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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평생 찾던 ‘진짜 나’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법정 스님 말씀1:35:49

Transcription

존경하는 법부님들, 혹시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아마도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계시거나 따스한 방 안에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앉아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잠시만요. 그 화면을 바라보고 그 차를 마시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혹시 지금 여러분이 느끼는 그 알 수 없는 허전함, 그 깊은 외로움의 뿌리가 바로 이 질문에 숨어 있음을 아셨습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입고 있던 여러분 안에 숨겨진 진짜 보물을 찾을 것입니다. 이 영상을 끝까지 함께 해 주시면 당신의 남은 삶이 더는 외롭지 않고 매 순간이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자, 그럼 마음에 문을 열고 저와 함께 고요한 깨달음의 여정을 떠나 보시겠습니까?

1. 문제의 시작. 외로움과 나라는 이름의 굴레.

많은 분들이 저에게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스님, 나이가 드니 부쩍 외로워집니다. 젊을 때는 바쁘게 사느라 몰랐는데 이제는 다 내려놓고 나니 [음악] 문득 허전하고 내가 누구였던가 싶어 마음이 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름이 있고 직업이 있고 가족이라는 끈으로 엮여 살았던 그 지난 세월에 나는 분명했습니다. 사업가로서, 교사로서, 누군가의 배우자로서, 자식들의 부모로서 우리는 저마다의 역할 속에서 충실하게 살아왔지요.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이름표를 내려놓고 그 관계의 끈을 잠시 놓아두었을 때 우리는 문득 거울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낯선 나와 마주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였던가? 지금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이라는 큰 무대에서 더는 주연이 아닌 듯한 이 느낌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선종의 한 스승이 제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태어나기 전, 내 부모가 태어나기도 전, 하늘과 땅이 생기기도 전, 그때 너는 누구였느냐?" 제자는 10살이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름 석 자를 벗어버리고 평생을 바쳤던 직함을 내려놓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가족과의 관계까지도 잠시 잊었을 때, 그때도 여전히 우리 안에 굳건이 남아 있는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립니다. 지금까지 나를 정의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마치 빈 껍데기만 남은 거 같은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내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는 물음들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들어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외로움은 특히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우리 벗님들에게 더욱 깊이 다가옵니다. 젊은 날의 활력과 빛나는 성취들이 마치 꿈처럼 아스라이 사라지고 몸은 병들고 쇠약해지며 사랑했던 이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갈 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과 고독감에 젖게 됩니다. 마치 텅 빈 강가에 홀로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일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홀로 남았구나. 내 인생은 이제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하는 막막함 속에서 많은 분들이 길을 잃고 [음악] 헤매곤 합니다.

이처럼 내가 누구인지, 내 존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갈증은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불안의 근원이 됩니다. 이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외로움과 혼란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육조해능 대사는 육조단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성은 본래 청정하니, 다만 이 마음을 쓰면 곧 부처를 이루리라." 여기서 '본래 청정하다'는 말씀이 바로 우리 모두의 본래 면목을 가르칩니다. 본래 면목이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참된 모습, 즉 불성을 의미합니다. 마치 거울이 먼지가 쌓여도 본래의 맑음을 잃지 않듯이 우리의 마음도 온갖 번뇌와 망상에 덮여 있을 뿐, 본질은 언제나 맑고 깨끗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맑고 깨끗한 본래 면목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자신을 찾으려 헤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느끼는 그 외로움과 고통은 사실 이 본래 면목을 찾아 달라는 우리 안의 깊은 울림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 울림에 귀 기울일 시간입니다.

2. 내면의 갈등, 찾아 헤매는 마음의 역설.

우리는 매일 거울을 봅니다. 거울 속 얼굴은 날마다 조금씩 변합니다. 젊음은 늙음으로, 건강은 병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때로는 주름이 늘고 머리칼이 휘어지며 기억력은 흐려지고 관절은 시큰거립니다. 이 모든 변화를 우린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며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 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것은 과연 변화할까요? 열 살 때도, 30살 때도, 그리고 지금 이른 살, 여든 살이 되어도 그 변화를 알아차리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때로는 아파하는 그 무엇은 늘 한결 같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우리의 본래 면목입니다. 변치 않는 영원한, 깨끗한 존재의 근원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 변치 않는 진실을 놓치고 늘 변하는 겉모습과 감정에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건강했을 때는 저런 일도 거뜬히 해냈는데, [음악] 그때는 내 곁에 가족과 친구들이 북적였는데" 하는 과거의 영화에 집착하거나, "앞으로 더 늙으면 어쩌지? 병이라도 들면은 자식들에게 짐이 될 텐데, 이 외로움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혀 현재를 온전히 살지 못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덫에 갇혀 정작 가장 중요한 지금 이 순간의 나, 변치 않는 나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헤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겪는 내면의 가장 큰 갈등이며 외로움과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우린 행복을 찾아, 평화를 찾아, 외로움을 달래줄 무엇인가를 찾아 끊임없이 바깥을 헤매고 다닙니다.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할까? 자식들이 더 잘되면 마음이 편안할까? 좋은 사람을 만나면 이 고독이 사라질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 헤매는 그 행복과 평화의 근원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없는 곳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중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만들어낸 가장 큰 역설이자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함정입니다.

옛 선방에서는 조실 스님들이 이런 화두를 던지곤 했습니다. "나는 빈손으로 왔다. 무엇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까?" 한 수행자가 조주 선사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스님, 저는 빈손으로 왔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조주 선사가 답했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으시오." 수행자가 의아하여 다시 물었습니다. "빈손으로 왔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입니까?" 그러자 조주 선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가져가시오."

이 짧은 대화 속에 본래 면목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빈손'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선사는 그 '빈손'이라는 관념조차도 내려놓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움켜지고 있는 것은 비단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나는 외롭다는 생각", "나는 불행하다는 생각", "나는 늙고 병들었다는 생각", "나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굳게 쥐고 놓지 못하는 관념들입니다. 이 관념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참된 모습,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이 있는 충만한 본래 면목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3. 지혜의 가르침, 불성과 본래 면목에 대한 깨우침.

불교의 핵심 가르침 중 하나는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불성이란 말 그대로 부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불성은 특정 종교인들만 가지고 있거나 깨달음을 얻은 성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조해능 대사의 말씀처럼 이 불성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청정한 본성입니다. 마치 씨앗 안에 거대한 나무의 모든 잠재력이 숨어 있듯이 우리 안에는 이미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이라는 흙먼지에 덮여 보석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본래 면목은 무엇일까요? 본래 면목은 바로 이 불성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변치 않는 우리의 참된 얼굴, 즉 본래의 자성을 의미합니다. 마치 거울이 먼지가 쌓여 탁해 보여도 그 거울의 본질은 언제나 맑고 투명하듯이 우리의 마음 또한 번뇌와 망상, 슬픔과 기쁨, 분노와 욕망이라는 온갖 감정과 생각으로 인해 잠시 가려져 있을 뿐, 그 근원적인 바탕은 언제나 맑고 깨끗합니다. 이 본래 면목은 그 어떤 이름이나 직업, 성별이나 나이, 심지어 우리의 몸이나 마음과도 구별되는 순수한 존재 자체입니다.

