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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흐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라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마음을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는 이 생각들을 통해 나를 느끼고 나를 확인하며 나를 증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법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그 존재조차 실은 생각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라는 깊은 가르침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울 앞에 섰습니다. 거울 속에는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춰집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생각합니다. "이것이 나다. 이 얼굴이 나고, 이 표정이 나고, 이 모습이 바로 나다." 하지만 거울에서 한 발짝 물러서면 그 모습은 사라집니다. 거울 속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거울 속 모습이 진짜 나였다면 거울을 떠난 순간 나는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사위성의 기수급 고독원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나라고 부르는가?" 제자들은 각자 대답했습니다. "이 몸이 나입니다. 이 마음이 나입니다. 이 생각이 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이 나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것들이다. 어떻게 변하고 사라지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는군. 나는 요즘 힘든가 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와 부딪혔을 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지? 무시하는 건가?" 직장에서 상사에게 질책을 들었을 때 생각합니다. "나는 왜 항상 이런 일을 겪는 걸까? 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인가?"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생각합니다. "나는 대체 뭘 하며 사는 걸까? 나의 삶은 의미가 있는 걸까?"
이 모든 순간 우리는 나를 느낍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아침의 나, 지하철의 나, 직장의 나, 침대의 나가 모두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화엄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화가와 같아서 온갖 세간을 그려낸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세상을 그려내고 그 중심에 나라는 주인공을 그려넣습니다. 행복할 때는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불행할 때는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립니다. 칭찬받을 때는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비난받을 때는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립니다.
이 모든 그림 속에서 우리는 나를 발견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림일 뿐 실체가 아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제 자신을 너무나 명확하게 느낍니다. 배가 고프면 내가 배고프다는 것을 알고, 아프면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분명한데 어찌 나가 없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대가 느끼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발에 있는가? 손에 있는가? 머리에 있는가? 가슴에 있는가? 그대의 몸을 찾아보아도 나라는 실체는 없다. 다만 몸에 감각이 있고, 그 감각에 대한 생각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그 생각을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자들도 비슷한 발견을 했습니다. 우리의 뇌는 매 순간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면서 그것들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엮어냅니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 나라는 주인공을 배치합니다. "나는 어제 이런 일을 겪었고, 오늘 이런 감정을 느끼며, 내일 이런 일을 할 것이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나의 연속성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서사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매 순간 새로운 경험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 경험하는 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 어떤 외도 수행자가 부처님께 찾아와 물었습니다. "고탐하시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내세에도 나는 계속 존재합니까?" 부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외도 수행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죽으면 나는 완전히 사라집니까?" 부처님께서는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외도 수행자가 당황하며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까?" 그제야 부처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그대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나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묻고 있으니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처음부터 나라는 것이 없는데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대화는 우리에게 깊은 충격을 줍니다. 우리는 평생 나의 존재를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여기 있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지 않는가?"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명백함 자체를 의심하라고 하십니다. 생각이 일어난다고 해서 생각하는 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감정을 느끼는 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이 일어난다고 해서 행동하는 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각이 일어나고, 감정이 일어나고, 행동이 일어날 뿐입니다.
어느 날 한 비구가 명상 중에 깊은 통찰을 얻었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달려가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나가 있는 것 같고, 생각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집니다." 부처님께서는 미소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렇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대는 나를 느낀다.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 나도 함께 사라진다. 그렇다면 생각 사이에, 그 고유한 순간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비구는 깊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 그 짧은 침묵의 순간에 나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너무나 빠르게 다음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강물에 비유해 봅시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어제 흘렀던 물과 오늘 흐르는 물은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같은 강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물의 흐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도 끊임없이 흐릅니다. 어제 생각했던 나와 오늘 생각하는 나는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같은 나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생각의 흐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물 그 자체에는 강이라는 실체가 없듯이, 생각의 흐름 그 자체에도 나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중국 선종의 육조혜능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 경험하는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나라는 존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를 느끼는 것은 나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을 떠올려 봅시다. 의식이 돌아오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 내가 깨어났구나"라는 생각입니다. 그 순간 나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생각하기 전, 의식이 돌아오는 그 찰나에는 나가 없었습니다. 단지 깨어남이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생각과 함께 나타났다가, 밤에 잠들면서 생각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집니다. 매일 밤 우리는 나를 잃고, 매일 아침 나를 다시 만들어 냅니다.
한 구도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제 마음을 관찰하려고 노력하는데, 관찰할수록 나는 더욱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관찰하는 그대가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마음을 본다고 생각하는 순간,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분리되고, 그 분리 속에서 나는 더욱 고착화된다. 진정한 관찰은 보는 자가 없는 봄이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듭니다.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그 질문 속에 이미 나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깨달음을 얻을 나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바랄 때, 괴로워하는 나를 실제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생각이 만들어낸 환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만약 색으로서 나를 보려 하고,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여기서 여래를 본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형상이나 소리, 즉 우리의 감각과 생각으로는 진리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감각과 생각은 끊임없이 나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보려면 나라는 환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SNS를 통해 매일 나를 만들어 냅니다. 아침에 먹은 음식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며 "이것이 나의 아침이다"라고 말합니다. 여행지의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으며 "이것이 나의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좋아요와 댓글을 통해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다" 혹은 "나는 외로운 사람이다"라고 확인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나를 구축하고, 유지하고, 방어합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순간, 그 나는 어디로 갑니까? 화면 속 나는 실제하는 나입니까? 아니면 생각이 만들어낸 이미지입니까?
어떤 사람이 스승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저는 명상을 10년 동안 해왔지만, 여전히 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나를 없앨 수 있습니까?" 스승이 물었습니다. "그대가 없애려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람이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제 안에 있습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꺼내어 내게 보여주게." 그 사람은 당황했습니다. 나를 꺼내어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꺼내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없앤단 말인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을 찾으려 하지 말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우리가 나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나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나는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통해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봅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사람들은 손가락을 볼까요? 달을 볼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달을 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손가락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생각은 손가락과 같습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도구일 뿐, 실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생 손가락만 보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나다"라고 믿으며 그 손가락을 꼭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라고 하십니다. 생각이 아닌 진리를 보라고 하십니다.
