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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관찰하는 것부터 | 부처님 말씀

부처의말1:01:06

Transcription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스마트폰 화면일 수도 있고 창밖에 풍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계 유심이요 만범 유식이니라." 삼계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요. 망가지법은 오직 인식작용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실제가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해석입니다. 지금부터 이 깊은 가르침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합니까? 왜 저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물한잔을 청년 앞에 놓으셨습니다. "이 물을 보아라. 이것이 무엇이냐?" 청년은 대답했습니다. "물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이것은 무엇이냐?" "생명입니다." "익사하는 자에게는?" 청년은 잠시 침묵했습니다. "죽음입니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셨습니다. "물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보는 이의 마음이 달랐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유식 사상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마음이 해석한 결과입니다.

유식 사상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여덟 가지 층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눈으로 보는 안식, 귀로 듣는 이식, 코로 맞는 비식, 혀로 맛보는 설식, 몸으로 느끼는 신식. 이렇게 다섯 가지 감각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를 종합하여 판단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우리 마음의 작동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깊은 곳에 말라식과 아래야식이 숨어 있습니다.

특히 아래야식은 모든 경험의 씨앗, 즉 종자를 저장하는 거대한 창고입니다. 당신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것,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 생각하고 행동한 모든 것이 종자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과거생의 업까지도 여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종자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결정합니다.

같은 비를 보면서 어떤 이는 우울함을 느끼고 어떤 이는 평온함을 느낍니다. 같은 말을 들으면서 어떤 이는 상처를 받고 어떤 이는 감사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비나 말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래야식 속 종자의 차이입니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 따뜻한 추억이 있는 사람은 비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비 오는 날 슬픈 이별을 경험한 사람은 비만 보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대상은 같지만 경험은 전혀 다릅니다.

신밀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아래야식은 마치 폭포수와 같아서 찰라찰라 쉬지 않고 흐릅니다. 그 안에서 무수한 종자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우리는 이 흐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마치 강물 위를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우리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래야식의 흐름에 따라 움직입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이유 없이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올라옵니다. 이것은 과거에 심어진 종자가 발현되는 것입니다. 전생에 혹은 어린 시절에 비슷한 인상의 누군가에게서 받은 상처의 기억이 아래야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지금 이 순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처음 보는 장소인데 묘하게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경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래야식 속 종자의 작용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다시 새로운 종자로 저장된다는 것입니다. 화를 내면 화의 종자가 심어지고 자비를 베풀면 자비의 종자가 심어집니다. 원망하면 원망의 종자가, 감사하면 감사의 종자가 쌓입니다. 그리고 이 종자들은 언젠가 반드시 싹을 틀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을 훈습이라고 합니다. 향이 옷에 배듯 우리의 모든 행위가 마음에 베어들어 습관이 되고 성품이 되고 운명이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의 실체가 바로 이것입니다. 업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아닙니다. 아래야식에 저장된 종자들의 집합이며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당신이 오늘 만나는 사람, 오늘 겪는 일, 오늘 느끼는 감정이 모든 것이 과거에 심어 놓은 종자들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동시에 오늘 당신이 하는 선택이 미래의 씨앗이 됩니다.

