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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에 드는 게 뭔가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16:59

Transcription

네. 어, 여러 큰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간절하고 사무치게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산매에 들어야 성불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요. 어, 산매에 드는 건 어떤 건지요? 그리고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은 어떻게 생기는지 보통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지 하고 하니까 어 좀 의도가 들어가서 그런지 명상도 좀 잘 안 되고요. 그러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 간절할 땐 바깥 경계가 닥쳐오면 간절해지더라고요. 근데 이거는 근기가 낮아서 그런 건지요? 네. 궁금합니다.

네네. 이제 수행으로서의 불교와 이 종교로서의 불교가 이게 믹스가 돼 있는 거예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너희 소원이 성취된다 하는 거는 종교로서의 불교예요. 어 그다음에 깨달음이라는 것은 수행으로서의 불교예요. 그러니까 이게 두 개가 믹서가 돼 가지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깨닫는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근데 이거는 좀 맞지는 않습니다. 아, 근데 그럼 그분이 거짓말 했냐? 그런 뜻이 아니라 그분들은 수행으로서의 불교와 종교로서의 불교가 구분이 안 되고 섞여 있다. 이런 얘기예요. 음.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이라는 거를 마치 간절하게 이렇게 뭘 하면 내가 돈을 번다. 간절하게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 것처럼 간절하게 기도하면 깨닫는다 하는 그 깨달음이라는 거를 그냥 얻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지금 말이 법문이 나오게 됐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우리 반야 성경에 그러잖아요. 깨달음은 이런 얻는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뭐다? 아이 어 무지 무득 어 얻을 것이 없다. 이 무소듣고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리살타는 이렇게 반야신경에 계속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돈을 내가 열심해가 돈을 번다. 열심해가 내가 어 출세를 한다. 지를 얻는다. 내가 열심히 해가 건강해진다. 열심히 해가 어 병을 고친다 하는 것 같이 깨달음도 이런 열심히 해서 내가 얻는 대상으로 깨달음을 산정하기 때문에 어 그래서 돈을 못 번 사람이 한탄하고 어 출세를 못 한 사람이 한탄하듯이 수행자가 깨달음을 못 얻으면 한탄을 합니다. 내가 30년간 수행을 했는데 아직도 깨달음을 못 얻었다. 내가 헛공부했다. 이런 얘기는 다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아니고 종교로서의 불교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는 거를 얻는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간절하게 기도하면 깨닫는다. 이제 이런 용어가 생겨나게 된 거다. 또 못 깨달았다고 한탄한다. 이런 얘기도 생겨난 거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런 어떤 막 어 욕구를 통해서 뭘 얻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놓아 버리는 거예요.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 우리는 어르바나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막 죽을 똥 살 똥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하는 거는 극기 훈련이지 그건 수행은 아니다. 이 이런 얘기야. 그 파워를 얻는 거예요. 파워를 크 해 가지고 막 훈련을 많이 받으면 어떤 힘을 얻는 그것이 이제 얻는 대상이죠. 수행은 뭘 얻는게 아니에요. 파워가 아니에요. 수행은 편안함이에요. 모든 권해의 사라짐이에요. 음. 그래서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쓰지만은 얻는 대상으로서의 깨달음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제 선에서 이 세 가지가 그 한 요소 간절함도 한 요소인데 세 가지가 겹쳐져야 깨달음을 얻는다. 이거는 이제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내용인데요. 첫째가 의심을 해야 됩니다. 의심. 이게 뭐지? 그게 왜 그렇지? 하는 이원이 있어야 됩니다. 그냥 뭘 얻는게 아니고 있으면 어때요? 의심이 있으니까 그 의심을 풀려고 하는게 당연히 뭐해진다? 간절해질 거 아니겠어요? 그죠? 그러니까 간절한 의심이 있어요. 그게 왜 그렇지 하는게 뭐 에이 그냥 뭐 뭐 왜 그렇지 하다가 에이 뭐 그 뭐 그렇게 되겠지 뭐 이런게 아니라 그게 골돌해야 된다는 골돌해야 된다. 이 먹고 하고 골돌해야 된다. 부처님이 새가 벌레를 쪼아먹는 걸 보고 왜 하나가 살기 하나가 죽어야 하지 같이 사는 길은 없을까? 누구한테 물어도 몰라요. 그러니까 혼자서 탄할 수밖에 없잖아요. 누구한테 물어가 다 벌어들 수 있으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러면 끝나 버린다 이 말이야. 근데 어떤 사람한테 물어도 그걸 아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이거는 스스로 탄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그 의문이 그 의심이 남을 뭐 못 믿어서 심하는 그런 의심이 아니에요. 음이라는 뜻의 의심이에요. 화이. 왜? 왜? 이게 간절하다 이 말이야. 이때 간절한 건 좋아요. 응. 왜 그렇지? 하는게 아주 간절해야 된다. 응.

