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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괴로운 이유 | 부처님 말씀

부처의말1:36:06

Transcription

[음악]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원하고 계신가요? 더 나은 직장, [음악] 더 큰 집, 더 많은 인정, 아니면 조금 더 평온한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음악]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도 잠시뿐, 다시 새로운 갈망이 마음속에 피어오릅니다.

이 끝없는 갈망의 고리는 대체 어디서 [음악] 시작되는 걸까요?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 보리수 아래에서 이 [음악]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이 존재를 깊이 들여다보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셨습니다. 우리가 확고하게 존재한다고 믿는 나는 [음악] 사실 다섯 가지 요소가 잠시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음악] 것을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온', 즉 다섯 가지 무더기라고 부르셨습니다.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우리 존재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먼저 색온을 살펴보겠습니다. 색온은 우리의 몸 그리고 [음악] 우리가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물질적 현상을 말합니다. [음악]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자리, 숨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가슴, 화면을 보고 있는 눈, 이 모든 것이 색온입니다. 우리는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잠시 관찰해 보십시오. 이 [음악] 몸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세포는 오늘 사라지고, [음악] 오늘의 세포는 내일 또 다른 것으로 바뀝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요?

다음은 수온입니다. 수온은 느낌, 감수 작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즐거움, 괴로움 혹은 중립적인 느낌을 경험합니다. 달콤한 음식을 먹을 때의 즐거움, 비난을 들을 [음악] 때의 불쾌함, 아무렇지 않은 순간의 평온함까지 모두 수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탐욕은 바로 이 수온에서 시작됩니다.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더 원하게 됩니다.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하려 합니다.

상온은 지각하고 인식하는 작용입니다. 우리는 감각으로 들어온 정보를 받아들여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합니다. '이것은 사과다', '저것은 자동차다', '이 사람은 친구다', '저 사람은 낯선 사람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대상을 분별하고 이름 붙이고 개념화합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우리가 실체가 없는 것에 실체를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변하는 현상을 마치 고정된 실체인 것처럼 [음악] 여기게 됩니다.

행온은 의지 작용, 형성 작용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심리적 활동, 의도, 결정, 충동이 여기에 속합니다. 화를 내려는 마음, 사랑하려는 마음, 회피하려는 마음, 집착하려는 마음 모두가 행온입니다. 이 행온은 우리의 업을 만들어냅니다. 선한 의도는 선한 업을, 악한 의도는 악한 업을 만들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마지막으로 식온입니다. 식온은 의식 자체, 인식 주체를 의미합니다. 눈으로 보는 의식, 귀로 듣는 의식, 코로 냄새 맡는 의식, 혀로 [음악] 맛보는 의식, 몸으로 느끼는 의식, 그리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의식까지 여섯 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의식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나', '판단하는 나', '결정하는 나' 말입니다. 하지만 의식 역시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바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색은 무상하고, 순은 무상하고, 상은 무상하고, 행은 무상하고, 식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모든 것,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의식도 모두 변하고 [음악] 있다는 것입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음악]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변하는 것들을 붙잡고 이것이 나다라고 착각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강물 한 줌을 떠서 "이것이 강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그 순간 [음악] 이미 그 물은 흘러가 버렸고, 새로운 물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강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물의 흐름입니다.

우리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흐름이 잠시 모여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무명 속에서 이 변화하는 오온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탐욕이 시작됩니다.

색온에 대한 집착을 먼저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몸을 아름답게 꾸미려 합니다. 건강하게 유지하려 합니다. 젊음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물론 몸을 돌보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음악] 문제는 집착입니다. 이 몸이 나이며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괴로워합니다. 주름이 생기면 괴롭고, [음악] 병이 들면 괴롭고, 늙어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수온에 대한 집착은 더욱 미묘합니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에 중독됩니다. 맛있는 음식, 편안한 온도, 기분 좋은 칭찬.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사라지면 다시 찾으려 합니다. 괴로운 느낌은 피하려 합니다. 불편한 대화, 힘든 상황, 아픈 진실로부터 도망칩니다. 하지만 [음악] 느낌은 본래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붙잡을 수 없습니다. 피할 수도 없습니다.

상온에 대한 집착은 [음악] 우리의 견해와 관념을 고착시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세상은 이래야 한다', '사람들은 저래야 한다'는 고정된 생각에 갇힙니다. [음악] 그리고 현실이 그 생각과 다를 때 우리는 화를 내고 좌절합니다. [음악] 타인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은 [음악] 나쁜 사람이다'라고 한번 규정하면 그 사람의 변화된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행온에 대한 집착은 우리의 습관과 성향을 만듭니다. 어릴 적부터 형성된 반응 패턴이 평생을 지배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의심이 많은 사람은 모든 [음악] 것을 의심합니다. 이것이 나의 성격이라고 여기며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행온 역시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식온에 대한 집착은 [음악] 가장 뿌리 깊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나를 가장 확실한 존재로 여깁니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처럼 의식을 존재의 증거로 삼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것조차 조건 지어진 현상임을 보셨습니다. 눈이 있고 형상이 있을 때 눈의 의식이 생깁니다. 귀가 있고 소리가 있을 때 귀의 의식이 생깁니다. 의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가 [음악]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온 하나하나에 대한 집착이 쌓이면서 우리는 확고한 자아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나이고', '이것이 나의 것이고',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자아를 지키고 [음악] 키우고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여기서 모든 탐욕이 피어납니다.

