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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쩌면 어제 못다한 일이 떠올랐을 수도 있고, 오늘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습관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하셨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당신이 눈을 뜬 그 순간이 당신 인생 전체의 시작이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오늘 밤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이 당신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놀랍게도 부처님께서는 이 비유를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하는 진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법구경 무상품에는 이런 말씀이 전해집니다. "모든 것은 더덮으니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니 이치를 깨달은 자에게 고유함이 찾아온다."
이 짧은 구절 속에 하루를 사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루살리처럼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사라지는 존재라는 사실 말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라앉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평생이라고 부르는 그 시간은 사실 하루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침에 태어나 한낮에 무언가를 이루려 애쓰고, 저녁이 되어 피로에 지쳐 잠드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하루의 모습이자 동시에 우리 일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옛 선사들은 이것을 가리켜 '1일생'이라 하였습니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작은 한 생을 사는 것이며, 한 생을 산다는 것은 긴 하루를 사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이 가르침을 처음 접한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나는 것입니까?" 스승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너는 어제의 너가 아니며, 오늘의 너도 내일이면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태어나고 또 죽는다."
이 말씀이 주는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자신이 수십 년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수십 년을 살아갈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그저 길고 긴 생의 한 조각쯤으로 여기고 무심하게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시선을 열어 보입니다. 오늘 하루가 바로 당신의 인생 전체라는 시선입니다.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실 때 한 비구가 다가와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람의 생명은 얼마나 되는 기간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되물으셨습니다. "내 생각에는 얼마로 보이는가?" 비구는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100년쯤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대는 도를 모른다." 다른 비구가 나와 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마도 몇십 년이 아닐까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대도 도를 모른다."
이어서 또 한 비구가 나와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쩌면 하루쯤 되는 것이 아닐까요?"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때 한 비구가 조용히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람의 목숨은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들이신 숨이 다시 나가지 않으면 그것이 곧 저 세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제야 환히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참으로 도를 아는구나."
이 짧은 대화 속에 불교가 바라보는 생명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100년도, 몇십 년도, 하루도 아닌 바로 호흡 하나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당신은 숨을 들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숨이 다시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 인생의 마지막이 됩니다. 이것은 두려워해야 할 진실이 아니라 깊이 사유해야 할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를 바로 보는 사람만이 오늘 하루의 무게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혹시 오늘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지금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들여다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고 짜증을 내지는 않으셨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아 하루 종일 그 생각에 갇혀 있지는 않으셨습니까? 혹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늘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흘려보내지는 않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아주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성제라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시며 인생의 본질이 고통임을 먼저 밝히셨습니다. 고성제, 즉 인생은 고통이라는 진리입니다. 태어남이 고통이고, 늙음이 고통이며, 병이 고통이고, 죽음이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함이 고통이고, 미워하는 이와 만나야 함이 고통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이 고통입니다.
이 모든 고통의 뿌리에는 바로 우리가 무상함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 몸이 영원하고, 이 관계가 영원하며, 이 감정이 영원할 것처럼 매달립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대행무상, 모든 지어진 것은 더덥다." 꽃은 피었다 지고,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며, 강물은 흘러 바다로 가고, 우리의 몸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엄연한 진실 앞에서도 마치 그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양 살아갑니다.
어느 마을에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부지런히 일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데,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을 내일을 위해 살았다. 오늘 쉬면 내일이 불안할까 봐, 오늘 기뻐하면 내 일이 흐려질까 봐 언제나 참고 아끼며 살았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나에게는 내 일이 없다. 그리고 더 슬픈 것은 내가 가진 오늘들조차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노인의 마지막 말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히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영혼을 바라며 순간을 놓쳐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지금 이 하루뿐입니다.
옛 선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를 살려거든 마치 천 년을 사는 것처럼 깊이 살아라. 천 년을 살더라도 하루처럼 가볍게 흘려보내지 말라." 이 말씀은 언뜻 모순된 것 같지만, 사실 깊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하루를 천 년처럼 깊이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을 정성껏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천 년을 하루처럼 가볍게 흘려보내지 말라는 것은 어느 한 순간도 허투로 보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이 하루를 내 인생 전체인 듯 살아라.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다."
이제 잠시 오늘 아침 당신이 눈을 떴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이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 감각, 창문으로 들어오던 희미한 빛,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흐릿한 의식. 그것이 바로 당신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은 인생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당신은 이 하루라는 생을 마칠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 또 다른 하루라는 생이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오늘로 완결됩니다. 어제의 당신이 오늘로 이어지지 않듯이, 오늘의 당신도 내일로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죽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루살리와 우리가 다르지 않은 이유입니다.
