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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37장 18절로 2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십시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서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루벤이 듣고 그들을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하고 또 루벤이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름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예. 오늘 말씀은 도단에서 어 있어진 일입니다. 어 도단에서 어 요셉은음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어 구덩이에에 던져지고 어 또 어 노예로 팔려갑니다. 이 모든 것들은요. 어, 그 이제 예수님의 고난을 미리 앞서 어, 이렇게 보여 주신 겁니다. 예. 하나님이에 그 버리시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그 어 요셉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 버려지심의에 모습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무엇을에 우리에게 말씀하심인지에 말씀을 나눠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 18절 한번 볼까요?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어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여기 그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는음 그 히브리 원어를 그대로 지격하면요.음 꿈의 주인이 오는도다입니다. 어, 여기 꿈꾸는 자라고 할 때 여기 바알이라는 단어가 쓰여져요. 그래서 어, 이 꿈의 주인이 오네. 에, 자, 우리가 저 꿈의에 주인을 죽이자. 에, 그러면 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번 보자. 이 이것은 굉장히 그 이 꿈의 주인을 오니까 환영하고 뭐 반가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굉장히 조롱하고 빚는 말입니다. 저 꿈의 주인을 죽이면에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보자. 그니까 단순히 요셉을 지금 미워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어 이 요셉 꿈의 꿈의 주인을 죽이면 어 하나님이 요셉에게에 보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라는 뜻이에요.
어 그 20절 보세요.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아, 저 꿈의 주인 꿈을 통해서 우리의 그 주관자가 되고 우리의 머리가 되겠다고 꿈이 그런 내용이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말한 저 꿈의 주인 요셉을 죽여 버려도 이래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이루어질까? 그게 될단 말인가? 우리가 한번 보자. 저 한번 처치해 보자. 그래도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지 우리가 한번 해보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저 꿈쟁이만 죽이면 하나님의 뜻도 끝난다라는 거죠. 이것은음 그 동생 요셉에 대한 시기와 질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하나님이 행하심에 대한 적계심이에요. 하나님께 대한 적계심. 이게 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걸 죄성이라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대한 반감 싫은 거예요. 그게 죄예요. 이것은 사탄의 생각과 지금 형제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어 사탄의 생각, 사탄의 역사가 뭐냐? 어, 그러니까 왜 사탄이에 그 있어지게 됐나? 타락한 천사잖아요. 왜 있어 됐나? 뭐 신학자들도 고민을 많이 하고 생각하고 나눕니다. 에,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움 속에서만 있었는데 왜 이런 사탄이라는 타락한 천사가 왜 존재하게 됐나? 음. 이것에 대해서 어 하나님의 형상 그니까 아주 독특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죠. 어, 천사는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가장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어 놓고 거기에에 하나님의 사랑을 퍼보어 주시는 거예요. 이거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못 견딘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감과 적개심이에 그 나타난 거죠. 이게 이제 사탄의에 모습입니다. 하나님의에 형상인음 저 사람을 그러니까 멸망시키자는 거죠.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적게심을 갖고 반역을 일으키고 나서 운명이 결정됐잖아요. 영원한 불못으로 지옥으로.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탄에 하고자 하는 건 그겁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끔찍하게 사랑했던 그 하나님의 형상인 저 사람을 끌어들여서 다 멸망시키자. 다 저들을 지옥의 불구덩이로 하나님을 반역했던 나와 똑같은 그런 적심을 품은 자들이 되게 해서 하나님의 심판때 앞에 쓰게 되면 뭐 하나님이 어쩔 건데? 