원효 대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체유심존이라."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날 원효 대사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 수행 중에 동굴에서 하룻밤을 묻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깨어난 대사는 손을 더듬어 물을 찾았습니다. 바가지에 담긴 물을 발견하고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그 바가지는 해골이었고 그 안에 물은 썩은 빗물이었습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순간 원효 대사는 깨달았습니다. 어젯밤 그렇게 달게 마신 물과 지금 보는 이 썩은 물은 같은 것입니다. 다만 마음이 달랐을 뿐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맑은 물이었고 밝은 곳에서는 썩은 물이었습니다. 물이 변한 것이 아니라 인식이 변한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진다." 이 깨달음 이후 원효 대사는 더 이상 중국으로 유학을 갈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이런 경험을 합니다. 배고플 때 먹는 밥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지만 배부를 때 같은 밥은 그저 그렇습니다. 밥이 변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천상의 음악이지만 미워하게 된 후 같은 목소리는 소음이 됩니다. 목소리가 변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종자가 변한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축복처럼 느껴졌던 부모님의 잔소리가 나이 들면 그리운 목소리가 됩니다. 말이 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성숙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언제나 마음의 투영입니다. 성유식론에서는 이것을 상분과 견으로 설명합니다. 상분은 대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고 견부는 그것을 보는 주체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분과 견은 모두 같은 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치 파도와 바다가 별개가 아닌 것처럼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원래는 하나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 둘을 분리하여 인식하기에 주체와 객체가 생겨납니다. 이것을 이분법이라고 합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자증분과 증자증도 있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입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그 분노는 정말 상대방 때문일까요? 상대방의 행동은 단지 조건일 뿐입니다. 진짜 원인은 당신의 아래야식 속에 저장된 분노의 종자입니다. 같은 행동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웃어 넘기고 어떤 사람은 며칠씩 괴로워합니다. 차이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더 이상 세상을 탓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는 세상은 결국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수행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명상을 아무리 해도 번뇌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번뇌를 없애려 하지 마라. 번뇌가 어디서 오는지를 보아라." 수행자가 깊이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그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노는 상대방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상처, 인정받고 싶은 욕구, 무시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켜이 쌓여서 분노라는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은 단지 방아쇠를 당긴 것일 뿐 총알은 이미 장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순간 수행자는 자유로워졌습니다. 더 이상 상대를 원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식 수행의 시작입니다. 밖을 바꾸려 하지 않고 안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고 세상을 보는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래야식은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왜냐하면 종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쁜 종자도 좋은 훈습을 통해 약화시킬 수 있고 좋은 종자는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과거의 업장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지금 이 순간부터 새로운 종자를 심을 수 있습니다. 매 순간이 변화의 기회입니다. 화를 낼 뻔한 순간에 한 참으면 인내의 종자가 심어집니다. 원망하고 싶은 마음을 자비로 바꾸면 자비의 종자가 자랍니다. 어리석은 생각을 지혜로운 관찰로 전환하면 지혜의 종자가 싹<0xEB><0x93><0x9C>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좋은 종자를 심다 보면 어느새 아래야식의 질이 변화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마음은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합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평온할 수 있고 같은 사람을 만나도 자비로울 수 있고 같은 일을 겪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변한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변했기에 세상도 변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법은 마음이 앞서고 마음이 주인이며 마음으로 만들어진다." 당신이 지금 경험하는 이 삶은 과거의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삶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삶은 운명이 아닌 선택이 됩니다. 피해자가 아닌 창조자가 됩니다.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마음을 닦게 됩니다. 이것이 유식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실제가 아니라 마음의 투영이며 그 마음은 아래야식에 저장된 무수한 종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종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더 깊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면 그 마음을 보는 나는 누구입니까?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이것을 읽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고 내가 선택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 '나'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성유식론에서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말라식은 항상 아레야식을 반연하여 나라고 집착하니 이것이 아집의 뿔이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나'라는 존재는 사실 말라식이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말라식은 여덟 가지 식 중에서 일곱 번째 식으로 끊임없이 작동하는 자 의식의 중심입니다. 이 말라식은 단 하나의 일만 합니다. 아래야식을 바라보며 "이것이 나다"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 모습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래야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일 뿐인데 말라식은 그 흐름 속에서 '나'라는 고정된 실체를 찾으려 합니다. 이것을 아직(我痴), 즉 '나'에 대한 집착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거울을 보면 거울 속 아이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점차 "저것이 나다"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정말로 거울 속 그 모습이 당신입니까? 당신이 태어났을 때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10년 전에 당신과 지금의 당신도 다릅니다.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새로 생겨나며 생각도 매 순간 변하고 감정도 계속 흘러갑니다. 그렇다면 그중 어느 것이 진짜 '나'입니까? 어느 시점에 당신이 진정한 '나'입니까? 진리는 이렇습니다. 고정된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말라식은 이 흐름 속에서 연속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나'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것은 마치 강물을 보면서 "이것이 한강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은 매 순간 흐르고 바뀌는데 우리는 그 변화하는 흐름에 한강이라는 이름을 붙여 고정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순간 변화하는 몸과 마음의 흐름에 '나'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착각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가 있다고 믿는 순간 '내 것'이 생겨납니다. 내 몸, 내 생각, 내 감정, 내 가족, 내 재산, 내 명예. 그리고 이 '내 것'을 지키려는 집착이 시작됩니다. 누군가 내 것을 위협하면 분노가 일어나고 내 것을 빼앗기면 슬픔이 일어나고 내 것을 더 얻으려고 탐욕이 일어납니다. 모든 번뇌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부처님께서 사슴동산에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 설법하실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색(色)은 나가 아니며, 수(受)도 나가 아니며, 상(想)도 나가 아니며, 행(行)도 나가 아니며, 식(識)도 나가 아니니라." 오온(五蘊)이라 불리는 몸과 마음의 모든 구성 요소가 '나'가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몸은 사대의 임시적 결합일 뿐이고 느낌은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며 생각은 끊임없이 변하고 의지 작용도 순간순간 다르며 인식 또한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중 어느 것도 영원하고 고정된 '나'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말라식은 이것들을 종합하여 "이것이 나다"라고 우깁니다.