탐욕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탐,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입니다.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경치, 듣기 좋은 소리, 향기로운 냄새, 부드러운 감촉을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음악] 가장 표면적인 탐욕이지만 우리 일상을 가장 많이 지배합니다.

둘째는 유탐, 존재에 대한 탐욕입니다.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 [음악]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 '나'라는 존재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더 깊은 차원의 탐욕으로 생명에 대한 근원적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셋째는 무유탐,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탐욕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도 일종의 탐욕입니다. 진정한 해탈이 아니라 도피하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음악] 세 가지 탐욕은 모두 오온을 실체로 착각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색온을 나의 몸이라 여기며 감각적 쾌락을 추구합니다. 수온을 나의 느낌이라 여기며 즐거움을 붙잡으려 합니다. 상온을 나의 생각이라 여기며 옳은 견해를 고집합니다. 행온을 나의 의지라 여기며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식온을 나라고 여기며 이 존재를 영원히 유지하려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깊이 관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똑같은 관찰을 하라고 권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무엇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혹시 배가 [음악] 고프다는 느낌이 있습니까? 그것은 수온입니다. 그 느낌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것은 고정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음악] 변하고 있습니까? 조금 전보다 더 강해졌습니까? 아니면 [음악] 약해졌습니까?

혹시 이 영상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상온입니다. 그 생각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것은 어디서 왔습니까? 무엇이 그 생각을 일으켰습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똑같습니까? 아니면 벌써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습니까?

혹시 자리를 바꾸고 싶다는 충동이 있습니까? 그것은 행온입니다. 그 충동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것을 따르면 어떻게 됩니까? 잠시 편해지다가 다시 불편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온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한 순간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습니다. 느낌이 생겼다 사라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의식이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음악] 마치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음악] 그런데 우리는 이 흐름을 보지 못합니다.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주의 깊게 보지 않기 때문에 마치 고정된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 필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초당 24장의 정지된 사진이 빠르게 지나가면 우리는 그것을 연속된 움직임으로 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각의 사진이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우리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순간 새로운 오온이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연속된 [음악] '나'로 착각합니다.

이 착각이 깊어질수록 탐욕도 깊어집니다. [음악] '나'라는 존재가 확고하다고 믿을수록 그것을 지키고 채우고 만족시키려는 욕구도 강해집니다.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괴로워합니다. 부처님께서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며 붙잡으려 하니 [음악] 괴로운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을 영원히 유지하려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음악] 실체 없는 것을 실체라고 여기며 집착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음악] 부처님께서 답하셨습니다.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라. 그것이 무상함을, 괴로움을, [음악] 나 아님을 보라. 그렇게 보면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면 해탈하리라."

여기서 '싫어하는 마음'이란 혐오가 아닙니다. 집착을 놓아내는 것입니다. 오온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자연스럽게 집착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밧줄을 뱀으로 착각했다가 [음악] 그것이 밧줄임을 알게 되면 두려움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찰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사념처, 즉 네 가지 마음 챙김을 가르치셨습니다. 몸을 관찰하고,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고, 법을 관찰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몸을 관찰합니다. 지금 이 순간 앉아 있는 이 몸을 느껴 보십시오. 엉덩이가 의자에 닿는 감촉, 발이 바닥에 닿는 [음악] 느낌,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껴 보십시오. 이것이 색온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냥 느끼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있는 [음악] 그대로 느낍니다.

다음으로 느낌을 관찰합니다. 지금 즐거운 느낌이 있습니까? [음악] 괴로운 느낌이 있습니까? 아니면 중립적인 느낌입니까? 이것이 수온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느낌을 [음악] 느낄 뿐 그것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느낌이 있다고 해서 더 원하지 않고, 괴로운 느낌이 있다고 [음악] 해서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관찰합니다.

세 번째로 마음을 관찰합니다. 지금 탐욕이 있는 마음입니까? 성냄이 있는 마음입니까?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음악] 평온한 마음입니까? 이것이 행온과 식온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릴 뿐 그것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화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화난 것은 아니다'. 그저 '화냄'이라는 현상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법을 관찰합니다. 모든 현상이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연기의 법칙을 직접 경험합니다.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점점 명확해집니다. 오온은 과정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탐욕이 일어나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게 됩니다. [음악] 즐거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 순간 더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려 합니다. [음악] 바로 여기입니다. 이 지점에서 알아차리면 탐욕은 힘을 잃습니다. '아, 지금 탐욕이 일어나려 하는구나' 하고 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동적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 순간 피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려 합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이 지점에서 알아차리면 혐오는 힘을 잃습니다. '아, 지금 피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보는 순간 우리는 [음악]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특별한 어떤 곳에서 특별한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일상의 모든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 걸을 때, 일할 때, 대화할 때, 모든 순간에 오온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평생을 오온과 동일시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 관찰하다 보면 점점 명료해집니다. 마치 탁한 물이 담긴 컵을 가만히 두면 흙이 가라앉고 물이 맑아지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관찰을 통해 점점 맑아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깊은 통찰이 일어납니다. '정말로 나라는 것은 없구나. 그저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음악] 사라지는 현상들의 흐름만 있을 뿐이구나.' 이것을 직접 체험하는 순간 탐욕은 뿌리째 흔들립니다. 탐욕은 '나'와 '나의 것'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것이 없다면 누가 탐욕을 부릴까요? 무엇을 위해 탐욕을 [음악] 부릴까요?

