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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하루에 3분의 1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없다면, 그가 누구든 무엇을 하든 그는 단지 노예일 뿐이다.
여러분은 성공합니다. 여러분이 그걸 원했기 때문이죠.
안녕하세요. 하와이 대저택입니다. 올 한해의 마지막 월요일입니다. 오늘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고 계신가요? 당신은 지금을 살고 있는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고 있는가? 오늘은요. 여러분의 삶에 조금은 불편하지만 중요한 이 질문. 그래서 여러분의 생각을 막 뒤흔들고 결국 삶을 바꿀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흔히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혼자 할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인사이트를 가져와서요. 니체의 시선에 저의 생각까지 더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들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순수한 영혼과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하고 평화로운 삶이 곧 행복이라고 믿었고, 그 신념대로 일생을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런 신념조차 그의 인간적인 나약함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그는 늘 세상을 한 발 물러서 바라보기만 할 뿐, 삶 속으로 깊이 뛰어들 용기가 없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존재할 뿐 진정한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 마치 인생이라는 강을 헤엄쳐 나가려 하지 않고 강가에 서서 흐르는 물을 구경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자신을 뛰어넘고 자신만의 삶의 그 이유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삶에는 그런 고민의 흔적이 없었다. 그의 기억은 아름답게 그려진 고유한 풍경화 같았고, 그 안에는 열정도 노력도 도전도 없었다. 겉모습만 그럴싸한 속은 텅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게 가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아버지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을 바라보며 내가 깨달은 솔직한 통찰에 가깝다. 아버지는 단순하고 평온한 삶을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오히려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깊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삶이란 정말 이게 전부일까? 이런 의문이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1849년 7월 26일, 아버지는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따금씩 눈을 뜨긴 했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회도 슬픔도 미련도 두려움도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이승과 결별한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인생과 작별을 고한 건 그때 그 순간이 아니라, 훨씬 더 이전 삶 속으로 뛰어들기를 포기했던 그때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그날 아침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눈물을 흘린 건 단지 아버지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처럼 그저 존재하다가 끝나버리는 그런 삶을 살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아버지처럼 인생을 그냥 스쳐 지나가듯 살아야 하니까, 살고 존재하니까 사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사는 삶. 절대로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아버지의 삶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침묵 속에서 오히려 나는 열정을 배웠고, 그의 멈춘 걸음 속에서 반대로 나는 도전을 배웠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때의 결심 때문일까? 나는 아버지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삶은 여전히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진정으로 살고 있는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고 있는가? 나는 매일이 질문 앞에 멈춰설 수밖에 없다. 고통과 희망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 있는지, 어제보다 오늘을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 인생을 바꿔야 한다. 삶은 도전이다. 뛰어넘어야 한다. 말하자면 초월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생존하는 것일 뿐,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채우는 일이 아니다. 매 순간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에 가깝다. 나는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매일 치열하게 선택했고, 그 선택이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아버지와 같은 삶을 동경하고 또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 중에서 안정된 길을 선택하곤 한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며 익숙한 환경 속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선택에 안정된 삶은 보장될지 몰라도, 그 길에는 별이 없다. 이때 말하는 별은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도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가치와 자유를 의미한다.
나는 별을 찾기 위해 불안정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때로는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야말로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꼈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고통과 맞서 싸우며 그 속에서 자신의 별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삶은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하지만, 우리는 그 시험 속에서만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너 자신이 되어라." 이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의 무게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삶의 모든 진실을 끝까지 꿰뚫고 그걸 따라 살아가는 사람 역시 거의 없다. 나 역시 이 말을 이해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의미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삶이 던지는 질문들과 마주하면서 진정한 뜻을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창조하라. "너 자신이 되어라"는 단순한 수동적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를 초월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라는 능동적 요청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길을 묻곤 한다. 그들은 내가 걸어온 길을 보며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그 길은 나의 길이다. 당신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너 자신이 되어라"는 바로 그런 뜻이다. 남에게서 길을 찾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창조하는 것이다. 본래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대신 만들어 줄 수 없다. 각자의 삶은 고유하며, 누군가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다.
