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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당신은 지금이 순간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름을 떠올리셨나요? 아니면 직업이나 역할을 생각하셨나요?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그 이름을 갖기 전, [음악] 그 역할을 맡기 전 당신은 누구였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혼란스러워하는지 아셨습니다. 우리는 평생 나라는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 '나'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음악]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함께 이 깊은 물음 앞에서 보려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오래된 질문은 불교 수행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입니다. 어쩌면 당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이 여정에 지금 함께하시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봅니다. 그 안에 비친 얼굴을 보며 우리는 [음악]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나야라고. 하지만 그 얼굴은 10년 전과 같습니까? 20년 전 어린 시절의 그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같습니까?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새로 태어나며 몸은 매순간 변화합니다. [음악] 그렇다면 변하는 이 몸이 정말 나일까요?
혹시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몸은 변해도 내 마음, 내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고. 정말 그럴까요? 10년 전 당신이 좋아하던 것과 지금 좋아하는 것이 같습니까? [음악] 예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와 지금의 가치가 같습니까? 화가 났던 그 순간의 마음과 평온했던 순간의 마음, 둘 다 당신이라면 진짜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모든 모양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님을 본다면 곧 열래를 보리라." 금강경의 이 구절은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모든 것, 이름도 직업도 외모도 생각도 모두 변하는 모양일 뿐입니다.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구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름을 붙잡고 이것이 나라고, 이것이 내 것이라고 외칩니다.
한 청년이 [음악]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출가 전에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고, 출가 후에는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전의 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저는 누구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미소 지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전에 너라고 집착했던 것도 실체가 없었고, 지금 내가 나라고 여기는 것도 실체가 없느니라. 다만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 따라 흩어지는 오온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오온 즉 색, 수, 상, 행, [음악] 식은 우리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입니다. 몸이라는 물질적 요소,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이 다섯 가지가 모여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음악] 현상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이 다섯 가지 중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고, 독립적이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닙니다. 마치 파도가 물과 바람과 중력이 만나 일어나는 현상이듯, 나라는 것도 여러 조건이 모여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 파도에게 이름을 붙이고 이것이 나라고 주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스승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30년을 수행했지만 여전히 번뇌에 시달립니다. 분노도 일어나고 욕심도 생기고 질투도 느낍니다. 이런 저는 수행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스승은 조용히 물었습니다. [음악] "그렇다면 번뇌를 느끼지 않을 때 너는 수행자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때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의 너와 번뇌가 없을 때의 너, 둘 다 너라면 진짜 너는 어디에 있는가? 아니면 [음악] 둘 다 네가 아니라면 지금 나와 이야기하고 있는 이것은 누구인가?"
제자는 그 순간 깊은 침묵에 빠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음악] 끊임없이 변하는 마음의 상태에 '나'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화난 나, 슬픈 나, 기쁜 나, 평온한 나. 하지만 이 모든 상태가 다 나라면, 정작 변하지 않는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그저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일 뿐, 뒤에 실체로서의 나는 없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이 느낌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연기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이 감각도 수많은 조건들이 만나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몸, 자라온 환경, 배운 지식, 만난 사람들, 겪은 경험들. 이 이 모든 조건이 모여서 지금 이 순간에 '나'라는 느낌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이 조건들이 변하면 '나'라는 느낌도 변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달라지고, [음악]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달라지고, 좌절을 겪으면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조건에 따라 계속 변하는 것을 어떻게 영원 불변한 '나'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음악] 한 부유한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음악] 자신의 재산과 지위에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나는 성공한 사람이야. 나는 존경받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화재로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실패자야."
그때 한 스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재산이 있을 때의 당신과 재산이 없는 지금의 당신, 둘 [음악] 중 어느 쪽이 진짜 당신입니까?"
상인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스님이 다시 말했습니다. "재산도 지위도 당신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조건 따라 왔다가 조건 따라 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오기 전, 그 모든 것이 간 후에도 여전히 여기 있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던져집니다. 우리는 소유물로 자신을 정의합니다. 내 집, 내 차, 내 직장, 내 학벌. 관계로 자신을 정의합니다. 누구의 부모, 누구의 자녀, 누구의 배우자. 역할로 자신을 정의합니다. 의사, 교사, 사업가, 학생. 하지만 [음악] 이 모든 것을 잃어도 여전히 무언가는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음악] 숨을 쉬고, 생각하고, 느끼는 이 무언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색은 무아이니라. 만약 색이 나라면, 색이 병들고 괴로워지는 일이 없을 것이며, 색에 대해 '나'라. 이렇게 되지 말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니라. 하지만 색은 병들고 괴로워지며, 색에 대해 '이렇게 되어라. 이렇게 되지 말아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색은 나가 아니니라."
이 이 가르침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만약 이 [음악] 몸이 정말 나라면,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늙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어야 하고, 병들지 말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여, 일어나지 마라"라고 명령해도 분노는 일어납니다. "슬픔이여, 사라져라"라고 해도 슬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나'라고,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어린 [음악] 시절 우리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이것은 내 거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음악] 시간이 지나면 그 장난감에 대한 집착은 사라집니다. 청소년이 되면 친구 관계가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친구 없이는 못 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새로운 관계가 생깁니다. 젊을 때는 외모와 체력이 자신의 정체성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것들도 변하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우리가 나라고, 내 것이라고 집착했던 모든 것들은 시간 속에서 변하고 사라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붙잡고 이것이 나라고, 이것이 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집착이 바로 괴로움의 근원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는 '일체개고',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왜 모든 것이 괴로움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변하는 것을 영원하다고 착각하고, 실체 없는 것에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에 집착하면 그 '나'를 보호하고 키우고 방어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면 화가 나고, 나를 무시하면 상처받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좌절합니다. '내 것'이라는 것에 집착하면 그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음악] 만약 '나'라는 것이 실체가 없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방어해야 합니까? 만약 '내 것'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면 무엇을 잃는다고 두려워해야 합니까?