이 본래의 면목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 법부님들 중 많은 분들이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가치가 사라졌다고 느끼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역할도 사라지고 육체적인 능력도 예전 같지 않고 자식들도 이제 독립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가니 문득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밀려올 때가 있지요. 이러한 생각은 고독과 허무함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어떤 조건도 없이, 그 어떤 역할도 없이, 그 어떤 육체적인 상태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본래 면목이며 그 안에 우리의 진정한 가치와 무한한 잠재력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옛 선사들은 본래 면목을 찾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자들을 이끌었습니다. 달마 대사가 중국에 와서 9년 동안 소림사의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그저 벽만 바라보는 이상한 승려라고 생각했지만, 달마 대사는 사실 벽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 마음에 가장 깊은 근원, 즉 본래 면목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혜가 스님이 달마 대사를 찾아와 "스승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스승님,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을 때, 달마 대사는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라. 내가 편안하게 해 주리라." 하고 답했습니다. 혜가 스님은 한참을 찾았지만 결국 그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찾아보니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달마 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편안하게 해주었느니라." 이 순간 혜가 스님은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그 마음이 바로 본래 면목을 가리고 있는 환영일 뿐, 환영을 놓아 버리면 본래의 평화로운 마음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안에 번뇌와 불안, 고통은 그 실체를 잡으려 할수록 더욱 커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 실체가 없음을 깨달을 때 모든 그림자는 사라지고 본래의 빛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4. 고요함을 찾는 여덟 가지 발자국, 본래 면목을 향한 수행.

이제 우리 안에 본래의 면목을 찾아가는 구체적인 여정에 대해 이야기해 볼 시간입니다.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을 넘어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여정은 그리 특별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법부님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평범하고도 강력한 수행법들입니다. 제가 제시하는 여덟 가지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의 평화와 충만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발자국: 무엇인가? 화두 들기.

선방에서는 좌선할 때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듭니다. 지금 이 글을 듣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맛있는 차를 마시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창밖에 비바람 소리를 듣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답을 찾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개념에 갇힌 생각일 뿐, 본래 면목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그저 우리의 마음을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리로 이끄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보세요. "지금 이 순간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두 번째 발자국: 평상심으로 돌아가기.

어떤 사람이 남전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평상심으로 돌아가는데, 어떻게 하면 평상심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남전 선사는 답했습니다. "얻으려 하면 이미 평상심이 아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라." 너무나 단순한 답변에 그 사람은 의아했습니다. [음악] "그것은 누구나 하는 일 아닙니까?" 남전은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천 가지 생각을 하고 잠을 잘 때 만 가지 꿈을 꾼다." 평상심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밥 먹는 그 순간, 차 마시는 그 순간, 걷는 그 순간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지요.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평범한 일에 온전히 집중하십시오. 설거지를 할 때는 그릇과 물, 그리고 손의 감촉에만 집중하고, 걸을 때는 발바닥과 땅의 접촉에만 온 마음을 두세요.

세 번째 발자국: 생각의 소음 내려놓기.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거의 후회, 미래의 걱정, 타인과의 비교, 불만과 욕망.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생각의 소음에 우리는 본래 면목의 고요한 빛을 보지 [음악] 못합니다. 무심(無心)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분별하는 마음, 끊임없이 대상을 만들고 판단하는 마음을 쉬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생각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그저 바라보세요. "아, 이런 생각이 떠올랐구나." 하고 관찰하되, 그 생각의 내용에 따라가지 마십시오. 마치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듯이 생각 또한 그렇게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연습을 해 보십시오.

네 번째 발자국: 감각으로 현재 머무르기.

우리 몸의 감각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혀로 맛보는 것, 몸으로 느끼는 것. 이 모든 감각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 온전히 머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음악] 차를 마실 때 그 차의 따스함, 향기, 맛에 온전히 집중하십시오. 길을 걸을 때 발바닥에 닿는 땅의 감촉, 스치는 바람, 들려오는 새 소리에 마음을 열어 보세요. 손주가 곁에 있다면 그 작은 손을 잡았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에 온전히 머무세요. 이 감각들은 우리를 과거와 미래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현실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

다섯 번째 발자국: 자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운문 선사가 대중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빛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찾으면 보이지 않는다."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빛을 볼 수 있습니까?" 운문은 답했습니다. "부엌과 화장실." 얼마나 평범한 답인지요. 그러나 이 평범함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 부엌에서 설거지 하는 그 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그 몸, 그것이 바로 불성의 작용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히말라야 산행이나 깊은 산속 동굴에서 찾으려 하지만, 조사들은 말합니다. "내가 서 있는 바로 그곳이 도량이고, 내가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정토다." 집 앞 작은 화단에 피어난 꽃 한 송이,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의 구름 한 조각, 새벽녘에 들려오는 새 소리. 이 모든 자연의 현상 속에서 우리는 본래 면목의 신비로운 작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가장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 속에서 고요히 자신을 관찰하며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는 가운데 변치 않는 나의 본질을 느껴 보세요.

여섯 번째 발자국: 비움과 내려놓음의 연습.

조주 선사는 '무(無)'라는 한 글자로 천 년 넘게 수많은 수행자들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무인가? 있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것도 아닌 그 너머에 무엇인가. 우리는 "나는 의사다. 나는 교사다. 나는 부모다."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역할입니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불자다."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하나씩 벗겨내면 무엇이 남을까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남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심의 경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관념,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놓아주듯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생각과 감정들을 놓아 주세요. "나는 외롭다는 생각"도 놓아주고, "나는 불행하다는 생각"도 놓아주세요. 텅 비우고 나면 그 텅 빈 공간에 본래의 충만함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발자국: 일상을 성스러운 순간으로 바꾸기.

대주 선사를 찾아온 한 수행자가 물었습니다. "저는 처자식이 있고 직장이 있습니다. [음악] 어떻게 하면은 이런 속세에서도 수행할 수 있습니까?" 대주 선사는 답했습니다. "처자식을 버리지 말고 직장을 그만두지 말라. 아이를 안을 때 온전히 안고, 일할 때 온전히 일하라. 그것이 수행이다." 우리는 수행과 일상을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절에 가서 절하고 경전 읽는 것만이 수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선종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설거지 하는 그 손길이 부처의 손이고, 아이를 재우는 그 자장가가 부처의 설법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 하나하나의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때, 그 순간은 거룩한 수행의 시간이 됩니다. 매일 뜨는 해를 영혼을 다해 보고, 매일 먹는 밥 한 그릇에서 우주의 이치를 맛보세요.