당신은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의 의지가 향하는 방향을 얼마나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가? 나 역시 젊은 시절.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의지가 무엇을 갈망하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큰 위험 속으로 내몰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속한 사회의 요구, 그들이 부여한 기대에 완전히 영매어 있었다. 사회가 정해 놓은 성공이라는 기준을 따르며 살아갔고, 심지어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그렇다. 나는 교수라는 지위에 얽매여 있었고, 그로 인해 진정한 나로부터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그토록 열망했던 교수직은 명예롭고 가치 있는 자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나를 구속하는 족쇄와도 같았다. 나는 내 스스로를 도구처럼 대하며 끊임없이 나 자신을 소모시켰다. 그 과정에서 삶을 향한 내 본래의 열망과 의지로부터 철저히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논문을 쓰고 학회의 일정을 채우는 일들이 나의 일상이자 삶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내 삶의 목적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목적에 끌려다니며 내 존재를 소모하고 있었을 뿐이다. 내 자신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바쁘게 달리면서도 내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열망했던 교수라는 자리는 남들이 정해 놓은 성공이라는 틀 속에 갇힌 채 스스로 속이며 유지해 온 허상에 불가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은 본래 스스로를 속이는 존재다. 나 역시 나를 속이고 있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기 보단, 그럴듯한 핑계와 이유를 만들어 현재의 삶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결국 내가 이룬 것들은 어딘지 모르게 애매했고,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당연한 성취나 보상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을 포장하는 대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 멈추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깎아내리는 태도는 당신의 행동과 생각을 위축시키고 더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라. 지금까지 큰 성취가 없었다 해도 괜찮다. 스스로를 항상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사랑하며 존경해야 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결코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을 행동도 하지 않게 된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온 열정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자기 발로 그 높은 곳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은 분명 고통스럽겠지만, 그 고통은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드는 과정일 뿐이다.
혼자 힘으로 설 수 없다면 결국 더 나아갈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준다 해도 단 한 걸음조차 타협해선 안 된다. 스스로 선택한 길은 반드시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고독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고독을 떠올릴 때마다 이유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한다. 사람들은 꿀벌이나 말벌처럼 정신없이 날아다니지만,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들은 대부분 소란스럽기만 할 뿐 진정한 열매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고요와 고독을 잃어버렸다. 끊임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바쁨은 삶의 진정한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이걸 나태한 활동이라고 부른다. 겉으로는 활동이 많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깊이도 의미도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인간은 여전히 두 부류로 나뉜다. 노예와 자유인. 만약 하루에 2분의 1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없다면, 그가 누구든 무엇을 하든 그는 단지 노예일 뿐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를 위해 시간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노예에 불과하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연결된 상태에서 일하고 소비하고 활동하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멈춰서 진정한 고요 속에서 자신과 대화한 적이 있는가? 고요한 침묵은 인간이 반드시 걸쳐야 할 과정이다.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고 삶의 진짜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사회는 무의미한 바쁨으로 당신을 묶어두고, 이미 자유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무의미한 바쁨 속에서도 고요와 침묵을 찾아낼 수 있다면, 당신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자신의 길을 찾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신만의 시간은 진정한 삶의 시작점이다. 남들이 정해 준 길을 벗어나 스스로의 방향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국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멈춰서라. 고요 속에서 자신과 마주하라. 그때야 비로소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것은 단지 생존에 불과했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진짜 삶이 시작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세 단계의 변화를 거치며 진정한 자유와 자기 극복에 도달한다. 나는 이 과정을 낙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 이렇게 세 단계로 구분한다.