한 수행자가 깊은 산 속에서 홀로 명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도적들이 나타나 그의 작은 암자를 불태우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음악] 다른 수행자들은 그가 분노하고 좌절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들이 가져간 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내 곁에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간 것뿐입니다. 불에 탄 암자도 [음악] 언젠가는 낡아서 무너질 것이었고, 이 몸도 언젠가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다만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 달라졌습니까?"
다른 수행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아무것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말입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모든 것이 소중합니다. [음악] 하지만 소중하다는 것과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다릅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꺾어서 내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피어 있는 곳에서 그 아름다움을 즐기면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소유하려 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함께 있는 순간을 감사히 여기면 됩니다."
[음악] 이것이 바로 무아의 지혜가 가져다주는 자유입니다.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나를 지키느라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난받아도 흔들리지 않고, 칭찬받아도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음악] 왜냐하면 비난받을 '나'도, 칭찬받을 '나'도 원래 실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혼란스러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없다는 말입니까? 지금 여기서 듣고 생각하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그런 방식의 '나', 영원 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고 느끼는 작용은 분명히 일어납니다. 다만 그 작용 뒤에 따로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 그 자체가 일어날 뿐입니다. 마치 비가 내릴 때 비를 내리게 하는 별도의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름과 수증기와 온도와 기압이 만나 비가 내리는 현상이 일어나듯이, 생각이 일어날 때도 생각하는 별도의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이 맞아 생각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무아를 깨닫는 첫걸음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호흡을 느껴 보십시오. 숨이 들어오고 나갑니다. 이 호흡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음악] 내가 숨을 쉰다고 생각하지만, 잠들어 있을 때도 호흡은 계속됩니다. 의식하지 않아도 심장은 뛰고, 소화는 일어나고, 세포는 [음악] 분열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아니면 [음악] 이런 작용들이 그냥 일어날 뿐 따로 주인은 없는 것입니까?
생각을 관찰해 보십시오. 지금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음악] 그 생각은 당신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떠올랐습니까? 다음에 어떤 생각이 떠오를지 미리 알 수 있습니까? 생각은 조건 따라 저절로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저절로 사라집니다. 당신이 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음악] 표현일까요?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픈 영화를 보면 슬픔이 일어나고, 무서운 장면을 보면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당신이 슬퍼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조건이 갖추어지니 슬픔이라는 감정이 자동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이 모든 현상을 지켜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조건 따라 일어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는 것. 그 과정에서 별도의 '나'라는 주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무아, 무상, 공'이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영원한 나는 없고, 모든 것은 변하며, 실체라고 집착할 만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이 가르침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하지만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가벼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를 지키고 방어하느라 쓰던 에너지를 이제는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남이라는 구분도 사실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스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음악] "강물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가?"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산에서 시작되어 바다로 갑니다."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음악] 산의 물과 강의 물과 바다의 물은 같은가 다른가?"
제자들은 혼란스러워했습니다. 하기에는 모양과 위치가 다르고, 다르다고 하기에는 연결되어 흐릅니다.
스님이 말했습니다. "물은 조건 따라 산에서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내리고, 계곡을 흐르고, 강이 되고, 바다에 이릅니다. 그 어느 순간도 물은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음악] 땅과 하늘과 태양과 모든 것이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도 이와 같습니다. 부모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당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태양이 없었다면, [음악] 공기가 없었다면, 땅이 없었다면, 수많은 농부와 요리사와 배달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당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이 없었다면, 책이 없었다면, 경험이 없었다면 그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와 연결된 하나의 현상입니다. 인드라망이라는 불교의 상징이 있습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그물이 있는데, 그 그물의 각 교차점에 보석이 하나씩 달려 있습니다. 각각의 보석은 다른 모든 보석을 반사하고, 그렇게 반사된 이미지는 또 다른 보석에 반사됩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이 반사 속에서 어느 하나의 보석도 독립적으로 [음악]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도 이와 같습니다. 당신 안에는 부모님이 [음악] 있고, 조상들이 있고, 스승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음악] 심지어 원수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음악] 없었다면 지금의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안에는 햇빛과 [음악] 비와 땅이 있고, 공기와 물이 있고, 우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발견하려 한다면 우주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나를 이해하려 한다면 모든 존재와의 연결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이 알려주는 진실입니다. 독립적인 나는 없지만, 모든 것과 연결된 나는 있습니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지만,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과정으로서의 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깨달음을 어떻게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음악] 첫 번째는 관찰입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 보십시오. 판단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십시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껴 보십시오.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해 보십시오. 감정이 일어났다가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이렇게 지켜볼 때, 당신은 관찰자입니까? 아니면 관찰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관찰이라는 행위 그 자체입니까? 이 이 질문 속에서 '나'라는 고정된 실체를 찾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집착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루 동안 자신이 얼마나 자주 '나', '내 것'이라는 말을 사용하는지 관찰해 보십시오. 내 의견, 내 감정, 내 권리, 내 물건. 이렇게 말할 때마다 잠시 멈추어 물어보십시오. 정말 이것이 나인가? 정말 이것이 내 것인가? 이 생각은 언제부터 [음악] 있었는가? 언제까지 있을 것인가? 이것이 변하면 나는 사라지는가? 이런 질문을 계속하다 보면 [음악] 집착이 조금씩 느슨해집니다. 마치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서서히 펴는 것처럼.
