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ription
네. 상담 센터에 오는 많은 분들이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선생님, 저는 왜 맨날 항상 같은 사람한테 당할까요? 제가 사람을 좀 잘 못 보는 걸까요?"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사람을 잘 못 본다기보다는 이미 처음에 다 느끼고 있습니다. "아, 이상한데? 좀 느낌이 싸한데? 뭔가 말이 잘 안 맞는데? 아, 뭔가 좀 걸린다." 이런 느낌들이 이미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주 자동적으로 그런 것들을 무시하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결국엔 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느낌을 버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같은 사람에게 같은 문제로 당하게 되는 거죠.
희한하게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시간이 지나면 나를 좀 무시하게 된다든지, 내가 또는 관계에서 을로 항상 들어가 버린다든지, 또는 항상 배신당하는 결론이 난다든지, 항상 그 사람이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쓴다든지 마치 사주에 나오는 운명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제 프로이트라는 정신분석 학자는 운명이 아니라 "운명 신경증"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신경증의 일종이라는 거죠. 그 말은 결국에는 이걸 병리적으로 봤다는 거고, 이것이 삶에서 반복되게 되면 삶이 피폐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순간에 내가 사람을 못 알아차리고 어떤 식으로 문제가 생기고 그 원인과 해결책까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자, 어떤 사람을 내가 만났어요. 근데 그 사람이 처음 이미지가 너무 좋은 거예요. 말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태도도 좋고. 그래서 그 사람은 되게 좋게 봤단 말이죠. 근데 자꾸 만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약속을 살짝살짝 어기는 거예요. 뭔가 시간 약속이 흐릿하고 말이 좀 바뀌고 약속을 어기고. 이런 것들이 느낌이 온단 말이죠. 그런데 이상한데? 이런 느낌을 내가 집중하기보다는 바로 다르게 정리하는 거죠. "좀 바쁜가 보다. 아, 뭐 가까운 사이 그럴 수 있지. 아, 내가 좀 너무 예민한 거야." 이렇게 하면서 그 느낌들을 덮어 버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런 이미지가 굳어져 버리면 나중에는 시간이 갈수록 이제 그 사람은 계속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되고 오랫동안 지나서야 이제 나는 비로소 또 한번 반복한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는 거죠.
이런 현상의 원인은 첫 번째는 "확증 편향"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은 쉽게 말해서 본인이 보고 싶은 걸 보려고 하고 한번 본인이 확증한 것에 대해서 잘 바꾸기 싫어한다는 거죠. 이거는 단순히 뭐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나르시시스트, 의존, 성격 아니면 뭐 HSP 등등등 우리 모두에게 있는 특성인 거 같아요. 인간은 본인이 처음에 판단 내리고 확정한 그 이미지를 바꾸는 거를 좋아하지 않고 또는 그것이 잘못된다는 걸 인정하는 걸 힘들어 한다는 거죠.
대표적으로 우리 주식 투자 같은 거를 들면 어떨까요? 주식 투자했을 때 내가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정보 속에서 어떤 종목을 선택했는데 계속 빠진단 말이죠. 근데 사람들이 손절을 못 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가 않은 거죠. 그리고 더불어서 이제 계속 내가 산 주식 그 종목에 대해서 좋은 뉴스만 계속 찾아보는 안 좋은 건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런 현상으로 벌어지고 이게 굉장히 시간이 가면은 엄청난 손실로 다가오잖아요.
인간관계도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어디랑 관련이 있는 거냐면요. 약간 나르시시스트적인 성향과 관련이 있어요. 우리 인간 모두는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적인 모습이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굉장히 이제 극단적으로 왔을 때 나르시시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 모두는 내가 한번 판단 내린 것에 대해서 잘못된다고 인정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그것이 이제 확증 편향으로 가서 대인관계에서 그것이 벌어졌을 때 큰 손실을 입게 되는 거죠. 손절을 못 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엔 이제 정리해 보면 사람을 잘 못 보는 첫 번째 순간은 보는 눈이 없는게 아니라 내가 만든 그 첫 인상을 지키려고 할 때 시작되는 거죠.
