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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여러분, 잠시 눈을 감고 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혹시 지금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절박한 소망이 울리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어쩌면 나는 왜 이리 복이 없을까 하는 서글픔, 혹은 남들은 다 가진 저 재물과 평안이 왜 나에게만 멀기만 할까 하는 허망함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외로움과 불안이 저 멀리 고향의 등불처럼 아련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겁니다.
오늘 우리는 이 깊은 외로움과 씨름하는 마음에게 부처님의 가장 단단하고 빛나는 지혜가 담긴 보석 같은 가르침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 가르침은 다이아몬드처럼 모든 집착을 깨뜨리고 여러분의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안겨 줄 것입니다. 이 영상에 끝까지 함께 해 주시는 분들께는 이 가르침을 여러분의 일상에서 바로 실천하여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진정한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는 작은 지혜의 씨앗을 선물로 드릴 것입니다. 이 지혜는 여러분이 그토록 바라던 평온과 풍요가 사실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 조급하지 마시고 그저 편안히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지금부터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금강경이라는 심오한 지혜 속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많은 분들이 금강경을 읽으면 복을 받고 재물이 쌓인다고 믿습니다.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복을 받는 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 금강경의 말씀은 언뜻 듣기에는 역설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차분히 마음을 열고 듣다 보면 복을 얻는 가장 빠른 길은 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마음을 비움으로써 오히려 더 가득 채우게 되는 놀라운 비밀을 여러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것을 갈망합니다. 특히 이 나이가 되면 더 이상 젊은 시절처럼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혹은 홀로 남겨진 현실에 더 깊은 외로움과 불안을 느끼곤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땀 흘려 일하면 돈을 벌고 노력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삶의 후반기에 접어들면 아무리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아지고, 쌓아온 재물이나 명예마저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마치 손에 쥐고 있던 모래알처럼 가진 것이 많아도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허망함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 젊은 시절 깊은 산속 암자에서 수행할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밤, 한 스님이 저에게 묻더군요. "불목하니, 자네는 무엇이 가장 간절한가?" 저는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답했습니다. "스님, 저는 부처님의 깊은 가르침을 깨달아 평생을 흔들림 없이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평화를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음 참으로 귀하구나. 하지만 그 간절함마저도 때로는 집착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라." 그 말씀이 어린 저에게는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좋은 뜻을 품는 것마저 집착이라니요.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지켜보며 그 말씀의 깊은 뜻을 조금씩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을 원합니다. 평안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 복과 평안을 움켜쥐려 할수록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립니다. 마치 뜨거운 숯을 맨손으로 쥐려 할수록 더 타오르는 고통만 안겨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 마음속에 깊은 결핍감과 불안만을 쌓아둡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왜 나에게는 좋은 일이 오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이러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밤마저 설치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마음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종종 과거의 후회에 갇히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젊은 날의 실수를 곱씹으며 그때 그랬더라면 하고 한숨 짓고, 다가올 노년의 외로움과 질병, 경제적 어려움을 미리 걱정하며 현재의 작은 기쁨마저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려 애쓰는 연어처럼,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쫓거나 피하려 애쓰며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바로 집착입니다. 금강경은 이 집착을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지혜의 칼로 부수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단순히 집착을 버려라 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하여 스스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찾도록 이끌어주는 자비로운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은 물질적인 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복이 진정으로 쌓이는 방법을 알려주는 보물과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주상보시, 무주상부시의 지혜입니다. "보살은 마땅히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 이른바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촉이나 그 어떤 것에도 머무르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 이 말씀이 바로 금강경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 보시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대부분은 물질적인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돈이나 물건을 나누어 주는 건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보시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보시의 진정한 의미는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베풀 때 마음속으로 어떤 기대를 품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나에게는 열 배, 100배의 복이 돌아와야 해.' 혹은 '남들이 나를 착한 사람이라고 알아봐 줘야 해.' '나는 이렇게 좋은 일을 했으니 뿌듯함을 느껴야 해.' 이런 마음들이 바로 형상에 머무는 마음입니다. 마치 물건을 팔고 대가를 바라는 장사꾼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주면서도 그에 대한 보상이나 인정을 은연중에 기대합니다. 이런 기대는 우리의 손을 꽉 움켜지게 만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손을 꽉 움켜지고 있으면, 그 손 안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이미 쥐고 있는 것 외에는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주면서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 대가를 받지 못하면 실망하고 조급해하게 됩니다. '나는 분명히 좋은 일을 했는데 왜 나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평불만이 생겨나고, 결국 마음속에는 다시 결핍감과 불안만이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대가를 바라는 보시의 한계이자 우리를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함정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베풀었던 수많은 친절과 선행들, 혹시 그 속에서 은근히 되돌려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제는 조용히 돌아볼 때입니다. 우리가 보시를 할 때 마음속에 어떤 형상을 그리면 그 보시의 의미는 퇴색되고 마음에 새로운 복이 들어올 공간이 사라져 버립니다.
여기서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 '저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심지어 '나는 착한 보살이다'라는 자만심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형상에도 머무르지 않는 지혜를 뜻합니다. 마치 새벽녘 이슬이 남은 잎에 맺혔다가 해가 뜨면 소리 없이 사라지듯, 우리의 보시도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져야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는 활짝 편 손과 같습니다. 활짝 편 손은 무엇을 주었는지 기억하지 않습니다. 대가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줄 뿐입니다. 그런데 손을 활짝 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손은 텅 비게 되고, 텅 비었기 때문에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됩니다. 새로운 물을 담을 수도 있고, 새로운 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주상보시의 역설적인 지혜입니다. 움켜진 손은 그 안에 든 모래알을 지키려다 귀한 보물을 놓치고 결국은 모래마저 다 흘려 버리지만, 활짝 편 손은 모래를 놓아줌으로써 우주 전체의 풍요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복은 흐름입니다. 강물이 고여 있으면 썩어 버리듯이, 움켜진 손은 그 복의 흐름을 막아 물을 고이게 하고 썩게 만듭니다. 하지만 활짝 편 손은 그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 더 큰 바다와 만나게 합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 복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를 여는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자꾸만 무언가를 움켜쥐려 하는 마음이 강해질 때가 많습니다. 젊은 날의 영광, 쌓아둔 재산, 심지어 자식에 대한 기대까지도 모두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활짝 편 손처럼 놓아주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스님, 제가 베풀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가진 것도 없고 몸도 예전 같지 않은데요." 하지만 보시에는 재물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들께서는 일곱 가지 재물 없는 보시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화안시(和顔施),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로 베푸는 보시, 즉 미소입니다.
둘째는 언시(言施), 사랑과 위로의 말을 건네는 보시입니다.
셋째는 심시(心施),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보시입니다.
넷째는 안시(眼施), 다정하고 친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보시입니다.
다섯째는 신시(身施), 몸으로 도와주는 보시입니다.
여섯째는 좌시(座施), 자리를 양보하는 보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는 방시(房施), 편안한 쉼터를 제공하는 보시입니다.