낙타, 짐을 짊어진 정신. 낙타는 정신의 첫 번째 단계로, 사회와 전통이 부여한 규범, 가치 그리고 기대라는 무거운 짐을 묵묵히 짊어지는 존재를 상징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고 "예"라고 대답하며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충실히 따르며 그냥 살아간다. 예를 들어, 사회가 정해 놓은 성공 기준을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직장을 얻고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낙타에 해당한다. 이들은 스스로 선택하기보다는 주어진 길을 묵묵히 따라가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낙타는 결국 한계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짊어진 짐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그 순간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 없게 되고, 정신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낙타는 수능과 인내의 상징이다. 하지만 이 상태에 머무르는 것으로는 결코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이제 낙타는 짐을 내려놓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이 싸움은 바로 사자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사자, 반항하는 정신. 사자는 기존의 규범과 가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니오"를 외치는 존재다. 앞서 말했듯 낙타가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단계가 바로 사자의 단계다. 이 단계에서 사자는 기존의 권위, 전통, 사회적 기대를 부정하며 스스로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한다. 사자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외부의 모든 억압과 구속에 맞서 싸운다. 예를 들어, 사자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기존의 안정된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잘 나가는 직업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과감히 도전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들은 남들의 기대에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삶을 선택하려는 태도를 가진다. 그러나 사자에게도 한계가 있다. 사자는 기존의 것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아니다라고 부정할 뿐, 이것이다라고 긍정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사자는 자유를 쟁취하는 전사지만, 그 자유를 바탕으로 삶을 재창조하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 다음 단계가 바로 어린아이의 단계, 즉 창조의 단계다.
어린아이, 창조하는 정신. 어린아이는 정신의 마지막 단계로, 완전한 자유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어린아이는 순수함을 지니고 스스로의 의지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은 더 이상 누군가가 정해준 가치나 삶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며 자신만의 길을 창조한다. 어린아이는 무에서 시작해 삶을 새롭게 정의하고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 어린아이는 단순히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설계하고 창조한다. 그렇다. 이 어린아이의 단계는 진정한 자유와 자기 실현의 완성형이다. 삶의 창조자가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정신이자 인간이 도달해야 할 상태다. 당신의 정신은 어린아이의 단계에 도달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여전히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가짜 자유의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그 길은 당신이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남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단지 걸어가는 척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삶을 새롭게 시작하라.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당신의 삶은 진정으로 당신의 것인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을 하며 자기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괴물은 단순히 외부의 악한 존재나 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패한 권력, 부정한 체제 혹은 당신 내면에 자리한 두려움, 욕망, 분노일 수도 있다. 괴물과 싸우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강력하며 동시에 위험하다. 괴물과의 싸움은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당신이 어떤 존재로 변하는지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당신이 괴물과 싸우게 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괴물의 방식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악과 맞서 싸우면서 그 악의 도구를 사용하거나 그 악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은 처음 싸우려 했던 그 괴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승리를 위한 수단이 당신의 본질을 훼손했다면, 그 싸움은 패배나 다름 없다.
그렇다. 괴물과 싸운다는 것은 단순히 적을 물리치는 문제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가치와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우는 동안 당신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두려움, 욕망, 그리고 도덕적 타협과 싸워야 한다. 괴물과의 싸움은 당신 내면의 약함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초월하는 과정이기에 그렇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적이 더 강할수록 당신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괴물과 싸우는 동안 그 괴물처럼 변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다. 끊임없이 당신 스스로를 돌보아라. 괴물과 싸우는 동안 당신은 그 괴물의 방식을 흉내내고 싶은 강한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강해지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잘못된 선택을 합리화할 수 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 당신에게 무엇이 남을 것인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조차 잊은 채 괴물처럼 변해버린 자신만 남아 있다면, 그 싸움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싸움의 과정에서 괴물처럼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당신의 내면을 지켜봐야 한다.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은 적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다. 싸움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것, 그것이 진짜 승리다. 싸움은 승패로 끝나지 않는다. 싸움이 끝난 뒤에도 스스로를 지켜낸 사람이 진정한 승자다.