하루살리는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사라집니다. 그들에게는 그 하루가 전부이고, 그 하루가 일생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루살리와 우리 사이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루살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의심 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어제를 후회하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며, 오직 오늘의 빛 속에서 날아다닐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제의 일로 괴로워하고, 내일의 일로 불안해하며, 정작 오늘이라는 빛 속을 날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바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쫓지 말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기다리지 말라. 오직 현재의 법을 있는 그대로 보라. 흔들림 없이 움직임 없이 그렇게 깊이 관찰하라." 이것이 바로 하루를 진정으로 사는 자의 지혜입니다. 하루를 사는 자는 어제를 탓하지 않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이 하루, 이 순간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을 깨달은 자에게는 삶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던 아침 햇살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지나치던 바람 한 줄기가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게 느껴집니다. 무심히 대하던 가족의 얼굴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알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 하루에만 허락된 선물이라는 것을. 내일의 햇살은 내일의 것이고, 내일의 바람은 내일의 것이며, 내일의 얼굴은 내일의 것입니다. 오늘의 것은 오늘에만이, 이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르쳐 '무상함 속의 축복'이라고 표현합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더 귀한 것입니다. 영원히 피어 있는 꽃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언젠가 질 것을 알기에 그 짧은 피어남이 더 없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도 그러합니다. 언젠가 저녁이 올 것을 알기에 이 아침의 빛이 이토록 귀한 것입니다. 언젠가 마지막 숨이 있을 것을 알기에 지금의 이 호흡이 이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습니다. 심장은 뛰고, 숨은 들고 나며, 생각은 흐르고, 감정은 일어납니다. 이 단순한 사실이 사실은 가장 큰 기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없는 것을 갈구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돈을 원하고, 더 높은 지위를 원하고, 더 많은 인정을 원하고, 더 나은 내일을 원합니다. 그러다 정작 지금 여기에 있는 이 귀한 하루를 놓쳐 버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100년을 살더라도 바른 진리를 모른다면, 하루를 살더라도 진리를 아는 자만 못하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거창한 무엇을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이 하루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임을 아는 것. 이 하루 속에 과거와 미래가 모두 녹아 있음을 아는 것. 그리고 이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곧 나의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와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 이것이 진리를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오늘 하루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아침은 어떠했습니까? 당신의 한낮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혹시 무언가에 쫓기듯 하루를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마음 한 구석에 이루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이미 걱정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러하시다면, 이제 그 모든 것을 가만히 내려놓아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이 순간, 이후 하루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삶은 충분히 완전합니다. 하루살리가 하루를 온전히 살아가듯이, 당신도 이 하루를 온전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어제의 미련 없이, 내일의 걱정 없이, 오직 지금 여기에 맑은 빛 속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무상 속에 영혼을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루 안에 태어나 하루 안에 죽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하루 안에 온 우주가 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재 전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오늘 하루가 천 년의 깊이를 품은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천 년의 깊이가 결국 당신의 일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루가 곧 일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당신은 혹시 시간이 강물처럼 흐른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시간을 직선으로 상상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직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붙잡으려 하고, 미래를 미리 걱정하며, 정작 발을 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스쳐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만약 시간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직선이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과거도 미래도 심지어 현재조차도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 살아가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이 물음에 대해 참으로 놀라운 답을 주셨습니다. 금강경 제18분 일체동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이 짧은 한 구절이 우리가 평생 붙들고 살아온 시간이라는 허상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습니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은 쉽게 이해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마음조차 얻을 수 없다니, 이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이 마음, 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바로 여기에 부처님 가르침의 깊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지금 이 순간을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이 순간은 과연 언제일까요? 내가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지금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이것이 현재라고 붙잡으려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처럼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찰나의 진리입니다. 현재라는 것은 사실 고정된 무엇이 아닙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끊임없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흐름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이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결코 그 흐름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선불교 위대한 스승이신 덕산 선사께서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는 것을 보시고, 시장하셨던 덕산 선사는 떡을 달라셨습니다. 노파는 떡을 내어 주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님, 스님께서 짊어지고 계신 그 책은 무슨 책입니까?" 덕산 선사는 자랑스럽게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평생 연구한 금강경 해설서이다." 그러자 노파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금강경에는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지금 어느 마음으로 이 떡을 드시려 하십니까?"
이 한마디에 덕산 선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경전을 공부하고 수많은 주석을 단 스님이셨음에도, 한 시골 노파의 질문 앞에서 말이 막혀 버린 것입니다. 이 일화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진리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지금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몸은 여기에 있되 마음은 과거에 어딘가를 헤매고, 또 미래의 어딘가를 달려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겪는 가장 근본적인 고통입니다.
당신은 식사를 하실 때 그 음식의 맛을 온전히 느끼며 드시는 편입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식사를 하면서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거나, 내일 해야 할 일을 걱정하거나, 아니면 손에 든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는 사이 당신의 입은 음식을 씹고 있지만, 당신의 존재는 그 식탁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샤워를 하실 때는 어떠십니까? 물줄기가 몸에 닿는 그 감각, 따뜻한 물이 주는 편안함, 비누 향기가 퍼지는 그 순간,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느끼고 계신가요? 아니면 샤워를 하는 내내 머릿속으로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은가요?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수많은 지금들을 놓치며 흘러갑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지 않고, 걸을 때는 걷지 않으며, 잠을 잘 때는 잠을 자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꿰뚫어 보시고 '깨어 있음'이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깨어 있음이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그저 밥을 먹는 것. 걸을 때는 그저 걷는 것. 숨을 쉴 때는 그저 숨을 쉬는 것.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일이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요? 왜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이토록 힘들어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원숭이 마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마치 원숭이가 나무에서 나무로 끊임없이 옮겨다니듯, 우리의 마음도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쉴새 없이 옮겨다닙니다. 한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생각이 밀려들고, 그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또 다른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마음의 요동 속에서 우리는 결코 지금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은 이 원숭이 마음을 강제로 묶어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마음의 흐름을 가만히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 감정이 솟아오르면 솟아오르는구나 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것. 그것을 붙잡지도 말고 밀어내지도 말고, 그저 흐르도록 두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을 사는 지혜입니다.
옛 선사들께서는 이러한 깨어 있음을 가리켜 '수처작주 입해지니'라 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서, 있는 그곳이 곧 진리의 자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이 사람. 그 모든 순간에 온전히 존재할 때 비로소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다른 곳에 주인이 되려 합니다. 더 좋은 곳, 더 나은 조건, 더 멋진 환경의 주인이 되려 합니다. 그러는 사이 정작 지금 이 자리의 주인 자리는 비어 있게 됩니다.