어느 선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화가 날 때 화내는 자는 누구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화를 냅니다." 선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화가 사라진 지금, 화내던 그날은 어디 갔느냐?" 제자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선승이 말했습니다. "화가 있을 때만 화내는 '나'가 있고, 기쁨이 있을 때만 기뻐하는 '나'가 있고, 슬픔이 있을 때만 슬퍼하는 '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나'는 각각 다른 존재냐 아니면 같은 존재냐?" 제자가 깨달았습니다. 고정된 '나'는 없었습니다. 다만 매 순간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에 '나'라는 이름을 붙여온 것뿐이었습니다.

말라식의 작용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네 가지 번뇌가 항상 함께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아치(我痴), 악견(惡見), 아마(我慢), 아애(我愛)입니다. 아치는 '나'라는 것의 실체가 없음을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악견은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아마는 '나'를 다른 것과 비교하며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느끼는 교만함입니다. 아애는 '나'를 사랑하고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이 네 가지가 말라식과 함께 끊임없이 작동합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깨어 있는 동안에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계속됩니다. 마치 심장이 쉬지 않고 뛰듯이 말라식은 쉬지 않고 '나'를 만들어냅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는 순간부터 이것이 시작됩니다. "오늘 내 얼굴이 좀 부었네." 마이너스. 이것이 악견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 마이너스. 이것이 아마입니다. "그래도 내가 최선을 다해야지." 마이너스. 이것이 아애입니다. 이 모든 생각 뒤에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착각. 이것이 아치입니다.

출근길에 누군가 당신을 스쳐 지나가면서 부딪혔습니다. 즉시 불쾌감이 올라옵니다. "나를 무시하나?" 왜 화가 납니까? '나'라는 것이 침해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라는 것이 없다면 누가 침해당합니까? 단지 두 개의 몸이 물리적으로 접촉했을 뿐인데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는 순간 고통이 시작됩니다. 직장에서 동료가 인정받는 것을 보면 질투가 일어납니다. 왜 질투합니까? '나'와 그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라는 구분이 없다면 동료의 성공이 곧 우리 모두의 성공입니다. 하지만 말라식은 끊임없이 경계를 만듭니다. 너, 우리, 그리고 그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경계가 모든 갈등의 시작입니다.

중론에서 용수보살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나가 오온이라면 나는 생멸하는 것이 된다. 만약 나가 오온과 다른 것이라면 오온의 특성이 없어야 한다." 즉 '나'가 몸과 마음이라면 계속 변하는 것이므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나'가 몸과 마음과 별개라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나'가 아닙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무아(無我)의 지혜입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나'가 없다면 누가 수행합니까? 누가 깨달음을 얻습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두 가지 진리로 설명하셨습니다.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입니다. 일상의 차원에서는 '나'가 있는 것처럼 작용합니다. 당신은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납니다. 이 차원에서는 '나'라는 개념이 유용합니다. 하지만 궁극의 진리 차원에서는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다만 인연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의 흐름이 있을 뿐입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면 진정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어떤 수행자가 깊은 명상 중에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생각을 관찰하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보는 순간 생각과 보는 자가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보는 자는 누구입니까? 더 깊이 관찰하자 보는 자를 보는 또 다른 자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속 따라가다 보니 결국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알아차림만 있었습니다. 주체도 객체도 없이 그냥 앎 자체만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아를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느꼈던 모든 무게가 사라졌습니다. 지켜야 할 '나'가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잃을 '나'가 없으니 슬플 것도 없었습니다. 채워야 할 '나'가 없으니 탐욕도 사라졌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경험만 흘러갔습니다. 이것이 말라식의 작용이 멈춘 순간입니다.