여덟 번째 발자국: 감사와 사랑으로 마음 채우기.

외로움과 고독은 종종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누군가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본래 면목은 이미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무언가를 갈구하지 않게 됩니다. 대신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숨을 쉬는 것,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것, 창밖을 보는 것. 이 모든 평범한 순간들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깨달을 때 우리의 마음은 감사로 충만해지고 외로움의 그림자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가득 차 있는 본래 면목의 빛입니다. 그 빛을 스스로 발견하고 세상 모든 존재에게 비춰주는 연습을 해보세요.

5. 뜻밖의 깨달음, 찾는 자가 곧 찾는 그것이다.

자, 지금까지 우리는 본래 면목을 찾아가는 여덟 가지 발자국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 가지 뜻밖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본래 면목을 찾기 위해 애쓰고 수행하고 노력해 왔을 것입니다.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아 험난한 산길을 헤매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찾는 자가 곧 찾는 그것'이라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파도가 바닷물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 자체가 물인데 자신을 [음악] 물과 분리된 별개의 존재로 착각하고 물을 찾아 먼 바다를 헤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지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이 몸과 마음으로 본래 면목을 찾으려 하지만, 사실은 그 찾는 '나' 자체가 이미 본래 면목의 작용입니다. 숨 쉬고, 생각하고, 느끼고, 이 모든 글을 듣고 이해하는 그 주체가 바로 우리가 찾아 헤매던 그 본래 면목이란 말입니다.

임재 선사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금 내 앞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그대가 바로 부처다."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번뇌에 가득 찬 자신들이 어떻게 부처란 말인가?" 그러나 임재 선사는 단호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 지금 여기서 듣고 보고 느끼는 그것이 바로 불성이다." 우리는 부처가 되기 위해 오랜 시간 수행해야 하고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사들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이미 완전한 것을 완전하다고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전부라고 말합니다. 마치 황금으로 만든 불상을 진흙으로 덮어 놓고는 황금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진흙만 씻어내면요. 황금은 이미 거기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나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괴로움은 사실 이 찾는 행위 그 자체가 만들어낸 환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것을 어떤 고정된 실체로 생각하고 그 '나'를 완성하기 위해 무언가를 더하고 빼려 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면목은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완전한 그 자체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니 무엇을 더해야 할까요? 흠결이 없으니 무엇을 드러내야 할까요? 그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숨 쉬고 있는 그대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는 그대로, 손끝으로 온기를 느끼고 있는 그대로가 바로 본래 면목입니다.

한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내 본래 면목을 보여다오." 제자가 합장하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배운 것이다." 제자가 합장을 풀자 스승은 또 말했습니다. "그것도 내가 배운 것이다." 제자는 당황했습니다. "그럼 무엇이 본래 면목입니까?" 스승이 미소지었습니다. "당황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습니다. 생각 이전에 그것, 분별 이전에 그것, 감정 이전에 그것.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잡을 수도 없는 그 생생한 지금 이 순간의 현존이야말로 본래 면목의 가장 선명한 표현입니다. 이 깨달음은 마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나는 것처럼 우리의 시야를 완전히 바꿔 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외로움 속에서 헤매지 않고,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6. 고요한 발견, 삶의 모든 순간이 수행이며 치유다.

우리는 지금까지 본래 면목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본래 면목을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여정을 함께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여정을 잠시 멈추고 지나온 일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찾아 헤매던 진정한 나는 멀리 떨어진 신비로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숨 쉬고 있는 여러분 자신 안에 늘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듯, 허공에서 공기를 찾듯 어리석게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 헤맸던 것이지요.

선종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합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완전한 것을 완전하다고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마치 황금으로 만든 불상을 진흙으로 덮어 놓고는 황금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진흙만 씻어내면 황금은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번뇌와 망상, 고통과 외로움이라는 진흙을 거둬내면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본래 면목이라는 황금이 저절로 빛을 바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불필요한 것을 놓아 버리면 됩니다.

백은 선사가 마조 선사를 찾아갔을 때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마조 선사가 갑자기 그의 코를 비틀었습니다. "아야!" 백은이 소리를 지르자 마조가 말했습니다. "아파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 순간 백은은 깨달았습니다. 생각 이전에 그것, 분별 이전에 그것을 만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음악]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순간, 심지어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본래 면목의 작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그 아픔을 알아차리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이라는 뜻입니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그것을 관찰해 보세요. 그러면 외로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너머에 변치 않는 '나'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생각 속에 살아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할 일을 생각하고, 어제의 실수를 후회하고, 내일의 불안을 걱정합니다. 이 끊임없는 생각의 흐름이 우리를 본래 면목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무심(無心), 무심(無心)을 말합니다.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마음, 즉 대상을 만들고 판단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쉬는 것입니다. 임재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든 관념 속에 부처, 개념 속에 조사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진짜 본래 면목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어떤 이미지나 개념으로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우리 벗님들의 외로움과 고통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외로움은 되게 '나'라는 존재가 다른 존재들과 분리되어 있다고 [음악] 느끼는 데서 옵니다. 하지만 본래 면목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 또한 그 그물망의 한 부분이며,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될 때 더 이상 고립감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이, 심지어 고통과 슬픔까지도 본래 면목을 깨닫는 수행의 과정이며, 그 과정 자체가 우리를 치유하고 성장시키는 귀한 선물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깨달음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깨달음이 우리의 남은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고요한 평화로 이끄는지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해 볼 것입니다.

7. 존재의 껍질 벗겨내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인류가 스스로에게 던져온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물음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름표를 달고 살아갑니다. 철수, 영이, 김노인, 이 할머니. 그리고 사회는 우리에게 다양한 역할과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나는 의사다. 나는 교사다. 나는 기업가다." 또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불자다.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같은 정체성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이러한 이름과 역할이 나를 분명하게 해주고 삶의 목표와 의미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밤 늦도록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나는 분명 강하고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사회적인 역할에서 물러나면서 우리는 문득 이 모든 이름표와 정체성이 벗겨져 나가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은퇴하고 나니 더 이상 대표님이나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사라지고, 자식들이 독립하고 나면 부모님이라는 역할도 점차 힘이해집니다.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면은 누군가의 짝이라는 정체성마저 사라집니다. 이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과 함께 존재론적인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남는가? 마치 가을날 낙엽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처럼 텅 빈 존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경험은 특히 홀로 남으신 어르신들에게 더욱 큰 외로움과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구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구나.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아무도 모를 텐데." 하는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지위나 역할, 심지어 건강이나 젊음까지도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들이 사라질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모든 이름표와 정체성, 그리고 변화하는 몸과 마음은 진정한 '나'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것들은 마치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나 가면과 같아서 본래의 자신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동산 선사가 시냇물을 건너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속에 그림자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고, 나는 그이면서 그가 아니다." 이 역설적인 깨달음이 바로 무심(無心)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도 없고, '나 아닌 것'이라고 분리할 것도 없는 경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 면목이라는 것입니다.

