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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당신은 지금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쇠창살도 없고 자물쇠도 없고 간수도 없는데 왜 이토록 숨이 막히는 것일까요?
[음악] 누군가의 한마디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음악]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어젯밤에 그 말이 다시 살아납니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고 그렇게 하루가 점읍니다. 밤이 되어도 마음은 쉬지 못합니다. 눈을 감으면 오늘 있었던 일들이 다시 재생됩니다. 내가 했던 말, 내가 보였던 표정,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봤을지 그 생각의 감옥 안에서 우리는 밤새 서성입니다.
그런데 한번 조용히 물어봐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갇힌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가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질문에 아주 조용히 그러나 아주 깊게 답하셨습니다. 나라는 것이 처음부터 [음악] 없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삶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관계가 힘들고 일이 힘들고 미래가 불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힘듦의 중심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거의 모든 고통의 뿌리에는 하나의 공통된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음악] 내가 무시당했다. 내가 인정받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내 삶이 이래서는 안 된다. 보통은 언제나 이날을 중심으로 회전합니다. 마치 거대한 태풍의 눈처럼.
[음악] 나라는 중심이 있고 그 주변으로 감정과 생각과 판단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칩니다. 우리는 [음악] 평생이 소용돌이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나는 원래 있는 것이고 [음악] 나를 지키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음악] 지점에서 전혀 다른 방향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날을 한번 찾아보라.고.
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무아의 [음악] 가르침을 설하신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 부처님께서는 [음악]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몸은 내가 아니다. 만약 몸이 나라면 몸은 병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몸은 병들고 늙고 결국 사라진다. 그러므로 몸은 내가 아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느낌도 내가 아니고 [음악] 인식도 내가 아니고 의지도 내가 아니고 의식도 내가 아니라고.
이것이 바로 오음무아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다섯 가지 요소의 집합입니다. 몸이라는 물질, [음악] 느낌, 인식, 의지적 반응 그리고 의식. 이 이 다섯 가지가 잠시 모여서 [음악] 나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파도가 잠시 높이 솟아 올랐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듯이. 파도는 바다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파도는 잠시 그런 모양을 띄고 있는 바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것은 잠시 그런 모양을 띄고 있는 무언가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음악] 왜 이 날을 그토록 실제라고 느끼는 것일까요? 왜 나를 지키기 위해 이토록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일까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아집이라고 부릅니다. 없는 나를 있다고 착각하고 그 착각을 지키려는 집착입니다.
이 [음악] 아집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깊이 새겨진 습관입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 중 하나가 나입니다. 내 것. [음악] 내가 할 거야. 나는 싫어. 이렇게 나는 삶의 가장 초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음악] 점점 더 두꺼워집니다. 내 이름, 내 직업, 내 재산, 내 가족, 내 명예. 이 이 모든 것들이 층층이 쌓이면서 나라는 건물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 건물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를 때, 내 직업이 위태로울 때, 내 가족이 아플 때, 내 명예가 떨어질 때. 그 두려움은 사실 건물 자체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집착합니다. [음악]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음악] 더 높이 올라가려 하고 더 오래 기억되려 합니다. 이것이 감옥입니다. 쇠창살이 없어도 이보다 더 단단한 감옥은 없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 수행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수행을 시작한 지 꽤 되었는데 여전히 마음이 괴롭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쁘고 나쁜 일이 생기면 무너집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승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습니다. 기쁜 것이 누구입니까? 무너지는 것이 누구입니까? 제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저입니다, 스승님.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저가 어디 있습니까? 제자는 가슴을 가리켰습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곳에 손을 대 보십시오.
[음악] 무엇이 느껴집니까? 제자가 답했습니다.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집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것이 나입니까? 제자가 망설였습니다. 그렇다면 피부가 나입니까? 피가 나입니까? 뼈가 [음악] 나입니까?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생각이 나입니까? 5년 전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은 같습니까? 제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스승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려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나는 찾으려 할수록 없습니다. 그런데 없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무아의 역설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있는 바 모든 형상은 [음악]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음악] 아님을 보면 곧 열래를 보리라. 이 이 말씀은 단순히 형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음악] 형상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꽃은 분명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피었다 지고 졌다가 다시 피어납니다. [음악] 그 변화 속에 있는 꽃이 진짜 꽃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릅니다. 10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는 더욱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제의 나 10년 전에 나와 동일한 나가 지금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이 집착을 만들고 집착이 고통을 만듭니다.
