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et Our Mobile App

Take your business learning on the go!

Download on the App StoreGet it on Google Play

당신의 삶이 향기가 되는 법 | 부처님 말씀

반야의말1:23:06

Transcription

당신은 지금 무엇을 미루고 계십니까? 언젠가 하겠다고 마음 먹은 일, 나중에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 꿈, 조금만 더 여유가 생기면 하려고 했던 수행이 있지 않으신가요?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시간이 무한한 것처럼, 내일도 오늘과 똑같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진리 하나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모든 행은 무상하니, 이것이 생멸의 법이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니, 그것이 고요해짐이 곧 즐거움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가르침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의 사라상수 아래 누으셨을 때,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위대한 스승을 잃는다는 두려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그들을 짓눌렀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고유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재행무상이니라. 모든 것은 변하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러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 말씀 속에는 슬픔이 아니라 깊은 자비와 지혜가 담겨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단순히 이별을 받아들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상함을 깨달아 지금 이 순간을 허투로 쓰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무상이라는 말을 듣고 허무함을 느낍니다. "어차피 다 사라질 건데, 무엇을 해도 소용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반대였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찰나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오늘이 당신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대로 하고 계시겠습니까? 미루고 있던 그 일을 여전히 내일로 미루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것에 온 마음을 쏟으시겠습니까?

부처님 제자 중에 아난존자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부처님을 25년 동안 시봉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난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도 아직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첫 번째 경전 결집이 있을 때였습니다. 500명의 아라한이 모였는데, 아난존자는 아직 아라한이 아니었기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아난존자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스승님 곁에서 그 오랜 세월을 함께 했는데, 정작 나는 아직도 깨닫지 못했구나.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온 것인가?"

그 순간 아난존자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나중에 언젠가"라는 말로 수행을 미루어 왔다는 것을 말이죠. 스승님이 계실 때는 스승님께 의지했고,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스승님은 가셨고, 시간은 이미 흘러가 버렸습니다.

아난존자는 그날 밤 온밤을 정진했습니다. 자리에 눕는 그 순간, 완전히 내려놓는 그 찰나에 아난존자는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했습니다. 무상함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무상함 속에서 지금을 온전히 살아낸 것이 그를 깨달음으로 이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난존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알고 있지만 나중으로 미룹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지금이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충분하다고, 기회는 또 올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은 숨쉬는 사이에 있느니라." 한번 들이시고 내시는 그 짧은 순간이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다음 숨을 쉴 수 있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은 두려움을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일깨우기 위한 자비로운 가르침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그 어느 시대보다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하루 종일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갑니다. 해야 할 일은 끝이 없고, 채워야 할 욕구는 계속 생겨납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1년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문득 돌아보면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나는 대체 무엇을 하며 산 것인가?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을 살고 있는가?" 하고 말이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상은 단순히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상은 변화의 법칙이며, 동시에 기회의 법칙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기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결정하지 않으며,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니 무상함을 깨닫는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사념처라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몸을 관찰하고,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고, 법을 관찰하는 수행입니다. 이 수행의 핵심은 바로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오직 이 순간을 또렷이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오직 현재만이 우리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 속에서 보내고 있습니까? 이미 지나가 버려서 바꿀 수 없는 일을 되씹으며 괴로워하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불안해합니다. 정작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지금은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온전히 하라. 걸을 때는 걷는 것을 알고, 앉을 때는 앉는 것을 알고, 먹을 때는 먹는 것을 알아라."

