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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말씀]금강경 ,붙잡으려 하면 놓치고, 놓으면 얻습니다 | 집착이 녹아내리는 밤 | 업장소멸 | 마음치유ㅣ불교명언

불교믿음1:25:43

Transcription

오늘 밤 여러분께 하나의 경전을 전해 드리려 합니다. 2500년 전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가르침이며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경전입니다.

그런데 이 경전의 이름이 조금 특별합니다. 다이아몬드라는 뜻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보석.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그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지혜가 이 경전 안에 담겨 있습니다. 바로 금강경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무언가를 꼭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느낌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다가 오히려 멀어졌던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돈을 모으려고 아등바등했는데 어느새 마음만 가난해졌던 적도 있으셨을 테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행복은 더 멀리 달아났던 경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붙잡으려 하면 놓치고 얻으려 하면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 그런 것일까 하고 밤마다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금강경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품고 있습니다. 놓치는 이유가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며 잃어버리는 이유가 얻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지금 이 시간 편안하게 누워 계셔도 좋습니다. 눈을 감으셔도 좋고 그저 흘려듯 들으셔도 괜찮습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무엇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접어 두십시오. 오늘 밤은 그저 부처님의 음성에 마음을 맡기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금강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는지요? 금강산의 그 금강이기도 하고 금강 역사의 그 금강이기도 합니다. 본래 뜻은 가장 단단한 것,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것을 가르킵니다. 다이아몬드가 세상 모든 것을 자를 수 있듯이 금강의 지혜는 모든 번뇌를 잘라낼 수 있습니다. 어떤 고통도, 어떤 집착도, 어떤 미혹도 이 지혜 앞에서는 녹아내리게 됩니다.

금강경의 정식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입니다. 금강처럼 단단한 지혜로 피안에 이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피안이란 고통의 강을 건너 도달하는 저 언덕이며 번뇌가 사라진 평화로운 세계를 말합니다. 이 경전 하나를 마음에 새기면 그 언덕에 이를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이 시간은 지친 분들을 위한 시간입니다. 하루 종일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오신 분들,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매듭을 안고 계신 분들, 밤이 깊어도 잠이 오지 않는 분들을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도 참 많이 애쓰셨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격려해 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오셨습니다. 그 마음을 부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금강경은 어려운 경전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공(空)이니 무한이니 하는 말들이 어렵게 느껴지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밤은 머리로 이해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이며 그저 편안하게 들으시면 저절로 스며드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금강경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의 생기심(生起心)이라는 여덟 글자입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무엇인가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며 붙잡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을 펴면 세상 모든 것이 들어오고 손을 주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금강경이 전하는 첫 번째 진리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재물을 붙잡으려 하고 명예를 붙잡으려 하며 사람을 붙잡으려 합니다. 심지어 행복마저도 붙잡으려 하다가 놓쳐버리곤 하지요. 그런데 금강경은 말합니다. 붙잡으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그러면 잃어버릴 것이 없어진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밤은 아무것도 붙잡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도 내려놓으시고 무엇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도 놓아 버리십시오.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가르침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나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물은 막으면 고이고 고이면 썩습니다. 그러나 흘러가도록 두면 맑음을 유지하며 가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게 됩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금강경이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경전들은 무엇인가를 얻으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덕을 쌓으라, 수행을 하라, 깨달음을 얻으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금강경은 다릅니다. 얻으려는 마음마저 내려놓으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깨달음에 대한 집착조차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장 높은 가르침은 가장 텅 빈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위로가 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일을 붙잡고 있기에 후회가 생기고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붙잡고 있기에 불안이 생깁니다. 잃어버린 것을 붙잡고 있기에 슬픔이 생기며 얻지 못한 것을 붙잡고 있기에 갈망이 생기게 됩니다. 금강경은 이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내려놓으면 괴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늘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하늘은 구름을 붙잡지 않습니다. 구름이 오면 오는 대로 두고 구름이 가면 가는 대로 둡니다. 붙잡지 않기에 하늘은 언제나 맑습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먹구름이 뒤덮어도 하늘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도 하늘과 같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맑고 본래 넓으며 본래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오늘 밤 금강경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2500년 전 인도의 기원정사로 가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그 자리로 말입니다. 그곳에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질문을 드렸고 그 질문과 대답이 금강경이 되었습니다. 어떤 질문이었기에 이토록 깊은 가르침이 나왔는지, 어떤 대답이었기에 2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밤 금강경을 만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깊은 인연이 있기에 이 자리에 함께하고 계신 것입니다. 금강경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경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받아들일 그릇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가르침을 듣고 계신 여러분은 이미 그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입니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지혜. 그 지혜가 오늘 밤 여러분에게 전해집니다. 이 지혜를 만나면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붙잡으려는 마음이 줄어들고 내려놓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집착이 녹아내리고 자유가 피어납니다. 금강경을 만난 수많은 분들이 경험한 변화이며 오늘 밤 여러분에게도 그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 주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 것입니다. 오늘 밤 금강경과 함께하는 시간이 여러분에게 깊은 평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가르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함께 그 자리로 가보겠습니다. 2500년 전 인도 북부의 코라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수도 사위성 남쪽에 아름다운 숲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기원정사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셨던 곳이며 수많은 가르침이 이곳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금강경도 바로 이 기원정사에서 설해졌습니다.

