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ription
할렐루야. 오늘은 사무엘상 8장을 통해서 또 우리 가운데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함께 찬송하며 예배하는 복된 시간 되기 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그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시고 오늘 사무엘상 8장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다시 한번 믿음 안에서 상고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신 하나님 영광받아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말씀 속에서 우리를 영한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듣게 하시고 그 뜻대로 믿음 안에 잘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일천 번제 가운데 귀한 예물을 드려오니 드려진 예물과 그 믿음의 섬김 위에 성령의 풍성함과 채우심과 은혜 베푸심이 가득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 주옵소서. 병든 자와 약한 자에게 치유하시고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재정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재정의 복들이 허락되어진 놀랍고 귀한 은혜로 풀어지는 역사가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자, 사무엘상 8장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정 통치가 종말을 고하고 인간에 의한 왕정 통치가 시작되는 비극적인 분기점인 동시에 인간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참된 왕되심을 시하는 바로 은혜의 서악을 보게 되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도 열방과 같이 바로 왕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구하죠. 사무엘의 노세와 그 아들들 요엘과 아비아의 부패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요구할 정당한 명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 이면에는 더욱 깊은 영적인 타락이 숨겨져 있었지요.
이스라엘이 외친 모든 나라와 같이라는 말은 단순히 정치적 효율성만은 구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불러내어 거룩한 나로 나라로 삼으셨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바로 진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힘의 논리 즉 세상의 시스템으로서의 회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는 이는 구별됨을 포기하고 보편성 속에 숨으려는 인간의 종교적인 본능을 폭로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구별되어진 은혜 안에 있기를 선택하기보다는 무리와 또한 시스템과 행정 속에 또 보편적인 구원 안에 보편적인 믿음 안에 거하기 원하는 우리들의 모습들은 어떠한가도 좀 살펴봐야 되는 모습이기도 하지요.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다라고 쓸 때 쓰인 샤알이라는 단어는 이들의 요구로 세워질 첫 왕 사울의 이름과 어근이 같습니다. 이는 이는 사울이 하나님의 선택이기에 앞서 이스라엘의 탐력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인간적인 욕망의 투영체임을 상징하지요. 즉 그들이 구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신들의 불안을 잠재워 줄 거대한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영이시죠. 말씀보다는 성령의 다스림보다는 바로 우리들의 불안을 잠지워줄 거대한 내 바깥에 있는 누군가를 믿고 있는 아이돌 우상숭배 모습들 또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진 믿음의 어떠한 모습일 줄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 앞에서 깊이 고뇌에 빠지게 되어지지요. 이는 이는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통하시는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바로 선지자적인 슬픔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신 말씀은 인간 실존에 대한 무서운 진단이었습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끊임없이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되고 싶다라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해 줄 눈에 보이는 대리자를 세움으로써 결국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하려는 자기 의를 구축하려 한 것이지 여기서 왕을 구하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마스 멸시하여 내던지다라는 행위로 규정되게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인간왕은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게 되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은혜의 통치를 거부하고 인과 통치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가장 율법의 보편적인 모습이 인과율입니다. 과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 말씀이 아닌 바로 스스로가 지켜낼 수 있어 그 지킨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어떤 가치로 여기고 싶었지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의 열매가 아니라 어떠한 하나님 앞에 가치로 인정받아 내가 원하는 때로는 자식들의 가정에 때로는 내 삶속에 필요한 또 다른 내가 같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삶을 영하기 위하여 내가 봉사하고 헌신하고 청소하고 드렸던 모든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바꾸는 것. 이것을 성경에서는 만몬이라 그러고 이것을 재물이라고 말하지요. 마태복음 6장 22절에는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무엘상 8장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 의존적인 삶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라는 바로 은혜 아래에 들어가 있는 인간의 슬이 자기들이 무지하게 느껴졌고 자기들이 무능력하게 느껴졌지요. 나의 어떠함, 나의 능력과 수고로 하나님 앞에 가치를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이 선악과였고 지금도 그것으로 우리는 내가 원하는 가치를 축복이라는 무엇인 그릇으로 포장하여 얻고 싶어하는 바로이 인가율 안에 갇혀 있지요. 