나도 사탄이죠. 나도 그때 되면 뭐 어떻게 하실 건데? 이게에 사탄의 생각입니다. 그리고서 그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에 철저하게 그 끌어들여서 멸망의 길로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는게 사탄의 일이죠. 어, 이런 생각은요. AW 토저나 찰스 펄전이 했던 말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질투해서 시작된 일이고 그리고 끝까지에 함께 그 하나님의에 심판 때까지 감으로 인해서 자기들이 살길을 찾는 거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해서 어 그 질투심 때문에 사탄은 시작했지만 사탄이 전혀 몰랐던 사실이 있어요. 아니 지금도 이 사실에 대하여서 어 드러났지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탄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어, 천사가 몰랐던 일이에요. 천사가 몰랐던 일. 베드로 말씀에 그러잖아요. 천사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걸 알기를 원한다. 천사도 몰랐던 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들어가는가? 이건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일. 그게 뭐예요? 이 이 아들의 십자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죄짓게 하고 그 죄로 인하여서 자기와 같은 운명 공동체가 만들어 버린 그런 존재가 됐는데 이런 죄악된 존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뭐예요? 아들을 십자가에내어 주시는 거예요. 이건요 사탄이에 도저히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고요.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해결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와 넓이고 부요함인데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죠. 사탄은 알아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온 우주 만물의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는 그 모습을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천사는요. 그 영광 속에 보았던 자고 있었던 자예요. 그런 하나님이 그 3위 중 하나님이신 제 2위 성자 하나님이 죄인들의 죄를 해결하시고자 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어지고 하나님이 외면당하시고 버려지는 그 일이 있어진다고 이건요 사탄의 그 지혜와 사탄의 그 모든 자식 자신의 모든 걸 동원해도 이해할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게 사탄의 생각이고요. 이런 사탄의 생각적 생 똑같은 발상들이 오늘 형제들이 하고 있는 모습이고요. 그리고 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들의 생각입니다. 어떻게 어 하나님이 창조주가 피조물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피조 세계에 몸을 입고 오셨다고 그리고 그분이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아 뭐 말이 그런 거지. 이게 어떻게 가능해? 그게 그게 어떻게 신이 어떻게 그런 일까지 하실 수 있어? 어 그렇게 하시겠다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적게 하고 반대하는 겁니다. 저 요셉을 죽여 버리면 그런 일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없는 거지. 그렇게 될 수가 없어. 사탄의 생각이죠.
보세요. 우리 한번 21절 볼까요? 자, 루벤이 이 형제들의 이 이야기를 그대로 듣습니다. 그리고서는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서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루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어때요? 여러분 느벤의 말이 괜찮아 보이고 오아 보이죠? 이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보면에 자기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 나머지 형제들의 그 모든 계략을 앓으니까 그것들을 다 무마시키고 살려내서 어 살려내서 그 다시 그 구덩이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내 가지고 아버지 야곱에게로 데리고 가려고 했던 루벤의에 그 속깊은 마음이죠.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의에 구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에 있어서 루벤이 말한 대로 되면 돼요, 안 돼요? 예. 똑같습니다. 표현만 그 형제들이나 루벤이나 표현만 좀 달랐다 뿐이지 사실은 똑같아요.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인간은 원치 않아요. 그 일을 돕지 않습니다. 그 일에 함께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요셉은 반드시 구덩이에 던져질뿐만 아니라 끌어올려져서 애굽에 팔려가야 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고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늘 이 부분에 대하여 반역심을 갖고 있고요. 이렇게 되어지는 일에 대하여 억울하고요. 