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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미래가 아니라 마음이 만든다 | 부처님 말씀

부처의말50:06

Transcription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어쩌면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걱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미 지나간 어제의 후회가 마음 한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아갑니다. 눈앞에 펼쳐진 지금이 순간은 외면한 채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 속을 끊임없이 떠돌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떠돌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불안은 과연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입니까? 누군가 당신에게 강제로 심어 준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능히 온갖 세간을 그려낸다고. 온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니 마음이 짓지 않는 것이 없다고."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전체가 사실은 마음이 그려낸 그림이라는 깊은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불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은 바깥 세상이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붓을 들어 스스로 그려낸 그림입니다.

어느 날 한 젊은 수행자가 스승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숨이 차오를 만큼 가파른 산길을 올라 스승이 머무는 작은 암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스승님, 저는 너무 괴롭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 모래는 또 어떻게 될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저를 놓아주질 않습니다. 이 불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젊은 수행자는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여기 스승님 앞에 있지 않습니까?"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두려워하는 그 내일은 어디에 있느냐?" 수행자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스승은 말을 이었습니다. "불안은 지금 이 자리에 없다. 그것은 내 마음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으로 달려가 스스로 그려낸 그림이다. 너는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불안을 경험합니다. 직장을 잃을까 봐, 관계가 틀어질까 봐, 건강이 나빠질까 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봐. 그 불안들은 실로 다양하고 때로는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서 마치 이미 일어난 일처럼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 불안들의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입니다. 어쩌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그곳에서 온갖 재난과 상실과 실패의 장면들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현실로 착각한 채 이 순간을 고통 속에서 보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분별심이라고 부릅니다. 분별심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개념과 판단과 두려움으로 현실을 더듬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분별심을 키워왔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고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을 끊임없이 판별하도록 훈련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훈련의 결과로 우리의 마음은 쉬지 않고 작동합니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과거를 되짚고 미래를 그려내며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불안은 자라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으로 설하신 가르침 속에 '고(苦)'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고'는 흔히 괴로움으로 번역되지만 그 의미는 단순한 신체적 고통을 넘어섭니다. '고'는 존재 자체의 불만족스러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집착에서 오는 근원적인 고통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도 바로 이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미래가 내가 원하는 대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내일도 오늘처럼 안전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늘 내 곁에 있기를, 내가 쌓아온 것들이 무너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무상합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 변화 앞에서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불안을 낳습니다. 불안은 결국 변하는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구하려는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입니다.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부처님 당시 키사고탐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린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약을 구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측은히 여기면서도 누구도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누군가 그녀에게 부처님을 찾아가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부처님을 만난 그녀는 울부짖으며 말했습니다. "부처님, 제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리다. 다만 한 가지를 가져오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죽음이 없었던 집에서 겨자 씨 한 알을 가져오너라."

희망을 품은 그녀는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집을 찾아가도 죽음을 겪지 않은 집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를 잃은 집, 어머니를 잃은 집, 젊은 남편을 잃은 집, 어린 딸을 잃은 집. 마을의 모든 집에는 저마다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키사고타미는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상함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함께 겪는 존재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깨달음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아들을 놓아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수행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이 사실은 삶의 본질적인 일부라는 것입니다. 변화, 상실, 이별, 죽음. 이것들은 피해야 할 재앙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함께 겪는 삶의 진실입니다. 불안은 이 진실을 외면하려는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잃지 않으려는 마음, 통제하려는 마음. 그 마음들이 모여서 불안이라는 그림을 그려냅니다.

그렇다면 그 그림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 강하게 미래를 통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철저하게 위험을 차단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마음이 그려낸 그림임을 알아차리는 것. 그 그림에서 눈을 거두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불안해서 벗어나는 첫 번째 문입니다.