강물은 항상 흐릅니다. 똑같은 [음악]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순간 새로운 물이 흐르고 있는데 우리는 어딘가에 고여 있으려 합니다. 그 고임이 감옥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특히 이 감옥 [음악] 안에 깊이 갇혀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는 [음악] 나를 끊임없이 전시하도록 요구합니다.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를 갔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응을 기다립니다. 좋아요가 많으면 기쁘고 적으면 불안합니다. 댓글이 칭찬이면 하루가 좋고 비판이면 하루가 무너집니다. 이것이 바로 나라는 감옥이 현대적으로 강화된 모습입니다. 플랫폼은 바뀌었지만 구조는 같습니다. 나를 인정받으려는 욕망, 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부처님 시대에도 이 구조는 똑같았습니다. 당시에는 소셜 미디어 대신 카스트 제도가 있었고 부족과 종족이 있었고 신분과 계급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나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그 모든 싸움의 뿌리가 [음악] 무엇인지를 보셨습니다. 나라는 착각. 그 착각을 해체하는 것이 해탈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아를 이해한다고 해서 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는 사람이 있고 길을 걷는 사람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대로입니다. 단지 그 나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 속이 슬퍼하면 우리도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것이 스크린 위에 빛과 [음악] 그림자였다는 것을 압니다. 감동은 진짜였습니다. 눈물도 진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영원히 [음악]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3도 이와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은 완전히 진짜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완전히 진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정된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더 자유롭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집착 없이 느끼는 것. 이것이 무아의 지혜가 열어주는 첫 번째 문입니다.
감옥은 항상 나를 중심으로 세워집니다. 나는 이래야 한다. 나는 절에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을 가져야 한다. [음악] 나는 저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이 이 모든 문장의 주어가 나입니다. 그리고 그 주어가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감옥 안에서 더욱 좁아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잠깐 그 주어를 내려놓아 보면 어떨까요? 나가 흔들린다는 것을 아는 그 의식은 흔들리고 있습니까? 화가 났다는 것을 아는 그 알아차림은 화가 나 있습니까? 슬프다는 것을 관찰하는 그 마음은 슬픕니까? 이 이 질문이 바로 무아를 향한 첫 번째 문입니다. 감옥의 문은 사실 처음부터 잠겨 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스스로 문을 붙들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손을 조용히 풀어 주는 일입니다. 억지로 뜯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손에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는 것입니다.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힘이 빠집니다.
[음악] 그것이 바로 통찰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단단히 이 감옥을 붙들고 있는지는 누군가 내 나를 건드릴 때 가장 [음악] 잘 드러납니다. 내 의견이 틀렸다는 말을들을 때, 내가 예상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나를 떠날 때, 그 순간 우리 안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그 반응의 [음악] 강도가 바로 아집의 두께입니다. 반응이 강할수록 감옥의 벽은 두꺼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반응은 사실 매우 소중한 정보입니다. [음악] 지금 여기에 집착이 있구나. 지금 여기에 나를 지키려는 힘이 작동하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 순간 이미 [음악] 감옥에서 한 발짝 나온 것입니다. 수행은 감옥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이 감옥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앎이 자유의 시작입니다.
오늘 하루 자신의 마음을 한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순간에 마음이 수축됩니까? 어떤 말에 방어적이 됩니까? 어떤 상황에서 두려움이 올라옵니까? 그것들을 판단하지 말고 그저 바라보십시오. 아, 지금 나를 지키려는 반응이 일어나고 있구나. 이렇게 하나씩 알아차릴 때 우리는 조금씩 그 감옥의 실체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실체를 보는 것, 그것이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평생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멀리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안을 들여다보는 것.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매우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나는 [음악]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랜 친구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음악] 친구가 말했습니다. 너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말이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내가 달라졌다고.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나는 여전히 나인데 그런데 잠이 들기 직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럼 변하지 않은 어디 있지? 그 질문은 [음악] 밤새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수행이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이 질문은 철학의 질문이기도 하지만 불교에서는 수행의 질문입니다. 머리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직접 탐구하는 질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집짓는 자를 찾아 헤맸다. 수많은 생을 거듭하면서도 그를 찾지 못해 괴로웠다. 그러나 이제 집 짓는 자여 나는 너를 보았다. 너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 너의 석가래는 부러졌고 너의 데들보는 무너졌다. 마음은 형성되지 않음에 이르렀고 가래는 소멸되었다. 여기서 집 짓는 자는 바로 아집입니다. 생마다 나라는 집을 짓고 그 집 안에서 살다가 집이 무너지면 다시 새 집을 짓는 것. 그것이 윤회의 구조입니다. 그리고 [음악] 그 집 짓는 자를 발견하는 순간 더 이상 집은 지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탈입니다.