수행자는 당황하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누구나 걷고, 앉고, 먹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걸으면서도 걷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앉아 있음을 알지 못하며, 먹으면서도 먹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보고, 사람과 대화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며, 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퇴근 후를 그립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실제로는 살아 있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상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러한 습관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 순간이야말로 내 삶의 전부라는 것을 또렷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진이란 무엇입니까? 하루에 몇 시간씩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만이 정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깨어 있는 것이 바로 정진입니다. 설거지를 할 때 설거지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걸을 때 걷는 것을 온전히 느끼는 것,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온 마음으로 듣는 것이 모두 정진입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깨어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살아 있는 삶이 됩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깨어서 사는 하루가 100년을 잠들어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말눈다라는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삶은 짧고 죽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워야 할 가르침은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대가 죽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이다. 많은 것을 배우려 하지 말고, 단 하나를 온전히 행하라."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며, 모든 것을 다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를 온전히 하라고.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에 온 마음을 쏟으라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수행일 수 있으며,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이 순간 그것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리수 아래에서의 마지막 밤을 떠올려 봅시다. 그날 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유혹과 방해를 받으셨습니다. 마라가 찾아와 온갖 환영을 보여주며 깨달음을 방해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나타나 유혹했고, 무서운 군대가 나타나 위협했으며, 의심의 목소리가 속삭였습니다. "그만두어라. 너는 할 수 없다. 이것은 너무 어렵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 깨달음을 향한 결심에만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이 밝아올 때, 새별이 떠오르는 그 순간 부처님께서는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도 수많은 마라가 있습니다. 나태함이라는 마라, 미루는 습관이라는 마라, 두려움이라는 마라, 욕심이라는 마라가 끊임없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이건 나중에 해도 돼. 지금은 좀 쉬어도 괜찮아.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뭐." 이런 속삭임들이 우리를 지금 이 순간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상을 깨닫고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안다면, 이런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마라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내면의 마라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안다. 너는 나를 지금 이 순간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속지 않겠다."

티베트의 위대한 수행자 밀라레파 존자는 평생을 동굴에서 수행하며 사셨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나 고행의 연속이어서 몸은 말라 뼈만 남았고, 피부는 녹색으로 변했습니다. 어느 날 사냥꾼들이 동굴에 들어왔다가 밀라레파 존자를 보고 놀라 물었습니다. "당신은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혹독한 수행을 하십니까?"

밀라레파 존자는 고요히 대답하셨습니다.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기에, 나는 이 순간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상함을 깨달은 자의 삶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알기에 더욱 깨어서 사는 것입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기에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모든 성인들도, 역사 속에 위대한 인물들도 모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죽음은 항상 남의 일이고,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그것이 너를 깨어 있게 할 것이다." 이것을 죽음에 대한 명상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더욱 깊이 사는 방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사소한 일에 화를 내며 시간을 낭비하겠습니까? 의미 없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겠습니까? 아니면 정말 소중한 것, 정말 중요한 것에 온 마음을 쏟겠습니까?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은 오직 죽음을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만 두려운 것이다. 매순간을 깨어서 산다면, 죽음이 찾아올 때 그대는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특별한 의식을 준비하거나, 많은 재산을 모으거나, 거창한 업적을 남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후회 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고, 매순간 깨어 있으며, 매순간 자비와 지혜로 행동한다면, 죽음이 언제 오든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이 무한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과, 시간이 유한함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오늘을 미루고 내일을 기약하며 언젠가를 꿈꿉니다. 후자는 오늘을 살고 지금을 실천하며 이 순간에 온전합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재행무상이니라.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 말씀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는 진리.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깨어서 정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고,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생에는 죽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법이고, 이것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시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남긴 가르침이 너희의 스승이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육신으로는 떠나셨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무상의 진리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남은 생을 깨어서 살라고,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이 가르침을 들으신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남은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정말로 이루고 싶은 것, 정말로 되고 싶은 사람, 정말로 살고 싶은 삶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언젠가로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하십시오. 한 걸음이라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십시오.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우리도 걸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도달하셨던 그 깨달음을 우리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상함을 깨닫고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알며, 더 이상 미루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남은 생은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어제는 이미 지났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당신의 것입니다. 이 순간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당신의 하루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십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스마트폰을 확인하실 것입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뉴스를 보고, SNS를 훑은 여기저기로 흩어집니다. 일을 하면서도 메시지 알림이 울리고, 식사를 하면서도 영상을 보며, 사람과 대화하면서도 다른 생각에 빠져듭니다. 우리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배웠습니다. 멀티태스킹이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하루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묻게 됩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했는가? 왜 이렇게 피곤한가? 왜 아무것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은가?" 하고 말이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짧은 말씀 속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다 보니, 정작 한 가지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기 전 보리수 아래에 앉으셨을 때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깊이 들여다 봅시다. 그날 밤 부처님께서는 결심하셨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 결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그 순간 다른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습니다. 배고픔도, 피곤함도, 두려움도, 의심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한 가지, 깨달음에만 마음을 모으셨습니다.

