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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몸은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은 쉴 새 없이 달립니다. 어제 했던 말이 떠오르고, 내일 해야 할 일이 머릿속을 가득 채웁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기억이 다시 올라오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이 가슴을 조여옵니다.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깊이 보는 자만이 참된 평화를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짚어주는 삶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지금 이 순간을 떠나 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마음은 오후의 회의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서도 눈은 스마트폰 화면을 향합니다. 아름다운 노후를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진심으로 느끼기보다 사진을 찍어 올릴 생각을 먼저 합니다. 우리는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기록하고 평가하고 비교하는데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늘 다른 무언가를 위한 통로가 되어 버리고, 그 자체로 머물러 있는 법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산란심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이 지금 이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흩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산란심은 단순한 부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통받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으로 설하신 가르침, 사성제를 기억하십니까? 고집멸도, 즉 고통이 있고, 고통의 원인이 있으며, 고통의 소멸이 있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첫 번째 고통의 진실을 이야기할 때,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삶이 힘들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믿는 마음. 바로 그것이 고통의 씨앗입니다.
우리는 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고, 더 나은 상황이 오면 비로소 행복해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랩니다. 그러나 그 내일이 왔을 때, 우리는 또다시 그 내일을 살지 못하고 또 다른 내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윤회의 굴레 속에 있다는 것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몸의 윤회만이 아니라, 지금 이생에서도 우리는 매 순간 과거와 미래 사이를 떠돌며 진정한 지금을 살지 못하는 윤회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스승은 조용히 물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너는 무엇을 느끼고 있느냐?" 수행자는 잠시 멈추었다가 답했습니다.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어지러움은 지금 여기에 있느냐? 아니면 내 생각 속에 있느냐?" 수행자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짧은 문답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대부분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기억이 만들어낸 상처이거나, 미래에 대한 상상이 만들어낸 두려움입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온전히 머물 수 있다면, 그 고통의 상당 부분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수행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마음 챙김, 즉 사티입니다. 팔리어로 사티는 '기억한다', '알아차린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를 기억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 지금 내 마음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지금 이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를 깨어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수행의 시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걸을 때는 걷고 있음을 알라. 앉을 때는 앉아 있음을 알라. 밥을 먹을 때는 먹고 있음을 알라." 이 가르침은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곧 알게 됩니다. 숨을 쉬면서 숨만을 온전히 느끼는 것. 단 한 걸음을 내디으면서 그 한 걸음에 완전히 깨어 있는 것. 이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와 자극 속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를 손에 쥐고 있으면 전 세계의 소식이 쏟아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밀려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고 듣고 반응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틈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지금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도 전에 또 다른 자극이 밀려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필요가 아닙니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과정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미혹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외부의 자극과 조건에 끌려다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얻어야만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시작은 아주 단순합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 바로 지금 이 숨으로, 이 몸으로, 이 자리로 돌아오는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하고 분석하고 반추해도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계획하고 걱정하고 상상해도 실제로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유일한 시간을 지나간 것에 대한 후회와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채웁니다. 마치 두 손에 가득 흙을 쥐고 있으면서 꽃을 받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손을 비워야 꽃을 받을 수 있듯이, 마음을 비워야 지금 이 순간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비움은 포기가 아닙니다. 비움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법구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요,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 마음이 청정하면 행복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행복은 더 많이 가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높은 곳에 올랐을 때 오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지금 이 순간에 머물 때, 마음이 청정하게 깨어 있을 때 행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 사실은 지금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너무 멀리 달려나갔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 잠깐 멈추어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숨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느껴 보십시오. 코끝에 닿는 공기의 감촉, 가슴이 오르내리는 움직임, 배가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리듬을 느껴 보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 지금 이 호흡이, 지금 이 순간이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과거의 상처도 미래의 두려움도 이 호흡 앞에서는 잠시 자리를 내어 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숨 속에, 지금 이 발걸음 속에, 지금 이 순간의 고유함 속에 있습니다. 깨달음은 특별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 그 단순하고도 깊은 실천 속에 깨달음으로 가는 문이 열려 있습니다.
걷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발이 땅에 닿는 감촉을 느끼고 있습니까? 숨을 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숨이 몸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밥을 먹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음식의 맛과 향과 씹히는 감촉을 온전히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을 하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실제로 그 자리에 있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몸은 밥상 앞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직장에 가 있고, 몸은 길을 걷고 있지만 마음은 어제의 대화를 반복 재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이 분리된 채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가장 일상적인 고통의 형태입니다.