이 중 우리가 돈 한 푼 들리지 않고도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소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외로운 이웃에게는 천금보다 귀한 보시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홀로 계신 어르신들께서는 이웃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 하나 건네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미 무주상보시의 꽃이 피어나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복은 절대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움켜진 것을 놓아주는 순간, 텅 빈 공간으로 새로운 복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치 강물이 끊임없이 흘러야 맑음을 유지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끊임없이 베풀고 놓아줄 때 비로소 맑고 투명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오늘 하루 대가를 바라고 행했던 일이 있는지 조용히 떠올려 보십시오. 누군가에게 베풀고도 혹시 마음속으로 '언젠가 나에게 돌아오겠지' 하고 기대했던 순간은 없었습니까? 그때 여러분의 마음은 혹시 움켜진 손처럼 불안하고 조급하지는 않았나요? 이제 그 마음속에 손을 활짝 펴보십시오. 내가 베풀었던 모든 것, 심지어 복받고 싶다는 그 마음까지도 다 흘려보내세요. 텅 빈 그 손 안에 진정한 평화와 풍요가 깃들게 될 것입니다. 마치 가을 하늘이 온 세상을 비워내어 더 깊고 넓어 보이듯이, 우리의 마음도 비워낼 때 비로소 무한한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보살은 마땅히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나는 복이 없어', '나는 가난해'라고 여기거나, 반대로 '나는 더 큰 복을 원해'라고 탐욕스러운 마음을 품을 때, 이 두 가지 마음 모두 우리를 괴롭힙니다. 마치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결핍감과 탐욕은 우리 마음의 평화를 집어삼킵니다. '나는 복이 없어'라는 생각은 우리를 과거의 불행에 묶어두고, '나는 복을 원해'라는 생각은 우리를 미래의 불확실성에 매달리게 합니다. 어느 쪽이든 현재의 순간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게 만드는 덫이 됩니다.
우리 마음은 마치 물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나는 복이 없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이미 결핍이라는 돌멩이로 가득 차 있는 그릇입니다. 돌멩이로 가득 찬 그릇에는 새로운 물을 담을 공간이 없습니다. '나는 더 큰 복을 원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이미 탐욕이라는 흙탕물로 가득 찬 그릇입니다. 흙탕물 가득한 그릇에 어떻게 맑고 깨끗한 물이 새로 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이미 결핍이나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어떤 복도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결핍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맑고 깨끗한 복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가뭄에 갈증나는 땅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려 하지만 채울수록 오히려 더 목마름을 느끼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복덕에 머물지 않는 마음이란 이 그릇을 텅 비우는 지혜입니다. '나는 복이 없다'는 생각도 내려놓고, '나는 복을 원한다'는 생각마저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마음을 모두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 그릇은 텅 비게 되고, 텅 빈 그릇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작은 차 한 잔만큼의 복만 담는 것이 아니라, 허공처럼 텅 비어 허공만큼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복을 담을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마치 비워진 잔에 차를 따를 수 있듯이, 마음이 텅 비워질 때 비로소 진정한 풍요가 차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복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얻어집니다. 우리가 복을 원한다는 그 생각에 머무르지 않을 때, 우리는 이미 헤아릴 수 없는 복을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큰 안도감을 줍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쫓거나 없는 것을 한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마음을 비우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이 비움의 지혜는 조계종의 선(禪)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선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불리원초(不離元初)"라 하여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하여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본성을 깨닫게 합니다. 여기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이라는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 미래의 예측, 현재의 감각.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현상일 뿐임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에 붙잡히지 않는 훈련입니다.
예를 들어, 홀로 사는 어르신들께서 종종 외롭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실 때가 많습니다. 이 외롭다는 생각은 하나의 마음의 형상입니다. 이 형상에 머무르면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아, 지금 내 마음에 외로움이라는 생각이 떠올랐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흘려보내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하늘의 구름이 떠다니듯, 생각도 그렇게 떠다니는 것일 뿐 나의 본질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 그릇을 비우는 첫걸음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은 단순히 욕심을 없애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본래 모습을 되찾는 적극적인 과정입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원래 텅 비어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고,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공간과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청정본심(淸淨本心)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청정본심은 이미 모든 복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집착이라는 흙탕물로 그 마음을 가려 놓았기 때문에 본래의 복덕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당신의 마음 그릇을 조용히 들여다 보십시오. 지금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나는 복이 없어'라는 결핍감입니까? 아니면 '나는 더 많이 가져야 해'라는 탐욕입니까? 이제 숨을 내쉴 때마다 그릇이 텅 비워진다고 상상해 보세요. 결핍의 돌멩이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탐욕의 흙탕물이 맑아져 투명해지는 것을 느껴보십시오. 깨끗하게 비어진 당신의 마음 그릇에 온 우주의 맑고 순수한 복이 저절로 가득 차오릅니다. 이는 마치 비온 뒤 맑게 갠 햇빛을 반사하는 산사의 마당처럼,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게 청정해질 수 있습니다.
"만약 보살이 복덕에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이하여 헤아릴 수 없다." 우리가 복을 짓고도 그 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분명 좋은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려움에 처하거나 마음이 평안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내가 베푼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이만큼 베풀었다'는 생각이 오히려 복이 들어오는 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마치 자물쇠를 걸어 잠근 문처럼, 그 생각은 복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아 버립니다.
우리가 베풀 때 마음속에 '나'라는 주체가 너무 강하게 자리 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깨달음을 줍니다. 보살의 경지에 이른다고 알려진 수행자조차도 '나'라는 아집에 사로잡히면 진정한 보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은 복이 드나드는 통로에 세워진 거대한 대문과 같습니다.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대문은 '나'라는 좁은 크기로 한정됩니다. 그래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복도 '나'라는 대문 크기만큼으로 줄어들고 맙니다. '나'라는 대문이 좁아지면 복이 들어올 통로도 함께 좁아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베풀었다고 생각하면, 저 사람이 갚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따라붙습니다. 불쌍한 중생에게 베풀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는 오만함이 마음속에 스며들기도 합니다. 이 모든 '나', '남', '중생'이라는 생각들은 복의 자유로운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우리가 홀로 지내다 보면 종종 '내가 이만큼이나 희생했는데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까?', '자식들에게 이만큼이나 해 줬는데 왜 나를 돌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나'라는 생각에 갇힌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하지만 '나'라는 생각 없이 그저 베풀 뿐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라는 대문은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은 허공처럼 끝없이 열리게 됩니다. 대문이 없으니 복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 우주의 복덕이 아무런 걸림 없이, 아무런 한계 없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나'라는 작은 그릇을 우주라는 무한한 그릇으로 바꾸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했다는 마음을 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우주 전체의 복을 받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거울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저 비출 뿐이지만 온 세상을 그 안에 담아내듯이, 우리의 마음도 '나'를 비울 때 무한한 가능성을 품게 됩니다. 이 '나'라는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 애씁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나'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임시적인 조합일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오온(五蘊)이라는 물질적, 정신적 요소들의 일시적인 결합일 뿐, 영원불변한 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나'라는 실체가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대문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스님이 되기 전 속세에서 살 때는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 했었습니다. 돈, 명예, 사랑. 이 모든 것을 움켜쥐려 했죠. 하지만 움켜지려 할수록 불안감은 더 커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움켜지려 했던 것들은 사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것들은 잠시 내 곁에 머물렀다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는 것을요. 이 깨달음 이후 저는 조금씩 '나'라는 대문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베풀 때는 내가 베푼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때는 내가 받는다는 감사함에 머무르되,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기 시작하자 이상하게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적어지니 실망할 일도 적어졌고, 나를 내세우지 않으니 남들과의 갈등도 줄어들었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다가왔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마치 열린 문으로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듯, '나'라는 대문이 허물어지자 복덕도 자유롭게 드나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오늘 하루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 혹은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일을 조용히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문장 속에서 '나'라는 주어를 지워 보세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는 대문이 활짝 열리고 온 우주의 복이 당신에게로 아무런 걸림 없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무한한 복을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다." 우리는 돈, 재산, 명예를 실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그것을 잃을까 봐 매일 밤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 집착은 더욱 강해지곤 합니다. 쌓은 재물이 한 순간에 사라질까 봐, 젊은 시절의 명예가 퇴색될까 봐, 심지어 내 몸의 건강마저 잃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썩은 동아줄을 잡고 위태롭게 절벽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금강경은 이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허망한 현상일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현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이 말씀은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죽비와 같습니다. 우리가 재물이라고 집착하는 그것은 손바닥 위의 물과 같습니다. 손바닥에 맑은 물을 담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잠시 내 손에 머물러 있는 것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손가락에 힘을 주어 움켜쥐는 순간, 물은 손가락 사이로 더 빨리 빠져나가 버리고 맙니다.