세 번째는 연결을 느끼는 것입니다. [음악] 오늘 하루 당신이 숨 쉬는 공기는 나무들이 만들어 준 것입니다. 먹는 음식은 농부들이 키워 준 것입니다. 입고 있는 옷은 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존재들이 당신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느낄 때 당신은 더 이상 외롭고 고립된 '나'가 아닙니다. 모든 것과 연결된 우주적 존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한 송이 꽃 속에 우주가 있고, 한 티끌 속에 벗개가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라는 존재 속에도 우주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당신을 통해 우주가 경험하고 느끼고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당신은 모든 것이고, 동시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우주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우주 전체입니다. 당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음악] 끊임없이 흐르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하고 증명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괴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완벽한 '나'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완벽해야 할 고정된 나는 애초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 순간,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삶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 오면 온전히 기쁨을 느끼고, [음악] 슬픔이 오면 온전히 슬픔을 느낍니다.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음악] 그냥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으로 봅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님을 볼 때 [음악] 우리는 비로소 진실을 봅니다. '나'라는 모양에 집착하지 않을 [음악] 때 진정한 '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고, 형태도 없고,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본래부터 청정하고 자유로운 본성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섰습니다. 이 질문은 한 번의 대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계속 물어야 할 화두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 화가 날 때마다 "지금 화내는 이것은 누구인가?" 기쁠 때마다 "기쁨을 느끼는 이것은 누구인가?" 이렇게 계속 물으며 살아갈 때, 어느 순간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음악] 질문하는 자도, 질문받는 자도 원래 따로 없었다는 것을. 다만 질문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깨달음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공이면서 동시에 충만하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 깨달음의 가능성이 있다고 [음악] 말씀하셨습니다. 불성은 모든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만 망상과 집착이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집착을 내려놓으면 그 본래 청정한 불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 면목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진실입니다. [음악]
지금 이 순간 호흡을 느껴 보십시오. 그 호흡 속에서 우주를 느껴 보십시오. 주변의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그 소리 속에서 정막을 느껴 보십시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깨어 있으십시오. 과거의 '나'도, 미래의 '나'도 잠시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현존을 느껴 보십시오. 그 속에서 당신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진정한 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가슴으로 알 수 있는 답을, 설명할 수 없지만 경험할 수 있는 진실을.
당신 부모님의 부모님을 만나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분들의 부모님은 어떤 모습이셨을까요? 거슬러 올라가면 10대 조상, 100대 [음악] 조상, 천대 조상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 단 한 분이라도 없었다면 지금의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 그 모든 조상이 태어나기 전 당신의 본래 면목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선종의 역대 조사들은 이 질문을 화두로 삼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직 만나기 전,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보라고.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근원, 본질, 진정한 정체성을 직접 체험하라는 간절한 가르침입니다.
중국 [음악] 당나라 시대 한 젊은 수행자가 해능 선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수년간 경전을 공부하고 계율을 지키며 열심히 수행했지만, 여전히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했습니다. 해능 선사께 절을 올리고 물었습니다. "큰스님, 저는 오랫동안 불법을 배웠지만 아직도 [음악] 번뇌가 끊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해능 선사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번뇌를 없애려 하지 말고, 번뇌가 일어나기 전 너의 본래 면목을 보아라."
젊은 수행자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본래 면목이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해능 선사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기 전, 아직 이름도 없고 몸도 없던 그때 너는 무엇이었느냐?"
젊은 수행자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이 화두를 붙들고 밤낮으로 참구했습니다. 본래 면목, 본래 면목. 태어나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머리로 생각하려 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면 영혼 같은 것이 있었을까? 업식이 있었을까? 하지만 모든 생각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으로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 물었습니다. 걸을 때도, 앉을 때도, 밥 먹을 때도, 쉴 때도. 본래 면목, 본래 면목. 석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새벽, 그는 산길을 걷다가 우연히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습니다. 생각도 멈추고, 의문도 멈추고, 찾는 자도, 찾는 대상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알았습니다. 태어나기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없이 여기 있던 그것을. 이름 붙일 수 없고, 형태도 없고, 오고 감도 없는, 본래부터 청정한 본성을.
그는 해능 선사를 찾아가 절을 올렸습니다.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이제 본래 면목을 보았느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음악] "보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본래부터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해능 선사께서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찾던 것은 멀리 [음악] 있지 않았다. 다만 내가 밖으로만 찾았을 뿐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찾아 헤맵니다. 행복을 찾고, 성공을 찾고, 사랑을 찾고, 의미를 찾습니다. 하지만 정작 찾아야 할 것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여기, 지금 당신 안에 있습니다.
본래 면목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당신의 본래 본성입니다. 몸이 변해도 변하지 않고, 생각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영원한 진실입니다. 하지만 [음악] 이것을 말로 설명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본래 면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래 면목은 언어와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경험해야 하는 것이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능 선사의 스승인 홍인 대사께서 [음악] 제자들에게 개송을 지어오라고 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수제자인 신수는 이렇게 썼습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으니, 때때로 [음악] 부지런히 닦고 털어서 티끌이 끼지 않게 하라." 이것은 점진적인 수행, 끊임없는 정진을 강조하는 계송입니다. 번뇌를 닦아내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수행을 쌓아가면 언젠가 [음악] 깨달음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해능은 달랐습니다. 그는 글을 몰랐지만, 누군가에게 부탁해 [음악] 이렇게 쓰게 했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 밝은 거울도 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음악] 어느 곳에 티끌이 일겠는가?"
이 이 계송은 완전히 다른 차원을 가르칩니다. 닦을 마음도, [음악] 깨끗해져야 할 거울도, 없애야 할 티끌도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면목은 처음부터 완전하고 청정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홍인 대사께서는 해능의 계송을 보시고 그에게 조용히 법을 전하셨습니다. 육조의 탄생이었습니다.