그날 밤 마라가 찾아왔습니다. 마라는 부처님을 깨달음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먼저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내 유혹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 편안함, 쾌락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마라는 무시무시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위협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부처님을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미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가장 교묘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의심을 불어넣은 것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무슨 자격으로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가? 너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가 너를 증명해 줄 것인가?"

이 순간 부처님께서는 오른손을 들어 땅을 가리키셨습니다. "돼지가 나의 증인이다." 그 순간 돼지의 여신이 나타나 부처님의 수행을 증명했고, 마라는 사라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 마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힘이나 신통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에 완전히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유혹이 와도, 위협이 와도, 의심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깨달음이라는 한 가지만을 향해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마라가 찾아옵니다. "이것도 해야 해. 저것도 해야 해. 이 영상도 봐야 해. 저 소식도 확인해야 해." 이런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여기저기로 끌고 다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소리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맙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주리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기억력이 매우 나빠서 다른 수행자들은 쉽게 외우는 계송 하나도 몇 달이 지나도록 외우지 못했습니다. 형인 마하반은 동생을 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너는 수행자가 될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라."

주리반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자격도 없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주리반에게 빗자루 하나를 건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마당을 쓸면서 단 두 글자만 기억하라. '먼지를 털고 때를 제거한다.' 이 두 가지만 계속 반복하라."

주리반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날마다 마당을 쓸면서 "먼지를 털고 때를 제거한다"를 반복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마당의 먼지를 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반복하면서 깊은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먼지와 때는 단지 마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도 먼지와 때가 있었습니다. 탐욕이라는 먼지, 분노라는 때, 어리석음이라는 더러움이 마음을 덮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리반은 마당을 쓸듯이 자신의 마음을 닦아 나갔습니다. 한 가지에만 집중하며 그 한 가지를 완전히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리반은 아라한을 증득했습니다. 다른 수행자들보다 늦었지만, 그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주리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없다는 것, 단 한 가지라도 완전히 이해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현대 신경과학은 이것을 증명합니다. 우리의 뇌는 실제로 멀티태스킹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고 생각할 때, 실제로는 매우 빠르게 주의를 이리저리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의를 옮길 때마다 에너지가 소모되고, 효율은 떨어지며, 실수는 늘어납니다. 반대로 한 가지에 완전히 집중할 때 우리의 뇌는 최고의 효율을 발휘합니다. 창의력이 높아지고, 문제 해결 능력이 향상되며, 깊은 통찰이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가르치신 것을 현대 과학이 이제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불교 전통에서는 이것을 화두 수행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화두를 붙들고 놓지 않는 수행입니다. "먹고, 어떤 것이 부처인가? 무엇이 참나인가?" 이런 질문 하나를 붙들고 밥을 먹을 때도, 걸을 때도, 일할 때도, 쉴 때도 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한 곳에 모으고 또 모으다 보면, 어느 순간 번쩍하는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조주 스님은 "뜰 앞에 잔나무"라는 화두로 유명합니다. 한 수행자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뜰 앞에 잔나무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겉으로 보면 전혀 관계없는 대답 같습니다. 하지만 이 화두를 깊이 참고하다 보면 깨달음이 열립니다. 부처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뜰 앞에 잔나무처럼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화두를 이해하려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마음을, 온 존재를 이 화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먹을 때도 잔나무, 잘 때도 잔나무, 일할 때도 잔나무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몰입할 때 마음은 하나가 되고, 그 하나 속에서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이것을 삼매라고 합니다.

삼매란 마음이 대상과 하나가 되는 상태입니다. 관찰하는 자와 관찰되는 대상이 따로 없고, 수행하는 자와 수행 자체가 따로 없는 상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종류의 삼매를 말씀하셨습니다. 호흡에 집중하는 안반수위 삼매, 자비심을 기르는 자비삼매, 무상을 관하는 무상삼매 등 다양한 삼매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삼매의 핵심은 같습니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 완전히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대부분의 문제는 마음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불안은 마음이 미래로 흩어질 때 생기고, 후회는 마음이 과거로 흩어질 때 생기며, 불만은 마음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볼 때 생깁니다. 반대로 마음이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집중되어 있을 때, 이런 번뇌들은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 파당파 상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를 알면 모든 것이 풀리고, 하나가 풀리면 모든 것이 풀린다." 이것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같습니다. 100가지 문제를 대충 풀려고 하면 하나도 제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고 나면, 나머지 문제들도 쉽게 풀립니다. 왜냐하면 그 한 문제 속에 모든 원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를 완전히 해낸다면, 그 경험이 다른 모든 것으로 확장됩니다.