그리고 거기에 또 뭐가 있냐? 그걸 모르는 거에 대한 약간의 분심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막 화가났다 하는 이런 분노가 아니라 내가 왜 이것도 몰랐지 하는 그런 좀 분심이라 그래. 그걸요. 다시 말하면 네가 누구냐 하니까 나는 내가 나를 아는 거 당연하지. 내가 내지 누구야? 이거면 끝이야. 누가 더 묻는 사람이 없어. 근데 계속 너 누구냐 하니까 법륜이다 하니까 그게네 이름이지. 너냐? 네 이름이 뭐냐면 법륜이라지. 너 누구냐? 법륜이냐? 그건 이름이잖아. 너 누구냐? 스님입니다. 스님은 네 직업이잖아. 네가 보면 네가 스님이가? 너 누구냐? 저는 봅니다. 이렇게 얘기할 때 만약 형이다. 언니 그 가족 관계지. 그게 무슨 냐? 엄마다. 그건 너 지금 가족 관계 위치잖아. 이렇게 자꾸 탐구하다 보면 내가 누군지 몰라. 그러면 내가 누구지? 이게 이제 어머니죠. 그런데 아니 세상에 온갖 걸 다 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를 몰라. 그것 따져보면 웃기는 얘기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를 몰라. 그럴 때 내가 나를 모른다에 대해서 약간의 분심이 일어나야 된다는 거. 어떻게 내가 이것도 모르고 살았냐 말이야. 그동안에 이런 분심. 음. 이거 막 화병하고 화라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내가 나를 그동안에 모르고 살았다. 바보같이 살았다는 거에 대한 어 거기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좀 있어야 되는 그래서 내가 나 내가 누군지를 알려고 하는 그 의지가 그 탐구가 아주 간절해진다 이 말이야. 그럴 때 이렇게 정진을 하면 마침내 내가 누군지를 알 수 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돼. 이 믿음이 없으면 하다가 관도 버릴 거 아니에요. 그죠?

그래서 선에서는 신심, 믿는 마음, 의심, 의심하는 마음, 의문, 세 번째 분심 하 자기가 모른 거에 대한 그런 강력한 그런 힘이 세 가지가 있어야 야 이제 간절해진다. 그 몰두이 먹고 나라는 이게 뭐냐 할 때 집중이 된다 이 말이야. 집중이 되면 깨달음을 합니다. 그건 맞아요. 뭐든지 집중이 되면 깨달음이 예진 어떤 순간에 아 그거구나 하고 이렇게 타파 그 벽을 뚫고 나가는 힘이 생긴다. 이런 얘기죠.

그래서 이제 또 스님들이 간절함을 얘기를 한다. 근데 여러분들이 그걸 들으면 간절하게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 것처럼 간절하게 기도하면 어 깨달음을 얻는다. 이건 조금 말은 좀 안 맞는 말이다. 어 근데 여러분들은 대부분 간절하지가 않습니다. 제가 볼 때는 어 내가 내 성질 같은 거 보면 이게 내가 원해서 이루어진 거 아니잖아요. 어릴 때 형성된 거잖아요. 근데 형성된 그 업식에 의해서 내가 그대로 어 다람 죄바퀴 돌듯이 대풀이하고 살아가고 있잖아요. 어 이거 조정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제 화내려면 어떻게 자극 주면 된다. 제 6억 하려면 뭘 자극 주면 된다. 왜냐면 그 까르마를 건드리면 그대로 하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빅데이터를 가지고 아, 저 사람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행동한다는게 다 나오면 조정하는 거 아주 쉬워요.

