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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여러분 잠시 눈을 감고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80세 노승이 있었습니다. 50년간 피나는 수행 끝에 온갖 깨달음을 얻었노라. 자부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죠. 나는 정말 깨달은 것인가? 아직 무언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삶의 황원기에 다다른이 노승의 마지막 질문은 어쩌면 여러분 마음속 깊이 숨겨진 바로 그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그토록 찾아 헤매셨습니까?
이 영상을 끝까지 보시면 여러분이 평생 찾아헤매던 그 무엇이 사실은 이미 여러분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 놀라운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얻으려 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얻을 것이 없다는 진실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부처님의 [음악] 깊은 가르침을 말입니다. 이제 그 오랜 여정의 문을 함께 열어 보시죠.
그 노승의 이름은 수보리.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분이셨습니다. 부처님을 만난 지은 50년. 머리칼은 하얗게 세웠고 깊게 폐인 주름은 지난 세월에 고행을 묵묵히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형했고 그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진리에 대한 갈증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콩콩을 깨달았고 무주 무주를 깨달았고 무상무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음을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음을 영원한 것은 없음을 깊이 통찰하신 분이셨죠. 그러나 놀랍게도 이토록 위대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수보리 존자의 마음 한구속에는 여전히 작은 의문 하나가 잔잔히 물결 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깨달은 것인가? 아직 무언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어쩌면이 질문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 채워지지 않는 갈증말입니다. 어느 날 저녁 수보리 존자는 홀로 앉아 자신의 삶을 조용히 돌아보셨습니다. 출가하기 전 그는 북인도의 유명한 부유한 상인이었습니다. 재산도 많았고 명예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노비와 가축, 갓비싼 보석과 비단으로 가득찬 창고를 소유했지요.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고 그의 말 한마디에 도시의 경제가 좌우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그런 분 계신가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고 있지만 밤이 되면 홀로 외로이 깊은 한숨을 쉬는 분들 말입니다. 통장에 쌓인 돈이 많아도 자식들이 다 잘되어도 번듯한 집과 차가 있어도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불안히 그림자처럼 드려워져 있을 것입니다. 수보리 존자도 그러했습니다. 늘 불안했고 늘 두려웠습니다. 더 많이 벌어야 돼. 더 높이 올라가야 해. 끝없는 욕망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는 지쳐 있었습니다. 그 욕망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마실수록 갈증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죠.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습니다. 그 결정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다니.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출가 후 처음 10년은 고행의 시간이었습니다. 잠도 줄이고 음식도 줄이고 온갖 수행법을 다했습니다. 히말라야의 차가운 동굴에서 정자하고 뜨거운 낮에는 사막의 태양 아래 섰습니다. 육신의 고통을 통해 마음의 번뇌를 씻어내려 노력했죠. 하지만 깨달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몸은 마르고 지쳐갔지만 마음속에 갈증은 여전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나요? 고생하고 인내하고 희생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얻고자 했던 평화 행복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지요. 물은 보이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음 10년은 경전을 읽고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부처님의 수많은 법문을 듣고 모든 경전을 외웠습니다. 당시에는 인수의 술이 발달하지 않아 경전 한 구절을 얻기 위해 수십일 수백일을 걸어가는 일도 답안사했습니다. 수보리 존자는 그렇게 지식의 바다에 깊이 뛰어들었습니다. 모든 가르침을 머리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파고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부족했습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그 답답함 여러분 중에도 지식을 많이 쌓고 정보를 많이 알아도 마음의 공허함은 여전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지혜를 모두 갖추었지만 정작 내 삶은 왜 이토록 팍팍하고 외로울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지요. 수벌리 존자 또한 그했습니다. 그 수많은 경전 속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부처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콩콩 무죄 우주 무상무의 깊은 진리를 설하셨고 수보리는 하나씩 그 진리를 깨달아 갔습니다. 그는 비로소 집착이 사라졌고 번뇌가 줄었으며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이 실체가 없음을 알고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며 모든 것이 변해 가는 것임을 받아들였습니다.이는 실로 위대한 진보였습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온과 지혜를 얻으신 것이죠.
