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et Our Mobile App

Take your business learning on the go!

Download on the App StoreGet it on Google Play

"신화란 무엇인가?" 인류가 만들어온 가장 오래된 이야기 |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총정리

밀리언마인드 A million mind1:01:53

Transcription

지금으로부터 약 이야기입니다. 당시 인류는 글자를 몰랐습니다. 도시도 국가도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불이 있었고 동굴이 있었고 그리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프랑스 남부 라스코 동굴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처럼 그들은 바위 벽에 달리는 들소를 그리고 손바닥 자국을 남기고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은 형상들을 새겼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그 그림을 남긴 사람들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둘 앞에 모여 앉아 그날 있었던 일을 전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두려운 것에 대해 죽음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지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을 겁니다. 아무도 대답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게 신화의 시작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디 있습니까? 불 대신 화면이 있고 동굴벽 대신 스크린이 있고 불빛 대신 영사기의 빛이 어둠 속으로 뻗어나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어둠 속에 모여 이야기를 듣습니다. 영화관의 좌석에서 이어폰을 꽂진 채 걸어가면서 혹은 지금 이렇게 혼자 목소리를 따라가면서 좋은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 앞에서 멈춰섭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제우스와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혹은 단군 왕검과 웅녀, 해와 다리된 온이 어쩌면 손호공이 연상되실 수도 있고 이집트에 오실이 있으나 아즈택의 태양신이 생각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과학이 없던 시절에 천둥과 홍수와 계절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들. 지금은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는 아주 오래된 옛 이야기들.

그런데 신화에는 이상한 특성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서로 만난 적 없는 문명들이 지구 반대편에 살면서 놀랍도록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홍수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는 이야기.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데우칼리온이라는 인물이 홍수에서 살아남습니다. 구약 성경의 노아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아실 겁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신화에도 인도의 고대문헌 마하바라타에도 거의 같은 구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로 바다로 가로막힌 교류 한번 없었던 문명들이 왜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살아 돌아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메르의 여신 이난나는 죽음의 세계로 스스로 내려갑니다. 그리스의 시인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를 찾아 저승으로 향합니다. 일본 신화에서는 이자나기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이자나미를 보러 황천으로 갑니다. 이 새 이야기는 시대도 장소도 언어도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그 구조가 이상할만큼 닮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일까요? 인간이라면 누구든 어느 시대에 살든 어느 땅에서 태어나든 공통적으로 품게 되는 질문들이 있고 그 질문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낳은 것일까요?

190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이 질문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독 이야기에 이끌렸던 그는 청소년 시절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 자주 드나들었고 특히 아메리카 원주민의 신하와 전설에 빠져들었습니다. 훗날 파리에서 유학하며 세계 각지의 신화를 본격적으로 비교하기 시작한 그는 결국 평생의 질문 하나를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왜 인류는 이야기를 만드는가?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왜 이토록 닮아 있는가?

그가 내놓은 책이 바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입니다. 조지 루카스는 훗날 이 책을 읽고 스타워즈를 구상했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인류가 수천년 동안 만들어 온 스천개의 신하와 이야기는 사실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 겉모습만 다를뿐 뼈대는 같다는 것. 그는 이것을 다니엘 신화 영어로 모노미스라고 불렀습니다.

평범한 주인공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앞에 낯선 무언가가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두려워서 망설입니다. 그러다 결국 발을 내딛습니다. 낯선 세계에서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들이 그를 기다립니다. 두렵자를 만나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지나서 그는 마침내 돌아옵니다. 떠날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서. 이것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루크 스카이워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프로도 백인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국 민담에 나오는 이름없는 막내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시대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배경도 완전히 다른데 뼈대는 이상할만큼 같습니다.

캠벨은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구조가 왜 생겨났는지 그것이 인간의 심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신화가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신화는 죽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신화는 살아 있습니다. 형태를 바꾸고 언어를 바꾸고 시대의 옷을 입고 여전히 우리의 곁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는 가슴이 뛰고 어떤 이야기에는 이상하게 공감이 되지 않는 그 차이 어딘가에 신화의 구조가 조용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년 전 동굴 속 불빛에서부터 캠벨의 오래된 책 한 권을 거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까지 인류는 왜 이야기를 만드는지 그 이야기들이 왜 서로 닮아 있는지 신화 속에 담긴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신화가 지금이 시대에 어떤 얼굴을 하고 우리 곁에 있는지를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 첫 번째 질문부터 시작합니다. 인류 최초의 이야기꾼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을까요?

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가지 사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만든 것은 우리 인류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만 년 전 지금의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샤니르 동굴에서 네안데르타린의 유골이 발견되었습니다.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유골 주변에 야생화 꽃가루가 잔뜩 남아 있었습니다. 누군가 죽은 자의 곁에 꽃을 놓았다는 뜻입니다.

