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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개천에서 나오는 용'이 멸종한 이유

지식공장장의 지식공장9:20

Transcription

자, 그래서 이번에는 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한국 사람들이 이상하게 궁금해하지 않는 어떤 대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장: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이유

「향기로운 꽃은 늠름하게 핀다」 이하 '향꽃'이라 부르겠습니다. 만화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애니메이션은 처음에는 기대를 하지 않았죠. 하지만 나중에 제작진이 발표된 후 생각을 바꿨습니다. 「4월은 너의 거짓말」, 「아케비의 세일러 복」에서 검증된 ‘쿠로키 미유키’ 감독이 맡았다니 넷플릭스에서 찾아볼 수 밖에 없겠죠. 결론부터 말하면 원작의 감성을 잘 해석한 원작을 초월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작품의 내용은 심플합니다. 작 중에는 바로 이웃인 두 학교가 있죠. 성적이 낮은 학생만 가는 남학교인 치도리 고등학교와 아가씨들이 다닌다는 중고등학교 통합인 에스컬레이터식 학교 유서 깊은 여학교인 사립 키쿄 학원 여자 고등학교. 이 둘은 서로를 경원시하는 사이인데요. 치도리에 다니는 고등학교 2학년, 츠무기 린타로는, 부모의 케이크 가게 일을 돕는 도중 손님으로 와 있던 소녀 케이크를 여러개 먹고도 살이 안찌는 신기한 소녀, 와구리 카오루코를 만납니다. 이후 둘은 급속하게 가까워지지만 그들의 사이에는 의외로 장벽이 많군요. ‘졸업하면 평생 엮일 일이 없는 인종들이니까.’ 왜 린타로는 이런 말을 했을까요?

한국에서 이 작품에 대해 리뷰를 한 것 중에 인상 깊은 멘트가 있었습니다. 착한 애들밖에 안 나오는 것이 이상하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죠. 카오루코같이 누구나 편견없이 웃는 얼굴로 대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한 번 보기도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의 진짜 메시지를 이해하고 나면 왜 이 작품에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이랄까 이상에 가까운 아이들이 작품에 등장하는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2장: 일본 만화에 나오는 계급

일본의 만화를 보다 보면 이 학교에는 문제아만 들어온다던가 이 학교에 들어왔으니 인생이 끝났다는 식의 말이 자주 나옵니다. 즉 학교 간의 서열에 민감하다는 뜻인데 사실 이건 한국인들 처지에선 절반 정도만 이해가 가능한 일입니다. 대한민국은 좋은 대학을 나와야 인생의 허들이 낮아지는 나라고 명히 특목고가 명문대 진학에 유리하니 학교 간의 서열은 존재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고교 평준화가 되기도 했고 일반학교에서 명문대에 가는 사람도 있으니 인생 망했다는 투의 저런 대사는 한국 사람들에겐 도통 이해가 안되겠죠.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겐 저게 당연합니다. 일본에선 학교 간 계급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 계급이 평생을 좌우하는 국가니까요. 일본 학원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학교 간 계급 차이'는 단순한 허구적 설정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학력 사회 구조와 치열한 입시 경쟁을 반영한 일본의 현실적 문제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죠.

우리나라는 자사고, 특목고를 제외하면 학교가 평준화되어 있지만 일본의 학교는 '편차치(偏差値)'로 분류되어 있어요. 편차치는 특정 시험에서 개인의 성적이 전체 응시자 중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준화된 점수로, 평균을 50으로 설정하여 상대적 위치를 파악합니다. 그리고 이 편차치는 개별 학생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명확하게 서열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죠. 즉 치도리 고등학교는 편차치가 낮은 학교 사립 키쿄 학원은 편차치가 높은 학교라는 겁니다. 즉 서열사회, 레일사회라는 일본에서 이 두 학교의 차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계급으로 인식되어 있고 사회가 이 계급을 계속 들먹이는 만큼 학생들의 사회적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 계급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요.

3장: 일본에 계급이 존재하는 이유

일본 사회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학력을 통한 인재 등용이 정착되면서 기존 계급 시스템이 유지되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구조는 100년 넘게 유지되고 있으며 전후 고도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일본사회는 '좋은 고등학교 → 좋은 대학 → 좋은 대기업'으로 이어지는 성공 공식이 사회 전반에 깊게 각인되었죠. 일본은 1967년 '학교군 제도'의 형태로 고교 평준화를 시행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이니 사실상 평준화는 의미가 없었고 오히려 사교육 시장이 방대하게 커지자 일본 정부는 2003년부터 학교군 제도를 폐지하면서 사실상 학교간 계급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계급은 일본인의 평생을 좌우하지요.