이 [음악] 질문 앞에서 탐욕은 힘을 잃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무아, 즉 '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음악]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있습니다. 오온의 작용이 있고, [음악] 느낌이 있고, 생각이 있고, 의식이 있습니다. 다만 그 안에 고정된 '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더 이상 나를 지키고 채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채운다는 말입니까? 그냥 삶이 흘러갑니다. [음악] 오온이 작용하고, 일이 일어나고, 상황이 전개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집착은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탐욕에서 벗어난 자유입니다.

오온이 만든 집착의 구조를 꿰뚫어 본 사람은 더 이상 그 구조에 갇히지 않습니다. [음악]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음악] 부처님께서도 6년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하지만 방향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탐욕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온에 대한 무지와 집착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일상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음악] 조용히 관찰을 시작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날 때 [음악] 몸의 느낌을 관찰하십시오. 식사할 때 맛에 대한 탐욕이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하십시오. 일할 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대화할 때 옳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매 순간이 수행의 기회입니다. 매 순간이 깨달음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오온을 관찰하십시오. 그것이 무상함을, 괴로움을, 나 아님을 보십시오.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탐욕은 점점 약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은 반드시 괴로움의 끝에 도달한다고, 탐욕의 끝에 도달한다고. 그 길은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 모두 이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탐욕의 끝을 향해, 자유를 향해, 평화를 향해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탐욕이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탐욕이 어떻게 우리 삶 전체를 사슬로 묶는지, 그 정교한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그날 밤, 놀라운 통찰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괴로움이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정확한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것을 12연기, 즉 12가지 고리로 연결된 발생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무명으로부터 행이 생겨나고, 행으로부터 식이 생겨나고, 식으로부터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으로부터 육입이 생겨나고, 육입으로부터 촉이 생겨나고, 촉으로부터 수가 생겨나고, 수로부터 애가 생겨나고, 애로부터 취가 생겨나고, 취로부터 유가 생겨나고, [음악] 유로부터 생이 생겨나고, 생으로부터 노사가 생겨납니다.

이 12고리는 하나하나가 다음 고리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됩니다. 마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이, 고리들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우리를 괴로움 속에 가둡니다.

무명.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무명은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 즉 괴로움의 진실을 모르고, 괴로움의 원인을 모르고, 괴로움의 소멸을 모르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모르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오온의 무상함과 무화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오온을 실체로 착각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명입니다. 색, 수, 상, 행, 식을 '나'와 '나의 것'으로 여기는 근본적인 착각 말입니다.

이 [음악] 무명 위에서 행이 형성됩니다. 행은 의지 작용, 업을 만드는 힘입니다. 무명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나'를 위해, [음악] '나의 것'을 위해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행동합니다. 이 모든 행동이 업의 씨앗을 심습니다.

업의 씨앗은 의식의 흐름 속에 저장됩니다. 이것이 식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의식은 과거의 업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식이 새로운 존재에 기반이 됩니다.

식으로부터 명색이 생겨납니다. 명은 정신적 측면, 즉 수, 상, 행, 식을 말하고, 색은 물질적 측면, 즉 몸을 말합니다. [음악] 의식이 형성되면서 정신과 물질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는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명색으로부터 육입이 생겨납니다. [음악] 육입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말합니다. 태아가 자라면서 감각 기관이 발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체적 발달만이 아닙니다. 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여섯 [음악] 개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육입이 완성되면 촉이 일어납니다. 촉은 접촉, 만남을 의미합니다. 감각 기관과 대상 그리고 의식이 세 가지가 만나는 순간입니다. 눈과 형상과 시각 의식이 만나면 봄이 일어나고, 귀와 소리와 청각 의식이 만나면 들음이 일어납니다. 이 만남의 순간이 바로 촉입니다.

촉으로부터 수가 생겨납니다. 수는 느낌입니다. 촉이 일어나는 순간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혹은 중립적인 느낌이 반드시 생겨납니다. 달콤한 것을 맛보면 즐거운 느낌이, [음악] 쓴 것을 맛보면 불쾌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감각 기관이 있고, 대상이 있고, 접촉이 일어나고, 느낌이 생겨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다음 단계에서 시작됩니다.