다바암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발을 들 때 발을 들고 있음을 알라. 발을 내릴 때 발을 내리고 있음을 알라." 이처럼 매 순간 깨어 있는 것이 곧 수행이다. 이 가르침은 수천 년 전에 설해졌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도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수행이라고 하면 깊은 산속 사찰에 들어가 오랜 시간 좌선을 하거나, 수백의 절을 올리거나, 경전을 외우는 것을 떠올립니다. 물론 그러한 수행들은 소중하고 깊은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수행의 핵심은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시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지금 하고 있는 바로 이 일에 온전히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수행의 본질입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설거지에 온전히 머무는 것, 걸으면서 걷는 것에 완전히 깨어 있는 것,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그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것. 모든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삶과 분리된 특별한 영역이 아니라, 삶 그 자체 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의 하루 전체가 수행의 장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제자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셨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새벽에 일어나 좌선을 하시고, 아침이 되면 발우를 들고 마을로 탁발을 나가셨습니다. 탁발이란 스님들이 마을을 걸으며 음식을 받는 수행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탁발을 하실 때의 모습은 매우 특별했다고 전해집니다.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걸으시면서, 발 하나하나를 땅에 내려놓는 순간순간에 완전히 깨어 계셨습니다. 눈은 아래를 향하고 마음은 고요했으며, 주변의 소란에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탁발을 마치고 돌아와 발우를 씻고 앉아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면 다시 좌선에 드셨습니다.
이 단순한 일상 속에서 부처님께서는 매 순간 완전히 깨어 계셨습니다. 그 깨어 있음이 바로 부처님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반드시 산속이 아니어도, 반드시 사찰이 아니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 즉 알아차림의 수행은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호흡입니다. 숨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납니다. 과거의 숨은 이미 지나갔고, 미래의 숨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흐르는 이 숨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호흡을 바라보는 것은 곧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숨이 들어올 때 숨이 들어옴을 압니다. 숨이 나갈 때 숨이 나감을 압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실천을 하다 보면 마음이 얼마나 자주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지 보게 됩니다. 호흡을 바라보려 하는데, 어느 순간 마음은 오늘 점심 메뉴를 생각하고 있거나, 며칠 전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음이 달아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바로 수행이 일어나는 순간이라는 점입니다. 마음이 달아났음을 알아차리고 판단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조용히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것. 이 과정 자체가 수행입니다. 수백 번 달아나도 수백 번 돌아오면 됩니다. 수행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달아났다가 돌아오는 그 반복 속에서 마음은 조금씩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힘을 키워 갑니다.
어떤 사람이 선사를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깨달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선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습니다. "밥은 먹었느냐?" "예, 먹었습니다." "그렇다면 발우를 씻어라."
이 짧은 대화는 선불교의 역사에서 유명한 법문으로 전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 대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깨달음을 물었는데 왜 발우를 씻으라고 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법문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깨달음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고 나서 발우를 씻는 이 평범한 일상의 순간에 완전히 깨어 있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실천입니다. 발우를 씻을 때는 발우를 씻는 것에 온전히 머무는 것. 그것이 수행이고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려 하기 전에,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이 일에 온전히 머무는 것. 그것이 먼저입니다.
알아차림의 수행이 깊어지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토록 괴로워하며 붙들고 있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의 진리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기쁨도 잠시이고, 슬픔도 잠시입니다. 분노도 지나가고, 두려움도 지나갑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난 감정은 다음 순간에 이미 조금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무상한 감정과 생각에 강하게 집착합니다. 한번 일어난 분노를 마음속에서 키우고, 한번 생긴 슬픔을 몇 날 며칠 동안 안고 삽니다.
