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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이승만의 일생] 26강. 그 고집불통의 합리성

이승만TV46:56

Transcription

[음악] 으 이승만 TV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행 명 가 이성만 의 일생 시리즈 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스물 여섯번째 에 강입니다. 어 제목은 그 고집불통의 합리성 입니다. 아 이 순간에 일본과 미국과의 외교 어 어 그 애교가 올해 주제가 되겠습니다.

이승만의 일본과 미국의 괴거나 일본과 미국의 팥은 애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고집불통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집불통 외교는 당시의 한국 국내외 실정에 있어서 매우 합리적 이었다 하는 게 제 생각이고 그 합리성은 결국은 내쇼날 intp 국가 정체성 그리고 내쇼날 임팩 레이 션 국민통합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 틈을 원을 강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까.

이성만 의 1번 외교와 미국 외교의 밝혀내 들은 여러 가지 아 이승만 의 그 고집불통 이 안고 있는 b 합리성에 대해서 지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광신적 으로 자기 합리성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비 감리 적이며 광신적 2 까지 하다 또는 그의 정신 상태는 병리적 이다 이렇게까지 어떤 일본인은 어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이성적이고 병리적 이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없는 상대가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1953년에 이승만 대통령 안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습니다. 그때 일본의 요시다 수상과 회담 을 했고 일본에서는 그 회담에 결과를 대단히 그 어종의 시 하고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 혼자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서 더 수상은 아무런 표정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것은 일본의 외교 라인들이 그 사람들은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대로 이야기 하게나 두세요 듣고 많이 쓰세요 이렇게 자문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승만 가는 대화를 할 수 없다 이렇게 에 생각을 한 거죠.

이승만은 자주 미국에 대해서 강한 어떤 그 도전을 했습니다. 공갈 과 협박을 했지요. 악연 와 대통령은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해서 공갈 협박을 일삼는 불쾌한 정치가 다 불쾌한 사람이다. 어 그래서 국무장관은 요 기만의 대가다 또는 동량의 협상 가다 뭐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 이승만은 미국이 한반도에 끌고 있는 어떤 그 전략적 이 이해관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결코 한국을 버릴 수 없고 한국을 쉽게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깔아 알기 때문에 에 그것을 담보로 해서 미국에 대해서 공갈 과 협박을 아 대 풀이 했던 것인데 그것은 미국으로서는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없는 그와 같은 불쾌하지 많은 가르쳐 들을 수 없는 공갈 과 협박이 얻습니다. 왜 공과가 협박도 로 실행할 지 모르는 광신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는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자 이와 같은 그 당대 인 드레그 거쳐 외국인 들의 1 이승만의 예 외교에 대한 평가는 국내 수도 야당의 수도 이루어졌을 까. 1인 외교가 유아독존 리가 어 등등 여러가지가 이성만 의 그 고집불통의 어떤 외계에 대한 어떤 비판이 구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집불통 더욱 병리 성비 합리성 광 신성 공갈 성 협박성 2에서는 결국 무엇을 지향한 고수연 느냐 하는 것을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할지 인데 그것이 바로 쫌 되는 말씀드린 과 된 국가 정체성 의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는 그 점을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1951년 9월 달에 으 일본이 드디어 샌프란시스코가 강화 조약 을 통해서 주권을 회복을 했습니다. 미국을 위시한 46개의 연합국과 그러고 일본이 2 2차 대적이 동전이 이후 10 을 처리하는 조약을 체결하지 어 샌프란시스코 가 어 조약이고 이강호 저역을 통해서 일본은 다시 독립 주권 국가로서의 그 국제적 지위를 회복을 하는데 이재희 조가 제 2의 장 이 영역이고 제 2의 조가 일본의 영역을 제조 정아는 거기 중입니다. 여기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성이라고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방지한다. 그 다음에 일본은 대만 및 행어 제도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은정 국어를 방지한다. 세번째는 일본은 지시 mi 도미 살린 일부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방지한다. 그 다음에는 에 국회의원 명의 1919년에 성립한 국제 명의 일본 외인 통치를 성인 1 태평양 제도 에 대한 국회 연합의 행동을 수락한다. 그 다음의 다섯 번째는 일본은 신남 군도 및 수사 군도에 대한 모든 권리 구원은 청구권을 바뀌었다. 여기서 보듯이 1구간 한국 대만 펭 어제도 지시 말 또 4화 된 일부 신안군 도서 4 군도 등 구 일본 제국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던 지역으로서 어 그 위 추가 설정돼 있고 그리고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반기 한다 한데 이 권리 권원 은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놓일 전쟁 이후 의외의 그치 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방기한 다 했으니까 유지나 암묵적으로 그 모든 글리 에 거는 및 청구 그는 에 런 그 원천적으로 그 승리 베 그 합리성을 인정을 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포기한다 했으니까 포기에 대상으로서 권리는 원래는 일본의 합법적인 권리 었다는 이와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여 연합국은 한국은 아 수 145년 팔을 이전에는 일본 제국의 한 부분이었고 거에 대한 일본의 집에는 합법적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어 이렇게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1951년 당시의 국 45 년 이전에 국제적 지위에 대한 51년 당시의 국제 사회의 합의된 이 시기 입니다.

