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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핵심 4가지! 공(空)을 알고나면 인생이 쉬워집니다┃70대 보살님도 바뀐 놀라운 변화 | 부처님 말씀 | 불교 명언 |

지혜의통로2:01:36

Transcription

새벽 예불 시간, 법당의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똑똑. 그 소리를 따라 스님들과 불자님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우리는 매일 이 주문을 외웁니다.

어떤 분은 10년을, 어떤 분은 수십 년을 이 경전을 독송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드실 때가 있지 않으신가요?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일까? 왜 이 말로 반야심경이 끝나는 걸까?" 하고 말입니다.

어느 날 아침, 예부를 마치고 법당을 나서는데 한 보살님께서 계단에 앉아 계셨습니다. 연세가 꽤 드신 것 같았습니다. "괜찮으세요?" 제가 여쭤보니 그분이 천천히 고개를 드셨습니다. 눈가에는 세월의 주름이 깊게 새겨져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맑았습니다.

"스님, 저는 평생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자식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시부모님 봉양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이 나이가 됐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겁고 힘든 걸까요?" 그분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가 배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옆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한참을 함께 침묵하다가 그분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반야심경을 읽습니다. 벌써 천 번도 넘게 읽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 삶은 왜 변하지 않을까요?"

그때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무언가를 너무 꽉 붙들고 살아왔다는 것이요. 경전도, 기도도, 심지어 수행까지도 꽉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분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보살님, 혹시 글자만 읽고 계신 건 아니신가요?"

그분이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반야심경 260자를 읽는 것과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제 말에 그분은 한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먼산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입으로 외우는 이 경전, 반야심경. 그 속에는 우리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네 가지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여러분의 무거운 짐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 짐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렵게 들리시나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천천히 함께 걸어가 보시겠습니까?

그날 이후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왜 반야심경을 읽는 걸까? 단순히 부처님의 가르침이니까? 선배 불자님들이 읽으라고 하니까? 공덕이 있다고 하니까? 그런 이유만으로 읽어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 이유는 훨씬 더 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경전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열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2600년 전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왕자의 신분을 버리시고 출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늙음이 두려웠고, 병이 두려웠고,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괴로웠고, 싫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괴로웠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어떻게 벗어나셨을까요? 바로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깨달으셨을까요? 그 모든 괴로움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에이,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픈 것도 괴롭고, 헤어지는 것도 괴로운데 그게 없다니요."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들어보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픔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아픔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꽉 붙들고 거기에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괴로움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이 다리가 아프다고 해봅시다. 다리가 아픈 것 자체는 그냥 감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이런 생각을 더합니다. "아, 나이가 들어서 이러는구나. 앞으로 더 아플 텐데 병원에 가야 하나? 돈도 많이 들겠지. 자식들한테 짐이 되면 어쩌나?" 여러분, 보이십니까? 다리 아픈 것은 하나인데 우리가 덧붙인 생각은 열 개가 넘습니다. 진짜 괴로움은 바로 이 덧붙인 생각들에서 옵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 생각들을 내려놓으라. 그것들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가르침입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과 재앙을 건넜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님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이 깊은 지혜를 행하실 때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온이 무엇인지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입니다. 색, 수, 상, 행, 식. 이것을 쉽게 풀어 볼까요? 색은 우리 몸입니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모든 물질적인 것입니다. 수는 느낌입니다. 기쁨, 슬픔, 아픔, 이런 모든 감각과 느낌입니다. 상은 생각입니다.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 하는 판단과 인식입니다. 행은 의지입니다. 무언가를 하려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식은 의식입니다. 알아차리는 마음 자체입니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가 모여서 '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몸이 나고, 이 느낌이 나고, 이 생각이 나고, 이 의지가 나고, 이 의식이 나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것이 공하다. 원래부터 고정된 실체가 없다."

무슨 말씀일까요? 우리 몸을 한번 보십시오. 이 몸이 정말 나입니까? 이 몸은 어제와 오늘이 다릅니다. 10년 전과 지금이 다릅니다. 세포는 계속 죽고 새로 생깁니다. 먹은 음식이 몸이 되고, 몸이었던 것은 버려집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진짜 나의 몸입니까?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는 기뻤는데 지금은 슬픕니다. 조금 전에는 화가 났는데 지금은 평온합니다. 계속 변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느낌이 진짜 나입니까?

생각도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 생각과 지금 생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어제 옳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은 틀렸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어느 생각이 진짜 나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 고정된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고정된 '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한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첫 번째 핵심입니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한 거사님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스님, 그럼 나는 없다는 말입니까? 그럼 내가 지금 여기서 스님과 이야기하는 것은 뭡니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가 아예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정되고 영원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강물처럼 계속 흐르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한강'이라고 부릅니다. 강의 물은 매 순간 다른 물인데도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매 순간 변하고 있지만 편의상 '나'라고 부를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이 몸이 늙는 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구나. 이 감정이 나의 전부가 아니구나. 이 생각이 나의 전부가 아니구나." 이렇게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에 덜 집착하게 됩니다. 덜 집착하면 덜 괴로워집니다.

어느 날 한 보살님이 법회 후에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스님, 제 며느리가 저를 힘들게 해요. 매일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요." 저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보살님, 지금 이 순간 며느리 분이 여기 계십니까?" "아니요. 집에 있죠." "그런데 왜 지금 괴로우십니까?" "생각이 나니까요." "그럼 그 생각이 보살님입니까? 아니면 그냥 스쳐 가는 생각입니까?"

그분은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우리의 괴로움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해서 옵니다.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서 불안해합니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이 순간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 때문에 존재하는 현재를 괴로워하며 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 이 구절을 많이들 어려워하십니다. 하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합니다. 색은 형체가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 산, 나무, 집, 모든 물질입니다. 공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형체가 있는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리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 바로 형체가 있는 것의 본질이다."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 앞에 찻잔이 하나 있다고 해봅시다. 이 찻잔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찻잔이 언제부터 찻잔이었습니까? 원래는 흙이었습니다. 누군가 그 흙을 파서 빚어서 구워서 찻잔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찻잔이 깨질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찻잔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찻잔입니까? 흙입니까? 아니면 깨진 조각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어느 것도 본질이 아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 따라 흩어질 뿐이다. 고정된 본질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이 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색입니다. 형체가 있다는 것과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 존재합니다. 분명히 살아 있고, 숨 쉬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라는 존재도 수많은 인연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부모님이 만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먹는 음식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숨 쉬는 공기가 없었다면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나는 우주 전체와 하나.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무엇을 집착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첫 번째 핵심입니다.