기원정사라는 이름에는 깊은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투다타라는 장자가 있었는데 그는 외롭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급고독(給孤獨)이라 불렀으니 외로운 이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뜻이었습니다. 어느 날 급고독 장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깊이 감동하였으며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실 곳을 마련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급고독 장자는 사위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을 찾아다녔습니다. 마침내 기타 태자의 숲을 발견하였고 그 숲을 사고 싶다고 청하였습니다. 기타 태자는 처음에 팔 생각이 없었으나 장자의 간절함에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숲 전체에 금은(金銀)을 깔아 덮으면 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급고독 장자는 정말로 그 금은을 실어 날랐습니다. 수레의 수레를 이어 금은을 쏟아부었고 숲 바닥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기타 태자는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이토록 귀한 것을 아끼지 않게 만드는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던 것입니다. 결국 태자는 숲을 팔았을뿐 아니라 직접 정사를 짓는 일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숲은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불리게 되었으니 기타 태자의 숲에 급고독 장자가 세운 정사라는 뜻입니다. 줄여서 기원정사라 부르게 되었고 이곳에서 부처님께서는 25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드신 후 사위성으로 탁발을 나가셨습니다. 집집마다 차례로 걸식하시며 보시를 받으셨습니다. 탁발을 마치신 후 기원정사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드셨고 발우를 씻어 거두신 후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금강경은 이 평범한 일상의 묘사로 시작됩니다. 특별한 기적이 없고 신비로운 현상도 없습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자리에 앉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가장 높은 진리는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을 때 온전히 밥을 먹고 걸을 때 온전히 걷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수행이었습니다. 특별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것. 금강경은 이렇게 일상의 모습으로 문을 열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 대중 가운데 수보리라는 존자가 있었습니다.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이셨으며 공(空)을 가장 잘 이해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는 칭호를 받으셨으니 공의 이치를 풀어내는데 가장 뛰어나셨다는 뜻입니다. 그날 수보리 존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갔습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었으며 두 손을 모아 합장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인도에서 가장 공경을 담은 예법이었습니다. 수보리 존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왜 눈물이었을까요? 수보리 존자는 그동안 수많은 가르침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번뇌가 일어날 때 어떻게 그것을 항복받아야 하는가? 이 물음이 오랫동안 가슴에 맺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려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경험 말입니다. 화를 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던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적도 있으셨을 테고 집착을 버려야지 하면서도 손에서 놓아지지 않았던 적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 존자도 같은 고민을 품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으로는 알겠는데 실제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녀인이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향해 마음을 낸다면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금강경의 핵심 질문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번뇌를 항복받을 것인가? 2500년 전 수보리 존자의 질문이 오늘 밤 여러분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질문을 들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좋은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가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었고 수보리 존자가 마침내 그것을 물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물은 대로 내가 말해 주리라.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고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이 금강경의 본론입니다. 집착을 내려놓는 법, 상(相)을 버리는 법,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법이 차근차근 펼쳐집니다. 금강경은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한 제자의 간절한 물음과 스승의 자비로운 대답으로 이루어진 경전입니다. 어려운 철학서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내서입니다.

여러분, 수보리 존자가 물었던 그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합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물음을 품고 계신 분이라면 금강경은 여러분을 위한 경전입니다. 오늘 밤 부처님의 대답을 함께 들어 보겠습니다. 기원정사에서 울려 퍼졌던 그 음성이 2500년의 시간을 건너 지금 여러분에게 전해집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상(相)을 버리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 네 가지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가르침이며 이것을 이해하면 금강경의 절반은 이해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 상이라는 말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상이란 어떤 것에 대해 마음속에 그려놓은 모습을 말합니다. 고정된 생각이라고 해도 좋고 집착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무엇인가를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규정짓는 마음이 바로 상입니다.

첫 번째는 아상입니다. 나라는 상, 나라는 집착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내 몸이 있고 내 생각이 있으며 내 감정이 있다고 여깁니다. 이 나를 지키려 하고 이 나를 높이려 하며 이 나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그 나라 것이 정말 있느냐고 말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나인가? 열 살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존재인가? 몸은 계속 바뀌고 생각도 계속 바뀌며 감정도 시시각각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나라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여러분, 강물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강물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어제 흐르던 물과 오늘 흐르는 물은 다른 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같은 강이라고 부릅니다. 한강은 여전히 한강이고 낙동강은 여전히 낙동강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안을 흐르는 물은 단 한 순간도 같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 강물과 같습니다.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새로 태어나며 생각은 쉴새 없이 바뀌고 감정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갑니다. 고정된 나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흐름이 있을 뿐이며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아상을 버린다는 것은 이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라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를 지키려는 마음, 나를 높이려는 마음, 나만 옳다는 마음. 이런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 번째는 인상입니다. 남이라는 상, 타인이라는 집착을 말합니다. 아상이 나에 대한 집착이라면 인상은 남에 대한 분별입니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 저 사람은 남이다 하고 선을 긋는 마음이지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을 긋습니다. 나와 남, 우리와 그들, 이쪽과 저쪽. 이 선 때문에 다툼이 생기고 이 선 때문에 미움이 생깁니다. 가족이라는 선 안에 있으면 사랑하고 선 밖에 있으면 무관심합니다. 같은 편이면 돕고 다른 편이면 경계합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 보면 나와 남의 경계는 허물어집니다. 내가 숨쉬는 이 공기는 아까 누군가가 내신 공기입니다. 내가 먹는 이 음식은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온 것입니다. 나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상을 버린다는 것은 이 연결을 보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저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저 사람이 기쁘면 나도 기쁜 것. 그것이 인상을 버린 자리에서 피어나는 자비입니다.

여러분, 세 번째는 중생상입니다. 중생이라는 상, 생명 있는 존재라는 집착을 말합니다. 이것은 조금 더 미세한 분별입니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 의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동물은 그다음이며 식물은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돌이나 흙은 생명이 없으니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중생상입니다. 그러나 화엄의 눈으로 보면 티끌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돌멩이 하나도 오랜 세월 바람과 물과 햇빛을 품고 있습니다. 살아 있다. 살아 있지 않다는 구분도 결국은 마음이 만들어낸 경계입니다. 중생상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존재를 똑같이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소중합니다. 이 마음이 깊어지면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네 번째는 수자상입니다. 수명이라는 상, 시간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 젊음을 붙잡고 싶다는 마음,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두렵다는 마음. 이것이 수자상입니다. 우리는 시간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는 것이 불안하고 언젠가 찾아올 죽음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젊음을 붙잡으려 애쓰고 건강에 집착하며 죽음을 외면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젊음이 있으면 늙음이 있다고.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거스를 수 없는 흐름입니다. 수자상을 버린다는 것은 이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꽃이 피면 아름답고 꽃이지면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꽃이지는 것도 아름다움입니다. 떨어지는 꽃잎에도 시드는 잎새에도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그렇습니다. 젊음도 아름답고 늙음도 아름다우며 삶도 귀하고 죽음도 귀합니다.