돈도, 명예도, 건강도 모두 이 손바닥 위의 물과 같습니다. 그것들은 본래 내 것이 아니라 잠시 인연이 되어 내 손에 머물러 있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경험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으려 애쓰는 것처럼, 우리는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 했으며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통장 잔고, 여러분의 집, 여러분의 차, 심지어 여러분의 몸까지도 사실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저 당신이 잠시 경험하고 있는 현상일 뿐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를 잊고 '이것은 영원히 내 것이어야 해'라고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흘러가 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불안의 노예가 됩니다. 마치 텅 빈 항아리를 채우려다 결국 항아리마저 깨뜨리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본래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임을, 언젠가는 흩어질 물거품임을 꿰뚫어 볼 때, 우리는 움켜진 손을 펴고 그것이 머무는 동안 감사히 경험하며 흘러가더라도 담담히 흘려보내는 자유를 얻습니다. 이 자유로운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장 큰 복입니다.
이 가르침은 한국 선불교회의 중요한 정신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선에서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공(空)하다고 봅니다. 공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인연에 따라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지, 영원 불변한 것은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생각, 감정, 육체, 그리고 우리가 소유했다고 여기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를 것이 없음을 알게 되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행해 오면서 제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바로 이 공의 지혜였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명예를 쫓아다녔습니다. 학위를 받고 인정받으려 했었죠. 하지만 명예는 마치 물거품처럼 한 순간에 사라지거나, 또 다른 경쟁과 질투를 불러일킬 뿐이었습니다. 재물을 얻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돈이 생기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돈을 잃을까 봐 더 큰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날 새벽, 홀로 앉아 좌선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움켜쥐려 했던 것들이 과연 진짜였을까? 내가 행복하다고 여겼던 순간들은 무엇에 기반한 것이었을까?'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명예도, 재물도, 심지어 '나'라고 여기는 이 몸뚱아리도 모두 잠시 인연 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요. 실체가 없으니 애초에 이를 것도 얻을 것도 없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저에게 엄청난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어깨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더 이상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고,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복은 외부의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마음 그 자체에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당신이 잃어버릴까 봐 가장 걱정하는 그것을 손바닥 위의 물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혹시 당신은 그것을 꽉 움켜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손가락의 힘을 스르르 풀어 보세요. 손바닥을 편안히 펴세요. 그것이 잠시 머무는 동안 감사하고, 흘러가더라도 괜찮다고, 나는 자유롭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하십시오. 이 연습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은 가벼워지고 진정한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현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
우리의 마음은 돈 걱정, 미래 걱정, 외로움 걱정에 꽉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걱정들이 한번 붙들면 좀처럼 떠나질 않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걱정만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라지만, 마음은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에 대한 걱정, 자식들에 대한 걱정, 홀로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걱정들이 우리 삶의 기쁨마저 앗아가 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금강경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답을 제시합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우리의 마음은 깨끗한 거울과 같습니다. 복이든, 재물이든, 걱정이든, 슬픔이든 그것들은 그저 거울 앞을 지나가는 풍경일 뿐입니다. 거울은 풍경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만, 그 풍경에 들러붙어 붙잡아두지 않습니다. 풍경이 지나가면 거울은 그저 텅 비고 깨끗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이라는 풍경이 지나가면 그 풍경이 거울에 들러붙기를 바랍니다. '이 돈이 영원히 내 것이기를' 하고 집착합니다. 반대로 걱정이라는 풍경이 지나가면 그 풍경이 거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아 괴로워합니다. '이 걱정이 사라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전전긍긍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거울의 본성을 잊고 풍경에 사로잡혀 고통을 자초합니다.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의 감정에 깊이 몰입하여 울고 웃는 것과 같습니다. 드라마가 허구임을 알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처럼 느끼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죠.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은 이 거울의 본성을 회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거울은 황금도 비추고 쓰레기도 비춥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붙잡아두지 않습니다. 풍경이 지나가면 거울은 그저 텅 비고 깨끗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복이 오면 오는 대로 감사히 비추되 머무르지 말고, 걱정이 오면 오는 대로 그저 비추되 머무르지 말고 흘려 보내십시오. 걱정이 없는 마음이 복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 머무르지 못하는 마음, 그 텅 비고 깨끗한 거울 자체가 바로 복을 담는 진짜 그릇입니다. 그 깨끗한 거울에 복은 저절로 와서 비춰집니다.
이 머무름 없는 마음은 한국 불교의 핵심 수행인 간화선(看話禪)에서도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간화선은 화두(話頭)라는 의심 덩어리를 들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수행법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두에 대한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들고 있는 '나'라는 주체와 화두라는 대상에 머무르지 않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즉,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의심에 집중하되, 그 의심마저도 놓아 버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마음 거울을 청정하게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조계산 송광사에서 수행할 때, 어느 날 한 노스님께서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자네,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저는 솔직하게 그날 저녁 공양에 나올 된장찌개가 너무나 먹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스님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 된장찌개의 맛을 미리 그려보고 있구나. 하지만 그 맛은 지금 여기에 없느니라. 내 마음이 그 맛에 머무르기에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내 마음이 된장찌개 맛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저 하나의 생각일 뿐이니라." 그때 저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과 즐거움은 사실 외부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그것에 머무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임을요.
외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외롭다'는 생각에 마음이 머무르기 때문에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증폭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에 외로움이라는 풍경이 지나가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 풍경에 머무르지 않고 흘려보낼 수 있다면, 외로움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마치 강가의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뿌리는 국건히 대지에 박혀 있듯이, 우리 마음도 세상의 풍경에 흔들릴지언정 본래의 청정함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당신의 마음을 깨끗한 거울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하루 당신을 괴롭혔던 그 돈 걱정, 사람 걱정, 혹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풍경이 되어 거울 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것들을 붙잡지 마세요. 거울에 묻히지 않게 하세요. 그저 비추고 흘려보내세요. 당신의 본래 마음은 그 걱정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비추는 텅 빈 거울입니다. 그 텅 빈 거울이야말로 진정한 복을 담는 그릇임을 잊지 마십시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우리는 재물을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혹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더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가족과의 시간, 자신의 건강, 마음의 평화까지도 돈을 위해 내어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세속적인 가치관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3천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 보시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경전에 네 구절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에게 설해 준다면, 그 복이 저보다 훨씬 수승하리라."