싫어요. 그리고 나름대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하는데요. 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립니다. 한번 여쭤 볼게요. 에 신앙생활을 우리가 어 횟수는 다르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죠. 말씀대로 어 살고 또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몸부림치면서 왔고 또 어쨌든 순종이라는 것을 또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이라는 것을에 나름 해 왔어요. 자, 그런데 아, 그 끝이 구덩이고 그리고 어, 노예로 질질 끌려가는 우리의 같은 짐승처럼 그런 처절한 실패로 어, 귀결이 되고 있다면 어때요? 받아들여집니까? 여러분 이게 그 정상이에요.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 안 되는 여러분이 비정상입니다. 왜요? 구원 역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 역사 측면에서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알려 주시는 바는 그겁니다. 예. 하나님은 작정하셨어요. 그 작정은 이 세상에서 어 잘 먹고 잘 살고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작정하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의 작정은 영혼과 영혼입니다. 영혼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과 함께 교재하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었고 그 사람과 사랑하기를 원했어요. 근데 하나님을 떠났죠. 이 이 떠났던 이 하나님의 형상인이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내어 주셨어요. 그리고 이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이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를 살려내서 받으셨어요. 받으셨어요. 왜 받으셨어요? 이 이 세상에서 이제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라고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두셨던 영원한 작정에 대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 때문에 받으신 거잖아요. 영원을 받으신 겁니다. 구원 역사예요. 이 이 구원 역사 속에서 반드시 내 인생은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믿음대로 살아왔고 순종한 나의 구원 역사는 그 귀결이 구덩이고 노예로 끌려가는 비참함이고 이 세상 가운데 그렇다는 거예요. 이 세상이 끝나고 나서 하나님 앞에는 찬란한 영광으로 구원 역사가 우리에게 임하죠. 세상 역사는 그렇습니다. 세상 역사는 내가 아 내가 기독교 신앙을 잘하고 또 교회 잘 섬기고 또 신앙 지식이 있어서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그러면 세상 역사의 관점 그 측면에서 보면 내가 잘돼야 돼요. 내가 행복해야 돼요.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은혜라고 말하기 시작해요. 그런데 그거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적계심이고 반역이에요. 그렇게 되지 않는다라고 하면 됐든 반역심이 생기죠. 하나님은 사랑이라며. 하나님은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데 하나님의 도움은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를 영원 속에서 사랑했고 영원토록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회복하심에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요. 루벤의 생각대로 되질 않습니다. 또 되어서도 안 돼요. 그래서 세상 역사가 아닌 세상 역사대로 그 좀 하나님이 좀 해 주세요. 세상 역사대로 나는 어 하나님의 도움 받고 살래요. 예수님을 진짜 만난 거 아니에요. 듣기 싫지만 사실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 하나님 잘 믿었으니까 세상에서도 잘 돼야 그게 정상이잖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은요. 예수님을 진짜 만난 거 아닙니다.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이 이 세상 가운데 우리에게 주신게 있어요. 지금 이제 그것을 살필 겁니다. 억울하지 않습니다. 어 내가 이 남편 만나서 내가 진짜 억울하다는 사람이 말씀 잘 들으세요. 내가 이 아내 때문에 내가 진짜 고생하고 있다라는 남편들 잘 들으세요. 자, 세상 역사가 아닌 구원 역사대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 우리에게 무엇을 정말로 복된 걸 주셨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23절 볼까요? 요셉이 형들에게 이름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여기 그 채색옷을 벗기죠. 어 이 형들이 지금 요셉의 옷을 벗겨요. 이 긴 옷 그 색깔이 있는 이 그 긴 옷이죠. 이게 이것은 관리자의 옷이고 왕의 왕들이 입게 되는 옷이고 어 일꾼들은 입을 수 없는 옷입니다. 근데 이 옷을 벗겨요. 이 이 옷이 벗겨짐에서 하나님의 어떤 일하심의 모습이 있는지에 우리가 한번 더 살펴볼까요? 창세기 37장을 한번 보세요. 31절이요. 아 형들이죠.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순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해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오신가 보소서. 