오늘 가장 좋게 웃는 자는 최후에도 웃을 것이다. 여기서 좋게 웃는다는 것은 단순한 즐거움이나 가벼운 유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기쁨을 발견할 줄 아는 태도를 의미한다. 좋게 웃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과 신뢰를 나타내며,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는 능력을 뜻한다. 삶은 고난, 역경, 그리고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 즉 현재를 긍정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도 웃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업에서 실패하거나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어떤 사람은 좌절하고 불평만 늘어놓는다. 반면 또 다른 사람은 그 상황에서 배울 점을 찾고 웃음과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삶은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오늘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미래에도 웃을 수 있는 이유를 만들지만, 오늘 좌절과 부정에 갇힌 사람은 미래에도 같은 태도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삶은 하나의 과정이다. 최후의 웃음은 갑작스럽게 막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오늘 당신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따라 차곡차곡 성실하게 만들어진다. 나는 나의 운명을 사랑한다. 그것이 내가 더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삶에 고통이 있다고 해도 그 고통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려 하지 말아라. 오히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 사랑해야 한다. 오늘 좋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 운명을 사랑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인생 최후의 웃음은 결국 이런 태도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결과다. 오늘 당신은 기쁨을 발견했는가? 그리고 지금 당신은 웃고 있는가? 절대 잊지 마라. 최후의 웃음은 오늘을 충만히 살았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하지만 눈을 가린 채 달리는 열차가 도착한 곳은 가고자 했던 목적지가 아니라, 여러분은 성공합니다. 여러분이 그걸 원했기 때문이죠.
안녕하세요. 하와이 대저택입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 한해도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 오늘을 기점으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계획과 다짐을 이야기할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 진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니체는 이렇게 묻거든요. 지금 이 삶을 그대로 영원히 반복해도 괜찮겠는가? 오늘 하루가 계속 반복돼도 좋을 만큼 그렇게 살고 있는지, 그런 가치가 있는 삶인지 묻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이어 오늘도 프리드리히 니체의 "혼자 할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인사이트를 가져와서요. 니체의 시선에 저의 생각까지 더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들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4년 12월 31일, 니체의 질문을 마음속에 새기며 더 깊이 있는 한 해의 마무리,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함께 만들어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쁜 습관은 천재를 평범하게 만든다. 당신의 습관은 무엇인가? 습관은 단순히 반복되는 행동이 아니다. 습관에는 당신의 삶과 성격 그리고 운명을 결정짓는 강력한 힘이 있다. 좋은 습관은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매일 조금씩 당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성공과 성장의 기반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나쁜 습관과는 다르다. 나쁜 습관은 당신의 가능성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게으름, 지나친 자기 의심, 혹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태도가 대표적인 나쁜 습관이다. 게으름은 "내일 하면 되지"라는 핑계로 당신을 제자리에 묶어두고, 자기 의심은 "나는 할 수 없어"라는 말로 시작도 하기 전에 스스로를 실패자로 만든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태도는 "지금 정도면 괜찮지"라는 자기 위안으로 변화를 거부하게 만든다. 이런 나쁜 습관은 한 번의 행동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작은 균열로 시작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커지고 결국 당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만약 이런 습관이 당신 삶을 막 지배하도록 그냥 내버려 둔다면, 아무리 천재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결국 평범한 존재로 끝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글을 잘 쓰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그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매일 글을 쓰고 연습한다면, 그는 자신의 잠재력을 현실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글을 쓰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며 "지금은 준비가 안 됐어. 나중에 더 잘 쓰면 되지"라고 자신을 속이며 계속 미루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재능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왜냐고? 재능이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실천 그리고 좋은 습관을 통해 다듬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는, 그를 옭아매고 있던 나쁜 습관 때문인 것이다. 한 번의 미룸이 또 다른 미룸을 낳고, 결국 그 미룸은 패턴이 되어 당신의 일상을 지배한다. "나중에 더 잘할 수 있어"라는 핑계는 결국 "나는 하지 않을 거야"라는 선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단지 재능이나 기회에 있지 않다. 