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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반갑습니다. 김영석입니다.
제가 올해로 백세를 넘기고 보니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가장 어려운 공부는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싸운 지식을 어떻게 하면 겸손하게 숨기느냐는 것이더군요. 오늘 저는 여러분과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자손들 앞에서 현명하게 바보가 되는 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100년 넘는 세월을 살며 수많은 가정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풍경이 하나 있어요.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오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부모들이 정작 노년에 이르러 자식들과 등을 돌리고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이죠. 왜 그럴까요? 그분들이 나빠서일까요? 아닙니다. 너무 똑똑해서 그렇습니다. 자식들의 허물이 너무 잘 보이고, 그들이 하는 방식이 서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한마디라도 더 거어주고 싶어 하는 그 옳은 마음이 화근이 되는 겁니다.
백세를 넘긴 노인으로서 제가 깨달은 한 가지 서글픈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젊은 세대는 결코 노인의 지혜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선택을 묵묵히 지켜봐 주는 따뜻한 시선이지, "내 경험에 의하면 말이다"로 시작되는 정답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노인은 자손들 앞에서 기꺼이 바보가 되기를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만약 여러분이 50세를 넘어서도 여전히 자식들의 살림사리에 간섭하고,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려 애쓰고 있다면은 미안한 말씀이지만 당신의 노년은 결코 평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모양이냐?"라는 말 한마디가 나오는 순간, 당신과 자식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세워집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며, 지혜가 아니라 노욕일 뿐입니다.
저는 제 자식들이나 손주들을 만날 때 종종 못들은 척, 모르는 척을 합니다. 그들이 요즘 세상 돌아가는 법을 설명하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일지라도 "허상이 참 많이 변했구나. 네 덕분에 내가 새로운 걸 배우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의 길을 살려주고, 그들이 가장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무대를 비워 주는 사랑의 연기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집안에 어른이 너무 영리하면 그 아래의 자손들은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어른이 조금 부족해 보이고, 어른이 조금 모르는 것 같아야 자식들이 들어올 틈이 생깁니다. 부모가 바보가 되어줄 때 비로소 자식은 효자가 될 기회를 얻는 법입니다. 제가 살아보니 인생의 후반전은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모르는 척할 수 있느냐에 따라 품격이 결정되더군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수만 가지의 정답을 가슴속 깊은 우물에 묻어 두십시오. 그리고 그저 허로운 웃음으로 그들을 바라봐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세인이 전하는 장수와 평온을 위한 첫 번째 비밀입니다.
자식들 앞에서 완벽한 부모가 되려 하지 마십시오. 대신 기꺼이 속아 줄 줄 알고, 기꺼이 져 줄 줄 아는 현명한 바보가 되십시오. 그때 비로소 당신의 노예는 존경과 사랑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모가 자식의 길을 닦아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100년의 시간을 지나오며 깨달은 것은, 부모가 자식의 인생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순간 그 도리는 서로의 영혼을 갉아먹는 업격이 된다는 사실이죠. 여러분, 자식은 여러분을 통해 세상에 왔을 뿐 여러분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50대, 6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자식의 직장 문제, 결혼 생활, 심지어 손주 교육까지 일일이 간섭하며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노년의 불행을 부르는 근원입니다.
영성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인생 공부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자식이 시행착오를 겪고 실패를 통해 좌절을 맛보는 것 또한 그 아이의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내가 다 겪어 봐서 안다"며 그 기회를 빼앗아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자식은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부모는 자식의 무거운 인생 가방까지 대신 매느라 허리가 휘고 기력이 쇠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자손들 앞에서 모르는 척 하라고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유독, 자식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자식이 잘되면 내 덕이고, 자식이 잘못되면 내 탓인 것 같아 담잠을 서치지요. 하지만 50세가 넘었다면 이제는 그 에너지의 끈을 과감히 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식의 일에 일비하며 감정을 쏟는 순간, 여러분의 생명력은 자식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버립니다.