이 이 인가율은 대부분 불교에서 쓰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기독교 안에서도 어느덧 축복이라는 그러한 프레임 안에 자연스럽게 여러분 새겨진 신앙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왕의 제도를 어 우리가 함께 보게 될 겁니다. 사무엘은 왕이 세워질 때 백성들이 겪게 될 구체적인 고통을 나열합니다. 징집할 것이고 세금과 강제 노역 등 인간 왕의 통치는 본질적으로 탈취 역사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취하는 왕, 주는 왕, 두 왕은 다른 왕이지요. 11절부터 17절까지 반복되는 핵심 동사는 라카흐입니다. 취하다라는 것입니다. 이 이 취하다라는 것은 바로 테이크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는데 어디에 쓰 있는 단어냐면 바로 선악가를 따먹을 때 썼던 단어입니다. 세상의 임금은 바로 사단은 바로 율법을 통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노동과 봉사와 수고의 가치로 내가 원하는 어떤 가치를 행복을 취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되어지. 그러나 그 율법, 그 사단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무기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단의 가장 큰 권능은 율법과 사망이라고 기록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왕은 백성의 아들들을 취하여 병사로 삼고 딸들을 취하여 요리하게 하며 밭 소산을 취하여 자신의 배우를 배를 채웁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 권력의 본질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예배하신 참된 왕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무엘의 경고는 경고는 결국 너희가 세운 왕은 너희를 노예로 만들 것이나 내가 세울 왕은 너희를 위하여 죽으리라는 복음적인 대조를 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 모든 살과 피를 우리 가운데 주심으로 그 말씀과 성령을 먹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리였습니다.
이 왕정대는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악한 요구를 허용하신 것은 그들을 방치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는 이는 율법이 인간을 정제하여 절망하게 하듯 인간 왕의 압재 아래에서 이 인간 왕은 바로 사단의 권세 권력을 말하고 인가율에 갇힌 바로 우리가 가장 합당하게 생각했던 세상에 갇혀 있는 바로 신앙의 모습을 대변하겠죠. 신음 그 아래 신음하게 함으로써 인간 스스로는 결코 자기를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 안에서 허용되어진 왕이었습니다. 왕정 제도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메시아를 간절히 대망하게 만드는 바로 몽학 선생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사무엘의 경고를 듣고도 아니소이다. 우리도 왕이 우리도 왕이 있어야 하리니라며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허용은 인간의 죄를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악된 선택마저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 재료로 사용하시는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사울이라는 실패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고 결국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을 거쳐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되어지지요. 사무엘상 8장의 비극은 신약에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외치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의 외침과 맞다 있게 되어집니다.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거부하고 세상의 힘을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그 거부당하심을 통해 오히려 인간을 구원해 내시는 바로 역설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결국에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의 말씀처럼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자발적인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길을 따라가는 이권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관계로 주님과 동거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지요.
결론을 냅니다. 오늘 우리 삶의 왕은 누구입니까? 사무엘상 8장은 먼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내면에서 매일 벌어지는 영적 전쟁처 전쟁터 있지요. 우리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돈 명예 시스템이라는 현대판 왕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가장 하나님 말고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상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취하는 왕의 노예에서 해방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는 왕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기도, 성령의 일들을 통하여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여러분들은 순복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인간 통치자의 무능과 부패를 볼 때마다 우리는 실망하는 것을 넘어서 완전한 공의와 사랑으로 통치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또한 소망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에게 실망을 느끼는 리더는 누굽니까? 그를 정지하기보다는 여러분 그를 통하여서 시험들기보다는 때로는 이 나라의 임금 때로는 온 세대 가운데 리더들을 향하여서 완전함을 보지 못할 때 과연 나는 비판과 정죄인가 아니면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리기를 기대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을 한번 살펴보기 원합니다. 결국 사무엘상 8장은 인간은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나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성도들의 삶의 여정을 축복하시고 그 걸음걸음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지도록 허락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