해능 선사의 가르침은 도노, 즉 단박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깨달음은 시간을 두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음악]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천년 동안 어둠이 쌓여 있었다 해도, 촛불 하나만 켜면 단박에 밝아지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량 동안 무명에 가려져 있었다 해도 [음악] 본래 면목을 보는 순간 모든 어둠이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본래 면목을 볼 수 [음악] 있습니까? 역설적이게도 보려고 S는 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는 자가 바로 본래 면목이기 때문입니다. [음악] 눈이 자기 자신을 직접 볼 수 없듯이, 본래 면목은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수행자가 조주 선사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걔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무."
이 한마디 '무'는 선불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걔에게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닌 '무'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음악] 혼란스럽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음악]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걔에게도 당연히 불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무'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무'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있고 없음을 넘어선 것. 언어와 개념을 초월한 것. 직접 체험해야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수행자는 이 '무'자를 화두로 삼아 참구해야 합니다. '무', '무'. 생각으로 풀려고 하지 말고 온몸으로 '무'가 되어야 합니다. 먹을 때도 '무', 걸을 때도 '무', 잘 때도 '무'. 이렇게 '무'자와 하나가 될 때, 어느 순간 의단이 [음악] 타파되며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임재선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견해를 바르게 해야 한다. 견해가 바르면 생사를 벗어나도 가고 머물러도 [음악] 자유롭다." 그렇다면 어떻게 견해를 바르게 합니까? 임재 선사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또렷하게 듣고 있는 이 한 사람. 형상도 없고 [음악] 근본도 없으며 의지할 곳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는 이 활발한 사람. 이것이 바로 부처다."
당신이 지금 이 말을 듣고 있습니다. 듣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귀입니까? 아니면 의식입니까? 귀는 단지 소리의 진동을 받아들이는 기관일 뿐입니다. 의식도 조건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귀도 아니고 의식도 아닌, 정작 듣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직접 보라는 것이 선종의 가르침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생각으로 잡을 수 없는, 하지만 지금 여기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는 이것. 이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 면목입니다.
덕산 선사께서는 젊은 시절 금강경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유명했고 자신만만했습니다. 어느 날 남방의 직지인 [음악] 견성을 가르치는 선승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바로가 보여주면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금강경 주석서를지고 남방으로 가서 그들의 헛된 주장을 논파하려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한 노파가 파는 떡집에 들렀습니다. 떡을 사 먹으려 하자 노파가 물었습니다. "스님, 무엇을 그리 많이 지고 가십니까?"
덕산이 대답했습니다. "금강경 주석서입니다."
노파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금강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음악]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으로 떡을 드시려 합니까?"
덕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음악] 평생 금강경을 공부했지만, 그 순간 자신이 정작 금강경의 진위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과거 마음도, 현재 마음도, 미래 마음도 잡을 수 없다면, 정작 지금 생각하고 의심하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덕사는 자신의 오만을 버리고 용담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용담 선사께 법문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깊어지자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돌아가 쉬어라."
덕산이 밖으로 나가려다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밖이 너무 어둡습니다."
용담 선사께서 촛불을 켜서 건네 주셨습니다. 덕산이 촛불을 받으려는 순간, 선사께서 '훅'하고 불어 촛불을 껐습니다. 그 순간, 칠흑 [음악] 같은 어둠 속에서 덕사는 활짝 깨달았습니다.
다음날 덕사는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금강경 주석서를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깊은 현묘한 이치를 안다 해도, 그것은 허공에 털럭하나 놓은 것만도 못하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 해도, 그것은 큰 바다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만도 못하다."
덕산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촛불이 꺼진 순간, 모든 외부의 빛이 사라졌습니다. 볼 수 있는 모든 대상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아는 것은 있었습니다. 어둡다는 것을 아는 것,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 외부에 빛이 없어도 여전히 [음악] 밝게 깨어 있는 이것이 바로 본래 면목입니다.
우리는 항상 외부를 향합니다. 지식을 쌓고, 경험을 모으고, 성취를 이루려 합니다. 하지만 [음악] 그 모든 것은 촛불과 같습니다. 언젠가는 [음악] 꺼질 것입니다. 몸도 늙고, 기억도 흐려지고, 모든 성취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할 본래 면목입니다.
백장 선사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은 나에게 무엇을 구하는가? 지금 내 앞에서 또렷하게 듣고 있는 그대들. 그 그대가 바로 부처인데 무엇을 더 구하는가? 부처는 멀리 있지 않다. 부처는 과거의 석가모니만을 가르키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음악] 듣고 보고 생각하는 이것.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부처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의심했습니다. "저는 번뇌 많고 무지한 범부인데, 어떻게 부처일 수 있습니까?"
백장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 다만 미혹하면 중생이요, 깨달으면 부처다. 미혹과 깨달음도 실제로는 둘이 아니다. 본래 면목을 보면 미혹도 깨달음도 모두 꿈과 같다."
이 이 말씀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봅니다. 더 나아져야 하고, 더 깨끗해져야 하고, 완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래 면목의 관점에서 보면, 처음부터 완전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여기는 망상이 있을 뿐입니다. 마치 구름이 해를 가렸다고 해서 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구름은 와도 해는 그대로 있고, [음악] 구름이 가도 해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의 번뇌도 마찬가지입니다. 번뇌가 일어나도 본래 면목은 더럽혀지지 않고, 번뇌가 사라져도 본래 면목이 더 밝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청정하고 완전합니다.
그렇다면 수행은 왜 해야 합니까? 본래 완전하다면 그냥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 선사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수행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음악]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거울이 먼지로 덮여 있으면 닦아야 하듯이, 번뇌의 구름이 본래 면목을 가리고 있으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음악] 거울의 본질은 닦기 전에도 닦은 후에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먼지가 거치면 원래의 밝음이 드러날 뿐이다."
[음악] 운문 선사께 한 수행자가 물었습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운문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말은 똥막대기니라."