이 채색 옷을 어떻게 해요? 벗이고 거기다가 순 염소를 죽여서 그 피를 바르죠. 그리고서 그것을에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게 아들의 옷인가 보세요. 채색 옷입니다. 이게 이 이 설명을 통해서 지금 말씀하시고자 하는게 무엇인 것 같아요? 예. 채색옷에 피가 묻혀졌다는 것은 바로 아들의 죽음을 말하는 거죠. 아들이 이렇게 죽었어요. 실제로 그 채세옷을 보면서 통곡하잖아요. 예. 바로 이 채색옷이 벗겨진다라는 것은 다른 설명이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에 피가 발라져서 바로 이 죽음을 가지는 설명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대로 보여 주는 거예요. 예표하는 거죠. 존재의 죽음이에요. 요셉이 죽었다. 누가 죽었다는 거예요, 지금? 장착. 이 요셉의 죽음을과 같이 죽을 자가 누군 거예요? 죽으러 올 자가 누군 거예요? 실제로 죽으신 분이 누구예요? 예수님입니다. 존재의 죽음입니다. 예수라는 존재의 죽음을 이렇게 채세곳을 벗겨서 순염소를 죽여서 그 피를 적셔 가지고 죽었다라고 내놓는 거예요. 예수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24절도 보세요.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이 이 구덩이는 그 뽀르라는 단어입니다. 에 뜻은에 그니까 광야 사막 같은 데서 보면 구덩이라는 그런 거잖아요. 이렇게 물이 스며 들어와서 고이는 곳. 그래서 물이 고는 곳이라는게 이 보르예요. 그리고 또는 우물이란 뜻입니다. 또한 이 이 우물 물이 고이는 곳이라는 설명뿐만 아니라 무덤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그래 시편 30편에가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이 무덤이 보르예요. 구덩이죠. 예. 구덩이로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그런데 지금 요셉이 던져진 이 구덩이를 뭐라고 얘기하냐면 빈 구덩이라고 하죠. 구덩이가 비어 있다. 그리고 어 물이 없는 구덩이다. 빈구덩이. 빈구덩이 빈무덤이죠. 빈무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요셉이 이 빈 무덤에 던져집니다. 갇혀요. 똑같아요. 예수께서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가 무덤에서 장사 지낸 바 되시고 묻히시죠. 그리고 그분이 빈무덤이 상징하는 건 그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시는 그 모습을 설명하고자 함입니다.
여러분, 그 우리 본문 속에 요셉이 형들에게 버려졌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나요? 안 나타나죠. 오늘 본문 속에서는 요셉이 형들에게 잡혀서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아무런 표현이 안 나타나요. 그런데 요셉이 반응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우리 창세기 뒷부분에 나타나요. 42장가 보세요. 42장 21절가 보세요.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오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나중에 요셉이 그 형제들을 정탄꾼으로 몰아 가지고 그들을 감옥에 갇혀놓 가둬 버리잖아요. 이때 형제들이 하는 말이에요. 그때 우리가 요셉을 동생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을 때 동생 요셉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으며 우리에게 애걸하지 않았느냐? 애원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그때 그 괴로움을 무시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괴로움 속에 있다. 그 설명이에요. 요셉이요.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아무런 표현을 한 게 아무 표현도 안 한 게 아니라는 거죠. 울부짖었어요. 살려 달라고. 왜 나를 버리냐고 애걸했습니다. 똑같습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면 그리고 그분은 죽으러 오신 분이고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하게 아시고 계시고 되어질 일을 다 아시는데 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사람들에게 버려지고 또 하나님께 울부짖고 이런 모습들 보세요. 이사야서 53장가 보시면 그는 이 이사야 53장은 메시아 그리스도의 고난시잖아요. 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오실 그리스도의 메시아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버림받고요. 무시당하잖아요. 어 하나님께서 어 이렇게음 버리신 겁니다. 사람들에게 귀여기집을 받지 못하도록 이게 버리신 거예요. 무시해요. 어 그 이 이사야서 그 53장 10절도 보세요. 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버려지는가? 그것이 10절이에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그니까 하나님이 버리신 겁니다. 하나님의 원하심 때문에 사람들이 무시하는 거예요.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게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버리심 받으신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어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셔야 할 그 어떤 이유도 또 그 어떠한에 죄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버림을 받으세요. 