알아차림의 수행은 이 집착의 고리를 조용히 풀어 줍니다. 지금 이 순간 분노가 일어남을 압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나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마치 하늘에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듯 바라봅니다. 구름은 하늘이 아닙니다. 감정은 내가 아닙니다. 감정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고유한 의식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통찰과 연결됩니다. 고정된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몸과 마음의 흐름이 있을 뿐입니다. 그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에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다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평생 닦아야 할 수행입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지금 당장 시작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영상을 보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몸이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느껴 보십시오. 등이 구부러져 있다면 천천히 펴 보십시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면 조용히 내려놓아 보십시오. 지금 이 숨이 어떻게 흐르는지 한 번만 느껴 보십시오. 이것이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 그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쌓아 우리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연기법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다는 것은 단지 나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 것. 지금 이 순간 내 손 안에 들려 있는 이 찻잔의 온기를 느끼는 것. 지금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에 잠깐 마음을 여는 것. 모든 것이 연기의 진실을 몸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인연들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 인연들에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자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수행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자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습니다. "더 잘해야 한다." "더 빨리 가야 한다." "더 많이 이루어야 한다." 그 목소리에 지쳐 있는 자신을 지금 이 순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판단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그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모든 중생 속에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당신도 포함됩니다. 당신도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 행복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온전히 머물 수 있을 때, 그 자체로 이미 행복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깨달음을 특별한 무언가로 여겨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모든 것이 환하게 보이며 삶의 모든 고통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그런 극적인 경험을 상상합니다. 혹은 수십 년의 수행 끝에 도달하는 아득히 먼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깁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스스로 그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러나 육조 단경에서 해능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깨달음은 따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마음이 곧 부처여, 지금 이 자리가 곧 정토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안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가르치는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 마음으로 이미 깨달음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해능 스님의 이야기는 매우 깊은 울림을 줍니다. 스님은 본래 글을 읽지 못하는 나무꾼이었습니다. 어느 날 장터에서 금강경을 독송하는 소리를 듣다가 그 한 구절에 마음이 크게 열렸다고 전해집니다. 그 뒤 스님은 오조 홍인 스님 밑에서 수행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방아를 찢는 허드렛일을 맡았습니다. 글도 모르고 신분도 낮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능 스님은 그 방아를 찢는 순간순간에 완전히 깨어 있었습니다. 몸은 방아를 찍고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조 스님으로부터 의발을 전해받아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가 되었습니다.
해능 스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 줍니다. 깨달음은 학식이나 신분이나 오랜 수행 경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얼마나 온전히 깨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방아를 찢는 자리가 곧 깨달음의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도 깨달음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불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이것이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불성이란 깨달음의 씨앗, 부처가 될 수 있는 본래의 성품을 말합니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 즉 탐진치가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먹구름이 태양을 가린다고 해서 태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번뇌가 불성을 가린다고 해서 불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름이 거치면 태양이 그대로 빛나듯, 번뇌가 가라앉으면 불성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수행이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을 가리고 있는 것을 걷어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크게 우리를 가리는 것은 바로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는 믿음. 이 '나'를 지키고 높이고 보호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욕구. 이것이 모든 고통의 뿌리입니다. "나는 이렇게 대우받아야 한다." "나는 이 정도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생각들이 '나'라는 껍질을 만들고, 그 껍질이 세상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무아의 진리는 이것을 꿰뚫습니다. 고정된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몸의 세포들은 변하고 있고, 마음의 생각들은 흐르고 있습니다. '나'라고 불리는 것은 이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에 임시로 붙여진 이름일 뿐입니다. 이것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깨닫는 것이 바로 무아의 체험입니다. 그 순간 '나'를 지키고 높이려는 긴장이 풀립니다. 세상과 '나' 사이의 벽이 조금씩 낮아집니다. 그리고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어떤 수행자가 오랫동안 산속에서 수행을 하다가 마침내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것 같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집착이 많이 줄었으며, 세상일에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스승은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이 마당에 떨어진 낙엽 하나가 보이느냐?" 수행자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습니다. "보입니다."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낙엽이 지금 막 떨어지는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느냐?" 수행자는 그 말에 오랫동안 침묵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진정한 수행의 경지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신선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얻는 것입니다. 낙엽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겨 있음을 보는 것. 지금 이 순간 이 공기의 흐름 속에서도 생명의 신비를 느끼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눈입니다. 우리는 매일 보는 것들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그것들을 진정으로 보지 못합니다. 처음 보는 눈으로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정토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의 극락 정토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극락을 죽은 뒤에 가는 곳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정토의 가르침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불국토가 청정하다." 극락은 저 멀리 서쪽 어딘가에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마음이 청정할 때, 지금 이 자리가 곧 극락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깨어 있을 때, 지금 이 자리가 정토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로 마음이 고요하고 깨어 있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달라집니다. 같은 하늘을 보아도 마음이 청정한 사람에게는 그 하늘이 다르게 보입니다. 같은 바람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는 그 소리가 다르게 들립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는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지금 이 자리가 곧 극락이 됩니다.