두 번째 상황은 내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항상 내가 힘들 때마다 나를 깊이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는 말을 해 줘요. 또는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굉장히 현명하고 스마트하게 어떤 해결책들을 잘 제시해 주는 친구인 거죠. 그래서 이 친구가 참 좋았고 많은 의지가 되었습니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 친구가 선을 넘기 시작하는 거예요. 공감과 위로 같은데 은근히 나를 마치 환자처럼 분석을 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마치 본인이 마스터인 것처럼 막 충고와 지적을 막 하기 시작하는 거죠. 가끔은 약간은 막말이라고 생각되는 정도의 말까지 심하게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바로 느낌이 오죠. "어, 이거는 선 넘은 건데. 이거는 아무리 나를 위한다고 하지만 아, 이건 약간 갑질 같은데 나를 좀 하대하나?" 이런 느낌들이 온다는 거죠. 하지만 바로 자동적으로 그걸 묻어 버리는 내면의 목소리가 올라옵니다. "아니야. 나를 진짜 생각해 주니까 다 날 잘되라고 해 주는 걸 거야. 그렇지. 틀린 말 아니지. 도움 받을 땐 도움 받아 놓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는 도리가 아니지." 이런 식의 내적인 목소리가 올라온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이런 것들을 계속 반복하게 되고 더 이상 내가 참지 못하고 힘들어질 때까지 계속 견디게 되면서 그 정도까지 가면 이미 이제 내가 피폐해져 있겠죠.
그래서 정리를 해 보면 사람을 잘못 보는 두 번째 순간은 내가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실을 본다기보다는 관계를 지키려고 할 때 우리는 왜곡해서 보게 되는 거죠.
자, 세 번째는 아주 미묘하게 보이지 않게 무례하게 굴거나 선을 넘는 사람들이에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예를 들면 직장 생활에서 분명히 이건 내 일이 아닌데 그렇다고 꼭 시간이 많이 잡아먹는 일은 아니고 그래서 그런 일을 항상 옆에 동료가 톡톡 나한테 던지는 거예요. 웃으면서. 이때 아주 미묘하게 "아 이건 아닌데"라는 느낌이 있지만 그걸 넘겨 버리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아주 미묘하게 무례하거나 공격적인 얘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옆에 직장 동료에게 뭐가 궁금해서 이거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딱 물어봤는데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김대리 지금 짬밥이 얼마인데? 이것도 몰라. 아직도? 아 진짜 장난해?" 이런 식으로 웃으면서. 하지만 내용은 전혀 웃기지 않죠. 그러면서 주변도 그냥 같이 웃는 분위기예요. 그러면 내가 그 짧은 찰나에 기분 나쁨이 있지만 그 기분 나쁨이나 무례한 느낌을 좀 눌러 버리고 같이 웃어 버리는 거죠. 이때 내적으로 올라오는 목소리는 어떤 거냐면 "야 이 정도 가지고 분위기 깨지 마라든지, 야 여기서 괜히 정색하면 너만 바보돼 또는 너만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야. 사회생활 다 그런 거야." 이런 식으로 눌러 버린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눌러 버리고 그런 것들이 계속 반복되게 되면 그 결과로 사람들은 알게 돼요. "아, 저 사람은 이 정도 해도 괜찮구나. 저 사람은 조금 밀면 밀리는 사람이구나. 아, 이 사람은 조금 불편해도 얼렁뚱 넘어가면 되는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정작 내 일이 아니라 타인의 일을 해 주느라고 업무 로드도 심하게 걸리고 굉장히 회사 생활이 비효율적으로 되겠죠.
그래서 세 번째 사람을 잘 못 보는 순간은 상대방의 감정이나 상황을 좀 더 우선시했을 때입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사람을 못 보는 사람을 왜곡해서 보는 그 순간은 첫 번째는 확증 편향이 생길 때, 그리고 두 번째는 관계를 지키려고 할 때, 세 번째는 타인이나 상황에 좀 더 우선순위를 둘 때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계속해서 이 반복되는 관계를 유지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매번 나는 타인들에게 똑같은 태도를 취하고 거기에 사람들은 똑같이 반응하고 그러기 때문에 계속 반복해서 당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결국에는 내가 이 사태를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거죠. 분명히 내 안에서 어떤 느낌이 올라왔는데 그것을 내가 눌러 버리고 무시할 때 생기는 겁니다. 바꿔서 말하면 내가 힘들지만 이 사태를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제대로 보는 것만으로도 많이 좋아진다는 거죠. 이때 제가 말씀드리는 건 제대로 봐야 된다는 것은 무조건 내 편을 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상대가 잘못이 없는데 괜히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트집을 잡거나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려고 한다면 그 모습도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봐야 되겠죠.