부처님께서는 재물보다 지혜의 복이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3천대천 세계는 광대 무변한 우주를 의미하며, 칠보는 세상의 모든 갑진 보석들을 뜻합니다. 즉, 온 우주의 보물로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의 짧은 네 구절을 배우고 남에게 전해 주는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는 파격적인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고기를 주는 것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의 비유와 같습니다. 칠보로 보시하는 것은 굶주린 사람에게 한 끼의 고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장의 배고픔은 해결해 주지만, 그 사람은 내일이면 또다시 굶주리게 됩니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허망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주어도 그 사람의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젊은 시절 불을 쌓아 놓아도 늙어 홀로 남겨지면 그 돈이 마음의 외로움을 채워주지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금강경의 지혜를 전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영원히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지혜란 무엇입니까? 집착이 고통의 원인임을 알고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지혜를 깨달은 사람은 재물이 있든 없든,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행복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마치 강태공이 낚싯대 하나로 천하를 낚았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평화와 만족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돈 걱정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재테크는 돈을 쫓는 것이 아니라, 돈에 머무르지 않는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 지혜 자체가 바로 가장 큰 재산이며,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진짜 복입니다. 이 지혜에는 도둑 맞을 염려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쓸려갈 걱정도 없습니다. 오직 내 마음에 새겨지는 영원한 보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온 우주의 칠보보다 더 큰 복을 짓고 있는 순간입니다. 이 금강경의 가르침은 물질적인 가치만을 쫓던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 줍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 때, 이 지혜는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어 줄 것입니다.
제가 수행하던 시절, 주변에 수많은 어르신 신도분들이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평생을 고생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자식들 간의 유산 다툼으로 말년에 큰 고통을 겪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항상 맑고 따뜻한 미소로 주의 사람들을 대하며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평안하게 지내셨습니다. 이 두 분의 모습을 통해 저는 부처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진실한지 몸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재물은 잠시의 풍요를 줄 수 있지만, 마음의 지혜는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특히 홀로 계신 어르신들께서 이 지혜를 얻으신다면, 더 이상 재물 걱정이나 외로움에 갇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지혜로 가득 차면, 주변의 작은 인연들도 소중하게 느껴지고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네 구절의 지혜는 단순히 경전을 외우는 것을 넘어, 그 가르침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번의 따뜻한 미소, 한마디의 격려하는 말, 작은 봉사 하나하나가 모두 이 지혜를 나누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돈만 있으면 행복할 텐데 하고 바랐던 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은 마치 굶주린 사람이 한 끼의 고기를 구하는 마음과 같았습니다. 이제 그 마음 대신, 돈이 있든 없든 흔들리지 않는 지혜를 구하겠다고 다짐해 보세요. 지금 이 경전을 듣는 당신은 이미 최고의 재산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혜의 재산은 그 어떤 도둑도 빼앗아갈 수 없으며, 여러분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이 경전에 네 구절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에게 설해 준다면, 그 복이 칠보로 보시한 복보다 훨씬 수승하리라."
우리의 재물 걱정은 늘 시간 속에 있습니다. 과거에 돈을 잃었던 후회, 미래에 가난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우리는 단 한 번도 지금 여기에서 완전히 풍요롭지 못합니다. 과거의 통장을 들여다보며 후회하고, 미래의 통장을 상상하며 불안해합니다. 현재의 통장에 돈이 많다 해도, 이 돈이 사라짐을 어쩌나 하는 걱정이 사로잡힙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혀 현재의 행복을 놓치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이 시간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이 말씀은 시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통찰하게 합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가난과 부자라는 개념은 사실 붙잡을 수 없는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과거의 가난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이미 흘러간 강물입니다. 우리는 이미 바다로 흘러가 버린 그 실패의 기억을 붙잡고 지금 이 순간까지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과거심 불가득(過去心不可得), 고추심 불가득(故秋心不可得)."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가 버려 붙잡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들께서 종종 "내가 왕년에 말이야" 하며 과거의 영광을 이야기하거나, "그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과거에 머무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미래의 가난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오지 않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파산을 상상하며 그 신기루를 피하려다 지금의 삶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미래심 불가득(未來心不可得), 외신 불가득(外心不可得)."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붙잡을 수 없습니다. "마무나 미래심 불가득(마무나 미래심 불가득)." 우리는 내일 일어날 일도 모르면서 지레짐작으로 걱정과 불안을 키워 현재의 평화를 앗아가 갑니다. 홀로 지내시다 보면 '나중에 몸이라도 아프면 누가 돌봐 줄까?', '지금 가진 돈 다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미래의 마음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지금 통장에 15억 원이 있다 해도, '아, 나는 부자다' 하고 그 마음에 머무르는 순간, 그 마음은 이미 과거가 되어 사라집니다. "현재심 불가득(現在心不可得), 견제심 불가득(見在心不可得)." 지금 이 마음조차 머무르지 않고 흘러가니 붙잡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는 생각도 그 말을 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됩니다. 모든 순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갈 뿐, 영원히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어떤 마음도 실체로서 붙잡을 수 없습니다. 시간은 마치 멈추지 않고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한 순간도 붙잡아둘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붙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편안히 숨 쉬고 있음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짜 부자가 되는 길이며, 진정한 풍요입니다.
이 가르침은 한국 선불교회의 현재 불견자포(不見自布) 사상과도 통합니다. 과거의 부처님도, 미래의 부처님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나'가 부처님과 같은 마음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자 행복입니다.