이 이 답은 충격적입니다. 부처를 가장 더럽고 쓸모 없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왜 이런 답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수행자가 부처를 멀리 있는 신성한 존재로 여기는 관념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부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 지금 일상의 가장 평범한 곳에 있습니다. 먹을 때도 부처요, 걸을 때도 부처, 화장실에 갈 때도 부처입니다. 본래 면목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신비한 경험이나 초능력이 아닙니다. [음악] 그냥 지금 여기 이 평범한 일상 그 자체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조주 선사께 한 수행자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이것은 달리 말하면 불법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조주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뜰 앞에 잔나무니라."
뜰 앞에 잔나무. 그냥 거기서 있는 평범한 나무. 이것이 불법의 핵심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잔나무는 그냥 잔나무로서 있습니다. 버드나무가 되려 하지도 않고, 소나무가 되려 하지도 않습니다. [음악] 더 크려고 애쓰지도 않고, 작다고 자책하지도 않습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겨울이 오면 잎을 떨굽니다. [음악]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존재합니다. 이것이 본래 면목의 모습입니다. 무언가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미 완전합니다.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갑니다. 우리 인간만이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고 애씁니다. 더 좋은 사람, 더 성공한 사람, 더 깨달은 사람. 하지만 그렇게 애쓰는 것 자체가 본래 면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잔나무는 그냥 잔나무입니다. 당신도 그냥 당신입니다.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완전합니다.
아마케양 선사와 마조도일 선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젊은 마조가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악 선사께서 다가와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조가 대답했습니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남악 선사께서 기화장 하나를 주어 옆에서 갈기 시작하셨습니다. 마조가 이상하게 여겨 물었습니다. "스승님, 무엇을 하십니까?"
남악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거울을 만들고 있다."
마조가 말했습니다. "기화장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남악 선사께서 되물으셨습니다. "기화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한다고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는 깊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남악 선사께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칠 것인가, 소를 칠 것인가? 좌선은 앉는 것이 아니요, 부처도 형상이 아니다. 형상 없는 법에 집착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라. 내가 좌선하는 부처가 되려 한다면, 이것은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내가 앉는 모습에 집착한다면 [음악] 그 도리에 이르지 못한다."
이 가르침은 무엇을 말합니까? 본래 면목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좌선도 염불도 독경도 모두 방편일 뿐입니다. 방편에 집착하면 오히려 본래 면목을 놓칩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달을 보지 못하듯이.
그렇다면 수행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손가락이 없으면 달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손가락이 달은 아닙니다. 수행은 필요하지만, 수행 [음악]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본래 면목을 깨닫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그리고 일단 깨달으면, 모든 행위가 수행이 됩니다. 밥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자는 것도 모두 부처의 행입니다.
방거사라는 제가 거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깊이 [음악] 깨달은 사람이었지만, 출가하지 않고 평범한 가정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음악] 그의 딸 영조가 물었습니다. "아버지, 부처님의 [음악] 가르침은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방거사가 대답했습니다. "어렵도다. 어렵도다. 마른 나무에 [음악] 기름을 바르는 것 같구나."
그러자 부인이 말했습니다. "쉽도다. 쉽도다. 풀잎 위에 이슬처럼 쉽구나."
영조가 말했습니다.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것입니다."
세 사람의 답이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음악] 모두 맞는 말입니다.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음악] 우리의 모든 습관과 개념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깨달으면, 그것은 어렵지도 쉽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다만 이제는 '나'라는 집착 없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입니다.
해능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일겠는가?"
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본래 면목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음악]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습니다. 생각도, 감정도, 심지어 '나'라는 것조차 없습니다. 텅빈 허공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텅빔은 죽은 공허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생한 비어 있음입니다. 그 비어 있음 속에서 모든 것이 자유롭게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기쁨이 와도 그것에 물들지 않고, 슬픔이 와도 그것에 빠지지 않습니다. 마치 거울이 모든 것을 비추지만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것처럼.
한 수행자가 위산 선사께 물었습니다. "백천만 가지 물건이 한 가지로 돌아간다면, 그 한 가지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위산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음악] 삼배옷 한 벌을 지었는데, 무게가 7근이었다."
이 대답은 전혀 질문과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수행자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했는데, 선사는 옷 이야기를 하십니다. [음악]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선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이 돌아가는 그 한 가지를 어디서 찾습니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 지금 이 구체적인 삶 속에 있습니다. 청주의 삼배옷, 7근의 무게. 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경험. 이것이 본래 면목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의자에 앉은 느낌, 호흡하는 느낌, 주변의 소리. 이 이 모든 것이 본래 면목의 작용입니다. 특별한 것을 찾지 마십시오. 지금 여기 이 평범한 순간 속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석두희천 선사께서 쓰신 참동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밝은 가운데 어둠이 있으니, 어둠으로서 대하지 말 것이며, 어두운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서 만나지 말라. 밝음과 어둠이 서로 의지하니, 마치 앞발과 뒷발이 나아감과 같도다."
이 말씀은 [음악] 본래 면목의 본질을 가르칩니다. 본래 면목은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닙니다. 밝음과 어둠을 넘어서 있지만, 동시에 밝음과 어둠을 모두 포함합니다. 옳음, 그름이 모든 대립을 넘어서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넓은 마음. 이것이 본래 면목의 모습입니다.
선종에서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화두 참구, 묵조선, 간화선, 염불선.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개념을 벗어나, 본래 면목을 직접 체험하는 것. 임재 선사의 '할', 덕산 선사의 '방' [음악] 이런 것들도 모두 제자들의 분별심을 타파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 생각이 끊어지는 그 순간, 본래 면목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음악]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일상 속에서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이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수행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는 것. 설거지를 할 때는 설거지에 온전히 집중하고, 걸을 때는 걷는 것에 온전히 깨어 있고, 대화할 때는 상대의 말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 것. 이렇게 매 순간 온전히 현존할 때, 본래 면목과 하나가 됩니다. 왜냐하면 본래 면목은 항상 지금 여기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이 순간 여기가 아닌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곳. 이것이 본래 면목이 머무는 곳입니다.
