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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말씀 하신 습관의 힘 | 부처님 말씀

부처의말1:25:31

Transcription

당신은 지금이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집어들었을 때, 그 행동은 과연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었을까요? 화가 날 때마다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왜 나는 늘 이럴까 하고 자책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선택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 이미 이 비밀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보이지 않는 창고가 있으며, 그곳에 저장된 무수한 씨앗들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만들어 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식 사상에서 말하는 아래야식과 종자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마음이라는 신비로운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당신의 습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반복되는 고통의 패턴은 왜 끊어지지 않는 걸까요? 그리고 우리는 과연 이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 답을 함께 찾아가 보겠습니다.

유식 사상은 인도의 위대한 불교 사상가인 무착보살과 세친 보살에 의해 체계화된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은 실은 우리 마음이 투영한 영상과 같습니다. 마치 영화관에서 스크린에 비친 영상을 보듯이, 우리는 마음이라는 프로젝터가 만들어낸 세계를 실제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요? 유식 사상에서는 마음을 여덟 가지 층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눈으로 보는 안식, 귀로 듣는 이식, 코로 냄새맞는 비식, 혀로 맛보는 설식, 몸으로 느끼는 신식. 이 다섯 가지를 전오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다섯 감각을 통합하고 판단하는 여섯 번째 마음 의식이 있습니다. 일곱 번째는 말라식으로,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를 집착하는 자의식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 여덟 번째 층에 아래야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래야식은 산스크리트어 알라야비즈냐를 한자로 옮긴 말로, 장식 또는 함장식이라고도 번역됩니다. 창고처럼 모든 것을 저장하고 간직한다는 의미입니다. 8밀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종자는 아래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며, 그것이 연을 만나면 현행하여 다시 종자를 심는다." 이 아래야식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아래야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자라는 개념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종자란 무엇일까요? 씨앗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모든 행위, 말했던 모든 언어, 생각했던 모든 관념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씨앗처럼 아래야식이라는 땅속 깊이 저장됩니다. 당신이 어제 화를 냈다면, 그 화의 에너지는 종자가 되어 아래야식에 새겨집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면, 그 자비의 마음 역시 종자가 되어 저장됩니다. 한 번의 탐욕, 한 번의 질투, 한 번의 자만심, 이 모든 것들이 저장됩니다. 반대로 한 번의 보시, 한 번의 인내, 한 번의 지혜로운 선택도 모두 저장됩니다.

아래야식은 선악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마치 돼지가 좋은 씨앗이든 나쁜 씨앗이든 모두 품듯이, 아래야식은 우리의 모든 경험을 종자로 저장합니다. 그리고 이 종자들은 단순히 저장되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적절한 조건이 갖춰지면, 즉 인연을 만나면, 다시 싹을 틀며 표면으로 올라옵니다. 이것을 현행이라고 부릅니다.