수로부터 애가 생겨납니다. 애는 갈애, 탐욕입니다.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 원합니다.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하려 합니다. [음악] 이것이 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상유따 니까야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구들이여, 색을 즐기는 자는 [음악] 괴로움을 즐기는 것이다. 괴로움을 즐기는 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온을 즐긴다는 것은 그것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을 즐기고 그것을 더 원하는 순간 우리는 괴로움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느낌은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느낌도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여기서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애로부터 취가 생겨납니다. 취는 집착, 움켜짐입니다. 단순히 원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소유하려 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합니다. 애가 마음속에 갈망이라면, 취는 그것을 실제로 붙잡는 행위입니다. 취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음악] 욕취입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입니다.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모습, 듣기 좋은 소리, 향기로운 냄새, 부드러운 감촉을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둘째, [음악] 견취입니다. 견해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고 다른 견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신념, 정치적 이념, 개인적 가치관에 집착하는 것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계금취입니다. 의식과 규범에 대한 집착입니다. 특정한 수행법이나 계율을 지키는 것만이 해탈의 길이라고 믿으며 [음악] 집착하는 것입니다.

넷째, 아취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실체로 여기며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미묘한 집착입니다.

이 네 가지 집착은 모두 오온을 실체로 착각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색온을 나의 것으로 여기며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고, 상온을 나의 생각으로 여기며 견해에 집착하고, 행온을 나의 수행으로 여기며 계율에 [음악] 집착하고, 식온을 나로 여기며 자아에 집착합니다.

취로부터 유가 생겨납니다. 유는 존재 생성입니다. 집착이 쌓이면 새로운 존재의 씨앗이 형성됩니다. 이것은 단지 다음 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며 "나는 [음악] 피곤해 보이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피곤한 '나'라는 존재가 형성됩니다. 회사에서 [음악] 상사에게 칭찬을 들으며 "나는 유능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유능한 '나'라는 존재가 형성됩니다. 친구와 다투며 "나는 오해받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피해자인 '나'라는 존재가 [음악] 형성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매 순간 다양한 '나'를 만들어 냅니다. 성공한 나, 실패한 나, 사랑받는 나, 버림받은 나, 강한 나, 약한 나. 이 [음악] 모든 정체성이 취로부터 형성된 유입니다.

[음악] 유로부터 생이 생겨납니다. 생은 태어남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만들어지면 그것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태어납니다. [음악] 이것은 윤회의 맥락에서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일상의 맥락에서는 새로운 상황, 새로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곤한 '나'가 형성되면 피곤한 하루가 펼쳐집니다. [음악] 유능한 '나'가 형성되면 더 많은 책임과 기대가 따라옵니다. [음악] 피해자인 '나'가 형성되면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 계속됩니다.

생으로부터 노사가 생겨납니다. [음악] 노는 늙음, 사는 죽음입니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변하고 결국 사라집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정체성, 모든 존재는 무상합니다. 피곤함도 지나가고, 유능함도 지나가고, 피해자 의식도 지나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질 때 [음악] 우리는 괴로워합니다. 젊음이 사라질 때, 건강이 사라질 때, 명성이 사라질 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우리는 [음악] 깊은 괴로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노사, 즉 늙음과 죽음이 가져오는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 우리는 다시 무명에 빠집니다. 왜 이런 괴로움이 생겨나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또다시 집착하고, 또다시 업을 짓고, 또다시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냅니다. [음악] 이것이 12연기의 순환입니다.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음악] 노사. 이 12가 끊임없이 돌아가며 우리를 괴로움의 바퀴 속에 가둡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사띠밭 수다에서 생생하게 묘사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잠시 머무는 여인숙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떠납니다. [음악] 그런데 그 사람은 여인숙을 자기 집으로 착각하고 집착합니다. 여인숙 주인에게 화를 내고, 다른 손님들과 다투고, 떠나야 할 때가 되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오온이라는 여인숙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집으로 착각합니다.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하고, 이 느낌이 [음악]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생각이 나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고리는 수에서 애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느낌이 생겨나는 것까지는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그 느낌에 반응하여 갈애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이 [음악]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린다면 나머지 고리들은 힘을 잃습니다.

한번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커피의 향기가 코에 닿습니다. 이것이 촉입니다. 향기를 맞는 순간 [음악] 즐거운 느낌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수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 좋다. 이 커피 한 잔 더 마셔야겠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애입니다. 갈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커피를 한 잔 더 따릅니다. 이것이 취입니다. 집착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유입입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커피 없이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생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음악] 건강 문제로 커피를 끊어야 하는 날이 옵니다. 고통이 오고 짜증이 나고 괴로워합니다. 이것이 노사입니다.

이렇게 작은 일상의 순간에도 12연기의 고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된 이야기지만 [음악] 그 안에는 무명, 집착, 괴로움의 전체 구조가 담겨 있습니다.