젊은 시절에 붓다.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 싯다르타 태자는 궁전을 떠나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6년 동안 극심한 고행을 했습니다. 하루에 곡식 한 알만 먹으며 몸을 말라비틀어지게 했습니다. "나를 괴롭히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년 후 그는 깨달았습니다. 괴롭히는 나와 괴롭힘을 당하는 나는 모두 생각이 만들어낸 환영이라는 것을. 나를 이기려는 노력 자체가 나를 더욱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고행을 멈추었습니다. 니란자라 강에서 목욕하고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보리수 아래 앉아 명상에 들었습니다. 이때 그는 더 이상 나를 이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 보려고 했습니다. 그 밤, 새벽별이 떠오르는 순간 싯다르타는 깨달았습니다. "신기하도다. 신기하도다.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깨닫지 못하는구나." 이 순간 그는 부처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깨달았기에 부처가 되었을까요? 나라는 것이 망상이고 집착이며, 그것만 내려놓으면 누구나 본래 부처라는 것을. 우리는 부처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라는 생각이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 밀라레파는 동굴에서 수행하던 중 악마를 만났습니다. 악마는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나타나 밀라레파를 위협했습니다. 처음에 밀라레파는 두려워하며 악마를 물리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악마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러다 밀라레파는 깨달았습니다. 악마는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영이라는 것을. 나를 지키려는 마음이 악마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그 순간 밀라레파는 악마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오, 나의 스승이여, 그대는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로다." 그러자 악마는 미소지으며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두려움, 모든 괴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지키려는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입니다.
한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착각한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는 나가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비가 내립니다. 우리는 비가 내린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비를 내리게 하는 주체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구름과 수증기와 온도와 기압의 조건이 모여 비가 내릴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일으키는 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감각과 무의식의 흐름이 모여 생각이 일어날 뿐입니다.
어느 선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본래 면목은 무엇이더냐?" 제자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선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내 부모가 만나기 전, 내 조부모가 태어나기 전, 내 선조들이 존재하기 전, 그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제자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선승이 말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너는 없었다. 다만 생각이 너를 만들어 낼 뿐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나를 확인합니다. "이것이 내 얼굴이다. 어제보다 주름이 늘었다. 나는 늙어가고 있다." 하지만 10년 전 사진을 보면 전혀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그 얼굴도 나였습니까? 아기 때 사진을 보면 더욱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그 얼굴도 나였습니까? 어느 것이 진짜 나입니까? 아니면 모든 것이 나입니까? 만약 모든 것이 나라면, 나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어떻게 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강물은 흐릅니다. 어제의 물과 오늘의 물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같은 강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편의를 위한 명칭일 뿐, 실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불은 무엇으로 인해 타오르는가? 나무로 인해 타오른다. 나무가 다 타 버리면 불은 꺼진다. 그렇다면 불은 어디로 갔는가? 동쪽으로 갔는가? 서쪽으로 갔는가? 남쪽으로 갔는가? 북쪽으로 갔는가? 아니다. 불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조건이 사라졌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조건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몸이라는 조건, 감각이라는 조건, 생각이라는 조건이 모여 나라는 느낌이 일어납니다. 조건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갔습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잠에 빠진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 그 순간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존재합니까? 아침에 깨어나 우리는 말합니다. "나는 잘 잤다." 하지만 잠자는 동안 나를 경험했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잠들기 전에 사라졌다가 깨어난 후에 다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같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생각이 만들어낸 연속성의 환영입니다.
중국 당나라 시대의 조주선사에게 한 승녀가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했습니다. "무." 이 '무'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있다와 없다를 넘어선 경지를 가르칩니다.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있다고 하면 실체로 집착하게 되고, 없다고 하면 허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입니다. 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입니다.
현대인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런 질문들로 고통받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고통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체성이라는 것 자체가 환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를 찾으려 하지만, 찾을 나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지키려 하지만, 지킬 나는 원래 없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증명하려 하지만, 증명할 나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한 수행자가 깊은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몇 시간 후 명상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상합니다. 명상 중에는 나가 없었는데, 지금은 나가 있습니다." 스승이 물었습니다. "명상 중에 나가 없다는 것을 누가 알았는가?" 수행자는 깨달았습니다. 나가 없다는 것을 아는 그것도 나라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진정으로 나가 없다면, 나가 없다는 것조차 알 수 없습니다. 알려고 하는 순간 나가 다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저런 것을 좋아해. 나는 이렇게 살고 싶어."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SNS의 글을 쓸 때도, 혼자 생각할 때도 우리는 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루에 몇 천 번, 몇만 번씩 '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 보면 나가 정말 존재한다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반복해도 환영은 실체가 되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아무리 오래 봐도 그것이 실제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께서 녹야에서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고는 괴로움이고, 집은 괴로움의 원인이며, 멸은 괴로움의 소멸이고, 도는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이다." 이것이 사성제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가래, 즉 집착입니다. 무엇에 대한 집착입니까?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는 행복해야 한다. 나는 성공해야 한다. 나는 인정받아야 한다." 이 모든 집착의 뿌리에는 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환영임을 깨닫는 순간, 모든 집착이 무너집니다.
생각이 흐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할까?" 이 생각 속에는 불행한 나가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생각 속에는 행복을 원하는 나가 있습니다. "나는 변해야 한다." 이 생각 속에는 변화가 필요한 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나는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생각이 멈추면 나도 멈춥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나라는 환영에서 벗어날 뿐입니다.