그 차이는 당신의 매일, 즉 반복되는 습관에서 비롯된다. 앞서 말했듯 좋은 습관은 당신의 가능성을 깨우고 꾸준한 발전을 통해 목표에 도달하도록 이끈다. 반면 나쁜 습관과는 당신을 점점 더 깊은 나태와 자기 회피로 몰아넣는다. 비록 아주 작은 행동일지라도 그 반복은 당신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하루하루의 습관이 쌓여 결국 당신의 삶 전체를 만든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라.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 부르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의 비범함은 타고난 재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며 연습하는 그 습관으로 자신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다빈치는 항상 스케치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새 날개짓을 보게 되면 멈춰서 그 장면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그는 새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날개짓이 어떻게 공기를 가르고 새를 하늘로 띄우는지 관찰하고 분석했다. 강가를 걸을 때면 물결의 흐름을 유심히 바라보고 그 패턴을 스케치했다. 물결의 움직임과 형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그게 무엇이든 절대 한 번 보고 지나치지 않았다. 본 것을 기록하고, 기록한 것을 다시 분석했고,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심지어 그는 인간의 몸을 이해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하며 근육과 뼈 구조를 탐구했다. 그 당시 해부학은 종교적인 이유로 금기시되었지만, 다빈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간의 움직임과 생명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시각적으로,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모든 영역을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사람들은 종종 천재를 그냥 타고나는 것으로 여긴다. 마치 신이 특별히 선택한 사람만이 비범한 재능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다빈치의 삶은 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단언한다. 천재란 끊임없이 배우고 관찰하고 반복하는 습관의 산물이다. 그의 이러한 습관은 모나리자와 같은 위대한 예술 작품을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 발견과 발명으로도 이어졌다. 또한 그의 기록하는 습관은 그의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가 남긴 스케치와 노트는 예술, 과학, 철학의 경계를 허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유산이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발명가, 철학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이토록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철저한 자기 개발 습관에 있었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삶을 더 나아지도록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를 철저히 계획하고 관리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정리하며 스스로 지켜야 할 13가지 덕목을 작성했다. 그 덕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제. 먹고 마시는 것을 지나치게 하지 말아라. 육체적,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기본이다.
침묵. 유익한 말만 하고 불필요한 논쟁이나 험담은 피하라. 말의 힘을 신중히 사용하라.
질서. 모든 물건과 일을 제자리에 두어라. 삶에서 혼란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원칙이다.
결단. 해야 할 일을 결심하고 결심한 일은 반드시 실행하라. 망설임과 미움을 극복하기 위한 강력한 의지다.
절약. 필요하지 않은 것은 사지 말아라. 시간과 자원 역시 낭비하지 말아라.
금면. 늘 유익한 일을 하라.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살아라.
진실.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만을 말하며 행동하라. 정직과 신뢰는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정의. 누구에게도 부당한 행동을 하지 말아라. 공정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하라.
중용. 극단을 피하고 이성을 유지하라.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라.
청결. 신체, 의복, 주변 환경을 늘 깨끗이하라. 외적인 정리는 내적인 질서로 이어진다.
평온. 사소한 일에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아라. 스트레스를 줄이고 내면의 평화를 찾아라.
순결. 모든 관계에서 순수함과 절제를 유지하라. 도덕적 책임.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라.
겸손.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며 언제 어디서든 그게 누구이든 배워라.
그렇다. 프랭클린은 말 그대로 자신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장기 프로젝트처럼 다룬 것이다.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그 결과를 점검하며 꾸준히 발전을 추구했다. 여기엔 그만의 구체적인 전략이 있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그는 항상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하루가 끝나면 다시 물었다. 오늘은 잘 살았는가? 하루를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하루를 제대로 살았는지 냉정하게 묻고 돌아본 것이다. 무엇을 잘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더 나아질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러한 습관은 결국 그를 역사에 남은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심지어 유능한 발명가이기도 했다. 그의 피뢰침 발명은 단순한 과학적 발견이 아니었다. 번개의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 반복된 실험과 실패 속에서 자연의 힘을 제어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안경의 개념을 확장한 것도 마찬가지다. 안경을 그냥 더 잘 보이게 하는 도구를 넘어, 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한 발명이었다.