아래야식에 저장된 분노의 종자는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면 순식간에 현행합니다. 누군가 당신을 비판하는 순간, 과거에 저장된 수많은 분노의 종자들이 일제히 활성화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게 됩니다. 이것이 습관입니다. 이것이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우리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왜 늘 비슷한 방식으로 괴로워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래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끊임없이 현행하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현행한 종자가 다시 새로운 종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화를 내면, 그 화는 다시 분노의 종자를 아래야식에 심습니다. 한 번 화를 낼 때마다 분노의 종자는 더욱 강해지고 많아집니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종자가 현행하고, 현행이 다시 종자를 만들고, 그 종자가 또다시 현행하는 무한한 반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폭류에 비유하셨습니다. 거센 물결처럼 쉴 새 없이 흘러가는 마음의 흐름. 그것이 바로 아래야식의 작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에 심어진 종자의 노예일 뿐인가요? 이미 저장된 수많은 악한 종자들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걸까요? 부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비록 과거의 종자가 현행하려는 힘이 강하다 해도,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종자를 심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유식 사상은 희망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습관을 바꿀 수 있다는, 우리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훈습이라는 원리를 통해서입니다. 훈습이란 무엇인가요? 반복적으로 좋은 것을 익히고 몸에 배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향을 피우면 그 향기가 옷에 배듯이,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을 반복하면 그것이 마음에 배어듭니다. 이것이 훈습의 원리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훈습의 힘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 자전거를 탈 때를 떠올려 보세요.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계속 연습했습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균형을 잡습니다. 이것이 훈습입니다. 자전거 타기라는 행위가 반복되면서 몸과 마음에 그 능력이 종자로 저장된 것입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처음에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말을 듣고 따라하며 반복합니다. 그렇게 훈습되면서, 어느새 자연스럽게 언어를 구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아래야식의 종자로 저장되고 훈습되는 과정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의식 중에 나쁜 습관도 똑같이 훈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습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폭식하는 습관,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습관. 이 모든 것들이 반복되면서 점점 더 강한 종자로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아래야식 깊은 곳에 뿌리내린 종자가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나쁜 습관이 훈습으로 형성되었다면, 좋은 습관 역시 훈습으로 형성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팔정도를 설하셨습니다. 정견(올바른 견해)부터 시작하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에 이르기까지, 이 여덟 가지 바른 길을 반복해서 익히라고 하셨습니다. 왜 반복해야 할까요? 한 번 올바른 생각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생각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그것이 아래야식에 깊이 훈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느 순간 올바른 생각이 자동으로 일어나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이란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좋은 종자를 반복해서 심고, 나쁜 종자가 현행하는 것을 알아차리며 멈추는 과정입니다. 매일 아침 명상하는 것, 경전을 읽는 것, 자비심을 내는 것. 이 모든 것이 훈습입니다. 성유식론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종자가 현행하고, 현행이 다시 종자를 훈습한다." 선한 훈습은 청정한 마음을 이루고, 악한 훈습은 번뇌를 증장시킨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의 현재 상태는 과거에 어떤 훈습을 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훈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반복하고 있나요? 분노를 반복하고 있나요? 아니면 자비를 반복하고 있나요? 탐욕을 반복하고 있나요? 아니면 보시를 반복하고 있나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나요? 아니면 지혜를 반복하고 있나요?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이 당신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아래야식이라는 개념이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이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항상 밝고 긍정적일까요? 그 사람의 아래야식에는 긍정의 종자가 많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라며 사랑받고 격려받으며 긍정적인 경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경험이 종자가 되어 쌓였고, 이제는 자동으로 긍정적인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항상 부정적이고 비관적입니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아래야식에 부정의 종자가 많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상처받고 실패하고 거부당한 경험들이 종자로 저장되었고, 그것이 자동으로 현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가 현재를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부정의 종자가 많다 해도, 지금부터 긍정의 종자를 심기 시작하면 조금씩 마음이 변화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변화일 것입니다. 하지만 꾸준히 훈습하면, 어느 순간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의입니다. 마음이 전환되는 것입니다.

아래야식의 가르침이 현대 심리학과 만나는 지점도 흥미롭습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했고, 융은 집단 무의식을 이야기했습니다. 현대 신경과학은 습관이 뇌의 신경회로에 각인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이 모든 발견들이 사실은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이미 가르치신 아래야식의 원리와 통합니다. 우리 뇌는 반복되는 행동을 학습하고 그것을 자동화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자가 현행하는 과정입니다. 신경 가소성이라는 개념도 훈습과 같은 맥락입니다. 뇌는 변화할 수 있고 새로운 신경회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의 신경 회로를 약화시키고 좋은 습관의 신경 회로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불교의 훈습로는 이미 과학적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좋은 종자를 심을 수 있을까요? 가장 기본은 알아차림입니다. 지금 내 마음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화가 일어날 때 그냥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아, 지금 내 안에서 분노의 종자가 현행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 알아차림 자체가 이미 변화의 시작입니다.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자동적인 반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얻게 됩니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다르게 반응해 보자"고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르게 반응하면 새로운 종자가 심어집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 것입니다. 오래된 종자의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면, 새로운 종자가 점점 강해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새로운 반응이 자연스러워지는 때가 옵니다. 이것이 훈습의 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반복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한 번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반복해서 듣고, 반복해서 사유하고, 반복해서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 번으로는 아래야식에 깊이 새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깊이 새겨지지 않으면 금방 잊혀집니다. 하지만 반복하면 점점 깊어지고, 어느 순간 자동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마치 구구단을 외울 때처럼 말입니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반복하면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나옵니다.

불교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심을 한 번 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자비심을 내는 연습을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생각하지 않아도 자비심이 자동으로 일어나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경지입니다.