왜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시나? 어 마태복음 27장 46절에가 보면음 십자가에서 예수님의에 이런에 부르짖음 하나님께 대한 애걸이 나오죠. 제 9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엘리 라마 사박단이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여러분 이 중요해요. 모든 이 땅에 태어난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은요. 에 에 하나님 앞에 다 어 반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게 하는 죄된 본질과 죄성을 갖고 태어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죄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이 세상이 없어지는 그날 이 피조 세계가 끝나는 그날 최후 심판의 그날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하나님 하나님 나를 정말 버리십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에게 정말로 거두실 겁니까? 하나님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실 겁니까? 하나님 나를 이렇게 처박아 두실 겁니까? 그것도 영원토록 이 일이 반드시 있어집니다. 최후 심판의 날에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요. 지금 예수님께서 엘리엘리 남아 사박단이라는 이 하나님 하나님 어찌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이 애걸과 애온과 이 부르짐에 들어가게 되는 어 하나님의 형상의 사람들 은혜 입은 자들이고 교회이고 성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존재 안에 그 존재적 의가 이루어진 그 사람들은요. 이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안에서 이 최후 심판을 함께 받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날 그날이 심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백보자 심판 앞에서 어떤 심판이 벌어지냐면 그때 멸망의 심판이 아니라 그 심판은 영원한 하나님 앞에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같이 나누는 왕노릇하는 보상이죠. 이걸 사실은 뭐 면류관을 주고 뭐 개털 못 이런게 아니라이 영광을 받는 상급입니다. 근데 이게 심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철저한 예수님의 버려지심이 있어진 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한 자기 백성들 교회 교회 교회가 받아지시는 받아들여지는 그 놀라운 일이죠.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 죄 없으신 이 아들 하나님을 왜 버리셨는가? 왜 버리셔야만 했는가? 마귀 사탄이 지금도 이건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서 경악을 하며 이해할 수 없는 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사랑을 알죠. 이 은혜를 알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내가 예수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 예수 안에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갔고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 안에서 예수와 함께 영광을 같이 누리게 된다는 이 복된 것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내가 조금 더 불편하고 모양이 빠지고 힘들고 어렵고 하는 것에 대하여 억울해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 가지고 내 남편이 저 사람과 내 아내가 그리고 나는 내 자녀는 이 끊임없는 비교와 끊임없는 더 가짐과 이런 생각들은 다 뭐예요? 하나님이 예수를 버려 나를 받으셨다라는 것에 대하여 진짜 하나님 사랑을 모른 건 진짜 이 예수님을 엘리렐리 하는 이 예수님을 진짜 못 만난 거예요. 만나면 원망 불평 없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금 오늘 나를 살려 주게 하셔서 오늘 나에게 예수를 왜 버리셨는지 그 예수를 버린 그 놀라운 그 진리를 내 안에 사실이 되게 하신 이것에 감사합니다. 이거면 됩니다. 내가 이 땅에 와서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를 알게 됐고 이 진리가 됐다는 것만으로 나는 이 땅에 온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예수를 통하여 받은 이 사랑을 알게 됐기에 하나님 저는 지금의 제 삶에 대하여 감당하겠습니다. 너 몸 아파서 죽을 때까지 몸 아프고 질고 질고하다가 죽어라. 아멘. 하겠습니다. 너 가난하게 살아라. 그래서 가난한 자도 예수를 잘 믿는다는 거 보여라. 아멘. 아멘. 안 하잖아요. 하나님 돈 주세요. 제가 일단 줘 보세요. 제가 그 돈 어떻게 쓰나? 다 그러잖아요. 예수가 우리에게 온 것, 예수를 가진 것에 대한 내가 어떠한 사랑을 입 입었고 어떠한 영광 가운데 지금 살고 있으며 그 영광이 나에게 어떻게 영원토록 주어졌는지에 대한 감각이 없는 거예요. 중생은 이 감각이 생긴 것을 중생이라 그러는 겁니다. 거듭났다면서요. 거듭났는데 세상에서 여전히 세상 것으로만 사는 것에 기뻐하고 울고 웃고 그게 무슨 거듭난 겁니까? 세상이 어찌할지라도 세상이 나를 울고 웃게 할 수 없다. 나는 이미 예수를 가진 자로 웃고 있는 존재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감당 못하는 거예요.