물론 이런 경험은 깊은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일상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에 완전히 빠져들었을 때 '나'가 사라지는 경험을 해 본 적 있습니까? 음악을 듣는 '나'도 없고 그냥 음악만 있습니다. 숲속을 걷다가 완전히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걷는 자도 없고 숲도 없이 그냥 걷기만 있습니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나'는 어디 갔습니까? 꿈도 없는 깊은 잠에서는 '나'라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나면 다시 '나'가 돌아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말라식이 작용하면 '나'가 나타나고 말라식의 작용이 멈추면 '나'가 사라집니다.

깨달은 이들은 이것을 완전히 꿰뚫어 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느니라." '나'라는 모습도 없고, 사람이라는 모습도 없고, 중생이라는 모습도 없고, 생명을 지닌 자라는 모습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말라식이 만들어낸 구분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하나입니다.

당신의 몸을 이루는 원소들은 우주에서 왔습니다. 당신이 마시는 물은 빗물이고 빗물은 바다에서 증발한 것이고 바다는 모든 강물이 모인 것입니다. 당신이 숨쉬는 공기는 나무가 만든 것이고 나무는 흙과 햇빛에서 자랐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배운 것, 경험한 것, 주변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의 결합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 어디까지가 당신이고 어디부터가 당신이 아닌 것입니까? 경계를 그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고 연결되어 있기에 독립적인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그리고 연기를 깨닫는 순간 아집(我執)이 무너집니다. 아집이 무너지면 법집(法執)도 함께 무너집니다. 법집은 '나' 이외의 모든 것, 즉 외부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집착입니다. '나'가 환상이라면 '나'가 경험하는 모든 대상도 환상입니다. 둘 다 마음이 만들어낸 구분일 뿐입니다.

어느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산은 산이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산은 산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산을 보는 자가 없다면 산이 있느냐?" 제자가 침묵했습니다. 스승이 다시 말했습니다. "보는 자가 일어나면 산이 일어나고 보는 자가 사라지면 산도 사라진다. 산과 보는 자는 원래 둘이 아니니라." 이것이 유식의 핵심입니다. 주체와 객체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식이 둘로 나뉘어 나타난 것입니다. 파도가 일어나면 골도 함께 일어나듯이 '나'가 일어나면 세상도 함께 일어납니다. '나'가 사라지면 세상도 함께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텅 빈 고유함입니다. 하지만 이 고유함은 허무가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을 품은 충만한 공(空)입니다. 이 공에서 자비가 일어나고 지혜가 일어나고 자유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지킬 '나'가 없기에 모든 존재가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고통이 내 고통이고 당신의 기쁨이 내 기쁨입니다. 이것이 대자비(大慈悲)의 바탕입니다. '나'라는 경계가 사라지면 사랑도 경계가 없어집니다. 가정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사랑하게 됩니다. 내 이익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보살(菩薩)의 길입니다. 말라식의 아집을 깨뜨리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이 왜곡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능가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생즉 종종법생하고 신멸즉 종종법멸이니라."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모든 문제의 시작도 마음이고 모든 문제의 해결도 마음입니다. 세상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을 바꾸면 됩니다.