어느 선사께서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무엇을 얻으려고 여기 왔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깨달음을 얻고, 지혜를 얻고, 자비를 얻고, 신통력을 얻고 싶습니다." 선사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욕심이 많구나.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으려면 100번을 태어나도 부족할 것이다. 그냥 앉아만 있어 보거라."

제자는 의아해 하면서도 스승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저 앉아서 호흡에 집중했습니다. 처음에는 온갖 잡념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뭐가 달라지나? 나는 뭔가를 배워야 하는데, 뭔가를 얻어야 하는데." 하지만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제자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찾던 모든 것이 이미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깨달음도, 지혜도, 자비도 어디 먼 곳에서 얻어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온전히 머무를 때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집중의 힘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에 완전히 집중할 때, 그 한 가지 속에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차를 마시는 것에 완전히 집중하면, 차 한 잔 속에서 우주를 볼 수 있습니다. 걷는 것에 완전히 집중하면, 한 걸음 속에 모든 법이 들어 있습니다. 호흡에 완전히 집중하면, 들숨과 날숨 속에 생과 사가 있습니다.

선사들은 이것을 "평상심이 도"라고 표현했습니다. 특별한 것을 찾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온전히 하라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는 밥 먹고, 잘 때는 자며, 일할 때는 일하는 것이 바로 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자면서도 꿈속에서 헤매며, 일하면서도 마음은 딴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일이 평범하지 않게 됩니다. 간단한 일도 복잡해지고, 쉬운 일도 어려워집니다.

일본의 선승 학쿠인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좌선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수행이다. 밥을 먹을 때는 그저 밥을 먹어라. 걸을 때는 그저 걸어라. 그렇게 매순간 완전히 그 일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좌선이다." 이것을 동중선(動中禪), 움직이는 가운데의 선이라고 합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때만 선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행위가 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입니다. 앉아 있어도 마음이 산란하면 그것은 선이 아니고, 걷고 있어도 마음이 고요하면 그것이 바로 선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몰입 상태 또는 플로우라고 부릅니다. 무언가에 완전히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자아를 잊고, 오직 그 행위 자체가 되는 상태입니다. 운동 선수들은 "존(zone)"에 들어간다고 표현합니다. 예술가들은 "영감이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수행자들은 "삼매에 든다"고 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완전한 집중, 완전한 몰입, 완전한 하나됨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집중 상태에 들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 외적인 산란함을 줄여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끄고, 소음을 줄이고,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정리하는 것이 마음을 정리하는 첫걸음입니다.