근데 이 조정을 안 당하려면 어떡하느냐? 내가 그 까르마대로 바깥에 오는 자극에 대한 감정대로 안 움직여야 돼요. 음. 그럴 때 진정한 자유 영역에 이르게 된다.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서 내가 주인이 된다. 상대가 나한테 욕하면 나도 욕하고 상대가 화내면 나도 화내고 상대가 뭐 어 울면 나도 따라울고 거의 이거는 노예적 생활이 꼭두각시란 말이에요. 상대가 나한테 욕을 해도 나는 웃는다. 이런 그건 네가 화내는 건네 일이고 나는 웃는다 이거예요. 영향을 안 받겠다는 거예요. 음. 울더라도 내가 선택해서 운든다는 거야. 자동으로 우는게 아니고 뭐 이거 우는게 좋겠다고 울고 화내는게 좋겠다고 화내는 거는 괜찮은데 우린 자극을 주면 자동 반응을 한다는 거예요. 이 꼭식과 같다. 그니까 이런 인생을 살지 않겠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수행을 하면 조금씩 그렇 되잖아요. 전에는 남편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꼭처럼 반응을 하는데 이제 남편이 좀 늦게 와도 뭐 좀 늦었나 보다 이러면 전에는 늦게 들어오면 화를 자동으로 내잖아요. 잔소리를 자동으로 하는데 애고 공부 안 하면 자동으로 잔소리를 하는데 이제 애고 공부 안 해도 아이고 뭐 공부하기 신나라 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를 하면 잔소리가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아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요. 내가 그 경계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음. 그래서 해탈이라고 말하는 거예. 누가 자극을 줘도 나는 거기로부터 자유롭다. 이 어 그건 꼭 반응을 안 한다는 거 아니에요. 반응을 하더라도 자동 반응 안 한다는 거예요. 내가 선택해서 반응을 하겠다는 거. 음. 자, 그렇게 이제 공부를 해 나가는게에 수행이다.

그런데 이제 이 간절하게 나가 내가 이 꼭두각시 노름하는 거에 대해서 자각이 좀 있어야 돼요. 이거 완전히 앞으로 인공지능이 탑재된 뭐하고 똑같다? 로봇트하고 똑같은 거예요. 시킴 시킨 대로 하는 거예요. 입력된 대로 앱 시킨 대로 그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다지가 맘대로 하는 거 같지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건드리면 그대로 따라서 반응을 하거든. 아무리 이렇게 절치나 서로 사랑한다는 남편도 뭘 하나 탁 건드리면 막 갑자기 원수가 될 수도 있는 거. 음. 그 그러한 것으로부터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좀 이렇게밖에 못 사는 나에 대해서 좀 분심이 있어야 돼. 그래야 내가 이 자유롭고 싶은 그거에 대한 탐구가 좀 적극적이다. 이런 얘기죠.

그래서 어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이제 이런 그 놓아 버린다는 거하고 간절하다는게 정반대데 결국 같아요. 즉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데 이게 놓아 버리는 거거든요. 매미 소리가 들리든지 다리에 통증이 오든지 뭐 머리에서 무슨 생각이 들든지 놓아 버린다. 나는 다만 호흡만 알아차린다. 나는 다만 화도만 창고한다. 잘한 거 그런데 반응 안 하겠다 이 말이에요. 이게 이제 딱 긴장을 풀고 놔아 버리는 거예요. 근데 안 놓아지잖아요. 대 반응을 하잖아요. 응. 어. 그래서 간절하다는 거하고 놓아 버린다는 건 일맥상 통합니다. 아주 그 문제 간절해 버리면 옆에서 누가 뭐라 그래도 그 신경 안 써 버려. 나는 이 문제 몰두해 있기 때문에 딴 거 신경 안 쓰잖아. 그죠? 그 일체나는 반응을 안 하겠다고 해도 신경 안 쓰잖아요. 그래서 이게에 정반대 같은 방법인데 또 결과적으로는 같은 효과를 낸다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그래서 비파산화에서는 놓아 버리는 쪽으로 선에서도 목조선 같은 거는 놓아 버리는 쪽으로 그다음 화도선 같은 거는 아주 간절하게 탐구하는 쪽으로 어 그러나 결과는 자유로워지는 상태에 이런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게.

그리고 왜 그런 용어가 있느냐? 기도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는 뭔가 간절임을 얻고자 할 때 기도라는 용어를 쓰는데 정토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쓸 때는 어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지를 깨우치는데 기도라는 용어가 하도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도라는 말을 쓰지만은 우리가 쓰는 정토에서 쓰는 기도라는 말은 수행으로서의 기도라는 용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 님 어 깨달음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어 꼭두각시가 아닌 주인공이 되는 그런 삶을 살도록 꾸준히 수행 전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