하지만 왜일까요? 수보리 존자는 여전히 자신이 완전히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부족한가?이 질문은 밤새도록 그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깊은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세하게 남아 있는 그 갈증.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오는 경험 말입니다. 혹은 큰 고통을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외로움이나 불안감이 고개를 들 때가 있습니다.이 이 모든 것이 결국 우리가 어떤 결핍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수보리 존자의 마음속 의무는 바로 그 근원적인 갈증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잠못 이루는 밤을 지세우며 온 마음을 다해 그 부족함의 실체를 찾으려 했습니다. 마치 오랜 병을 앓던 사람이 마침내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 마지막 희망을 거는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수벌리 존자는 새벽일찍 부처님을 찾아뵙고 공손이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지난밤에 고해와 간절함이 고스란이 묻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를 깊이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빛에는 무한한 자비가 담겨 있었습니다. 마치 자유로운 할아버지가 오랜 고민 끝에 찾아온 손자를 지긋이 보듬는 것과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말하라 수보이여. 부처님의 음성은 고요했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수보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어 저는 50년을 수행했습니다. 공도 깨달았고 무주도 깨달았고 무상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왜 여전히 무언가 부족한 느낌입니까? 제가 진정으로 깨달은 것입니까?이 이 질문은 단순히 수보리 존자의 개인적인 고해를 넘어 우리 모두가 살면서 한번쯤 던져보았을 질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루고 얻고 성취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그 뒤에는 늘 이것으로 충분한가 하는 의문이 따라붙습니다. 마치 목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짠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일시적인 만족감은 줄지 언정, 갈증은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질문에 한참을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보리가 스스로 답을 찾을 시간을 주는 깊은 가르침의 일부였습니다. 때로는 가장 현명한 답이 침묵 속에 숨겨져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여셨습니다. 수보리여, 내가 깨달은 것이 있느냐?이 이 질문은 수보리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했던 공과 무주와 무상을 떠올렸습니다. 공과 무주와 무상을 깨달았습니다. 수보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들이 부처님께서 인정해 주시길 바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적 시험을 잘 본 후 부모님께 칭찬받기를 기다리던 마음과 비슷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것을 내가 얻었느냐?이 질문에 수보리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얻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아니면은 얻지 못했다고 말해야 할까요?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만약 얻었다고 말하면 그것은 여전히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이 될 테였습니다. 하지만 얻지 못했다고 말하면 그동안의 50년 수행이 모두 헛된 것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부처님께서는 자유로운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 미소는 수보리의 혼란을 꿰뚫어보고 계셨다는 듯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했습니다. 그 미소에 이미 모든 답이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를 내 것으로 만들려 애을 때 그것은 이미 우리를 속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마치 새해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다가 자신이 앉았던 나뭇까지에 집착하여 날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미소 지으시며 수보리 존자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수보리여 내가 옛날 연등불 부처님께 법을 얻었느냐? 연등불은 부처님께서 성부를 하시기 전 오랜급 재전에 과급을 고치 이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연등 불로부터 미래의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 소기를 받으셨다고 전해집니다.이 질문은 수보리 존자에게 더 깊은 통찰로 안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보리는 공선이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 시역께서는 연등불게 실로 법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그는 부처님께서 연등불게 법이라는 어떤 실체를 얻으신 것이 아님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즉 법은 얻고 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수보리어 만약 내가 법을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내가 미래의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지 않으셨을 것이니라. 왜냐하면 [음악] 얻을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이 말씀은 수보리 존자의 머리를 전율케했습니다. 부처님조차 법을 얻지 못하셨다니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깨달음이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 마침내에 성취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마치 보물을 찾아 떠나는 탐험가처럼 혹은 높은 삼봉을 정복하려는 등상가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런 어둠의 개념 자체를 부정하셨습니다. 법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얻으려 애쓰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수보이여 아다라삼신삼벌이 최고의 깨달음난 정해진 [음악] 법이 없느니라. 또한 열래 부처가 얻을 법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열래가 사람 법은 얻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요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이 이 말씀은 너무나 심오하여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정해진 법이 없다. 얻을 법이 없다.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다라니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를 어떤 특정한 틀이나 언어 속에 가두려는 우리의 습관적인 마음을 깨뜨리는 말씀입니다. 