아래야식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책임감도 일깨워 줍니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행동이 미래의 나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 이상 함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한 번의 거짓말이 거짓말의 종자를 심고, 한 번의 도둑질이 도둑질의 종자를 심습니다. 그리고 그 종자들은 언젠가 반드시 현행합니다. 이것이 업보의 원리입니다. 업이란 행위를 뜻하고, 보(과)는 결과를 뜻합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업이 종자로 저장되고, 그것이 반드시 과보로 돌아온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두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공정한 우주의 법칙입니다. 당신이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지극히 공정한 원리입니다. 나쁜 종자를 심으면 괴로운 결과를 얻고, 좋은 종자를 심으면 행복한 결과를 얻습니다. 이보다 더 공정한 법칙이 어디 있을까요?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나쁜 종자를 심었다 해도,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좋은 종자를 심기 시작하면 미래는 바뀔 수 있습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을 통해서 말입니다.

대승기신론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망념을 끊고 진여를 관찰하면, 아래야식의 염한 종자가 점차 소멸하고 청정한 종자로 전환된다." 이것이 전의, 즉 마음의 전환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깨달을 수 있는 씨앗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씨앗이 아직 싹을 키우지 못했을 뿐입니다. 좋은 훈습이라는 물과 햇빛을 주면, 그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웁니다.

오늘 우리는 아래야식과 종자의 비밀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무수한 종자들이 저장되어 있고, 그것들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훈습을 통해 이 종자들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시간입니다. 훈습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를 더 깊이 탐구해 보겠습니다. 반복이 어떻게 마음을 변화시키는지, 그 놀라운 원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좋은 씨앗을 심는 여정은 이제 시작입니다.

당신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어떤 생각을 가장 먼저 했나요? 그 생각은 정말로 당신이 선택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어제와 똑같은 생각이 자동으로 떠올랐나요? 우리 대부분은 매일 아침 같은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제의 걱정이 오늘도 이어지고, 지난주의 불안이 이번 주에도 반복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훈습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은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훈련시킵니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말입니다.

훈습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어렵고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훈습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당신이 걷는 방식, 말하는 습관, 웃는 모습, 화내는 패턴. 이 모든 것이 훈습의 산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훈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의식적 훈습이 우리를 고통으로 이끌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훈습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고, 의식적으로 좋은 훈습을 실천하는 방법을 배워 보겠습니다.

성유식론에는 훈습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종자가 현행하고, 현행이 다시 종자를 훈습한다." 이 짧은 문장 속에 훈습의 모든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종자가 현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래야식에 저장되어 있던 씨앗이 조건을 만나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수많은 종자들이 동시에 현행하기 시작합니다. 어제 미루었던 일에 대한 걱정의 종자, 오늘 만날 사람에 대한 기대나 불안의 종자, 습관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스마트폰에 대한 집착의 종자.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 현행은 단순히 생각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됩니다. 걱정의 종자가 현행하면 한숨을 쉬게 되고, 불안의 종자가 현행하면 초조하게 움직이게 되고, 집착의 종자가 현행하면 스마트폰을 집어들게 됩니다. 이것이 현행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현행이 다시 종자를 훈습합니다. 당신이 걱정하는 행동을 했다면, 그 걱정은 다시 걱정의 종자를 아래야식에 더욱 깊이 새겨 넣습니다. 불안하게 행동했다면, 불안의 종자가 더 강해집니다. 스마트폰을 습관적으로 확인했다면, 집착의 종자가 더욱 단단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입니다. 종자가 현행하고, 현행이 종자를 강화하고, 강화된 종자가 더 쉽게 현행하고, 또다시 강화되는 끝없는 반복입니다. 이 순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패턴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해탈의 시작입니다.

훈습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는 사자성어입니다. 한 방울의 물은 바위를 뚫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 계속해서 떨어지면, 결국 단단한 바위에도 구멍이 뚫립니다. 이것이 바로 반복의 힘입니다. 훈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의 생각으로 마음이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아래야식이라는 마음의 땅에 깊은 자국이 새겨집니다. 좋은 생각을 반복하면 좋은 자국이 새겨지고, 나쁜 생각을 반복하면 나쁜 자국이 새겨집니다. 처음에는 얕은 자국이지만, 반복할수록 깊어지고, 어느 순간 그 자국을 따라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듯이, 우리 마음도 그 자국을 따라 자동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훈습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항상 반복적인 수행을 강조하셨습니다. 매일 명상하고, 매일 경행하고, 매일 경전을 독송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매일 해야 할까요? 한 번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명상을 하면 그 순간은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하지만 명상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예전의 마음 상태로 돌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오랜 세월 동안 훈습된 번뇌의 종자가 아직 강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명상으로 그 깊은 종자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명상하면 어떻게 될까요? 매일 고요함의 종자를 심으면, 조금씩 그 종자가 자라납니다. 처음에는 작은 변화입니다. 명상 직후 몇 분 동안만 고요함이 유지됩니다. 하지만 계속하면 그 시간이 점점 길어집니다. 몇 분이 몇 시간이 되고, 며칠이 되고, 결국에는 일상의 대부분이 고요함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훈습의 힘입니다.