법정스님께서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이다." 처음 들으면 이상하게 들립니다. 보통은 가진 게 없어서 괴롭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법정스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을 잃을까 봐 걱정하고, 더 가지려고 애쓰면서 괴로워합니다. 만약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면, 아니 정확히는 아무것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걱정할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극단적인 금욕을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 자신도 출가 후 6년간 극심한 고행을 하셨지만, 그것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중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풍족하게도, 너무 모자하게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지되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집이 있으면 집에 감사하되, 집이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이 있으면 자식을 사랑하되, 자식이 나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필요한 곳에 쓰되, 돈이 나의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가지고 있되 메이지 않습니다. 누리되 집착하지 않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보살님이 오랫동안 모은 돈을 사기를 당했습니다. 노후를 위해 10년 넘게 조금씩 모은 돈이었는데, 믿었던 사람에게 다 빼앗긴 것입니다. 그분은 너무 괴로워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절에 오셨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 돈에 너무 집착했나 봅니다."

저는 그분께 말씀드렸습니다. "보살님, 돈을 모은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사기를 당한 것도 보살님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 괴로운 이유는 그 돈이 '나의 것'이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돈은 처음부터 보살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보살님 손을 거쳐 갔을 뿐입니다. 이제 다른 곳으로 흘러간 것뿐입니다."

그분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며칠 후 다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정말 그렇네요. 나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텐데 뭐가 내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공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은 잠시 우리 곁을 스쳐 갈 뿐입니다. 돈도, 명예도, 심지어 이 몸도, 이 생각도 다 그렇습니다. 영원히 우리 것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면 있을 때에 감사할 수 있고, 없어져도 담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도 공하고, 상도 공하고, 행도 공하고, 식도 공하다." 느낌도 고정된 실체가 없고, 생각도 고정된 실체가 없고, 의지도 고정된 실체가 없고, 의식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모든 것이 흘러갑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겠네요. 어차피 다 공한 거라면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소중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은 지금이 순간뿐이니까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니까요.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 지금 여러분이 먹는 밥, 지금 여러분이 마시는 차, 지금 여러분이 보는 풍경. 이 모든 것이 한 번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이 인연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욱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더욱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공을 아는 사람의 삶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노야원에서 처음 설법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모든 것은 무아이다." 이것을 삼법인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괴롭다는 것,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모든 것에 고정된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 이 세 가지가 우주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처음 들으면 너무 비관적으로 들립니다. "모든 것이 괴롭다니, 이게 무슨 희망이 있는 말입니까?"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좌절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희망을 주시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괴로움도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괴로움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괴로움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무리 괴로워도 그 괴로움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반드시 지나갈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괴로움 한가운데서도 평온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지나가리라." 이 한 마디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한 거사님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30년 전에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그때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빚쟁이들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아내는 울고, 아이들은 배고파하고. 세상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밑바닥을 쳐봤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괴로움도 무상합니다. 고통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나쁜 것도 변하고, 좋은 것도 변합니다. 그러니 나쁠 때 절망하지 말고, 좋을 때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항상 중심을 지키고 담담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안이비설신의가 없고, 색성향미촉법이 없다." 눈, 귀, 코, 몸, 마음이 없고,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처음 들으면 정말 이상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빛깔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지 않습니까? 그런데 없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빛깔을 봅니다. 하지만 정작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똑같은 빛깔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아름답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추하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빛깔 자체가 아름답거나 추한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다, 추하다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사람은 행복해하고, 어떤 사람은 시끄럽다고 합니다. 음악 자체가 행복하거나 시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세상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을 바꾸면 됩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을 바꾸면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입니다.

"아니비비설신의가 없다"는 것은 그것들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첫 번째 핵심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온개공,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첫 번째 선물입니다.

이제 두 번째 핵심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반야심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다." 우리는 앞서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공 가운데는 색도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 보살님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스님, 색이 공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공 가운데 색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색이 공한 것과 공 가운데 색이 없는 것이 어떻게 다릅니까?"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의 깊은 가르침입니다.

색이 공하다는 것은 '색'이라는 것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색이 변하고 사라지고 다시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 가운데 색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공'이라는 것조차도 어떤 실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칫 공이라는 것을 하나의 실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 세상은 공한 것이구나. 공이라는 것이 진리구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더 깊이 들어가십니다. 공조차도 공하다는 것입니다. 공조차도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색이 있어야 공도 있기 때문입니다. 색이 없다면 공이라는 말도 필요 없습니다. 공과 색은 서로를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공 가운데는 색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공의 세계에서는 색이 있다 없다 하는 분별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새벽 예부를 마치고 법당을 나서는데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새벽 하늘을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빛깔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늘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 눈에 있는 것일까?" 하늘을 보면 분명히 빛깔이 있습니다. 붉고, 노랗고, 푸릅니다. 하지만 그 빛깔이 정말 하늘에 있는 것일까요? 과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빛의 파장이 우리 눈에 들어와서 만들어낸 감각입니다. 하늘 자체는 색이 없습니다. 우리 눈이 빛의 파장을 색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색은 눈에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눈을 감으면 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색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색은 하늘에도 없고, 눈에도 없고, 마음에도 없다. 색은 그 모든 것이 만나는 인연 속에서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연이 흩어지면 색도 사라진다. 그러니 색에 고정된 위치나 실체가 있겠는가? 없다." 이것이 바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다"는 말의 뜻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인연이 만나서 일어납니다. 기쁨도 인연 따라 일어나고, 슬픔도 인연 따라 일어납니다. 그리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집니다. 고정된 것이 없습니다.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흘러갑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반야심경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안개도 없고, 내지 의식계도 없다." 안개는 눈의 세계, 의식계는 마음의 세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세계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처음 들으면 이상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세계를 보고, 듣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 세계가 없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두 분의 보살님이 같은 법문을 들으셨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한 분은 매우 감동하셨습니다. "오늘 법문이 정말 좋았어요. 제 마음에 딱 와닿았어요." 하지만 다른 한 분은 시큰둥하셨습니다. "글쎄요. 뭐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요." 똑같은 법문을 들었는데 한 분은 감동받고, 한 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법문 자체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법문은 그냥 소리일 뿐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그 사람의 경험에 따라, 그 사람의 준비 정도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러니 세계에 고정된 실체가 있겠는가? 없다." 이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해. 세상이 불공평해. 세상이 잘못됐어."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원래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내가 세상을 그렇게 보고 있을 뿐이다. 내 마음을 바꾸면 세상도 달라 보인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의 가르침입니다.

어느 날 한 거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평생 억울하게 살았습니다. 형제들은 부모님께 사랑받았는데 저만 미움 받았어요. 그래서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거사님, 혹시 부모님께서 거사님을 정말로 미워하셨을까요? 아니면 거사님이 그렇게 느끼신 것일까요?"

그분은 한참 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천천히 말씀하셨습니다. "글쎄요. 지금 생각해 보니 잘 모르겠네요. 어쩌면 부모님은 그저 엄하게 키우신 것뿐인데, 제가 그것을 미움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네요." 그 순간 그분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70년을 안고 살던 상처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반야의 힘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힘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세상을 보는 우리 마음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바뀌면 세상도 달라집니다. 똑같은 세상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해탈의 길입니다.