진리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며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치 아름다운 노를 붉다, 황홀하다고 말하지만 그 말들이 노체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분별심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합니다.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며 점점 더 깊은 바다로 빠져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다.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어떤 미지의 문이 열리는듯한 신비로운 감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평생을 무엇인가를 얻으려 노력해 왔습니다. 부유한 상의 시절에는 재물을 출가 후에는 깨달음을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 모든 어둠을 부정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50년 수행의 근간을 뒤흔드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돈을 얻으려쓰고 명예를 얻으려 하고 사랑을 얻으려 하고 건강을 얻으려 합니다. 때로는 평화를 얻으려 행복을 얻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또 다른 결핍이 찾아오거나 얻은 것을 잃을까 봐 불안해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얻으려 했던 그 모든 것이 오히려 우리를 끊임없이 부족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깊은 혼란을 아시고 더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그 자비로운 마음으로 마치 어린아이가 어려운 질문을 할 때 눈높이를 맞춰 설명해 주시듯 쉽고 친절하게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수벌이여 일체 현성은 모두 무의법 무의 화학으로서 차별이 있느니라. 무의법이란 만들어진 법이 아니니라. 본래부터 있는 것이니라. 중생이나 성인이나 부처나 모두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느니라. 다만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니라.이 말씀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무의법이란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는 진리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죠. 그것은 누가 만들거나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 부처님께서는 중생이든 깨달은 성인이든 부처님이든 모두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부처님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특별함이 본래의 본성 자체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을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희망을 줍니다.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씨앗이 본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씨앗은 싹을 키우고 어떤 씨앗은 그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이는 본성이 아니라 그 본성을 발현시켰느냐의 여부에 있다는 것이죠.
스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설명을 들으며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마음속 혼란이 점차 거치고 밝은 빛이 스며드는 듯 했습니다. 본래부터 있는 것 모두 같은 본성이라는 말씀이 그의 50년 수행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핵심적인 가르침을 이어가셨습니다. 수보이여 마음이 청정하면 실상이 생기느니라. 신심 청정 즉생 실상 신신 청정 저성 수상 이것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니라.이 이 여섯 글자가 수보리 존자의 마음에 본개처럼 내려앉았습니다. 그러나 숨이 옛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찾던 보물의 지도를 마침내 손에 주인듯한 강렬한 감각이었습니다. 신청정 즉생 실상 믿음이 청정하면 실상이 생긴다.이 짧은 구절이 그가 50년 동안 헤매던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이었을까요? 여러분이 구절을 천천히 따라 읽어 보시겠습니까? 신심 청정, 즉생 실상이 여섯 글자 속에 부처님의 모든 지혜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불안하고 외로울 때 무엇인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더 열심히 해야 하고 보시를 더 많이 해야 하고 명상을 더 깊이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믿음이 청정하면 실상이 생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청정하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고 실상이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요? 수보리 존자는이 구절 앞에서 평생의 수행이 집약되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깊은 통차를 아시고 다시 한번 자상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수볼리여 신심이란 의심없는 마음이니라. 내가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없고 내가 깨달았다는 교만도 없느니라. 다만 본래부터 완전함을 믿는 것이니라.이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믿음은 어떤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신심은 자신 안에 이미 완전함이 존재한다는 깊은 확신을 의미합니다. 내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 혹은 내가 무언가를 특별히 성취했다고 자만한 마음이 모든 의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그저 나는 본래 완전한 존재다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 마음 그것이 바로 신심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자신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습니까? 이제 그 마음을 내려놓고 여러분 안에 이미 존재하는 완전함을 믿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이어서 청정의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음악] 청정이란 아무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는 것이니라. 본래부터 청정하니 청정하게 만들 필요가 없느니라. 다만 본래 청정함을 가리는 것을 치우면 저절로 드러나느니라.이 이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오해 속에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청정해지기 위해습니다. 마음속에 번뇌를 없애려 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억누르려 합니다. 마치 더러워진 물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정화제를 넣고 필터를 거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본래부터 청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고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의 본래 마음은 어떠한 번뇌에도 물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청정하지 않은 것을 청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 청정함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치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 그리고 수많은 번뇌와 집착입니다. 