영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이자 시인으로 평가받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정식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평생 동안 39편의 희곡, 154편의 소네트, 그리고 수많은 서사시를 창작했다. 그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뛰어난 고전으로 평가받지만, 이 모든 건 꾸준한 창작 노력과 글쓰기에 반복적인 훈련에서 비롯된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런던의 극장에서 연극을 쓰고 배우로 활동하며 무대와 관객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관객의 반응을 연구하며 그 반응에 맞춰서 글을 발전시키는데 몰두했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무대를 통해 다듬어지고 완성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가벼운 희극과 역사극을 주로 썼지만, 점차 그의 관심은 인간의 깊은 내면과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과 같은 심오한 비극 작품들은 인간의 본질과 삶의 복잡성을 예리하게 파헤친 작품이다. 셰익스피어는 평범한 이야기를 예술적으로 재구성하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전설, 역사적 사건, 심지어 다른 작가의 작품까지도 독창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렇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반복하는 습관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독창성도 예외는 아니다. 독창성은 매일 반복적으로 실천하는 습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재능이 있다고 안심하지 마라. 그 재능은 당신의 습관에 의해 빛날 수도 있고,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재능은 씨앗과 같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그 씨앗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꾸준히 가꾸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빛과 바람을 맞게 해주는 노력이 없다면, 그 씨앗은 땅 속에서 썩어 버리고 만다. 나쁜 습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씨앗에 물을 주는 대신 그 위에 돌을 얹어 성장을 방해하는 행위와도 같다.
인간은 스스로를 초월하는 존재다. 초인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초월의 과정은 당신 안의 나약함과 삶을 갉아먹는 나쁜 습관과 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쁜 습관과 싸워 이기는 과정에서 당신의 진정한 힘이 발휘된다. 그 싸움에서 이길 때 당신은 비로소 평범하지 않은, 그런 삶을 살게 된다. 오늘 당신이 내린 선택이 내일에 당신을 결정한다. 그 선택은 당신이라는 씨앗에 물을 주고 빛과 바람을 맞게 해서 성장할 기회를 주는 행동인가? 아니면 그 씨앗 위에 돌을 얹어 그 성장을 가로막는 방해물인가? 당신 손에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 어떤 습관을 만들어 나갈지는 오직 당신 몫이다.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걸으면서 탄생한다. 걷는 행위는 몸과 마음이 동시에 해방되는 자유의 상징이다. 당신이 걸을 때 몸은 고정된 자리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리듬을 얻고, 마음은 그 리듬에 맞춰 자유롭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때 걸음은 물리적인 이동일뿐만 아니라, 생각과 사고의 경계를 넓히는 행위다. 내가 산책을 좋아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스위스의 산과 들판을 걸으며 나는 철학적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경험했다. 걷는 동안 머릿속에 뒤엉켜 있던 혼란스러운 생각들은 산의 맑은 바람처럼 서서히 정리되었고, 들판의 끝없는 풍경처럼 철학적 사고도 점차 확장되었다. 그렇다. 걷기는 창조적 사유를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내 사고와 철학을 빚어낸 여정이었던 것이다.
당신이 지금 걷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의 시야는 끊임없이 변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그 변화는 단순한 시각적 자극에 그치지 않는다. 걷는 동안 머릿속에 갇혀 있던 고정된 생각들은 자연스럽게 풀리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관점이 마치 신선한 공기처럼 막 흘러 들어온다. 걷기란 이렇게 사고의 물을 트는 가장 강력한 행위인 것이다. 당신이 만약 어떤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면,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는 것만으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일단 걷기 시작하면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나 그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위대한 사상가들과 예술가들 역시 걷기를 창조의 도구로 삼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아테네의 거리를 걸으며 제자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철저한 규칙과 체계로 유명한 철학자 칸트.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다. 그의 산책 시간은 언제나 정확하고 일정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칸트가 산책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시계를 맞췄다고 전해진다. 칸트가 걸었던 그 시간. 그 시간을 통해 순수 이성 비판과 같은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음악의 거장 베토벤 역시 걷기를 사랑했다. 그는 숲속을 산책하며 자연의 소리와 리듬 속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곤 했다. 숲을 거닐며 떠오르는 선율을 잊지 않기 위해 항상 악보를 들고 다녔고, 그 자리에서 바로 기록하곤 했다. 그의 교향곡 중 자연의 웅장함과 평화로움을 담아낸 교향곡 제 6번 '전원'은 산책 속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숲속에서 걷지 않으면 제대로 작곡할 수 없다."