더 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칭찬합니다. 귀에 칭찬의 말이 들립니다. 이것이 촉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수입니다. 그 순간 "나는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야. 더 칭찬받고 싶어"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애입니다. 그리고 칭찬받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 애씁니다. 이것이 취입니다. '칭찬받는 나', '인정받는 나'라는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음악] 이것이 유입니다. 그리고 [음악] 그 정체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생입니다. 하지만 [음악] 언젠가 칭찬이 사라지고 비판이 옵니다. 형성된 정체성이 무너집니다. 괴로워하고 분노하고 [음악] 우울해집니다. 이것이 노사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칭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 자체도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느낌에 집착하는 것, 그것을 통해 '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만약 칭찬을 들었을 때 즐거운 느낌을 알아차리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구나"라고 알아차리지만, '더 칭찬받아야 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애가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취도 일어나지 않고, 유도 생도 노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리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연기의 소멸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법칙입니다.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이 소멸하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모든 고리가 소멸합니다. 하지만 실제 수행에서는 어느 지점에서든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지점이 바로 수에서 애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느낌이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느낌에 집착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을 관찰하며 머물고, 밖으로 몸을 관찰하며 머물고, 안팎으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생겨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물고, [음악]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물고, 생겨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문다." 이것이 12연기의 고리를 끊는 방법입니다. 생겨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느낌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관찰할 때 중요한 것은 평정심입니다. 좋은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않고, 나쁜 것을 보고 싫어하지 않습니다. [음악] 그냥 있는 그대로 봅니다. 이것을 우백화, 즉 평정이라고 합니다.

평정심으로 관찰하면 모든 현상이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음악]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즐거운 느낌도 조건이 있어 일어났다가 [음악]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집니다. 괴로운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도, 감정도, 의식도 모두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음악] 사라집니다. 이것을 깊이 체험하면 집착이 [음악] 저절로 약해집니다.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잡으려는 순간 이미 사라져 버리는 것을 말입니다. 마치 물을 주먹으로 움켜 주려는 것과 같습니다. 주려고 하면 할수록 물은 빠져나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느낌을 없애려 해서는 안 됩니다. 느낌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감각 기관이 있고 대상이 있고 접촉이 있는 한 느낌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문제는 느낌 자체가 아니라 느낌에 대한 반응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더 원해'라고 반응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 '피하고 싶어'라고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냥 '즐거운 느낌이 [음악] 있구나', '괴로운 느낌이 있구나'라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림 속에 머물면 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애가 일어나지 않으면 취가 일어나지 않고, 취가 일어나지 않으면 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업의 씨앗이 심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에 심어진 업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들은 조건이 맞으면 싹을 틔울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씨앗을 심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모든 씨앗이 다 소진될 것입니다. 이것이 해탈입니다.

부처님께서 [음악]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형성된 것, 즉 상카라는 행, 의지 작용을 말합니다. 무명 속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정체성, 모든 존재는 결국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더 이상 형성하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나'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뿐입니다. 집착 없이, 혐오 없이 평정심으로 경험합니다. 이것이 12연기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탐욕이 만드는 고통의 사슬을 끊는 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자신을 관찰해 보십시오. 어떤 [음악] 느낌이 있습니까? 그 느낌에 대해 어떤 반응이 일어나려 합니까? 더 원하는 마음입니까? 피하려는 마음입니까? 그 반응이 일어나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해 보십시오. 느낌과 갈애 사이에는 아주 작은 틈이 있습니다. 그 틈을 발견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처음에는 [음악] 그 틈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느낌이 일어나는 순간 자동적으로 갈애가 뒤따릅니다. 마치 [음악] 번개가 치면 바로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음악] 계속 관찰하다 보면 점점 그 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번개와 천둥 사이에는 실제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빛의 속도와 소리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느낌과 갈애 사이에도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짧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짧은 순간에 알아차림을 집중하십시오. '느낌이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갈애로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생깁니다. 집착할 수도 있고, 집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조건에 의해 [음악]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 속에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물론 완벽한 자유는 아닙니다. [음악] 여전히 과거의 업이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업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12연기의 사슬은 정교하고 강력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생을 거치며 이 사슬에 묶여 왔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고리씩, 한 순간씩 약화시킬 [음악] 수 있습니다. 매번 느낌에 반응하지 않을 때마다 사슬의 한 고리가 약해집니다. 매번 집착을 알아차릴 때마다 사슬의 힘이 줄어듭니다. 매번 평정심으로 관찰할 때마다 자유에 한 걸음 가까워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점진적 수행이라고 하셨습니다. 단번에 해탈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금씩 나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음악] 12연기의 사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지,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가는지가 중요합니다. 집착할 때마다 사슬은 강해집니다. 알아차릴 때마다 사슬은 약해집니다. 매순간이 [음악] 선택의 순간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으로 돌아가십시오.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12연기의 고리를 경험하는지 관찰해 보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촉과 수와 애와 취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에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그 고리를 포착하고 멈출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한 번의 경험이 씨앗이 되어 점점 더 자주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탐욕이 만드는 고통의 사슬은 정교하지만 끊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길을 보여 주셨고, 수많은 수행자들이 그 길을 걸어 자유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탐욕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이 만드는 사슬을 보았다면, 이제 [음악]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이 탐욕을 실제로 놓아낼 수 있을까요? 이론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몸으로 체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가르침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수행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윗빠사나, 즉 관찰 수행입니다. 윗빠사나는 특별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깊이,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개념에서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관찰의 대상을 제시하셨습니다. [음악]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이 네 가지를 순서대로 관찰하면서 우리는 점점 깊은 통찰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몸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가장 구체적이고 명확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앉아 있는 자세를 느껴 보십시오. 엉덩이가 의자나 바닥에 닿는 감각, 등이 [음악] 기대어 있거나 곱게 펴진 느낌, 손이 무릎 위에 놓여 있는 촉감을 느껴 보십시오. 이것이 몸의 관찰입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느낍니다. 판단하지 않고, 분석하지 않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부처님께서는 호흡 관찰을 특히 강조하셨습니다. 숨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숨이 나가는 것을 압니다. 긴 숨을 쉴 때는 긴 숨임을 알고, 짧은 숨을 쉴 때는 짧은 숨임을 압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됩니다. 몇 번의 호흡도 채 관찰하기 전에 마음은 [음악] 이미 다른 곳으로 달아나 있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내일 할 일을 계획하고, 지금 이 수행이 효과가 있을지 의심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마음은 본래 산란합니다. 한 곳에 머무는 것을 싫어합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달아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 지금 생각에 빠져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다시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부드럽게, 비난하지 않고, [음악] 다시 돌아옵니다. 이 과정을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합니다. 달아나고, 알아차리고, 돌아오고, 또 달아나고, 또 알아차리고, 또 돌아옵니다. 지루하고 단조로워 보이지만 [음악] 이것이 바로 수행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마음의 본성을 직접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얼마나 통제하기 어려운지,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얼마나 집착하고 싫어하는지를 몸으로 알게 됩니다. 이것은 책에서 읽는 지식이 아닙니다. 직접 체험하는 지혜입니다.