마치 거울에 먼지가 쌓여 본래의 모습을 비추지 못할 때 우리가 할 일은 거울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먼지를 닦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먼지를 닦아내면 거울은 저절로 본래의 맑고 투명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착과 욕망의 먼지를 치우면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저절로 빛을 바라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실상이란 진짜 모습이니라. 꾸미지 않은 만들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니라.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까?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꾸미고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모습은 결코 우리의 진짜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실상은 그 모든 꾸임과 가공을 벗어던진 본래부터 존재했던 우리의 순수한 모습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났을 때 가지고 있던 그 순수한 마음, 어린아이처럼 티없이 맑은 그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 순간 수벌리 존자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50년 동안 자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깨달음을 얻으려 했었고 청정해지려 노력했고 시상을 버려 수행했습니다. 수보리 존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청정해지기 위해 실상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요? 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모든 노력이 사실은 불필요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은 본래부터 깨달아 있었고 본래부터 청정했고 본래부터 실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을 모르고 무지 무지의 구름으로 덮어 버렸을 뿐이었습니다. 마치 맑은 하늘의 태양이 항상 빛나고 있지만 구름에 가려 태양의 존재를고 어둠 속을 헤매는 것과 같았습니다. 구름이 거치면 태양은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태양이 다시 드러날 뿐인 것처럼 말입니다.이 깨달음은 수보리 존자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답이 사실은 처음부터 자신 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의 감동이란 얼마나 컸을까요?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깊은 통찰를 아시고 다시 한번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수불이어 보살은 아상 오도 없고 인상 른도 없고 중생상 중성도 없고 수자상 서드 없느니라. 또한 법상 화도 없고 비법상 회의 화장도 없느니라. 왜냐면 만약 보살의 마음에 법상이 있다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니라.이 이 말씀은 근강경의 핵심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상상이란 쉽게 말해 개념이나 고정된 생각을 의미합니다. 아상은 나라는 고정된 개념, 인상은 다른 사람이라는 개념, 중생상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라는 개념, 수자상은 영원히 살려는 개념입니다. 우리는이네 가지 상에 갇혀 살아갑니다. 내가 남이 우리 모두가 오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묶여 끊임없이 분별하고 집착합니다.
수보리 존자는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나라는 상에 집착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수행한다. 내가 깨달아야 한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이 모든 것이 나라는 개념에 갇힌 집착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법에도 집착했습니다.이 이 법을 닦아야 한다.이 수행을 해야 한다. 이것이 옳은 길이다. 이것 또한 법이라는 개념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심지어 법이 아니다라는 생각. 즉 비법상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은이 모든 상시을 떠나는 것 즉 어떤 고정된 개념이나 생각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나도 없고 법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것 바로 그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그 모든 상향 즉 고정된 개념과 생각을 내려놓는 것에 있었음을 수보리 존자는 마침내 완전히 깨달았습니다. 나라는 생각, 다른 존재라는 생각, 법이라는 생각, 심지어 깨달음이라는 생각조차도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음악] 알게 된 것입니다.이 이 얼마나 역설적이고 심무한 진리입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얻으려 할 때 우리는 이미 그 얻을 것이라는 개념에 갇치게 됩니다. 우리는 행복을 얻으려 하고 평화를 얻으려 하고 심지어 깨달음을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 그 모든 어둠을 놓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손에 쥐고 있는 모래가 많을수록 손가락 사이로 더 많은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우리가 무엇인가를 움켜 주려 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서 멀어져 갈 뿐입니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순간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수보리 존재는 부처님께 깊이 절하며 말씀드렸습니다. 그의 눈에는 기쁨과 감사함의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감사합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50년 동안 무엇을 찾았는지 그리고 왜 찾을 수 없었는지이 고백은 그의 평생 권뇌와 노력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그동안 자신이 헛된 곳을 찾아 헤매였음을 하지만 그 헤매 또한 깨달음을 향한 피연적인 과정이었음을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시행 착오를 겪습니다.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길을 잃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이 모든 과정이 결국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의 일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얼굴을 보며 자유로운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깨달았느냐?이 이 질문은 수보리의 깨달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동시에 그의 마음을 더욱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보리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본래부터 붙여졌습니다. 