찰스 다윈은 자신의 집 정원에 있는 사색의 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 걸었다고 한다. 다윈이 이 길을 거닐며 자연의 패턴, 생명체의 변화를 세심히 관찰했고, 자신의 진화론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생물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종의 기원'이었다.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플라톤의 대화, 칸트의 사유, 베토벤의 선율,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까지. 이 모든 위대한 업적들은 걷는 동안 얻어진 통찰과 영감의 결과물이었다. 이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생각의 자유를 느끼고 있는가?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그 환경을 만들고 있는가? 머리가 복잡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책상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겨라. 그 길 위에서 자연 속에서 당신도 위대한 생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신념이란 진리보다 위험한 것이다. 신념은 강력한 무기다. 진리와 함께하는 신념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진리에서 벗어난 신념은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항해를 시작하기 전 지구 크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신념은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에라토스테네스가 계산한 지구의 크기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기원전 3세기 경 막대와 태양의 그림자를 이용해 지구의 둘레를 약 4만km로 정확히 추정했다. 이 놀라운 업적은 후대에도 널리 인정받은 사실이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이 계산을 무시했다. 그는 지구가 에라토스테네스의 추정치보다 훨씬 작다고 믿었다. 자신의 이 신념을 토대로 서쪽으로 항해하면 짧은 시간 안에 인도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당시 많은 학자들을 비롯한 조언자들은 콜롬버스의 계산이 틀렸음을 경고했다. 그들은 서쪽으로 그렇게 항해할 경우 지구의 실제 크기 때문에 인도에 도달하기 전 식량과 물이 모두 바닥날 거라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롬버스는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며 자신의 확신에 의지한 채 항해를 강행했다. 결국 그의 항해는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인도에 도달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전혀 다른 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디었다. 1492년 콜롬버스는 예상보다 훨씬 긴 항해 끝에 도달한 낯선 땅을 동인도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도착한 곳이 인도 대륙의 동쪽 동인도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만약 그가 과학적 계산을 신중히 검토하고 현실을 직시했더라면,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신 역시 냉정히 돌아보라. 사람들은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하지만 눈을 가린 채 달리는 열차가 도착한 곳은 가고자 했던 목적지가 아니라 파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리를 추구하되 겸손하게 의심하라. 신념을 가지되 항상 검토하라. 그런 뒤에 스스로 옳다고 믿는 길을 그저 묵묵히 걸어가라. 바로 그 길 끝에 당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마라. 사람들은 종종 오늘을 외면하며, 그리고 소중한 지금의 시간을 쉽게 희생한다. "퇴직 후엔 여행을 갈 거야." "승진하면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야지." "조금만 더 참으면 나아질 거야."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당신이 바라던 나중은 생각처럼 쉽게 오지 않을 수 있다. 설령 도달하더라도 그 순간이 상상했던만큼 달콤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늘을 희생하는 삶의 방식은 내일도 똑같은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내일만을 바라보며 오늘을 잃는 사람은 정작 내일이 오면 또 다른 내일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게 된다. 그렇게 반복되는 희생 속에서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 바로 오늘이 영영 사라지고 만다.
삶의 질문을 먼 미래에서 찾지 마라. 당신이 원하는 삶은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매일의 순간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저 바쁘게만 살고 있는 것.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간을 그냥 막 흘려 보내고 있다면, 그건 삶을 낭비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멈춰서 당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는 지금 오늘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일이라는 환상을 위해 소중한 오늘을 버리고 있는가? 삶의 본질은 내일에 있지 않다. 오늘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당신 삶의 중심이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하와이 대저택이었습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