그런데 이 해탈은 멀리 [음악]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나를 만들어 가는 그 작용을 보는 것. 그것이 무아의 통찰입니다. 무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어떻게 나를 만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무언가가 보입니다. 그 순간 의식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곧바로 인식이 붙습니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이것은 나쁜 것이다. 이것은 나와 관련 있다. 이것은 나와 [음악] 상관없다. 이 인식의 과정에서 나라는 기준점이 작동합니다. [음악] 나에게 좋은 것, 나에게 나쁜 것. 이렇게 매 순간 수천 번씩 나는 다시 만들어집니다. 생각 하나가 일어날 때마다, 느낌 하나가 올라올 때마다 나는 그 중심에 자리를 잡습니다.
불교 [음악] 유식 사상에서는 이것을 매우 정밀하게 분석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단순히 하나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의식, 귀로 듣는 의식, 코로 냄새맞는 의식, 혀로 맛보는 의식, 몸으로 느끼는 [음악] 의식, 생각하는 의식. 이 여섯 가지 의식 아래에 더 깊은 층이 있습니다. 모든 경험을 저장하고 나르는 알라야 의식. 그리고 그 알라야 의식을 나로 착각하게 만드는 마나스 의식. 이 마나스 의식이 바로 아집의 근원입니다. 매 순간 알라야 의식을 들여다보며 이것이 나다라고 선언하는 것. 그 선언이 쌓이고 쌓여서 나라는 건물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음악] 그렇다면 이 마나스 의식의 착각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불교는 명상을 그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음악] 명상은 단순히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상은 자신의 의식 작용을 정밀하게 관찰하는 훈련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것. 감정이 올라올 때 그 감정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앎이 생각도 아니고 [음악] 감정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이 이 세 번째 앎이 매우 중요합니다. 생각을 아는 것은 생각이 아닙니다. 감정을 아는 것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불교에서는 이것을 순수한 알아차림이라고 부릅니다.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본래 면목이라고 합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그것. 나가 아니면서도 모든 것을 아는 그것.
[음악] 순수한 알아차림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 무아의 통찰입니다.
[음악] 자바암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색은 나가 아니요 수도 나가 아니요 상도 나가 아니요 행도 나가 아니요 식도 나가 아니니라. 이와 같이 관찰하는 자는 세간에 대하여 집착할 것이 없느니라.
[음악] 이 가르침을 처음 들으면 당황스럽습니다. 몸도 나가 아니고 느낌도 나가 아니고 인식도 나가 아니고 의지도 나가 아니고 의식도 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바로 이 당황스러움이 출발점입니다. 나를 찾으려는 마음이 방향을 잃는 그 순간 그 순간이 바로 통찰의 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선사들은 이것을 두고 큰 의심이 일어나야 큰 깨달음이 온다고 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그 의심. 그 의심이 깊어질수록 통찰은 가까워집니다.
어떤 수행자가 오랜 시간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년 동안 좌선을 하고 경전을 읽고 [음악]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명상 중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지금 누가 명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순간 멈췄습니다. 명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찾는 자가 있고 찾기는 하는데 찾아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두렵기도 했지만 [음악] 동시에 이상하게 가벼웠습니다. 그 가벼움이 잠깐이었지만 [음악] 그 경험이 그의 수행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무아 체험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론으로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물에 대한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목은 마릅니다. 직접 물을 마셔야 합니다. 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을 아무리 읽어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머릿속에 지식일 뿐입니다. 그 직접 경험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명상을 가르치셨습니다.
무아를 체험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벽 중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나가 없어진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한은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나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꽃이 시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꽃은 더 완전하게 핍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은 [음악] 더 깊이 흐릅니다. 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붙들고 있던 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힘이 사라질 때 오히려 더 넓어집니다. 더 자유로워집니다. 더 온전해집니다. 이것이 무아가 열어주는 공간입니다.