다만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이 짧은 한 마디에 50년 수행의 모든 의미가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나가 무언가를 얻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부처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거치면 본래 있던 해가 드러나듯이 수벌이 존자의이 마지막 답변은 그의 모든 권와 의문을 종식시키는 완벽한 통찰이었습니다. 그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떤 특별한 [음악] 상태 혹은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밝은 빛을 가리고 있는 무지의 구름을 걷어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도 저마다의 해가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 불안, 욕심, 외로움과 같은 무거운 구름들이 그 빛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구름이 거치면 해는 저절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저 구름을 걷어내는 법을 배우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장하다, 수보이여, 내가 이제 진정으로 깨달았느니라. 이제부터 너는 해공제일이니라. 공을 가장 잘 이해한 자니라. 해공제일이라는 칭호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내려주신 최고의 찬사이자 그의 깨달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신 것이었습니다.이는 수보리 존자가 단순한 지식적인 이해를 넘어 공의 진리를 삶 속에서 온전히 최득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동시에 모든 것을 자유롭게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이 공임을 아는 자는 세상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날 이후 수보리 존자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늘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습니다. 더 수행해. 더 깨달아야 해.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본래부터 완전했으니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마치 이미 가득찬 물통에 물을 더 채우려 애쓰지 않는 것처럼 그는 더 이상 어떤 부족함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늘 무언가 얻으려 했습니다. 지혜를 얻어야 해. 공덕을 쌓아야 해. 하지만 이제는 얻을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얻으려 할 때 오히려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그 시절과는 달랐습니다.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모든 집착과 갈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한한 평화와 자유가 찾아왔습니다. 예전에는 늘 무언가 두려웠습니다. 내가 퇴보하면 어쩌지? 내가 잘못 가고 있으면 어쩌지? 수행의 길에서 벗어날까 봐, 깨달음을 잃을까 봐 늘 불안해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본래 완전한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불이 붙지 않는 마른 나무는 이미 다 태워버린 상태와 같습니다. 더 이상 탈 것이 없으니 죄가 될 걱정도 없는 것이죠. 수벌리 존자는 자신이 본래부터 완전한 존재임을 깨달았기에 더 이상 퇴보하거나 잘못될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과거의 후에도 미래의 불안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이 순간에 충만한 평화만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한 젊은 비구가 수보리 존자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번민과 좌절감이 서여 있었습니다. 존자님, 저는 10년째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젊은 비구의 질문은 어쩌면이 영상을 보고 계신 여러분의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자녀를 키우고 직장에서 일하고 가정을 돌봅니다. 때로는 종교 활동이나 봉사 활동에 매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나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이 젊은 비구처럼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수벌리 존자는 젊은 비구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지였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젊은 비구는 지체없이 대답했습니다. 깨달음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수보리 존자는 그를 보며 고요히 말했습니다. 그대는 이미 깨달아 있네.이 이 말에 젊은 비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의 눈이 휘둥글해졌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제가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이 반응은 우리에게도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지식 혹은 신비로운 경험으로 생각합니다. 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이미 깨달아 있다는 말이 쉽게 납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젊은 비구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며 수보리 존자는 빙글에 웃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쉬운 답을 찾지 못해 헤멜 때 자유롭게 미소짓는 어른과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진짜 댐이라네.이 이 말씀은 젊은 비구의 마음속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이 많을수록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겸한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고 성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할 때 비로로 우리의 마음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됩니다.
수보리 존자는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젊은 비구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대가 지금 나는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 바로 그것이 본래 청정한 마음이라네.이 말씀은 다시 한번 젊은 비구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마음이 어떻게 본래 청정한 마음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상식을 쥐없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잘못됐다,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그 순간 그 판단을 내리는 마음 자체는 이미 온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거울의 어떤 상이 빛이든 거울 자체는 변함없이 맑고 투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든 그 마음의 본성은 변함없이 청정한 것입니다.
