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ription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44장 1절로 13절 말씀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십시오.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아침이 밝을 때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그들이 성읍에서 멀리 가기 전에 이어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데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다 하라.
그들에게서 그대로 말하니 그들이 그에게 어찌 이런 일은 아니하나이다. 다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열어 기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씻고 성으로 돌아가니라.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요셉의 그 함정입니다. 아, 그리고 어, 뒤에 가서 어, 이제 회개하는 형들의 모습을 만나 보게 됩니다. 어, 1절과 2절을 한번 먼저 보면요. 어,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만큼 채우고 여기 운반할 수 있을 만큼이라는 것은요. 어, 그 자루에 실을 수 있을 최대한 도로 어, 꽉 채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에 실을 수 있을만큼 다 실어 주고 또 각자의 돈을 또 그 자루에 넣고 그리고 어, 내 잔, 요셉이 쓰는 잔입니다. 이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이 청년은 베냐민이죠. 어, 그 양식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는 것은 청지기입니다. 그러니까 청지기가 생각할 때 어 참 내 주인 요셉이 이들을 이 히브리인들을 당신의 왕의 식탁에 초대해서 이렇게 잘 먹여 주고 어 그러니까 이렇게 다시 자루에에 돈도 이렇게 넣어 주고 그러는구나. 그리고 특별히 어 다섯 배의 음식을 주었던 그 가장 막내였던 청년이었던 베냐민에게는 어 이렇게 당신이 늘 아끼고 곁에 썼던 그 그 잔을에 이 은잔을 그 베냐민의 자루에 이렇게 넣게 했구나 청지기는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행을 했죠.
그리고서는 이제 아침이 되었습니다. 3절에 보면 아침이 밝을 때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이제 그들은 떠났습니다. 예. 이때 4절.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서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데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어,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가서 그대로 어,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 지금음 이 은잔을 집어넣어 놓고서 갑자기 청지기한테 따라가서 그들이 돌아올 만약에 갔다가 이걸 발견하면 돈 돈이 있는 자루에 돈이 있다거나 그리고 또 자루에 은잔이 발견되면 형들이 돌아와서 요셉한테 줄 것 같으니까 급히 쫓아가도록 그런 일이 없도록 어 청지기를 통해서 급히 쫓아가서 이 말을 하는 겁니다. 내 주인이 쓰는 은잔이 없어졌다. 어, 사실 이 은잔은요. 음, 한 20에서 25cm 되는 예, 그냥 그 물이나 술을 담아 먹는 컵입니다. 은으로 된 컵이에요. 어, 보통 그 애굽에서 어, 이 제사장들이나 지금 이제 그 총리이지만 요셉은 제사장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 애굽은 이 자신들에 쓰는 그런 어떤 은잔에다가 이렇게 물을 따르고 그 물이 어떻게에 이렇게 그 바뀌는지 악령에게 기도를 한 다음에 그 모습을 따라서 점을 쳤거든요. 그러니까 어 지금 요셉이 사실은 그렇게 그 점치는 자냐?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에요. 그러나 요셉이 이렇게 말을 하라 한 거죠. 아 그러면서 어 이 형들이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에 도대체 지금 이 은잔을 훔쳐갔다라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잘못된 것인지를 알도록 일부러 이렇게 말을 한 거지. 실제로 요셉이 점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어 요셉이 의도를 가지고 지금 함정을 파는 거예요. 어 그리고서는 쫓아가서 악하다. 어떻게 내 주인의 잔을 도둑질할 수 있느냐. 지금 그렇게 말을 한 거죠.