불교 수행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관찰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보통 마음이 만들어내는 생각이나 감정에 그대로 휩쓸립니다. 불안이 일어나면 그 불안과 함께 미래 속으로 달려갑니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그 두려움 속에서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를 펼쳐 놓습니다. 그러나 수행이 깊어지면 마음의 작용을 그대로 따라가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아, 지금 내 마음이 불안을 만들어내고 있구나." "아, 지금 내 마음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달려가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과 나 사이에 작은 틈이 생깁니다. 그 틈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맛봅니다. 마음이 그린 그림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나 그림을 그린 마음 자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안은 마음이 만든 그림입니다. 그 그림은 너무나 생생해서 우리는 종종 그것이 현실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림은 그림일 뿐입니다. 아무리 생생한 그림이라도 그것은 실제 세계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자리. 지금 이 순간 당신의 폐 속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이 숨결.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귀에 들려오는 이 소리. 이것이 진짜입니다. 이것이 실제입니다. 마음이 그려낸 불안의 그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펼쳐진 이 순간이 진짜 현실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의 세계에서 깨어나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그 돌아옴 속에서 불안은 비로소 그 힘을 잃습니다. 마음이 그린 그림임이 드러나는 순간 그림은 더 이상 우리를 가두지 못합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갈 길이 남아 있습니다. 알아차림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수행으로 삼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수행이 어떻게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지 그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이 만들어낸 불안의 그림에서 눈을 거두어 지금 여기로 돌아오십시오. 그것이 모든 수행의 시작입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유일한 길이요.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괴로움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며 바른 길을 얻고 열반을 실현하는 길이니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천 년 전 인도의 한 숲 속에서 울려 퍼진 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이 가리키는 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림. 이 한 단어 안에 불안해서 벗어나는 길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에서 깨어나는 길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알아차림이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고 덧붙이지 않고 밀어내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숨이 들어오면 숨이 들어오는 것을 압니다. 숨이 나가면 숨이 나가는 것을 압니다. 몸에 긴장이 느껴지면 긴장이 느껴지는 것을 압니다. 마음에 불안이 일어나면 불안이 일어나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입니다.

단순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수행 속에 놀라운 힘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불안을 대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안이 일어나면 우리는 대부분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첫 번째는 불안에 완전히 휩쓸리는 것입니다. 불안이 이끄는 대로 미래 속으로 달려가고 온갖 걱정과 두려움의 시나리오를 펼쳐 놓으며 그 속에서 점점 더 깊은 불안의 소용돌이에 빠져듭니다. 두 번째는 불안을 억누르려는 것입니다.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고 다른 생각으로 덮으려 하거나 바쁜 일로 자신을 채우거나 혹은 무언가에 의존하여 그 느낌을 지워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불안에 휩쓸리면 불안은 더 커집니다. 불안을 억누르면 불안은 더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불안에 휩쓸리지도 않고 불안을 억누르지도 않고 그저 불안이 일어나고 있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 스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은 하늘과 같고 생각과 감정은 구름과 같다. 구름이 아무리 짙게 몰려와도 하늘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구름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하늘이 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이 알아차림의 본질을 정확하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구름과 동일시합니다. 불안이라는 구름이 몰려오면 나 자신이 불안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본래 자리는 구름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알아차림은 구름을 바라보는 하늘로 돌아가는 수행입니다. 불안을 바라보는 고유한 자리로 돌아가는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알아차림의 수행은 네 가지 영역으로 펼쳐집니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 그리고 법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포괄합니다.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가?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 있는가?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마음이 어둡고 혼란스러운가?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현상임을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이 알아차림 속에서 우리는 경험의 주인이 됩니다. 경험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바라보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알아차림은 어떻게 수행합니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호흡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숨결을 느껴 보십시오. 코 끝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시원함을 느껴 보십시오. 가슴과 배가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움직임을 느껴 보십시오. 내쉬는 숨과 함께 몸 안에 긴장이 조금씩 흘러나가는 것을 느껴 보십시오. 이것이 알아차림의 시작입니다.

호흡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과거의 호흡은 이미 지나갔고 미래의 호흡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들어오고 나가는 이 숨결만이 진짜로 존재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동으로 우리를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옵니다. 마음이 과거로 달려가거나 미래로 흘러갈 때마다 호흡으로 돌아오는 것. 이것이 알아차림 수행의 핵심입니다.

어느 선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 무엇이 달라지셨습니까?" 스승이 답했습니다. "밥 먹을 때 밥을 먹고 잠 잘 때 잠을 잔다." 제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스승이 웃으며 답했습니다. "아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밥 먹을 때 온갖 생각을 하고 잠 잘 때 온갖 걱정을 한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알아차림의 전부가 담겨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 밥맛을 온전히 느끼는 것. 걸을 때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촉을 온전히 느끼는 것.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말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과 완전히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알아차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마음은 끊임없이 달아납니다. 방금 호흡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마음은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대화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이번에는 저녁에 해야 할 일들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수행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음의 본성입니다. 마음은 원래 이렇게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수행의 요점은 마음이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달아났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달아남을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이미 알아차림입니다. 마음이 100번 달아나면 100번 돌아오면 됩니다. 그 돌아옴의 반복 속에서 알아차림은 점점 깊어집니다.