여러분 이 네 가지 상을 버리라는 것이 금강경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아상을 버려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인상을 버려 남과의 분별을 녹이며 중생상을 버려 모든 존재를 귀히 여기고 수자상을 버려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나를 버리라니 그러면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을 버린다는 것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손 안에 무엇이 있든 꽉 쥐고 있으면 손이 아픕니다. 오래 쥐고 있을수록 더 아파집니다. 그런데 손을 펴면 어떻게 되는지요? 아픔이 사라지고 손이 편안해집니다. 손 안에 있던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쥐고 있던 힘을 놓았을 뿐입니다. 상을 버리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나라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움켜지던 힘을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자유로워집니다.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높이려 힘쓰지 않아도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밤 이 가르침을 마음에 담아 보십시오. 당장 네 가지 상을 모두 버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아, 지금 내가 나를 지키려고 힘쓰고 있구나. 아, 지금 내가 저 사람과 선을 긋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집착은 조금씩 느슨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상을 버린 자리에서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지킬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고 높일 것이 없으니 다툴 것이 없습니다. 나와 남의 경계가 녹으니 온 세상이 한 가족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금강경이 말하는 해탈의 첫걸음입니다. 네 가지 상을 버리는 것. 그것이 다이아몬드 같은 지혜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상을 버리라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부처님께서는 더 깊은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그 말씀이 바로 응무소주(應無所住)의 생기심(生起心)입니다. 금강경에서 가장 유명한 여덟 글자이며 이 한 구절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있을 만큼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것이 부처님께서 전하신 실천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응무소주의 생기심. 이 말을 천천히 음미해 보십시오. 응(應)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뜻이고 무소주(無所住)는 머무는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생기심(生起心)은 이와 같이 마음을 낸다는 뜻이지요. 합쳐서 풀이하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딘가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것이며 매달리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 좋음에 머물고 나쁜 일이 있으면 그 나쁨에 머뭅니다. 칭찬을 받으면 칭찬에 머물러 우쭐해지고 비난을 받으면 비난에 머물러 괴로워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머무름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일이 와도 거기에 머물지 말고 나쁜 일이 와도 거기에 머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는 것은 오는 대로 두고 가는 것은 가는 대로 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한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머물러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머물러 걱정합니다. 누군가에게들은 말에 머물러 화를 내고 잃어버린 것에 머물러 슬퍼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아무리 붙잡아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지 않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걱정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머무름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으면서 다만 우리를 괴롭게 할 뿐입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것은 마음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내되 거기에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이 일어나면 기뻐하되 그 기쁨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슬픈 마음이 일어나면 슬퍼하되 그 슬픔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늘에 뜬 구름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구름은 떠다닙니다. 이리저리 움직이고 모양이 변하며 어느새 사라집니다. 하늘은 그 구름을 붙잡지 않습니다. 구름이 오면 품어주고 구름이 가면 보내줍니다. 그래서 하늘은 언제나 맑고 넓습니다. 우리 마음도 하늘과 같아야 합니다. 생각이 구름처럼 떠오르면 그것을 알아차리되 붙잡지 않습니다. 감정이 구름처럼 몰려오면 그것을 느끼되 매달리지 않습니다. 오는 대로 두고 가는 대로 두면 마음은 언제나 하늘처럼 맑고 넓어집니다.

여러분, 이 응무소주의 생기심이라는 구절로 단박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 선종의 육조 해능 대사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해능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어머니를 모시고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글을 배울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나무를 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누가 봐도 평범한 나무꾼이었고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이었습니다. 어느 날 해능은 나무를 팔러 시장에 갔습니다. 한 집 앞을 지나가는데 안에서 누군가 경전을 읽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그 구절을 듣는 순간 해능의 마음에 무엇인가 확 열렸습니다. 글을 몰랐던 나무꾼이 경전의 뜻을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 단 한 구절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해능은 그 집에 들어가 물었습니다. "지금 읽으신 것이 무슨 경전입니까?"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금강경이라고 합니다. 오조 홍인 대사께서 이 경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분, 해능은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홍인 대사를 찾아가 배우고 싶다고. 가난한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씨를 끌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어머니의 생활비를 대어 주겠다고 나섰고 해능은 마침내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홍인 대사가 계신 황매산까지는 먼 길이었습니다. 천리가 넘는 거리를 해능은 걸어서 갔습니다. 한 달이 넘게 걸렸을 것입니다. 마침내 황매산에 도착하여 홍인 대사를 배웠습니다. 홍인 대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구하러 왔느냐?" 해능이 대답했습니다. "영남에서 왔으며 부처가 되고자 왔습니다." 홍인 대사가 말했습니다. "영남 사람은 불성이 없는데 어찌 부처가 되겠느냐?" 이것은 시험이었습니다. 해능이 대답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을 수 있으나 불성(佛性)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홍인 대사는 속으로 감탄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해능을 방앗간에 보내 쌀을 찧게 하였습니다. 여덟 달 동안 해능은 방앗간에서 일했습니다. 경전을 배우지도 못했고 법문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오직 쌀을 찧고 또 찧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수행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화려한 법당에서 경전을 외우는 것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방앗간에서 쌀을 지으며 한 순간 한 순간에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해능은 방앗간에서 자신의 마음을 닦아 나갔습니다.