어떤 구도자가 수십 년간 수행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좌절한 그는 산을 내려와 평범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을로 가는 길에 시냇물을 건너다가 돌다리 위에서 미끄러졌습니다. 그 순간,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그 짧은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떨어지는 동안에는 나가 없었다는 것을. 두려움도, 걱정도, 생각도 없었다는 것을. 다만 떨어짐만 있었다는 것을. 물에 빠져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수십 년간 찾았던 것을 미끄러지는 순간에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이 멈춘 곳에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 뭐 입지?"라고 생각하며 옷을 선택합니다. 식당에서 "뭐 먹지?"라고 생각하며 메뉴를 선택합니다. 이 모든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나를 느낍니다.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나, 결정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느낍니다. 하지만 신경과학자들은 흥미로운 발견을 했습니다. 우리가 선택했다고 의식하기 전에 이미 뇌에서는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식적인 나의 선택은 사후에 만들어진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이것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뜻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라고 하십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나가 없는데 무엇의 자유를 논하겠습니까? 다만 원인과 결과의 흐름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연기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에 따라 사라집니다. 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밤하늘의 별을 봅시다. 수천 년 전 사람들도 이 별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저 별은 영원하다. 우리는 죽어도 저 별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천문학은 알려줍니다. 별도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우리가 보는 별빛은 수백만 년 전에 출발한 빛이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 그 별은 이미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의 환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것도 과거의 환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이미 사라졌고, 다음 순간에 나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을 나는 고정된 실체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능가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행복도, 괴로움도, 성공도, 실패도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조차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나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열반이 남는다고. 모든 생각이 사라진 자리, 모든 환영이 거친 자리에 진정한 평화가 있다고.
우리는 지금까지 나라는 것이 생각이 만들어낸 환영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더 깊이 들어가 물어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이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년 전에 명확한 답을 주셨습니다. 5운입니다.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다섯 가지 무더기가 모여 나라는 착각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자바암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색은 나가 아니며, 나는 색이 아니다.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다." 이 짧은 구절 속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몸, 우리의 감정, 우리의 생각, 우리의 의지, 우리의 의식, 그 어느 것도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평생 이것들을 나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해변을 걷다가 모래성을 보았습니다. 정교하게 쌓아올린 아름다운 모래성이었습니다. 그는 감탄하며 생각했습니다. "이 모래성은 튼튼하고 견고하다." 하지만 파도가 한번 밀려오자 모래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모래알들 뿐이었습니다. 모래성은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잠시 모인 모래알들의 조합이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온이라는 모래알들이 잠시 모여 있는 것일 뿐입니다.
먼저 색(色)을 살펴봅시다. 색은 물질적 존재, 즉 우리의 몸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몸을 보며 "이것이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야." 하지만 이 몸은 정말 나일까요? 10년 전의 몸과 지금의 몸은 완전히 다릅니다.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새로 태어납니다.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7년이면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고. 그렇다면 7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몸입니다. 어느 것이 진짜 나입니까?
부처님 당시 어떤 비구가 자신의 몸을 관찰했습니다. 머리카락, 털, 손톱, 이빨,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신장, 심장, 간, 비장, 폐, 창자, 위, 배설물을 하나하나 관찰했습니다. 이것을 부정관이라고 합니다. 관찰하면 할수록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 몸 어디에도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다만 여러 요소들이 모여 잠시 형태를 이루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머리카락이 나입니까? 머리카락을 자르면 나가 줄어듭니까? 손톱이 나입니까? 손톱을 깎으면 나가 사라집니까? 어느 것 하나 나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현대 의학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 몸은 약 37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세포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며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심장 세포는 피를 펌프질하고, 뇌세포는 전기 신호를 주고받으며, 피부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재생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은 내가 원해서 뛰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뜁니다. 호흡도 내가 원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몸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한 수행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제 몸을 느낍니다. 손을 움직이면 손이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면 발이 움직입니다. 이것이 제가 몸의 주인이라는 증거 아닙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심장을 멈춰 보라. 늙는 것을 멈춰 보라. 병드는 것을 막아보라. 할 수 있는가?" 수행자는 침묵했습니다. 스승이 계속했습니다. "그대가 주인이라면 왜 그대의 몸이 그대의 뜻대로 되지 않는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인연에 따라 몸이 움직일 뿐, 움직이게 하는 나는 없다."
다음으로 수(受)훈을 살펴봅시다. 수훈은 느낌, 감각을 의미합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우리는 이 느낌들을 통해 나를 경험합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지금 슬프다. 나는 지금 화가 난다." 이런 느낌들이 나를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이 느낌들은 정말 나일까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점심 때쯤 나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분이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역시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무엇입니까? 행복한 나, 불행한 나, 긍정적인 나.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느낌이 어떻게 나가 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괴로운 느낌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어찌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느낌은 구름과 같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떠 있습니다. 잠시 후 바람이 불면 구름은 사라집니다. 구름이 떠 있다고 해서 하늘이 구름인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느낌이 일어난다고 해서 우리가 느낌인 것은 아닙니다. 하늘은 구름이 오든 가든 변하지 않듯이, 우리의 본성도 느낌이 오든 가든 변하지 않습니다.
어느 선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무슨 느낌이 드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평온함을 느낍니다." 선승이 물었습니다. "그 평온함은 어디에 있는가?" 제자가 가슴을 가리켰습니다. 선승이 말했습니다. "가슴을 열어 그것을 꺼내 보여주라." 제자는 당황했습니다. 느낌은 꺼내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선승이 말했습니다. "꺼내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어찌 네가 될 수 있겠는가? 느낌은 그저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상(想)훈은 생각과 관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판단하며, 미래를 계획합니다. 이 생각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나를 규정합니다. "나는 착한 사람이야. 나는 똑똑해. 나는 부족해." 이 모든 것이 생각이 만들어낸 관념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얼마나 자주 바뀝니까? 어제는 어떤 결정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때는 성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침에는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녁에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은 이렇게 끊임없이 변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물결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렇게 불안정한 것이 어떻게 나가 될 수 있습니까?