깨달음은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해집니다.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건만,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이 말씀의 무게를 깊이 느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라고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중생이 이미 그 깨달음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망상과 집착이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가르침입니까? 우리는 이미 깨달음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수행은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미 있는 그 깨달음의 성품을 만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거창한 수행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 단 한 번이라도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보십시오. 아침에 차 한잔을 마실 때, 그 온기를 두 손으로 느끼면서 차의 향기를 들이마시면서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머물러 보십시오. 길을 걸을 때, 발이 땅에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한 발 한 발 깨어서 걸어 보십시오. 누군가의 말을들을 때, 다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사람의 말에 온전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이 작은 실천들이 쌓아 삶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달라집니다. 세상이 달라집니다. 수행은 인생에서 따로 시간을 내어 해야 하는 특별한 활동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순간이 수행의 장입니다. 밥을 먹는 것이 수행이고, 잠을 자는 것이 수행이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수행이고,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삶 전체가 수행이 될 때, 깨달음은 더 이상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마음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이 수행의 본질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지금 이 자리가 곧 깨달음의 땅입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 지금 이 순간 숨을 쉬고 있는 그 자리가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리수나무 아래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서 완전히 깨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가 깨달음의 땅이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완전히 깨어 있다면, 지금 이 자리가 곧 보리수나무 아래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온전히 머물 수 있다면, 지금 이 자리가 곧 정토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이 말씀은 단순한 격려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어제 잘했다고 해서 오늘 쉬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은 매 순간 새롭게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자유입니다. 어제 어떻게 살았든, 지금 이 순간 깨어 있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마음을 놓치며 살았든, 지금 이 순간 돌아오면 됩니다. 수행에는 늦은 때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숨 속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발걸음 속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이 머무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미래로 달려갈 수도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우리가 실제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머무십시오. 그 자리에서 깨어 있으십시오. 그 자리에서 숨을 쉬고, 느끼고, 바라보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곧 깨달음의 문이고, 지금 이 자리가 곧 깨달음의 땅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지금 여기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깨어 있으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머무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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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시작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이 순간이 영상을 보고 있는 바로이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몸이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느껴 보십시오. 등이 구부러져 있다면 천천히 펴 보십시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면 조용히 내려놓아 보십시오. 지금이 숨이 어떻게 흐르는지 한 번만 느껴 보십시오. 이것이 지금이 순간 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이 자리에서 지금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 그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쌓여 우리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연기법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에 깨어 있다는 것은 단지 나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이 사람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 것. 지금이 순간 내 손 안에 들려 있는이 차잔의 온기를 느끼는 것. 지금 창 밖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에 잠깐 마음을 여는 것. 모든 것이 연기의 진실을 몸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인연들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 인연들에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자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지금이 순간에 머무는 수행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자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습니다. 더 잘해야 한다. 더 빨리 가야 한다. 더 많이 이루어야 한다. 그 목소리에 지쳐 있는 자신을 지금이 순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판단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그저 지금이 순간이 자리에 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모든 중생 속에는 지금이 자리에 있는 당신도 포함됩니다. 당신도 지금이 순간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 행복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이 자리에 온전히 머물 수 있을 때 그 자체로 이미 행복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깨달음을 특별한 무언가로 여겨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모든 것이 화나게 보이며 삶의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그런 극적인 경험을 상상합니다. 혹은 수십년의 수행 끝에 도달하는 아득히 먼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깁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스스로 그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러나 육조 단경에서 해능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깨달음은 따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 마음이 곧 부처여, 지금이 자리가 곧 정토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안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가르치는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이 자리에서이 마음으로 이미 깨달음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해능 스님의 이야기는 매우 깊은 울림을 줍니다. 스님은 본래 글을 읽지 못하는 나무꾼이었습니다. 어느 날 장터에서 금강경을 독송하는 소리를 듣다가 그 한 구절에 마음이 크게 열렸다고 전해집니다. 그 뒤 스님은 오조홍인 스님 밑에서 수행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방아를 찢는 허드렛일을 맡았습니다. 글도 모르고 신분도 낮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능 스님은 그 방아를 찢는 순간순간에 완전히 깨어 있었습니다. 몸은 방아를 찢고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지금이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조 스님으로부터 의발을 전해받아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가 되었습니다. 해능 스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 줍니다. 