이에 대해서 어 이제 청지기의 말을 듣고 7절 보세요. 형들이 이렇게 청지기에게 대답하죠.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그러니까 전에 그 자루에 돈이 있었잖아요. 돈이 자기들이 가져가 보니까 돈이 있었잖아. 그 돈을 사실은 가지고 내려왔거든요. 가지고 내려와서 돌려줬단 말이에요. 심지어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지금 이렇게에 요셉 그 애굽의 총리로부터 이런 호화로운 대접을 받고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또 훔치겠느냐? 그런 일 없다라고 지금 변명하는 거죠. 7절이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8절.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금을 도둑질하리까? 아 그러면서 어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은잔이 발견되면에 그 발견된 사람은 죽을 것이고 우리는에 그 총리 이 은잔의 주인인 총리의 그 종들이 되겠다. 다 아 종들이 되겠습니다. 이 굉장히 이전에 보이지 못했던 모습이에요. 음. 그런 모습을 지금 말을 하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10절 봅시다. 아,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러면서 이제 점검하기 시작하는 거죠.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형들이에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씻고 다시 애굽의 성으로 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 여기 그 어 그들이 그러니까 형들이에 옷을 찢는 장면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 과거에에 요셉이 그 자기들을 찾아왔을 때 도단에 찾아왔을 때에 저 꿈꾸는 자 죽여 버리자 해 가지고 물 없는 구덩이에다가 요셉을 밀어 넣어서 살려 달라. 애걸 복걸하는 것을 외면했습니다. 죽이자. 그렇게 했죠. 죽이자. 그때 이제 유다가 나서서 어 죽이면 뭐 하냐? 아 이스라엘 애굽으로 내려가는 저 상인한테 팔아 넘기자. 그렇게 팔았습니다. 그리고서는 그 그 요셉의 옷을 벗겨서 어 짐승의 피를 발라 가지고 야곱 아버지한테 보여 줬죠. 어 그걸 보면서 아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어 죽은 거 같습니다. 이 옷이 당신의 아들 요셉의 옷인지 한번 아버지 보세요. 요셉이 그 요셉의 그 옷을 야곱이 보고 어 어떻게해요? 어 야곱이 그 슬픔에 자기 옷을 찍 찢습니다. 그런데 그 형들은 그걸 보면서 어 어때요? 어, 쾌제를 부렸죠. 아버지가 속아 넘어갔구나. 그리고 우리가 한 일이 우리의 이 모략이 성공했구나. 그랬던 형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세요. 그들이 우리는 도둑질 안 했습니다. 만약에에 도둑질을 한 것이 우리 중에 누구에게 발견되면 그는 죽지만 우리 또한 우리 또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발견되자마자 자기들의 옷을 찢죠. 그 예전 야곱이 옷을 찢었을 때 무반응했던 이들이 지금은 공동체적으로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자, 요셉은 왜 이런 일을 꾸몄을까요? 어 그 요셉이 뒤끝이 장렬해요. 그 이전에도 막 그 정탐꾼으로 몰고 그리고 그 감옥에 가둬 놓고 그 인질로 삼고 그리고 또 그 그래 놓고 베냐민 내려오게 하고 그랬으면 됐잖아요. 그런데 또 어 돈은 또 각 자루에다 돌려주면서 베냐민의 자루에다가 은잔을 집어넣어서 그리고 돌아와서 이실 짓고 하기 전에 그냥 달려가 가지고 새벽같이 쫓아가 가지고 범죄 도둑으로 몰고 그리고 그들을 다시 끌어와서 끌어오게 하고 왜 이렇게 이게 복수극일까요? 복수극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은 뒤끝은 있어요. 어 분명하게에 그 목적을 두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거죠. 과거에 에에 있었던 그 제연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시키면서 어 지금 시험하고 있는 예 요셉의 모습입니다. 과거에 그은 몇 세 자기를 팔아넘겼어 형들이요? 20에 그죠? 은 은 20에 자신을 팔아넘겼고 그리고 그때는에 그 야곱이 옷을 찢는 것을 보면서도 무반응했던 속으로 기쁨을 삼켰던 이들에 대하여 지금은 이들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변화됐는지 그 중심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지금 확인하고 있는 겁니다.
신명기 말씀을 우리 한번 같이 볼까요? 신명기 8장 보면요.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여러분 그 하나님께서 어 자기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가? 명령을 따르는가? 어 그 명령을 마지 못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따르는 것에 그 마음이 겸비한가 낮춰져 있는가 이런 것들을 살펴보시겠다는 겁니다. 어 계속 11절 한번 연어 볼게요. 아 내가 아 내가 오늘 너에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상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내 소와 양이 번성하며 내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너에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너에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그러나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너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음. 조상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광야로 이들을 이끄셨고 그리고 이들을 시험한다라는 말씀입니다.