중화암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매일 명상하며 제 생각을 관찰합니다. 그런데 생각이 너무 많아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생각들이 모두 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비구여, 생각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의 것이라면, 그대가 원하지 않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가? 그것은 생각이 그대의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이것은 깊은 통찰입니다. 우리는 종종 원하지 않는 생각에 시달립니다. 불안한 생각, 걱정스러운 생각, 분노하는 생각이 자꾸 떠오릅니다. "이런 생각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에도 계속 떠오릅니다. 만약 생각이 정말 나라면, 내가 원하지 않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생각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저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행(行)운은 의지와 형성 작용을 의미합니다. 무언가를 하려는 의도, 결심, 습관적 반응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결정을 내립니다. "오늘은 운동을 해야지. 이 일은 내일 하자. 그 사람에게 전화해야겠다." 이런 의도와 결심을 통해 우리는 나의 주체성을 느낍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다." 하지만 정말 나라는 것일까요? 신경 과학자들은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피험자에게 자유롭게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뇌의 활동을 측정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피험자가 "내가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의식하기 약 0.5초 전에 이미 뇌에서는 손가락을 움직이라는 신호가 발생했습니다. 즉, 의식적인 결정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사후 해석일 뿐이었습니다. 내가 선택했다는 느낌은 뇌가 만들어낸 환영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이것을 아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의지는 어디서 오는가? 과거의 업에서 온다.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의지를 만들고, 현재의 의지가 미래의 행위를 만든다." 이것이 연기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결심할 때, 그것은 진공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경험, 교육, 문화, 유전자, 무의식적 습관 등 수많은 조건이 모여 그 결심을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그 결심을 내린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조건들의 흐름만 있을 뿐, 결심하는 독립적인 나는 없습니다.
한 수행자가 21일 동안 단식 수행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굳게 다짐했습니다. "나는 반드시 21일을 채우겠다." 하지만 7일째 되던 날, 극심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는 좌절했습니다. "나는 의지가 약한 사람이다. 나는 실패자다." 스승이 물었습니다. "7일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의지였는가?" 수행자가 대답했습니다. "제 의지였습니다."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8일째 참지 못한 것은 누구의 의지였는가?" 수행자가 대답했습니다. "그것도 제 의지였습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두 개의 의지가 있는가? 참는 의지와 참지 못하는 의지. 어느 것이 진짜 너인가?" 수행자는 깨달았습니다. 의지라는 것도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일 뿐, 그것을 가진 나는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식(識)원을 살펴봅시다. 식원은 의식, 앎, 인식 작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 경험한다는 것, 의식한다는 것 자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몸은 내가 아닐 수 있지만, 의식은 분명 나다. 의식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마저도 나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의식을 관찰해 봅시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이 말을 듣고 있습니다. 듣는 의식이 일어납니다. 동시에 주변의 소리도 들립니다. 듣는 의식이 분산됩니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생각하는 의식이 일어납니다. 몸이 불편해집니다. 느끼는 의식이 일어납니다. 의식은 이렇게 끊임없이 대상을 바꿔가며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듣는 의식, 보는 의식, 냄새 맡는 의식, 맛보는 의식, 촉감을 느끼는 의식, 생각하는 의식. 이 모든 의식이 각각 다른 순간에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바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식은 인연을 따라 일어난다. 눈과 색을 인연하여 안식이 일어나고, 귀와 소리를 인연하여 이식이 일어나며, 코와 냄새를 인연하여 비식이 일어난다. 인연이 없으면 의식도 없다." 즉, 의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 기관과 대상이 만나는 순간에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치 두 나무를 비벼서 불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와 나무가 만나 마찰이 일어나면 불이 일어나지만, 나무를 떼어 놓으면 불은 사라집니다. 불이 나무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모였을 때 잠시 나타났을 뿐입니다.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부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생각합니다. 고로 저는 존재합니다. 생각하는 나, 의식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반문하셨습니다. "그대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졌을 때,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철학자가 대답했습니다. "잠들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 의식이 있었는가?" 철학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의식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의식이 없는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의식이 나라면, 의식이 사라진 순간 나도 사라져야 하지 않는가?" 철학자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심오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밤 잠들면서 의식을 잃습니다. 깊은 수면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 순간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의식이 나라면, 잠드는 순간 나는 죽고, 깨어나는 순간 새로운 나가 태어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존재입니까? 이런 모순에 직면하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의식도 나가 아니라는 것을.
중국 당나라의 임재선사는 이렇게 갈파하셨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이 말씀은 폭력을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개념, 모든 관념을 놓으라는 뜻입니다. 부처라는 개념에도 집착하지 말고, 나라는 개념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깨달음이라는 개념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개념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오온 그 어느 것도 나가 아니라는 것을. 몸도 나가 아니고, 느낌도 나가 아니며, 생각도 나가 아니고, 의지도 나가 아니며, 의식조차 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명확하게 답하십니다. 나는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을 처음 들으면 두렵습니다. "내가 없다고? 그럼 지금 이렇게 경험하고 있는 이것은 뭐지?"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나가 없다는 것이 허물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자유를 의미한다고 하십니다. 나라는 환영에서 벗어나는 순간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고 하십니다.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이 거울을 보다가 자신의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착각했습니다. 왕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내 머리가 사라졌다! 내 머리를 찾아라!"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신하들이 왕의 머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왕의 머리는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왕이 거울을 잘못 본 것뿐이었습니다. 어느 현자가 와서 왕에게 말했습니다. "폐하, 머리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원래 거기 있었습니다." 왕이 다시 거울을 제대로 보자 머리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평생 나를 찾아 헤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지만 처음부터 나는 없었습니다. 찾을 나가 없는데 무엇을 찾겠습니까? 다만 나가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고통이 사라집니다.