호흡 관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몸 전체로 관찰을 확장합니다.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음을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음을 알고, 걸을 때는 걷고 있음을 알고, 눕거나 있을 때는 눕거나 있음을 압니다. 더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손을 들 때 손이 올라가는 움직임을 느낍니다. 천천히 의도가 일어나고, 그 의도에 따라 근육이 움직이고, 손이 공간을 이동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보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관찰하면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손을 든다'는 하나의 행위로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수많은 작은 움직임의 연속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의도가 일어나고, 근육이 수축하고, 힘줄이 당겨지고, 관절이 움직이고, [음악] 피부가 늘어나고, 공기의 저항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체 감각의 관찰이 아닙니다. 무상을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간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음악]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몸 안을 더 깊이 들여다봅니다. 부처님께서는 32가지 신체 부분을 하나하나 관찰하라고 하셨습니다. 머리카락, 털, 손톱, 발톱, [음악]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 능막, 비장, 폐, 창자, 장막, 윗속에 음식, 배설물,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기름, 침, 콧물, 관절, 오줌입니다. 입니다. 이것은 몸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 아름답고 깨끗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그저 물질의 집합입니다. [음악] 흙, 물, 불, 바람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잠시 모여 있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깊이 관찰하면 몸에 대한 집착이 약해집니다. 이 몸을 나라고 여기고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느슨해집니다. 몸은 그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물질일 뿐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합니다. [음악]

다음으로 느낌을 관찰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느낌은 [음악] 탐욕이 발생하는 핵심 지점입니다. 촉이 일어나면 반드시 느낌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음악] 느낌에 대한 반응으로 갈애가 일어납니다. 느낌 관찰의 핵심은 느낌을 느낌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즐거운 느낌'이라고 알아차립니다. '좋다. 더 원한다'가 아니라 그냥 즐거운 느낌입니다. [음악]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로운 느낌'이라고 알아차립니다. '싫다. 피하고 싶다'가 아니라 그냥 괴로운 느낌입니다. 중립적인 [음악] 느낌이 있을 때는 '중립적 느낌'이라고 알아차립니다. 중립적 [음악] 느낌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그것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중립적 [음악] 느낌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음악]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느낌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느낌은 [음악] 그냥 느낌일 뿐입니다. 좋아해야 할 이유도, 싫어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한번 실험해 보십시오. 손바닥을 비벼서 따뜻하게 만들어 보십시오. 따뜻한 느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즐거운 느낌입니까? 괴로운 느낌입니까? 중립적 느낌입니까? 아마도 약간 즐거운 느낌일 것입니다. 그 느낌을 관찰하십시오. 더 비비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까? 그 충동을 따르지 말고 그냥 관찰하십시오. 잠시 후 따뜻함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느낌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이제 손을 찬물에 담그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차가운 느낌이 생겨납니다. [음악] 이것은 괴로운 느낌입니까? 손을 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까? 그 충동을 관찰하십시오.

이렇게 작은 느낌부터 관찰하는 연습을 합니다. 그러면 더 강한 느낌이 올 때도 같은 방식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슬픔이 밀려올 때, [음악] 기쁨이 폭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음악] 느낌으로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느낌을 관찰할 때 안과 밖을 모두 보라고 하셨습니다. 안으로는 자신의 [음악] 느낌을 관찰하고, 밖으로는 다른 사람의 느낌도 이해합니다. '저 사람이 화를 내는 것도 괴로운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구나. 저 사람이 집착하는 것도 즐거운 느낌을 더 원하기 때문이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자비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 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느낌에 반응하며 살아가고, 그 반응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의 관찰입니다.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립니다. 지금 탐욕이 있는 마음입니까? 탐욕이 없는 마음입니까? 지금 성냄이 있는 마음입니까? 성냄이 없는 마음입니까? [음악] 지금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입니까?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입니까? 또한 마음이 수축되어 있는지, 산만한지, 위대한지, 위대하지 않은지, 집중된 마음인지, 집중되지 않은 마음인지, 해탈한 마음인지, 해탈하지 못한 마음인지를 관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되 그것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화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화냄'이라는 정신 상태가 지금 존재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입니다. 내가 화났다고 하면 화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화가 나를 정의하고, 나는 화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화가 있다'고 하면 화는 그저 지나가는 현상일 뿐입니다.