어느 날 홍인 대사가 선언했습니다. 제자들에게 개송(偈頌)을 지어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뛰어난 개송을 지은 사람에게 법을 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의 눈이 신수(神秀) 존자에게 쏠렸습니다. 신수는 홍인 대사 문화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수가 개송을 지어 벽에 붙였습니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 많은 제자들이 이 개송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홍인 대사도 이 개송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해능은 달리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개송을 벽에 적어 달라고 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해능은 직접 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개송은 이러했습니다.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요 맑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으니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

여러분 이 개송의 뜻을 새겨 보십시오. 신수의 개송은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먼지가 끼지 않도록 부지런히 닦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좋은 가르침이지만 아직 머무름이 있습니다. 닦아야 할 마음이 있고 제거해야 할 먼지가 있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습니다. 해능의 개송은 다릅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했습니다. 닦아야 할 마음도 없고 제거해야 할 먼지도 없습니다. 본래 깨끗한데 무엇을 닦겠습니까? 본래 부처인데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이것이 응무소주의 생기심의 경지입니다. 머무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홍인 대사는 해능의 개송을 보시고 아직 견성(見性)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발로 그 개송을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제자들의 시기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날 밤 홍인 대사는 몰래 해능을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응무소주의 생기심 구절에 이르렀을 때 해능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윽고 홍인 대사는 해능에게 법과 가사와 발우를 전하셨습니다. 해능은 그렇게 육조가 되었습니다. 글도 모르는 나무꾼이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해능 대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배움에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신분에 높고 낮음에 있지 않으며 나이에 많고 적음에도 있지 않지요. 오직 마음을 내려놓는데 있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 가르침이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원효 대사께서는 해골물 사건으로 유명합니다. 당나라로 유학을 가시던 중 밤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보니 해골의 고인물이었습니다. 그 순간 원효 대사는 깨달으셨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것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도 무덤도 둘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바로 응무소주의 생기심의 다른 표현입니다. 마음이 머물면 분별이 생기고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분별이 사라집니다. 어젯밤에 달콤한 물과 아침에 해골물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이 머무는 곳에 따라 달라 보일 뿐입니다.

여러분, 오늘 밤 이 가르침을 삶에 적용해 보십시오. 내일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되 그 기쁨에 너무 머물지 마십시오. 기쁨에 머물면 기쁨이 사라질 때 슬퍼지기 때문입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힘들어하되 그 힘듦에 너무 머물지 마십시오. 힘듦에 머물면 힘듦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물처럼 흘러가십시오. 물은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채우고 넘칩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기에 물은 결국 바다에 이릅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흘러가면 결국 평화의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심. 이 여덟 글자를 가슴에 새겨 두십시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것이 금강경이 전하는 수행의 핵심이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무엇이 가능해지는지 부처님께서는 보시(布施)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보시란 베푸는 것입니다. 나눔이며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보시에도 참된 보시가 있고 참되지 못한 보시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비운 자리에서 하는 보시가 참된 보시이며 집착이 섞인 보시는 아무리 많이 베풀어도 공덕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베풉니다. 돈을 기부하기도 하고 시간을 내어 봉사하기도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하고 아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하지요. 이 모든 것이 보시입니다. 그런데 베풀고 나서 마음이 어떠하신지요? 잘했다는 뿌듯함이 남기도 하고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하면 서운함이 남기도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저 사람은 받기만 하고 감사할 줄 모른다는 원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이 남는다면 그것은 아직 참된 보시가 아니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상(相)에 머물러 보시하지 말아야 한다." 상에 머문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집착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에 머물거나 저 사람이 받았다는 생각에 머물거나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륜청정(三輪清淨)이라고 합니다. 세 바퀴가 깨끗하다는 뜻이지요. 주는 사람도 비우고 받는 사람도 비우며 주고받는 물건도 비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에 집착하지 않을 때 보시는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에 머물면 교만이 생깁니다. 나는 주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받는 사람이라는 분별이 생기며 그 분별 속에서 높고 낮음이 만들어집니다. 베풀면서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받는 사람에 대한 생각에 머물면 기대가 생깁니다. 저 사람이 고마워해야 한다. 저 사람이 잘 써야 한다는 기대가 생기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베풀고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고받는 물건에 대한 생각에 머물면 아까움이 생깁니다. 이만큼이나 주었는데 이렇게 좋은 것을 주었는데 하는 마음이 남습니다. 주고 나서도 마음 한 구석에 무엇인가 걸려 있게 됩니다. 삼륜청정의 성스러운 보시는 이 모든 것을 비웁니다. 주었다는 생각도 없고 받았다는 생각도 없으며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마치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는 것처럼 베풀고도 베푼 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주었는데 나중에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적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오랜 시간이지나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말할 때 무슨 일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어리둥절했던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삼륜청정에 가까운 보시입니다. 베풀고도 베푼 줄 모르니 거기에 집착이 없었던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보시의 종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재보시(財施), 법보시(法施), 무외보시(無畏施)입니다. 재보시는 재물로 베푸는 것입니다. 돈이나 물건, 음식이나 옷을 나누는 것이지요. 가장 눈에 보이는 보시이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보시입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쌀을 보내고 불우한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사 주는 것이 재보시입니다. 법보시는 가르침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하고 좋은 말씀을 나누며 바른 길을 알려 주는 것이지요. 경전의 뜻을 풀어 설명해 주거나 삶의 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이 법보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재보시보다 법보시의 공덕이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한 때를 돕지만 가르침은 평생을 돕기 때문입니다. 무외보시는 두려움을 없애 주는 것입니다. 무섭고 불안한 사람에게 안심을 주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 주는 것이지요. 어두운 밤길을 함께 걸어 주거나 힘든 시간을 곁에서 버텨 주는 것이 무외보시입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보시 중에서 우리가 매일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얼굴로 하는 보시, 말로 하는 보시입니다. 안시(顔施)와 언시(言施)라고 합니다. 밝은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안시입니다. 찡그린 얼굴보다 미소짓는 얼굴이 무표정한 얼굴보다 따뜻한 얼굴이 상대방에게 큰 선물이 됩니다. 돈 한 푼 들지 않지만 상대방의 하루를 바꿀 수 있는 보시입니다. 따뜻한 말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언시입니다. 거친 말보다 부드러운 말이 차가운 말보다 따뜻한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녹입니다.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지친 사람에게 큰 힘이 됩니다.