반야심경에는 이런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몸이 있지만 그것은 공합니다. 느낌이 일어나지만 그것도 공합니다. 생각이 흐르지만 그것도 공합니다. 나라는 느낌이 있지만 그것도 공합니다. 공하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체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흐른다는 뜻입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아를 깨달으면 모든 것이 사라집니까? 세상도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무가 됩니까?"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비구여, 무아를 깨달으면 사라지는 것은 하나뿐이다. 고통이 사라진다. 세상은 여전히 있고, 사람도 여전히 있으며, 삶도 여전히 흘러간다. 다만 나라는 집착이 사라질 뿐이다. 그리고 그 집착이 사라지면 모든 고통도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무아를 깨닫는다는 것은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더 풍요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필터를 통해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게 좋은가 나쁜가? 이것은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이런 판단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어느 선승이 제자와 함께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무아를 깨달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됩니까?" 바로 그때 선승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습니다. "아야!" 선승이 소리쳤습니다. 제자가 놀라며 물었습니다. "스승님, 무아를 깨달으셨다면서 왜 아프다고 하십니까?" 선승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픔은 여전히 있다. 다만 내가 아프다는 생각이 없을 뿐이다. 아픔이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 아파하는 나는 없다." 이것은 중요한 구분입니다. 무아를 깨닫는다고 해서 감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감각도 여전히 일어납니다. 하지만 내가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고통과 나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고통은 있지만, 고통받는 나는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고의 소멸입니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나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행복해야 해. 나는 성공해야 해. 나는 사랑받아야 해." 이런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나는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 돼. 나는 이렇게 살면 안 돼." 이런 저항이 일어날 때 괴로움이 증폭됩니다. 하지만 나가 환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이 모든 괴로움이 근본부터 무너집니다. 행복해야 할 나가 없는데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성공해야 할 나가 없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어느 마을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항상 나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내 집, 내 가족, 내 재산, 내 명예." 그는 끊임없이 나의 것을 지키려 했고, 늘리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나은 것을 보면 질투했고, 자신이 손해를 보면 분노했습니다. 그는 평생 불안하고 괴로웠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나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살았습니다. 좋은 일이 생겨도 내가 잘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나쁜 일이 생겨도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이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평생 평온하고 자유로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고, 애착하기 때문에 슬픔이 생긴다. 집착과 애착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다." 무엇에 대한 집착입니까?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를 지키려는 집착, 나를 증명하려는 집착. 나를 사랑받게 하려는 집착. 이 모든 집착이 고통의 뿌리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자아가 강할수록 스트레스가 크다고 말합니다. 자존감이 손상될까 봐 두려워하고,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며, 실수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반면 자아가 약해진 사람, 즉 나라는 생각에 덜 사로잡힌 사람은 더 자유롭습니다. 실패해도 "내가 실패했다"가 아니라 "실패가 일어났다"고 봅니다. 비난받아도 "내가 비난받았다"가 아니라 "비난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엄청난 자유를 가져옵니다.
티베트의 어느 스승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고통이 일어날 때, 그것을 환영하라. 오, 고통이여, 잘 왔다. 너는 내게 무아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로다." 이렇게 생각하면 고통은 더 이상 적이 아니라 스승이 된다. 이것은 고통을 즐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과 나를 분리하라는 뜻입니다. 고통은 일어나는 현상일뿐, 겪는 나는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한 수행자가 10년 동안 동굴에서 수행했습니다. 어느 날 마을로 내려왔을 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10년 동안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수행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실망하며 물었습니다. "그럼 10년이 헛된 것 아닙니까?" 수행자가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깨달을 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깨달음입니다.
무아의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만, 체험으로 깨닫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생각이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매 순간 나를 만들어 왔습니다. 수십 년 동안 반복된 습관입니다. 이 습관을 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보여 주셨고, 수많은 조사들이 증명했습니다. 무아를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합니다. "너무나 간단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을 찾느라 평생을 헤맸다."
일본 선불교의 독 선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것이요, 자기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만물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잊는다는 것, 이것이 무아입니다. 나를 내려놓는 순간 전체와 하나가 됩니다. 분리가 사라지고, 경계가 무너지며, 모든 것과 연결됩니다.
오온이 모두 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공(空)이 남는다. 공은 텅 빈 것이 아닙니다. 가득 참입니다. 나라는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 전체가 드러납니다. 우주 전체가 나입니다. 아니, 나와 우주의 구분이 사라집니다.
바닷물 한 방울을 떠올려 봅시다. 이 물방울은 자신을 바다와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작은 물방울이야. 나는 바다가 아니야." 하지만 물방울이 바다로 돌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물방울의 경계가 사라지고 바다와 하나가 됩니다. 물방울이 사라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물방울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아니, 원래 바다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경계가 사라지면 전체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죽음이 아닙니다. 나라는 환영의 소멸입니다. 그리고 그 소멸 속에서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제 깊은 진리 앞에서 있습니다. 나는 생각이 만들어낸 환영이고, 오온 어디에도 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환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명확한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관찰입니다. 생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모든 법을 관찰할 때 법에 머물지 않고 법을 따라가지도 않는다.
이 구절은 수행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에 머물지도 말고 그것을 쫓아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려 하지 말고 생각을 억누르려 하지 말며 생각을 분석하려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저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명상할 때마다 수많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 생각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는가?" "예,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제자는 잠시 침묵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계속하셨습니다. "생각을 보고 있다면 그대는 생각이 아니다. 거울이 영상을 비추지만 거울은 영상이 아니듯이 그대는 생각을 비추지만 생각이 아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통찰입니다. 우리는 평생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해 왔습니다. "내 생각, 나의 생각, 내가 생각한 것." 하지만 생각을 관찰할 수 있다면 관찰하는 자와 관찰되는 것은 다릅니다. 생각을 볼 수 있다면 보는 자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생각을 보는 그 의식입니까? 아닙니다. 그 의식마저도 관찰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가 아닙니다.
어느 선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승이 호통쳤습니다. "그것도 생각이다."