네안데타리는 우리 인류와 다른 종이었습니다. 언어도 달랐을 것이고 사고 방식도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죽은 자를 그냥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무언가를 했습니다. 꽃을 꺾어 곁에 올려 놓는 그 행위는 단순한 본능이라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죽음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게 이야기의 씨앗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라진 것들에 대한 의문, 저 너머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증명할 수 없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감각.

다른 동물들을 생각해 보면이 점이 더 분명해집니다. 늑대나 코끼리처럼 죽음 앞에서 슬픔을 드러내는 동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동물도 죽은 자를 위해 꽃을 꺾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달랐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목격한 뒤에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저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는가?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정말로 아무 곳에도 없는 것인가?

이 이 질문이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답을 모른다는 사실을 견디기 위해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혼자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두려움은 조금씩 가벼워졌을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는 어느 문화권에나 있습니다. 지구 위 어느 민족이든 어느 시대든이 질문만큼은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어디서 왔는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오스트렐리아 원주민들은이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 태초의 조상들이 잠든 채로 세상을 걸어다녔다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산이 솟고 강이 흐르고 동물들이 태어났다고. 이것을 드림타임, 꿈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에게 드림타임은 과거에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이 땅에 새겨진 흔적으로 언제나 현재와 함께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신화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단순히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지금이 땅 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살아 있는 지도였습니다.

먼라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시베리아에도 아마존 깊숙한 곳에도 북극의 얼음 위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형태는 모두 달랐지만 질문은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화는 인류가 처음으로 쓴 과학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번개가 치는 이유를 몰랐을 때 사람들은 신이 화를 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식이 일어나 갑자기 낮이 어두워졌을 때 어느 문화권에서는 하늘의 짐승이 태양을 삼켰다고 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그냥 모른다고 손을 놓는 대신 이야기를 만들어 그 빈자리를 채웠습니다.

그 이야기가 공동체 안에서 공유될 때 사람들은 두려움을 조금씩 덜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답을 몰라도 같은 이야기를 함께 믿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밤이 조금은 덜 무서웠을 것입니다. 신화는 그렇게 공동체를 하나로 먹는 접착 역할도 했습니다. 같은 신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질문들을 처음으로 언어로 만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샤먼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입니다. 샤먼은 단순히 주술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에서 가장 먼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 병에 걸리면 샤머는 그 병의 원인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찾으러 갔습니다. 누군가 죽으면 샤머는 그 영혼을 안내했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경계에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샤먼이라는 존재가 시베리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프리카 남부의 산족은 바위의 그림을 그리며 신령한 존재와 접촉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메디슨맨도 몽골의 무당도 한국의 무속인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살면서 서로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왜 이토록 비슷한 역할을 하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일까요? 그것은 그 역할이 인간 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해 줄 누군가, 두려움을 이야기로 바꿔 줄 누군가가.

그리고 샤먼이 되는 과정 자체도 신화와 닮아 있었습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샤머는 혹독한 입문 의식을 치어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 홀로 광야에 머물거나 극한의 고통을 견디거나 깊은 무아지경을 경험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만이 비로소 이야기를 전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샤머는 돌아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이 만난 존재들을 그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그 이야기들이 모이고 쌓이면서 신화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경험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음 세대에 전해지고 또 그다음 세대에 전해지면서 이야기는 살이 붙고 뼈가 굵어지며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이 모든 과정이 문자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글자가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부족의 어른이 모닥불 앞에 모인 아이들에게, 수천년 동안 이야기는 오직 사람의 기억과 목소리에만 의존해서 살아남았습니다.

전해지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조금씩 바뀌기도 했습니다. 어떤 부분은 더 극적으로 과장되고 어떤 부분은 잊혀졌습니다. 그 시대, 그 공동체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이야기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손에 남아 있는 신화들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수천 년의 시간을 버텨낸 것들입니다.

신화는 단순히 오래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가장 진지하게 붙들어온 질문들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수십년의 시간을 받쳐 그 흔적들을 하나의 거대한 이론으로 꿰어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도서관 서가 사이에서 책을 쌓아 놓고 혼자 앉아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평생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조셉 캠벨.

이 이름을 처음 듣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그가 남긴 것들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모를 뿐입니다. 1904년 뉴욕.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은 일곱살 무렵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자연사 박물관에 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마 그날을 특별하게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은 달랐습니다. 그날 전시실에서 마주친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템 기둥과 가면들 그들의 신화를 설명해 놓은 작은 팬말들이 소년의 가슴 어딘가에 꽂혔습니다.