여러분, 이런 작은 보시가 모여 세상을 바꿉니다. 거창한 기부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큰 돈을 내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 한 번 더 짓고 따뜻한 말 한 마디 더 건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매일 할 수 있는 보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보시를 하면서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미소지어 주었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내가 좋은 말을 해 주었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베풀고 잊어버리는 것, 주고 비워버리는 것. 그것이 금강경이 말하는 참된 보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동쪽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남쪽, 서쪽, 북쪽, 사방, 상하의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헤아릴 수 없다고 대답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보살의 복덕도 그와 같이 헤아릴 수 없다." 여러분이 말씀의 뜻을 새겨 보십시오.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의 공덕은 무한합니다. 허공처럼 끝이 없고 바다처럼 다음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집착이 없으면 보시하는 마음도 허공처럼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베풀어도 베풀어도 줄어들지 않는 마음, 주어도 주어도 비어 있는 마음. 그 마음에서 나오는 보시이기에 그 공덕도 허공처럼 무한한 것입니다.

오늘 밤 이 가르침을 마음에 담아두십시오. 내일 누군가에게 베풀 기회가 있다면 삼륜청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준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저 사람이 받는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며 무엇을 준다는 생각을 내려놓아 보십시오.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베풀어 보십시오.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베풀고 나면 자꾸 생각이 나고 고맙다는 말을 기다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아, 내가 지금 집착하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면 집착은 조금씩 느슨해집니다. 여러분, 진정한 보시는 주는 사람도 행복하고 받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집착이 없기에 주는 사람은 가벼워지고 분별이 없기에 받는 사람은 편안해집니다. 이것이 금강경이 말하는 보시의 참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집착 없이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형상(形像)에 속지 않는 눈이 필요합니다. 모든 형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범소유상 개시여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모든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보리라. 이것이 형상에 속지 않는 눈을 여는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도 형상이고 산과 강도 형상이며 꽃과 나무도 모두 형상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이 형상이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형상이 허망하다고 하셨습니다. 허망하다는 말이 조금 무섭게 들릴 수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이 다 거짓이라는 말인가?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고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허망함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형상은 분명히 있습니다. 꽃은 피어 있고 산은 서 있으며 사람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허망하다고 하신 것은 그 형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꽃 한송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침에 활짝 피어 있던 꽃이 저녁이면 조금 시들어 있습니다. 어제 보았던 그 꽃과 오늘 보는 이 꽃은 같은 꽃일까요? 형상은 같아 보이지만 실은 매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세포가 죽고 새로 생기며 수분이 빠져나가고 색이 바래갑니다. 우리 눈에는 같은 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 한 순간도 같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울을 보면 어제와 같은 얼굴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수많은 세포가 죽고 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피부는 끊임없이 벗겨지고 새로 만들어지며 뼈조차도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7년이 지나면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바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7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요? 형상이 허망하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고정된 것 같지만 실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형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줄어들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형상에 속아서 괴로워합니다. 젊은 모습을 붙잡으려 하다가 늙어가는 것이 괴롭고 건강한 모습을 붙잡으려 하다가 아픈 것이 괴롭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붙잡으려 하다가 그 모습이 변하면 슬퍼합니다. 그러나 형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원래 변하는 것이니 변한다고 슬퍼할 것이 없습니다. 원래 흘러가는 것이니 흘러간다고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꽃이 피면 피는 대로 아름답고 꽃이지면 지는 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더 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땡된 길을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부처님조차도 형상으로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처님 하면 어떤 모습을 떠올립니다. 절에 모셔진 불상의 모습, 보리수 아래 앉아 계신 모습, 자비로운 미소를 띤 모습.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런 형상이 부처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형상에 매이면 진짜 부처님을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진짜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형상 너머에 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 모습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 안에 계십니다. 깨달음의 빛 안에 계시며 자비의 마음 안에 머무십니다. 형상을 넘어서야 비로소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형상으로 봅니다. 얼굴이 잘생겼다 못생겼다. 옷이 좋다 나쁘다 지위가 높다 낮다. 이런 형상에 따라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형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 형상 너머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형상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사람의 본래 마음이 있습니다. 불성이 있고 부처의 씨앗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다 달라도 그 안에 있는 본성은 같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두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상의 눈으로 보면 천차만별이지만 본질의 눈으로 보면 하나입니다. 금강경이 말하는 지혜의 눈은 바로 이것을 보는 눈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물결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 위에 물결이 일렁입니다. 큰 물결도 있고 작은 물결도 있으며 높은 물결도 있고 낮은 물결도 있습니다. 물결만 보면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물결 아래를 보면 모두 같은 바닷물입니다. 물결은 형상이고 바닷물은 본질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다른 물결 같지만 그 아래는 같은 바다입니다. 형상에 속으면 다름만 보이고 본질을 보면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금강경은 이 본질을 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형상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꽃이 허망하다고 해서 꽃을 함부로 대하라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허망하다고 해서 사람을 가볍게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형상이 허망함을 알면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해집니다. 꽃이 영원히 피어 있지 않기에 지금 피어 있는 이 꽃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영원히 함께하지 않기에 지금 함께하는 이 시간이 더욱 귀합니다. 허망함을 아는 것은 소중함을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오늘 밤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보십시오. 내일 무엇인가를 볼 때 형상 너머를 보려고 해 보십시오. 사람을 만날 때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의 마음을 보려고 해 보십시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것도 변화리라는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범소유상 개시여망. 모든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합니다. 그러나 그 허망함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빛나고 있습니다. 형상은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으며 물결은 사라져도 바다는 남아 있습니다. 그 변하지 않는 것을 보는 눈. 그것이 금강경이 전하는 지혜의 눈입니다.