현명한 노인은 자식이 실수하는 것을 보아도 "허허,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모르는 채 넘깁니다. 그것은 방관이 아니라 자식의 운명을 존중하는 가장 깊은 수준의 배례입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한 노교수는 자식들이 사업의 실패에 큰 어려움을 겪을 때도 끝까지 모르는 척을 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냐고 비난했지만, 그는 침묵하며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훗날 그 아들이 스스로 일어서서 성공했을 때, 아버지는 그제야 아들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믿었기에 기다려 준 것이란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나서서 잔소리를 하고 금전적인 도움으로 상황을 무마했다면은, 아들은 결코 지금의 단단한 내면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 앞에서 똑똑한 척하며 훈수를 두는 것은 여러분의 에고를 만족시킬 뿐, 자식의 인생에는 독이 됩니다. "내가 말했지, 내 말이 맞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순간, 자식의 마음속에는 부모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열등감과 원망이 싹틉니다. 늙은 부모가 지켜야 할 가장 큰 덕목은 기다림입니다. 자식들이 모여 앉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논할 때, 슬며이 자리를 비워 주거나 못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여 주십시오. "요즘 젊은 애들 사는 건 도통 모르겠구나" 하고 허웃음 짓는 그 태도가 자식들에게는 가장 큰 자유를 줍니다. 부모가 바보를 자처할 때, 그 가문의 에너지는 비로소 선순환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노년이 평안하고 장수하기를 원하신다면, 오늘부터 자식의 인생에서 감독관의 완장을 내려 놓으십시오. 그것이 자식도 살리고 여러분의 남은 생명력도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인생의 가을을 지나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여러분, 가끔 이런 기분이 들지 않으십니까? "내가 이렇게 정정하고 아직 머리도 팽팽 돌아가는데, 왜 아이들은 나를 뒷방 늙은이 취급할까?" 하는 서운한 마음입니다.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서 자식들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고 싶고,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아 주고 싶은 욕구가 불쑥 들칠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가 바로 여러분이 가장 경계해야 할 순간입니다. 내가 내 지식을 뽐내고 아는 체를 하는 그 찰라가 사실은 자식들과의 거리를 수미터나 벌려 놓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시당한다는 느낌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내가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데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며 버럭 화를 내기도 하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 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의 존재 가치를 자식들의 인정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갈증입니다. 내가 똑똑해야만, 내가 영향력이 있어야만 대접받는다고 믿는 그 마음이 여러분을 불명과 스트레스로 몰아놨습니다.
백세를 살아보니 알겠더군요. 인생의 진정한 품격은 대접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접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아는 체는 에너지를 밖으로 쏟아붓는 행위입니다. 50세 이후에는 안으로 에너지를 모아야 장수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의 대화가 비논리적이고, 그들의 경제 관념이 밑바닥으로 보여도 그냥 "허허, 그렇구나" 하고 넘기십시오. 그들이 당신을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으로 여긴다면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으십시오. "그래, 나는 이제 그런 복잡한 세상일은 있고 마음 편히 살련다" 하는 태도가 여러분을 모든 책임과 비난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리는 영적 자유입니다.
고독은 여러분이 똑똑할 때 찾아옵니다. 모든 것을 비판하고 분석하는 노인 곁에는 아무도 머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반면 조금 모자란 듯 웃어 주고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노인 곁에는 손주들도 모여들고, 자식들도 마음을 더 넣습니다. 여러분이 바보를 자처할 때 역설적으로 여러분은 가족 내에서 가장 강력한 치유 에너지를 가진 존재가 됩니다. 자식들이 사회에서 입은 상처를 들고 부모를 찾았을 때, 거기서 또 다른 훈계와 지적을 만난다면 그들이 갈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현대 사회의 중년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는 지적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식들도 밖에서는 이미 충분히 지적받고 경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모님 곁만큼은 내 서툰 모습도 허용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부모가 완벽한 정답을 들고 기다리고 있으면, 자식은 그 집 대문을 열기가 두려워집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 마십시오. 내가 모르면 자식들이 무시할까 봐 겁낼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진짜 가치는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굴곡진 세월을 버텨온 그 깊은 생명력에 있습니다. 그 생명력은 말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그리고 자비로운 미소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오늘 밤 잠자리 들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나는 자식 앞에서 얼마나 바보가 되어 주었는가?" 만약 당신이 오늘 자식의 실수를 보고도 눈 감아 주었다면, 당신은 오늘 하루를 아주 훌륭하게 보낸 것입니다. 그 눈감음이 당신의 혈압을 낮추고, 당신의 심장을 평온하게 하며, 결국 당신을 세 너머의 평안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머리로 이기려 하지 않고 가슴으로 품어 앉는 법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지켜야 할지 실천적인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인생의 후반전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자식을 비교하는 마음입니다. 100년을 살아보니 노년의 건강과 장수는 입으로 들어가는 보약보다 입밖으로 나가지 않는 말의 절제에서 결정되더군요.
먼저 여러분의 언어에서 반드시 버려야 할 세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다 해 봐서 아는데"입니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험은 비중한 유산이지만, 지금의 자식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공식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너희들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입니다. 걱정은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심리적 부채가 됩니다. 셋째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 말 들어라"입니다. 후회 또한 자식이 스스로 겪고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이 말들을 버리는 순간, 여러분의 뇌는 불필요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에너지는 비로소 여러분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하는데 쓰이게 됩니다.
다음으로 자식이나 손주들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 때의 대처법입니다. 이때야말로 진짜 바보가 되어야 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자식이 무례한 말을 하거나 당신의 조언을 묵살할 때, 똑똑하게 맞서 싸우지 마십시오. "허허, 내가 나이가 드니 정말 깜빡깜빡하는구나. 내 말이 맞겠지"라고 말하며 허롭게 웃어 버리십시오. 이것은 비굴함이 아닙니다. 상대의 낮은 수준에 나의 귀한 에너지를 섞지 않겠다는 거룩한 선언입니다. 여러분이 화를 내는 순간 혈압은 오르고 기치는 영유하지만, 허허 웃으며 넘기는 순간 독소는 몸 밖으로 배출됩니다.