한 젊은 승려가 노수성에게 물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스승은 답했습니다. "마음은 본래 깨끗한데, 무엇을 닦는단 말이냐?" 다시 젊은 승려가 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스승은 간단히 말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이 수행이다." 이 대화는 우리가 '나'라는 고정된 관념에 갇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들고 고치려 하는 어리석음을 일깨워 줍니다. [음악] 진정한 '나'는 이미 완전하고 청정하기 때문에 굳이 무엇을 더하고 빼거나 닦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나'라고 이름 붙인 모든 껍질들을 벗겨내고 나면 본래에 빛나는 자성이 저절로 드러날 뿐입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가 겪는 외로움과 상실감을 근원적으로 치유하고 남은 삶을 고요한 평화 속에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8. 무심의 경지, 영원한 자유와 평온으로 가는 길.

'무심(無心)', '무심(無心)'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혹시 아무 생각 없는 바보 같은 상태를 떠올리시지는 [음악] 않으셨는지요? 그러나 선종에서 말하는 무심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맑고 깨어 있으면 가장 높은 지혜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무심은 끊임없이 대상을 만들고 판단하고 집착하는 분별심을 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본래 맑고 투명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그 어떤 진흙에도 물들지 않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듯이, 무심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번뇌와 고통에 끌려다니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온갖 생각과 감정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됩니다. 과거의 기억에 붙들려 후회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걱정하며, 타인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때로는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거나 욕심을 부립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분별심의 작용입니다. 이러한 분별심은 특히 우리 벗님들에게 깊은 외로움과 고독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참 좋았는데,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혼자 남았을까?" 하고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고 비교하며 현실의 외로움을 더욱 깊게 느낍니다.

하지만 무심의 경지에 이르면 이러한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선방에서는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한 수행자가 10년 동안 좌선을 했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실망하여 절을 떠나려는데 문지방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아!" 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그는 10년 동안 찾던 것을 찾았습니다. 생각이 끊어진 그 찰나, 분별이 사라진 그 순간, 본래의 면목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깨달음이 결코 특별하거나 신비로운 체험이 아니며, 우리가 평소에 놓치고 있던 지극히 평범한 순간 속에 숨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생각과 분별이 멈추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본래 면목은 저절로 빛을 바라는 것입니다.

운문 선사가 법문을 하는데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생각을 쉬면은 무엇이 됩니까?" 운문이 답했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것은 평범한 일 아닙니까?" 운문은 대답했습니다. "평범한 줄 아는 자가 몇이나 되겠느냐?" 우리는 특별한 것을 찾습니다. 신비한 체험, 초자연적인 능력, 황홀한 경지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무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차를 마실 때 차의 향기를 온전히 느끼는 것. 꽃을 볼 때 꽃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무심입니다. 황벽 선사가 말했습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다." 이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이해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분별심입니다. 그저 이 순간 이 글을 읽는 그대로 머물러 보십시오. 아무것도 더하지 말고, 아무것도 빼지 말고, 그저 이 순간의 존재 자체에 머무는 것. 이것이 바로 무심의 경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무심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자유와 평온을 선사합니다. 세상의 모든 번뇌와 고통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맑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이 자유와 평온이야말로 우리 벗님들이 외로움과 고독에서 벗어나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입니다.

9. 일상 속에 깨달음, 평범함 속에 숨겨진 보물.

많은 분들이 깨달음이라고 하면 마치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 혹은 깊은 산 속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하듯 특별한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선사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깨달음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평범함 속에 보물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거사가 약산 선사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약산 선사가 하늘을 가리키고 다시 물병을 가리켰습니다. 거사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자 약산이 말했습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못합니다. 구름을 보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고, 물을 보면서 다른 것을 원합니다. 구름을 보며 "아, 저 구름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넘어 "저 구름이 곧 사라지겠지" 하며 무상함을 느끼고 "내 인생도 저 구름처럼 덧없구나" 하며 외로움에 젖기도 합니다. 물병을 보면서도 "이 물로 목을 축여야지" 하는 생각을 넘어 "내 목마름은 이 물로 채워질 수 있을까?" 하는 근원적인 갈증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항상 우리의 생각과 감정, 욕망이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 필터가 우리의 본래 면목을 가리고 외로움과 고통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주범이 됩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바로 이 필터를 걷어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무문 선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봄에는 백화가 피고, 가을에는 달이 뜨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눈이 내린다. 만약 한가한 일로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이 인간의 좋은 시절이다." 여기서 '한가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쓸데없는 분별, 불필요한 걱정, 끊임없는 비교,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한가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은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봄에는 꽃이 피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가을에는 달이 뜨는 것을 그저 즐기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을 그저 느끼고, 겨울에는 눈 내리는 것을 그저 감상하는 것. 여기에 그 어떤 판단이나 집착도 더하지 않는 것이 평상심이자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한 노승이 대나무 숲을 거닐다가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대나무를 보아라."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네. 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푸른 대나무가 보입니다." 노승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내 생각이다. 다시 보아라." 제자는 한참을 보다가 말했습니다. "그냥 이것이 보입니다." 노승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보는구나." '푸른 대나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이미 우리의 생각과 개념이 개입된 것입니다. '그냥 이것'이라고 보는 순간 우리는 생각 이전에 순수한 존재 자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 법부님들의 일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늙었구나" 하는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내 얼굴이 여기에 있구나" 하고 관찰해 보세요. 식사를 할 때 "맛있다", "맛없다"는 판단을 잠시 미루고, 그저 혀끝에서 느껴지는 맛의 감각에 온전히 집중해 보세요. 혼자 앉아 있을 때 외롭다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말고, 그 외로움을 느끼는 '나'라는 존재 자체에 고요히 머물러 보세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처럼 '그냥 보는 연습', '그냥 느끼는 연습'을 꾸준히 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그 속에 숨겨진 본래 면목의 빛나는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물은 우리에게 더없는 평화와 충만함을 선사할 것입니다.

10. 무심의 자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이.