선불교회는 이런 화두가 있습니다. 부모 미생전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부모님이 나를 낳기 전 [음악]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사실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모든 역할과 이름과 관계를 벗겨냈을 때 무엇이 남는가? 나는 누군가의 자녀이고 누군가의 친구이고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고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씩 벗겨나가면 무엇이 남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까? [음악] 아니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음악] 그 무언가. 그것이 본래 면목입니다. 그것이 진짜 나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 이 역설이 선불교의 핵심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형상 없는 것, 잡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안에 있습니다.
자가 무너지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거창한 명상 수련회에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주 일상적인 순간에 찾아옵니다.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한 일이 한 순간에 무너질 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몸이 갑자기 아파서 [음악]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극도의 무력감을 느낍니다. 나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음악] 그 무력감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매우 소중한 순간입니다. 나라는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파괴의 경험이라고도 하고 큰 상실의 경험이라고도 합니다. 그 상실이 단순히 무언가를 잃은 것이 아니라 나를 붙들고 있던 환상을 잃은 것임을 알 때 그 순간 고통은 통찰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음악] 많은 수행자들이 가장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은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고통이 나라는 감옥의 벽을 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얇아진 벽 사이로 빛이 들어옵니다. 무아의 통찰은 단계적으로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이론으로 이해합니다. 그다음에는 명상 중에 잠깐 경험합니다. 그다음에는 일상 속에서 작은 알아차림들이 쌓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알아차림이 연속되기 시작합니다. 깨어 있는 상태가 길어집니다. 나를 붙드는 힘이 조금씩 약해집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오지 않습니다. 씨앗이 땅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에야 [음악] 싹을 티우듯이 수행도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매 순간의 알아차림이 매 순간의 관찰이 모두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씨앗들이 일제히 싹을 티우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을 불교에서는 견성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본성을 본다는 뜻입니다. 나가 [음악]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진짜 본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 본성은 텅 비어 있지만 텅 빈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음악]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공의 세계입니다.
연기법을 통해서도 무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은 이렇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이 소멸한다. 이 가르침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꽃 한송이가 피어나기 위해서는 흙이 있어야 하고 물이 [음악] 있어야 하고 햇빛이 있어야 하고 씨앗이 있어야 하고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꽃만으로 존재하는 꽃은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에 내가 있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있어야 했고 그 부모님의 부모님이 있어야 했고 내가 먹은 음식이 있어야 했고 나를 가르친 선생님이 있어야 했고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만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의 나는 사실 수많은 인연들의 집합입니다. 그 인연들을 제거하면 [음악]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는 남지 않습니다. 이것이 연기법이 가르쳐 주는 무아입니다. 이해가 깊어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겸손해집니다. 내가 이룬 것들이 사실 수많은 인연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겸손함이 자비의 씨앗이 됩니다. 나와 타인이 사실 하나의 큰 인연망 안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가 무너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무너짐이 사실은 열림입니다. 단단한 씨앗의 껍질이 갈라져야 싹이 나오듯이 자아는 껍질이 얇아져야 진짜 생명력이 나옵니다. 우리가 나를 지키는데 쓰는 에너지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보다 뒤쳐질까 봐 불안해하고 내 의견이 무시당할까 봐 조심하고 내 감정이 드러날까 봐 숨기고 이 [음악] 모든 에너지가 나를 지키는데 소모됩니다. [음악] 만약 그 에너지가 해방된다면 어떨까요? 나를 지키는데 쓰이던 그 에너지가 그대로 삶을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면 그것이 바로 무아의 통찰이 가져오는 선물입니다. 더 가볍게, 더 자유롭게, 더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음악] 감옥문이 열리기 직전의 순간입니다. 자가 무너지는 그 순간 진짜 자유가 시작됩니다.