홀로 계신 어르신들께서는 종종 과거의 인연을 그리워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제가 수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시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언젠가 깨달음을 얻어 스님이 되어야지' 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고, 수행 중 작은 실수라도 하면 과거에 자신을 질책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노스님께서는 항상 저에게 "이 복아, 불목하니 지금 바로 공양에 집중하게. 밥 한 톨 한 톨에 우주의 진리가 담겨 있거늘 내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는가?"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밥, 지금 걷고 있는 길, 지금 하고 있는 수행이 모든 것이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임을 깨닫게 된 것이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고, 걸을 때는 발이 땅에 닿는 감각에만 집중하고, 숨 쉴 때는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여기에 몰입할 때,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은 저절로 사라지고 우리 마음속에 평화로운 고요함이 찾아옵니다. 이 고요함이야말로 그 어떤 재물과도 바꿀 수 없는 진정한 부입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당신의 과거 통장과 미래 통장을 조용히 덮어 버리세요. 그 숫자는 모두 허상입니다. 이제 오직 현재 통장을 바라보세요. 그곳에는 지금 이 순간의 편안한 호흡이라는 무한한 재산이 있습니다. 이 숨이야말로 당신의 진짜 재산임을 느끼며 편안히 잠드십시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이 진리가 여러분의 마음을 평화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처님을 복을 주는 존재로 오해합니다. 부처님 상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돈벼락 맞게 해 주세요. 로또 당첨되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빕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처님을 원망하거나 실망하곤 합니다. 마치 부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산타클로스라도 되는 양 말입니다. 하지만 금강경은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깨뜨립니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이것은 금강경의 가장 파격적인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여래의 루라인(如來의 樓欄)은 부처님을 의미합니다. 즉, 부처를 형상에서 찾거나 음성에서 찾는 것은 삿된 길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이는 식당의 메뉴판을 음식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상이나 경전은 우리를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메뉴판입니다. 깨달음이란 집착에서 벗어난 평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메뉴판을 붙들고 "배부르게 해 주세요"라고 비는 꼴입니다. 아무리 메뉴판을 붙잡고 흔들어도 배가 불러오지는 않습니다. 직접 음식을 먹어야 배가 부르듯이, 직접 집착에서 벗어나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는 밖에서
복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복은 내 마음이 집착해 벗어날 때 저절로 솟아나는 평화입니다. 부처는 그 평화로운 마음의 본성을 부르는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밖에서 복을 구하는 마음을 멈추고 내 마음이 본래 부처이며 복 그 자체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밖에서 복을 찾지 않게 됩니다. 그 평화 자체가 가장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외부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며 스스로 존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한국 불교에서 부처가 되라는 말은 단순히 죽어서 부처님 곁으로 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이 자리에서 부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성불 정이란 우리의 마음이 본래 지니고 있는 청정한 불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마음속에 부처님의 씨앗 즉 불성 포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집착과 번뇌라는 먼지로 그 빛이 가져 있을 뿐이죠. 마치 연못 속에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우리의 번뇌 속에서도 불성은 언제나 빛나고 있습니다.
제가 출가하기 전 한참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어느 노스님을 찾아가 스님, 저는 왜 이렇게 괴로울까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저의 손을 잡고 조용히 눈을 감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목하니 네가 찾는 부처는 저기 불쌍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또한 누군가의 말속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니라. 네가 괴로움을 느끼는 바로 그 마음 그 마음의 본성이 바로 부처이라.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라.
스님께서는 제가 괴로움을 느끼는 바로 그 마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저에게 큰 충격과 함께 깊은 위안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행복과 평화를 얻기 위해 밖으로만 헤매고 다녔는데 정작 그 모든 것은 내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외부의 조건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추고 내 마음을 비추고 다스리는 수행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홀로 계신 어르신들께서도 종종 누군가 나를 돌봐 주었으면은 자식들이 찾아와 주었으면 하고 외부에서 행복을 찾으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과의 교류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기대와 실망이 반복된다면 그것 또한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이제 외부를 향해 빌던 그 마음을 잠시 거두어 드리십시오. 진정한 복과 평안은 지금이 순간이 말씀을 알아차리고 있는 여러분의 고요한 마음 안에 이미 존재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바로 복의 근원입니다.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무엇을 해 달라고 밖을 향해 빌었던 그 마음을 거두어 드리세요. 당신이 찾던 그 복과 평안은 지금이 순간이 말씀을 알아차리고 있는 당신의 고요한 마음 안에 이미 존재합니다. 당신 자신이 바로 복의 근원입니다. 밖에서 찾지 마세요.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열래를 볼 수 없으리라. 우리는 복, 재물, 가나안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마치 나는 복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가난해라는 이름표를 스스로에게 붙이고 그 이름표대로 살아갑니다.이 이름표가 우리 삶을 규정하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나이가 들수록이 이름표는 더 경고해지고 우리의 정체성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나는 노인이야. 나는 외로운 사람이야. 나는 병든 사람이야. 이런 이름표들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며 본래의 밝은 모습을 가려 버립니다.
하지만 금강경은이 모든 이름표가 실체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이른바 복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복덕이 아니며 그것을 그저 복덕이라고 이름 붙일 뿐이다. 우리가 복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이름표일 뿐입니다.이는 이는 부자라는 명찰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원히 행복한 부자라는 실체가 됩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저 부자라고 불리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 명찰을 언제든 뗄 수 있고 그 명찰을 달고도 그는 여전히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가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가난해라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붙인 이름표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표를 나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받습니다. 나는 가난하다는 이름 교회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치 연극 배우가 자신의 역할에 너무 몰입하여 연극이 끝난 후에도 그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금강경은 그 이름표를 떼어내라고 말합니다. 복이라는 이름표에 집착하지도 말고 가난이라는 이름표에 절망하지도 마십시오. 당신은 그 어떤 이름표로도 규정할 수 없는 그 이름표가 붙기 이전에 텅비이고 순수한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름표에 머무르지 않을 때 당신은 진정 자유롭고 풍요롭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모든 판단과 규정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조개종의 선사상에서는 본래 면목, 본의 면모이라는 개념을 중요시 합니다.이는 이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본래의 모습을 의미하며 모든 이름표와 개념이 붙기 이전에 순수하고 청정한 자성을 뜻합니다.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참고하는 것도 결국이 본래 면목을 찾기 위함입니다. 나는 스님이다. 나는 남자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늙었다. 나는 외롭다.이 이 모든 것이 후천적으로 붙여진 이름표일뿐 나의 본래의 면목은 그 어떤 이름표로도 규정할 수 없는 텅빈 자유 그 자체입니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노스님께 물었습니다. 스님, 저는 아직도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롭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스님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음악] 나라는 이름표를 벗어던지게 그 이름표가 너를 괴롭히는 것이지. 네. 본래의 모습은 괴로움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름표가 붙기 이전에 너를 찾아보게 그 말씀은 저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모든 개념과 이름표가 사실은 우리를 옥제는 감옥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오늘 하루 당신을 괴롭혔던 그 이름표들을 떠올려 보세요. 나는 가난해. 나는 실패했어. 나는 복이 없어. 나는 외로워. 이제 그 이름표들을 하나씩 떼어낸다고 상상해 보세요. 거울 속에 나에게 붙어 있던 모든 이름표를 힘껏 떼어내어 바람에 날려 보내십시오. 이름표가 사라진 당신, 텅빈 당신은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그 자유 속에서 편안히 쉬세요.
이른바 복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복덕이 아니며 그것을 그저 복덕이라고 이름 부치뿐이다. 우리는 내가 보시했다는 기억에 집착합니다. 과거에 내가 했던 선행을 되새기며 뿌듯해하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아무게 보살이 저 사람을 도와줬대. 아무게 거사가 절에 시주를 많이 했대 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랑스러운 마음이 오히려 복을 가로막습니다. 마치 잘 차려놓은 밥상에 파리가 앉아 밥상을 더럽히듯이 내가 했다는 마음은 보시의 순수함을 더럽힙니다.
보살은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이 이 가르침은 앞서 배운 형상에 머무리지 않는 보시와 일맥상통합니다. 보시를 행하고 나서 내가 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그것은 더 이상 무주한 곳이가 아닙니다. 머무음 없는 보시는 태양과 같습니다. 태양은이 세상을 향해 빛과 열을 아낌없이 베니다. 산도 비추고 바다도 비추고 잘 사는 사람도 비추고 가난한 사람도 비춥니다. 하지만 태양이 내가 오늘 너에게 빛을 주었다고 생색을 냅니까? 너는 내 빛을 받았으니 나에게 감사해야 해라고 장부를 적어둡니까? 나는 착한 사람에게만 비출 거야 하고 차별합니까? 아닙니다. 태양은 그저 존재 자체로 빛을 발산할뿐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이 말하는 무주상보시의 완성입니다.