제자가 깨달았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의 생각이라는 것을. 생각 없음을 생각하는 것도 생각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각을 멈추려 하지 말고 생각 없음을 만들려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다만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마치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보듯이 구름을 쫓아가지도 않고 구름을 없애려 하지도 않으며 그저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봅니다. 하늘은 구름이 오든 가든 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성도 생각이 오든 가든 변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명상을 시작합니다. 조용히 앉아 호흡을 관찰합니다. 들숨과 날숨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잠시 고유함이 찾아옵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튀어나옵니다. "오늘 회의에서 뭐라고 말하지?" 이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첫 번째 선택은 생각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회의 준비를 제대로 했나? 부장님이 뭐라고 하실까? 저번에 실수한 거 또 얘기하시면 어쩌지?" 생각은 끝없이 확장됩니다. 회의 생각이 실수 생각으로, 실수 생각이 자책으로, 자책이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어느새 나는 불안한 사람이 됩니다.
두 번째 선택은 생각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안 돼. 지금은 명상 시간이야. 이런 생각하면 안 돼." 하지만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생각은 더 강해집니다. 생각하지 말자는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낳습니다. "왜 자꾸 생각이 나지? 나는 집중력이 없는 사람이야." 어느새 나는 무능한 사람이 됩니다.
세 번째 선택이 있습니다. 관찰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그냥 봅니다. "아, 회의에 대한 생각이 일어났구나." 판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으며 그저 알아차립니다. 생각을 쫓아가지도 않고 억누르지도 않습니다. 마치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차를 보듯이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지만 차를 타지는 않습니다. 생각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만 생각에 올라타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사념처행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몸을 관찰하고 느낌을 관찰하며 마음을 관찰하고 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특히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념처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비구는 마음이 탐욕에 물들었을 때 마음이 탐욕에 물들었다고 알고, 마음이 탐욕에서 벗어났을 때 마음이 탐욕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이것이 관찰입니다. 탐욕스러운 마음을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탐욕스러운 마음이 있다고 알아차립니다.
한 수행자가 시장을 지나가다가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았습니다. 순간 침이 고였습니다. "저것 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수행자가 어떻게 탐욕을 내지? 나는 아직 멀었어." 자책하고 좌절하고 나는 부족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났구나." 그저 알아차렸습니다. 욕구를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욕구를 억누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욕구가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욕구를 있는 그대로 보자 욕구는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관찰의 힘입니다.
생각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것은 저절로 힘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감정은 '나'라는 동일시를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내가 화났다고 생각하면" 화는 더 커집니다. "나는 불안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면 불안은 정체성이 됩니다. 하지만 "화가 일어났다. 불안이 일어났다"고 보면 그것은 지나가는 현상일 뿐입니다.
중국 선종의 육조해능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은 묶인 것이요. 생각이 일어나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자유다." 생각 없음을 목표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살아 있는 한 생각은 계속 일어납니다. 문제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나'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명상할 때 잠념이 너무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잠념을 없앨 수 있습니까?" 스승이 물었습니다. "잠념이 일어나는가?" "예,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누가 보고 있는가?" "제가 보고 있습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잠념에서 벗어나 있다. 잠념을 보고 있다는 것은 잠념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깊은 진리입니다. 관찰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습니다. 분노를 관찰하는 순간 우리는 분노가 아닙니다. 슬픔을 관찰하는 순간 우리는 슬픔이 아닙니다. 생각을 관찰하는 순간 우리는 생각이 아닙니다. 관찰은 자동으로 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 거리 속에서 자유가 생겨납니다.
태국의 아잔차 스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영상은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다. 생각과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을 적으로 여겨왔습니다. "이 생각만 없으면 평화로울 텐데." 하지만 생각은 적이 아닙니다. 생각은 그저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적으로 여기지 않듯이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적으로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비는 그냥 옵니다. 생각도 그냥 옵니다.
어느 수행자가 폭풍우 치는 날 명상하고 있었습니다. 천둥 소리가 요란했고 빗소리가 시끄러웠습니다. "이 소음 때문에 집중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소음이 문제가 아니라 소음 때문에 집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문제라는 것을. 그는 관점을 바꿨습니다. 천둥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항 없이, 판단 없이 그냥 들었습니다. 빗소리도 들었습니다. 시끄럽다는 생각 없이 그냥 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소음은 여전했지만 소음과 싸우는 '나'는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관찰 수행의 핵심입니다. 현상과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과 싸우지 않고 감정과 싸우지 않으며 소음과도 싸우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부 경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숙련된 목수가 나무에 곧고 굽음을 알듯이 수행자는 마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안다." 목수는 구부러진 나무를 보고 화내지 않습니다. "왜 이 나무는 곧지 않지?"라고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나무가 구부러져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 맞게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마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압니다.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고 알고 슬프면 슬프다고 압니다. "화내면 안 돼"라고 자책하지 않습니다. 그저 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사람이 화가 났습니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예전 같으면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했을 것입니다. 첫째, 화를 폭발시키기. 상사에게 따지고 동료에게 푸념하고 집에 가서 가족에게 짜증내기. 둘째, 화를 억누르기. "화내면 안 돼. 참아야 해. 나는 성숙한 사람이야." 하지만 억눌린 화는 몸 안에서 썩어 병이 됩니다.
이제 그는 세 번째 방법을 압니다. 관찰입니다. 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아, 지금 화가 일어났구나." 화를 밀어내지 않고 화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화를 느낍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빨라지고 주먹이 저절로 쥐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관찰합니다. "화라는 에너지가 몸을 통과하고 있구나."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관찰하는 순간 화는 더 이상 '나의 화'가 아닙니다. 그저 일어나는 에너지일 뿐입니다. 몇 분이 지나면 화는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파도가 치솟다가 가라앉듯이.
이것을 윗빠사나 즉 관수행이라고 합니다. 윗빠사나는 명확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색안경을 끼지 않고 선입견 없이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봅니다. 이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생 판단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 이것은 내게 이롭다. 저것은 해롭다." 끊임없이 판단하고 분류합니다.