어느 선사께서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돈은 어디에 있느냐?" 제자는 먼 곳을 바라보며 답했습니다. "저 산 너머 구름 속에 있지 않겠습니까?" 선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그러면 깊은 바닷 속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다." "그러면 높은 하늘 위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다." 제자는 당황하여 여쭈었습니다. "그렇다면 돈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선사는 조용히 제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발 아래에 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내가 지금 숨 쉬는 그 순간, 거기에 도가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늘 진리가 어딘가 먼 곳에 있다고 믿습니다. 깊은 산속에, 절에, 오랜 수행의 끝에, 특별한 깨달음의 순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한결같이 가르치신 것은 진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당신이 들리시는 이 한 호흡 속에 온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의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무상과 영원이 동시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언제나 다른 곳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유마경에는 이런 말씀이 전해집니다. "중생의 병은 애욕과 무명에서 생기고, 보살의 자비는 중생을 보는 그 순간에서 일어난다." 이 말씀은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중생의 병, 즉 우리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애욕과 무명에서 옵니다. 무엇인가를 끝없이 갈망하는 마음과, 그 갈망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은 결국 지금 이 순간을 바로 보지 못함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흡이 있고, 심장의 박동이 있고, 존재 자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명한 선물을 보지 못하고 없는 것을 갈구합니다. 그 갈구가 우리를 과거로 끌고 가고, 미래로 떠밀며, 결코 지금을 살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 진실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게 되면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하면, 내 앞에 놓인 모든 것이 기적으로 다가옵니다. 뜨거운 차 한잔이 주는 온기, 창 밖으로 들리는 새소리,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스치는 미소. 이 모든 것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유일한 순간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내일 또 봐요." "내일 다시 만나요." "내일 또 이야기해요." 그런데 과연 내일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요? 내일의 태양은 오늘의 태양과 같은 태양이 아닙니다. 내일의 당신도 오늘의 당신과 같은 당신이 아닙니다. 내일 만나는 그 사람도 오늘 만난 그 사람과 정확히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매 순간 다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의 만남, 지금 이 순간의 대화, 지금 이 순간의 눈빛이 우주에서 단 한 번뿐인 사건입니다.
이 진실을 깊이 느낀 사람은 삶의 모든 순간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마주친 낯선이의 얼굴도, 우연히 스친 바람 한 줄기도,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작은 벌레 한 마리도, 이 모든 것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이례적인 만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다도에는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의 만남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니 온 마음을 다해 대하라는 뜻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차 한잔, 지금 내 앞에 앉은 이 사람, 지금 이 순간의 이 공기, 이 모든 것은 오직 이 순간에만 존재하며 다시는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만남을, 지금 이 순간을 온 존재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을 사는 자의 자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바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거품과 같다. 일어났다가 곧 사라지니 그 머무는 시간은 지극히 짧다. 그러나 이 짧은 머무음 속에서도 진리를 본 자는 영혼을 본다." 이 말씀이 주는 울림은 참으로 깊습니다. 우리의 삶이 물 위에 거품과 같다는 것은 무상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짧은 거품 속에서도 영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깊이를 뜻합니다. 영혼은 시간에 끝없는 연장이 아닙니다. 영혼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온전한 현존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깊이 살아갈 때, 그 순간 속에 온 영혼이 담깁니다. 반대로 지금 이 순간을 흘려보내면, 영원히 그 순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시간의 비밀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호흡을 느껴 보십시오. 들이마시는 숨과 내쉬는 숨. 그 사이에 미묘한 고요. 당신의 몸을 느껴 보십시오.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그 자세. 몸의 여기저기에 느껴지는 감각들. 당신의 마음을 느껴 보십시오. 지금 어떤 생각이 흐르고 있습니까? 어떤 감정이 머물러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지금을 사는 연습입니다.
이 연습을 거듭할수록 우리는 지금이라는 이 신비로운 자리에 점점 더 자주 머물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 몇 초도 지금에 머물기 어렵습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도망가려 하고, 생각은 쉬지 않고 솟아오릅니다. 그러나 조급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도망가면 도망갔구나 하고 다시 데려오면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났구나 하고 다시 내려놓으면 됩니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문득 고요가 찾아옵니다.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가 잠시 멈추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환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그것이 사실은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평화와 행복이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 속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부처'라는 가르침의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본래부터 이미 깨달은 존재입니다. 단지 우리의 시선이 언제나 다른 곳을 향해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갈 뿐입니다. 시선을 지금 이 자리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부처입니다.
그러나 이 진실은 한번 깨달았다고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 합니다. 걱정과 불안, 기대와 욕망이 매 순간 우리를 지금에서 떼어 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수행이란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매 순간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오는 연습.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걸을 때는 걷고, 앉을 때는 앉고,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고, 숨을 쉴 때는 숨을 쉬는 것. 이것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깊은 수행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이 순간들의 연속입니다. 그 순간들 하나하나에 얼마나 깨어 있느냐에 따라 당신의 하루는 완전히 다른 빛깔을 띠게 됩니다. 무심히 흘려보내는 하루가 될 수도 있고, 매 순간이 살아 있는 빛나는 하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오롯이 당신의 몫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셨을 뿐,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전히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로 달려가는 마음을 따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한 호흡, 이 한 순간에 온전히 현존하시겠습니까? 답은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루를 온전히 사는 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은 영원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 전해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잠시 숨을 멈추고 이 질문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의 해는 당신에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누군가의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오늘 이 순간에도 지구상에 수많은 이들에게 이것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아침에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저녁에 웃으며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깨어나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날이 자신의 마지막 날이 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일어날 일이기도 합니다.
아함경 무상경에는 부처님과 한 제자 사이에 유명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날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죽음을 얼마나 자주 생각하느냐?" 한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며칠에 한 번씩 죽음을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대는 아직 도를 닦는 자가 아니다." 다른 제자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저는 하루에 한 번씩 죽음을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대 역시 아직 도를 닦는 자가 아니다." 또 다른 제자가 자신 있게 답했습니다. "저는 밥 먹을 때마다 죽음을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셨습니다. "그대도 아직 도를 닦는 자가 아니다." 그때 한 제자가 조용히 앞으로 나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호흡할 때마다 죽음을 생각합니다. 들이신 숨이 다시 나가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저 세상임을 매 순간 잊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제야 환히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참으로 도를 아는구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죽음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아니, 잊고 있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조차 불길하다고 여기고, 장례식 이야기를 꺼리며, 노인의 모습을 애써 외면합니다. 마치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정반대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죽음을 매 순간 떠올리라. 왜냐하면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비로소 삶이 빛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비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삶의 긍정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잊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는지를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미룹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내일 하면 되고, 화해도 다음에 하면 되고, 미안하다는 말도 언젠가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은 여유가 생기면 할 것이고, 가고 싶은 곳은 시간이 되면 갈 것이며, 만나고 싶은 사람은 기회가 오면 만날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는 사이 수많은 내일들이 결코 오지 않는 내일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아직 하지 못한 말들을 품은 채로 그 대상을 영영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보지 못한 길을 간직한 채로 더 이상 길을 나설 수 없는 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죽음을 잊고 살아가는 자의 비극입니다.