우리의 보시가 장사가 되지 않으려면이 태양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저 베풀고 잊어버리십시오. 오른손의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베푼 후에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잊어버림 속에서 우리의 복은 태양처럼 무한해집니다. 내가 했다는 마음이 사라진 텅빈 그 자리에 헤아릴 수 없는 복이 저절로 기듭니다.
이 태양과 같은 마음은 조개종의 종조인 도이국사 다이고 씨가 강조했던 무의무회의 정신과도 통합니다. 무의란 억지로 애쓰거나 인위적인 자기를 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보시를 할 때 내가 복을 받아야지 하는 의도를 가지고 애하면 그것은 이미 무의가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런 기대나 목적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베풀면은 그것 자체가 이미 무한한 복을 낳는 무의 행위가 됩니다. 마치 숲 나무가 아무런 의도 없이 산소를 내뿜듯이 우리의 배단도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제가 어린 행자 시절 절 마당을 쓸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쓸었으니 스님들이 나를 칭찬해 주시겠지 하는 기대를 품권했습니다. 그러다 칭찬을 받으면 뿌듯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은 서운했습니다. 어느 날 큰스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는 저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불목하니 자네는 마당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네 마음을 쓸고 있구나. 마당을 깨끗이 하는 행위 자체에 만족해야지 남의 칭찬을 바라면 그 공덕은 눈녹이 사라지느니라. 태양은 칭찬을 바라지 않고 빛을 주지 않느냐? 그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마당을 쓰든 공양 준비를 하든 그저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고 내가 했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훨씬 평안해졌고 힘든 노동도 더 이상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행위 속에서 오는 작은 [음악] 기쁨과 평화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홀로 계시더라도 주변에 누군가에게 작은 선행을 베풀 기회가 있다면 내가 했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태양처럼 베풀어 보십시오. 그 마음이 여러분에게 진정한 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내가 오늘 이만큼 잘했어 뿌듯해하던 마음 혹은 왜 나만 베풀어야 해 하고 억울했던 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제 그 모든 마음의 장부를 찢어버리세요. 당신은 태양입니다. 그저 빛을 비출뿐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 넉넉하고 따뜻한 태양의 마음으로 잠드세요.
보살은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재물, 돈, 빚이라는 현실이 너무나 무겁고 실제적이어서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이 좀처럼 와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일 당장 갚아야 할 빛이 산덤인데 이게 어떻게 꾸이냐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이 현실의 무게는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은퇴후 줄어든 수입, 감당하기 어려운 병원비,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오는 채무 등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이 모든 것이 꿈과 같다는 가르침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금강정은이 모든 것을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거품과 그림자 같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현상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거품과 그림자 같으니라.이는 악몽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꿈속에서 100억원에 빚을 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꿈속에서 당신은 빚쟁이에게 쫓기고 절망하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합니다. 그 고통은 100% 진짜입니다. 심장이 뛰고 식은땀도 흐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아 꿈이었구나 하고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 100억 원의 빛과 빚쟁이 그리고 절망은 어떻게 됩니까? 눈 녹듯 사라집니다. 실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굳게 믿고 집착하는이 돈 걱정과 빚이 사실은 깨어나지 못한 긴 꿈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꿈임을 알아차지는 순간 우리는 그 꿈의 노예가 되는 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꿈속에서 빛을 갚으려 발둥치는 대신 깨어나려는 노력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의 빚은 갚아야 합니다. 하지만 빚이라는 현실의 걱정이라는 꿈을 더해 스스로를 지옥에 가두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그 고통스러운 걱정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알람소리와 같습니다.이 이 현상은 꿈과 같다는 가르침은 단순히 현실을 외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허망하고 임시적인지를 깨닫게 하여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는 지혜입니다. 한국 불교의 선사들은 종종 1일장 춘몽,이자 춘몽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한파 꿈과 같은 인생이라는 의미이죠. 조선 시대 대선사였던 서산 대사는 인생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며 한 조각 구름이 흩어짐이다라고 했습니다.이 모든 것이 실체가 없이 연기 웬치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임을 통찰하는 [음악] 것입니다.
제가 수행하던 시절 한 노보사님께서 절에 찾아와 통곡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사기당에 한 순간에 다 잃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절망스러워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고 하셨죠. 저는 그 보살님의 손을 잡고 조용히 금강경에이 구절을 들려 드렸습니다. 보살님, 지금 보살님이 겪는 고통이 진짜가 아닐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재물도 그 재물을 잃었다는 사실도 마치 꿈속에 이루갔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사라지듯이이 고통의 꿈에서도 깨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시던 보살님께서는 매일밤이 금강경 구절을 대내며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몇 달 후 다시 저를 찾아오셨을 때 그 보살님은 얼굴에 놀라운 평화를 찾고 계셨습니다. 스님, 정말 신기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외우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잠들기 전 아,이 모든 걱정은 꿈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빚은 아직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빛 때문에 스스로를 지옥에 가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금강경의 지혜는 우리에게 현실의 고통을 무시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칩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현실의 어려움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 거리를 두는 순간 우리는 고통의 노예가 아니라 고통을 관찰하는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당신을 짓누르는 그 돈 걱정, 건강 걱정, 외로움 걱정을 떠올려 보세요. 그것이 악몽 속에 빚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꿈속에서는 그토록 절망적이었지만 지금 이불 속에 편안이 누워 있는 당신은 안전합니다. 그 꿈에서 한걸음은 물러나 그저 알아차리는 자가 되어 보세요. 아, 내가 지금 돈 걱정이라는 꿈을 꾸고 있구나.
모든 현상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거품과 그림자 같으니라. 무주상보씨가 복이 크다는 것은 알겠지만 나는 당장 나눌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가난한 나는 복을 지을 수 없습니까? 하고 절망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특히 홀로 지내시는 어르신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남에게 베풀 수도 없고 그러니 복을 지을 기회도 없겠구나 하고 스스로를 한탄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까지도 헤아리셨습니다. 만약 보살이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은 그 복덕은 가의 헤아릴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재물로 하는 보호시만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불교에서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지을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를 말합니다.이를 무제칠시 무사이 지시라고 합니다.
첫째는 화한시허 강수입니다. 따뜻한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얼굴에 화사하고 편안한 미소를 뛰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기쁨과 위안을 줍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습니다.
둘째는 언시입니다. 사랑이 담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격려의 말, 위로의 말, 칭찬의 말, 진심으로 공감하는 말 한 마디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특히 외로운 분들께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큰 힘이 됩니다.
셋째는 심시신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비록 물질적으로 도울 수 없어도 상대를 염려하고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은 그 어떤 선물보다 갑집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함께 공감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보입니다.
넷째는 안시엔스입니다. 친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그저 따뜻하고 자비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처받은 영혼에게는 큰 치유가 됩니다.