무심의 경지는 마치 겨울에 얼음이 녹아 봄의 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꽁꽁 얼어붙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분별과 집착의 얼음이 녹아내리면은 물처럼 자유롭고 유연하게 흐르는 마음이 됩니다. 얼음은 형태가 고정되어 있어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지만, 물은 그 어떤 그릇에도 담길 수 있고 높은 곳에서는 낮은 곳으로 흐르며 바위틈을 비집고 나아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심이 선사하는 궁극적인 자유입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이와 같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걸 해야 해. 나는 저 사람보다 잘나야 해. 나는 저 사람보다 불행해." 같은 온갖 고정된 생각과 관념들이 우리를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의 틀에 갇혀 끊임없이 자신을 제안하고 타인과 비교하며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려 합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이 옳다고 굳게 믿게 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굳어짐은 우리를 외로움과 고독의 얼음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하지만 무심의 수행을 통해 분별심이라는 얼음이 녹아내리면 우리의 마음은 물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워집니다. 세상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타인의 다름을 이해하며 자신의 감정조차도 흘러가는 강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슬픔이 오면 슬픔을 느끼고 기쁨이 오면은 기쁨을 느끼되 그 감정에 휩쓸려가지 않고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로운 마음이며, 이 자유로운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원천입니다.

석두 선사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주장자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느냐?" 제자들이 어리둥절해하자, 석두가 주장자를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늘이 가려진다." 제자들이 웃자 석두가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하늘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고 주장자가 너무 작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분별심이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눈앞에 작은 문제나 걱정거리로 인해 거대한 행복의 하늘을 스스로 가리고 살고 있습니다. "나는 외로워. 나는 아파. 나는 늙었어."라는 작은 생각의 주장자로 우리 안에 무한한 가능성과 평화의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이죠.

무심은 차별이 없는 마음입니다. 크고 작음, 높고 낮음, 좋고 나쁨의 분별이 사라진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똑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낮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과 쉬든 꽃, 건강한 몸과 병든 몸, 젊음과 늙음. 이 모든 차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외로움과 고통이 찾아올 때,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판단하거나 피해야 할 것이라고 저항하지 않고, 그저 "지금 여기에 외로움이 있구나. 지금 여기에 아픔이 있구나." 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무심의 차별 없는 마음입니다.

이런 무심의 자유를 얻게 되면은 우리 벗님들의 남은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이라는 굴레에 갇히지 않고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에 흔들리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더욱 자유롭고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세상과 하나되는 충만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고요한 자유 속에서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 분별을 넘어선 깨달음, 조주 선사의 고양이 일화.

선종의 가르침 중에는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일화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깊은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남전 선사가 두 제자의 다툼을 중재하던 고양이 일화가 바로 그러한 예시입니다.

동쪽 선빵과 서쪽 선빵의 수자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기며 크게 다투었습니다. 참다 못한 남전 선사가 고양이를 들고 말했습니다. "누구든 한 마디 하면은 이 고양이를 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두 동강 낼 것이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남전 선사는 고양이를 두 동강 내고 말았습니다. 저녁에 조주 선사가 돌아오자 남전 선사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조주 선사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 버렸습니다. 남전 선사는 탄식했습니다. "조주가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렸을 것을."

이 일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줄까요? 고양이를 두 동강내는 잔인한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바로 분별과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에 있습니다. 고양이를 살릴 수 있는 한마디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고양이를 살려 주세요"와 같은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선사들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가진 이분법적인 사고, 즉 "이것이 옳다. 저것이 틀리다. 이것이 내 것이다. 저것이 내 것이다." 하는 분별심 자체를 깨뜨리라는 요구입니다. 고양이를 살린다, 죽인다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선 차원의 대답이 필요했던 것이죠.

조주 선사의 행동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신발은 발에 신는 것인데 머리에 써야 한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깬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통념, 우리가

옳다고 굳게 믿는 모든 기준들을 뒤집어 버린 행동이죠. 이처럼 절심에 사로잡혀 내 고향이라는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며 다투는 순간 생명은 고통받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반면 모든 분별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과 생명이 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일하는 우리 법부님들의 삶에도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 굳건해지는 자신만의 생각과 고집에 갇치기 쉽습니다. 내 자식은 이래야 해. 내 인생은 일했어야 했는데 세상은 이렇게 변하면 안 돼. 하는 고정관념들이 우리를 외로움과 고통 속에 가두고 젊은 세대들과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내 것이 옳다는 분별심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로막고 결국 우리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조주 선사의 가르침처럼 이러한 분별심을 내려놓고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연습을 한다면은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늙고 병들었다는 생각. 나는 외롭다는 생각.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

이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신발을 머리에이고 다니는 것과 같은 고정관념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굴래에서 벗어나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외로움은 사라지고 삶의 모든 순간이 충만한 깨달음의 장이 될 것입니다.

12. 평범함으로 회기 깨달음 이후의 삶. 깨달음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특별한 능력을 얻거나 신비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상상합니다. 하늘을 날거나 물위를 걷거나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을 기대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선종의 가르침은 이러한 환상과는 거리갑니다. 진짜 깨달음은 평범함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산은 다시 산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됩니다. 다만 [음악] 그 산과 물을 보는 눈이 달라질 뿐이지요.

조주 선사가 노년에 이르러 한 젊은 수행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조주 선사는 답했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 나른다. 젊은 수행자는 의하여 다시 물었습니다. 그것은 깨닫기 전에도 하던 일 아닙니까? 조주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래. 하지만 이제는 알고 한다.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요? 나무를 하는 것이 부처의 일이고 물을는 것이 조사의 일임을 아는 것입니다. 즉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모든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현장이자 불성을 실천하는 자리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법부님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었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더 많은 것을 이루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애었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이 모든 것이 부지럽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외로움과 허무함이 찾아들곤 하지요. 하지만 깨달음은 이러한 허무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무함조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줍니다. 더 이상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지금이 순간에 평범한 삶을 온전히 누리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저녁에 가족과 대화하는 것 그 일상의 모든 순간이 바로도 나가 되는 것입니다.

문문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상심이 돈이라 조작하지 말고 시비하지 말며 취사하지 말고 담하지 말라. 평상심이란 무엇일까요? 꾸임없이, 판단 없이 좋고 실름 없이 그저 지금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살아간 마음입니다. 혼자 계시는 버부님들도이 평범함 속에서 깨달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홀로 앉아 차를 마실 때 그 차의 온도와 향기 맛에 온전히 집중해 보세요. 창밖을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낄 때 아름답다. 슬프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풍경 자체에 머물러 보세요.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 할 때 설거지하는 손의 움직임 청소하는 몸의 감각의 의식을 두어 보세요. 이처럼 모든 일상의 순간을 의식적으로 온전히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속에서 본래 면목의 빛을 발견하고 외로움이 아닌 충만함을 [음악] 느끼게 될 것입니다.

깨달음 이후의 삶은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 더 깊고 풍요롭게 느껴질 뿐입니다. 길가에 작은 풀 한포기에서도 우주의 신비를 보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된 평화와 기쁨을 발견하고 삶의 모든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외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와 [음악] 행복을 얻는 길입니다.