수보리 존자는 젊은 비구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계속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대는 지금 내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깨달음은 얻는 것이 아니라네 본래부터 있는 것이네. 다만 그대가 얻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본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네. 그 생각을 내려놓게 그러면 본래 깨달아 있는 그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네.이 이 가르침은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얻어야 한다. 평화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행복과 평화는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내제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얻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도 안경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젊은 비군은 수보리 존자의 말씀을 듣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드려웠던 번민과 좌절감은 사라지고 대신화한 빛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밤 그는 홀로 앉아 수보리의 말을 되새했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 본래부터 완전하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던 그에게 얻을 것이 없다는 말은 너무나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부처님과 수보리 존자의 가르침을 믿고 묵묵히 그 말씀들을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 [음악] 넣었습니다. 그는 고요히 앉아 그 의미를 재새기고 또 되새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마음 속에서 뭔가 풀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꽁꽁 얼어붙었던 얼음이 햇살을 받아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평생 무언가를 얻으려 했는데 사실은 얻을 것이 없었구나. 본래부터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구나.이 이 순간 젊은 비군은 깊은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던 욕망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그 자리에 고유하고 충만한 안정이 찾아왔습니다.이는 마치 긴 여행 끝에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것과 같은 안도감과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성취하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완전함을 발견하데 있습니다.이 젊은 비구처럼 여러분도 그 완전함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부처님께서 계시던 기원정사에는 평생 보시를 실천한 한 제가 신도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선생 산성이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부자였고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줬습니다. 굶주린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며 집 없는 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한 사찰에도 많은 보시를 했습니다. 불상 조성에 힘썼고 승려들의 수행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나누는 삶을 실천하며 살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늙어갈수록 그의 마음 한 곳에는 불안히 찾아들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보시했는데 복을 받을 수 있을까? 다음생에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을까? 그의 보시에는 여전히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 그사의 불안감은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겪는 어려움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부모님을 봉양하며 이웃을 돕습니다. 때로는 교회나 절에 헌금이나 보시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이만큼 했으니 복을 받겠지.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기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기대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음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보시를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기대했던 복이 오지 않거나 오히려 불행이 닥치면 우리는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쌓은 공덕이 모두 헛된 것인가 하는 의문에 빠지게 되죠. 선생 거사도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보리 존자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간절함이 섞여 있었습니다. 존자님, 제가 평생 보시는데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 존자는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선생 그사의 마음속 깊은 것을 꿰뚫는 듯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 보시했는가? 선생사는 잠시 망설리다가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는 복을 바라지 않는 보시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모든 행위에는 어떤 목적이나 대가가 따르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수보리 존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아직 진짜 보시를 하지 못했네. 선생 거사는 당황했습니다. 그렇다면 제 보시가 헛된 것입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가득했습니다. 평생을 바쳐 쌓아온 공덕이 헛되다고 하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요? 수보리 존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헛되지는 않네. 하지만 완전하지도 않네. 진짜 보시는 법을 바라지 않는 보이라네. 내가 준다. 저 사람이 받는다.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생각 없이 그냥 주는 것이네. 그곳이 무산보이 우스라네. 무상보시는 보시의 주체나 보시의 대상 받는 사람, 보시하는 물건 그리고 보시의 결과복에 대한 집착 없이 행하는 보시를 의미합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태양이 아무런 대가 없이 빛을 비추듯이 그저 자연스럽게 나누는 것이 진정한 보이라는 뜻입니다.
선생사는 수보리 존자의 무상보시 가르침을 듣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복을 바라지 않는 보시라니 그의 삶을 지배했던 모든 생각들이 한 순간에 뒤바뀌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보시를 투자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 내가 씨앗을 뿌리면 미래에 더 큰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말입니다. 하지만 수보리 존자는 그 기대를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기대 자체가 보시를 오염시키고 진정한 공덕이 되는 것을 막는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줄 때 그 선물을 주고 나서 나도 언젠가 저 사람에게 더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선물이 순수한 마음에서 울어나온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저 주는 것 자체로 완성됩니다.
그날 이후 선생 거사의 보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보시할 때마다 계산했습니다. 이만큼 주면 이만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주었습니다. 주어야 할 때 주는 것이라는 수보리 존자의 가르침처럼 그는 아무런 계산 없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재산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죽고 나서는 잊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생각?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는 생각. 내가 복을 쌓았다는 생각.이 모든 상을 내려놓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러자 그의 마음이 진정으로 평화로워졌습니다. 복을 바라지 않으니 복이 오지 않아도 실망할 일이 없었고 복이 오면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맑고 투명한 호수처럼 고요해졌습니다. 여러분 살면서 대가를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하는 일이 얼마나 될까요? 때로는 작은 친절 하나도 언젠가 저 사람이 나에게 갚겠지 하는 기대를 품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그 기대를 내려놓고 그저 주어야 할 때 주는 삶을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그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날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를 부르셨습니다. 부처님의 목소리에는 온함과 깊은 지혜가 담겨 있었습니다. 