소년은 그날 이후 혼자서도 박물관에 찾아갔습니다. 전시물을 외울만큼 들여다보다가 사서에게 관련 책을 달라고 했습니다. 사서가 어린 소년에게 건네 줄 수 있는 책들을 다 읽으면 더 어려운 책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캠벨은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원주민의 신화 속 이야기들이 어릴 때 가톨릭 학교에서 배운 성경 이야기와 구조가 닮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비슷한가? 그 이문이 소년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조셉 캠벨이었습니다. 그 집착은 평생 꺼지지 않았습니다.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중세 문학을 전공한 캠벨은 졸업후 파리와 미넨으로 건너갔습니다. 1920년대 말을 파리는 온갖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모여들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캠벨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처음 읽었습니다. 당시 조이스의 윤리시스는 이미 전 세계 문학계를 뒤흔들고 있던 작품이었습니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왜 그리스 신화 속 영웅 오디세우스의 구조와 포개어지는가? 캠벨은이 질문 앞에서 한참 동안 멈춰섰습니다. 조이스는 의도적으로 그 구조를 빌려왔습니다. 그 말은 신화의 뼈대가 수천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야기를 세우는데 쓸모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캠벨에게 그것은 단순한 문학적 기교가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훨씬 더 깊은 것이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유럽에 머무는 동안 캠벨은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 기론도 접했습니다. 특히 칼 융이 주장한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그가 어릴 때부터 품어온 의문에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신화가 왜 비슷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인간의 심층 심리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습니다.

파리에서 돌아온 캠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공황이었습니다. 1929년 미국 경제가 무너지면서 대학들도 함께 흔들렸습니다. 교수 자리를 구하려던 캠벨의 계획은 완전히 막혀 버렸습니다. 서른도 채 되지 않은 그는 일자리도 뚜렷한 계획도 없이 뉴욕 외곽의 작은 마을 우드스톡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의 5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책을 읽었습니다. 낮에는 읽고 밤에는 생각했습니다. 세계 각지의 신화, 철학, 심리학, 종교학. 프로이트를 읽고 융을 읽고 인도의 우파니샤들을 읽고 아서왕전서를 읽었습니다. 밖에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5년이 없었다면 이후 캠벨이 내놓은 모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훗날 캠벨은이 시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그에게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1934년 캠벨은 세라 로렌스 칼리지에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38년을 그 학교에서 보냈습니다. 교수로서의 캠벨은 독특했습니다. 그는 신화를 단순히 옛 이야기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힌두교 이야기로 넘어갔고 거기서 다시 아프리카의 의식으로 건너뛰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의가 끝날 지음이면 대부분 무언가 연결된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캠벨의 강의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연결선을 따라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제자들은 캠벨의 강의실에서 느꼈던 그 감각을 잊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든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그 전율 같은 느낌을.