이제 반야심경의 가장 유명한 구절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무명도 없고, 무명진도 없다. 내지 늙음과 죽음도 없고, 늙음과 죽음의 진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무명이라는 것은 무지, 즉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괴로운 이유를 12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을 12연기라고 합니다.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이 12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우리를 괴로움 속에 가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르는 무명에서 시작합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행)을 하게 됩니다. 잘못된 행동이 쌓이면 잘못된 의식(식)이 생깁니다. 잘못된 의식은 몸과 마음(명색)을 만들고, 그것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육입)을 만들고, 감각 기관이 세상과 접촉하면서 느낌(촉, 수)이 생기고, 그 느낌에서 갈애(애)가 생기고, 갈애가 집착(취)되고, 집착이 존재(유)를 만들고, 존재가 있으니 태어남(생)이 있고, 태어났으니 늙고 죽음(노사)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윤회하는 과정입니다. 이 12단계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생사의 바퀴를 돌고 돕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12단계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 무명도 없고, 늙음과 죽음도 없다."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한 보살님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스님, 저는 분명히 늙고 있고, 언젠가는 죽을 텐데 어떻게 늙음과 죽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늙고, 분명히 죽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늙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보다 오늘이 하루 더 나이를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우리 몸의 세포는 매일 죽고 매일 새로 태어납니다. 어제 나와 오늘의 나는 사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포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경험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누가 늙는 것입니까? 고정된 '나'라는 것이 없는데 누가 늙는다는 말입니까?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왜 두려워할까요? '나'라는 것이 사라질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정된 '나'라는 것이 원래부터 없었는데 무엇이 사라진다는 것인가?" 파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듯이, 모든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거기에 태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바다를 생각해 봅시다. 바다에 파도가 일어납니다. 파도는 높이 솟았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파도가 태어났다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파도는 원래부터 바다였습니다. 잠시 파도의 형태를 가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다시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형태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입니다. 우주라는 큰 바다에서 잠시 인간이라는 파도의 형태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우주로 돌아갈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형태가 바뀔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성철 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에 이런 계송을 남기셨습니다. "생일(生日) 멸일(滅日) 거일(去日) 내일(來日) 일일시일(一日是日) 일일여시(一日如是)." 무슨 뜻일까요? 태어나는 날도, 사라지는 날도, 가는 날도, 오는 날도, 모든 날이 이 날이고, 모든 날이 여여한 날이다. 무슨 뜻일까요? 태어남도, 죽음도, 감도, 옴도 사실은 모두 하나라는 것입니다. 분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의 두 번째 핵심입니다. 불생불멸,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을 두 개의 다른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것들은 하나다. 분리되어 있지 않다. 태어남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태어남이 있다.

범을 생각해 봅시다. 범에 꽃이 핍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생명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꽃이 피기 위해서는 씨앗이 썩어야 했습니다. 씨앗의 죽음이 꽃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그 꽃도 언젠가는 시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씨앗이 될 것입니다. 끊임없는 순환입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입니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저 변화만 있을 뿐입니다.

한 거사님이 아버님을 여이셨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스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슬픕니다.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저는 그분의 손을 잡고 말씀드렸습니다. "거사님, 아버님이 정말 돌아가신 것일까요?"

그분은 눈물을 닦으면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스님, 아버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화장을 하셨으니 재가 되셨겠죠? 이제는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땅이 된 아버님은 나무가 될 것이고, 풀이 될 것이고, 꽃이 될 것입니다. 아버님이 드셨던 음식은 거사님의 몸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가르침은 거사님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사랑하셨던 모든 것들 속에 아버님이 살아 계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돌아가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한참 동안 울다가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을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됩니다. 아버지가 정말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저 형태만 바뀔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불생불멸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세 번째 핵심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반야심경은 말합니다. "불구정불증불감."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늙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이것도 처음 들으면 이상합니다. 세상에는 분명히 더러운 것도 있고 깨끗한 것도 있지 않습니까? 많아지는 것도 있고 적어지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절에서 청소를 하는데 젊은 보살님 한 분이 화장실 청소를 꺼리셨습니다. "스님, 화장실은 너무 더러워요. 다른 곳을 청소하면 안 될까요?" 저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보살님, 화장실이 왜 더럽습니까?" "더럽고 불결하잖아요." "그럼 법당은 왜 깨끗합니까?" "법당은 부처님이 계신 곳이니까요."

저는 그분께 말씀드렸습니다. "보살님, 부처님은 화장실에도 계십니다. 아니, 부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리고 더럽다, 깨끗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실제로는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 그분은 이해하지 못하시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화장실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몸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이 소화되고 남은 것입니다. 그것이 몸 안에 있을 때는 괜찮다가 밖으로 나오면 갑자기 더럽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흙으로 돌아가서 식물의 거름이 되고, 식물은 우리의 음식이 됩니다. 끊임없이 순환합니다. 그 순환에 어느 부분이 더럽고, 어느 부분이 깨끗합니까?"

이 말씀을 듣고 그 보살님은 생각이 바뀌셨습니다. 그날부터 화장실 청소를 기꺼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분별심을 가지고 살았는지 알게 됐어요.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고, 이 사람은 훌륭하고, 저 사람은 못 났고. 항상 나누고 판단하면서 살았더군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을 나눕니다. 좋고 나쁨, 아름답고 추함, 옳고 그름.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 분별은 본래 없다. 내 마음이 만든 것이다. 실제로는 모든 것이 하나다.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꽃을 생각해 봅시다. 아름다운 연꽃은 진흙 속에서 핍니다. 진흙이 없으면 연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흙은 더럽고, 연꽃은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진흙이 연꽃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진흙만 더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흙과 연꽃은 하나입니다.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 성공과 실패, 만남과 이별. 우리는 이것들을 따로따로 봅니다. 즐거움은 좋고, 괴로움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것들은 하나다. 즐거움 속에 괴로움의 씨앗이 있고, 괴로움 속에 즐거움의 씨앗이 있다."

한 보살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젊었을 때 아주 잘 나가는 사업가였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때가 제 인생의 전성기였죠.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가 가장 불행한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교만했고, 욕심이 많았고,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업에 실패했어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겸손을 배웠고, 감사를 배웠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됐으니까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다시 한번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했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변합니다.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쁘게 보이고,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이 좋게 보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좋고 나쁜 것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보았을 뿐입니다.

"불증불감."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자꾸 무언가를 얻으려고 합니다. 돈을 더 벌고, 명예를 더 얻고, 지식을 더 쌓으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더 얻어야 행복해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원래부터 완전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 늘어날 것도 없고 줄어들 것도 없다."

어느 날 한 거사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평생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악기도 배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서 배울 수가 없어요. 늦었습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요." 저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거사님, 왜 배우려고 하셨습니까?" "그래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아서요." "지금 거사님은 쓸모 없는 사람이십니까?"

그분은 잠시 말이 막히셨습니다. 그러다가 천천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거사님, 거사님은 원래부터 완전하십니다. 무언가를 더 배워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사님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분입니다. 살아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숨 쉬신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귀한 존재이십니까?"