수보이여, 이와 같이 설한 법의 요지를 너는 보았느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가 자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공손이 대답했습니다. 세존시어 이제 조금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겸손함과 함께 깊은 깨달음의 빛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그동안 찾아 헤매던 답을 마침내 찾았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겸손한 대답에 미소 지으시며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냐?이 이 질문은 수보리의 깨달음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수보리 존자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습니다. 그의 답은 그가 50년 수행 끝에 도달한 핵심 진리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소득 무서인 것 같습니다.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 것 같습니다. 무소득이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만 사실은 그 어떤 것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으며 진정한 평안나 행복은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이 깨달음은 모든 집착과 갈망을 내려놓게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답에 만족하시며 미소 지으셨습니다. 잘 깨달았느니라. 하지만 수벌이여 한 가지 더 있느니라.이 이 말씀에 수벌리 존자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이미 깊은 깨달음을 얻었지만은 부처님께서는 그를 더욱 심무한 진리의 세계로 이끌고 계셨습니다.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잠소에 들어갈 때 한 번 더 깊이 숨을 들이쉬어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소득을 깨달으면 무엇이 남느냐?이 질문은 수보리 존자의 마음에 번개처럼 성광을 일으켰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그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어려든 모든 것을 놓아 버렸으니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렇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 무엇이 드러나느냐?이 이 질문에 수보리 존자는 마침내 그의 평생 수행의 정점을 찍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번개처럼 답을 깨달았습니다. 본래 그대로가 드러납니다.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아무것도 빼지 않는 본래 그대로. 그것이 실상 휘장입니다. 수보리 존자의 마지막 답변.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아무것도 빼지 않은 본래 그대로 그것이 실상입니다.는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를 완벽하게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 하려 하고 무언가를 빼내려 합니다. 나쁜 습관을 버리려 하고 좋은 습관을 들려 애으며 완벽한 모습이 되기 위해 자신을 바꾸려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이 모든 시도가 사실은 우리의 본래 모습을 가리는 행위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수상은 그 모든 더함과 그 모든 인위적인 노력을 벗어던진 우리 존재의 순수하고 완전한 모습입니다. 마치 잘 다듬어진 조각상보다 자연 그대로의 원석이 더 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니라. 수보리 존자는이 한 마디의 평생의 수행이이 한 순간으로 완성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거나 부족함을 느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본래부터 완전했으며 그 자신 또한 그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이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입니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부족함을 느끼며 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얻을 것이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때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본래부터 존재했던 우리의 완전한 실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날밤 수보이 존재하는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평화와 자비가 가득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제 마지막 법문을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수보의 존자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제자들 중 한 명이 대답했습니다. 깨달음을 구합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들도 깨달음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수보리 존자는 깨달음을 구한다는 제자의 말에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깨달음은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깨달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행과 노력을 해왔던가요? 그런데 스승께서는 그 모든 구함 자체가 이미 잘못된 방향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다지는 것과 같습니다. 행복은 외부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는 감정의 상태인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구하기 위해 돈을 벌고
성공을 쫓고 관계에 집착하지만, 정작 행복은 우리 마음속에 조용히 숨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다른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은 스승의 말씀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길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수보리 존자는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은 하십시오. 하지만 '내가 한다. 나는 이것을 얻을 것이다.' 하는 생각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한 일을 하되 머물지 마십시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은 금강경의 핵심 구절 중 하나로,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행위의 결과나 그 행위에 대한 집착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에 일을 해 나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되 일에 묶이지 않고, 사랑을 하되 사랑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다른 제자가 물었습니다. "존자님, 그렇게 살면은 무엇이 달라집니까?" 그들은 이 가르침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수보리 존자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자유로워집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 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삶,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마지막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그동안 갇혀 살았던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보았습니다.
며칠 후, 수보리 존자는 조용히 입적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평화로웠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했습니다. 제자들은 슬픔 속에서도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떠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래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법은 영원히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수보리 존자가 '나'라는 개별적인 존재의 상실을 완전히 넘어섰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의 깨달음과 가르침, 즉 법(法)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마치 강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지만 강물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고 바다와 하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육신의 옷을 벗게 되겠지만, 우리의 본래 성품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습니다.
수보리 존자가 입적한 후,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부단히 전했습니다. 특히 수보리와 부처님의 대화를 담은 금강경은 천년, 이천 년을 넘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혜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이 경전은 형식적인 수행이나 지식적인 이해를 넘어 마음의 본성을 직시하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단순한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지혜입니다.