미얀마의 마하사야도 스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알아차림은 레이블을 붙이는 것이다. 걸을 때 '걷는다'. 걷는다. 앉을 때 '앉는다'. 앉는다. 생각할 때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속으로 말하라."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레이블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행위에서 한 걸음 물러납니다. 걷는다고 말하는 순간 걷기와 동일시가 깨집니다. 생각한다고 말하는 순간 생각과 동일시가 깨집니다. 작은 틈이 생기고 그 틈 속에서 자유가 싹듭니다.
수행자가 이 방법으로 수행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작했습니다. "일어난다. 일어난다." 화장실에 가며 "걷는다. 걷는다." 세수하며 "씻는다. 씻는다." 밥을 먹으며 "삼킨다. 삼킨다." 처음에는 이상했습니다. 마치 로봇이 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행위가 선명해졌습니다. 걷기는 그냥 걷기였고 먹기는 그냥 먹기였습니다. "내가 걷는다. 내가 먹는다"는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걷기만 있고 먹기만 있었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아의 직접 체험입니다.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나'가 없다는 것이 허무가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가 사라졌지만 삶은 계속됩니다. 오히려 더 생생하고 더 풍요롭게 흘러갑니다.
한국의 성철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간단한 말씀이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산을 볼 때 "나에게 저 산이 어떤 의미지?"라고 묻지 않습니다. "저 산에 오르면 내가 대단해 보일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산은 그냥 산입니다. '나'라는 필터를 통과하지 않고 산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이것이 관찰입니다.
어느 수행자가 숲을 걷고 있었습니다. 새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리네. 나는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혹은 "시끄럽네. 나는 조용한 걸 좋아하는데."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새 소리를 그냥 들었습니다. '나'를 끼워넣지 않았습니다. 아름답다거나 시끄럽다는 판단 없이 그냥 들었습니다. 소리가 귀에 닿고 고막이 진동하고 뇌가 그것을 처리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 나는 듣기만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이야 경에서 가장 간결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볼 때는 다만 봄만 있어야 하고, 들을 때는 다만 들음만 있어야 하며, 느낄 때는 다만 느낌만 있어야 하고, 알 때는 다만 앎만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봄이 일어날 때 "내가 본다"는 생각을 더하지 않습니다. 들음이 일어날 때 "내가 듣는다"는 생각을 더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경험만 남깁니다. '나'라는 해석을 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경험과 비슷합니다. 어린아이는 꽃을 볼 때 그냥 봅니다. "이 꽃은 내 정원의 꽃이야. 이 꽃을 사진 찍어 SNS에 올려야지. 이 꽃의 학명은 뭐지?" 이런 생각 없이 그냥 봅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눈은 항상 경의로움으로 빛납니다. 우리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잠시 내려놓으면 됩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명상할 때는 평화롭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나'에 빠집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명상과 일상을 나누지 말라. 걸을 때도 관찰하고 먹을 때도 관찰하며 말할 때도 관찰하라. 모든 순간이 수행이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관찰은 방석 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됩니다. 대화할 때, 일할 때, 쉴 때,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회의 중에 관찰을 실천했습니다. 동료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비판했습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 사람은 왜 나한테만 그러지?" 예전 같으면 즉시 반박했을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을 방어하고 상대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 화가 일어났구나." 방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방어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구나." 몇 초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화는 절정에 이르렀다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관찰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생긴 것입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틈이 생긴 것입니다. 그 틈이 자유입니다. 조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화를 표현할까 말까? 이 말을 할까 말까? 자동 조종 장치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상의 목적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다." 무슨 훈련입니까? 관찰의 훈련입니다. 반응하기 전에 한 번 더 보는 훈련입니다.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서는 훈련입니다. 이것은 근육을 키우듯이 매일 연습해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작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뜨는 순간을 알아차립니다. "깨어남이 일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나며 몸의 움직임을 느낍니다. "일어남이 일어나고 있다." 화장실에 가며 걷는 것을 느낍니다. "걷기가 일어나고 있다." 세수하며 물의 감촉을 느낍니다. "차가움이 느껴진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습관의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동으로 생각하고 자동으로 반응하고 자동으로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느 순간 자동으로 알아차림이 일어납니다. "아, 지금 생각에 빠져 있었구나." 이 자각 자체가 큰 진전입니다.
한 수행자가 10년 동안 관찰 수행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물었습니다. "10년 수행에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예전에는 생각이 일어나면 10분 후에 알아차렸습니다. 지금은 10초 후에 알아차립니다. 언젠가는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리게 되겠지요." 이것이 수행의 과정입니다. 단번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나'의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을 '나'라고 믿지 않게 됩니다. 감정이 일어나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몸이 아파도 "내가 아프다"가 아니라 "아픔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어느 선승이 병들어 누워 있었습니다. 제자가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많이 아프십니까?" 선승이 대답했습니다. "아픔은 있지만 아파하는 나는 없다." 제자가 이해하지 못하자 선승이 설명했습니다. "몸에서 통증이라는 신호가 올라온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아프다. 나는 불쌍하다.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라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통증은 있지만 고통은 없다."
이것은 깊은 구분입니다. 통증과 고통은 다릅니다. 통증은 몸의 신호입니다. 피할 수 없는 생리적 현상입니다. 하지만 고통은 마음이 만들어냅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나는 운이 없어. 나는 약한 사람이야." 이런 생각들이 고통을 만듭니다. 관찰을 통해 통증은 남지만 고통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80세의 열반에 드실 때 심한 복통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염려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 한다여. 이 몸은 늙고 병들었으나 마음은 평화롭다." 몸의 통증과 마음의 평화가 공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몸은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할 뿐입니다.