그리고 1949년 마침내 책이 나왔습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출간 당시 반응은 조용했습니다. 학계 일부에서 주목했지만 대중에게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캠벨은 개이치 않았습니다. 그는 원래부터 유명해지기 위해 그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책은 조용히 퍼져 나갔습니다. 손에서 손으로 책장에서 책장으로. 그리고 어느 날 26의 젊은 영화학도 한 명이 그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조지 루카스였습니다. 훗날 루카스는 스타워즈의 시나리오를 구상하면서 캠벨의 영웅 구조를 의식적으로 따라갔다고 밝혔습니다. 사막 행성 타투인의 평범한 청년이 낯선 세계로 떠나 시련을 겪고 돌아오는 이야기. 그 뼈대는 캠베리 수천개의 신화에서 발견한 바로 그 구조였습니다. 스타워즈가 전 세계에서 수십억 명의 가슴을 두드린 데는 수천년 된 그 패턴이 조용히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루카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소설가 리처드 에덤스,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작가 어슐러를 긴 등 수많은 창작자들이 캠벨의 책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신화학자의 조용한 책 한 권이 이후 수십년간 세계의 이야기 방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캠벨의 이름이 진정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생애 만련이었습니다. 1985년 언론인 빌 모이어스가 캠벨을 찾아와 카메라를 켰습니다. 두 사람의 긴 대화는 다듬어져 PBS 다큐멘터리 시리즈 신화의 힘으로 방영되었습니다. 캠벨이 세상을 떠난 1987년 이후인 1988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닿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 방송에서 캠벨은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인용되는 말입니다. 자신의 기쁨을 따르라. 단순해 보이는 말이지만 캠벨이 평생 신화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모든 영웅의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여정은 항상 두려움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 캠벨은 그 말을 강단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5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향해 끝내 걸어간 삶으로 증명한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캠벨이 수천개의 신화에서 발견한 그 뼈대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영웅은 어떤 길을 걷고 그 길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캠벨은 수천 개의 신화를 분석한 끝에 하나의 답에 도달했습니다. 영웅의 여정은 언제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는 것. 출발하고 시련을 겪고 돌아오는 것. 그는 이것을 단일 신화 즉 모노미스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웅 이야기는 사실이 하나의 구조 위에서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처음 들으면 너무 단순하게 느껴집니다. 고작 세 단계라고요. 그런데이 구조를 실제 신하들 위에 올려 놓는 순간 무언가 탕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마치 서로 다르게 생긴 열쇠들이 사실은 같은 자물쇠를 열도록 만들어진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캠벨이 분석한 신화는 그리스, 이집트, 인도, 중국, 아메리카 원주민, 북유럽, 아프리카까지 막했습니다. 그 방대한 범위에도 불구하고이 세 단계의 구조는 어디서나 나타났습니다. 문화도 언어도 시대도 달랐지만 영웅이 걷는 길의 모양만큼은 놀랍도록 같았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출발입니다. 이야기는 항상 일상에서 시작됩니다. 영웅은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특별할 것도 없고 거창한 운명 같은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캠벨은이 일상의 세계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영웅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무엇을 지키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무대라고 했습니다. 일상이 구체적일수록 영웅이 그것을 떠나는 순간에 무게도 커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언가 찾아옵니다. 낯선 사람일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사건일 수도 있고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부름일 수도 있습니다. 캠벨은 이것을 모험의 소명이라고 불렀습니다. 한국 신화의 바리대기 공주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입니다. 산에 버려진 간난 아기를 산신령이 거두어 키웠고 소년은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소식이 들려옵니다. 자신을 버린 부모가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것. 그 병을 고칠 약이 있는데 그 약이이 세상이 아닌 저승에 있다는 것. 신하들이 다 거절한 그 길을 바리기는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위해 저승으로 가겠다고.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캠벨이 발견한 패턴에서 영웅은 처음에 거의 항상 망설입니다. 발리되기도 처음부터 선뜻 나선 것이 아닙니다. 모세도 처음에 신의 부름 앞에서 자신은 말도 잘 못한다며 물러섰습니다. 영웅이 처음부터 용감하고 의연한 경우는 오히려 드뭅니다. 두려움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결단입니다. 그 망설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웅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웅이 망설이는 그 순간 어디선가 안내자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리데기에게 길을 일러준 신령처럼 아테나가 오디세우스 곁에 머물렀던 것처럼 캠벨은이 존재를 현명한 안내자라고 불렀습니다. 영웅을 대신해서 싸워 주는 존재가 아니라 영웅이 스스로 발걸음을 내디둘 수 있도록 등을 밀어 주는 존재입니다.

출발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경계선이 있습니다. 일상 세계와 낯선 세계를 가르는 그 선. 그 선을 넘는 순간 이야기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발리데기가 저승으로 향하는 길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그 경계선을 넘는 장면을 신화는 항상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시련입니다. 낯선 세계에 들어선 영웅에게 시련이 기다립니다. 그런데 캠벨이 주목한 것은 시련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시련의 구조였습니다. 시련은 항상 영웅이 가장 약한 곳을 건드립니다. 두려워하는 것, 회피해 온 것, 스스로도 마주치기 싫었던 것 그 앞에 서게 만듭니다. 시련의 길에서 영웅은 혼자이기도 하지만 뜻밖에 동료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 동료가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영웅을 흔드는 존재인지는 이야기가 흘러가야 알 수 있습니다.

캠벨은이 과정에서 영웅이 가장 중요하게 맞닥뜨리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바리데가 저승에서 만난 것은 단순히 위험한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 어딘가에서 그녀는 무장승이라는 존재를 만납니다. 그는 바리데기에게 약을내어 주는 대신 수년간의 고된 노동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바리데기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시련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자신이 버려졌다는 상처를 버린 자를 위해 헌신하는 역설를 통과하는 과정입니다.

인도에서 태어난 시다르타 왕자의 이야기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던 왕자가 어느날 성 밖으로 나가 늙음과 병과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 순간이 그에게는 모험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왕궁을 떠났고 오랜 방랑과 수행 끝에 보리수 아래 앉았습니다. 그가 거기서 맞닥뜨린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욕망과 두려움이었습니다. 밤새 그것들과 마주했고 새벽에 왔을 때 그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붙다라고 부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캠벨은 이것을 가장 어두운 곳, 즉 동굴의 가장 깊은 지점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웅은 반드시 그 어두운 지점을 통과해야 합니다. 거기서 무언가를 얻거나 무언가를 잃거나 무언가와 화해합니다. 그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이 영웅을 변화시킵니다. 떠나기 전에 그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순간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지점을 통과하지 않으면 영웅은 돌아올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귀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캠벨이 가장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귀환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흥미롭게도 어떤 영웅들은 처음에 돌아오기를 거부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처럼 그 세계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혼자서 얻은 것이 너무 크고 깊어서 그것을 어떻게 일상의 언어로 전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의 여정은 돌아옴으로써 완성됩니다. 영웅이 돌아올 때는 자신이 가져온 무언가를 세상과 나눕니다. 그것이 실제 물건일 수도 있고 지혜일 수도 있고 새로운 시각일 수도 있습니다. 혼자서 어둠을 통과한 경험이 공동체 전체를 위한 무언가로 바뀌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바리데기는 약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부모를 살렸습니다. 그리고 신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리데기는 이후 죽은 자의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이 됩니다. 한번 죽음의 세계를 통과한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돌아온 바리데기는 떠나기 전에 바리대기가 아니었습니다. 시따르타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 그는 혼자 머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처음 만난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 나눔이 결국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영웅의 귀한이 완성되는 것은 돌아오는 순간이 아니라 가져온 것을 세상에내어 놓는 순간입니다.