반대로 죽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자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는 오늘 사랑한다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내일 그 말을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늘 화해합니다. 왜냐하면 내일이면 늦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늘 감사함을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성껏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평범한 아침 식사가 생의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는 귀한 자리가 됩니다. 무심히 지나치던 가족의 얼굴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소중한 얼굴이 됩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건강한 호흡이 매 순간 감사해야 할 기적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죽음을 생각하라 하신 진정한 뜻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통해 삶을 깊이 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옛 수행자들은 이것을 '사즉관(四卽觀)', 즉 죽음을 관하는 수행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하루였다면 나는 후회 없이 살았는가?" 이 단순한 두 가지 물음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침의 물음은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을 새롭게 다져 주었고, 저녁의 물음은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점검하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부터 이 두 가지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 것인가?" 그리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오늘이 내 마지막 하루였다면 나는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냈는가?"
이 두 가지 물음이 매일 반복될 때 우리의 삶은 놀랍도록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줄어듭니다. 하찮은 다툼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줄어듭니다. 미루어오던 중요한 일들을 오늘 당장 실행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하루를 일생처럼 사는 지혜입니다.
열반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삶은 머무음이 없고, 죽음은 때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마치 산 위에서 굴러내리는 바위처럼,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아간다." 이 말씀은 참으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삶은 결코 멈추어서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며, 한 번 지나간 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왜 자꾸만 삶을 미루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내일이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그 착각 속에서 오늘을 허비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무명을 깨우치기 위해 네 가지 성스러운 장소를 순례하라 하셨습니다. 그분이 태어나신 룸비니, 깨달음을 얻으신 부다가야, 처음 설법하신 사르나트, 그리고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 이 네 곳을 순례하는 것은 부처님의 생애를 따라 걷는 여정입니다. 태어남에서 시작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순례를 통해 존재의 전 과정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매일매일 이 네 가지 장소를 지나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우리의 룸비니이고, 한낮에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이 우리의 부다가야이며,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말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르나트이고,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우리의 쿠시나가라입니다. 하루 안에 부처님의 생애 전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깊은 진실을 느끼는 사람은 하루를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에게 하루는 단순한 24시간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의 일생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을 탄생으로 맞이하고, 저녁을 죽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사이에 모든 시간을 정성껏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선불교에서는 '평상심이 도(道)'라고 표현합니다. 특별하고 거창한 곳에 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마음 그 자체가 도라는 뜻입니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차 마실 때 차 마시고, 사람을 만날 때 정성껏 만나고, 일을 할 때 온 마음을 다하는 것. 이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가장 거룩한 수행입니다.
어느 수행자가 조주 선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 어떻게 하면 도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조주 선사는 되물으셨습니다. "너는 아침 공양을 하였느냐?" 수행자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쳤습니다." 조주 선사는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릇을 씻어라." 이 짧은 대답 속에 평상심의 가르침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밥을 먹었으면 그릇을 씻는 것. 그 단순한 일상 속에 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를 멀리서 찾습니다. 높은 산, 깊은 절, 먼 나라. 그러나 조주 선사의 가르침은 도가 바로 우리의 부엌에, 우리의 밥상에, 우리의 손끝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는 것은 이 평상심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침에 세수를 할 때는 세수하는 그 일에 온 마음을 담는 것. 출근길을 걸을 때는 그 걸음 하나하나에 깨어 있는 것.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성스러운 수행처럼 여기는 것. 사람을 만날 때는 그 만남이 일생에 단 한 번뿐임을 기억하는 것.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 하루를 감사의 마음으로 돌아보는 것. 이 모든 순간들이 쌓여 하나의 완전한 일생이 됩니다.
법화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니, 자신 안의 보배를 잊지 말라. 옷 속의 구슬이 있음을 모르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 비유는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 안에 무한한 보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보배란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배를 모른 채 밖에서 행복을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고, 더 높이 올라가면 만족할 것이라 여기며, 더 많은 인정을 받으면 평안해질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는 사이 정작 우리 안에 진짜 보배는 빛을 잃어갑니다.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는 것은 바로 이 보배를 꺼내어 쓰는 일입니다. 이 보배는 어느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눈을 뜨고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로 지금, 그 보배는 이미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가르침을 마무리하며 당신에게 세 가지 작은 수행을 권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아침에 눈을 뜨면 잠시 누운 채로 오늘 하루가 새로운 일생의 시작임을 마음에 새겨 보십시오. 어제의 모든 일은 어제로 끝났습니다. 오늘은 완전히 새로운 하루이며, 당신에게 새로이 주어진 한 생입니다. 이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지 잠시 마음을 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루 동안 단 세 번만이라도 자신의 호흡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특별한 장소나 자세는 필요 없습니다.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잠시 멈추고 자신의 호흡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들이시는 숨이 있고, 내쉬는 숨이 있으며, 그 사이에 고요한 당신이 있습니다. 이 짧은 호흡의 시간이 당신을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오게 해 줄 것입니다.
셋째,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하루를 고요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오늘 나는 누구를 만났는가? 오늘 나는 어떤 말을 했는가? 오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가?" 이 돌아봄은 후회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라는 일생을 정성스럽게 마무리하기 위한 의식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려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라는 생을 살았습니다. 이 하루의 모든 인연에 감사합니다. 이제 이 하루를 내려놓고 편안히 잠에 들겠습니다."