일본의 독선사는 정법안장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불법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요.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기억상실이 아닙니다. '나'라는 개념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매 순간 새롭게 경험합니다. 과거의 '나'를 끌고 다니지 않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정체성에 갇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나는 소심한 사람이야"라고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이 오면 "나는 소심해서 못해"라고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관찰 수행을 시작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소심함은 정체성이 아니라 조건적 반응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 경험이 만들어낸 패턴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소심한 것이 아니라 소심함이라는 반응이 일어날 뿐이라는 것을. 이 깨달음이 그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소심한 반응이 일어나도 그것을 '나'라고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 소심함이라는 패턴이 일어났구나." 그리고 그 패턴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얀마의 우반디타야도 스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관찰은 온화해야 한다.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보듯이 부드럽고 주의 깊게 관찰하라." 이것은 중요한 지침입니다. 관찰이 거칠어지면 그것은 억압이 됩니다. "이 생각을 잡아내야 해"라는 태도는 전쟁입니다. 부드럽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 생각이 일어났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듯이 적대적이지 않게, 판단하지 않게.
한 수행자가 분노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작은 일에도 화가 났고 화가 나면 며칠씩 지속되었습니다. 스승이 조언했습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그것을 환영하라. '오, 분노여, 잘 왔다. 내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 오셨는가?'라고 말해 보라." 수행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실천했습니다. 다음에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는 속으로 말했습니다. "오, 분노여, 잘 왔다."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노를 환영하자 분노가 힘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분노는 저항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화내면 안 돼"라는 저항이 분노를 키웁니다. 하지만 분노를 환영하자 저항이 사라지고 분노도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이것을 역설적 수용이라고 합니다. 싸우지 않고 받아들이면 적은 사라집니다. 생각도 감정도 통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항하면 강해지고 받아들이면 약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이것을 아셨습니다. 상유따 니까야에는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마치 두 사람이 싸우는데 한 사람이 싸우기를 멈추면 싸움은 끝난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것과 싸우는 것이 다른 한 사람입니다. 싸우기를 멈추면 싸움은 끝납니다.
어느 명상 수행자가 10일간의 침묵 수행을 했습니다. 3일째부터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세를 바꾸고 쿠션을 조정하며 통증을 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통증은 계속되었습니다. 스승이 조언했습니다. "통증을 피하지 말고 들어가 보라." 수행자는 용기를 내어 통증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통증을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통증인가? 찌르는 듯한가? 쑤시는 듯한가? 타는 듯한가? 통증의 위치는 정확히 어디인가? 통증의 강도는 변하는가? 일정한가?" 놀랍게도 통증을 자세히 관찰하자 통증이 변했습니다. 때로는 강해지고 때로는 약해졌습니다. 때로는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수행자는 깨달았습니다. 통증은 고정된 것이 아니구나.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이구나. 이 깨달음이 통증과의 관계를 바꿨습니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적이 아니었습니다.
관찰 수행을 계속하면 점점 깊은 층으로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거친 생각들을 관찰합니다. "배고프다. 피곤하다. 저 사람이 싫다." 이런 명확한 생각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더 미묘한 생각들이 보입니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충동,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 미세한 떨림, 마음의 가장 깊은 층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12연기로 설명하셨습니다. 무명에서 행이 일어나고 행에서 식이 일어나며 식에서 명색이 일어나고 이렇게 연세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생각이 어떻게 다음 생각을 낳는지, 한 감정이 어떻게 다음 감정을 촉발하는지 이 모든 과정이 자동이 아니라 조건적임을 봅니다. 조건이 있으면 일어나고 조건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수행자가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 텅 빈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미세한 떨림이 일어났습니다. 그 떨림이 점점 커지며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시 사라져 공간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치 파도가 바다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듯이. 그는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모든 생각은 공에서 와서 공으로 돌아가는구나. 이것을 직접 보았을 때 '나'라는 환영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끝이 아닙니다. 깨달음 후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관찰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한번 깨닫는다고 모든 것이 영원히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이 새로운 수행입니다. 매 순간 '나'라는 환영이 다시 일어나려 합니다. 매 순간 그것을 알아차리고 놓아야 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깨침 후의 수행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수행은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수행이 시작됩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을 깨어 있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설거지할 때도 깨어 있고 걸을 때도 깨어 있으며 말할 때도 깨어 있습니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선이라고 합니다.
어느 선승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는 무엇을 하십니까?" 선승이 대답했습니다. "나무를 자르고 물을 깃는다."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 전에도 하셨던 일 아닙니까?" 선승이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 하지만 예전에는 '나무를 자르며 내가 나무를 자르고 물을 기우며 내가 물을 깃는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나무 자르기'만 일어나고 '물 깊기'만 일어난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궁극적인 자유입니다. 특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을 '나' 없이 사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는 그냥 먹고 잘 때는 그냥 자고 일할 때는 그냥 일합니다. "내가 먹는다. 내가 잔다. 내가 일한다"는 생각 없이 행위만 일어날 뿐입니다.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부처님께서는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수많은 조사들이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관찰을 계속하면 됩니다. 생각을 보고 감정을 보며 몸의 감각을 봅니다. 매 순간 매일 평생.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잊어버리고 생각에 빠지고 다시 알아차립니다. 이것을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어느 날 문득 깨닫습니다. "아, 나는 생각이 아니구나. 나는 이 몸이 아니구나. 나는 이 감정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나는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 떠오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변하지 않는 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흐르고 변합니다. 이 진리를 매 순간 관찰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자유로 가는 길입니다.
지금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 생각을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생각에 빠져 있습니까? 보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자유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빠져 있다면 지금이 순간 알아차리십시오. 알아차림 자체가 자유의 시작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계속하십시오. 아침에 눈 뜰 때 깨어남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십시오. 식사할 때 맛을 느끼며 먹으십시오. 걸을 때 발이 땅에 닿는 감각을 느끼십시오. 화가 날 때 화가 일어났다고 알아차리십시오. 기쁠 때 기쁨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십시오. 매 순간이 수행의 기회입니다. 매 순간이 깨어 있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나'라는 환영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은 먼 곳에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보기만 하면 됩니다. 생각을 보고 느낌을 보며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나'라는 해석을 더하지 않고 판단을 더하지 않으며 그냥 보면 됩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평화입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깨어 있는 의식 그 자체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송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