에 에 이렇게 광야에 있으면서도 얻을 게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재물을 주시고 넉넉함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이들이 갖는 마음은 내가 한 거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수고해서 내 재능이 탁월해서 이것을 했다라고 한다는 거예요. 어떤 상태에서? 광야에서. 그러니까 오늘 요셉의 이 이 그 은잔의 시험 이것은 사실은 이 그 이 복음의 은잔입니다. 너희들이 과거에 그 어떤 존재였는지를 일깨워 주면서 지금 어 지금 어 그 어떤 상태로 하나님이 이들을 바꿔 가고 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하나님이 이렇게 공정 이렇게 다루어 가시는 과정인 거예요. 이게 복음의 은잔이죠. 점치는 은잔이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서 이 형들, 이 형제들을 지금 다루고 있는 내용이에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구원의 감격에 사로잡혀서 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어. 너무 기뻐. 어, 지금 나는 죽어도 천국가라는 구원의 감격에 빠져서 우리의 신앙은 게으르고 무사 안일 속에 있을 수 있어요. 근데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고 구원된 자기 백성들은 구원의 감격과 기쁨에만 빠져서 나는 구원받았어. 난 죽어도 천국가 이렇게 두지를 않으세요. 그게 오늘 이 복음의 은잔의 시험이고 사건이에요. 어떠한 사람이 되어 가는지 내가 지금 어떻게 변모됐고 변화되었는지를 점검하는 말씀이에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죠. 이렇게 다루신다고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끝. 됐다. 너 예수 믿어. 그러면 됐어. 그렇게 안 하신다고요. 지금 요셉이 계속 뒤끝 있는 모습처럼 계속 어떤 복수극을 펼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과거에 자신들이 어떠한 자였는지 지금은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어져 있는지를 점검시키는 거예요. 그것을 계속 확인하는 내용들이죠.
어, 우리가 이런 큰 질문을 하나 해 볼 필요가 있어요. 창세기를 같이 우리가 나누면서 어, 어차피 돌아올 건데 왜 굳이 가나안에서 어, 지금 야곱과 함께 70 가족이죠. 70명이 왜 굳이 애굽으로 내려가지? 그리고 애굽에 있다가 어차피 가나안으로 돌아올 거잖아요. 어차피 돌아올 겁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이미 창세기 15장에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어요. 너희들은 내가 이렇게 할 거다. 한번 보실래요? 창세기 15장에 가보면 1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반드시 알라는 것은 꼭 이렇게 되겠다는 거죠. 네 자손이 이방에서 계기되어 애굽을 말합니다. 이방에서 계기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증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러니까 어 애굽에서 결국은 나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대로 될 거예요. 어 근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음 왜 가나안에서 큰 민족을 이룰 수 있잖아요. 가나안에서 못 할게 뭐 있습니까? 그런데 왜 가나안에서 하지 않고 이런 고된 과정을 가나안에 있으면 되잖아요. 하나님 약속의 땅이라면서 그럼 약속된 민족이 그냥 그곳에 있으면 되는데 왜 굳이 애굽에 가서 사대년 사대 400년 동안 종사리를 하게 하고 그곳에서 고된 나그네 생활을 겪게 한 다음에 왜 또 가나안으로 올리는가? 또 그것도 가나안으로 직접 오는게 아니라 또 40년 광야를 거치게 하면서 왜 그렇게 하시냐 말이에요. 저와 여러분의 신앙에 대하여 굉장히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일방적이고 은혜예요. 그런데 이 은혜는요. 자격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자격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지 않고 베풀어지는 은혜가 아니에요. 물론 처음 받을 때는 이걸 모르죠. 그러나 구원을 받고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거듭난 생명이 된 다음부터 하나님께서 줄기차게 멈추지 않고 우리 안에 점검시키고 또 확인시키며 이루시는 것이 뭐냐? 나는 이 은혜를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절감시키세요. 만약 가나안 땅에 머물면서 계속 번성했다면요.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한 자신들의 권리이고 그리고 능력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까 신명기 8장에서 그랬잖아요. 광야에서 재물을 번 것을 아 내가 똑똑해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한 거 그렇게 하잖아요. 그러나 애굽으로 내려가서 다시 올라오는 과정을 통해서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뼈저리게 절감시킵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사실은 이거예요. 음. 하나님께서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성경의 큰 그림은 그겁니다. 처음에 하나님 나라의 그 모형이고 축소판으로 그려진 것이 에덴 동산이에요. 에덴 동산은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에요. 자, 그곳에 아담을 두셨고 그리고 아담에게서 갈비뼈를 취해서 하와를 내셨습니다. 에덴 동산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이 아담과 하와가 그곳에서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서 죄를 만나지 않고 사탄의 시험이 있어도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주고 그래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하실 수 있으셨지만 넘어지는 것을 허용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게 뭐예요? 죄인이라는 것이 뭔지 하나님과 원수됨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떠나온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거죠. 에덴 동산에 머물러서 그곳에서 죄를 안 짓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것보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선악과의 명령 속에서 넘어진 것은 정말 하나님이 감추어 준 감추어둔 복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거예요. 