이 세 단계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일상에서 출발하고 낯선 세계에서 시련을 겪고 변화한 채로 돌아와 나눈다. 캠벨은이 구조가 단순히 이야기의 공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방식 자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삶을 돌이켜 보아도 그 사람이 가장 크게 달라진 시점에는 반드시 무언가 낯선 세계로 들어갔다 나온 경험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실이었거나 생전 처음 맞닥뜨린 실패였거나 스스로 선택한 긴 여정이었거나 형태는 달라도 그 경험이 사람을 바꾸었습니다. 신화는 그 변화를 이야기의 언어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공통적인 구조를 가지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변화하는 방식이 어느 시대에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이 구조만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신화 속에는 구조뿐 아니라 이상할만큼 반복되는 상징들이 있습니다. 세계 각지의 신화가 놀랍도록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상징들은 어디서 온 것이고 왜 인류는 같은 상징을 꿈꾸었을까요?

잠깐 상상해 보겠습니다. 여기 지도가 하나 있습니다. 세계 각지의 신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들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핀란드, 인도, 마무명, 북유럽, 중국, 아프리카, 서북 서로 교류한 흔적이 없는 문명들입니다. 그런데지도 위에 핀을 꽂다 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같은 상징이 지구 전체에 흩어져 있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고 너무 정확합니다. 그 상징들 중 몇 가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세계를 떠바치는 나무입니다. 북유럽 신화에는 이그드라실이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있는 거대한 물풀의 나무로 그 뿌리는 세계의 세계를 지탱하고 가지는 하늘까지 닿아 있습니다. 신들은 그 나무 아래에서 회의를 열었고 죽은 자의 세계도 그 뿌리 아래에 있었습니다. 우주 전체가 그 나무 하나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지구 반대편 마야 문명에는 세이바 나무가 있었습니다. 마야 사람들에게 세이바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를 연결하는 축이었습니다. 테이바 나무의 뿌리는 죽은 자의 세계로 내려가고 줄기는 인간이 사는 세상을 지나고 가지는 신들이 사는 하늘로 뻗어 있었습니다. 이그드라실과 구조가 거의 같습니다. 인도의 고대 문헌에도 우주의 중심을 가르는 신성한 나무가 등장합니다. 시베리아의 샤먼들은 의식을 치를 때 반드시 나무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 기둥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통로라고 믿었습니다. 한국의 무속 신화에서도 신단수라는 신성한 나무가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나무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았을까요? 나무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인간이 사는 지면을 통과하며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습니다. 아래와 위를 동시에 향하는 존재. 인류가 세계를 수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그 수직의 중심에 나무를 놓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는 뱀입니다. 뱀만큼 세계 각지의 신화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상징도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뱀이 어떤 문화권에서는 악의 상징이고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지혜와 생명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동물이 정반대의 의미를 가집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뱀은 왕권과 보호의 상징이었습니다. 파라오의 왕관 앞에는 항상 코브라가 달려 있었습니다. 코브라는 파라오를 지키는 존재였습니다. 반면 구약 성경에서 뱀은 인간을 타락으로이 존재로 등장합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인간에게 금지된 열매를 먹도록 유혹합니다. 같은 뱀인데 한쪽에서는 수호자이고 한쪽에서는 유혹자입니다.

그런데 전 세계 신화를 넓게 보면 뱀에는 한 가지 공통된 의미가 있습니다. 변화입니다. 뱀은 허물을 벗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다가 새로운 피부로 되살아납니다. 인류는 그 모습에서 죽음과 재생, 끝과 시작을 동시에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화권에서 뱀은 두려워하면서도 경외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의술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은 뱀이 감긴 지팡이였습니다. 병든 몸이 치유되어 새로운 몸으로 되살아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상징은 지금도 세계 곳곳의 병원과 의료 기간의 로고로 남아 있습니다. 수천년 전의 상징이 지금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자기 꼬리를 무는 뱀의 이미지도 있습니다. 우로보로스라고 불리는이 상징은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 나타났지만 놀랍게도 북유럽 신화에도 인도 철학에도 아즈택 신화에도 거의 같은 형태로 등장합니다. 끝이 곧 시작이고 시작이 곧 끝이라는 순환의 개념. 인류는 뱀이 자기 자신을 삼키는 그 이미지에서 세상이 돌고 도는 원리를 보았습니다.