깨달음은 학식이나 신분이나 오랜 수행 경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이 자리에 얼마나 온전히 깨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방아를 찢는 자리가 곧 깨달음의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도 깨달음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불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이것이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불성이란 깨달음의 씨앗, 부처가 될 수 있는 본래의 성품을 말합니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 즉 탐진치가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먹구름이 태양을 가린다고 해서 태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번뇌가 불성을 가린다고 해서 불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름이 거치면 태양이 그대로 빛나듯 번뇌가 가라앉으면 불성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수행이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을 가리고 있는 것을 걷어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금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크게 우리를 가리는 것은 바로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는 믿음. 이 나를 지키고 높이고 보호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욕구. 이것이 모든 고통의 뿌리입니다. 나는 이렇게 대우받아야 한다. 나는 이 정도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생각들이 나라는 껍질을 만들고 그 껍질이 세상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무아의 진리는 이것을 꿰뚫습니다. 고정된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몸의 세포들은 변하고 있고 마음의 생각들은 흐르고 있습니다. 나라고 불리는 것은 이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에 임시로 붙여진 이름일 뿐입니다. 이것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순간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깨닫는 것이 바로 무아의 체험입니다. 그 순간 나를 지키고 높이려는 긴장이 풀립니다. 세상과 나 사이의 벽이 조금씩 낮아집니다. 그리고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어떤 수행자가 오랫동안 산속에서 수행을 하다가 마침내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것 같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집착이 많이 줄었으며 세상일에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스승은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순간이 마당에 떨어진 낙엽 하나가 보이느냐? 수행자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습니다. 보입니다.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낙엽이 지금 막 떨어지는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느냐? 수행자는 그 말에 오랫동안 침묵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진정한 수행의 경지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이 순간의 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신선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얻는 것입니다. 낙엽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겨 있음을 보는 것. 지금이 순간의 공기의 흐름 속에서도 생명의 신비를 느끼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눈입니다. 우리는 매일 보는 것들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그것들을 진정으로 보지 못합니다. 처음 보는 눈으로 지금이 순간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정토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의 극락 정토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극락을 죽은 뒤에 가는 곳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정토의 가르침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불국토가 청정하다. 극락은 저 멀리 서쪽 어딘가에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마음이 청정할 때 지금이 자리가 곧 극락입니다. 지금이 순간에 완전히 깨어 있을 때 지금이 자리가 정토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로 마음이 고요하고 깨어 있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달라집니다. 똑같은 하늘을 보아도 마음이 청정한 사람에게는 그 하늘이 다르게 보입니다. 같은 바람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는 그 소리가 다르게 들립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는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지금이 순간에 깨어 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지금이 자리가 곧 극락이 됩니다.
깨달음은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해집니다. 기하고 기의하도다.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건만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이 말씀의 무게를 깊이 느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라고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중생이 이미 그 깨달음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망상과 집착이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가르침입니까? 우리는 이미 깨달음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수행은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미 있는 그 깨달음의 성품을 만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이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거창한 수행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 단 한 번이라도 온전히 지금이 순간에 머물러 보십시오. 아침에 차 한 잔을 마실 때 그 온기를 두 손으로 느끼면서 차의 향기를 들이마시면서 지금이 순간에 완전히 머물러 보십시오. 길을 걸을 때 발이 땅에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한 발 한 발 깨어서 걸어 보십시오.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다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사람의 말에 온전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이 작은 실천들이 쌓아 삶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달라집니다. 세상이 달라집니다. 수행은 인생에서 따로 시간을 내어 해야 하는 특별한 활동이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순간이 수행의 장입니다. 밥을 먹는 것이 수행이고 잠을 자는 것이 수행이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수행이고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수행입니다. 삶 전체가 수행이 될 때 깨달음은 더 이상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마음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이 수행의 본질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지금이 자리가 곧 깨달음의 땅입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 지금이 순간 숨을 쉬고 있는 그 자리가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리수나무 아래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서 완전히 깨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가 깨달음의 땅이 된 것입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이 완전히 깨어 있다면 지금이 자리가 곧 보리수나무 아래입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이 온전히 머물 수 있다면 지금이 자리가 곧 정토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이 말씀은 단순한 격려가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어제 잘했다고 해서 오늘 쉬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은 매순간 새롭게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순간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자유입니다. 어제 어떻게 살았든 지금이 순간 깨어 있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마음을 놓치며 살았든 지금이 순간 돌아오면 됩니다. 수행에는 늦은 때가 없습니다. 지금이 순간이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이 순간이 숨 속에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이 발걸음 속에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의 마음이 머무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미래로 달려갈 수도 없습니다. 오직 지금이 순간만이 우리가 실제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머무십시오. 그 자리에서 깨어 있으십시오. 그 자리에서 숨을 쉬고 느끼고 바라보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이 순간이 곧 깨달음의 문이고 지금이 자리가 곧 깨달음의 땅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지금 여기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지금이 순간이 자리에 있는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 함께 깨어 있으십시오. 지금이 자리에서 함께 머무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송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