선사들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상심 시도(平生心 是道), 평상심이 바로 도다." 특별한 경지를 구하지 말고, [음악] 평범한 마음 그대로가 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음악] 평상심은 번뇌로 가득한 우리의 일상적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도 거부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음악]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우는 자연스러운 마음. 다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평상심이고, [음악] 이것이 본래 면목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본래 면목은 어디에 [음악] 있습니까?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것, 생각하고 있는 이것, 의심하고 있는 이것. 바로 이것이 본래 면목입니다. 다만 그것을 대상화하려는 순간 놓쳐 버립니다. 왜냐하면 보는 자가 바로 본래 면목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듯이, 본래 면목은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분명히 여기 있습니다. 살아 있고, 깨어 있고,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의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미 완전합니다. 다만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음악] 그 모음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었고, 찾을 것도 없었고, 닦을 것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했고, 지금도 완전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완전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능 선사께서 깨달으신 진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 면목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됩니다. 출근 준비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본래 면목을 깨달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깨달음은 산속 동굴에서만 유효한 것일까요? 아니면 이 복잡하고 분주한 세상 속에서도 살아 숨쉬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이니, 다른 누가 의지처가 되겠는가? 자기를 잘 조복한 사람은 얻기 어려운 의지처를 얻느니라."
이 말씀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본래 면목을 깨달았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의지처를 찾았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외부의 것에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재산에 의지하지 않아도, 명예에 의지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인정에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가장 확실한 의지처가 자기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출가하지 않고 세상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왜 속세에서 장사를 합니까? 산속에 들어가 수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상인이 대답했습니다. "산에 들어가면 산이 절이 되고, 시장에 나와도 시장이 절이 됩니다. 본래 면목을 알면 어디든 청정도량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깨달음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그는 장사를 할 때도 정직했고, 손님을 대할 때도 자비로웠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되 탐욕스럽지 않았고, 손해를 보아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득과 손실도 모두 인연 따라오고 가는 것일 뿐. 진정한 나는 그 무엇으로도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것을.
어느 날 큰 화제로 그의 가게가 전소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쌓아온 재산이 하루아침에 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슬퍼하고 좌절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2년 따라 모였던 것이 2년 따라 흩어졌을 뿐입니다. 본래 내 것이었던 적도 없고, 지금 잃어버린 것도 없습니다. 다만 또 다른 인연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작은 장사부터 시작했습니다. 원망도 없고, 조급함도 없이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지혜가 일상에서 펼쳐지는 모습입니다. 나라는 집착이 없으니 이를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으니 빼앗길 것도 없습니다. 다만 지금이 순간 주어진 인연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아를 깨달으면 아무것도 소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도, 소중한 것을 잃어도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냉정하고 무감각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랑. 내 필요를 채우려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 집착이 없으니 질투도 없고, 소유욕도 없고,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심도 없습니다. 다만 함께 있는 순간을 온전히 감사하고, 떠나갈 때는 아름답게 보내 줄 수 있습니다.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깊은 수행을 한 사람이었지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잠시 내게 맡겨진 인연일 뿐이라는 것을. 아이가 자라면서 그녀는 최선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도록 도왔고, 자신의 기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 멀리 떠날 때 그녀는 슬펐지만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아이가 떠나가도 슬프지 않습니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슬픔은 느낍니다. 하지만 슬픔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입니다. 그것을 느끼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꽃이 피었다 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만남과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무아를 깨달은 사람의 삶입니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강조하셨습니다. 자(慈)는 기쁨을 주는 것이고, 비(悲)는 괴로움을 덜어 주는 것입니다. 무아를 깨달으면 진정한 자비가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나와 남이라는 구분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남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남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됩니다. 하지만 그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물이 넘치는 것을 보면서도 물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느끼되 그 안에서 길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명확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니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선사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비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중생을 볼 때, 그 괴로움이 진실이 아님을 안다. 다만 그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스스로의 본래 면목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이 진정한 자비다."
이 말씀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도움은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본래 완전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을 걷어내어 해가 드러나도록 돕는 것처럼.
일상에서 무아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 발을 밟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화가 났을 것입니다. "왜 조심하지 않는 거야? 사과도 안 해. 무례한 사람이야." 나라는 것에 집착하니 상처받고 방어하고 화를 냅니다.
하지만 무아를 깨달으면 다릅니다. 발을 밟힌 아픔은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몸이라는 현상과 다른 몸이라는 현상이 부딪친 것일 뿐입니다. 아픔은 느끼되 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대를 보니 급한 일이 있어 보입니다. 오히려 괜찮다는 미소를 보냅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부당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억울하고 분했을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밤새 그 일을 곱씹으며 잠도 못 이루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아를 깨달으면 다릅니다. 상사의 화난 말을 들으며, 그 사람이 지금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어떤 스트레스, 어떤 두려움, 어떤 압박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화는 나를 향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화난 말은 들리지만,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민이 일어납니다. "저 사람도 괴로워하고 있구나."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실패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자책했을 것입니다. "나는 무능해. 나는 실패자야.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니 실패가 정체성을 위협합니다.