불교 경전 곳곳에서 우리는 반복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법구경에는 이런 계송이 있습니다. "물 한 방울씩이라도 떨어지면 물병이 가득 차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조금씩이라도 선을 쌓아 결국 선으로 가득 찬다." 조금씩이라도 계속하면 결국 가득 찬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포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으니까 포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명상했는데 여전히 화가 나고, 오늘 경전을 읽었는데 여전히 탐욕이 일어나고, 오늘 자비를 실천했는데 여전히 미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소용 없구나. 나는 변하지 않는구나. 수행은 나와 맞지 않는구나."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변화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씨앗을 심고 다음날 확인했을 때 싹이 나지 않았다고 해서 씨앗이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땅속에서 보이지 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훈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도, 아래야식 깊은 곳에서는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종자가 조금씩 쌓이고 있고, 나쁜 종자의 힘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 심리학과 신경과학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습관을 바꾸는 데는 평균적으로 66일이 걸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새로운 행동을 반복하면 뇌에 새로운 신경 회로가 만들어집니다. 처음에는 약한 회로이지만, 반복할수록 그 회로가 강화됩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을 지나면 그것이 기본 회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종자가 현행하고, 현행이 종자를 훈습하는 과정의 과학적 증명입니다.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이미 발견하신 진리를 현대 과학이 뒤늦게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좋은 훈습을 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훈습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나쁜 습관을 훈습합니다. 화를 내면서도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탐욕을 부리면서도 그것이 탐욕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면서도 그 어리석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념처(四念處)를 가르치셨습니다. 몸을 관찰하고,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고, 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 관찰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지금 내 몸이 긴장하고 있구나." "지금 불쾌한 느낌이 일어나고 있구나." "지금 분노의 마음이 생기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자동적인 반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얻습니다. 그 공간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다르게 반응해 보자"고 말입니다.

두 번째는 의도적인 반복입니다.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을 의도적으로 반복해야 합니다. 저절로 좋은 습관이 생기지 않습니다. 나쁜 습관은 저절로 생기지만, 좋은 습관은 의도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감사한 일 세 가지를 떠올리는 것. 이것이 의도적 반복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억지스러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감사할 일이 없는 것 같고, 오히려 불평하고 싶은 일이 더 많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것입니다. "숨 쉴 수 있어서 감사하다." "눈을 뜰 수 있어서 감사하다."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렇게 작은 것부터 시작합니다. 매일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억지로 하던 것이 어느 순간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훈습의 결과입니다. 감사의 종자가 아래야식에 깊이 뿌리내린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환경의 활용입니다. 우리는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좋은 환경에 있으면 좋은 훈습이 일어나고, 나쁜 환경에 있으면 나쁜 훈습이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도 이것을 아셨기에 승가를 만드셨습니다.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저절로 수행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경전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자신도 경전을 읽고 싶어집니다. 명상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명상에 대한 동기가 생깁니다. 이것이 상구(相遇)라는 개념입니다. 좋은 법과 함께하면 좋은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환경에 계속 노출되면,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나쁜 훈습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늘 부정적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이 훈습되고, 늘 화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분노가 훈습되고, 늘 탐욕스러운 환경에 있으면 탐욕이 훈습됩니다. 그래서 환경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능하면 좋은 환경에 자신을 두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큰 변화를 시도하다가 좌절합니다.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갑자기 완전히 끊으려고 하거나, 운동을 전혀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매일 두 시간씩 운동하려고 하거나, 명상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갑자기 매일 한 시간씩 명상하려고 합니다. 이런 시도는 대부분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종자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한꺼번에 바꾸려고 하면 강한 저항이 일어납니다. 대신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담배를 끊고 싶다면 하루에 한 개비씩 줄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운동을 시작하고 싶다면 하루 5분 걷기부터 시작합니다. 명상을 하고 싶다면 하루 1분 호흡 관찰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작은 변화는 저항이 적습니다. 그리고 작은 성공을 경험하면 그것이 동기가 되어 조금씩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1분이 2분이 되고, 5분이 되고, 10분이 되고, 결국에는 한 시간도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점진적 훈습의 지혜입니다.