우리가 심리적이나 관계의 모든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결국에는 앞서 말씀드린 왜곡해서 보는 것, 환상적으로 본다는 거죠. 그것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이라는 걸 기반해서 얘기했잖아요. 무의식의 어떤 충동이나 또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상처나 억압된 욕구들이나 이런 걸 통해서 많은 것들을 상대를 왜곡하고 자신을 왜곡해서 보면서 신경증으로 발전하는 거죠.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상대를 굉장히 이상화시키는 순간 나는 나르시시스트에게 당할 수도 있고 또는 내가 혹시 상대를 굉장히 과소평가하고 웅대한 자기 상에 취해 버린다면 그건 이제 나르시시스트로 또 발전할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그 왜곡된 형태들은 다양한 심적 방어 기재로 나타나고 증상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좀 불교 철학을 끌어들여서 설명하면 좀 쉬울 것 같아요. 불교 철학의 핵심은 이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왜곡해서 바라보는 것이고 그 왜곡을 끝내면 고통이 사라지는 거거든요. 그래서 유식불교에 인간이 외부를 인식하는 그 프로세스에 대해서 제 8식, 1식부터 8식이라는 걸로 설명을 해 놨습니다. 안비설신의 만화식, 아야식 이런 식으로 설명을 했어요. 그러니까 안비설신는 이 감각 기관들이거든요. 그리고 말라식은 내 안에 있는 어떤 자아상이라고 볼 수 있고 마지막에 아까 말씀드린 제8식 알아야식. 그런데 저 밑에 있는 그 아라야식라는 것이 중요한데요. 그것이 모든 왜곡을 만들어내는 저장소 같은 거라는 겁니다. 아라야라는게 이제 산스크리터로 저장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니까 아라야식 어떤 저장된 공간이라고 하는데 우리 어떤 습관, 감정, 성향, 반응 같은 모든 패턴들이 거기에 저장돼 있고 그런 것들이 다 영향을 미치면서 뭐 신체 감각, 의식 모두에게 왜곡을 일으킨다고 보면 돼요.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이걸 어떻게 보면 이제 업의 씨앗, 업의 종자라고 볼 수도 있는 거죠.
바꿔서 말하면 그런 것들이 끊어져 버리면 왜곡해서 보지 않는 눈이 생긴다면 또는 이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내가 무의식의 영향을 받지 않고 또는 그것을 정확히 해석해서 사태를 정확히 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건강한 것이고 불교에서 이제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거겠죠. 물론 이제 이렇게 거창하게 제가 설명을 했는데요. 물론 이제 인간의 구조가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죠. 하지만 핵심은 바르게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이거는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구조 자체가 그렇게 인식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원래 구조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역행하면서 우리가 해내야 되는 거잖아요. 쉽지 않아요. 근데 바꿔서 말하면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가 마음의 평화, 영혼의 자유를 원하는 거잖아요. 당연히 쉽지가 않겠죠.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있는 분들이 "이거 왜 이렇게 안 되죠? 나는 왜 이렇게 아무리 분석하고 노력해도 왜 이걸 반복하는 거죠?" 이렇게 얘기하시는데요.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약하거나 뭔가 잘못돼서 그런게 아니라고 좀 지지해 드리고 싶어요. 오히려 저는 심지어 어려움 때문에 시작됐지만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바르게 보는 눈을 탑재하려고 노력하시는 그 자체가 훨씬 더 성숙되고 지성적인 태도를 가진 분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좀 더 이상적인 얘기 말고 그럼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잘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얘기를 해 볼 거예요.