이것이 바로 불증불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완전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더해야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빼야 완전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완전합니다. 다만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달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달은 차고 기울고를 반복합니다. 보름달이 되었다가 초승달이 되었다가 합니다. 하지만 정말 달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달은 항상 같은 크기입니다. 다만 우리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입니다. 달 자체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도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본성은 우리가 좋은 일을 해서 커지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일을 해서 작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그대로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우리의 본성은 번뇌라는 구름에 가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구름이 거치면 태양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태양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언가를 더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덜어내야 합니다. 욕심을 덜어내고, 분노를 덜어내고, 어리석음을 덜어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본래 모습이 드러납니다. 맑고 밝고 고요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한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행은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이다. 조각가가 돌을 깎아서 부처님 형상을 만들듯이, 우리도 번뇌를 깎아내면 본래 부처인 모습이 드러난다." 정말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부처님 형상은 원래부터 돌 안에 있었습니다. 조각가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낼 뿐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단지 번뇌를 깎아내면 됩니다.

신경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다." 이미 말씀드린 내용이지만 여기서 한 번 더 강조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 실체를 만듭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성격이야. 나는 이런 운명이야." 하고 자신을 규정짓습니다. 그리고 그 틀 안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 틀은 없다. 내가 만든 것일 뿐이다.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다." "나는 원래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에요." 정말 그럴까요? 원래부터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단지 지금까지 화를 많이 냈을 뿐입니다. 앞으로는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불운한 사람이에요." 정말 그럴까요?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운명은 얼마든지 바뀝니다. 고정된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과거가 우리를 규정하지 못합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 지금 이 순간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과거의 업장이 아무리 무거워도 지금 이 순간 바른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한 보살님이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젊었을 때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거짓말도 하고, 남을 속이기도 했습니다. 그 죄가 너무 무거워서 평생 괴로웠습니다. 이제 와서 참회한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분께 말씀드렸습니다. "보살님,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과거의 보살님과 지금의 보살님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보살님은 과거를 뉘우치고 계십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다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안굴리말라라는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굴리말라는 999명을 죽인 살인마였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을 만나서 참회하고 수행하여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과거가 그를 규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바른 마음을 일으키면 과거와 상관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 있어도 한 순간에 빛을 켤 수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어두웠던 방도 촛불 하나를 켜면 밝아집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번뇌 속에 있었어도 한 순간 깨달음의 빛을 켜면 모든 어둠이 사라집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두 번째와 세 번째 핵심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불생불멸,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 불구정불증불감.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늙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분별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의 분별, 있고 없음의 분별, 나고 죽음의 분별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분별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평화가 옵니다. 더 이상 이것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저것을 피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오면 감사하고, 나쁜 일이 오면 배우고, 모든 것을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세 번째 선물입니다.

이제 네 번째이자 마지막 핵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함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이른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걸림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집착이 없다는 뜻입니다. 무언가를 꽉 붙들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돈을 붙들고, 명예를 붙들고, 사람을 붙들고, 심지어 괴로움까지 붙들고 삽니다. 왜 그럴까요? 놓으면 무너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놓으면 내가 사라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한 보살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자식들이 잘되는 것이 제 유일한 기쁨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자식들이 다 커서 독립했습니다. 저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허전합니다." 저는 그분의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평생 자식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살다가 갑자기 그 무게가 없어지니 오히려 불안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짐을 내려놓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짐이 무거워서 괴롭다고 하면서도 막상 내려놓으려고 하면 불안해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짐이 우리를 규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규정하면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짐을 내려놓아라. 그것이 너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원래부터 자유롭다." 저는 그 보살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보살님, 자식을 위해 사신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보살님의 전부는 아닙니다. 보살님은 자식의 어머니이기 전에 한 사람의 온전한 존재입니다. 이제 자식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서 보살님 자신을 위한 삶을 사셔도 됩니다. 아니, 사셔야 합니다."

그분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저를 위해 산다니, 그건 이기적인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보살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보살님이 행복해야 자식들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보살님의 불안과 집착이 자식들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며칠 후 그 보살님이 다시 오셨습니다. 얼굴이 한결 밝아져 있었습니다. "스님, 스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자식들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식들을 통해 제 존재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자식들이 잘되어야 제가 좋은 엄마라는 증명이 되니까요. 그게 집착이었네요."

그렇습니다. 사랑과 집착은 다릅니다. 사랑은 상대를 자유롭게 하지만, 집착은 상대를 묶습니다. 반야심경의 네 번째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무소득, 얻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함으로 마음에 얻을 것이 없다." 얻을 것이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얻으려고 살아왔습니다. 돈을 얻고, 지위를 얻고, 인정을 얻고, 심지어 깨달음까지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얻을 것이 없다니,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완전하기 때문에 새로 얻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보물을 품고 있으면서 보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됩니다. 옛날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목에 보석 목걸이를 걸고 있으면서 그것을 잊어버리고 보석을 찾아온 세상을 헤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거울을 보고서야 자신의 목에 보석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완전합니다. 다만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수행은 무엇입니까? 새로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먼지를 닦아내는 것입니다. 구름을 걷어내서 원래 빛나고 있던 태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소득의 가르침입니다.

한거사님이 오랫동안 참선 수행을 하셨습니다. 몇 년을 열심히 하셨는데도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 좌절하고 계셨습니다. "스님, 저는 몇 년째 참선을 하는데도 아무런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제가 재능이 없는 걸까요?" 저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거사님, 무엇을 얻으려고 참선하십니까?" "깨달음을 얻으려고요?" "그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대답하지 못하셨습니다.

"거사님, 깨달음은 어디 밖에서 얻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깨닫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닫이 원래부터 부처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얻으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멀어집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십시오. 지금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선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평상심 시도." 평범한 마음이 바로 도라는 뜻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도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경지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이 순간 믿는 그대로의 삶이 이미 완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특별한 무언가를 원합니다. 신통력을 얻고 싶어하고 산매에 들고 싶어하고 광명을 보고 싶어 합니다. 물론 그런 경험들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도 또 하나의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보살님이 기도하다가 신비한 빛을 보셨다고 합니다. 그 후로 계속 그 빛을 다시 보려고 애쓰셨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시면서 그 체험을 다시 하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빛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점점 초조해지셨습니다. "왜 그 빛이 다시 안 나타날까?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저는 그분께 말씀드렸습니다. "보살님, 그 빛을 보려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냥 기도 자체를 하십시오. 빛이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상관하지 마십시오. 빛을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마음을 맑히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분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며칠 후에 다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했더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뭔가를 얻으려는 마음이 오히려 저를 괴롭게 했던 거네요."

이것이 바로 무소득입니다.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서 올까요? 이를까 봐 두렵습니다. 가진 것을 잃을까 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봐, 건강을 잃을까 봐, 목숨을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붙들고 있지 않다면 이을 것도 없습니다. 이를 것이 없으면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쉬운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소중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잃는다면 당연히 슬프고 괴로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도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제자가 죽었을 때 슬퍼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슬픔에 휩쓸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슬픔을 느끼는 것과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르면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하지만 그 슬픔이 나라고 생각하고 그 슬픔을 평생 붙들고 산다면 그것은 집착입니다. 슬픔도 오고 가는 감정입니다. 올 때 오게 하고 갈 때 가게 하면 됩니다. 붙들지 않으면 됩니다.