다섯 번째는 꾸준함입니다. 하루 10시간 수행하고 나머지 일주일을 쉬는 것보다, 매일 10분씩 꾸준히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훈습은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며칠 쉬면 종자가 약해지고, 다시 시작할 때 처음부터 해야 합니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면 종자가 약해질 틈이 없습니다. 매일 물을 주는 식물처럼, 매일 훈습하는 마음은 계속 자랍니다. 부처님께서도 정정진(正精進), 즉 올바른 노력을 강조하셨습니다. 한순간에 강한 노력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떠올려 보세요. 빠르게 달리다가 쉬는 토끼보다, 천천히라도 꾸준히 가는 거북이가 결승점에 먼저 도착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 열심히 하다가 그만두는 것보다, 평생 조금씩이라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훈습의 과정에서 우리는 반드시 저항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래된 종자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시작하면 온갖 잡념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비심을 내려고 하면 오히려 더 미운 마음이 강하게 올라옵니다. 탐욕을 끊으려고 하면 더 강한 욕망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래된 종자가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면, 그 저항은 점점 약해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저항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새로운 종자가 완전히 자리 잡은 것입니다.

선불교에는 타파삼관(打破三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번의 관문을 깨뜨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알아차림의 관문을 깨뜨립니다. "아,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집착의 관문을 깨뜨립니다. 알아차렸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을 붙잡지 않고 놓아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습관의 관문을 깨뜨립니다. 한두 번 놓아 준다고 습관이 바뀌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놓아주는 훈습을 통해 비로소 습관이 바뀝니다. 이 세 관문을 모두 지나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바로 훈습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훈습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지금도 훈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 순간, 지혜의 종자가 당신의 아래야식에 심어지고 있습니다. 이 종자는 당장 싹을 틔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심어졌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적절한 때가 오면, 그 종자는 싹을 틔울 것입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노력은 헛되지 않습니다. 비록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도, 분명히 변화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래야식 깊은 곳에서 보이지 않게,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유식론의 가르침대로, 선한 훈습은 청정한 마음을 이룹니다. 매일 조금씩 선한 훈습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 당신의 마음은 청정해집니다. 청정하다는 것은 오염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탐진치 삼독에 물들지 않은 맑은 마음입니다. 이 청정한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좋은 종자를 심는 평범한 반복입니다. 물 한 방울씩 떨어뜨려 물병을 가득 채우듯이, 하루하루 선한 훈습을 쌓아 청정한 마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훈습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반복이 어떻게 마음을 변화시키는지, 그 놀라운 힘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천이 필요합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마음을 전환할 수 있는지, 아래야식의 오염된 종자를 청정한 종자로 바꾸는 수행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의, 즉 마음의 전환은 가능합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여정을 함께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낀 순간이 있으신가요? 어제까지의 나와 오늘의 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 경험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사고를 겪은 후에,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 또 어떤 사람들은 깊은 명상 체험 후에 이런 변화를 경험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전의(轉依)라고 부릅니다. 마음이 전환된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전식지(轉識智), 즉 아래야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오염된 마음을 청정한 마음으로, 번뇌로 가득한 의식을 지혜로 빛나는 의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을 전환하는 구체적인 수행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대승기신론에는 전의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망념을 끊고 진여를 관찰하면, 아래야식의 염한 종자가 점차 소멸하고 청정한 종자로 전환된다." 이 짧은 문장 속에 수행의 모든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망념을 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망념이란 헛된 생각을 뜻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루에도 수만 가지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중 대부분이 망념입니다. 과거를 후회하는 생각, 미래를 걱정하는 생각, 있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는 생각, 남과 나를 비교하는 생각. 이 모든 것이 망념입니다. 이런 망념들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망념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불안해하고, 이미 지나간 일 때문에 후회합니다. 그래서 망념을 끊어야 합니다.