13. 삶은 수행이다. 일상에서 꽃 피우는 지혜. 우리는 종종 수행이라고 하면 절에 들어가서 정죄하고 염불하거나 경전을 읽는 것만을 떠올립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수행의 한 부분이지만 선종에서는 우리의 일상 생활 자체가 가장 위대한 수행의 장이라고 가르칩니다. 숨 쉬고 밥 먹고 걷고 말하는 모든 순간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쁜 세월 보내고 이제는 다소 한가해진 우리 부부님들에게는이 일상속 수행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한재가 수행자가 대주 선사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저는 처자식이 있고 직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속세에서도 수행할 수 있습니까? 대주 선사는 답했습니다. 처자식을 버리지 말고 직장을 그만두지 말라. 그럼 어떻게 수행합니까? 아이를 안을 때 온전히 앉고 일할 때 온전히 일하라. 그것이 수행이다.이 대답은 우리에게 큰 깨우침을 줍니다. 우리는 수행과 일상을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지만은 대주선사는 그 둘이 [음악] 결코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설거지하는 그 손길이 부처의 손이고 아이를 재우는 그 자장가가 부처의 설법입니다.이 이 말은 어떤 특정 행위가 신성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든 온전히 그 순간에 몰입할 때 그 행위 자체가 수행이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이 순간 여러분이 차를 마시고 있다면 오직 차를 마시는 행위에만 집중하세요. 따뜻한 차가 입술에 닿는 감촉,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따스함, 차의 향기, 그리고 차의 맛에 온전히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오직 지금 여기에 차한잔에 몰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판산 선사가 시장을 지나가다가 부착관 앞에서 멈춰섰습니다. 한 손님이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좋은 고기로 한 근만 주시오. 주인이 칼을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음악] 우리 가게의 고기 중에 좋지 않은 고기가 어디 있단 말이요?이 이 말을 듣는 순간 판산 선사는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완전하다는 것을 좋은 고기, 좋지 않은 고기라고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뿐 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의 외로움과 고독감을 치유하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부족한 존재,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끼며 외로움에 빠집니다. 젊지 않아서 돈이 없어서 병이 있어서 등 온갖 이유를 들어 자신을 부족하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판산 선사의 깨달음처럼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귀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돈이 많든 적든 그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우리의 벌레 면목은 늘 완전하게 빛나고 있습니다.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외부의 시선이나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에 충만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일상을 수행의 장으로 삼으십시오. 밥 먹는 것, 걷는 것, 청소하는 것, 심지어 홀로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것까지이 모든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러면 일상의 모든 순간 속에서 본래 면목의 빛을 발견하고 외로움이 아닌 깊은 평화와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삶은 이처럼 매순간 우리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선서하는 가장 위대한 스승입니다. [음악]

14. 고통과의 화해. 지하철 속의 깨달음. 많은 현대인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고통과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특히 도시에서 생활하는 분들은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큰 피로감을 느낍니다. 분비는 사람들, 소음, 답답한 공기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에 시달리고 마음은 더욱 불안해집니다. 이러한 일상의 고통은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를 더욱 작고 나약하게 만들고 깊은 외로움과 고독감에 빠지게 하기도 합니다.

어느 도시의 직장인이 선사를 찾아와 하소연했습니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데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사람들에게 치이고 소음에 시달리고 숨이 막힙니다. 선사가 물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 무엇을 합니까? 직장인이 답했습니다. 휴대폰을 보거나 음악을 듣습니다.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것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지하철을 탈 때는 지하철을 타십시오. 다음날 그 직장에는 휴대폰을 끄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흔들리는 몸을 그대로 두고 들려오는 소리를 그대로 들었습니다. 놀랍게도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음이 느껴졌습니다.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상황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저항과 판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하철을 타면서 휴대폰을 보는 것은 지하철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무식적인 노력입니다. 그러나 그 도피가 오히려 고통을 더 깊게 만듭니다.

우리 법부님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실 때가 많을 것입니다. 몸이 아플 때 그 아픔 자체보다이 아픔은 없어져야 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왔을까 하는 생각과 저항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나는 외로워선 안 되는데 외로움을 피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외로움을 더욱 커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지하철 직장인의 이야기처럼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주할 때 우리는 뜻밖에 평화와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임재선사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도에 이르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다. 나만 평상심으로 똥 누고 오줌 누며 옷집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을 안다. 똥 누는 것이 어떻게 도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순간만큼 우리가 완전히 현재에 머무는 때가 있습니까? 그 어떤 생각이나 판단도 없이 오직 몸의 자연스러운 작용에만 온전히 몰입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고통스러운 순간들은 사실 깨달음으로 가는 문이 될 수 있습니다. 아픔이 찾아오면 그 아픔을 거부하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그 아픔의 감각에 온전히 집중해 보세요. 외로움이 찾아오면 그 외로움을 느끼는 나라는 존재 자체에 고요히 머물러 보세요. 그러면 놀랍게도 그 고통과 외로움의 실체가 점차 사라지고 그 너머에 있는 고요한 평화와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과의 화해이며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자신 안에 본래 면목을 발견하는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15. 수행의 본질 쌀 씻는 부처님. 우리는 수행을 너무 거창하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님들이나 하는 일 혹은 일상과는 동떨어진 신성한 행위라고 여기죠. 그러나 불교 특히 선종의 가르침은 수행이 결코 우리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우리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바로 가장 위대한 수행의 장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본래 면목을 발견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 주부가 절에 와서 스님께 물었습니다. 집안일이 너무 많아 수행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님이 다 폈습니다. 쌀을 씻을 때 쌀을 씻는 것이 수행입니다. 주부는 의아하여 물었습니다. 그것은 그냥 집안일 아닌가요? 스님은 미소지며 말했습니다. 부처님도 바로를 씻었습니다. [음악]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밥그릇을 손수 씻으셨다는 이야기지요.이 작은 일화 속에는 수행의 본질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그 주부는 집에 돌아가 쌀을 씻었습니다. 스님의 말씀대로 그 순간 쌀 씻는 행위에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물에 씻기는 쌀랄 하나하나가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찬물의 차가움이 손끝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주부는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이 수행이구나. 매일 반복되던 지루하고 고된 집안일이 이제는 깨달음으로 가는 성스러운 의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히 현재에 머무는 삶의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몰입할 때 그 일은 더 이상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맑고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수행이 됩니다. 설거지를 할 때 그릇에 매끄러운 감촉, 물의 온도, 거품이 부드럽게 일어나는 모습을 관찰하세요. 빨래를 넣을 때 옷감의 부드러움, 바람에 흔들리는 옷의 움직임, 햇볕에 따함을 느껴 보세요. 식사를 준비할 때 채소를 써는 소리, 재료의 색깔과 향기, 요리하는 과정 자체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특히 홀로 계신 버부님들에게는 이러한 일상속 수행이 더욱 큰 위안과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은 종종 우리가 할 일이 없거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없을 때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일상의 모든 순간을 수행으로 삼는다면은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은 매 순간이 자신과 깊이 연결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귀한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쌀을 씻는 동안 우리는 자신 안에 번뇌를 씻어내고 빨래를 넣는 동안 우리는 마음의 짐을 털어내며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신 안에 부처님을 만나고 그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로 삶을 채워나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외부에서 위안을 찾거나 특별한 누군가의 관심을 갈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무한한 행복과 평화의 샘이 솟아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쌀 씻는 부처님처럼 우리도 일상의 모든 순간을 깨달음의 기회로 삼아 고요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6. 더위와 추위 그리고 평상심의 극치.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변화와 마주합니다. 때로는 따뜻한 햇살처럼 평화롭고 기쁨으로 가득찬 날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매소운 칼바람처럼 시련과 고통이 몰아닥치기도 합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젊었을 때보다 더 많은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에 부딪히게 됩니다. 질병, 노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외로움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는 피하고 싶은 더나 추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남 선사가 동산에게 물었습니다. 더위와 추위가 닥쳐올 때 어떻게 피합니까? 동산가 답했습니다. 더위와 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된다.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어디에 더위와 추위가 없습니까? 동산 선사가 말했습니다. 더울 때는 더위가 그대를 죽이게 하고 추울 때는 추위가 그대를 죽이게 하라.이 말을 처음 들으면은 다소득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고통을 있는 그대로 춥게 [음악] 내버려 둘 수 있을까요? 여기에 바로 평상심의 극치가 담겨 있습니다. 더위와 추위가 없는 곳이란 우리가 더위와 추위에 대한 저항과 분별을 내려놓은 마음의 경지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뜨거우면 뜨겁다 하고 저항하고 추우면 춥다 하고 불평합니다.이 저항과 불평이 사실은 더위와 추위를 더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상황 자체보다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 때문에 더욱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유가 그대를 죽이게 하고 추위가 그대를 죽이게 하라는 말은 더위와 추위를 피하려 하지 말고 그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픔이 찾아오면 그 아픔을 거부하거나 도피하려 하지 말고 그 아픔의 감각에 온전히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아, 지금 여기에 이런 아픔이 있구나. 내 몸이 이렇게 반응하고 있구나 하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죠. 외로움이 찾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지금 내 마음에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있구나. 내 가슴이 이렇게 답답하구나 하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요. 마치 파도가 오면 그 파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 위에 몸을 맡기고 함께 흘러가는 서퍼처럼 말입니다. 파도를 피하려 하면 파도에 휩쓸려 넘어지지만 파도 위에 몸을 맡기면은 파도의 힘을 빌려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버님들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모든 변화와 어려움을 피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것으로만 여기지 마십시오. 대신 그것들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지혜와 배움을 찾아보십시오. 질병이 찾아오면 그 질병을 통해 내 몸에 소중함을 깨닫고 휴식과 치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외로움이 찾아오면 그 외로움을 통해 내면에 나와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동산 선사의 가르침처럼 더위와 추위를 피하려 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의 굴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삶의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화와 충만함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평상심의 극치이며 우리 버님들의 남은 삶을 고요한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