한보살님이 남편을 여이셨습니다. 50년을 함께 사신 분이었습니다. 슬픔이 컸습니다. 매일 우셨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슬픔이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여전히 오셨습니다. "스님, 저는 남편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차라리 저도 죽고 싶어요." 그분의 고통은 너무 깊었습니다.

저는 그분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습니다. "보살님, 남편분을 사랑하셨군요." "네, 너무 사랑했어요." "그럼 남편분도 보살님을 사랑하셨겠네요." "네, 그렇죠." "그렇다면 남편분이 보살님이 이렇게 괴로워하시는 것을 보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슬퍼하실까요?" 그분은 한참 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남편분은 분명히 보살님이 행복하기를 바라실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슬픔을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슬픔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남편분을 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슬픔이 아니라 감사로, 괴로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분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슬픔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남편과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리며 이소 지으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걸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슬픔이 와도 그것에 붙들리지 않고 기쁨이 와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있는 그대로 흘려보냅니다. 강물처럼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반야심경은 말합니다.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이른다." 뒤바뀐 헛된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진리를 거꾸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괴로운 것을 즐겁다고 생각하고 나라는 것이 없는데 나라고 생각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사전도 내 가지 뒤바뀐 생각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은 무상합니다.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늙지 않을 거야. 나는 죽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것은 헛된 생각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평화로워집니다.

쾌락은 괴로움입니다. 쾌락은 잠깐 동안 기쁨을 주지만 그것이 사라지면 더 큰 괴로움이 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쾌락을 쫓습니다. "이것만 얻으면 행복할 거야." 하지만 얻고 나면 또 다른 것을 원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나라 것이 없는데 나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앞서 배웠습니다. 온이 모여서 임시로 나라고 부를뿐 고정된 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나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야.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것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입니다. 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몸은 더럽습니다. 우리 몸은 온갖 불결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몸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집착합니다. 물론 몸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몸의 본질을 정확히 알 때 우리는 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네 가지 뒤바뀐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 수행입니다. 무상한 것은 무상하다고 보고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보고 나라 것이 없음을 알고 몸의 본질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르게 볼 때 우리는 헛된 생각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안전한 열반에 이릅니다.

열반이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열반을 죽음 이후에 어떤 상태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열반은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반은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입니다.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입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탐욕이 일어나지 않을 때,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때, 어리석음이 없을 때 그 순간이 바로 열반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그것이 열반입니다.

한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반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한 생각 돌이키면 곧 열반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탐욕의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그 순간이 열반입니다. 분노의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그 순간이 열반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그 순간이 열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어떻게 이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반야신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크게 세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첫째, 집착하지 않기. 무엇이든 꽉 붙들지 마십시오. 좋은 것이 오면 감사히 돼 그것이 영원하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나쁜 것이 오면 받아들이되 그것이 영원하리라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자유롭습니다.

둘째, 분별하지 않기.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재빨리 판단하지 마십시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은 나쁘게 보이는 일도 나중에는 좋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좋아 보이는 일도 나중에는 후회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십시오.

셋째, 지금이 순간의 머무기. 과거를 후회하지 마십시오. 미래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이 순간만이 진짜입니다. 지금이 순간에 충실하십시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십시오.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을 온전히 대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어느 날 한보살님이 물으셨습니다. "스님, 저는 직장에서 일하고 집에서 가사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합니다. 언제 수행을 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저는 대답했습니다. "보살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수행입니다. 일을 할 때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선정입니다. 가사일을 할 때는 가사일에 온전히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수행입니다. 아이들을 돌볼 때는 아이들과 온전히 함께하십시오. 그것이 자비입니다."

수행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모든 순간이 수행의 기회입니다. 밥을 먹을 때, 걸을 때, 말할 때, 듣을 때 모든 순간이 수행입니다.

밥을 먹을 때를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밥을 먹으면서 다른 생각을 합니다. TV를 보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걱정을 하거나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진짜 수행은 밥을 먹을 때 온전히 밥을 먹는 것입니다. 밥의 맛을 느끼고 밥의 촉감을 느끼고 이 밥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랫살이 되기 위해 농부가 논을 갈고 모를 심고 김을 매고 거두어들였습니다. 햇빛이 비추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것을 도정하고 운반하고 판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엌에서 그것을 씻고 불을 집고 밥을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밥그릇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밥을 먹으면 그냥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하나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 체험입니다. 한 아래 쌀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먹는 것과 모르고 먹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보통 목적지만 생각하면서 걷습니다. 빨리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수행은 걷는 그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발이 땅에 닿는 느낌, 바람이 얼굴에 스치는 느낌, 주변의 소리, 냄새, 풍경. 이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경험하면서 걷는 것입니다. 팅낫는 걸음걸음이 평화라고 하셨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평화롭게 걸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정토라는 것입니다. 정토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평화롭게 걷는 그 순간 그곳이 바로 정토입니다.

말을 할 때도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바른 말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간질하지 말고 거친 말을 하지 말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더해서 말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이 말이 진한가? 둘째, 이 말이 필요한가? 셋째, 이 말이 친절한가? 이 이 세 가지를 다 통과한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훨씬 적게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는 말마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말로 인한 업을 짓지 않습니다.

듣는 것도 수행입니다. 우리는 보통 상대방의 말을 온전히 듣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 미미 우리의 대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동의하거나 반박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듣기는 온전히 비우고 듣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그저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들을 때 우리는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도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상대방에게 온전한 관심을 주는 것. 그것이 자비입니다.

반야신경의 가르침을 일상에 적용하는 또 다른 방법은 명상입니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조용히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복잡한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앉아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숨이 들어올 때 들어온다고 알아차리고 숨이 나갈 때 나간다고 알아차립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수행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호흡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생각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생각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과거와 미래에 살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씩 지금이 순간에 머무는 법을 배웁니다. 생각을 그냥 생각으로 보고 감정을 그냥 감정으로 보고 그것에 휩쓸리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입니다. 지혜입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고 그저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감정이 일어나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관찰자가 됩니다. 주인이 됩니다.

어느 날 한거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명상을 시작한 후로 제 마음을 처음으로 보게 됐습니다. 제 마음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오가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것을 보기 시작하니까 조금씩 조용해지더라고요. 억지로 조용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보기만 했는데 저절로 조용해졌어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관찰합니다. 관찰하면 저절로 변합니다. 마치 어둠 속에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마음의 알아차림에 빛을 비추면 번뇌가 사라집니다.