다음으로 하나의 대상을 선택합니다. 호흡이 될 수도 있고, 화두가 될 수도 있으며, 지금 하고 있는 일 자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음은 원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원숭이에 비유하셨습니다. 나무에서 나무로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원숭이처럼, 우리의 마음도 생각에서 생각으로 끊임없이 옮겨다닙니다. 이것을 원숭이 마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화낼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 흩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깨어 있는 것입니다. 부드럽게 다시 선택한 대상으로 마음을 돌려 놓으면 됩니다. 이것을 반복합니다. 흩어지면 돌아오고, 또 흩어지면 다시 돌아옵니다. 천 번 흩어지면 천 번 돌아오고, 만 번 흩어지면 만 번 돌아옵니다. 이 과정 자체가 바로 수행입니다.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명상을 하려고 하는데, 자꾸 잡념이 일어납니다. 제가 수행에 소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스승이 대답하셨습니다. "잡념이 일어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잡념을 따라가는 것이 문제다.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오는 그 순간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상태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는 깨달은 부처님께나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잡념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오는 연습입니다. 이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점점 마음이 안정되어 갑니다. 흩어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지며,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완전한 고요함이 찾아옵니다. 마음이 대상과 하나가 되고, 시간이 멈추며, 깊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것이 삼매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삼매가 목적은 아닙니다. 삼매는 수단입니다. 삼매를 통해 우리는 마음의 본성을 봅니다. 번뇌가 사라진 마음, 욕망이 고요해진 마음, 본래 청정한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삶을 변화시킵니다. 한번 깊은 집중을 경험한 사람은 산란함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한번 고요함을 맛본 사람은 소음이 얼마나 시끄러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한번 하나됨을 느낀 사람은 분리가 얼마나 허상인지 알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삶의 방식이 바뀝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줄이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의미 없는 자극을 멀리하고, 깊이 있는 경험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집중의 기쁨을 알기에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49일 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삼매에 머무셨습니다. 완전한 집중, 완전한 평화, 완전한 자유의 상태였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깊었는지,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이 가르침을 전하기를 주저하셨습니다. "이 법은 너무나 깊고 미묘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범천왕이 나타나 간청했습니다. "세상에는 눈에 먼지가 조금만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해 주십시오." 그제야 부처님께서는 녹야원으로 가셔서 첫 번째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45년 동안 쉬지 않고 법을 설하시며 중생들을 제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깨달음은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나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집중을 통해 얻은 평화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깊이 집중하면, 그 주변 사람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한 사람이 고요해지면, 그 고요함이 파문처럼 퍼져나갑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당신이 누군가와 대화할 때 온전히 그 사람에게 집중한다면, 상대방은 그것을 느낍니다. 당신이 일을 할 때 완전히 몰입한다면, 그 결과물에 깊이가 생깁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진정으로 함께한다면, 그 순간은 영원히 기억됩니다. 반대로 당신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시간만 흘러가고, 기회는 사라지며, 관계는 멀어집니다.

그러니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계속 마음을 여기저기 흩어놓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한 가지에 온전히 집중하며 살 것인가? 여러 가지를 대충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한 가지를 완전히 하며 살 것인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이든, 그것에 온전히 집중한다면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 앞에 놓인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설거지일 수도 있고, 걷는 것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다만 그것을 온전히 하십시오.

설거지를 한다면, 그냥 설거지만 하십시오. 물의 온도를 느끼고, 그릇의 감촉을 느끼며, 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보십시오. 스마트폰을 보지 말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며, 오직 설거지 그 자체가 되십시오. 그렇게 할 때 평범한 설거지가 명상이 됩니다.

걷는다면, 그냥 걸으십시오. 발이 땅에 닿는 감각을 느끼고,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주변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걷는 그 순간 자체를 즐기십시오. 그렇게 할 때 한 걸음 한 걸음이 깨달음의 걸음이 됩니다.

대화를 나눈다면, 진정으로 들으십시오.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판단하지 말며, 오직 듣는 것 자체에 집중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고, 깊은 이해가 생기며, 참된 관계가 맺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한 가지에 집중하는 삶입니다.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을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완전히 하는 것입니다. 어디론가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무는 것입니다.

선사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는 멀리 있지 않다. 다만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그곳이 바로 도다." 우리가 도를 찾아 헤매는 이유는 도가 멀리 있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를 놓치고 다른 곳을 찾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다른 일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을 완성하는 것이지,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낫다." 우리는 종종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에 매력을 느낍니다. 새로운 프로젝트, 새로운 취미, 새로운 관계, 새로운 도전이 설렙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를 끝까지 완성하는 경험은 드뭅니다. 시작은 쉽지만, 완성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계속 집중하는 것이 어렵고, 지루함이 찾아오며, 어려움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간에 포기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나섭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면 평생 완성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한 가지를 끝까지 해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평생의 자산이 됩니다. 집중하는 방법을 배우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얻으며, 완성의 기쁨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다른 모든 일로 확장됩니다. 한 가지를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무엇에든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이(transfer)의 효과입니다. 한 영역에서 배운 것이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빈비사라 왕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왕으로서 그는 수많은 일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돌보며, 외교를 하고, 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빈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왕으로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일을 잘 해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대왕이여, 많은 일을 동시에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한 번에 한 가지씩 하십시오. 신하를 만날 때는 오직 그 신하의 말에만 집중하고, 백성을 돌볼 때는 오직 그 백성에게만 마음을 쓰십시오. 그렇게 할 때, 비록 하루에 100가지 일을 하더라도 각각의 일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빈비사라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예전에는 한 신하와 대화하면서도 다음 일을 걱정했습니다. 한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다른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바쁘고 피곤했지만, 정작 일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습니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일은 더 빨리 끝났고, 결과는 더 좋았으며, 왕은 덜 피곤했습니다.