하지만 망념을 끊는다는 것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생각 자체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생각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망념을 끊는다는 것은 헛된 생각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그저 바라보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다음 진여(眞如)를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진여란 참다운 모습,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뜻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왜곡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편견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합니다. 진여를 관찰한다는 것은 이 렌즈를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비판적인 말을 했다고 합시다. 보통은 즉시 반응합니다. 화가 나고, 상처받고, 방어적이 됩니다. 하지만 진여를 관찰하면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아, 상대방이 저런 말을 하는구나. 그 말을 들은 내 안에서 불쾌한 느낌이 일어나는구나. 그리고 그 느낌에 대해 내가 화를 내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찰하면 자동적인 반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화를 낼 수도 있고, 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망념을 끊고 진여를 관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대승기신론의 말씀대로 아래야식의 염한 종자가 점차 소멸합니다. 오염된 종자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라질까요? 종자는 현행할 때 힘을 얻습니다. 분노의 종자가 현행하여 실제로 화를 내면, 그 종자는 더 강해집니다. 하지만 분노의 종자가 현행하려고 할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화를 내지 않으면, 그 종자는 힘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약해집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결국 그 종자는 소멸합니다. 마치 사용하지 않는 근육이 퇴화하듯이, 현행하지 않는 종자는 점점 약해지고 결국 사라집니다.

동시에 청정한 종자가 자라납니다. 분노 대신 자비를 선택할 때마다 자비의 종자가 심어지고, 탐욕 대신 보시를 선택할 때마다 보시의 종자가 심어지고, 어리석음 대신 지혜를 선택할 때마다 지혜의 종자가 심어집니다. 이것이 전의의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전의를 이루기 위한 실천적 방법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사념처행(四念處行)입니다. 사념처란 네 가지 알아차림의 터전을 뜻합니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 법(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이 수행은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수행법입니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은 호흡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숨이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이 나가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됩니다. 몇 번의 호흡도 채 지나기 전에 마음이 딴 곳으로 달아납니다. 과거의 기억, 미래의 계획, 온갖 잡념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매번 마음이 달아날 때마다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것. 이것이 바로 망념을 끊는 훈습입니다.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은 감각과 감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느낌이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관찰합니다. 즐거운 느낌인가? 괴로운 느낌인가? 중립적인 느낌인가? 대부분의 고통은 느낌에 대한 반응에서 생깁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우리는 즉시 그것을 밀어내려 합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이 밀어내기와 붙잡기가 괴로움의 근본 원인입니다. 하지만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밀어내거나 붙잡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는구나. 그것은 잠시 후 사라지는구나." 이렇게 관찰만 합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는구나. 그것도 잠시 후 사라지는구나." 이렇게 관찰만 합니다. 이렇게 하면 느낌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무상(無常)을 직접 체험하는 수행입니다.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은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금 탐욕이 일어나는구나." "지금 분노가 일어나는구나." "지금 질투가 일어나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립니다. 중요한 것은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났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라고 자책하지 않습니다. 그저 분노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알아차립니다. 마치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듯이, 마음을 지나가는 생각과 감정을 바라봅니다. 구름이 하늘을 더럽히지 않듯이, 생각과 감정도 본래 마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에 집착하고 동일시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알아차림을 통해 거리를 두면,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고, 감정은 그저 감정일 뿐입니다. 내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무아(無我)를 체험하는 수행입니다.

법에 대한 알아차림은 현상의 본질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법(緣起法)을 직접 관찰합니다. 화가 일어날 때, 그 화가 어떤 조건들 때문에 일어났는지 살펴봅니다. 누군가의 말, 내 안의 상처, 과거의 경험, 현재의 피로. 이 모든 조건들이 모여서 화라는 현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조건이 없으면 화도 없습니다. 조건이 사라지면 화도 사라집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면 화를 나라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화는 여러 조건이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현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화에서 벗어나기가 쉬워집니다.

사념처 수행을 꾸준히 하면 알아차림의 힘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이 알아차림의 힘이 바로 전의의 기초가 됩니다.

두 번째 수행법은 선정 수행입니다. 선정이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깊이 집중된 상태를 뜻합니다. 사마디(Samadhi)라고도 부릅니다.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것이 선정의 목적입니다. 우리 마음은 평소에 끊임없이 여기저기로 달아납니다. 마치 원숭이가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다니듯이, 마음도 생각해서 생각으로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진여를 볼 수 없습니다. 물이 흔들리면 달그림자가 보이지 않듯이, 마음이 흔들리면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합니다.

선정 수행의 가장 기본은 호흡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만 온전히 집중합니다. 처음에는 몇 초도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계속 연습하면 점점 오래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몇 초가 몇 분이 되고, 몇 분이 몇십 분이 되고, 결국에는 몇 시간도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깊은 집중 상태에 들어가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아집니다. 번뇌의 종자들이 현행하지 못합니다. 고요하고 맑은 마음 상태에서는 지혜가 일어납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어떤 종자들이 있는지, 어떤 패턴들이 반복되는지 명확하게 보입니다. 이것이 선정의 힘입니다.