이 세 가지 작은 수행이 매일 반복될 때 당신의 하루는 서서히 일생의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무심히 흘러가던 시간이 의미로 채워지고,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이 경이로움으로 빛나며, 지나치던 인연들이 소중한 만남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는 것이 결국은 가장 충만하게 삶을 살아내는 길이라는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나눈 가르침은 결국 단 한 가지로 수렴됩니다. "인생은 하루이고, 우리는 하루 안에 죽는다." 이 진리를 두려움이 아닌 깨어 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오늘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오늘 밤 잠드는 그 순간까지, 그 사이에 펼쳐진 하루라는 무대 위에서 당신은 어떤 삶을 연기하시겠습니까? 대충 연기하다 막을 내리는 배우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매 장면을 온 존재로 살아내는 배우가 되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게으르지 말고 방일하지 말라. 모든 것은 덧없이 지나간다.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하루의 가르침을 잊지 말라." 이 당부의 말씀이 오늘 당신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당신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루가 곧 당신의 일생입니다. 부디 이 하루를 깊이 있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밝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 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수십 년을 살아갈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그저 길고 긴 생의 한 조각 짐으로 여기고 무심하게 흘려 보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시선을 열어 보입니다. 오늘 하루가 바로 당신의 인생 전체라는 시선을.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실 때 한 비구가 다가와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람의 생명은 얼마나 되는 기간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되물으셨습니다. "내 생각에는 얼마로 보이는가?" 비구는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100년쯤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대는 돌을 모른다."
다른 비구가 나와 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마도 몇 십 년이 아닐까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대도 돌을 모른다."
이어서 또 한 비구가 나와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쩌면 하루쯤 되는 것이 아닐까요?"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때 한 비구가 조용히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람의 목숨은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들이신 숨이 다시 나가지 않으면 그것이 곧 저 세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참으로 도를 아는구나."
이 짧은 대화 속에 불교가 바라보는 생명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100년도, 몇십년도, 하루도 아닌 바로 호흡 하나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당신은 숨을 들이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숨이 다시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 인생의 마지막이 됩니다. 이것은 두려워해야 할 진실이 아니라 깊이 사유해야 할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를 바로 보는 사람만이 오늘 하루의 무게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혹시 오늘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지금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들여다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고 짜증을 내지는 않으셨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아 하루 종일 그 생각에 갇혀 있지는 않으셨습니까? 혹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늘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흘려보내지는 않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아주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성제라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시며 인생의 본질이 고통임을 먼저 밝히셨습니다. 고성제, 즉 인생은 고통이라는 진리입니다. 태어남이 고통이고, 늙음이 고통이며, 병이 고통이고, 죽음이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함이 고통이고, 미워하는 이와 만나야 함이 고통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이 고통입니다.
이 모든 고통의 뿌리에는 바로 우리가 무상함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 몸이 영원하고, 이 관계가 영원하며, 이 감정이 영원할 것처럼 매달립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대행무상, 모든 지어진 것은 덥다." 꽃은 피었다 지고,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며, 강물은 흘러 바다로 가고, 우리의 몸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엄연한 진실 앞에서도 마치 그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양 살아갑니다.
어느 마을에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부지런히 일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데,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을 내일을 위해 살았다. 오늘 쉬면 내일이 불안할까 봐, 오늘 기뻐하면 내 일이 흐려질까 봐 언제나 참고 아끼며 살았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나에게는 내 일이 없다. 그리고 더 슬픈 것은 내가 가진 오늘들조차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노인의 마지막 말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히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영혼을 바라며 순간을 놓쳐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지금 이 하루뿐입니다.
선불교회 어느 조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를 살려거든 마치 천년을 사는 것처럼 깊이 살아라. 천년을 살더라도 하루처럼 가볍게 흘려보내지 말라." 이 말씀은 언뜻 모순된 것 같지만, 사실 깊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깊이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을 정성껏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천년을 하루처럼 가볍게 흘려보내지 말라는 것은 어느 한 순간도 허투로 보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이 하루를 내 인생 전체인 듯 살아라.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다."
이제 잠시 오늘 아침 당신이 눈을 떴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이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 감각, 창문으로 들어오던 희미한 빛,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흐릿한 의식. 그것이 바로 당신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은 인생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당신은 이 하루라는 생을 마칠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 또 다른 하루라는 생이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오늘로 완결됩니다. 어제의 당신이 오늘로 이어지지 않듯이 오늘의 당신도 내일로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죽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루살이와 우리가 다르지 않은 이유입니다.
하루살이는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사라집니다. 그들에게는 그 하루가 전부이고, 그 하루가 일생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하루살이와 우리 사이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루살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의심 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어제를 후회하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며, 오직 오늘의 빛 속에서 날아다닐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제의 일로 괴로워하고, 내일의 일로 불안해하며, 정작 오늘이라는 빛 속을 날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바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쫓지 말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기다리지 말라. 오직 현재의 법을 잊는 그대로 보라. 흔들림 없이 움직임 없이 그렇게 깊이 관찰하라. 이것이 바로 하루를 진정으로 사는 자의 지혜이다." 하루를 사는 자는 어제를 탓하지 않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이 하루 이 순간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을 깨달은 자에게는 삶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던 아침의 햇살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지나치던 바람 한 줄기가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게 느껴집니다. 무심히 대하던 가족의 얼굴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알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 하루에만 허락된 선물이라는 것을. 내일의 햇살은 내일의 것이고, 내일의 바람은 내일의 것이며, 내일의 얼굴은 내일의 것입니다. 오늘의 것은 오늘에만이, 이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르쳐 무상함 속의 축복이라고 표현합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더 귀한 것입니다. 영원히 피어 있는 꽃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언젠가 질 것을 알기에 그 짧은 피어남이 더없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도 그러합니다. 언젠가 저녁이 올 것을 알기에 이 아침의 빛이 이토록 귀한 것입니다. 언젠가 마지막 숨이 있을 것을 알기에 지금의 이 호흡이 이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습니다. 심장은 뛰고, 숨은 들고 나며, 생각은 흐르고, 감정은 일어납니다. 이 단순한 사실이 사실은 가장 큰 기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없는 것을 갈구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돈을 원하고, 더 높은 지위를 원하고, 더 많은 인정을 원하고, 더 나은 내일을 원합니다. 그러다 정작 지금 여기에 있는 이 귀한 하루를 놓쳐 버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100년을 살더라도 바른 진리를 모른다면, 하루를 살더라도 진리를 아는 자만 못하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거창한 무엇을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이 하루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임을 아는 것. 이 하루 속에 과거와 미래가 모두 녹아 있음을 아는 것. 그리고 이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곧 나의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와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 이것이 진리를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오늘 하루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아침은 어떠했습니까? 