세 번째는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전 세계 신화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널리 퍼진 신의 형태를 꼽으라면 많은 학자들이 대지무신을 꼽습니다. 땅을 어머니로 보는 상상력은 인류 문명의 거의 모든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가이아가 있습니다. 세상이 생겨나기 전부터 존재하던 돼지 그 자체인입니다. 인도에는 어머니 여신의 이미지가 수천년 전부터 숭배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인도 곳곳에서 대지와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상이 발견됩니다. 메소포타미아에는 닌후르 사그라는 생명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신화에도 돼지를 어머니로 부르는 표현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이 이 상징이 있범위하게 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씨앗을 심으면 싹이트는 땅, 생명을 낳고 기르는 땅, 죽은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돌려보내는 땅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 근원에 어머니의 얼굴을 붙인 것입니다.

이 상징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들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계수는 세상의 구조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사는이 세계는 어떻게 생겼는가? 뱀은 변화와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끝나고 그리고 다시 시작된다는 것. 데지모시는 탄생과 귀한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돌아가는가? 인류가 어느 땅에 살든 어느 시대에 태어나든이 질문들을 피해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답하면서 같은 상징에 도달했습니다.

이 상징들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에 가깝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이미 새겨진 무언가를 각자의 언어와 이미지로 꺼내 놓은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것은 무엇일까요? 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이 상징들이 새겨져 있는 것일까요?

이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달려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캠벨의 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었습니다. 융은 스위스에서 태어난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지금은트 프로이트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프로이트는 당시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세상에 내놓으며 심리하게 판도를 뒤은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 즉 무의식에 의해 움직인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융은 그 개념에 강하게 이끌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용은 프로이트와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결국 결했습니다. 그 결별은 융에게 깊은 내면의 혼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1913년 융은 자신이 뭔가 거대한 것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낮에는 진료를 했지만 밤이면 감당하기 어려운 꿈과 환상들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노트를 펼치고 꿈속에서 본 것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적었습니다. 그 작업을 수년간 이어갔습니다. 훗날 레드북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는 그 기록물은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간 여정의 흔적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융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이 꿈속에서 본 이미지들이 자신이 읽은 적 없는 신화 속 이미지들과 닮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가 꾼 꿈이 수천 년 전 이집트 신화나 인도의 고대 문헌 속 이미지와 겹쳤습니다. 그것이 융을 멈추게 했습니다.

융이 내놓은 개념이 바로 집단 무의식입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개인의 억압된 기억과 욕구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융히 말한 집단 무의식은 그보다 훨씬 깊은 층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류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심층 심리의 저장소. 수백만 년에 걸쳐 인간이 경험해 온 것들이 쌓여 만들어진 개인을 넘어서는 심리의 기층이었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개인의 의식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입니다. 각 섬은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고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섬들의 뿌리는 모두 같은 해저 집안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집단 무의식은 그 해저 집안입니다. 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든 그 깊은 층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융은 그 집단 무의 시간에 특정한 패턴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그는 원형이라고 불렀습니다. 원형이란 쉽게 말하면 인간의 심리 안에 이미 새겨진 틀 같은 것입니다. 특정한 상황이 되면 자동으로 활성화되는 심리적 패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어떤 존재가 현명한 노인처럼 느껴질 때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현명한지 검증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융은 이것이 현명한 노인이라는 원형이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수십만 년 동안 인류는 경험 많은 어른에게 의존해야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경험이 심리 안에 패턴으로 새겨진 것입니다. 신화 속 현명한 안내자들을 떠올려 보면이 원형이 얼마나 일관되게 나타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문화도 시대도 다르지만 영웅 곁에는 항상 현명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가 전 세계 신화에서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융히 발견한 주요 원형 중에 그림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림자는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입니다. 누구든 내면에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억누를수록 그림자는 더 깊이 내려가 무의식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옵니다. 1886년에 발표된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이 원형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입니다. 낮에는 존경받는 의사로 살아가는 지킬 박사가 약을 통해 자신 안에 어두운 면을 하이드라는 별개의 존재로 분리해 냅니다. 처음에 지킬은 그 분리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이드는 점점 강해졌고 결국 지키를 집어삼켰습니다. 융히 말한 그림자의 역학이 그대로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억눌릴수록 커진다는 것. 신화 속에서 그림자는 종종 괴물이나 악당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영웅이 물리쳐야 하는 그 존재는 어쩌면 영웅 자신 안에 그림자를 외부로 투영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영웅이 괴물을 쓰러뜨리는 장면이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과의 대결로 읽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융이 발견한 또 다른 중요한 원형은 트릭스터입니다. 속임수를 쓰고 규칙을 어기고 예상을 뒤엎는 존재. 북유럽 신하의 로키가 대표적입니다. 로키는 신들의 편에 서기도 하고 신들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입니다. 아프리카 신화에는 검이 아난시가 있습니다. 힘은 없지만 꾀로 강자들을 이깁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신화에는 코요테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것 같으면서 결국 이야기를 뒤집어 버리는 존재입니다.