반야신경의 마지막 부분에는 진언이 나옵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가자 가자 저 너로 가자 완전히 저 너로 가자 깨달음이여 이루어지이다." 이런 뜻입니다. 어디로 가자는 것일까요? 피안 저 너머의 세계로 가자는 것입니다.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자는 것입니다. 생사의 이쪽에서 열반의 저쪽으로 건너가자는 것입니다. 무명의 이쪽에서 깨달음의 저쪽으로 건너가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방편입니다. 정말로는 이쪽도 없고 저쪽도 없습니다. 행사도 열반도 본래 하나입니다. 우리가 분별하기 때문에 둘로 보일 뿐입니다. 분별을 내려놓으면 지금 여기가 바로 피안입니다. 지금이 순간이 바로 열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피안으로 가자고 발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원의 힘입니다. 진언을 외우면서 우리는 그 뜻을 마음에 새깁니다. "나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있다. 나는 점점 더 평화로워지고 있다." 이렇게 발언하고 실천하고 또 발언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반신경의 네 가지 핵심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온계공.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 둘째, 불생불멸.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 셋째, 불구불정 불증불감.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 넷째, 무소득 얻을 것이 없다는 것. 이 네 이 네 가지를 알고 나면 정말로 인생이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착의 짐, 분별의 짐, 탐욕의 짐, 욕심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볍게 자유롭게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반야심경의 네 가지 핵심을 모두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경전을 천권 읽는 것보다 한 구절을 실천하는 것이 낫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깊은 가르침을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꽃 피울 수 있을까요?

한 보살님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분은 70평생을 화를 안고 사셨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 맞으며 자랐고 결혼에서는 시댁 식구들에게 구박받으며 살았습니다. 자식들은 커서 연락도 잘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인생은 한마디로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 하필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밤에 잠을 자다가도 옛날 일이 생각나서 이를 갈았습니다. 누가 조금만 잘못해도 폭발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 괴로웠지만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절에 오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심심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집에 혼자 있으니 답답해서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법회에서 반야신경을 독송하는 것을 들으면서 무언가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그날부터 그분은 매일 절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반야신경을 배우기 시작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글자만 읽었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읽으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그분이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스님, 이 경전이 무슨 뜻입니까?" 저는 그분께 천천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오온개공, 모든 것이 공하다는 거,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거.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환상이라는 것." 그분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겪은 고통은 진짜인데. 그게 환상이라니요."

저는 그분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습니다. "보살님, 보살님이 겪으신 일들은 분명히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일어난 것과 보살님이 지금도 그 일들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일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보살님은 그 기억을 붙들고 계십니다. 매일 그것을 다시 꺼내서 보고 화를 내고 괴로워하십니다. 그것이 보살님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한참 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천천히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아팠는데, 그렇게 힘들었는데."

"보살님 잊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려놓으시라는 것입니다. 그 기억을 붙들지 마십시오. 그 기억에 계속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나는 불쌍한 사람이다. 나는 피해자다.' 이런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날 이후로 그분은 달라지기 시작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씩이었습니다. 누군가 말을 함부로 해도 예전 같으면 바로 화를 냈을 텐데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공한 것이다. 이 말도 결국 소리일 뿐이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화가 조금 덜 났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저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어제 딸아이가 전화를 했는데 예전 같으면 '왜 이제야 전화하느냐? 너는 엄마 생각도 안 하느냐?' 하고 잔소리를 했을 거예요. 그런데 어제는 그냥 '그래 잘 지내니?' 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딸아이가 오히려 놀라더라고요. '엄마 어디 아프세요?' 하고 물을 정도로요." 그분은 웃으시면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건 전화를 끊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전화하고 나면 항상 기분이 나빴어요. '왜 내 딸은 다른 집 딸처럼 자주 전화하지 않을까? 왜 나한테는 이렇게 소홀할까?' 하면서 혼자 화를 냈거든요. 그런데 어제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그냥 딸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어요."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의 힘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딸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바쁘게 살면서 가끔씩만 전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기대를 내려놓았습니다. 집착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러자 같은 상황인데도 전혀 다르게 경험되었습니다.

1년쯤 지났을 때 그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습니다. 절에 오시면 다른 보살님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분을 처음 봤을 때와 너무 달라서 새로 오신 분들은 이분이 원래 이런 분인 줄 알았습니다.

어느 날 제가 그분께 물었습니다. "보살님 어떻게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그분은 웃으시면서 대답하셨습니다. "스님, 저도 신기해요. 제가 이렇게 될 수 있을 줄 몰랐어요. 사실 처음에는 반신반이 했어요. 공인이 뭐니 하는 말들이 다 말장난 같았어요. 하지만 조금씩 실천해 보니까 정말로 되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반야신경을 읽어요. 그리고 오늘 하루는 화내지 않고 살겠다고 다침해요. 누가 나를 화나게 하더라도 '이것도 공이다. 이 사람도 자기 업으로 그러는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정말 화가 안 나요. 아니, 화는 나는데 금방 사라져요. 예전에는 며칠 화를 붙들고 있었는데 이제는 한시간도 안 가요. 그리고 자기 전에는 오늘 하루 감사한 일들을 생각해요. 예전에는 항상 억울한 일, 화난 일만 생각했어요. '오늘도 누가 나한테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하면서요. 그런데 이제는 감사한 일을 찾아봐요. 아무리 힘든 날도 감사한 일이 하나는 있더라고요. 아침에 따뜻한 밥을 먹었다든지 날씨가 좋았다든지 누가 웃으면서 인사했다든지 그런 작은 것들이 다 감사해요."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감동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입니다. 특별한 신통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수행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마음을 바꾸면 됩니다. 집착을 내려놓고 분별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한거사님은 사업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업이 잘됐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직원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존경했습니다. 그분도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성공한 것은 내 능력 덕분이다. 나는 남들보다 뛰어나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위기가 왔습니다. 큰 거래처가 부도가 났고 그 여파로 그분의 회사도 어려워졌습니다.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했습니다. 빚이 쌓였습니다. 결국 회사는 문을 닫았습니다. 30년 동안 읽고 온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분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되는 거지?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신도 붙여도 없는 것 같다." 술을 마시고 사람들을 피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가족들이 걱정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그분을 절에 데려왔습니다. 억지로 끌려온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법회가 있었는데 그분은 뒤쪽에 앉아서 멍안이 있었습니다. 그날 법문 주제가 바로 반야심경이었습니다. 저는 무소득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얻을 것도 없고 이를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 따라 흩어질 뿐이다." 그분은 그 말씀을 듣고 무언가 마음에 와닿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법회가 끝나고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스님, 제가 지금 사업에 실패해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저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거사님, 정말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까?" "네, 회사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습니다. 다 이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거사님은 여기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숨을 쉬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인도 계시고 자녀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정말로 다 이루셨습니까?" 그분은 잠시 말이 막히셨습니다.

"거사님, 거사님이이었다고 생각하시는 것들을 한번 봅시다. 회사 그것은 원래부터 거산인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인연 따라 모였다가 2년 따라 흩어진 것입니까? 돈. 그것은 원래부터 거사님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잠시 거사님 손을 거쳐 간 것입니까? 명예.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생각일 뿐입니까?" 그분은 한참 동안 생각하시더니 천천히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을 들으니 제가 원래부터 가진 것이 없었네요. 다 빌려쓴 것이었고 이제 돌려 준 것뿐이네요. 그런데 저는 그것들이 제 것인 줄 알고 그것들이 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이었을 때 제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꼈나 봅니다."