마음 관찰의 핵심은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마치 [음악]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을 보듯이 관찰합니다. 구름이 하늘을 더럽히지 않듯이, 정신 현상도 우리 본성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음악] 그냥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어렵습니다. 특히 강한 [음악] 감정이 일어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그 안에 완전히 빠져들어 버립니다. [음악] 두려움이 오면 압도당합니다. 하지만 계속 수행하면 점점 거리가 생깁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 '아, 분노가 일어나는구나'라고 알아차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생깁니다. 그 공간이 점점 커집니다. 마침내 어떤 감정이 일어나든 그것에 휘말리지 않고 관찰할 [음악]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법을 관찰합니다. 법은 여기서 진리, 현상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5장애, 7각지, 4성제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제 경험 속에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5장애에는 마음을 흐리게 하는 장애물입니다. 감각적 욕망, [음악] 악, 혼침과 졸음, 들뜸과 후회, 의심입니다. 이것들이 마음속에 있을

때는 오장애가 있다고 알아차리고 없을 때는 오장애가 없다고 알아차립니다. 5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색, 수, 상, 행식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직접 관찰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조건에 따라 일어나며 무상하고 나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육천은 여섯 가지 감각 영역입니다.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과 법입니다. 각각의 영역에서 어떻게 집착이 생겨나는지 관찰합니다.

칠각지는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입니다. 마음 챙김, 법에 대한 탐구, 정진, 기쁨, 평온, 산매, 평정입니다. 이것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발달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사성제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것, 괴로움의 원인이 가래라는 것, 괴로움이 소멸될 수 있다는 것, 괴로움의 소멸 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지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 속에서 확인합니다. 지금 괴로움이 있습니까? 그 괴로움을 관찰하십시오. 그것의 원인을 찾아보십시오. 무엇에 대한 가래에서 비롯되었습니까? 가래를 놓아 놓았을 때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해 보십시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일시적이겠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멸로 가는 길을 실천합니다.

팔정도입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산매입니다. 이 여덟 가지는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께 작동합니다. 바른 견해가 있으면 바른 사유가 따라오고 바른 사유가 있으면 바른 말과 행위가 나옵니다. 다른 생계를 유지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정진할 수 있고 정진하면 마음 챙김이 강해지고 마음 챙김이 강해지면 산매가 깊어집니다.

특히 바른 마음 챙김과 바른 산매는 윗빠사나 수행의 핵심입니다. 마음 챙김으로 현재 순간에 깨어 있고 산매로 마음을 안정시켜 깊이 들여다봅니다. 삼매 즉 집중은 윗빠사나의 필수적입니다. 마음이 산란나면 미세한 현상을 볼 수 없습니다. 물이 파도치면 바닥이 보이지 않듯이 마음이 흔들리면 진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산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깊은 산매에 들면 매우 평온하고 즐거운 상태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산매에서 나오면 다시 평소의 마음 상태로 돌아옵니다. 진정한 변화는 지혜에서 옵니다. 무상 곧 무아를 직접 보는 지혜 말입니다. 이 지혜는 삼배 위에서 마음 챙김을 통해 얻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 척경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생겨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물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물고 생겨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은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윗빠사나의 핵심입니다. 모든 현상이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호흡이 들어왔다 나가고 느낌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생각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감정이 생겼다 없어집니다.

이것을 계속 관찰하면 어느 순간 깊은 통찰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 붙잡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괴롭다는 것, 그리고 나가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깨닫습니다. 이것은 지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뼈속 깊이 스며드는 깨달음입니다. 마치 손을 불에 댔을 때 뜨겁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직접적 앎입니다.

이 통찰이 일어나면 탐욕은 자연스럽게 약해집니다. 무상한 것을 어떻게 붙잡겠습니까? 나 아닌 것을 어떻게 나의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집착할 대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물론 한 번의 통찰로 모든 탐욕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랜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방향이 바뀝니다. 탐욕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수행을 계속하면 통찰이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단편적으로 보이던 것이 점점 명확해집니다. 무상 고, 무아가 모든 현상에 적용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큰 전환이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수다원 즉 흐름에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깨달음의 흐름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해탈에이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면 세 가지 속박이 끊어집니다. 첫째, 자아에 대한 견해가 끊어집니다. 몸이나 마음을 나라고 여기는 근본적 착각이 사라집니다. 둘째, 의심이 끊어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 수행의 효과에 대한 의심이 사라집니다.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계율에 대한 집착이 끊어집니다. 계율을 지키되 그것만이 해탈의 길이라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계율의 본질을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지킵니다.