이 트릭스터라는 원형이 전 세계에서 반복되는 이유를 융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심리 안에는 고정된 질서를 흔들고 싶은 충동이 있다고 그것이 때로는 창의성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반항으로 나타납니다. 트릭스터는 그 충동의 얼굴입니다.

캠벨은 융의이 개념들을 신화하게 끌어들였습니다. 세계 각지의 신화가 같은 구조를 가지는 이유가 무역이나 문화 교류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든 공유하는 심층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 완성되었습니다. 신화는 외부에서 발명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그 신화가 지금이 시대에도 살아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번개가 신의 분노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홍수의 원인도 압니다. 우주의 탄생도 과학이 설명합니다. 신화가 설명하던 자리를 과학이 채워버린 지금 신화는 어디에 있을까요?

1882년 철학자 프리드리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신화의 사망 선고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이성과 과학의 시대가 열렸으니 더 이상 신과 영웅과 용의 이야기는 필요 없다고. 그런데 그 선언 이후 140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역사상 가장 많은 신화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신화를 담는 그릇이 동굴 벽에서 스크린으로 바뀌었을뿐 담긴 것은 여전히 같습니다.

1999년 한 영화가 전 세계 극장을 뒤덮었습니다. 매트릭스였습니다. 평범한 회사원 토마스 앤더스는 낮에는 사무실에서 코드를 짜고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의 해커로 살아갑니다. 어느 날 그의 앞에 두 아래 약이 놓입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지금까지의 삶으로 돌아가고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보게 됩니다.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합니다. 그 순간이 경계선이었습니다. 일상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넘어가는 그 선. 진실의 세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계들이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모피어스라는 안내자가 그를 이끌고 트리니티라는 동료가 곁에 있고 배신자가 나타나고 네오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시련들 앞에 섭니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지점에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합니다. 돌아온 네오는 떠나기 전과 다른 존재입니다.

이 이 이야기의 구조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워셔스키 감독들이 캠벨의 영웅 구조를 의식하며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구조만이 아닙니다. 네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새로운 뜻이고 동시에 선택받은 자를 의미하는 더 원의 철자를 바꾼 것이기도 합니다. 모피어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꿈의 신의 이름입니다. 영화 곳곳에 신화의 언어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이름들이 단순한 장명이 아니라는 것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우리 안에서 무언가가 반응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화의 언어가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매트릭스는 SF 영화지만 그 뼈대는 수천년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매트릭스를 처음 본 사람들이 낯설다고 느끼면서도 어딘가 깊이 공명하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같은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영국의 한 작가가 쓴 소설이었습니다. 해리 포터였습니다. 부모를 잃고 이모집 계단 아래 창고에서 자라는 소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가던 그 소년에게 어느 날 편지가 날아옵니다. 수백통의 편지가 그것이 소명이었습니다. 해리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되고이 세상과는 다른 세계인 호그와트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악의 존재 볼드모트와 맞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웅의 출발, 낯선 세계, 안내자 덤블도어, 동료들, 배신, 죽음과 부활, 귀한, 캠벨이 정리한 그 구조가 영국의 어느 작은 카페에서 혼자 글을 쓰던 작가의 손끝에서 다시 한번 완성되었습니다. 조엔 롤링이 캠베를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구조는 의식하지 않아도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 때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전 세계에서 5억 이상 팔렸습니다. 5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나라의 아이들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왜이 이야기가 그토록 많은 사람의 마음에 닿았을까요? 단순히 잘 쓰여진 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부모를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자하다가 어느 날 진짜 자신을 발견하는 이야기.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의 사람에게도 깊이 울리는 이야기입니다. 신화 속에서 수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바로 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신화가 살아 있는 곳은 극장과 서전만이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 우리가 신고 있는 운동화 브랜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이키. 이 이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승리를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입니다. 날개 달린 여신 니켈는 전쟁터에서 승자에게 나타나 왕관을 씌워 주는 존재였습니다. 스포츠 용품 회사가 그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이 신발을 신으면 당신도 승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신화의 언어로 담은 것입니다.