이것이 집중의 역설입니다. 많은 것을 동시에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지만, 한 가지씩 온전히 하면 모든 것이 잘됩니다. 서두르면 오히려 늦어지지만, 천천히 확실하게 하면 더 빨리 도착합니다. 이것을 선사들은 "급하면 천천히 가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가려고 하면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가면, 결국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우리 시대는 속도의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빨라야 하고, 즉각적이어야 하며, 효율적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오늘 해야 할 일들, 걱정거리들, 피곤함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오늘 하루 당신은 누구를 위해 사시겠습니까?

이 질문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한 가지를 놓치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하나, 덕을 지닌 이의 향기는 사방에 퍼지느니라."

이 말씀을 처음 들으면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뜰에 핀 꽃 한송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꽃은 왜 피어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입니까? 칭찬받기 위해서입니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꽃은 그저 핍니다. 피는 것이 꽃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어 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향기를 냅니다. 향기를 내려고 애쓰지도 않고, 누가 맞든 맞지 않든 상관하지도 않습니다. 바람이 불면 멀리까지 퍼지고, 바람이 없으면 그저 그 자리에 머물 뿐입니다. 꽃에게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향기가 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49일 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삼매의 기쁨을 누리시던 부처님께 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이 법은 너무나 깊고 미묘하다. 욕망과 분노에 젖은 중생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법을 설하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깨달음의 평화 속에 머물며 홀로 그 기쁨을 누리려고 하셨습니다.

그때 범천왕이 나타나 간청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상에는 눈에 먼지가 조금만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듣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디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자비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셨습니다. 연못에 연꽃들을 보듯 중생들을 보셨습니다. 어떤 연꽃은 물속 깊이 있고, 어떤 연꽃은 물 표면 가까이에 있으며, 어떤 연꽃은 이미 물밖으로 나와 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셨습니다. 모든 중생에게 깨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다만 그때가 다를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홀로 누리는 것을 그만두고,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 순간이 바로 대승불교의 시작입니다. 자신만의 해탈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존재를 위해 일어서는 것. 이것이 보살의 길입니다.

보살이란 무엇입니까? 보살은 깨달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모든 중생이 함께 깨달을 때까지 이 세상에 남기로 서원한 존재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소리를 듣고 고통에서 구해 주시고,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까지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하셨습니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보현보살은 실천을 상징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중생을 제도하십니다.

하지만 보살은 저 높은 곳에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는 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설하신 곳은 녹야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다섯 명의 수행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예전에 부처님과 함께 고행했던 동료들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고행을 그만두고 우유죽을 드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실망하여 떠났었습니다. 고타마는 수행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부처님께서 다시 찾아오시자, 그들은 서로 약속했습니다. "그를 맞이하지 말자. 일어서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자."

하지만 부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부처님을 맞이했습니다. 부처님의 온 존재에서 뭔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자리에는 깊은 평화와 자비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성제를 설하셨습니다. 고통의 진리,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중 교진녀가 가장 먼저 깨달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교진녀가 알았구나. 교진녀가 알았구나." 이렇게 세상의 첫 번째 불자가 탄생했고, 이어서 나머지 네 명도 차례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제 세상에는 부처님을 포함해 여섯 명의 깨달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너희들도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가서 많은 이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세상을 불쌍히 여겨 법을 전하라. 같은 길로 두 사람이 가지 말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법을 설하라."