세 번째 수행법은 윗빠사나(Vipassanā) 수행입니다. 윗빠사나는 통찰을 뜻합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입니다. 선정이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라면, 윗빠사나는 그 고요한 마음으로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볼까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이 세 가지 특징을 봅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을 직접 체험합니다. 호흡을 관찰하면 매 순간 호흡이 변합니다. 느낌을 관찰하면 느낌이 계속 변합니다. 생각을 관찰하면 생각이 끊임없이 바뀝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흐르고 변합니다. 이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직접 체험하면 집착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변하는 것에 어떻게 집착할 수 있을까요? 물 위에 그은 선처럼, 즉시 사라지는 것에 어떻게 집착할 수 있을까요?

고를 직접 체험합니다. 집착하는 모든 것이 괴로움을 만든다는 것을 봅니다. 즐거운 느낌에 집착하면 그것이 사라질 때 괴로워집니다. 괴로운 느낌을 밀어내려 하면 그 저항이 더 큰 괴로움을 만듭니다. 심지어 중립적인 느낌조차도 그것을 유지하려는 미묘한 집착이 있으면 괴로움이 됩니다. 이것을 직접 보면 집착을 놓게 됩니다. 집착을 놓으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고의 소멸입니다.

무아를 직접 체험합니다. 몸을 관찰하면 몸은 그저 물질의 집합일 뿐입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모인 것입니다. 거기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느낌을 관찰하면 느낌도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질 뿐입니다. 생각을 관찰하면 생각도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질 뿐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나가 있을까요? 나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사실은 조건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인 현상들일 뿐입니다. 이것을 깊이 체험하면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사라집니다. 이것이 무아의 깨달음입니다.

네 번째 수행법은 사무량심(四無量心) 수행입니다. 사무량심이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뜻합니다. 자애(慈), 연민(悲), 희열(喜), 평정(捨)입니다.

자애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명상할 때 먼저 자신에게 자애를 보냅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평안하기를, 내가 건강하기를." 이렇게 기원합니다. 왜 자신부터일까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자애를 충분히 보낸 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애를 보냅니다.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그 사람이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다음 중립적인 사람, 즉 특별한 감정이 없는 사람에게도 자애를 보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려운 사람, 즉 싫어하거나 원수로 여기는 사람에게도 자애를 보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해질 때 진정한 자애가 완성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존재에게 자애를 확장합니다.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모든 존재가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연민은 괴로워하는 존재를 보고 그 괴로움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고통받는 존재가 많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 마음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 무지로 고통받는 사람. 이들 모두에게 연민을 보냅니다. "당신들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당신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이렇게 기원합니다. 연민을 훈습하면 이기심이 줄어듭니다. 내 괴로움만이 아니라 남의 괴로움도 보게 되고, 그것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이것이 보살의 마음입니다.

희열은 남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질투와 정반대의 마음입니다. 누군가 성공했을 때, 행복해 보일 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치 내 일처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훈습하면 질투심이 사라집니다. 남과 나를 구분하는 경계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평정은 공유하지 않는 고유한 마음입니다. 좋은 일에도 들뜨지 않고, 나쁜 일에도 절망하지 않는 평온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이해에서 나오는 평화입니다. 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수행법은 참회(懺悔)와 발원(發願)입니다. 참회는 과거에 지은 악업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악업은 아래야식의 종자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참회는 그 종자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면 악업의 종자가 현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참회할 때는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막연히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어떤 해를 끼쳤는지, 그것이 왜 잘못인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참회입니다.

발원은 미래에 이루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마음을 키우고 싶은지, 어떤 수행을 하겠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발원합니다. 발원은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방향이 명확하면 걸음도 명확해집니다. 매일 아침 발원하고, 매일 밤 참회하는 것. 이것이 일상 수행의 기본입니다.

여섯 번째 수행법은 경전 공부입니다.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것도 중요한 수행입니다.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보물창고입니다. 거기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모든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경전을 읽을 때는 단순히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깊이 사유합니다. 이것을 문사수(聞思修)라고 합니다. 듣고 생각하고 닦는 것입니다. 경전을 듣거나 읽는 것이 문(聞)입니다. 그 내용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사(思)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수(修)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갖춰져야 진정한 공부가 됩니다. 경전을 반복해서 읽으면 부처님의 말씀이 아래야식에 깊이 훈습됩니다. 그러면 일상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것이 경전 공부의 힘입니다.