지금 이 순간 잠시 눈을 감아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 어떤 생각이 있습니까? 그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있습니까? 그 알아차리는 것은 생각입니까? 그 알아차리는 것은 느낌입니까? 아니면 [음악] 그냥 조용히 있는 무언가입니까? 그 조용히 있는 무언가. [음악] 그것이 바로 나가 아닌 진짜 당신입니다. 이름 없고 형상 없고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그것. 그것이 지금 여기 있습니다. 감옥은 사실 그것 위에 세워진 그림자였습니다. 이제 그 그림자가 거치기 시작합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감옥 안에 있었던 사람은 문이 열려도 처음에는 나가지 못합니다. 감옥받기 더 두렵기 때문입니다. [음악] 익숙한 것이 편안하고 낯선 것이 두렵습니다. 나라는 감옥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나를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음악] 나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해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두려움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해탈의 길을 단번에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씩 한 단계씩 조용히 이끄셨습니다. 그 길의 이름이 팔정도입니다. 바른 >> [음악] >>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 이 이 여덟 가지는 단순한 규칙이 아닙니다. 감옥문이 열린 후 진짜 자유를 향해 걸어가는 길입니다.
진짜 자유는 어떤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런 제약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얻으면 정말 자유롭습니까?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는데도 마음 한편이 여전히 허전합니다. 원하던 것을 얻었는데도 곧 [음악] 다른 것이 원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가래의 구조입니다. [음악] 원하는 것을 얻으면 잠시 만족하지만 그 만족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곧 새로운 원함이 생겨납니다. 이 순환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두고 타는 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불은 연료를 먹을수록 더 커집니다. 가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채울수록 더 커집니다. 그러므로 진짜 자유는 원하는 것을 다 얻는 것이 아닙니다. 원함 자체의 구조를 아는 것입니다. 그 앎이 [음악] 진짜 자유의 시작입니다.
법구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고 [음악] 마음이 주인이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맑은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기쁨이 그림자처럼 따라오리라. 이 이 말씀은 매우 단순하게 들리지만 그 깊이는 끝이 없습니다. 감옥도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자유도 마음이 만드는 것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갇혀 있고 어떤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외부의 조건이 바뀌어서가 아닙니다. 마음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를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바라보는 마음과 [음악] 나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 이 이 두 마음은 완전히 [음악] 다른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전자는 항상 부족하고 항상 불안하고 항상 비교합니다. 후자는 지금 이 순간이 충분하고 고요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맑은 마음이란 나에 대한 집착이 가라앉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자연스럽게 기쁨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법경이 말하는 진짜 자유의 모습입니다.
어떤 스님이 계셨습니다. 오랜 수행 끝에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하루는 한 신도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스님 깨달음을 얻으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이 달라 보입니까? 신통력이 생깁니까? 스님이 조용히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잡니다. 신도가 의야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기 전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스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밥을 먹으면서도 온갖 생각이 따라다녔습니다. 지금은 밥을 먹을 때 [음악] 그냥 밥을 먹습니다. 이 짧은 대화 안에 진짜 자유가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 밥만 먹는 것. 걸을 때 그냥 걷는 것. 숨을 쉴 때 그냥 숨을 쉬는 것. 나가 개입하지 [음악] 않는 순수한 경험. 이것이 해탈의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압니다. 그 단순함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진짜 자유를 향해 가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 중 하나가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팔리어로는 사띠라고 합니다. 이 알아차림은 단순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 없이 개입 없이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 우리는 보통 두 가지 반응을 합니다. 화를 >> [음악] >> 폭발시키거나 화를 억누르거나. 그런데 알아차림은 이 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 화가 일어나고 있구나. 그냥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화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고 화에 끌려가지도 않습니다. 그냥 봅니다. 이 봄이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관찰되는 것은 힘을 잃습니다. 어둠 속에 있던 것이 빛 앞에 드러나면 더 이상 어둠이 아닌 것처럼 알아차려진 화는 더 이상 나를 지배하는 화가 아닙니다. 그냥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기적입니다.
[음악]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우리는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모든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라집니다. 감정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가라앉습니다. 몸에 감각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변합니다. 이 무상의 흐름을 직접 보는 것이 윗빠사나 수행의 핵심입니다. 무상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명상 중에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다 보면 들숨과 날숨이 매번 다르다는 것을 [음악] 알게 됩니다. 같은 호흡이 두 번 오지 않습니다. 같은 생각이 정확히 [음악] 같은 모양으로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이 직접적인 경험이 쌓일 때 무상은 [음악] 지식이 아닌 지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지혜가 깊어질 때 자연스럽게 집착이 옅어집니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래를 손에 꽉 주면 오히려 더 빨리 빠져나갑니다. 가볍게 손을 펴고 있을 때 모래는 더 오래 머니다. 집착도 이와 같습니다.