이것이 불교 역사상 첫 번째 전도 명령이었습니다. 깨달았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 그 깨달음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깨달음은 혼자 간직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누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행복은 혼자 누리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누리라고 있는 것입니다. 향기는 한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수행은 나만을 위한 것이고, 깨달음은 나만의 것이며, 평안은 나만 느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나와 남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남도 행복해야 하고, 내가 평화로우려면 세상도 평화로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보살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보살의 실천을 육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 가지입니다. 먼저 보시를 생각해 봅시다. 보시란 단순히 돈이나 물건을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재물을 베푸는 재시가 있고, 가르침을 전하는 법시가 있으며,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보시는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의 존재 자체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힘들 때 옆에 앉아 함께 있어 주는 것,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 지나가는 길에 미소 하나를 건네는 것이 모두 보시입니다.

어느 마을에 가난한 노파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작은 등잔 기름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기름으로 등을 켜서 부처님께 올렸습니다. 그날 밤 큰 바람이 불어 모든 등불이 꺼졌지만, 노파가 올린 등불만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목련존자가 그 불을 끄려고 했지만 꺼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등불을 끄지 마라. 그것은 진심에서 울어나온 것이기에 큰 바람도 끌 수 없고, 큰 물도 끌 수 없다." 이것이 진정한 보시입니다. 얼마를 주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노파는 자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그 진심이 작은 등불을 꺼지지 않는 빛으로 만든 것입니다.

다음은 지계입니다. 지계란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오계입니다. 하지만 계율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말로도, 행동으로도, 생각으로도 다른 이를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의미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다음은 인욕입니다. 인욕이란 참는 것이지만,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이해에서

나오는 수용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화를 내더라도 그 사람이 고통받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두려움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내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비심을 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전법하실 때 어느 마을에 가시니 바라문 한 사람이 욕을 퍼부었습니다. 온갖 험한 말로 부처님을 비난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요히 그 말을 다 들으신 후 물으셨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당신이 받지 않는다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바라문이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준 사람의 것이 되겠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나에게 욕을 주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욕은 당신의 것입니다. 바라문은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화를 내지 않으셨고 욕을 욕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욕입니다.

다음은 정진입니다. 정진이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꾸준히 변함없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정지는 자신을 혹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검은고 줄처럼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듯이 중도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다음은 선정입니다. 선정이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입니다. 삼매 집중의 수행이 바로 선정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맑으며 또렷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지혜입니다. 지혜란 사물을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무상 곧 무아의 진리를 깨닫고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따로 있지 않고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며 존재함을 보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를 실천하는 삶이 보살의 삶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꽃이 억지로 향기를 내지 않듯이 보살도 억지로 착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자신의 본성에 따라 존재 자체로 향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생각해 봅시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는 분입니다. 누군가가 고통 속에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즉시 나타나 구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왜 이렇게 하실까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공덕을 쌓기 위해서입니까? 칭찬받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저 그것이 관세음보살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존재를 보면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일어나고 그 자비심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오는 아이를 보면 저절로 품에 앉듯이 관세음보살은 고통받는 중생을 보면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비입니다.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성에서 울어나오는 자비입니다.

우리도 이런 자비심을 가질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합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존재 안에 이미 부처의 씨앗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번뇌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마치 먹구름에 가려진 해처럼 우리의 본성은 이미 밝게 빛나고 있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본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하지만 수행이란 무언가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있는 것을 가린 구름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조주 스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주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아침밥은 먹었는가? 네. 먹었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릇을 씻어라. 그 순간 수행자는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은 어디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 그릇을 씻는 이 평범한 순간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 보살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자비와 지혜로 하는 것이 바로 보살의 길입니다. 설거지를 할 때 그것을 가족을 위한 사랑의 표현으로 한다면 그것이 보살행입니다. 출근길 버스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힘들어하는 동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길에서 쓰레기를 주어 쓰레기통에 넣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거창한 것이 필요 없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자비와 지혜로 한다면 그것이 모두 보살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행위들이 모여서 당신의 삶 전체가 향기가 됩니다.