또한 집안에 낡은 번을 버리십시오. 예전에는 가부장적인 권위가 가정을 지탱했지만, 지금은 공감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정을 화목하게 합니다. 자식들이 여러분을 찾아와 세상 살아가는 고충을 털어 놓을 때, 해결책을 제시하려 들지 마십시오. 대신 "참 고생이 많구나. 애썼다"는 한마디와 함께 따뜻한 밥 한 끼를 내어 주십시오. 자식은 부모의 똑똑한 머리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기억하며 다시 찾아오는 법입니다.
물건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합니다. 나중에 자식들 주겠다며 쌓아둔 오래된 가구들, 잊지도 않는 옷들, 옛날 서류들 이런 것들은 집안에 기 흐름을 막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정신을 과거에 묶어둡니다. 공간이 비워져야 새로운 기운이 들어오고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몸은 자연스럽게 생기를 되찾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상팔자는 자식에게 대접받는 노인이 아니라 자식에게 바랄 것이 없는 노인입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고, 실망이 없으면 마음은 늘 고요한 호수와 같습니다. 자식들이 주는 용돈이나 안부 전화에 목매지 마십시오. 대신 혼자서도 즐거울 수 있는 취미를 찾고, 동네 산책길에 들꽃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행복해 보일 때, 자식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여러분 곁으로 다가옵니다.
현명하게 바보가 되어 자식의 짐을 덜어 주는 부모. 그 부모의 얼굴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온한 광체가 설립니다. 그것이 바로 장수의 비결이자 중년 이후의 삶을 완성하는 최고의 기술입니다.
인생이라는 긴 강물을 따라 100년을 흘러와 보니, 마지막에 남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평온하게 내려놓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아는 현명한 바보의 철학은 결코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 삶의 주권을 타인의 시선이나 자식의 반응으로부터 완전히 되찾아오는 가장 적극적인 자기 사랑의 방법입니다.
노년의 장수는 단순히 숨을 오래 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 없이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시간을 뜻합니다. 제가 살아보니 사람의 수명을 깎아 먹는 가장 큰 독소는 섭섭함이더군요.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나? 내 지혜가 이렇게 깊은데 왜 몰라주나" 하는 그 섭섭함이 마음에 병이 되고 몸에 병이 됩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바보를 자처하고 자식 앞에서 내 지식을 감추며, 그저 허 웃음으로 결심하는 순간 그 독소는 신기하게도 사라집니다.
이제 여러분의 남은 인생은 자식의 성적표나 성공 여부에 따라 출렁거려서는 안 됩니다. 자식들이 여러분을 세상 물정 모르는 인자한 노인으로 기억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입니다. 부모가 너무 똑똑하고 서슬퍼렇게 살아 있으면 자식들은 부모를 존경하기보다 두려워하고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가 조금 모자한 듯 편안하면, 자식들은 삶이 고달플 때마다 부모라는 그늘 아래로 찾아와 마음을 쉬어갑니다. 누군가에게 쉼터가 되어 주는 삶. 이보다 더 아름답고 불람찬 노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연습합니다. "김영석, 오늘도 가르치려 하지 말고, 지적하려 하지 말고, 그저 많이 웃어 주자" 하고 말입니다. 백살이 넘은 저도 매일 이렇게 다짐해야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마음의 짐을 하나만 내려놔 보십시오. "그래, 내 자식도 이제 제 인생을 사는 어른이지. 내가 모르는 척 해 주는 것이 저 아이를 돕는 길이다"라고 마음 먹어 보십시오. 그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인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통장의 잔고도, 화려한 경력도 아닙니다. 오직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사랑했고, 얼마나 부드럽게 세상을 대했느냐는 기억뿐입니다. 자식들에게 똑똑했던 부모보다는 "나를 보고 늘 환하게 웃어 주던 따뜻한 부모"로 기억되기를 소망하십시오. 그 웃음 속에 장수의 비결이 있고, 가문의 화목이 있으며, 여러분 여생의 구원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디 스스로를 너무 들지 마십시오. 이미 충분히 잘 살아오셨고, 충분히 고생하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복잡한 계산기를 내려놓고, 그저 창가에 비치는 햇살과 바람의 노래를 즐기며 현명한 바보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얼굴에 어린 그 허로운 미소가 주변 사람들을 치유하고, 여러분의 생명을 더욱 길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100년의 세월을 담아 여러분의 앞날에 평화와 안식을 축원합니다. 이제 마음 편히 그리고 가볍게 남은 생의 아름다운 노후를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