이 형상의 허망함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금강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구게(四句偈)의 지혜입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금강경 전체를 마무리하는 네 구절의 계송입니다. 이 사구게라고 불리며 이 짧은 계송 안에 금강경의 모든 지혜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계송을 천천히 풀어 보겠습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모든 만들어진 것을 말합니다. 인연이 모여 생겨난 것, 조건이 갖추어져 이루어진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가르킵니다. 우리 몸도 유위법이고 우리 마음도 유위법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유위법입니다.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는 뜻입니다. 네 가지 비유로 유위법의 성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꿈을 생각해 보십시오. 꿈을 꿀 때는 그것이 진짜라고 믿습니다. 무서운 꿈을 꾸면 진짜로 무섭고 슬픈 꿈을 꾸면 진짜로 슬퍼집니다. 그러나 깨어나면 어떻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토록 무섭던 것이 사라지고 그토록 슬펐던 것이

허망해집니다. 여러분, 우리 삶도 꿈과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는 모든 것이 진짜처럼 느껴집니다. 기쁨도 진짜이고 슬픔도 진짜이며 성공도 진짜이고 실패도 진짜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모든 것이 꿈처럼 아득해집니다. 10년 전에 그토록 중요했던 일이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졌습니다. 20년 전에 그토록 괴로웠던 일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기루를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사막에서 물이 보이고 아스팔트 위에서 호수가 보입니다. 분명히 보이는데 가까이 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에 보인다고 해서 다 실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잡으려는 많은 것들이 이 신기로와 같습니다. 명예를 얻으면 행복해질 것 같고 돈을 모으면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얻고 나면 생각했던 것과 다릅니다. 명예를 얻어도 여전히 불안하고 돈을 모아도 여전히 걱정입니다. 신기루를 쫓아 달려갔는데 그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물거품은 어떠합니까? 계곡물이 바위에 부딪히면 하얀 거품이 일어납니다. 잠깐 동안 아름답게 부풀어 오르지만 금세 터져 버립니다.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단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정도 물거품과 같습니다. 기쁨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슬픔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습니다. 어떤 감정도 영원히 머물러 있지 않으며 거품처럼 일어났다. 거품처럼 사라질 뿐입니다.

그림자는 또 어떠합니까? 그림자는 분명히 보이지만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실체가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생기고 빛이 없으면 사라지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지하여 나타날 뿐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도 그림자와 같습니다. 분명히 있는 것 같지만 실체를 찾으면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을 나라고 하기엔 몸은 계속 변하고 마음을 나라고 하기엔 마음은 한 순간도 같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은 여러 조건이 모여 잠시 나타난 그림자와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 비유가 더 이어집니다. 아침 이슬을 떠올려 보십시오. 풀잎 위에 맺힌 이슬 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보석처럼 아름답지만 해가 뜨면 곧 사라지고 맙니다. 잠깐 동안 빛나다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립니다. 우리 삶도 이슬과 같습니다. 아무리 길어봐야 100년입니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이슬 방울이 맺쳤다 사라지는 것보다 더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인지, 무엇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번개는 더욱 짧습니다. 하늘을 가르며 한 순간 번쩍하고 금세 사라져 버립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났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집니다. 그 찰나의 빛이 번개의 전부입니다. 우리 생각도 번개와 같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른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생각이 번갈아 나타나지만 어떤 생각도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번개처럼 번쩍였다가 번개처럼 사라질 뿐입니다. 응작여.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여섯 가지 비유로 세상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꿈처럼, 환상처럼, 물거품처럼, 그림자처럼, 이슬처럼, 번개처럼 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허무주의가 아니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아꿈고 허망하다면 살아서 무엇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꿈인 줄 알면서 꾸는 꿈은 다릅니다. 무서운 꿈인 줄 알면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꿈인 줄 모르고 꾸면 꿈에 끌려다니지만 꿈인 줄 알고 꾸면 꿈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각몽이라고 합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꿈과 같다는 것을 알면 삶에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며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꿈인 줄 알면서도 꿈을 즐길 수 있듯이 허망함을 알면서도 삶을 충실히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슬이 아침에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 지금 이 이슬이 더욱 소중해집니다. 번개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 지금 이 적임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더덮음을 아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이 꿈과 같다는 것을 알면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온전히 살게 됩니다.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 깨어 있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사국계를 통해 전하시려는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일체유의법 여몽한 포형 여로여 응자여시 이물럭자를 가슴에 새겨 두십시오. 힘든 일이 있을 때 이 계송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이 괴로움도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러면 괴로움이 조금 가벼워질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이 계송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이 기쁨도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는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러면 기쁨에 취해 놓치지 않고 그 기쁨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국에는 금강경 전체를 압축한 보석과 같습니다. 이 짧은 계송 하나만 마음에 새겨도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집착이 줄어들고 평화가 찾아오며 자유로움이 피어나게 됩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한국과 금강경의 인연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그 인연은 1400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금강경은 인도에서 태어나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으며 1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한국 불교와 금강경은 때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원효 대사를 아실 것입니다. 신라 시대의 고승으로 우리나라 불교의 큰 스승이십니다. 원효 대사께서는 금강경을 깊이 연구하셨고 금강산매 경론이라는 위대한 저술을 남기셨습니다. 금강경의 지혜를 바탕으로 새로운 경전을 해석하신 것입니다. 원효 대사의 깨달음 이야기는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해골 사건으로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채득하셨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도 무덤도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 이것은 금강경의 응무소주의 생기심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원효 대사께서는 거리로 나가셨습니다. 높은 절에만 계시지 않고 저잣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셨습니다. 무애가를 부르며 중생들 속으로 들어가셨으며 어려운 교리를 쉬운 말로 풀어 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에 머물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스님의 체면에 머물지 않고 깨달은 자의 위신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서산 대사께서도 금강경을 깊이 수행하신 분입니다. 조선 시대의 고승으로 선교양종의 큰 스승이셨습니다. 서산 대사께서는 매일 금강경을 독송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새벽마다 금강경을 읽으시며 하루를 시작하셨고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산 대사께서는 이른이 넘은 나이에 승병을 이끄셨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산에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도 서산 대사께서는 금강경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싸우되 싸움에 머물지 않고 이기되 승리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산 대사께서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공을 세웠다고 자랑하지 않으셨고 나라를 구했다고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행자의 삶으로 돌아가셨으니 이것이 삼년청정의 실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한국의 사찰에서는 예로부터 금강경을 독송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새벽 예불 때 금강경을 읽었고 저녁 예불 때도 금강경을 읽었습니다. 스님들뿐 아니라 신도들도 금강경을 외웠으며 집집마다 금강경 한 권쯤은 모셔두었습니다. 특히 49제와 천도제에서 금강경을 독송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사람이 돌아가시면 49일 동안 재를 올리는데 이때 빠지지 않고 읽는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왜 하필 금강경일까요?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집착을 내려놓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승에 대한 미련, 남겨진 가족에 대한 걱정,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 이런 집착들이 영혼을 붙잡고 있으면 편안히 가실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이 그 집착을 풀어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체유의법 여몽한 포양.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는 가르침이 돌아가신 분께 전해집니다. 이승의 삶도 꿈과 같았으니 이제 그 꿈에서 깨어나 편안히 가시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이 영혼을 자유롭게 해드립니다. 남겨진 가족들에게도 금강경은 위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그리움. 이런 마음들이 가슴을 찢어 놓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읽으며 만남과 헤어짐도 꿈과 같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형상은 사라져도 인연은 사라지지 않으며 몸은 떠나도 마음의 연결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어르신들 중에는 새벽마다 금강경을 독송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직 해가 뜨기 전 고요한 새벽에 목탁 소리와 함께 금강경을 읽으시는 할머니들.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시골 마을의 새벽은 고요합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어디선가 금강경 읽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시암문 일시불 제사위국 기수급 고독원 여대비구중 1250인구. 낮고 정갈한 음성이 새벽 공기를 타고 퍼져 나갑니다. 그 할머니들께서는 왜 새벽마다 금강경을 읽으셨을까요?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복을 받으려고만도 아니셨습니다. 금강경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셨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닦으셨고 세상의 시끄러움이 시작되기 전에 고요함을 채우셨습니다.