당신의 한낮은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혹시 무언가에 쫓기듯 하루를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마음 한 구석에 이루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이미 걱정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러하시다면, 이제 그 모든 것을 가만히 내려놓아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이 순간, 이후 하루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삶은 충분히 완전합니다. 하루살이가 하루를 온전히 살아가듯이, 당신도 이 하루를 온전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어제의 미련 없이, 내일의 걱정 없이, 오직 지금 여기에 맑은 빛 속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무상 속에 영혼을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루 안에 태어나 하루 안에 죽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하루 안에 온 우주가 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재 전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오늘 하루가 천년의 깊이를 품은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천년의 깊이가 결국 당신의 일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루가 곧 일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당신은 혹시 시간이 강물처럼 흐른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시간을 직선으로 상상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직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붙잡으려 하고, 미래를 미리 걱정하며, 정작 발을 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스쳐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만약 시간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직선이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과거도, 미래도, 심지어 현재조차도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 살아가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이 물음에 대해 참으로 놀라운 답을 주셨습니다. 금강경 제18분 '일체동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이 짧은 한 구절이 우리가 평생 붙들고 살아온 시간이라는 허상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습니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은 쉽게 이해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마음조차 얻을 수 없다니, 이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이 마음, 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바로 여기에 부처님 가르침의 깊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지금 이 순간을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이 순간은 과연 언제일까요? 내가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지금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이것이 현재라고 붙잡으려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처럼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찰나의 진리입니다. 현재라는 것은 사실 고정된 무엇이 아닙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끊임없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흐름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이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결코 그 흐름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선불교 위대한 스승이신 덕산 선사께서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는 것을 보시고 시장하셨던 덕산 선사는 떡을 달라셨습니다. 노파는 떡을 내어 주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님, 스님께서 짊어지고 계신 그 책은 무슨 책입니까?" 덕산 선사는 자랑스럽게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평생 연구한 금강경 해설서이다." 그러자 노파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금강경에는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지금 어느 마음으로 이 떡을 드시려 하십니까?"
이 한마디에 덕산 선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경전을 공부하고 수많은 주석을 단 스님이셨음에도, 한 시골 노파의 질문 앞에서 말이 막혀 버린 것입니다. 이 일화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진리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지금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몸은 여기에 있되 마음은 과거에 어딘가를 헤매고, 또 미래의 어딘가를 달려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겪는 가장 근본적인 고통입니다.
당신은 식사를 하실 때 그 음식의 맛을 온전히 느끼며 드시는 편입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식사를 하면서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거나, 내일 해야 할 일을 걱정하거나, 아니면 손에 든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는 사이 당신의 입은 음식을 씹고 있지만, 당신의 존재는 그 식탁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샤워를 하실 때는 어떠십니까? 물줄기가 몸에 닿는 그 감각, 따뜻한 물이 주는 편안함, 비누 향기가 퍼지는 그 순간,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느끼고 계신가요? 아니면 샤워를 하는 내내 머릿속으로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은가요?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수많은 지금들을 놓치며 흘러갑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지 않고, 걸을 때는 걷지 않으며, 잠을 잘 때는 잠을 자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꿰뚫어 보시고 '깨어 있음'이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깨어 있음이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그저 밥을 먹는 것. 걸을 때는 그저 걷는 것. 숨을 쉴 때는 그저 숨을 쉬는 것.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일이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요? 왜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이토록 힘들어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원숭이 마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마치 원숭이가 나무에서 나무로 끊임없이 옮겨다니듯, 우리의 마음도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쉴 새 없이 옮겨다닙니다. 한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생각이 밀려들고, 그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또 다른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마음의 요동 속에서 우리는 결코 지금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은 이 원숭이 마음을 강제로 묶어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마음의 흐름을 가만히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 감정이 솟아오르면 '솟아오르는구나' 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것. 그것을 붙잡지도 말고, 밀어내지도 말고, 그저 흐르도록 두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을 사는 지혜입니다.
옛 선사들께서는 이러한 깨어 있음을 가리켜 "수처작주 입처진(隨處作主 立處眞)"이라 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서, 있는 그곳이 곧 진리의 자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이 사람. 그 모든 순간에 온전히 존재할 때 비로소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다른 곳에 주인이 되려 합니다. 더 좋은 곳, 더 나은 조건, 더 멋진 환경의 주인이 되려 합니다. 그러는 사이 정작 지금 이 자리의 주인 자리는 비어 있게 됩니다.
어느 선사께서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돈(道)은 어디에 있느냐?" 제자는 먼 곳을 바라보며 답했습니다. "저 산 너머 구름 속에 있지 않겠습니까?" 선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그러면 깊은 바닷 속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다." "그러면 높은 하늘 위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다." 제자는 당황하여 여쭈었습니다. "그렇다면 돈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선사는 조용히 제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발 아래에 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내가 지금 숨 쉬는 그 순간, 거기에 도(道)가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늘 진리가 어딘가 먼 곳에 있다고 믿습니다. 깊은 산속에, 절에, 오랜 수행의 끝에, 특별한 깨달음의 순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한결같이 가르치신 것은 진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당신이 들리시는 이 한 호흡 속에 온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의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무상과 영원이 동시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언제나 다른 곳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유마경에는 이런 말씀이 전해집니다. "중생의 병은 애욕과 무명에서 생기고, 보살의 자비는 중생을 보는 그 순간에서 일어난다." 이 말씀은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중생의 병, 즉 우리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애욕과 무명에서 옵니다. 무엇인가를 끝없이 갈망하는 마음과, 그 갈망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은 결국 지금 이 순간을 바로 보지 못함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흡이 있고, 심장의 박동이 있고, 존재 자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명한 선물을 보지 못하고 없는 것을 갈구합니다. 그 갈구가 우리를 과거로 끌고 가고, 미래로 떠밀며, 결코 지금을 살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 진실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게 되면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하면, 내 앞에 놓인 모든 것이 기적으로 다가옵니다. 뜨거운 차 한잔이 주는 온기, 창 밖으로 들리는 새 소리,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스치는 미소. 이 모든 것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유일한 순간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내일 또 봐요." "내일 다시 만나요." "내일 또 이야기해요." 그런데 과연 내일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요? 내일의 태양은 오늘의 태양과 같은 태양이 아닙니다. 내일의 당신도 오늘의 당신과 같은 당신이 아닙니다. 내일 만나는 그 사람도 오늘 만난 그 사람과 정확히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매 순간 다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의 만남, 지금 이 순간의 대화, 지금 이 순간의 눈빛이 우주에서 단 한 번뿐인 사건입니다.