첫 번째 당연히 중요한 것은 그 왜곡이 일어나려면 첫 번째 내가 느꼈던 그 느낌을 무시하면 안 되겠죠. 그러니까 분석하면 늦습니다. 분석하는 건 늦고요. 대부분 분석은 나의 어떤 편향적인 시각을 만들어내는 논리일 경우가 많고요. 그 느낌 아주 찰나에 지나가는 그 느낌을 무시하시면 안 돼요. 그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어요. "근데 그 느낌이 잘못될 수도 있잖아요." 물론 그럴 수 있죠. 예를 들면 나르시시스트가 어떤 얘기를 딱 들었는데 "아 기분 나쁘네. 내 자존심 상하게 했단 말이지." 이게 과연 이제 올바른 느낌이냐, 정당한 느낌이냐, 그렇지 않을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드리는 얘기도 완벽할 수 없고 하나의 관점 정도를 이해해 보면 좋아요. 하지만 맹자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타고난 본성 같은게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수오지심", 의의 단서라고 했어요. 기본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그 시각이 탑재 그게 그 단서가 수오지심 어떤 느낌이라는 거죠. 부끄러워할 수, 싫어할 오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뭔가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스스로 부끄럽고 타인이 그걸 했을 때 싫어한다는 거예요. 그게 수오지심이라는 부끄럽고 또는 이제 싫어하는 그 느낌으로 직각적으로 오고 이건 본성이라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느낌을 무시하지 않는 것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자, 두 번째는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벌어지는 반복적인 프로세스를 봐야 돼요. 근데 중요한 건 제가 "프로세스"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상담에서 되게 중요한게 컨텐츠와 프로세스라는 구분입니다. 컨텐츠는 뭐냐면 하나의 내용 같은 거예요. 그런데 프로세스는 그 내용보다는 지금 여기서 벌어진 어떤 현상, 반복되는 구조 이런 것들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 예를 들면은 저 사람이 말로는 나한테 굉장히 친절하고 또 따뜻하게 대하는 거 같은데 여기서 벌어지는 프로세스상으로 보면은 계속 자기 할 말만 반복해서 하고 있다든지 또는 내용적으로는 나를 위하는 척하고 이해해 주는 척을 하고 위로하는 척을 하지만 계속 얘기를 듣다 보면 그 사람은 나에게 설교를 하고 있고 나는 계속 위축되어 있고 이런 프로세스가 반복되고 있는지를 보라는 거죠. 대부분 컨텐츠 내용보다는 그 프로세스가 진실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걸 잘 봐야 돼요. 그래서 대부분 그 프로세스는 비언어적인 어떤 것들로 나오거든요. 그 사람의 말투나 행동이나 태도, 관계의 형태. 그래서 이런 것들을 잘 봐야지 진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반복적인 프로세스를 잘 봐야 되고 각각의 컨텐츠들은 하나의 사건일 수 있지만 반복적인 프로세스를 내가 발견한다면 그거는 그 사람의 진실한 진면모일 확률이 많죠.
세 번째 마지막으로는 결국엔 나를 잘 봐야겠죠. 내가 분명히 어떤 느낌들이 있었는데 싸한 느낌이나 무례하다 느낌, 선 넘는 느낌이 있었는데 내가 왜 이것을 넘기고 있는지. 그래서 이렇게 질문해 보면 좋아요. 그 인지 치료적인 기법인데요. 내가 만약에 그 느낌대로 행동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약간은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써 보는 거죠. 예를 들면은 내가 무례한 행동을 했는데 거기 한마디 했고 싸움이 벌어졌고 내가 나만 바보가 되고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결국엔 사람들이 날 미워하고 나는 혼자 된다든지. 이런 식으로 따라가다 보면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에는 내가 어디에서 두려워하고 어디를 방어하고 싶은지가 나오는 거거든요. 아까 말씀드렸죠. 제가 바르게 본다는 것은 타인을 바르게 보는 것도 있지만 결국에는 바르게 보는 그 시각 속에서 나 역시도 가차 없이 봐야 되는 거죠. 그것이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이해가 되셨죠? 그래서 마지막으로는 나 자신의 불안과 방어를 잘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자, 오늘 이상으로 마치고요. 제 얘기가 여러분들의 대인관계에 좀 도움이 되셨길 바라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 좋아요를 눌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