일곱 번째 수행법은 계율 지키기입니다. 계율은 단순한 규칙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삶을 위한 지침입니다. 오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살생하지 않기, 도둑질하지 않기, 사하지 않기, 거짓말하지 않기, 술 마시지 않기.

이 이 다섯 가지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악업을 짓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살생하지 않으면 자비의 종자가 자라고, 도둑질하지 않으면 정직의 종자가 자라고, 사험하지 않으면 절제의 종자가 자라고, 거짓말하지 않으면 진실의 종자가 자라고, 술 마시지 않으면 명류함의 종자가 자랍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 자체가 훈습입니다. 매일매일 선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지켜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지키면 자연스러워집니다. 살생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고 훔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계율이 완성된 상태입니다.

여덟 번째 수행법은 보시입니다. 보시는 베푸는 것입니다. 물질을 베푸는 제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무예시,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이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보시는 탐욕을 끊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탐욕은 쌓으려는 마음이고 보시는 나누려는 마음입니다. 보시를 반복하면 탐욕의 종자가 약해지고 배품의 종자가 강해집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베풀수록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싸울 때는 항상 부족한 것 같지만 베풀 때는 항상 넉넉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체험해 보면 진리임을 알게 됩니다.

보시는 또한 자비를 키우는 수행입니다. 남의 필요를 보고 도와주는 것. 이것이 자비의 실천입니다. 작은 보시부터 시작하세요. 미소짓기, 친절한 말 한마디, 길을 비켜주기, 문을 잡아주기. 이런 작은 것들도 모두 보시입니다. 이런 작은 보시를 매일 실천하면 베푸는 마음이 습관이 됩니다. 그리고 그 습관이 아래야식에 깊이 새겨집니다.

아홉 번째 수행법은 정진입니다. 정진은 꾸준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열심히 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평생 지속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치 검은고를 조율하듯이 수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적절한 긴장이 필요합니다. 무리하지 않게 게으르지도 않게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적절한 강도로 수행해야 합니다.

정진에는네 가지가 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악을 소멸시키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을 일으키고, 이미 일어난 선을 증장시키는 것입니다. 이네 이네 가지를 매일 실천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열 번째 수행법은 일상속 수행입니다. 수행은 명상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수행의 기회입니다. 걸을 때 걷는 것을 알아차리고, 먹을 때 먹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할 때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생각할 때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을 사위라고 합니다. 행주자와 어묵동정 모든 행동에서 깨어 있는 것입니다.

설거지할 때도 수행입니다. 물의 온도를 느끼고, 그릇의 감촉을 느끼고, 비누 거품의 움직임을 보고, 그릇이 깨끗해지는 과정을 관찰합니다. 이렇게 온전히 현재에 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출근길에도 수행입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호흡을 관찰하고, 걸으며 발바닥에 감각을 느끼고, 사람들을 보며 자비심을 냅니다. 모든 순간이 수행의 기회입니다. 이렇게 일상을 수행으로 만들면 하루 24시간이 모두 훈습의 시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만큼 빨리 변화합니다.

이 이 모든 수행법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지금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순간에 깨어 있으면 오래된 종자가 자동으로 현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이 새로운 선택이 반복되면 새로운 종자가 심어집니다. 그 새로운 종자가 강해지면 마음이 전환됩니다. 이것이 전의입니다. 전식지 아래 야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극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매일매일 조금씩 일어나는 점진적인 변화입니다. 마치 얼음이 녹듯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깨달을 수 있는 본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불성이 번뇌에 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번뇌에 가려진 불성입니다. 하지만 구름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태양은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번뇌도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불성은 항상 우리 안에 있습니다. 수행은 구름을 걷어내는 과정입니다. 번뇌의 종자를 약화시키고 지혜의 종자를 강화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꾸준히 지속하면 언젠가 구름이 완전히 거칩니다. 그리고 본래부터 빛나던 불성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전의의 완성입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부터 시작하세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한번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오늘 한번 자비심을 내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오늘 한번 경전을 읽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이 작은 시작이 당신의 아래식에 좋은 종자를 심습니다. 그리고 그 종자는 반드시 싹을 키웁니다. 물 한 방울씩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듯이 하루하루에 작은 수행이 모여 깨달음을 이룹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변화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씨앗은 땅 속에서 보이지 않게 자라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싹을 띄우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당신의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꾸준히 좋은 종자를 심으세요. 매일매일 훈습하세요. 그러면 언젠가 당신도 전일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전환되는 그 놀라운 순간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날까지 함께 정진합시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송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암아미타불 관세음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