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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는 쇼페나인데요. 쇼페나를 이해하려면 칸트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칸트는 물자체와 현상계를 나누었죠.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이 물 자체이고 감각과 인식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 현상계입니다.
쇼페노와가 보기에 칸트가 물 자체와 현상계로 나눈 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관념론자들이 나타나서 이걸 자꾸 합치려는 겁니다. 비태, 쉘링, 해겔은 헛소리만 늘어놓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으며 독일의 관념로는 사람들을 속이는 하나의 거대한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쇼페나오는 당시에 명성이 자재했던 해겔에 반대했습니다. [음악] 그래서 베를린 대학 강사로 있을 때 일부러 해겔의 강의 시간과 똑같은 시간에 자신의 강의를 개설했죠. 해겔의 수강생들이 자기한테 다 올 거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해겔의 강의에는 수백명의 수강생들이 몰렸지만 자신의 강의에는 선호명밖은 겁니다. 여기 열받은 쇼페너워는 해계를 더욱 비난하고 다녔죠. 듣는 해결은 신경도 안 썼어요. 그러자 쇼페나는 한 악기만 강의하고 그만두었어요.
그렇다면 쇼페나원은 칸트의 철학을 어떻게 계승한 걸까요? 그리고 어떤 점에서 해결과 다른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말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가 나의 인식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즉, 세계는 인식 주체가 지각하고 구성한 현상일 뿐이라는 거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나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감각과 인식 능력을 통해 구성되어 나에게 나타난 나무일 뿐이죠. 이거 칸트의 현상계와 너무 비슷하죠.
그렇다면 표상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칸트는 그것을 물자체라고 했죠. 그리고 인간은 결코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어요. 그런데 쇼페나원은 표상의 이면에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지라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내면에 있는 의지가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는 의지라고 하는 근원적인 힘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에 의해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표상은 세계의 외적 모습이고 의지는 세계의 내적 본질이다."
쇼페나오의 의지를 리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개념과 비교할 수 있는데요. 도킨스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자를 실어나려는 하나의 생존 기계에 불과합니다. 나의 주인은 나의 몸도 나의 마음도 아닌 내 안에 있는 유전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욕망은 유전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 몸속에 심어놓은 프로그램이라는 겁니다. 유전자에게 개체는 목적이 아니라 [음악] 자신을 전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즉, 번식입니다. 그래서 유전자는 개체의 고통이나 희생에는 사실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토킨스는 그것을 이기적 유전자라고 불렀습니다.
남태평양에 사는 큰 거북기는 짝짓기철의 모래 속에 알을 낳기 위해서 해안가를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거북이들이 죽죠. 그런데 거북이는 왜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까지 알을 낳으러 해안가를 오르는 걸까요? 그것은 자신의 유전자를 2세에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은 18세가 되면 2세를 만들 준비가 다 끝나고 그 이후로는 신체가 노화되기 시작하는데요. 죽어가는 거죠. 사랑. 그런 거 없어요. 사랑은 종족 보전을 위한 유전자의 욕망일 뿐인 겁니다.
유전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복제를 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복제를 하지 않는 유전자는 사라져서 없어졌고 복재를 하는 유전자만 살아남은 것일 뿐이에요. 쇼페나우의 의지도 이와 마찬가지인데요. 의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의지는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으며 의식조차 없습니다. 의식은 그저 막무관로 날뛰는 욕망일 뿐이에요. 쇼페나우의 의지는 한 사람의 욕망이고 조금 더 넓게 보면 인간이라는 종의 욕망이며 더 크게 보면 자연 전체의 힘이자 에너지인 셈입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이 세계 전체의 배후에는 이러한 힘과 에너지가 있다는 겁니다.
쇼페나우의 의지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개념은 공통점도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습니다. 도킨스에게 이기적 유전자는 생물학적 설명 체계예요. 유전자가 복재 효율을 급대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쇼페나우에게 의지는 [음악] 형의상학적인 원리입니다.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의지를 넘어서 세계 전체의 배후에 있는 힘과 에너지예요. 쇼페나워는 생명이 왜 존재하는가를 묻는 형의상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유전자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그런데 욕망이 채워지나요? 안 채워지죠.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서 인간은 결핍을 느낍니다. 그래서 인생이 고통스러운 겁니다. 물론 욕망이 일시적으로 채워질 수는 있죠. 그런데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인간의 이번에는 권태라는 고통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다른 욕망에 사로잡히죠. 이처럼 인생은 결핍과 권를 왔다 갔다 하는 고통일 뿐인 겁니다.이 세 개는 지옥에 가깝죠. 단태의 신곡을 보면 지옥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게 잘 되어 있지만 천국에 대한 묘사는 굉장히 어색해요.이 세계가 지옥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만 천국은 상상을 못하는 겁니다. 라이프니츠는이 세계는 신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세계라고 했죠. 쇼페나오는 그 반대로 말합니다.이 세계는 신이 만들 수 있는 최악의 세계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는 음악입니다. 하지만 음악을 통해서는 일시적으로밖에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길은 바로 열반을 하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그 열반 맞습니다. 일체의 욕망을 끊고 금욕을 통해서 열반을 하면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쇼페나워의 책상 위에는 청동 불쌍이 있었다고 합니다.
쇼페나워는 거의 평생을 고독 속에 살았습니다. 야심차게 내놓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거의 팔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폐지로 처분되기도 하였는데요. 그리고 베를린 대학교에서는 한악기만의 해결한테 망심만 당하고 대학을 떠났자. 그리고 어머니와도 의를 했고 평생을 혼자 살았습니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인생은 고통이었고 세계는 최악이었던 겁니다.
그는 늦은 나이에 책을 한 권 냈는데요. 그것이 바로 여록과 보유라고 하는 에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쇼페나오의 행복론, 쇼페하워의 인생론으로 번역이 되었는데요. 쇼펜하워의 촌철 살인을 볼 수 있는 책입니다.이 책으로 나중에 유럽에서 아주 유명 인사가 되었는데요. 하지만 그는 이미 고령의 나이로 지쳐 있는 상태였죠. 이제는 지쳐서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라고 말을 했다고 하죠. 그러고 보면 사는게 원래 다 그런 건가 봅니다. 살만하면 가는 거죠. 오늘은 이만 마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