다섯째는 신시스입니다. 몸으로 돕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 주거나 어르신들께 자리 양보를 해 드리거나 작지만 누군가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행위입니다.
여섯째는 좌시 조서입니다. 자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대중통에서 혹은 강연장에서 자신보다 약하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작은 행위지만 큰 덕을 쌓는 보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는 방시 방스입니다. 편안한 쉼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이는 반드시 크고 넓은 집을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상대를 위해 편안한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 혹은 작은 쉼터라도 함께 나누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일곱 가지 보시는 돈 한 푼 드리지 않고도 우리가 매일매일 실천할 수 있는 봇입니다. 복은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마음으로 짓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복을 못 짓는 것이 아니라 베풀려는 마음이 없어서 복을 못 짓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에 머물러서 스스로 복 짓는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에 갇혀 있으면 우리는 스스로 복을 지을 기회마저 놓치게 됩니다. 마치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을 눈앞에 두고도 나는 물이 없어라고 한탄하며 목마음에 시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무죄 칠시는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만 있다면은 얼마든지 복을 지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특히 홀로 계신 어르신들께서 이웃이나 사회와 단절되어 외로움을 느끼실 때이 작은 보시들은 여러분을 세상과 다시 연결해 주는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미소 하나, 격려의 말 한 마디를 건네는 작은 실천을 통해 여러분은 세상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다시 여러분에게로 돌아와 마음의 풍요로움을 안겨 줄 것입니다.이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긍정적 외부 효과 엑널리티와도 비슷합니다. 내가 좋은 에너지를 발산하면 그 에너지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결국 나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부처님의 가르침은 수천년 전의 것이지만 현대 사회의 심리학이나 경제학에서도 그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절 주변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고 누가 말을 걸어도 잘 웃지 않으셨죠. 저는 그 할머니를 볼 때마다 어떻게 하면 할머니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마당을 쓸다가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빙긋이 미소지어 드렸습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투명스럽게 고개를 돌리셨지만 며칠 뒤 제가 또 미소를 건네자 아주 희미하게 남아 마주 웃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미소보시를 이어갔습니다. 한 달쯤 지나자 할머니는 제가 마당을 쓸 때면 곁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시거나 먼저 젊은 스님 오늘 날씨 참 좋지하고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직접 끓인죽을 가져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죽 한 그릇에서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느꼈습니다. 제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건낸 미소 보시가 할머니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고 저에게는 따뜻한 공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나는 가진게 없어라는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내일 만나는 첫 번째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 하나를 아무런 대가 없이 베풀겠다고 다짐해 보세요. 돈으로 살 수 없는이 미소 보시가 당신의 복밭을 일구는 가장 위대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피어나는 미소 한송이가 온 세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 우리는이 금강경의 가르침조차 집착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이 경전을 들어야만 복을 받는다.이 이 가르침만이 유일한 진리다라고 집착하며 또 다른 힘의 노예가 됩니다. 마치 깨목을 타고 강을 걷는 후에도 그 땜목을 너무나 고마워하며 등해지고 산을 오르려 하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맨목을 사용한 후 미련 없이 놓아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을 미리 아시고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마땅히 알라. 나의 가르침마저 땜목과 같은 것이 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이랴. 부처님의 가르침은 강을 건너는 폐목과 같습니다. 우리가 재물에 대한 집착, 외로움에 대한 집착,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이쪽 강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집착 없음에 평화라는 저쪽 강가로 건너갈 수 있도록 금강경이라는 훌륭한 땜목을 주셨습니다. 우리는이 맨목을 타고 무사히 강을 건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강을 다 건넜음에도 불구하고이 땜목이 너무나 고마워서라며 그 무거운 땜목을 등해지고 산을 오르려 합니다. 나는 금강경을 안다는 새로운 아상 오시안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 집착을 버리라고 배웠는데 이제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그 생각에 또다시 집착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목에 걸린 가시를 빼려고 다른 가시를 사용했다가 두 개의 가시가 목에 박힌 것과 같은 어리석음입니다.
금강경은 그 마지막 집착마저 깨뜨리라고 말합니다. 가르침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고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이 가르침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평화로워졌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가르침에 맞아 머무르지 마십시오. 진리는 우리의 머릿속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경험되고 실천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합니다. 강을 걷는 후에는 덴목을 버리고 홀가분하게 나아가듯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면 이제는 그 가르침마저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한국 불교에서는 방착 황시아저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내려놓아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걸까요?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깨달음이나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마저도 내려놓으라는 깊은 가르침입니다.이 금강경의 팀 비유는 바로 방하의 정신과 맞다 있습니다. 우리가 금강경을 알아야 한다. 금강경을 외워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리면은 그것 또한 하나의 집착이 되어 마음의 짐이 됩니다.
제가 젊은 스님 시절 경전 공부에만 매달려 머리가 지근거린 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경전을 외우고 주석을 달고 밤새고 공부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번뇌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스님께서 저를 보시고는 [음악] 빈이 웃으시며 불목하니 그 머릿속 지식만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느니라. 네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그 마음마저도 낸 목과 같으니 이제 그 목을 내려놓고 스스로 강을 건너보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경전 구절들이 마치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비우고 직접 경험하데 있다는 것을요. 그 이후로 저는 경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저 길잡이 삼아 사용하고 때가 되면 기꺼이 놓아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려 했습니다.
여러분도이 근강경의 가르침을 너무 어렵게 붙잡지 마십시오. 그죠? 편안히 듣고 마음속에 울리는 지혜의 목소리를 따라 보세요. 그것이 여러분을 진정한 자유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지금 듣고 있는이 금강경의 가르침조차도 하나의 땜목일 뿐임을 기억하세요.이 가르침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졌다면 몽목은 그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다 알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그저 땜목에 몸을 맡긴 채 편안히 잠드세요. 여러분의 마음은 이미 충분히 지혜롭습니다.
나의 가르침마저 맨목과 같은 것이 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이랴 우리는 복을 돈이나 성공이라는 덧셈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자꾸 더해야만 복이 커진다고 믿습니다. 재산이 늘고 명예가 높아지고 가족이 더 많아져야 행복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은 무언가 더 가지고 있어야 안전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통장 장고가 늘어나고 몸에 좋은 약을 더 많이 챙겨먹고 자식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어야 안심이 된다고 여기죠.
하지만 금강경은 이와 반대의 지혜를 제시합니다.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현상이 현상이 아님을 본다면 금강경이 말하는 복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입니다. 진정한 복은 무엇을 더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에서 더 자유로워졌느냐로 측정됩니다.이는 풍성과 같습니다. 우리는 돈, 명예, 인정이라는 헬륨 가스를 풍선 안에 더 많이 채워야 하늘로 떠오른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허둥되며 풍선 안에 무언가를 채우려 애습니다. 하지만 가스를 채울수록 풍선은 빵빵해져 터질까 봐 전전 긍긍합니다. 작은 바늘 하나에도 터질까 봐 늘 불안에 시달립니다.