불안이 일어날 때 알아차림은 어떻게 작용합니까? 불안이 밀려올 때 잠시 멈추어 이렇게 해 보십시오. 먼저 지금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느껴 보십시오. 가슴이 두근거립니까? 어깨가 굳어 있습니까? 배가 긴장되어 있습니까? 이렇게 몸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 마음을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옵니다. 다음으로 그 느낌의 이름을 붙여 보십시오. "아, 지금 가슴이 조이는 느낌이 있구나." "아, 지금 어깨가 무거운 느낌이 있구나."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순간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느낌과 나 사이에 약간의 거리가 생깁니다. 나는 그 느낌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에서 그 느낌을 바라보는 자리로 조금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다가 변하고 사라지는 무상한 현상임을 보게 됩니다.

이 알아차림 속에서 불안은 조금씩 그 힘을 잃습니다. 불안을 없애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 바라봄 속에서 불안은 스스로 변하고 흘러갑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현상이 무상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불안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불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불안은 일어났다가 반드시 사라집니다. 우리가 불안을 붙들고 있을 때 불안은 더 오래 머뭅니다. 그러나 불안을 알아차리며 그저 바라볼 때 불안은 자연스럽게 변하고 흘러갑니다. 강물 위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불안도 흘러갑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나뭇잎을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바라봄이 알아차림이고 그 알아차림이 수행입니다.

알아차림은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조용한 방에 앉아 눈을 감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조용한 시간에 앉아서 수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일상의 모든 순간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지금 깨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세수를 하며 차가운 물이 손에 닿는 감촉을 알아차립니다. 밥을 먹으며 음식의 맛과 씹히는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길을 걸으며 발바닥이 땅을 누르는 감촉을 알아차립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지금이 순간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일상의 모든 순간이 알아차림의 기회가 됩니다. 참 전체가 수행의 장이 됩니다.

알아차림 수행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사실 매우 단순한 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괜찮습니다. 지금 이 순간 숨을 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재난은 대부분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은 충분합니다.

이 단순한 진실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알아차림이 가져다주는 선물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단지 순간적인 안도감을 주는 기술이 아니라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수행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매 순간의 알아차림이 어떻게 쌓여서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지 그리고 일상의 모든 순간이 어떻게 수행의 자리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숨결을 느껴 보십시오. 들어오는 숨, 나가는 숨. 이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깊은 수행입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 앞에 처음 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낍니다.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갔으니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현재의 마음조차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 이 순간 분명히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마음조차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르키는 것입니까?

이 물음 속에 사실 불교 수행에 가장 깊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현재 이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현재의 마음은 너무나 살아 있어서 고정된 형태로 붙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강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움직이며 불꽃처럼 살아 춤춥니다. 그 흐름을 붙잡아 고정시키려는 순간 우리는 이미 현재를 놓칩니다. 알아차림은 그 흐름을 붙잡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흐름과 함께 흐르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살아서 움직이는 그 흐름 속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사 문화에 오랫동안 수행한 노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은 수십 년을 산속에서 수행하며 경전을 읽고 참선을 하고 계율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늘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딘가 저 너머에 있는 것 같아서 아무리 수행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그 스님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물이 손 위로 흐르고 그릇이 깨끗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저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저 뜨거운 물과 그릇과 손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스님은 무언가를 알았습니다. "아, 이것이었구나. 수십 년간 찾아 헤맸던 것이 항상 여기 있었구나." 깨달음은 어딘가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여기 있는 것. 그것이 수행의 완성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수행은 일상에서 분리된 특별한 활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행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바로 이것입니다. 밥을 먹는 것이 수행입니다. 설거지를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아이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 수행입니다. 동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수행입니다. 길을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다만 그 모든 순간에 알아차림이 있을 때 수행이 됩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고 몸만 그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 지금 이 순간에 있을 때 그것이 수행입니다.