"맞습니다. 거사님. 거사님은 회사가 아닙니다. 거사님은 돈이 아닙니다. 거사님은 명예가 아닙니다. 거사님은 거사님입니다. 그것들이 있든 없든 거사님은 여전히 거사님입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거사님을 규정하던 외부적인 것들이 사라졌을 뿐입니다. 이제 진짜 거사님을 발견하실 차례입니다."

그날 이후로 그분은 매일 절에 오셨습니다. 아침 예불에 참석하고 법문을 듣고 절 일을 도와주셨습니다. 청소도 하고 공양 준비도 하고 정원도 갖꾸셨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직원들을 부리던 사장이었는데 이제는 화장실 청소를 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씩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화장실을 청소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청소할 수 있는 몸이 있구나. 내가 쓸 수 있는 손이 있구나.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정원에서 풀을 뽑고 계셨습니다. 한참 풀을 뽑다가 문득 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보셨습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분은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이것이 행복이구나. 지금이 순간이 완벽하구나. 내가 그동안 찾아 헤매던 것이 바로 여기 있었구나." 나중에 그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제가 사업할 때는 매일 바빴어요. 돈 벌 생각, 사업 키울 생각, 남들에게 인정받을 생각으로 가득했어요.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도 없었어요. 아니, 올려다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매일 하늘이 보여요. 구름도 보이고 새도 보이고 바람도 느껴져요.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없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없었던게 아니라 제가 보지 못했던 거예요. 그리고 깨달았어요. 제가 그때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가난했고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부자라는 것을 그때는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고 지금은 안에서 행복을 발견했어요. 그때는 얻으려고 했었고 지금은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몇 년이 지나서 그분은 다시 작은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돈을 벌되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성공하되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실패에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잘되면 좋고 안 되면 또 다른 길을 가면 되지." 이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사업이 잘됐습니다. 예전보다 더 잘됐습니다. 왜 그럴까요? 집착이 없으니 판단이 명확했습니다. 욕심이 없으니 실수가 적었습니다. 두려움이 없으니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분을 믿었습니다. 예전에 그분은 성공만 추구했지만 지금의 그분은 진심으로 사람들을 위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소득의 역설입니다. 얻으려 하지 않을 때 얻어집니다. 붙들지 않을 때 오히려 머물러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을 때 진정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반야신경이 가르쳐 주는 삶의 지혜입니다.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한 젊은 보살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30대 초반이었는데 결혼 생활이 힘드셨습니다. 남편과 사사건 부딪혔습니다. 사소한 일로 다un 설거지를 누가 할 것인가? 쓰레기를 누가 버릴 것인가? 이런 일로 매일 싸웠습니다. "왜 나만 해야 해요? 당신도 하면 되잖아요." "나는 회사에서 일하느라 피곤해. 당신은 집에 있으면서 이것도 못 해."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점점 멀어졌습니다.

어느 날 그 보살님이 절에 오셨습니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스님, 이혼하고 싶어요.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한참을 울면서 이야기하시더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잘못 만난 거죠? 남편이 이기적이죠?" 저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보살님은 이기적이지 않으십니까?" "요. 저는 항상 양보했어요. 참았어요." "정말 그럴까요? 아니면 양보했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는 점수를 먹기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내가 이만큼 했으니 저 사람도 이만큼 해야 해.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그분은 잠시 당황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결혼은 서로 노력하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보살님은 상대방이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죠. 그래서 화가 나시죠. 그런데 혹시 남편분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나는 이렇게 노력하는데 아내는 왜 노력하지 않지?' 하고 말입니다." 그분은 한참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는 제 입장에서만 생각했어요. 남편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을 수 있겠네요. 제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기 고생은 크게 보고 남의 고생은 작게 봅니다. 자기 노력은 과대 평가하고 남의 노력은 과소 평가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그분께 반야신경의 가르침을 말씀드렸습니다. "보살님, 남편분이 설거지를 안 한다고 해봅시다. 그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까? 보살님이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해야 해. 저 사람이 해야 해.' 이런 분별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냥 해야 할 일이니까 하십시오. 누가 하든 상관없이 그냥 하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제가 계속 손해 보는 거 아닌가요?" "손해라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설거지를 하는 것이 손해입니까? 아니면 집안일을 하는 것이 고통입니까? 설거지는 그냥 설거지일 뿐입니다. 보살님이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니까 괴로운 것입니다. 봉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수행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분은 반신반이 하는 표정이었지만 한번 해보겠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후에 다시 오셨습니다. 이번에는 표정이 밝았습니다. "스님,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어제 저녁에 남편이 설거지를 안 하고 그냥 TV를 보고 있었어요. 예전 같으면 '왜 당신은 맨날 나만 일하게 해' 하고 따졌을 거예요? 그런데 어제는 신 말씀이 생각나서 그냥 제가 했어요. 처음에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어요. 그런데 이것도 수행이다. 수행이다 하면서 집중해서 설거지를 했어요. 그릇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씻었어요.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어요. 거품이 반짝이는 것을 봤어요. 그러다 보니까 마음이 고요해지더라고요. 설거지가 명상이 되었어요. 그리고 설거지를 다 하고 나니까 남편이 제 뒤에 와 있더라고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설거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나 봐요. 그러면서 조용히 말하더라고요. '고마워. 미안해. 내가 도와줄 걸.' 저는 그 말을 듣고 울컥했어요.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한테 그런 말을 들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말했어요. '괜찮아. 내가 할게. 당신은 피곤하잖아.' 그랬더니 남편이 저를 안아 주더라고요. 우리 결혼하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서로 안았어요. 설거지 때문에 싸우던 우리가 설거지 때문에 화해했어요."

스님, 정말 신기해요.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의 힘입니다. 자기 주장을 내려놓고 분별을 내려놓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상대방도 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드러워지면 상대방도 부드러워집니다. 우리가 열리면 상대방도 열립니다.

그 후 보살님 부분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여전히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심각하지 않습니다. 다투다가도 금방 화해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는 생각이 문제라는 것을, 내 입장만 고집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반야신경의 가르침이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우리 산 속에서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지혜라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일, 만나는 모든 사람, 겪는 모든 상황에서 반야신경의 가르침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도 살아 있다. 숨을 쉴 수 있다.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반야입니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이고 무상하고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아침 식사를 할 때 "이 음식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연이 있었는지" 생각하는 것이 반입니다. 농부, 태양, 비 운송하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출근 길에 지하철을 탈 때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모두 각자의 고민이 있고 각자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자비심을 내는 것이 반야입니다. "저 사람들도 행복하기를 바란다. 저 사람들도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 실수를 해도 자책하지 않는 것이 반야입니다. "나는 완벽해야 해. 실수하면 안 돼." 이런 생각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실수하면서 배웁니다. 실수를 했으면 인정하고 배우고 다음에는 더 잘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상사에게 야단을 맞았을 때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반야입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화를 낼까? 나를 괴롭히려고 그러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면 괴롭습니다. 하지만 "저 사람도 자기 나름에 스트레스가 있겠지. 저 사람도 괴로운 사람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화가 나지 않습니다.