1969년 인류 최초로 달래 착륙한 우주선의 이름은 아폴로 11호였습니다.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과 빛, 이성과 예술의 신입니다. 미국 항공 우주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담한 탐험에 신화 속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이름 짓기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신화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나이키와 아폴로뿐만이 아닙니다. 아마존이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여전사 부족에서 왔습니다. 마라톤이라는 경기 이름은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전보를 전하러 달려온 전령의 이야기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 안에도 신화가 살아 있습니다.

현대의 스포츠도 신화를 만듭니다. 월드컵이 열리는 해마다 우리는 새로운 영웅 서사를 기다립니다. 무명의 선수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팀을 구하는 이야기. 부상을 딛고 돌아온 선수가 다시 경기장에서는 이야기. 수십년간 우승을 못 하던 팀이 마침내 트로피를 드는 이야기. 이것들은 단순한 스포츠 결과가 아닙니다. 출발하고 시련을 겪고 돌아오는 그 구조가 경기장 위에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수학명이 경기를 보면서 함께 숨을 죽이고 함께 환호하는 것은 단순히 어느 팀이 이기는지가 궁금해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영웅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응원하는 선수는 그 순간 신화 속 영웅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영웅의 여정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수만 명이 한 경기장에 모여 같은 이야기를 함께 경험하는 그 장면은 수천 년 전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같은 신화를 듣던 사람들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마다 건국 신화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느 나라든 자신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안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고 결단이 있고 희생이 있습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그 이야기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힘을 가집니다. 같은 신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류는 과학의 시대에도 신화를 만들고 소비하는 것일까요? 캠벨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신화는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신화는 인간이 세상 안에서 자기 자신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번개가 왜 치는지를 알게 된다고 해서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일문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 앞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이 질문들은 과학이 채워줄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신화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지금도 형태를 바꾸고 언어를 바꾸고 시대에 옷을 입고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질문들은 3년 전 동굴 안에서 불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품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화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화는 단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류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어 온 그 이후에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잠깐 지금이 질문을 잠시 내려놓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꺾인 적이 있으십니까?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찾아와서 그 이전의 삶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 순간이. 그때 당신은 어쩌면 경계선을 넘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일상의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향하는 그 선을.

우리는 신화를 오래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제우스의 번개, 영웅들의 전쟁, 죽음의 세계로 내려간 신들의 이야기, 저 멀리 있는 것들이라고 나와는 관계 없는 것들이라고. 그런데 캠벨은 마지막까지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신화는 바깥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신화는 인간 안에 있는 이야기라고 수천년 동안 인류가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만들어 온 것은 그 이야기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미 신화 속에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어느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름은 없습니다. 이름이 없어도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익숙한 자리에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고 편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자리가 흔들렸습니다.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갑자기 아무 예고 없이 그 사람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소명인지 재앙인지 아니면 그냥 부른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움직였습니다. 익숙한 것들을 뒤에 남겨 두고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 길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만났고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상처를 받았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쳤습니다. 그 사람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외부에서 가해진 시련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 무언가가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그 사람은 떠나기 전에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신화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분들 중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쩌면 지금이 순간 그 한가운데에 있는 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캠벨이 평생 신화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것입니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왔는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항상 바로 나였다는 것. 영웅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화 속 영웅들을 다시 떠올려 보면 그들은 처음에 모두 평범했습니다. 버려진 아이였고 양치기였고 목수의 아들이었고 왕궁에서 도망친 왕자였습니다. 그들이 영웅이 된 것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경계선을 넘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웠지만 결국 발을 내디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수천년 동안 반복되어 전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년 전 프랑스 남부 어딘가의 동굴 불이 타고 있습니다. 그 불빛 앞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글자도 없고 도시도 없고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무서웠던 것을, 죽은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를, 저 하늘에 있는 별들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대답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모여 함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이 순간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도 어딘가에 있습니다. 방 아닐 수도 있고 길을 걷는 중일 수도 있고 잠들기 전 침대 위일 수도 있습니다. 년이 지났습니다. 불은 화면이 되었고 동굴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 순간 당신은 이야기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3만 년의 거리가 지금이 순간 사라집니다.

신화가 오늘도 살아 있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인간이 여전히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무언가를 잃고 여전히 어딘가로 떠나고 여전히 돌아오고 여전히 죽음 앞에서 무언가를 묻습니다. 그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야기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캠벨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경험이라고. 그리고 신화는 바로 그 경험을 가장 깊이,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전달해 온 것이라고.

동굴벽에 손바닥을 대고 흔적을 남긴 사람이 있었습니다. 년 전에 그 손바닥은 지금도 거기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손바닥 앞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나 여기 있었다고. 수만 년 전 누군가가 바위 위에 남긴 그 말이 지금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당신에게도 닿기를 바랍니다. 인류가 4만 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어 온 것은 결국 그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 여기 있었다고. 그리고 당신도 여기 있다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