아,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아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서 아들들이 되는 양자가 되어서 누리게 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더 복된 거죠. 그리고 어거스틴은 오 복된 죄여라고 말했어요. 우리가 여기에서 정말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이 하나님은 목적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목적 이루기 위하여 그것만을 목적 두는게 아니라 아 하나님은 과정을 쓰시는구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이 목적 그리고 이 본질이 본연이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시는구나. 그 과정을 하나님은 보셔요. 과정으로 인도하세요. 기독교 신앙인들이 이것을 정말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보십시오. 창세기 45장에 보시면 요셉이 하는 말입니다. 이 땅에 2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5년은 밭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지금 애굽으로 내려와서 양식을 사야 되는 이 온 땅의 기근이 내린 이것이요 지금 7년 기근 중에 2년밖에 되지 않은 거예요. 앞으로 5년은 지금 시작도 안 했어. 이제 벌어질 정말 더 처참한 지경이 벌어질 겁니다. 근데 이 사실은 요셉은 지금 알고 있잖아요. 그러나 야곱과 그 형제들은 이 사실을 지금 몰라요. 7년 앞으로 5년이 더 남았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래서 요셉은 어떻게 해야든지 가족들을 애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지금 계속 만들어 가는 겁니다. 베냐민을 딱 애굽에다가 붙들어 두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내려올 수밖에 없도록. 근데 야곱의 입장에서는 왜 내려가야 돼? 아니 그 내려가기 싫은 거죠. 어느 정도인 줄 아세요? 여기 우리 계속 보세요. 창세기 46장에 가보면 좀 보세요.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의 야곱이죠. 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너의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이렇게 되어질 겁니다. 근데 야곱은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근데 야곱은 지금 내려가기를 두려워해요. 부엘세바까지 가서 애굽으로 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해요. 가기 싫어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려움과 불안 속에 있는 야곱을 그래 그냥 가나안에 있어라. 그러지 않고요. 과정을 쓰시죠. 내려갈 수밖에 없도록 기근을 주셨고 베냐민을 붙들고 이렇게 모든 상황 속에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과정을 만들어요. 이게 복음의 은잔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이 은잔이 은잔의 시험이 우리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과정 속에 우리를 단련하시는 거예요. 과정이 있는 거예요. 기독교는 종말론적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들어보셨나요? 어 그렇다면 그 이미와 아직이란는 말은 들어보셨나요? 그러면 영어로 할게요. 얼레디 예 들어보셨나요? 이게 다 같은 말이에요. 기독교는 종말론적이다. 여러분, 이것은 그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 사이에 시간과 단계와 과정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과정 속에서는 완성이 다 드러나지가 않아요. 그럼 완성이 다 드러나지 않으니까 불완성이고 미완성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이미 완성이에요. 하나님의 계획은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에 드러나는 모든 것도 완성이에요. 그런데 이 과정은요. 시간이라는 역사라는 흐름 속에서의 단계는 완성품으로 있지 않아요. 하나님이 공정해 가신다고요. 작업 중이라고요. 만들어 가시. 근데 이 작업 중 하나님이 각자 각자의 자루에 돈을 넣듯이 각자에게 두셨던 그 완성을 향하여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신다고요. 일하신다고요. 그게 복음의 은잔이라고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아 나는 나는 아직 불완전하고 나는 아직 성도가 가져야 할 생각은 이거예요.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이 구원은 나의 어떠함 때문에 취소되거나 변경되거나 바뀌어지지 않아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 안에서 이루어진 틀림없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런데 역사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의 현실에서는 우리가 죄에 넘어지잖아요. 그러면 그 구원은 취소가요? 그 구원은 없어지는 건가요? 그렇지 않은 거예요.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대로 오늘 그 밤 부엘세바의 그 장소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마라. 너 내려가라. 내가 너와 함께 갈 것이고 다시 너 올 내가 너를 올릴 것이고 요셉이네 눈을 감길 거야. 걱정하지 마. 과정에서는 요셉은 두려워요. 베냐민이 잃어버리지 않을까? 요셉처럼 또 베냐민도 죽지 않을까? 또 나는 그곳에 가서 어떤 일을 겪 성도는요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붙드시고 그 안에서 이미 완성으로 있습니다. 그 과정 안에 하나님은 완성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멈추지 않고 다루어 가신다는 거예요. 성도의 괴로움은 틀림없이 있죠. 이 이 과정이라는 시간 속에서 나는 왜 변화되지 않지? 탄식이 있죠. 생각하세요. 그러나 이 과정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식이 광야의 길이었고 그 길을 통하여서 아 저 불순종해서 아니요. 그럴 수밖에 없는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하여 아름답게 목적 두신 대로 우리를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분이에요.