퇴근 후집에 와서 가족을 만날 때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반야입니다. "오늘도 무사히 집에 왔다. 가족이 여기 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매번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별할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이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가족과 대화할 때 진심으로 듣는 것이 반야입니다. 핸드폰을 보면서 대충 듣지 않습니다. TV를 보면서 건성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상대방에게 집중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눈을 보고 마음을 느낍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녀가 말을 안들을 때 화를 내기보다는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반야입니다. "왜 내 말을 안 들어? 너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이렇게 말하면 아이도 반발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니? 힘든 일이 있니?" 이렇게 물으면 아이도 마음을 엽니다. 이해받는다고 느끼면 변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하루를 돌아보는 것이 반야입니다. 잘한 일 못한 일을 생각합니다. 잘한 일은 기뻐하되 교만하지 않습니다. 못한 일은 유우치되 자책하지 않습니다. 내일은 더 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만난 모든 사람, 겪은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평범한 순간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지금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를 깊이 관찰하라. 거기에 지혜가 있다." 지금이 순간에 깨어 있으십시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십시오.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을 온전히 대하십시오. 그것이 수행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물으실 수 있습니다. "스님, 그렇게 살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까?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집착도 없이, 욕심도 없이 살면 뒤쳐지는 거 아닙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진짜 성공이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입니까? 유명해지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을 얻었는데도 불행한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돈은 많은데 잠을 못 자는 사람, 지인은 높은데, 외로운 사람, 유명한데, 우울한 사람. 그들이 정말 성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평범한 삶을 살지만 매일 행복한 사람이 더 성공한 사람입니까?

진짜 성공은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주변 사람들과 화해하고 세상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고 매일 밤 감사한 마음으로 잠드는 것입니다. 하는 일의 의미를 느끼고 만나는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살아 있음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렇게 살면 세속적인 성공도 따라옵니다. 집착 없이 일하면 오히려 더 창의적이 됩니다. 욕심 없이 사람을 대하면 오히려 더 깊은 관계가 맺어집니다. 두려움 없이 도전하면 오히려 더 큰 성취를 이룹니다. 왜 그럴까요? 내려놓으면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면 자유롭고 자유로우면 가능성이 무한해지기 때문입니다.

한보살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예전에는 항상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았어요.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집도 넓은 데로 옮겨야 하고 아이도 더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하고 끝이 없었어요. 하나를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겼어요. 행복은 항상 저 앞에 있었고 저는 항상 부족했어요. 그런데 반야 신경을 배우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더 가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더 가지게 되더라고요. 억지로 얻으려고 할 때는 안 됐는데 내려놓으니까 오히려 오더라고요." 이것이 바로 무소득의 역설입니다. 얻으려 하지 않을 때 얻어집니다. 우주의 법칙이 그렇습니다. 꽉 쥐면 빠져나가고 펼치면 머무릅니다. 붙들면 도망가고 놓아주면 돌아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할 시간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긴 여정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반야심경에 네 가지 핵심을 배웠습니다. 온 개공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 불생불멸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 불구불정 불증불감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 무소득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 네 가지는 사실 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변하고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작은 일에서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화가 날 때 한 번 더 생각하고 욕심이 날 때 한번 내려놓고 판단하려 할 때 한 번 멈추고 과거에 사로잡힐 때 현재로 돌아오고 미래를 걱정할 때 지금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실천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여러분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삶이 정말로 쉬워졌다는 것을, 마음이 정말로 가벼워졌다는 것을, 매일이 정말로 감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었던 선물입니다.

반야심경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가자 가자 저 너로 가자 완전히 저 너로 가자 깨달음이여 이루어지다. 이것은 명령이 아닙니다. 권유입니다. 초대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리 오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여기 있다. 자유로워지는 길이 여기 있다. 평화를 찾는 길이 여기 있다." 우리 모두 그 부름에 응답합시다. 오늘부터 지금이 순간부터 반야의 길을 걷기 시작합시다.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천천히 가도 됩니다. 넘어져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자유를 향해, 평화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모든 보살님들이 함께하십니다. 같은 길을 걷는 수많은 수행자들이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 안에 있는 불성이 함께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부처입니다. 단지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제 깨달을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발언합시다. 이 이 발언이 여러분의 마음속 깊이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이 발언이 여러분의 삶을 이끄는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야심경의 깊은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 가르침이 제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기를 발언합니다. 온이 공하다는 진리를 깨달아 더 이상 헛된 것에 집착하지 않기를 발언합니다. 고 죽음이 없다는 진리를 깨달아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발언합니다. 더럽고 깨끗함의"

분별을 넘어서 모든 존재를 평하게 보기를 발언합니다.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달아 더 이상 욕심내지 않기를 발언합니다.

매일 아침 깨어날 때 살아 있음에 감사하기를 발언합니다. 매일 밤 잠들 때 오늘 하루에 감사하기를 발언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대하기를 발언합니다. 겪는 모든 일을 수행의 기회로 삼기를 발언합니다.

화가 날 때 한 호흡 쉬기를 발언합니다. 욕심이 날 때 내려놓기를 발언합니다. 교만할 때 겸손하기를 발언합니다. 게으를 때 정진하기를 발언합니다. 어리석을 때 지혜를 구하기를 발언합니다.

나 혼자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기원합니다.

이 땅에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모든 존재가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스승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 몸 받은 것에 감사하고 이 마음 받은 것에 감사하고 이 가르침 받은 것에 감사합니다.

제가 받은 이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발언합니다. 제가 얻은 이 평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발언합니다. 저로 인해 누군가 위로받고 저로 인해 누군가 힘을 얻고 저로 인해 누군가 희망을 갖기를 발언합니다.

이 생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다음 생에서도 계속 정진하기를 발언합니다. 생생셋세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고 생생셋세 수행의 길을 걷고 생생세 중생을 이롭게 하기를 발언합니다.

마침내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마침내 모든 중생이 평화를 얻고 마침내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기를 발언합니다.

이 모든 발언이 허공에 사라지지 않고 우주에 새겨지고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발언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여러분 긴 시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가르침이 여러분의 삶의 작은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가르침이 여러분의 괴로움을 더어주기를 바랍니다. 이 가르침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반야심경은 단순히 읽는 경전이 아니라 사는 경전입니다. 암송하는 경전이 아니라 실천하는 경전입니다. 머리로 아는 경전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행하는 경전입니다.

오늘 들으신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내일부터 아니 오늘부터 지금 이 순간부터 실천하십시오. 작은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한 번에 하나씩 바꿔 가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여러분의 산 전체가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평안하십시오. 여러분 모두 행복하십시오. 여러분 모두 자유로우십시오. 여러분 모두 깨달음에 이르십시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