하지만 무아를 깨달으면 다릅니다.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그것이 나의 실패는 아닙니다.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일 뿐입니다. 그 경험에서 배울 점을 배우고, 다음에는 다르게 접근합니다. 자책도 없고, 변명도 없고, 다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이렇게 무아를 실천하면 삶이 훨씬 가벼워집니다. 방어할 나가 없으니 공격받아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증명할 나가 없으니 인정받지 못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완벽해야 할가 없으니 실수에도 자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무아는 무책임이 아닙니다. 나가 없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책임감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의 결과가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드라망의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하나의 보석이 움직이면 그물 전체가 함께 움직입니다. 당신의 한 생각, 한 말, 한 행동이 세상 전체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더 조심스럽게 살아갑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업의 법칙도 이와 같습니다. 모든 행위는 결과를 낳습니다.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악한 행위는 악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은 벌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입니다. 씨를 뿌리면 열매가 맺는 것처럼. 무아를 깨달으면 업의 법칙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고정된 나는 없지만, 행위의 연속성은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의 행위가 다음 순간을 만들고, 그것이 또 다음을 만들어 갑니다. 마치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그러므로 매순간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어떤 생각을 일으킬 것인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이 선택들이 모여 당신의 삶을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만듭니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아를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었는데 왜 힘든 농사일을 계속합니까?"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의무감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기쁨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씨를 뿌릴 때 씨앗이 돼지와 만나는 그 순간을 느낍니다. 물을 줄 때 물이 흙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함께 느낍니다. 싹이 트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모든 과정이 기적입니다. 나는 그저 그 기적이 일어나도록 조건을 만들어 줄 뿐입니다."
추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곡식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땅과 햇빛과 비와 공기와 무수한 미생물들이 함께 만든 것입니다. 나는 그저 그 과정에 참여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수학의 기쁨도 내 것이 아니라 우주의 기쁨입니다.
이렇게 일상의 모든 활동이 수행이 됩니다. 설거지를 할 때도, 걸을 때도, 대화할 때도, 모든 순간이 명상입니다. 왜냐하면 매순간 본래 면목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물었습니다. "수행과 일상은 다른 것입니까?"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무를 할 때는 나무를 하고, 물을 깃을 때는 물을 깃는다. 이것이 바로 수행이다. 나무를 하면서 깨달음을 생각하고, 물을 기으면서 부처를 찾는다면 그것은 나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물도 제대로 깃지 못한다. 지금 하는 일에 온전히 있는 것. 이것이 최고의 수행이다."
현대인들은 항상 어딘가로 가려고 합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 지금의 나가 아닌 다른 나를 찾으려 합니다. 더 성공하고, 더 행복하고, 더 깨달은 상태. 하지만 그렇게 찾아 헤매는 동안 정작 지금이 순간을 놓칩니다.
무아를 깨달으면 더 이상 다른 곳을 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찾던 평화도, 행복도, 자유도 모두 지금이 순간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완벽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완벽한 외모, 완벽한 직업, 완벽한 가정.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항상 무언가 부족했고, 항상 더 나아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날 심한 병을 얻었습니다. 더 이상 일할 수도, 외모를 가꿀 수도 없었습니다. 그토록 지켜왔던 완벽한 이미지가 무너졌습니다. 처음에는 절망했습니다. 하지만 병상에 누워 지내는 동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자 오히려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될 필요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여기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창 밖에 나무를 바라보며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나무는 완벽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냥 나무로 존재할 뿐이다. 꽃도 피었다 지고, 잎도 나왔다가 떨어진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아름답다. 나도 마찬가지다. 건강할 때도, 아플 때도, 웃을 때도, 울 때도, 모든 순간이 완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이 순간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병이 나은 후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완벽하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실수해도 괜찮고, 부족해도 괜찮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수록 더 자유롭고, 더 창의적이고, 더 진실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이전에 없던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무아가 가져다 주는 자유입니다. 완벽해야 할 나가 없으니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 무아를 깨달으면 이 팔 정도가 자연스럽게 펼쳐집니다.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바른 길을 걷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왜곡된 렌즈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니 정견이 일어납니다. 집착과 혐오가 없으니 정사유가 일어납니다. 상처 주려는 의도가 없으니 정어가 일어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칠 이유가 없으니 정업이 일어납니다. 탐욕 없이 일하니 정명이 일어납니다. 되려고 애쓰지 않으니 정정진이 일어납니다. 매순간 깨어 있으니 정념이 일어납니다. 산란함이 없으니 정정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무아의 깨달음은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킵니다. 어떤 사람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욕망은 어떻게 됩니까? 무아를 깨달으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됩니까?"
아닙니다. 욕망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욕망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배고프면 여전히 먹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욕망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먹을 수 있으면 감사히 먹고, 먹을 수 없으면 그것도 받아들입니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망도 조건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행 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 수행 중에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었다. 수행 후에는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 말씀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산은 그냥 산이고, 나는 그냥 나입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집니다. 산도 실체가 없고, 나도 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공하고, 모든 것이 환상 같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에 이르면 다시 산은 산이 됩니다. 동아지만 존재하고 실체는 없지만 작용합니다. 산은 여전히 거기 있고, 나도 여전히 여기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그것의 진정한 본질을 압니다.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과 연결된 현상이라는 것을. 영원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것을 알고 보는 산과 모르고 보는 산은 완전히 다릅니다.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기 전에는 그냥 일상입니다. 깨닫는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입니다. 하지만 깨달은 후에는 다시 일상이 빛납니다. 같은 설거지, 같은 출근, 같은 대화. 하지만 이제는 그 속에서 우주의 신비를 봅니다. 그릇을 씻으며 물과 하나가 되고, 걸으며 땅과 하나가 되고, 대화하며 상대와 하나가 됩니다. 모든 것이 성스럽고, 모든 순간이 기적입니다.
한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수행을 많이 하셔서 특별한 능력이 있으신가요? 허공을 날 수 있나요? 미래를 볼 수 있나요?"
할아버지께서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특별한 능력이라, 그런 건 없단다. 다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자고,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우는 것. 그것을 온전히 할 수 있게 되었지."