진짜 자유를 이야기할 때 자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아의 통찰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자비가 흘러나옵니다. 나와 너의 경계가 얇아지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감옥이 두꺼울 때 우리는 타인을 경쟁상대로 봅니다. 저 사람이 잘되면 내가 뒤쳐지는 것 같고 저 사람이 칭찬받으면 내가 초라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가 옅어질 때 타인의 고통이 낯설지 않습니다. 저 사람도 나처럼 고통받고 [음악] 있구나. 저 사람도 나처럼 자유롭고 싶구나. 이 이 앎이 자연스럽게 자비로 이어집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의무감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와 너의 경계가 없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음악] 진흙에 물들지 않듯이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끌려가지 않는 것. 이것이 자비와 지혜가 함께하는 삶입니다.
진짜 자유는 세상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항상 웃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통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가 올 때 비를 맞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비를 맞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파도가 없는 바다가 아니라 파도 아래 깊은 고유함이 있는 바다입니다.
[음악] 부처님께서도 살아 계시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제자가 배신하기도 했고 적들이 비방하기도 [음악] 했고 사랑하는 이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부처님의 내면에 고유함을 빼앗아가지 못했습니다. [음악]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외부의 조건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닌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자리. 그 자리를 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불이 꺼진 상태. 가래의 불, 분노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 꺼진 상태.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십 년을 수행해야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수행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숨을 한번 고르게 쉬는 것. 지금 이 순간 불필요한 생각을 하나 내려놓는 것.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내는 것.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조금 더 너그럽게 바라보는 것. 이 이 모든 것이 수행입니다. 거창한 수행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매 순간의 작은 알아차림이 쌓여서 큰 변화가 됩니다. 물방울이 모여 강이 되듯이 작은 알아차림들이 모여 지혜가 됩니다. 그 지혜가 깊어질 때 자연스럽게 감옥의 문이 열립니다. 억지로 여는 것이 아닙니다. 문이 원래 열려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음악] 일상 속에서 무아를 실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을 때 잠깐 멈추십시오. 지금 상처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 무엇이 고정된 실체입니까? 이렇게 한 번만 물어보십시오. 그 물음 자체가 이미 나라는 감옥에서 한 발 물러서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음악] 잠깐 멈추십시오. 이것을 얻으면 영원히 만족할 수 있습니까? 이 이 원함은 어디서 왔습니까? 이렇게 한 번만 물어보십시오. 그 물음이 가래의 자동 반응을 조금 늦혀 줍니다. 그 늦혀짐 속에 자유가 있습니다.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잠깐 보고 선택하는 것. 이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을 만드는 것. 그 공간이 넓어질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집니다.
[음악]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입니다. 그런데 열반은 죽은 후에 가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가래와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이 꺼질 때 그 순간이 열반입니다.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화가 일어났다가 알아차림으로 인해 가라앉는 그 순간 집착이 일어났다가 [음악] 무상의 통찰로 인해 옅어지는 그 순간 판단이 일어났다가 자비로 인해 녹아드는 그 순간이 모든 순간들이 작은 열반입니다. 그 작은 열반들이 쌓일 때 [음악] 삶 전체가 조금씩 변합니다. 더 가벼워집니다. [음악] 더 따뜻해집니다. 더 고요해집니다. 이것이 불교 수행이 가져다 주는 진짜 변화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장 [음악]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더덥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이 이 말씀이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더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덮음이 슬픈 것이 아닙니다. 더덥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귀한 것입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영원히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만남이 소중한 것입니다. 무상은 허무가 아닙니다. 무상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은 알아차림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행은 특별한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매 순간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정진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그 감옥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불안입니까? 분노입니까? 외로움입니까? 자기 혐오니까? 그 감옥이 아무리 단단해 보여도 사실 그것은 나라는 착각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 착각이 옅어지면 감옥은 자연스럽게 힘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 착각을 엮게 만드는 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숨을 한번 깊이 쉬는 것.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 지금 이 순간 나는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깐 내려놓는 것. 이 이 작은 것들이 모여서 감옥의 문을 엽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미 깨달을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불성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그 의식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여정이 바로 불교 수행입니다. 그 여정이 길어도 좋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이미 [음악]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감옥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이제 걸어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한 걸음을 지금 이 순간 내디드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암아 미타불 관세음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