이사야서 43장을 봅시다. 여기 보시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야곱이나 이스라엘이나 같은 그 사람입니다. 어 불리어질 것만 다른데. 그런데 보세요. 지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이 창조라고 하는 단어는 바라예요. 바라. 우리 그 창세기 1장 1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대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바라. 무에서 유를 있게 하시는 거죠. 어 야곱을 그 이스라엘로 하나님이 부르신 일방적인 선택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을 칭의라 그래요. 야곱의 칭의가 바라예요. 내가 너를 창조했다. 그런데 보세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칭의하시고 한 이 야곱을 지금 뭐라고 하냐면 이스라엘아라고 부르시면서 너를 지으신이가 말씀하시느니라. 여기 지으시다라는 것도 이것도 창조적 단어인데요. 야차르라는 단어를 썼어요. 우리 옛날 개혁한글에는 이것을 조성이라고 번역했어요. 너를 조성한다. 그니까 조성해 간다라는 것은 어떤 말이에요?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빚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야곱의 실패, 고난, 두려움 이런 모든 것을 통해 언약의 언약의 사람으로 이렇게 조성해 가시는 이 부분을 이제 우리는 이것을 그 성화라는 단어를 쓰죠.
로마서 8장을 한번 볼까요? 로마서 8장 하나님이 우리 같이 한번 읽어요. 29절 30절 함께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마다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마다들이라는 단어는요. 많은 사람들이 아, 첫째 아들 이렇게 생각해요. 성경은 마다들이라고 말할 때는 공동상속자를 뜻하는 겁니다. 바다들 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똑같이 아들들이 되어서 그 마다들의 모든 언약 그리고 그 상속되어질 모든 분깃을 같이 받는 거예요. 그래서 마다들이 의미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닮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일을 하신다. 그게 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 안에 과정을 쓰신다. 하나님이 공정하신다. 다루신다. 그런 말씀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아들 예수님이죠. 아들 안에서 그 아들로 만들어져 가는 자입니다. 성도는 성도는 구원받은 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맞죠? 그런데 성경은요 하나님은요 그 거룩한 백성 하나님 나라에서 흠이 없고 영광 가운데 함께할 그 거룩한 백성을 역사라는 인생이라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통해서 어떻게해요? 맞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 다우도록 해서 함께 누릴 것을 같이 누릴 수 있는 그런 하늘의 인격자로 빚어가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이 땅에서 만들어 가시는 내용물이에요. 그것이 여기 보면 우리가 놀라운 것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뭐라고 돼 있어요? 영화롭게 할 것이다 해요.
이게 부정 과거 시제입니다. 이게요. 헬라어 문법에만 있어요. 어느 언어 문법에도 없습니다. 부정 과거 시제인데요. 이건 뭐냐면 이미 하나님 편에서는 완성입니다. 완성이에요. 그리고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단계와 과정으로 이 완성을 이루어 가신다라는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틀림이 없는 거죠. 그래서 영화롭게 하셨. 나는 아닌데. 물론 아니죠. 나는 내 모습을 볼 때 되지 못했고요. 서지 못했고요. 그래요.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영화롭게 하셨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깊이 코 하실 겁니다. 하나님 내가 죽으면 저와 여러분이 오늘 저녁에 오늘 밤에 내가 죽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은 거기예요. 그러니까 하루를 살면 이 하루 내일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장성한 믿음의 분량 아름다운 형상에 가도록 하나님은 나를 고급지게 목적 두고 계셨구나 아 그래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의미가 있구나 내가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하루를 하나님이 나에게 더 지금 만들 이거라고요. 그래서 아 난 빨리 죽을래? 아우 난 살아서 이런 말을 하지 마세요. 아 나는 요것밖에 아니야. 난 요것밖에 하나님이 나를 요정도로밖에 대워하지 않았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일을 하셨고 많은 기회를 주셨고 나를 많이 다루셨다는 뜻입니다.