17. 지금이 순간을 온전히 바쁜 현대인의 명상법. 현대 사회는 너무나도 바쁩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출근길에도 뉴스를 보고 점심 시간에도 일을 생각합니다. 퇴근 후에도 내일을 걱정하고 잠들기 전까지 SNS를 확인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마치 쫓기듯이 쉬지 않고 달려야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언제 현재에 머물러 있습니까? 언제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특히 우리 법부님들 중에는 젊었을 때부터 평생을 바쁘게 살아오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자식들을 키우고 생계를 책임지느라 단 한 순간도 자신을 돌아볼 틈 없이 달려오셨지요. 이제는 은퇴하여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지만 그동안 몸에 벤 바쁨의 습관 때문에 오히려 더 큰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불안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상태일 것입니다.

한 기업가 선사를 찾아와 하소해냈습니다. 사업이 너무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심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습니다. 선사가 물었습니다. 사업할 때 무엇을 생각합니까? 기업가가 답했습니다.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실을 생각합니다.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냥 지금 하는 일에만 집중하십시오. 이메일을 쓸 때는 이메일만, 회의할 때는 회의만. 그 기업가는 반신반이하며 돌아갔지만 스님의 말씀대로 실천해 보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스트레스가 줄어들었을뿐만 아니라 일의 효율도 높아졌습니다. 현재에 집중하니 오히려 미래가 저절로 열렸습니다.이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에 낭비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낭비가 결국 우리를 지치게 하고 외로움과 불안에 빠뜨린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지금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바쁜 현대인을 위한 가장 강력한 명상법이자 우리 법부님들의 남은 삶을 평화롭게 만들어 줄 지혜입니다.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TV를 끄고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집중해 보세요. 차를 마실 때는 차의 향기와 맛에 식사를 할 때는 음식의 질감과 온도에 산책을 할 때는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각과 스치는 바람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의식을 지금 여기로 가져오는 연습입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생각과 잠념이 밀려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부드럽게 마음을 지금 여기로 다시 데려오십시오. 마치 어린아이에 손을 잡고 조용히 이끄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매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연습을 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자신 안에 고요한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동선사가 제자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이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왜 즐거워 보이십니까? 설봉이 답했습니다. 밭을 갈 때는 온 우주가 밭을 간다. 제자가 이해하지 못하자 설봉이 덧붙였습니다.이 호미질 한 번에 별들이 움직이고이 발걸음 한 번에 지구가 돈다. 내가 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나를 통해 밭을 가는 것이다.이 깨달음은 우리의 삶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평범한 행위가 사실은 우주의 거대한 생명력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나를 통해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나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과 하나로 연결되 있는 거대한 생명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순간 여러분이 숨쉬고 있는 그 순결 하나하나가 바로 우주의 순결이며 여러분이 걷는 발걸음 한 번 하나가 바로 우주의 발걸음입니다.이 깊은 연결감을 느낄 때 우리는 더 없는 평화와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8. 순간의 영혼 첫 순간처럼 살아가는 지혜 평상심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매 순간을 첫 순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 모든 것을 신기하고 경의롭게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마시는 커피도 처음 마시는 것처럼 만 번째 보는 하늘도 처음 보는 것처럼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익숙함 속에 숨겨진 삶의 경의로움을 놓치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 매 순간은 실제로 처음입니다. 지금이 순간 여러분이 보고 있는 구름은 아까의 구름이 아니고 지금의 나는 어제 내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강물은 늘 흐르고 나무는 늘 자라며 우리의 몸과 마음도 한시도 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변화하는 진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익숙함이라는 오래된 안경을 벗어던지고 매 순간을 새롭고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조주 선사가 120세까지 살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한평생 한 번도 남을 속인 적이 없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진실입니까? 조주 선사가 답했습니다. 차 한잔하게. 이것이 그의 마지막 가르침이었습니다. 차 한잔에 우주의 진리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이 이 평범한 차 한잔 속에 모든 순간이 첫 순간처럼 새롭고 경의롭다는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차를 마실 때 그냥 차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차한자는 수많은 인연의 결과물입니다. 햇살과 비, 찬잎을 키운 땅, 차를 만들고 운반한 사람들, 그리고이 차를 마시는 나의 몸과 마음까지이 모든 인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지적과 같은 순간이 바로 차 한잔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 법부님들의 외로운 마음에 깊은 위로와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외로움은 종종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옵니다. 젊음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곁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며 내 삶의 방식이 영원히 유지될 것이라고 여겼지요.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집니다.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고 저항할 때 우리는 더 큰 고통과 외로움에 빠집니다. 하지만 매 순간이 첫 순간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모든 순간들도 그저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 속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름진 얼굴은 지난 세월에 지혜를 담고 있고 홀로 남은 시간은 자신과 깊이 대화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됩니다.