이 진실을 깊이 느낀 사람은 삶의 모든 순간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마주친 낯선 이의 얼굴도, 우연히 스친 바람 한 줄기도,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작은 벌레 한 마리도, 이 모든 것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이례적인 만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다도에는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의 만남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니 온 마음을 다해 대하라는 뜻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차 한잔, 지금 내 앞에 앉은 이 사람, 지금 이 순간의 이 공기, 모든 것은 오직 이 순간에만 존재하며 다시는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만남을, 지금 이 순간을 온 존재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을 사는 자의 자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바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거품과 같다. 일어났다가 곧 사라지니, 그 머무는 시간은 지극히 짧다. 그러나 이 짧은 머무음 속에서도 진리를 본 자는 영혼을 본다." 이 말씀이 주는 울림은 참으로 깊습니다. 우리의 삶이 물 위에 거품과 같다는 것은 무상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짧은 거품 속에서도 영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깊이를 뜻합니다. 영혼은 시간에 끝없는 연장이 아닙니다. 영혼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온전한 현존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깊이 살아갈 때, 그 순간 속에 온 영혼이 담깁니다. 반대로 지금 이 순간을 흘려보내면, 영원히 그 순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시간의 비밀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호흡을 느껴 보십시오. 들이마시는 숨과 내쉬는 숨. 그 사이에 미묘한 고요. 당신의 몸을 느껴 보십시오.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그 자세. 몸의 여기저기에 느껴지는 감각들. 당신의 마음을 느껴 보십시오. 지금 어떤 생각이 흐르고 있습니까? 어떤 감정이 머물러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지금을 사는 연습입니다.
이 연습을 거듭할수록 우리는 지금이라는 이 신비로운 자리에 점점 더 자주 머물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 몇 초도 지금에 머물기 어렵습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도망가려 하고, 생각은 쉬지 않고 솟아오릅니다. 그러나 조급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도망가면 '도망갔구나' 하고 다시 데려오면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났구나' 하고 다시 내려놓으면 됩니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문득 고요가 찾아옵니다.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가 잠시 멈추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환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그것이 사실은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평화와 행복이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 속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부처'라는 가르침의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본래부터 이미 깨달은 존재입니다. 단지 우리의 시선이 언제나 다른 곳을 향해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갈 뿐입니다. 시선을 지금 이 자리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부처입니다.
그러나 이 진실은 한번 깨달았다고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 합니다. 걱정과 불안, 기대와 욕망이 매 순간 우리를 지금에서 떼어 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수행이란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매 순간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오는 연습.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걸을 때는 걷고, 앉을 때는 앉고,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고, 숨을 쉴 때는 숨을 쉬는 것. 이것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깊은 수행입니다.
이제 당신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이 순간들의 연속입니다. 그 순간들 하나하나에 얼마나 깨어 있느냐에 따라 당신의 하루는 완전히 다른 빛깔을 띄게 됩니다. 무심히 흘려보내는 하루가 될 수도 있고, 매 순간이 살아 있는 빛나는 하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오롯이 당신의 몫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셨을 뿐,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전히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로 달려가는 마음을 따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한 호흡, 이 한 순간에 온전히 현존하시겠습니까? 답은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루를 온전히 사는 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은 영원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 전해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잠시 숨을 멈추고 이 질문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의 해는 당신에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누군가의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오늘 이 순간에도 지구상에 수많은 이들에게 이것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저녁에 웃으며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깨어나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날이 자신의 마지막 날이 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일어날 일이기도 합니다.
아함경 '무상경'에는 부처님과 한 제자 사이에 유명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날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너희는 죽음을 얼마나 자주 생각하느냐?" 한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며칠에 한 번씩 죽음을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대는 아직 돌을 닦는 자가 아니다." 다른 제자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저는 하루에 한 번씩 죽음을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대 역시 아직 돌을 닦는 자가 아니다." 또 다른 제자가 자신 있게 답했습니다. "저는 밥 먹을 때마다 죽음을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셨습니다. "그대도 아직 도를 닦는 자가 아니다."
그때 한 제자가 조용히 앞으로 나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호흡할 때마다 죽음을 생각합니다. 들리신 숨이 다시 나가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저 세상임을 매 순간 잊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참으로 도를 아는구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죽음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아니, 있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조차 불길하다고 여기고, 장례식 이야기를 꺼리며, 노인의 모습을 애써 외면합니다. 마치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정반대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죽음을 매 순간 떠올리라. 왜냐하면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비로소 삶이 빛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비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삶의 긍정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잊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는지를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미룹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내일 하면 되고, 화해도 다음에 하면 되고, 미안하다는 말도 언젠가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은 여유가 생기면 할 것이고, 가고 싶은 곳은 시간이 되면 갈 것이며, 만나고 싶은 사람은 기회가 오면 만날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는 사이 수많은 내일들이 결코 오지 않는 내일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아직 하지 못한 말들을 품은 채로 그 대상을 영영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보지 못한 길을 간직한 채로 더 이상 길을 나설 수 없는 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죽음을 잊고 살아가는 자의 비극입니다.