유식 사상에서는 이것을 전식지(轉識成智)라고 합니다. 식(識)을 전환하여 지혜(智)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여덟 가지 식은 본래 번뇌로 물들어 있지만 그것을 전환하면 네 가지 지혜가 됩니다. 이것은 마치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얼음과 물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같은 H2O입니다. 다만 온도라는 조건이 다를 뿐입니다. 번뇌와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은 같지만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먼저 전오식(轉五識), 즉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감각을 전환하면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됩니다. 성소작지는 이루어야 할 일을 완성하는 지혜입니다. 번뇌에 물든 감각은 대상을 탐하고 싫어하며 분별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집착하고 추한 것을 보면 혐오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더 원하고 맛없는 것은 거부합니다. 하지만 감각을 청정하게 전환하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집착도 혐오도 없이 순수하게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아름다운 소리로 법문을 하고 향기로운 음식으로 배고픈 일을 먹이며 따뜻한 손길로 아픈 일을 어루만집니다. 감각이 번뇌의 도구가 아니라 자비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육식(轉第六識), 즉 의식을 전환하면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됩니다. 묘관찰지는 미묘하게 관찰하는 지혜입니다. 번뇌에 물든 의식은 끊임없이 분별하고 판단합니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이익이다, 손해다. 이런 분별이 갈등을 만들고 고통을 낳습니다. 하지만 의식을 청정하게 전환하면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 너머의 본질을 봅니다. 사람들의 행동 뒤에 숨은 고통을 이해하고 사건의 표면 아래 흐르는 인연의 법칙을 파악합니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연기를 봅니다. 이 지혜로 법을 설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올바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다음으로 말라식(轉第七識)을 전환하면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됩니다. 평등성지는 모든 것이 평등함을 아는 지혜입니다. 말라식은 끊임없이 나와 너를 구분하며 차별을 만듭니다. 내가 높고 너는 낫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나는 중요하고 너는 하찮다. 이런 차별이 교만과 질투와 증오를 낳습니다. 하지만 말라식을 전환하면 모든 존재가 본래 평등함을 깨닫습니다. 높고 낮음이 없고 귀하고 천함이 없으며 나와 남의 구분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고 모두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지혜가 생기면 차별 없는 자비가 일어납니다. 원수도 친구도 똑같이 사랑하고 의인도 죄인도 똑같이 구원하려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무연대자(無緣大慈), 동체대비(同體大悲)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래야식(轉第八識)을 전환하면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됩니다. 대원경지는 크고 둥근 거울의 지혜입니다. 아래야식은 모든 종자를 저장하고 있지만 그것들에 물들어 있습니다. 선악의 종자가 뒤섞여 있고 맑고 흐린 것이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아래야식을 완전히 정화하면 티끌 하나 없는 큰 거울이 됩니다. 이 거울은 모든 것을 비추지만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비춰도 집착하지 않고 추한 것을 비춰도 혐오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완벽하게 반영하되 왜곡이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 모든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이 네 가지 지혜를 얻는 것이 성불(成佛)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식을 지혜로 전환할 수 있습니까? 유식 사상에서는 유식관(唯識觀)이라는 수행법을 제시합니다. 유식관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명상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허망 분별(虛妄分別)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실제가 아니라 마음의 분별임을 직접 관찰합니다. 화가 날 때 그 화를 바로 억누르려 하지 말고 관찰합니다. "지금 화라는 감정이 일어나고 있구나. 이 화는 어디서 왔는가? 상대방의 말 때문인가? 아니면 내 마음속 종자 때문인가?"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화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같은 말을 듣고도 누군가는 화내지 않습니다. 차이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화에 대한 집착이 약해집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의탁기성(依他起性)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이 조건에 의존해서 일어남을 관찰합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슬픔은 무엇 때문입니까? 깊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조건의 결합입니다. 과거의 경험, 현재의 상황, 몸의 상태, 날씨,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모든 것이 얽혀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이 중 하나라도 달랐다면 지금의 슬픔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슬픔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깨닫으면 슬픔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이것도 지나가리라"는 지혜가 생깁니다.