티베트의 위대한 수행자 티베트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의 행복을 원한다면 자비를 실천하라.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면 자비를 실천하라. 이것은 역설처럼 들리지만 깊은 진리입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다른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 안에 있던 나와 남의 벽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분리감이 사라지고 연결감이 생기며 외로움이 사라지고 충만함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현대 과학도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를 할 때 우리 뇌에서는 도파민과 옥시토신 같은 행복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것을 헬퍼스 하이라고 부릅니다. 남을 도울 때 오히려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현상입니다.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가르치신 것을 현대 과학이 이제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자비를 실천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비가 아닙니다. 행복해지려고 공덕을 쌓으려고 인정받으려고 착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집착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무소득입니다.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저 자연스럽게 울어나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시해야 한다. 모양에 머물지 않고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보시를 하되 내가 보시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준다. 저 사람이 받는다. 이것을 주었다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저 주는 것 그 자체로 완결되는 것입니다. 마치 꽃이 향기를 낼 때 내가 향기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우리도 자비를 실천할 때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윤청정이라고 합니다. 주는 자, 받는 자, 주는 것이 세 가지가 모두 공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진정한 보살의 행이 이루어집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전생의 보살로 수행하실 때 배고픈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새끼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자신의 새끼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보살은 이것을 보고 깊은 자비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호랑이에게 던졌습니다. 이것을 사신보호라고 합니다. 몸을 버려서 호랑이를 구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이시니까 가능한 것이지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당장 몸을 던지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호랑이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마음입니다. 다른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도 키울 수 있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자신의 시간을 조금 내어 주는 것, 자신의 편안함을 조금 포기하는 것, 자신의 욕심을 조금 줄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고 싶지만 더 피곤해 보이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고 싶지만 가족과 나누는 것입니다. 의견을 주장하고 싶지만 상대방의 말을 먼저 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서 점점 우리의 마음이 넓어집니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서, 그다음에는 친구를 위해서, 그다음에는 이웃을 위해서, 그다음에는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그다음에는 동물을 위해서, 마침내는 모든 존재를 위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사무량심이라고 합니다. 자, 비, 희, 사 네 가지 한없는 마음입니다. 자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비는 연민, 모든 존재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희는 기쁨, 다른 이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사는 평등,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입니다.

이 네 가지 마음을 개발하는 명상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에게서 시작합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평화롭기를, 내가 건강하기를. 이것은 이기심이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사랑하는 사람으로 확장합니다. 이 사람이 행복하기를, 이 사람이 평화롭기를, 이 사람이 건강하기를. 그다음 중립적인 사람, 즉 특별한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확장합니다.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가게 점원, 버스 기사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도 행복하기를, 이 사람도 평화롭기를, 이 사람도 건강하기를. 그다음이 가장 어렵습니다. 당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행복하기를, 이 사람도 평화롭기를, 이 사람도 건강하기를.

처음에는 이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통받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의 행복을 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사람도 고통받고 있기에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치지 않습니다. 평화로운 사람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해진다면 더 이상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원수조차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존재로 확장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곤충, 모든 생명, 나아가 우주의 모든 존재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모든 존재가 평화롭기를,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렇게 명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와 남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순간 자비는 더 이상 노력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꽃이 향기를 내듯 당신의 존재 자체에서 자비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경지입니다.

지장보살의 서원을 떠올려 봅시다. 지옥이 비지 않으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 중생을 다 제도한 후에야 보리를 이루리라.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서원입니까? 자신의 깨달음, 자신의 해탈, 자신의 행복을 뒤로 미루고 모든 중생이 먼저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살이시니까 가능한 것이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불가능해.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는 자신이 배고파도 아이에게 먼저 먹입니다. 자신이 추워도 아이에게 먼저 옷을 입힙니다. 자신이 아파도 아이가 건강하면 행복해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특별한 수행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이를 사랑하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보살의 행을 하게 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사랑을 키울 수 있을까요? 먼저 나 자신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얼마나 자주 실수하는지,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겸손해질 때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군가가 실수했을 때 나도 그럴 수 있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화를 낼 때 저 사람도 고통받고 있구나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비의 시작입니다.

다음으로 연기법을 깊이 관찰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누군가가 만들어 준 것입니다. 내가 지금 먹는 밥은 농부가 지어 준 것입니다. 내가 지금 걷는 이 길은 누군가가 닦아 준 것입니다. 내가 지금 숨쉬는 이 공기는 나무들이 만들어 준 것입니다. 나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존재들의 도움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느낄 때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나도 다른 이들을 돕고 싶어집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밝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

[음악]

[음악]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