리비히의 최소율의 법칙이라고 있습니다. 예. 제가 고등학교 때 생물학 시간에 배웠던 거예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저 공부했어요. 그 독일 화학자 이름을 딴 겁니다. 리비히. 예. 최소율의 법칙이라는게 뭐냐면 그 이게 식물의 성장이 그 넘치는 영양소로 이렇게 그것을 결정하는게 아니라 그 가장 부족한 영양소에 의해서 결정된다라는 겁니다. 이게 리비히의 최소력 법칙. 그리고 실험을 어떤 실험을 하냐면 나무통 판자 실험을 해요. 그래서 나무통에 이렇게 물을 붓는데 한쪽에 나무통의 높이가 낮으면 물을 부면 그 낮은 판자의 높이만큼 물은 채워지는 거예요. 99개가 다 높은 것으로 균열하게 이렇게 채워져 있어도 하나가 음 하나가 반토막으로 돼 있거나 1토막으로 돼 있으면 그 1 토막만큼 물은 채워지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빠져나가는 겁니다. 이게 리비히의 최소율의 법칙이에요. 예전에 박영선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제가 들었던 내용 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인들이 그 욕조에 수도꼭지 물기둥 하나를 세운대요. 어떤 사람은 전도. 그래서 이 사람은 그 많은 사람들을 볼 때 막 전도의 열심이 막 대단하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 기도의 철량이 뭐 소나무를 하나를 뽑 기도 어떤 사람은 말씀 교리 막 어 어떤 사람은 막 주차부터 해서 성가대 성가대란 말 틀린 단어예요. 찬양되면 막 뭐 봉사하고 막 어 각자의 어느 한 부분에서 이렇게 물기둥 하나를 세우는데 그게 아니라 물은 물기둥 하나만 욕조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전반적으로 차올라서 같이 이렇게 욕조가 차듯이 전 인격적으로 신앙의 전반이 자라가야 된다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예. 저희 집사람이 저한테 언젠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아 잘 이런 말 또 하면 또 혼날 것도 같은데 당신은 참 이상하대. 그 뭐가 이상하냐? 내가 일을 뽑은 게 없는데 왜 이상하냐? 이상하대. 그 뭐가 이상하냐 했더니 당신이 성도들을 대할 때 보면 잘 참는데. 근데 왜 테니스 칠 때는 못 참냐고? 근데 테니스 칠 때 못 참는 게 제 리뷰의 최소율입니다. 그게 저의 신앙 인격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 부분에서 아 내가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살려 두시는 이유는 여기에 있구나. 내가 성도들을 대할 때는 가식을 하고 기도를 하고 막 했어. 그런데 운동할 때는 이걸 참아내지를 못하는 거예요. 아, 이게 나구나.