세 번째 단계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허망한 분별과 조건적 현상을 꿰뚫고 진여(眞如)를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진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궁극의 실제입니다. 변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으며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본래의 청정한 성품입니다. 이것은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깊은 명상 속에서 모든 생각이 고요해지고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질 때 진여가 드러납니다. 이것을 견도(見道), 즉 돌을 본다고 합니다. 한번 진여를 보고 나면 다시는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평생 동굴 속에 살던 사람이 처음으로 햇빛을 본 것과 같습니다. 다시 동굴로 돌아가도 그 햇빛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느 수행자가 10년 동안 좌선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잡념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저녁에 뭘 먹지? 내일 무슨 일이 있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했을까?"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관찰했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렸습니다. 생각을 쫓아가지도 않고 억누르지도 않고 그저 지켜보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생각과 생각 사이에 고유한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간이 점점 넓어졌습니다. 어느 날 좌선 중에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습니다. 생각도 멈추고 시간도 멈추고 '나'라는 의식도 멈췄습니다. 그런데 그 멈춤 속에 살아 있는 깨어 있음이 있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명확했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것이었습니다. 평생 찾던 것이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에 있었습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고 특별히 얻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원래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다만 번뇌의 구름이 가려서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견도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한번 진여를 보았다고 해서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습기가 남아 있기에 계속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이것을 수도(修道), 즉 돌을 닦는다고 합니다. 말라식 속에 저장된 나쁜 종자들을 하나하나 정화해야 합니다. 좋은 종자를 계속 심고 나쁜 종자를 약화시키는 훈습을 반복합니다. 화가 일어날 때마다 자비로 대치하고 탐욕이 일어날 때마다 보시로 극복하며 어리석음이 일어날 때마다 지혜로 관찰합니다. 이런 수행을 거듭하면 점점 번뇌가 약해지고 지혜가 강해집니다. 마침내 모든 번뇌의 종자가 완전히 제거되면 이것을 무학도(無學道)라고 합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단계, 즉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이때 식이 완전히 지로 전환됩니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수행할 수 있습니까? 먼저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첫 생각이 무엇입니까? "아, 피곤해. 더 자고 싶어." 이것이 탐욕의 종자입니다. 알아차리십시오. 출근길에 교통이 막히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왜 이렇게 막히지? 짜증나?" 이것이 분노의 종자입니다. 알아차리십시오. 직장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나는 왜 이것도 못 할까? 나는 무능해." 이것이 아집의 종자입니다. 알아차리십시오. 이렇게 하루 종일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면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생각이 탐진치(貪瞋痴), 즉 탐욕, 분노, 어리석음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들이 실제가 아니라 아래야식에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반응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생각과 동일화되지 않게 됩니다. "나는 화가 났다"가 아니라 "화라는 감정이 일어나고 있구나"로 바뀝니다. 이 작은 차이가 엄청난 자유를 줍니다.

다음으로 좋은 종자를 의도적으로 심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키십시오. "오늘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건강한 몸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이것이 감사의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출근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십시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속으로 "당신도 행복하기를"이라고 축복하십시오. 이것이 자비의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힘든 일을 할 때 "이것도 수행이다"라고 생각하십시오. 힘든 일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어려운 사람을 통해 자비를 배우며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웁니다. 이것이 지혜의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는 하루를 돌아보십시오. 어떤 좋은 일을 했습니까? 어떤 실수를 했습니까? 좋은 일은 기뻐하고 실수는 참하되 자책하지는 마십시오. "내일은 더 잘하리라"는 발언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십시오. 이것이 매일의 수행입니다.

특별한 시간을 내서 명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상의 모든 순간을 수행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 걸을 때, 일할 때, 사람을 만날 때 모든 순간이 깨어 있음의 기회입니다. 육조 단경에서 해능 대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은 세간을 떠나지 않나니, 세간을 떠나 보리를 구함은 마치 토끼뿔을 찾는 것과 같으니라." 깨달음은 일상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깨달을 수 있고 아이를 돌보면서도 수행할 수 있으며 직장에서 일하면서도 마음을 닦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입니다.

또한 공동체와 함께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서는 자신의 맹점을 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수행하면 서로의 거울이 되어 줍니다. 당신이 보지 못하는 당신의 습관을 다른 사람이 지적해 줍니다. 당신이 넘어졌을 때 다른 사람이 일으켜 세워 줍니다. 당신이 게으를 때 다른 사람이 격려해 줍니다. 이것이 승가(僧伽)의 힘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혼자 깨달으셨지만 깨달은 후에는 제자들과 함께 수행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함께 가는 길이 더 확실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을 위해 수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을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내가 깨달으면 모든 존재를 구원하리라"는 보살의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이런 큰 발심이 있을 때 수행에 힘이 생깁니다. 자기만을 위한 수행은 금방 한계에 부딪히지만 모든 존재를 위한 수행은 끝없는 에너지를 줍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작은 틀을 벗어나 무한한 자비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존재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깨달으면 이들에게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지혜가 이들의 어둠을 밝히고 당신의 자비가 이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혼자만의 해탈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가는 길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그것을 나누십시오. 말로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평온한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당신이 화내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도 평화로워집니다. 당신이 욕심내지 않으면 주변에 여유가 생깁니다. 당신이 지혜롭게 살면 다른 사람들도 배웁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나면 세상이 바뀝니다.