금강경의 지혜는 가스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풍선을 묶고 있던 무거운 돌덩이를 빼내는 것입니다. 풍선 안에 가스가 얼마나 들었든 상관없이 집착이라는 돌덩이만 떼어내면 풍선은 본래의 가벼움으로 저절로 하늘로 떠오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집착이라는 돌덩이를 매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이 돌덩이들을 하나씩 내려놓을 때 우리의 마음은 본래의 가벼움과 자유를 되찾습니다. 가장 큰 복은 돈이 아니라 돈 걱정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입니다. 가장 큰 복은 성공이 아니라 성공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가장 큰 복은 바로 평화 그 자체입니다.
이 이 마음의 평화야말로 건강경이 약속하는 헤아릴 수 없는 복덕입니다.이 뺄셈의 지혜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수많은 고통의 무게를 덜어 줍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채우려 애쓰지 않아도 되며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하고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한국 선불교회에서는이 뺄셈의 지혜를 무소유 무소요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이 큰 인기를 얻었던 것도 우리 마음속에 쌓여 있는 소유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 주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필요한만큼만 가지고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란는 뜻입니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이을까 봐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놓아버릴수록 우리는 더 큰 자유를 얻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가진 것이 거의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 마음은 오히려 더 자유로웠습니다.이를 이를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물건들이 하나도씩 생기고 조금씩 재물도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불안감이 다시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이르면 어쩌지? 저것을 지켜야 하는데 하는 걱정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다시 금강경의 뺄셈의 지혜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제 주변의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주변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마음속에 불안감이 줄어들고 다시 예전에 가벼운 마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소유가 줄어들수록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콜로 지내시다 보면은 자꾸만 물건들을 쌓아두려 할 때가 있을 겁니다. 이것저것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려 하죠. 하지만 이제는 그 집착이라는 돌덩이를 하나씩 내려놓을 때니다.
사랑하는 도반 여러분, 잠들기 전 당신의 마음을 묻고 있는 무거운 돌덩이들을 떠올려 보세요. 돈 걱정, 남의 시선, 복에 대한 집착, 자식들에 대한 기대, 혹은 지나간 과거의 후회 이제 그 돌덩이들을 하나씩 빼낸다고 상상해 보세요. 풍선을 묶고 있던 밧줄를 끊어내세요. 당신의 마음 풍선이 얼마나 가볍게 떠오릅니까? 그 본래의 가벼움 속에서 편안히 잠드세요.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현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열래를 보리라. 오늘 우리는 금강경과 함께 복을 부르는 역설적인 지혜를 배웠습니다. 진정한 복은 움켜진 손이 아니라 활짝 편손에서 나오며 나라는 대문을 허물 때 우주만큼 큰 복이 들어옴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던 재물은 손 안에 물과 같았고 꿈속의 빛과 같았으며 돈보다 위대한 제사는 지혜이고 가장 큰 복은 돈 걱정에 머무르지 않는 평화로운 마음 그 자체였습니다.
이 모든 깨달음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이 세상의 가르침에 따라 무언가를 더 채우고 더 많이 소유하며 더 크게 움켜 주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무거워지고 불안과 외로움은 깊어져만 같습니다. 마치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움터에 나선 병사처럼 우리는 스스로 만든 갑옷에 갇혀 자유를 잃었습니다. 이제 그 갑옷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가벼운 몸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이 건강경의 가르침은 비단 불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마음의 평화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등불이 되어 줄 지혜입니다. 특히 홀로 계신 어르신들께서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신다면은 더 이상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평화와 만족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외로움과 불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요하고 충만한 행복이 피어날 것입니다.
제가 수행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도반들과 어르신들은 제게 삶에 많은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세상을 살면서 온갖 풍파를 다 겪으신 분들이 많았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으신 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분들의 얼굴에는 물질적인 풍요에서는 찾을 수 없는 깊은 고요와 자비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한 복덕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거듭 깨달았습니다.
오늘 밤 편안한 잠자리에 드시거든 나는 부족하다는 결핍의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더 가져야 한다는 집착의 돌덩이를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의 본래 마음은 텅비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허공과 같고 집착하지 않아 무엇에도 물들지 않는 거울과 같습니다. 당신은 이미 헤아릴 수 없는 복채입니다. 여러분의 텅빈 마음 안에 온 우주의 복덕이 가득 차오르기를 간절히 발언합니다. 여러분이 들리시는 숨 내시는 숨마다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고요한 평화와 함께이 건강경의 지혜가 깊이 뿌리내리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이 지혜는 여러분이 앞으로 마주할 삶의 모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림없는 등대가 되어줄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듯 느껴질 때마다이 말씀을 기억하며 마음의 빛을 찾으십시오.
제가 오랫동안 수행해 오면서 깨달은 것은 불교의 가르침은 결코 어려운 철학이나 고리타분한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평화를 찾는 실용적인 지혜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마치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맑고 시원하여 우리의 갈증 나는 마음에 한 방울 한 방울 생명수를 뿌려 줍니다. 특히 홀로 계신 어르신들께서는이 말씀을 통해 외로움이라는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스스로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외부의 조건을 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미 모든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씨앗 속에 나무 한구루가 고스란히 담겨 있듯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이미 헤아릴 수 없는 복덕과 무한한 잠재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이 모든 지혜는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작은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그 빛을 바랍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하루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건내고 작은 친절을 베푸십시오. 그리고 잠들기 전 오늘 하루 베풀었던 모든 것을 기꺼이 놓아 버리고 마음을 텅 비우는 연습을 해 보세요. 매일매일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여러분의 삶은 놀랍도록 평화롭고 풍요롭게 변화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스님,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 제가 이런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강경의 지혜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마치 따뜻한 햇살이 얼어붙은 땅을 녹이듯의 말씀은 여러분의 굳게 다친 마음을 부드럽게 열어 줄 것입니다. 그저 편안히 귀기울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울리는 소리에 집중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갑니다. 젊은 시절의 건강과 활력도 쌓아올렸던 재물과 명예도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인연도 모두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진리입니다. 하지만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본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늘 텅 비어 있고 청정하며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순수함 그 자체입니다.이 마음을 발견하고 그 안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탈리자 평화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지금 여기에서이 마음의 평화를 누리십시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을 찾아 헤매던 진정한 행복입니다.
여러분 어떠셨는지요?이 이 긴 시간 동안 제 이야기에 귀울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금강경의 시모한 가르침을 통해 복과 재물에 대한 우리의 오랜 편견을 깨뜨리고 진정한 풍요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깊이 성찰해 보았습니다.이 여정이 여러분의 마음에 작은 위안과 희망을 안겨 주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별핍의 마음을 내려놓고 집착의 돌덩이를 벗어던진 순간 여러분의 마음은 비로소 본래의 청정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 청정한 마음 안에는 온 우주의 복덕이 가득 차오를 것이며 여러분은 더 이상 외롭거나 불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빛을 바라는 태양처럼 주변을 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셨다면 이제 그 평화를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직접 실천해 보십시오. 작은 미소 하나, 따뜻한 말 한 마디,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주상보시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선한 마음이 모여이 영상을 접하는 더 많은 이들이 결핍과 불안 속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마음의 등불을 밝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모여 세상을 조금 더 밝고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이 말씀을 전하며 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미 부처님이 계십니다. 그 부처님을 찾아나서지 마십시오. 그저 마음에 흙탕물 걷어내고 혼래의 맑은 거울을 비추십시오. 그 안에 영원한 평화와 무한한 복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