로마서 5장 8절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우리가 우리가 다 회개하고 우리가 막 이렇게 하나님 앞에 거룩해져 있고 그랬을 때 예수님이 죽으신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적기심을 품고 반역자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원치 않았을 때 그때 예수님이 죽으셨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 예수님을 버리셨고 죽이셨대요.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나는 예수와 너를 맛꿨다. 제금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나는 내 아들을내어 주고 나는 너를 아들로 삼았다. 딸로 나는 너를 받았다. 내 사랑 어쩔래? 이 이 어쩔래?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운한 감정,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건 그래도 너무하잖아요라고 생각하는 마음. 꿈의 주인인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래요라는 이 적심을 갖고 있는 우리 속에 죽여도 어떻게 되나 보자. 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확정하셨어요. 이미 예수님을내어 주셨 못먹은 하나님 앞에 대적하고 반역기를 들고 그렇게 했던 나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미 나를 예수를 내어주 이미 나를 받으셨고 사랑하셨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일에 나의 그 어떠함이 장애가 안 됐어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이렇게 뚜렷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의 이 예배 속에 하나님의 이 말씀 속에 우리가 이런 존재가 하나님이 되게 하셨고 우리를 받으셨다라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지도 못했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치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셨다고 이렇게 나를 사랑하신다고. 네, 맞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2,000년 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오시고 이때 우리를 나게 하셔서 충분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렇게 만나게 한 이처럼 풍성한 복음의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이 사랑을 깨닫고 누리게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억울하세요?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 뭐가 그렇게 짜증나고 뭐가 예수를 믿고 신앙하는데 있어서 뭐가 그렇게 그 어 다오 다오 다오 어 거머리처럼 하나님 하나님께 뭐 뭐 맡긴 적 있어요? 로마서 8장도 보세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 그러면 이제 됐든 그러잖아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다 그런 것에만 막 은혜가 받고 아멘하잖아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예. 그 모든 것에는요. 에 우리가 벌거벗음, 사망 어 그리고 우리가 어 그 고통 속에 들어가는 것이 모든 것을 다 함께 설명하는 거예요. 좋은 것, 내가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도저히 받기를 원치 않았던 그 모든 것 내 안에선 어 내 가정에서는 내 자녀에게서는 나에게서는 도저히 상상도 안 하고 있을 수도 없었던 그 모든 것 주신대요. 근데 그 앞에 전제가 있지요. 예.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도 남녀노소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 거듭난 사람 성도를 말해요. 예 그에게내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그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받는 거예요. 하나님이 건강케 하시면 그 건강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건강을 통하여 무엇? 하나님이 돈을 주시면 이 돈으로 하나님이 이 돈을 통하여 어떠한에 영광을 나타내시라고 나에게 이 돈을 바뀌셨을까? 고민하고 그걸 사용하는 거죠. 하나님이 조금 더 인컴을 늘게 해서 돈을 맡겨 보면 그 사람을 그 사람이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내어 주신 그래서 그 아들을 죽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딸로 받아들여짐을 받은 자인지 아닌지 돈을 맡겨 보면 알아요. 그 돈을 가지고 그가 우선 순위를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그 물질에 대하여 기도하며 쓰는지 아니면 잘됐다. 이번에 이번에 이거 가지고 내가 원하던 백을 사고 내가 원하던음 그거 여행도 가고 그러니까 우선순위가 여러분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우리가 먼저 기억을 잘하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셔서 또 그 어 그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셨다. 이게 뭘 도대체 거져 주셨다는 거예요? 어, 예수님 자기 아들을 버리시고 그리고 어, 우리를 자격 없는 저와 여러분을 어 아들들로 받으시는 일을 거져 주셨대요.