여러분, 그 할머니들은 교리를 깊이 아시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범소유상 개시어망이 무슨 뜻인지, 응무소주의 생기심이 어떤 경지인지 설명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아셨습니다. 금강경을 읽으면 마음이 맑아진다는 것을, 집착이 녹아내린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으셨습니다. 평생을 고생하며 사셨던 분들입니다. 자식 키우느라 허리가 휘고 농사 짓느라 손이 거칠어졌습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신 분도 계셨고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안고 사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 모든 괴로움을 안고 새벽마다 금강경을 읽으셨습니다. 금강경이 그분들의 위로였습니다. 삶이 힘들어도 꿈과 같다는 것을 알았기에 견딜 수 있었고 형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집착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금강경은 그렇게 우리 어머니들의 할머니들의 삶을 지탱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전국의 사찰에서는 금강경이 읽히고 있습니다. 새벽 예불 때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산사에 울려 퍼지며 제일마다 신도들이 모여 금강경을 독송합니다. 1400년 전에 이 땅에 전해진 가르침이 오늘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한국인의 정서와도 잘 맞습니다.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이 체념이 아니라 수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이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지혜, 힘들어도 웃을 줄 아는 여유. 이런 한국인의 마음속에 금강경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밤 여러분도 이 전통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1400년 동안 수많은 스님들이, 수많은 신도들이, 수많은 할머니들이 읽어온 금강경. 그 가르침이 지금 여러분의 귀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거룩한 인연의 고리에 연결되어 계신 것입니다.

이제 금강경을 읽고 지니는 것의 공덕에 대해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 곳곳에서 이 경전을 읽고 지니는 공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공덕이 얼마나 큰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듣고 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3천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많겠느냐고. 수보리 존자가 대답했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3천대천 세계란 우주 전체를 말합니다. 그 광대한 우주에 금과 은, 유리와 수정, 산호와 호박, 만호가 가득 차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을 모두 보시한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에서 사구게를 받아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덕이 앞에 보시보다 더 크다고. 우주를 가득 채운 보물보다 금강경 네 구절을 받아지니는 것이 더 큰 공덕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보물은 아무리 많아도 언젠가는 다 합니다. 그음보화를 아무리 쌓아도 쓰면 줄어들고 이르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지혜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번 마음에 새기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나눠져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보물로 하는 보시는 몸을 돕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움은 일시적입니다. 밥을 먹으면 다시 배가 고프고 옷을 입으면 다시 헤어집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마음을 돕습니다. 집착을 내려놓는 법을 알려주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줍니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평생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물 보시보다 법보시가 더 큰 것입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드셨습니다. 항하사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갠지스 강의 모래라는 뜻인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를 나타낼 때 쓰는 표현입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항하사에 있는 모래 수만큼 항아가 있다면 그 모든 항아의 모래 수가 많겠느냐고. 수보리 존자가 대답했습니다. 항아만 해도 그 수가 무량한데 하물며 그 모래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래 수만큼의 3천대천 세계의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한다 해도 금강경 사구계를 받아지니고 설해 주는 공덕이 더 크다고. 상상할 수 없는 비유입니다. 무한에 무한을 곱한 것보다 금강경 네 구절이 더 크다는 말씀이니까요.