불교에서는 수행의 방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입니다. 지혜는 사물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는 능력이고 자비는 그 지혜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알아차림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키웁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타인의 마음도 더 섬세하게 느끼게 됩니다. 내 안에 불안과 두려움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 타인의 불안과 두려움에도 더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자주 고통받는지를 알면 다른 존재들도 똑같이 고통받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 앎에서 자비가 피어납니다. 자비는 특별한 감정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 사람도 나처럼 불안하고 나처럼 두렵고 나처럼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마음입니다. 알아차림이 깊어질수록 자비는 자연스럽게 넓어집니다.

일상 속 수행에는 특별한 형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분들에게는 몇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도움이 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바로 휴대전화를 집어들지 마십시오. 잠시 단 몇 번의 호흡 동안만이라도 지금 이 순간을 느껴 보십시오. 오늘 하루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몸의 상태를 느껴 보십시오. 마음의 상태를 느껴 보십시오. 이 짧은 알아차림이 하루를 전혀 다르게 시작하게 해 줍니다. 하루 중 틈틈이 잠깐씩 호흡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하십시오. 회의 전 잠깐, 밥을 먹기 전 잠깐, 잠자리에 들기 전 잠깐. 이 짧은 순간들이 모여서 알아차림의 힘을 키웁니다. 그리고 불안이 밀려올 때 그것을 억누르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 바라보십시오. "이 불안이 지금 내 몸에 있는가?" "이 불안이 어떤 느낌인가?" "이 불안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이렇게 바라보는 것 자체가 불안의 힘을 약하게 만듭니다.

부처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한 가지 인상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도 인도 대륙을 두루 다니시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왕을 만나고 거지를 만나고 살인자를 만나고 창녀를 만나고 아이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만남에서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온전히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과거의 만남을 떠올리거나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과 온전히 함께하셨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자비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사람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 이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듣는 것, 이 사람에게 온전히 응답하는 것. 이 온전한 현재의 자비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일상 속 자비의 수행입니다.

알아차림 수행을 오래하다 보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변합니다. 전에는 불안이 찾아오면 적이 나타난 것처럼 두려웠는데 이제는 불안이 찾아와도 그것을 하나의 신호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아, 지금 내 마음이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구나." "아, 지금 내 마음이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구나." 이 신호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불안은 적이 아닙니다. 불안은 내 마음이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를 억누르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듣고 바라보는 것. 그것이 성숙한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들을 때 우리는 종종 발견합니다. 불안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잃을까 봐 두렵다는 것은 그것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실패할까 봐 두렵다는 것은 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불안의 뿌리에는 언제나 삶을 향한 열망이 있습니다. 그 열망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 열망을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불안을 지혜로 바꾸는 수행입니다.

삶은 언제나 불확실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불확실성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 수행을 통해 우리는 그 불확실성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불확실성을 두려워하고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의 확실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숨결은 확실합니다. 지금 이 발바닥 아래 땅은 확실합니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이 확실한 것들 위에 서는 것.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확실한 현재 위에 뿌리를 내리는 것. 그것이 알아차림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한 노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 곁에 있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 이 순간이 언제나 충분하다." 이 짧은 말씀 속에 수십 년 수행의 결정체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언제나 충분하다는 것. 더 나은 미래가 와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 지금 여기 숨 쉬고 느끼고 바라보고 존재하는 이 순간이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알아차림 수행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입니다. 불안해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온전한 삶 속에서 불안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잃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비유하셨습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한 도구입니다. 강을 다 건넌 후에는 뗏목을 머리에 이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차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불안해서 벗어나기 위해 알아차림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수행이 깊어지면 알아차림은 수단이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가 됩니다. 특별히 수행한다는 생각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지금 이 순간과 함께하는 삶. 밥을 먹으면 밥맛을 느끼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느끼고 누군가 웃으면 그 웃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삶. 그것이 수행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입니다.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매 순간 알아차리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달아나면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씩 더 지금 이 순간과 가까워지면 됩니다. 그 조금씩에 가까워짐이 쌓여서 삶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지금 이 순간 잠시 멈추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의 숨결을 느껴 보십시오. 들어오는 숨, 나가는 숨. 지금 당신의 몸이 느끼는 것을 느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바라보십시오. 판단하지 않고 고치려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수행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는 알아차림입니다. 불안은 마음이 만든 그림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마음이 만든 그림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은 살아 있는 현실입니다. 그 현실 위에 서십시오. 그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리고 그 뿌리 위에서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숨결 속에 있습니다. 지금 이 알아차림 속에 있습니다. 이 순간이 곧 수행입니다. 이 순간이 곧 삶입니다. 이 순간이 곧 깨어 있음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