유식 사상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세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마음에 따라 변한다는 것입니다. 나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바뀝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여러 생이 걸쳐 수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첫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분노를 알아차린다면 그것이 수행입니다. 오늘 단 한 번이라도 타인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낸다면 그것이 보살행입니다. 오늘 단 한 번이라도 '나'라는 환상을 꿰뚫어 본다면 그것이 지혜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쌓이면 어느새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듯이 작은 수행이 모여 깨달음에 이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원을 기억하십니까? "모든 것은 변하는 법이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은 고통도 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번뇌도 변하여 지혜가 될 수 있고 어둠도 변하여 빛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절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해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잊어버리면 다시 기억하며 흐트러지면 다시 모아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길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도달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에게는 불성(佛性)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안에도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씨앗이 있습니다. 다만 번뇌의 흙에 덮혀 있을 뿐입니다. 그 흙을 조금씩 걷어내면 씨앗은 자연스럽게 싹을 틉니다. 햇빛과 물을 주면 나무로 자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깨달음의 열매, 자비의 열매, 지혜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당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와 나누는 것입니다. 당신이 깨달으면 수많은 존재들이 그 빛을 받습니다. 당신이 자유로워지면 다른 이들도 자유의 길을 봅니다. 당신이 행복해지면 그 행복이 파문처럼 퍼져나갑니다.

이것이 유식 사상의 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들지만 그 마음은 바꿀 수 있습니다. 왜곡된 인식은 청정한 지혜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번뇌의 식은 깨달음의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이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바로 이 순간이 깨어남의 시작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을 관찰해 보십시오.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습니까? 그것을 판단하지 말고 억누르지도 말고 그저 지켜보십시오. 보는 순간 당신은 그것과 하나가 아닙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에 공간이 생깁니다. 그 공간이 자유입니다. 그 공간 속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분노를 따라갈 것인가? 자비를 일으킬 것인가? 탐욕에 빠질 것인가? 만족함을 느낄 것인가? 어리석음에 머물 것인가? 지혜를 구할 것인가? 선택은 언제나 당신의 것입니다.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깨달아 줄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보살도 스승도 길을 가르쳐 줄 뿐입니다. 그 길을 걷는 것은 당신의 몫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과거의 조사들이 이미 그 길을 완성했고 현재의 동료들이 함께 걷고 있으며 미래의 구도자들이 뒤따를 것입니다. 이 위대한 행렬에 당신도 함께 하십시오. 한 걸음 한 걸음 깨어 있음으로 걸어가십시오. 마음이 만든 환상에서 깨어나 진실을 보는 눈을 여십시오.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와 하나됨을 느끼십시오. 번뇌의 식을 지혜로 전환하여 자유와 평화를 얻으십시오. 그리고 그 자유와 평화를 아직 고통받는 모든 존재와 나누십시오.

이것이 유식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구름을 걷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 구름은 무지이고 그것을 걷어내는 것은 수행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하십시오. 내일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지금 이 불완전한 순간이 혼란스러운 마음 그대로 수행을 시작하십시오. 숨을 들이시며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십시오. 숨을 내시며 모든 집착을 내려놓으십시오. 이것이 첫걸음입니다. 그리고 이 첫걸음이 깨달음으로 가는 천리길의 시작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함께, 조사들의 지혜와 함께, 모든 수행자들의 염원과 함께 당신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당신은 발견할 것입니다. 찾던 것이 이미 여기 있었음을. 얻으려던 것을 이미 가지고 있었음을. 되려던 것을 이미 그 자체였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미소 지으며 말할 것입니다. "나는 원래부터 부처였구나." 그리고 그 미소로 세상을 밝힐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