여러분, 왜 이토록 공덕이 클까요? 금강경은 모든 부처님을 낳는 어머니와 같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일체의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최상의 깨달음이 다 이 경전에서 나온다고. 금강경을 읽고 깨달으면 부처가 됩니다. 부처를 만드는 경전이니 그 공덕이 무량한 것은 당연합니다. 보물은 보물을 만들 뿐이지만 금강경은 부처를 만듭니다. 어떤 보물이 이것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 계신 것과 같다고. 금강경을 모신 곳에 부처님께서 함께 계시며 금강경을 읽는 사람 곁에 부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절에 가지 않아도 스님을 뵙지 않아도 금강경을 읽으면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도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 계시니 부처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지독송의 공덕도 말씀하셨습니다. 수지란 받아서 지닌다는 뜻이고 독송이란 읽고 외운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면 한량없는 공덕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공덕을 바라고 읽으면 그것은 완전한 공덕이 아닙니다. 복을 받으려고 읽으면 복에 집착하는 것이 됩니다. 금강경은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는데 공덕에 집착하면 가르침을 어기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공덕은 공덕을 구하지 않는 데서 옵니다. 그냥 읽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저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덕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이 공덕이 수행을 따라오게 됩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도 공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 외우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듣고 마음에 믿음이 생기면 그것만으로도 인연이 맺어진 것입니다. 오늘 밤 여러분은 금강경을 듣고 계십니다. 모든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셨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무엇인가 닿는 것이 있으셨다면 그것이 바로 인연입니다. 그 인연의 씨앗이 언젠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전을 받아지니는 사람은 과거에 이미 무량한 부처님을 모시고 공양한 사람이라고. 금강경을 만나는 것 자체가 과거의 성근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가르침을 듣고 계신 여러분은 이미 큰 인연을 지니고 계신 분들입니다. 아무나 금강경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이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인연이 있기에 오늘 이 자리에 계신 것이며 성근이 있기에 이 말씀을 듣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낮추지 마십시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아직 멀었다 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분들이며 깨달음의 씨앗을 품고 계신 분들입니다.

여러분, 금강경의 공덕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비유로서 설명하셨을 뿐 진정한 크기는 표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경전을 읽고 지니면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집착이 조금씩 줄어들고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집니다. 괴로움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평화가 조금씩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금강경의 공덕이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이제 오늘 밤의 여정이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금강경이 전하는 마지막 당부를 함께 새겨 보겠습니다. 그 당부는 바로 이것입니다. 붙잡지 마십시오. 오늘 밤 들으신 모든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붙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려놓으십시오. 손을 펴십시오. 그러면 잃어버릴 것이 없어지고 놓칠 것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오늘 밤 우리는 긴 여정을 함께했습니다. 기원정사에서 시작하여 수보리 존자의 질문을 들었고 부처님의 대답을 따라왔습니다. 네 가지 상을 버리라는 가르침을 만났으며 응무소주의 생기심의 깊은 뜻을 새겼습니다. 삼륜청정의 보시를 배웠고 범소유상개시어망의 지혜를 들었습니다. 사구계의 여섯 가지 비유를 마음에 담았으며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온 금강경의 전통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경전을 읽고 지니는 공덕이 얼마나 큰지도 들으셨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남이라는 분별을 내려놓으며 얻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를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밤 처음에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붙잡으려 하면 놓치고 얻으려 하면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으려다 멀어지고 행복을 쫓다가 행복이 달아났던 경험을 떠올려 보셨을 것입니다. 금강경은 그 이유를 알려 주었습니다. 붙잡으려는 바로 그 손이 떠나게 만드는 손이었습니다. 움켜지려는 바로 그 마음이 잃어버리게 만드는 마음이었습니다. 손을 펴면 세상이 손 안에 들어오고 마음을 비우면 온 우주가 마음에 담깁니다.

여러분, 오늘 밤 들으신 가르침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한 구절만 마음에 남으셔도 충분합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 한 구절만 기억하셔도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이 구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이 힘듦에 머물지 말자. 이것도 지나가리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이 구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이 기쁨에 머물지 말자. 온전히 누리되 집착하지 말자. 이렇게 생각하시면 기쁨이 더 깊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금강경은 어려운 경전이 아닙니다. 삶을 위한 경전이며 지금 여기를 위한 경전입니다. 절에 가야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출가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에서 오늘 여러분이 사시는 그 삶 속에서 금강경의 지혜를 펼칠 수 있습니다. 내일 아침 눈을 뜨시면 오늘 밤의 가르침을 조금만 떠올려 보십시오. 출근길에 일하는 중에 사람을 만날 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됩니다.

여러분, 오늘 밤 여러분은 2,500년 전 부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기원정사에서 울려 퍼진 그 가르침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여러분에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작은 인연이 아닙니다. 과거의 성근이 있기에 오늘 이 자리에 계신 것이며 깊은 인연이 있기에 이 가르침을 들으신 것입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이제 편안히 쉬어도 좋습니다. 오늘 들으신 가르침이 꿈속에서도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금강경의 지혜가 여러분의 삶에 스며들어 집착이 녹아내리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빕니다.

여러분,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지혜,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진리. 그것이 오늘 밤 여러분의 마음에 심어졌습니다. 이 씨앗이 자라나 여러분의 삶 전체를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이 법문의 공덕을 여러분만 가지지 마십시오. 돌아가신 부모님께, 보고 싶은 분들께,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께 함께 나누어 주십시오. 이 공덕이 모든 중생에게 전해져 함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영상이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와 구독으로 응원해 주십시오. 알림 설정을 해 두시면 새로운 법문이 올라올 때 놓치지 않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댓글로 오늘 가장 마음에 남은 구절을 남겨 주시면 함께 나누는 기쁨이 되겠습니다. 다음에 또 좋은 가르침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부디 평안한 밤 되십시오. 금강경의 가피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에게 함께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