소년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게 뭐가 특별한가요? 누구나 하는 건데요."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사람들을 보렴. 밥을 먹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자면서도 걱정을 하고, 웃으면서도 슬퍼하고, 울면서도 화를 낸단다. 지금이 순간에 온전히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그것이 바로 가장 어렵고, 가장 특별한 능력이란다."
이 대화는 핵심을 짚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평범한 것을 평범하게 온전하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지금이 순간에 완전히 존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최고의 신통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니, 게을리하지 말고 정진하라."
이 말씀은 지금도 우리에게 울립니다. 무아를 깨달았다고 해서 수행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수행이 시작됩니다. 매순간 깨어 있어야 하고, 매순간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고, 매순간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쁨입니다. 될 필요가 없으니 되어가는 과정을 즐길 수 있습니다. 도착할 곳이 없으니 여행 자체를 음미할 수 있습니다.
한 여행자가 긴 여정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려고 서둘렀습니다. 길가에 풍경도 보지 않고, 쉬지도 않고, 오직 앞만 보고 걸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또 다른 목적지가 생길 것이고, 그렇게 평생 달려가다 인생이 끝날 것이라고.
그 순간부터 그는 걷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 보았습니다. 꽃이 피어 있으면 잠시 멈춰 그 향기를 맡았습니다. 새가 지적이면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피곤하면 나무 그늘에 앉아 쉬었습니다. 목적지는 여전히 있었지만, 더 이상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도착하면 좋고, 도착하지 못해도 괜찮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기쁨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 그 자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를 가지는 것은 좋지만, 목표에 집착하면 지금을 놓칩니다. 무아를 깨달으면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을 즐길 수 있습니다. 성공에도 교만하지 않고,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공과 실패도 조건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은 후 선사께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더 이상 구할 것도 바랄 것도 없습니다."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수행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편안히 앉아 있겠습니다."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집착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이다. 진정한 자유는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도 아니다. 해야 할 때는 하고, 쉬어야 할 때는 쉬되,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다."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 고행도 거부하고 쾌락도 거부했던 부처님의 길.
무아를 깨달았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물들지 않고, 연꽃이 진흙에서 피어나되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처럼.
일상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챙김입니다. 지금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 걸을 때 걷고 있음을 알고, 앉을 때 앉아 있음을 알고, 생각할 때 생각하고 있음을 아는 것. 이렇게 매순간 깨어 있을 때 무의식적인 습관과 반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 화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욕심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 욕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념, 바른 마음 챙김입니다.
한 직장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아에 대해 배우고 일상에서 실천하려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습니다. 회의 중에 누군가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면 자동으로 화가 났고, 승진에서 밀리면 자동으로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잠시 멈추고 관찰했습니다. "지금 화가 나고 있구나. 몸이 긴장되고, 심장이 빨리 뛰고, 공격적인 말을 하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관찰하는 순간 이미 화와 동일시되지 않았습니다. 화를 경험하는 나와 화 사이에 공간이 생겼습니다. 그 공간에서 선택이 가능해졌습니다. 화를 표현할 수도 있고, 그냥 흘려 보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변화를 느꼈습니다. 화가 일어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일어나도 금방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화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동료들도 그의 변화를 알아챘습니다. 예전에는 쉽게 흥분하고 방어적이었는데, 이제는 침착하고 열려 있었습니다. 비판도 잘 받아들이고, 갈등 상황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편해졌습니다.
이것이 무아의 실천이 가져오는 변화입니다. 자신만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편안해집니다. 자신만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유롭게 만듭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자, 그가 진정한 수행자다." 무아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이타적이 됩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흐려지니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에는 나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내가 포기하고, 내가 참는다는. 무아에서는 그런 나가 없으니 희생도 없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이 가고, 사랑이 필요한 곳에 사랑이 갑니다. 박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세상도 변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변화가 되어라." 무아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변화시킬 세상도, 변화시키는 나도 따로 없습니다. 다만 변화라는 현상이 일어날 뿐입니다. 그 변화는 당신에게서 시작되지만, 당신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주 전체의 변화입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과거를 후회하고 있습니까?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습니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이 여정이 이제 끝나갑니다. 하지만 진정한 여정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본래 면목을 보았다면, 이제 그것을 삶 속에서 펼쳐야 합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이렇게 물으십시오. "오늘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집착 속에서 살 것인가? 자유 속에서 살 것인가? 분리 속에서 살 것인가? 연결 속에서 살 것인가? 두려움 속에서 살 것인가? 사랑 속에서 살 것인가?
이 선택은 매순간 주어집니다. 한 번에 큰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매순간의 작은 선택들이 더 중요합니다. 화날 때 잠시 멈추는 선택. 판단하고 싶을 때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선택. 집착하고 싶을 때 내려놓는 선택. 이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삶을 만들어 갑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니, 게을리하지 말고 정진하라." 나라는 것도 무상하고, 본래 면목을 깨달았다는 경험도 무상합니다. 집착하면 그것마저 장애가 됩니다. 매순간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매순간 비우십시오. 매순간 깨어 있으십시오.
당신의 본래 면목은 지금 여기 있습니다.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이미 당신이 그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살아가십시오. 숨을 쉴 때 우주가 숨 쉬고, 걸을 때 땅이 걷고, 웃을 때 모든 존재가 함께 웃습니다. 당신은 작은 파도가 아니라 바다 전체입니다. 당신은 한송이 꽃이 아니라 봄 전체입니다. 당신은 따로 떨어진 개인이 아니라 우주의 표현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 이것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무아의 자유입니다.
오늘부터 매일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답을 찾으려 하지는 마십시오. 질문 그 자체 속에 머무십시오. 질문하는 그것이 바로 답입니다. 지금이 순간 살아 숨 쉬는 이 생생한 현존. 이것이 당신의 본래 면목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것으로 세상을 축복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