1990년대 초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일본은 '잃어버린 10년',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을 겪게 되죠. 기업들은 신규 채용을 대폭 줄이거나 비정규직 위주로 고용형태를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기업 시스템은 연공제 중심이라 우수한 신입을 학벌 위주로 골라 가르쳐서 키우는데서 벗어나지 않았고 키우기 위해선 아무래도 갓 졸업한 학생들이 유리했던지라 일본에선 졸업 후 당장 일자리를 잡지 못하면 평생 일을 못잡는 경우가 많았죠. 문제는 경제불황으로 인해 채용은 줄였는데 졸업한 사람은 넘쳐나는 상황이라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은 프리터나 히키코모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을 잃어버린 세대, 로스트 제네레이션이라고 하지요. 그만큼 일본에서는 인생의 레일에서 밀려나면 죽는다는 인식이 강해졌고 그게 학교, 학원에도 영향을 끼친거죠.

4장: 일본 사회의 안정이라는 틀

일본은 개인보다 집단, 조화, 질서를 중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 내에서 서열과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 '안정적'이라고 느끼는 경향이 강합니다. 즉 사람마다 고유한 '위치'가 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죠. 이러한 문화적 배경 하에서 계급을 넘나드는 행동, 예를 들어 다른 학교나 다른 출신 배경의 사람들과 엮이는 것을 불편하게 만드는 문화가 생긴 겁니다. 이는 이미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하는 공고한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일부 명문 사립학교는 부유층 자녀들이 입학하여 대학까지 시험 없이 진학하는 '에스컬레이터' 제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교육 기회가 경제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일본에선 '쇼갓코', '소학교'라고 하는데 아이들부터 입학시험은 물론 부모까지 면접봐서 뽑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나오죠? 명문 소학교에 아이가 입학할 때 부모 면접 보고 부모가 전문직이나 대기업이 아니면 아이가 떨어지는 양상. 과거 평민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사무라이가 되고 싶어했 듯 현재 일본에선 이런 계급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험전쟁이 상당히 치열합니다.

학생들은 정규 학교 수업 외에 '주쿠(塾)'라고 불리는 입시 학원에 다니며 밤늦게까지 공부하거나 혹은 레일에서 밀려난 사람은 졸업 후 취업을 목표로 하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학교의 서열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실제로 만화 연재판에서 린타로들이 풀고 있는 문제집을 스바루는 중학교때 풀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제력에 의한 교육 격차가 확실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즉 사회 계층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본 사회니 자신이 속한 학교의 '등급'에 따라 자부심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갖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사회에서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린타로는 '졸업하면 평생 엮일 일이 없는 인종들이니까.' 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겁니다.

5장: 일본의 고유한 문화가 된 계급

결국 일본에서 계급은 사라진 적이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권법소년」 등 80년대 만화는 물론 여러분이 보시는 향꽃에서도 학교 간의 서열이 존재하는 것이며 작중 캐릭터들도 서열을 내면화하고, 이에 맞춰 행동하는 겁니다. 향꽃의 온라인 연재판 24화의 표지에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같이 걸을 수 있기를' 이라는 카피가 적혀있는데 이는 서로의 편견을 깨고 어울리면서도 그 서열화란 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심지어 교사가 이를 조장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본 학원물에서 이런 교육격차는 단골소재입니다. 「꽃보다 남자」에서 주인공 츠쿠시가 평범한 가정 출신이라 초엘리트 사립고등학교에서 차별당한다던가, 「오란고교 호스트부」에서 장학생 하루히가 부잣집 학교에서 겪는 어려움 등이 대표적인 예이죠. 카오루코는 밝은 아이라 말은 안 하지만 아무래도 서민 가정에서 장학생으로 올라온 아이니만큼 아마 어떤 형태로든 차별적인 시선이 있을 것이 뻔하고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카오루코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린타로라는 사람의 출신이 아니라 내면을 볼 수 있었던 것이죠.

이 작품이 특이한 이유는 기존 작품들처럼 구조를 타파하고 도전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사람은 출신이 아니라 인격과 행동으로 평가 받아야 한다'는 인간 중심의 평등한 사회에 대한 본질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작가가 가진 철학의 깊이를 보여주죠. 기존 사회를 부수는 혁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회 내에서 이것이 편견이라고 깨달아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최소한 알고 나면 좋은 사람을 차별이라는 장벽 너머에서 편견을 갖고 보지 말라는 것을 작품 전체에 걸쳐 말하고 있지요.

6장: 일본 사회의 틀, 깰 수 있는가

일본 학원물에서 나타나는 학교 간 계급 차이에 대한 의식은 단순한 미디어의 과장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문화적 배경을 반영한 현실적 문제입니다. 편차치라는 명확한 서열화 도구, 학력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강력한 사회적 믿음,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극한의 입시 경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계급'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고 있죠.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어느 학교 출신이냐를 넘어서, 한 개인의 잠재력과 미래까지 그 학교의 '등급'으로 재단해버리는 그렇기에 사회 유지는 가능할지 몰라도 기존의 틀을 깨는 도약이 어려운 일본 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기에 이 작품이 제시하는 '남이 만든 편견에 갇혀 사람을 보지 말자'는 메시지는 한국인에게도 와닿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며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네요. 다음 영상도 기대해주시길 바라며 지식으로 세상을 보는 이 채널의 영상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