당나라 시대, 육조 혜능 대사(六祖慧能大師)는 다시는 금강경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본래 그를 모르는 나무꾼이었지만, 우연히 지나가던 스님이 암송하는 금강경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이 여덟 글자를 듣는 순간, 그는 모든 고정된 생각과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입니까? 오랜 수행을 거친 수보리 존자도 힘겹게 얻은 깨달음을, 그를 모르는 나무꾼이 단 한 구절의 말씀을 통해 얻었다니, 이는 깨달음이 지식이나 경험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혜능 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후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을 지었습니다.
"보리 본래 무수명(菩提本來無樹明)
명대 역본래 무신(明臺 亦本來無身)
본래 청정무일물(本來淸淨無一物)
하처 낙진애(何處 惹塵埃)"
이는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어느 곳에 티끌이 묻겠는가?"라는 뜻입니다. 혜능 대사의 이 게송은 금강경의 정수를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본래 아무것도 없다. 얻을 것도, 버릴 것도, 깨달을 것도 없습니다. 다만 본래 그대로일 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완성됩니다. 마치 빈 그릇에 어떤 것을 담아도 그릇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한 선사(禪師) 신씨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금강경을 한 글자로 표현하면 무엇이냐?" 제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그 심오한 경지를 어떻게 단 한 글자로 압축할 수 있을지 막막했을 것입니다.
한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공(空)입니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는 의미의 '공'은 금강경의 핵심 사상 중 하나였기에 일견 맞는 답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선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다."
다른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무(無)입니다." 없다는 의미의 '무'. 또한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사는 다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금강경의 정수를 담은 한 글자일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선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깨달음과 함께 유머가 섞여 있는 듯했습니다. "시(是)다." '이것이다'라는 뜻이다. 금강경은 무엇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라고 긍정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모습 그대로, 그것이 완전한 것이다. '시(是)'라는 한 글자, 이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금강경은 단순히 없다거나 비어 있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전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도, 즐거움도, 외로움도, 기쁨도, 이 모든 것이 '이것이다'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진리의 한 조각이 됩니다. 제자들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진리를 멀리서 찾으려 했지만, 진리는 이미 자신들의 발밑에,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근대에 이르러 번잡한 어느 도시에서 한 사람이 금강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평생 성공을 쫓아 살았습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공허했고 불안했습니다. 그는 늘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습니다. 그의 삶은 끝없는 경쟁과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그러한 삶을 살아오신 분 계신가요?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정작 마음은 늘 허전하고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그런 삶 말입니다.
그 또한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도시의 사업가는 우연히 금강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경전의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 '모든 만들어진 것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그림자와 같다'는 구절을 접했을 때,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온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성공, 그의 재산, 그의 명예가 모두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니, 그의 마음은 혼란과 함께 깊은 회의감에 휩싸였습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이런 질문들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금강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구절을 만났습니다. "신심청정 즉생실상(信心淸淨 卽生實相)" - '믿음이 청정하면 실상이 생긴다.' 이 여섯 글자를 읽는 순간, 그의 마음 속에서 뭔가 터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꽁꽁 얼어붙었던 얼음이 단번에 깨져 버리는 듯한 강력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평생 무언가를 얻으려 했는데, 사실은 얻을 것이 없었구나. 본래부터 완전했구나." 이 깨달음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밖에서 찾아 헤매던 모든 것이 사실은 자기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외부에서 행복을 찾고 성공을 쫓으며 완벽한 무언가가 되려 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리 안에 완벽함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여전히 일을 했습니다. 돈도 벌고 사업도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것을 꼭 이뤄야 해" 하는 강박이나 집착이 사라졌습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러자 오히려 일이 더 잘 풀렸습니다. 마음이 자유로워지니 창의력이 샘솟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훨씬 원만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진정으로 행복해졌습니다. 그의 행복은 외부의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영원한 평화였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비로소 얻은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성공, 돈, 명예, 사랑, 행복. 이 모든 것을 한번 내려놓아 보십시오. 얻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아 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본래부터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본래부터 완전합니다.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뺄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모습 그대로 완전합니다. 그것을 믿으십시오. "신심청정, 즉생실상(信心淸淨, 卽生實相)" - 믿음이 청정하면 실상이 생깁니다. 이것이 금강경 제5회 최종회의 메시지입니다. 수보리 존자가 50년 만에 깨달은 것,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가르치신 것, 금강경이 이 500년 동안 전하고자 한 것이 모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본래부터 부처입니다. 다만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이제 깨달으십시오. 당신의 본래 모습을 그리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