음. 여러분, 음 하나님이 정하신 예, 구원 방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창세기 4장에 보면에 아벨은 받고 또 가인은 안 받고 그렇게 돼 있지 않고요. 아벨과 그의 재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재물은 거절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요. 내물에 걸려 있지 않아요. 왜냐면 어 뭐 아벨은 자기가 한 것음 뭐 그 농사 지은 것에 대하여 그 수학물을 드린 거고요. 가인도 자기가 한 것 어에 대한 그 수학물을 그대로 한 거고요. 그래서 이게 뭐 저 곡식이냐 뭐 양이냐라는 그런 측면이 아니라 묶여 있는 거예요. 아벨과 아벨과 그의 재물. 그러니까 아벨이라는 존재 안에서의 재물이죠. 가인과 가인이라는 존재 안에서의 재물이죠. 여러분 이걸 잘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은 아벨을 받으실 때 이 아벨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그 안에서의 존재가 된 것. 그게 재물이에요. 예수님을 우리가 존재로 만나고 그 예수님의 존재적 의를 갖는 것이 구원받은 의예요. 이것은 정말 속의죠. 그러나 가인과 그의 재물처럼 형식과 모양을 가지고 그것을 내 나타내면서 계속하는게 율법의 행함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계속하는 이것은 겉의죠. 이것은 상 이것은 우리 안에 구원과는 상관없는 의예요. 이 속의 구원받은 의, 이 존재적 의는 예수님의 존재가 된 그 존재적 의예요. 그럼 그게 도대체 예수님의 존재 안에서의 그 예수님의 존재가 된 의는 도대체 뭘 말하는 거냐? 예수님 안에서 생겨진 일 있잖아요. 똑같아요.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지고 종으로 팔려가고 하는 일이 요셉에게 있었고요. 그 요셉에게서 있었던 일은 예수님에게 있어진 일이고요. 그 예수님에게 있어진 일은 우리에게 있어진 일입니다. 무엇 때문에? 구원 역사 때문에. 그 안에서 그 안에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하나님께 버려지는 그런 아픔과 그런 어려움들을 겪게 하는 그 속에서 비로서 우리 안에 예수님이 버려지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받아지는진 것처럼 우리가 이 예수님 앞 예수님 님의 존재 안에 들어가서 내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었던 나의 존재가 버려지고 예수님 안에서 다시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 그것을 갖는 겁니다. 그니까 예수님에게서 생겼던 일을 똑같이 겪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받으셨다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아무 일도 이 세상에서 아무 일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그냥 받으시는게 아니라 요셉처럼 또 예수님처럼 내 인생을 주시고 내 인생 속에서 버려지는 일. 그러나 그 버려지는 일을 통해서 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짜 만나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짐을 얻는 겁니다. 이게 신앙이에요.
시편 40편 보겠습니다. 다윗의 신데요.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다윗을 끌어올리시듯이 이 다윗의 고백이 그런 거잖아요.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셨고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다 아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지금 다윗이 하는 그 고백의 쉽니다. 새 노래라는 것은 구원의 노래예요. 어 내가 아 그 이 기가 막힐 웅덩이 속에서 건짐을 받고 보니까 메시아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참으로 붙들게 되었다. 진짜 그것을 소망하고 의지케 되었다라는 그 고백의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 안에서 어 지금 다윗이에 자기가 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이렇게 건짐을 받는 이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일임을음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질 일임을음 지금 미리 맛보면서 고백하는 겁니다. 왜냐면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이라는 이 다윗의 이 표현은 정확하게 그가 사무 그 사울한테 쫓길 때인지 아니면 아들 압살롬한테 쫓겨서 그럴 건 그럴 때인지 아니면 그 뭐죠? 자신의 죄 가운데, 고통 가운데 하는 말이 이제 정확하게 어느 때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에 이런 어려움과 어 아픔 속에서 건짐을 받았거든요. 그것을 기억하면서 쓰고 있는 시예요. 그러니까 아, 지금 다윗은 이런 가운데서 내가 이렇게 건짐을 받고 살아난 것을 보니까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질 것에 대하여서 미리 그것 또한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맛보고 감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새 노래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그 도단에서 어 벌어지는 일, 요셉에게 벌어진 일이고요. 