빌립보서 2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니까 뭐 무엇을 자기가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근데 여기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것을 표준 세 번역은요. 어 그 이루어 나가라고 번역했고요. 이 말은 뭐냐면 그 완주하라 뜻입니다. 완주하라. 그러니까 어 이미에 이미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월계수를 쓴 자로서 이미 우승했어요.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근데 끝까지 그 이루어진 구원을 완주해 가도록 요청하는 것이죠.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칼빈은 음 이런 표현을 쓰더라고요. 예. 그 극단적 개혁주의는 과정을 무시한다. 음. 음. 성령의 열매가 있잖아요.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충성, 온유, 절제 이런 성령의 열매는요. 과정에서 맺쳐져 나오는 거예요. 아, 나는 그 결과 열매로 나는 사랑이 근데 그 사랑이 오래참음이 충성이에 성도의 일상 일상과 또 우리의 그 예배와 또 성도의 교재와 이곳에서 이 과정에서 이것이 나오는 것이 이게 성령의 열매입니다. 가정을 무시하고 어이 우리 안에서 어떤 신앙의 그런 하나 하나를 신앙의 하나 기도 나는 기도 왜에 장로님들이 기도 안 해? 기도 하나를 세우는게 아니라 그렇다고 우리 장로님들이 기도 안 한다고 제가 말하는게 아니에요. 그냥 여러분들이 상처를 제일 안 받는 분이 장로님이기 때문에 제가 표현을 그렇게 한 겁니다. 왜 교회가 선교를 안 해? 어느 하나만을 세우지 마시고 그 속에서 그렇다면 나는 왜라고 말하는 나는 그 안에서 충성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그 열매들을 맺쳐가는 그런 모습으로 나는 자라고 있는가? 이 부분을 봐야죠. 그래서 하나님은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다만 그이 천국에 드려 보내 드려오는 그런게 아니 성경에서 말하는 성경적 구원은 잘 들으세요. 천국을 받은 자가 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 그 성경적 구원 아닙니다. 성경적 구원은 천국을 받은 자가 그 천국 다워져 가도록 그 되는 구원이에요. 천국인 다져 가는 천국이 되어 가는 천국 들어가는 구원이 아니라 이미 천국은 받았잖아요. 완성으로 받았잖아요. 그러면 지금 이 현실에서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천국 다운 천국이 되어 가는 과정이거든.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우리 과정 속에서 있어야 됩니다. 오아요. 늘 바리새인들은 옳았습니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요한복음 8장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은 여인의 간음을 보았대요. 예수님은 가음한 여인을 보셨답니다. 우리가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을 성령의 열매로 맺쳐 줘야 되는지를 생각하셔. 오늘 복음의 은잔이 그런 겁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보여 주는 것이죠. 여러분, 그 요셉은 지금 감정을 억누르며 지금 그이 형들을 알잖아요. 그런데 그 감정을 억누르면서 어, 이 은잔 사건을 버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이 요셉은 자신의 운명 속으로 지금에 형들을 들여넣고 있는 겁니다. 요셉의 우리 고난을 알죠. 그 요셉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이었고 그 예수님의 고난은 동일하게 우리 성도의 고난이에요.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들어가도록 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구원하신 겁니다.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하셨다. 대신이 아니에요. 함께 하시는 거예요. 내 죄를 위하여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나와 함께 부활하셨고 함께 응 그 함께 하신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아가도록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거예요. 우리는 그 신앙을 해야 되는 겁니다. 내가 맞아. 맞으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그 생명을 어떻게 표출해 내셨고 어떻게 살려내셨는가? 그래서 오래 참는 것이고 그래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거예요. 이 싸움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 시편 105편 마지막으로 말씀 볼까요?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냈으며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착고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이렇게 가는 겁니다. 그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과정이 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요셉이 단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들어갔던 것처럼 우리의 고난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우리를 들어가도록 이때까지 복음의 은자는 있어지는 거예요. 이 복됨이 예 저와 여러분의 신앙 속에 가득 채워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자신이나 공동체인 교회를 볼 때 예, 이렇게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우리 교회는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 개혁교회, 개혁 신앙을 자랑하면서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나님께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우리를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목적 두셨던 그 자리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절망은 하되 자폭은 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이루어내실 거예요. 그리고 어 지금의 내 모습, 지금의 우리의 부족한 교회 모습 앞에서 우리는 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아름다운 교회 모습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소망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쳐낼 수 있도록 함 힘써 회개하고 믿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권합니다.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우리 모두를 하늘의 잔치로 또 그 잔치에 앉아서 식탁에 참여하는 우리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에 사랑과 은혜와 받아줌과 섬김이 가득차고 충발한 넘치는 우리의 모습으로 보게 해 주시고 이제 그 모습대로 이 땅에서 살아내라. 이게 너의 참 모습이다. 너의 본질이고 너의 참 가치이며 존재이다.라고 오늘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살아내겠습니다. 나 홀로 하는 게 아니라 야곱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내려갈 것이고 그곳에서 함께 있을 것이며 내가 너와 함께 올라올 것이다. 말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붙듭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원하셨던 그런 교회로 장성해 갈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지역에서 말씀과 기도와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건강한 교회로 자라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나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