음을 얻으면 번뇌가 완전히 사라집니까? 해능 대사가 물었습니다. 거울이 먼지를 닦으면 먼지가 다시 앉지 않는가? 수행자가 대답했습니다. 다시 앉습니다. 해능 대사가 말했습니다. 그렇다. 살아 있는 한 본뇌는 계속 일어난다. 하지만 본래 거울이 있는가? 수행자는 어리둥절했습니다. 해능 대사가 계속 말했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가 있겠는가? 번뇌를 닦을 거울도 없고 번뇌라는 먼지도 본래 없다. 다만 분별하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분별을 내려놓으면 번뇌도 보리도 하나이니라.
이것이 선불교회의 궁극적 가르침입니다. 번뇌와 보리는 둘이 아닙니다. 생사와 열반도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별할 때만 둘이 됩니다. 하지만 분별을 내려놓으면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완전합니다. 특히 홀로 삶을 정리해야 할 때 우리는이 분별심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지난날에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분대를 내려놓고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완전한 삶으로 끌어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이 어떤 번뇌를 겪고 있든 그것은 괜찮습니다. 화가 나도 괜찮고 슬퍼도 괜찮고 불안해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사는 것의 일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번뇌를 어떻게 대하느냐입니다. 적으로 볼 것인가? 스승으로 볼 것인가? 피할 것인가? 관찰할 것인가? 억압할 것인가? 전환할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것입니다. 매순간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이것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깨어날 기회, 자유로워질 기회, 성장할 기회입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납니다. 당신의 깨달음도 번뇌 속에서 피어날 것입니다. 진흙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진흙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속에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리고 천천히 꾸준히 위로 자라나십시오. 언젠가 당신도 물 위로 피어올라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입니다. 그 꽃은 진흙에게 물들지 않을 것입니다. 깨끗하고 향기롭고 찬란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흙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감사할 것입니다. 번뇌에 감사할 것입니다. 왜냐면 번뇌가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힘들게 당신을 괴롭했던 번뇌가 사실은 당신을 더 큰 지혜와 평화로 이끌었던 스승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임멸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모든 것은 변합니다. 번뇌도 변하고 기쁨도 변하고 고통도 변합니다. 당신도 변합니다.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니 게으르지 마십시오. 매 순간 깨어 있으십시오. 매 순간 알아차리십시오. 매 순간 선택하십시오. 번뇌를 적으로 볼 것인가? 스승으로 볼 것인가? 번뇌를 피할 것인가? 관찰할 것인가? 번뇌 속에 머물 것인가? 번뇌 속에서 피어날 것인가? 선택은 항상 당신의 것입니다. 그리고이 선택이 순간순간 쌓여서 당신의 삶을 만듭니다. 당신의 운명을 만듭니다.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이 선택의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 외부의 자극이나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의 지혜에 의지하여 스스로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죠.
지금이 순간 숨을 한번 깊이 들으셔 보십시오. 그리고 내쉬십시오. 당신은 지금 살아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여기 있습니다. 이 순간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원인이 이 순간에 결실을 맺었고 미래의 모든 가능성이 이 순간에서 싹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영혼입니다. 이 순간이 열반입니다. 번뇌도 있고 평화도 있고 고통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있습니다. 완전합니다. 당신은 완전합니다. 지금 이대로 번뇌와 함께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힘들 때, 지칠 때, 포기하고 싶을 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번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관찰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관찰 속에서 연꽃이 피어납니다. 진흙 속에서, 번뇌 속에서, 당신 안에서 지금이 순간에도 그 연꽃은 천천히 피어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피어나고 있습니다. 믿으십시오. 그리고 계속 나아가십시오. 한음 한걸음 한 호흡 한 호흡 한 순간 한 순간 이것이 수행입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번뇌 속에서 표현하는 연꽃 바로 당신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한다는 뜻입니다. 이 이 염성 한 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탑을 관세원 보살을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 마디가 복독의 시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이 글을 듣는 모든 분들의 마음에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오늘 이야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