예수님에게서 벌어진 일이고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받으신 거예요. 내 삶에 아픔이 있고 고난이 있는 것을 아 그냥 아 내가 재수가 없구나. 내 인생을 내가 실패했구나. 그거는 의미가 없어요. 성도의 인생은 우연 없습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세요. 구덩이든 팔려가는 거든.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인생 속에 하실 거고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 현실에 이 어려움이 있구나. 그게 믿음이에요. 그리고 이 믿음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내어 주신 뚜렷한 것처럼 우리를 뚜렷하게 이미 받으셨다라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에 진리가음 무엇인지를 안 사람은요. 진리가 어 되어서 그 진리가 된 자의 실제적인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빌라도 교인이 있어요. 진리를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실제가 되어서 살지는 않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가 진리가 실제가 되도록 우리에게 도단을 주신 거예요. 그리고 이 도단에서 진리 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진짜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진리를 안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진리를 실제가 되는 그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도단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진짜 만난 자의 참다운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 크죠. 엄청납니다. 근데 이 능력보다 더 엄청나고 큰 능력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예수님을 정말로 그 마음에 모신 자가 같게 되는 어 삶이며 같게 되는 마음이에요. 어 죄를 거부하고 죄와 싸우고 자기의 생각을 파묻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이 땅에서 손해보고 억울하고 끝이 구덩이고 뻔히 보이는 실패가 있는데도 그 길을 간다. 여러분 이거는요 구원 시켜 놓은 그래서 하나님을 그 부르심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서만 벌어지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입은 자가 성도이고 그가 진짜 교회예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는 그 하나님이 오라 하는 그곳이 그 결과가 가시밭 길이고 좁은 길이고 협착한 길이고 내가 원치 않는 십자가지는 길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데 예수님이 그 길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예수님을 진짜 믿기에 우리는 그 길을 가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에요. 아무나 못 가요. 근데 내가 그 길을 지금 가고 있다. 내가 그 길을 기뻐하고 있다. 내가 이 길에 지금 함께하고 있다. 아, 나에게는 하늘의 생명, 거듭남이라는 것이 내 안에 있구나라는 증거예요. 그렇게 가기 원치 않는다. 나는 그 길이 싫다. 나는 그 길이 원치 않는 난 세상에서 잘되기 원한다. 여러분,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예수님을 정말로 인격적으로 진짜 못 만난 겁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세상 역사에서 세상에서만 끝으로 알고 있지 구원 역사 속에서 내 인생을 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성공한 인생이고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고 이미 영혼을 보장받은 인생입니다. 이 신앙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아들 하나님을 얼마만큼 어느 정도 아끼시고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의 가치와 그 사랑의 내용이 바로 우리인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짓밟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기를 거부하며 내 고집대로 살아왔던 저희를 하나님 그 당신의 아들만큼 그 가치를 여기시고 우리를 그렇게 존귀하게 받으시고 그 영원토록 사랑을 나누시고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 앞에 고개를 떨굽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로서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만 인정하고 다뤄는 것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고 맛보게 하셨사오니 하나님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지금은 내 삶이 깊은 수렁 같고 암담한 구덩이 같을지라도 그러나 이 글 끝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승리와 영광을 이미 우리로 하여금 보여 주셨사오니 믿음으로 걷겠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끝없는 영광을 올려 드리겠나이다.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