반대로 죽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자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는 오늘 사랑한다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내일 그 말을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늘 화해합니다. 왜냐하면 내일이면 늦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늘 감사함을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성껏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평범한 아침 식사가 생의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는 귀한 자리가 됩니다. 무심히 지나치던 가족의 얼굴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소중한 얼굴이 됩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건강한 호흡이 매 순간 감사해야 할 기적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죽음을 생각하라 하신 진정한 뜻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통해 삶을 깊이 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옛 수행자들은 이것을 '사, 즉 죽음을 관하는 수행'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하루였다면 나는 후회 없이 살았는가?" 이 단순한 두 가지 물음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침의 물음은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을 새롭게 다져 주었고, 저녁의 물음은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점검하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부터 이 두 가지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 것인가?" 그리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오늘이 내 마지막 하루였다면 나는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냈는가?"
이 두 가지 물음이 매일 반복될 때 우리의 삶은 놀랍도록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줄어듭니다. 하찮은 다툼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줄어듭니다. 미루어 오던 중요한 일들을 오늘 당장 실행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하루를 일생처럼 사는 지혜입니다.
열반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삶은 머무음이 없고, 죽음은 때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마치 산 위에서 굴러내리는 바위처럼,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아간다." 이 말씀은 참으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삶은 결코 멈추어서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며, 한 번 지나간 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왜 자꾸만 삶을 미루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내일이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그 착각 속에서 오늘을 허비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무명을 깨우치기 위해 네 가지 성스러운 장소를 순례하라 하셨습니다. 그분이 태어나신 룸비니, 깨달음을 얻으신 부다가야, 처음 설법하신 사르나트, 그리고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 이 네 곳을 순례하는 것은 부처님의 생애를 따라 걷는 여정입니다. 태어남에서 시작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순례를 통해 존재의 전 과정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매일매일 이 네 가지 장소를 지나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우리의 룸비니이고, 한낮에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이 우리의 부다가야이며,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말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르나트이고,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우리의 쿠시나가라입니다. 하루 안에 부처님의 생애 전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깊은 진실을 느끼는 사람은 하루를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에게 하루는 단순한 24시간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의 일생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을 탄생으로 맞이하고, 저녁을 죽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사이에 모든 시간을 정성껏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선불교에서는 '평상심이 도(道)'라고 표현합니다. 특별하고 거창한 곳에 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마음 그 자체가 도라는 뜻입니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차 마실 때 차 마시고, 사람을 만날 때 정성껏 만나고, 일을 할 때 온 마음을 다하는 것. 이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가장 거룩한 수행입니다.
어느 수행자가 조주선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 어떻게 하면 도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조주선사는 되물었습니다. "너는 아침 공양을 하였느냐?" 수행자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쳤습니다." 조주선사는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릇을 씻어라." 이 짧은 대답 속에 평상심의 가르침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밥을 먹었으면 그릇을 씻는 것. 그 단순한 일상 속에 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를 멀리서 찾습니다. 높은 산, 깊은 절, 먼 나라. 그러나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도가 바로 우리의 부엌에, 우리의 밥상에, 우리의 손끝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는 것은 이 평상심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침에 세수를 할 때는 세수하는 그 일에 온 마음을 담는 것. 출근길을 걸을 때는 그 걸음 하나하나에 깨어 있는 것.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성스러운 수행처럼 여기는 것. 사람을 만날 때는 그 만남이 일생에 단 한 번뿐임을 기억하는 것.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 하루를 감사의 마음으로 돌아보는 것. 이 모든 순간들이 쌓여 하나의 완전한 일생이 됩니다.
법화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니, 자신 안의 보배를 잊지 말라. 옷 속에 구슬이 있음을 모르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 비유는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 안에 무한한 보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보배란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배를 모른 채 밖에서 행복을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고, 더 높이 올라가면 만족할 것이라 여기며, 더 많은 인정을 받으면 평안해질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는 사이 정작 우리 안에 진짜 보배는 빛을 잃어갑니다.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는 것은 바로 이 보배를 꺼내어 쓰는 일입니다. 이 보배는 어느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눈을 뜨고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로 지금, 그 보배는 이미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가르침을 마무리하며 당신에게 세 가지 작은 수행을 권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아침에 눈을 뜨면 잠시 누운 채로 오늘 하루가 새로운 일생의 시작임을 마음에 새겨 보십시오. 어제의 모든 일은 어제로 끝났습니다. 오늘은 완전히 새로운 하루이며, 당신에게 새로이 주어진 한 생입니다. 이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지 잠시 마음을 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루 동안 단 세 번만이라도 자신의 호흡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특별한 장소나 자세는 필요 없습니다.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잠시 멈추고 자신의 호흡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들이시는 숨이 있고, 내쉬는 숨이 있으며, 그 사이에 고유한 당신이 있습니다. 이 짧은 호흡의 시간이 당신을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오게 해 줄 것입니다.
셋째,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하루를 고요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오늘 나는 누구를 만났는가? 오늘 나는 어떤 말을 했는가? 오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가? 이 돌아봄은 후회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라는 일생을 정성스럽게 마무리하기 위한 의식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음조려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라는 생을 살았습니다. 이 하루의 모든 인연에 감사합니다. 이제 이 하루를 내려놓고 편안히 잠에 들겠습니다."
이 세 가지 작은 수행이 매일 반복될 때 당신의 하루는 서서히 일생의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무심히 흘러가던 시간이 의미로 채워지고,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이 경이로움으로 빛나며, 지나치던 인연들이 소중한 만남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루를 일생처럼 산다는 것이 결국은 가장 충만하게 삶을 살아내는 길이라는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나눈 가르침은 결국 단 한 가지로 수렴됩니다. 인생은 하루이고, 우리는 하루 안에 죽는다. 이 진리를 두려움이 아닌 깨어 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오늘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오늘 밤 잠드는 그 순간까지, 그 사이에 펼쳐진 하루라는 무대 위에서 당신은 어떤 삶을 연기하시겠습니까? 대충 연기하다 막을 내리는 배우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매 장면을 온 존재로 살아내는 배우가 되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게으르지 말고 방일하지 말라. 모든 것은 덧없이 지나간다.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하루의 가르침을 잊지 말라." 이 당부의 말씀이 오늘 당신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당신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루가 곧 당신의 일생입니다. 부디 이 하루를 깊이 있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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