이제 내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매 순간을 첫 순간처럼 살아보십시오. 처음으로 마시는 차처럼 그 향기와 온기를 온전히 느껴보고 처음으로 보는 하늘처럼 그 푸른 빛과 구름의 움직임을 경의롭게 바라보세요.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처럼 그 존재 자체에 순수한 마음을 열어보세요. 그러면은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지루하거나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매순간이 새롭고 매 순간이 경의로우며 매 순간이 충만한 깨달음의 장이 될 [음악] 것입니다. 이처럼 순간의 영혼을 살아가는 지혜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음악]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9. 청원 선사의 버사는 산 물은 물. 우리는 본래 면목을 찾아 먼기를 떠났습니다. 선종의 가르침을 따라 무심의 문을 열고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떠나기 전에 일상과 똑같은데 뭔가 다릅니다. 밥은 여전히 밥인데 그 맛이 다르고 물은 여전히 물인데 그 느낌이 다릅니다.이 이 미묘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청원 선사의 유명한 법어가 있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수행을 시작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라. 깨달음을 얻고 보니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더라.이 이 법원은 깨달음의 세 단계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평범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상태입니다. 산은 그저 산이고 물은 그저 물일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죠. 두 번째 단계에서 수행을 시작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것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 세상의 본질을 짚여다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살을 보면서 살은 무상한 것이구나. 산은 흙과 돌의 조합일뿐 고정된 실체가 없구나 하고 분석하고 분별합니다. 물을 보면서도 물은 생매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휩쓸러가는 무서운 힘이 있구나 하고이 분법적인 사고로 바라봅니다.이 단계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개념이 개입하여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온갖 번뇌와 망상이 마음을 어지럽힙니다.이 이 시에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아 헤매면서 [음악] 더 큰 혼란과 고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단계 즉 깨달음을 얻고 보니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더라는 것은이 모든 분별과 분석을 넘어서 다시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게 되는 경지입니다. 처음의 산과 마지막의 산이 같을까요? 겉모습은 같지만 그 산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산이었지만 이제는 본래 면목을 비추는 거울이 된 산입니다. 사는 산이 되 산 속에 우주의 진리가 담겨 있음을 깨닫는 것이죠. 물은 물이되 그 물 속에 생명의 신비와 불성이 함께 흐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이 깨달음은 우리의 외로움과 고독을 근론적으로 치유합니다. 외로움은 되게 나라는 존재가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옵니다. 하지만 깨달음을 통해 산과 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존재가 바로 나의 본래 면목을 비추는 거울이며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홀로란 고립감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세상 모든 존재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충만함과 평화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한 어머니가 선사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느라 지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선사가 답했습니다. 아이가 우는 것이 부처님 설법입니다. 기적일을 가는 것이 조사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다른 곳에서 평화를 찾으니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집에 돌아가 우는 아이를 안았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정말로 설법처럼 들렸습니다.이 아이가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구나. 평상심이 도라는 것은 특별한 것을 평범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음악] 평범한 것에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매일 뜨는 해명의 빛을 보고 매일 먹는 밥 한 그릇에서 우주의 풍요로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지금이 순간 여러분이 숨 쉬고 듣고 느끼는 그 모든 것이 바로 본래 면목의 자격입니다. 다른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이것이 전부입니다.이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남은 삶을 고여하고 충만한 행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0. 끝이 아닌 시작. 본래 면목과 함께 사는 삶. 존경하는 법부님들. 이제 우리는 긴 여정의 마지막에 다았습니다. 선종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의 본래 면목을 찾아헤매고 무심의 문을 열었으며 일상 속에서 깨달음의 순간들을 경험했습니다.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일상이 곧 도량이고 평상신이 곧 부처라는 것입니다. 먼 곳에서 찾았던 본래 면목이 사실은 늘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존재를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모르고 헤매고 새가 하늘을 모르고 날아다니듯이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가장 소중한 보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 여정을 마치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시작입니다.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이 끝이 아니라 본래 면목과 함께 사는 것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아침 당신이 눈을 뜰 때 그것이 본래 면목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출근길에 걸을 때 그것이 본래 면목이 걷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것이 본래 면목이 말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순간이 바로 본래 면목의 작용이며 그 자체로 완전한 깨달음의 현장입니다. 우리는이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답을 찾았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찾고 있습니까? 사실 답은 질문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찾는 자가 바로 찾고자 하는 그것입니다. 파도가 바닷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 자체가 물인데 자신을 물과 분리된 존재로 착각하고 물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 나라는 존재 역시 본래 면목의 한 작용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신비한 것도 없습니다. 그저이 평범한 일상이이 소중한 매일매일이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기적입니다.이 평범함 속에 모든 진리와 행복이 담겨 있습니다. 더 이상 외로움 속에서 헤매지 마십시오. 이미 여러분 안에는 무한한 평화와 충만함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삶을 이렇게 한번 살아 보세요. 매 순간 어떤 일을 하든지 이렇게 마음속으로 되내어 보십시오. 아, 이것이 본래 면목의 작용이구나. 내가 지금 숨쉬고 있는 이것이 바로 불성이구나. 그리고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존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내십시오. 비록 홀로 계시더라도 여러분은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이 우주 만물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생명의 일부입니다. 나이가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육체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속에서도 변치 않는 여러분의 혼래 면목은 늘 빛나고 있습니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 외로움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자신 안에 고요한 존재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외로움의 실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깊은 평화와 사랑이 차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매 순간을 감사하고 모든 존재를 사랑하며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신 안에 부처님을 만나십시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남은 삶을 고요하고 충만한 행복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음악]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은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한다는 뜻입니다.이 염성 한 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 아미타불 관세현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 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지금이 순간 여러분이이 글을 듣고 느끼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여러분의 본래 면목이며 가장 소중한 수행의 시간입니다. 더 이상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이미 여러분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