수다원 이후에도 수행은 계속됩니다. 한번 돌아오는 자, 돌아오지 않는 자, 그리고 마침내 아라의 이름입니다. 아라는 모든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뿌리째 뽑힌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계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순간의 수행입니다. 지금 호흡을 관찰하고 지금 느낌을 알아차리고 지금 마음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는 이미 같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현재를 명려하게 관찰하라고 말입니다. 지금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수행의 전부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요? 특별히 시간을내어 자선을 하는 것도 좋지만 모든 순간이 수행의 기회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눈을 뜨는 그 순간을 알아차립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느낌. 빛이 눈에 들어오는 감각을 느낍니다. 서두르지 않고 그냥 알아차립니다.

세수할 때 물이 얼굴에 닿는 촉감을 느낍니다. 차갑거나 따뜻한 느낌,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감각을 관찰합니다. 세수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느낍니다.

밥을 먹을 때 첫 숟가락을 입에 넣기 전에 잠시 멈춥니다. 음식의 색깔을 보고 냄새를 막고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천천히 씹으며 맛을 응미합니다. 삼키는 과정도 관찰합니다.

걸을 때 발걸음 하나하나를 알아차립니다. 왼발이 들리고 앞으로 나가고 땅에 닿습니다. 오른발이 들리고 앞으로 나가고 땅에 닿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걷는 과정 자체를 경험합니다.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때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낍니다. 회의 중에 누군가 말할 때 진심으로 경청합니다. 마음이 딴 데로 가려할 때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옵니다.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을 온전히 듣습니다. 대답을 준비하느라 듣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상대방의 감정도 느껴봅니다. 그 사람도 나처럼 행복을 원하고 괴로움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화가 날 때 화를 억누르지도 폭발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냥 관찰합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열이 오르고 근육이 긴장되는 것을 느낍니다. 화가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립니다. 관찰하는 순간 화는 이미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슬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 관찰합니다. 가슴이 멍먹하고 눈물이 고이고 목이 매는 것을 느낍니다. 슬픔이 있구나라고 알아차립니다. 억압하지 않고 느끼되 휩쓸리지는 않습니다.

기쁠 때도 관찰합니다. 기쁨에 들떠 자재력을 잃지 않습니다. 기쁨이 일어나는구나라고 알아차리며 그 기쁨도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질 것임을 압니다. 즐기되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순간을 수행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특별한 장소가 필요 없습니다. 특별한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지금 여기가 바로 수행처입니다.

물론 정기적으로 앉아서 하는 수행도 중요합니다. 마음을 깊이 가라앉치고 미세한 현상을 관찰하려면 조용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능하다면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수행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10분이라도 좋습니다. 혹은 잠들기 전에 10분이라도 좋습니다.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고 몸을 느끼고 마음을 지켜봅니다.

처음에는 10분도 길게 느껴질 것입니다. 다리가 아프고 마음은 산란하고 지루할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하십시오. 매일 조금씩이라도 계속하십시오. 물이 끓으려면 계속 불을 떼야 합니다. 잠깐 데웠다가 시키고 또 잠깐 데웠다가 시키면 절대 끓지 않습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집중 수행 기간을 가지십시오. 며칠이라도 일주일이라도 다른 모든 일을 내려놓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런 시간을 통해 깊은 통차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중 수행 기간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수행에서 얻은 통차를 일상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좌선 중에만 마음 챙김하고 일상에서는 무명 속에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진정한 수행은 삶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일할 때도 쉴 때도 혼자 있을 때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능합니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탐욕을 놓아내는 것은 무엇인가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얻는 것입니다. 자유를 얻고 평화를 얻고 진정한 행복을 얻습니다. 탐욕 속에서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둘을 원하고 열을 얻으면 100을 원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탐욕을 놓으면 이미 가진 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이 순간이 완전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건강이 최고의 이익이요 만족이 최고의 재산이요 신뢰가 최고의 친척이요 열반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입니다. 만족하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부유함입니다.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적게 필요로 하는 것이 부유함입니다. 탐욕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만족이 옵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세상을 포기하거나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탐욕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탐욕에서 벗어나면 진정으로 필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세상에 기여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탐욕이 사라진 자리에 자비가 핍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약해지면 남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으로 느껴집니다. 돕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혜와 자비는 함께 갑니다. 지혜로 무아를 보면 자비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자비를 실천하면 지혜가 더욱 깊어집니다. 이 둘은 깨달음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45년간 중생들을 가르치신 것도 이 자비심 때문입니다. 이미 해탈하셨으니 가만히 열반의 평화를 즐기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길을 걸어 마을마다 다니시며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어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 사람이 깨어나면 그 깨어남은 주변으로 퍼져나갑니다.

지금이 순간 여러분은 새로운 시작점에서 있습니다. 탐욕의 구조를 이해했고 그것이 만드는 사슬을 보았고 그것을 놓아내는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실천할 차례입니다. 알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직접 수행해야 합니다. 매일 매순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넘어질 것입니다. 무명에 빠질 것입니다. 탐욕에 휘말릴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고 말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시오. 작은 실천이 모여 큰 변화가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탐욕의 끝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오온이 만든 집착의 구조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지혜와 자비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보여 주셨고 수많은 수행자들이 걸어갔습니다.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지금이 순간부터 시작하십시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송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암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