5단체 사조를 보내는 일본 국립 그 국민의 자산으로서 위 모든 지역에 있는 급과 앞서 제가 10단 이 모든 지역에 있는 것과 청구권 채권 아 니까 물 적 재산과 그 다음에 모든 유체 재산과 모든 유체 제어 이만 아 유체 재산과 무 체재 3 일체 재산의 처리 또한 1 본국에 있는 위 모든 지역의 국감이 그 국민의 자산 및 청구권에 처리는 일본 국가 윅 모든 국가간에 특별 표 수업에 주체로 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제국의 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분리돼 있으니까 뭔가 서로 주고받을 끼 있겠지요. 그래서 그런 것은 담가 간의 특별 교습으로 어 처리한다. 그리고 일본국 은위 모든 지역에서 미국 정부에 의해서 혹은 그 지형에 의해서 행해진 일본국 및 그 국민의 최소한의 처리에 호르 걸 성인 한다. 옷을 2 우수 나중에 해석상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재산의 처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이제 어쨌든 이런 식으로 샘 프란시스 고강 와줘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역할 즉 관계와 그리고 당면한 현안에 대한 규정이 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샘 프란시스코 강화 제약이 있기 전에 한국 영문은 아까 미국에 대해서 나무 같은 요구를 했습니다. 첫째 한국을 대일 전에 참가한 교 전국으로 인정할 것 같으니까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해서 아 성 전국으로 포함시켜 달라 했습니다. 많은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아 특히 거 지 일본이 반발을 하고 특히 영국이 또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 함으로써 어허 한국은 어떻게 까지나 아야나 꼬기 이런 으로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두번째는 한국은 일 어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정부 소유 어 개인 소유를 불문하고 모든 재산 요거를 포기할 것 어이 렇게 에 됐습니다. 이 일본이 철수를 하면서 한국의 에 상당 양의 재산을 어 남겨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형성 되었든 간에 45년 8월 당이 씨의 일본 총독 조선 청도 부와 일본 기업이나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 있었습니다. 그 재산의 양은 지금 보여드리는 이 화면으로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어 45 는 8월 이후에 그 어 46년 이 되어서 동경에 있는 어제나 꽃 사령부와 그리고 그 일본 정부가 서로 협의를 해서 합동으로 예 당시 남 조성과 남한과 북조선 북한 에 있는 아 일본의 남기고 간 재산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나머지 금수 자가 복잡해서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고요. 이 남조선 나만의 남기에 있는 재산은 합계를 보시면은 20 2억 7500만 달러 합니다. 어 당시의 1 15회 엔을 $1 가 헐어 하는 그와 같은 그 관절의 기준에서 나만의 20 2억 7500만 달러 그들을 북한의 아이 19억 7000만달러 합해서 약한 52억 4천 6백 맞거나 정도의 재산이 에 이때 여러 없구 어 동정의 gq 가 선이나 알고 있는 에 그와 같은 일본군 9 일본정부 및 아 민간의 에 남겨진 최선입니다. 이 재산의 기억이 소유한 것이 있고 요점 거죠 정부라고 서 조선총독부 그 다음에 개인이 소유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남기 구간 2 재산 총 개 52억 달러 는 당시 남한 국부의 내셔날 웰스의 에 약간 85%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이렇게 추계 됐습니다. 마이 것은 어 뭐 어쨌든 언니 부정할 수 없는 그 현실인데요. 어 바로 이것을 그 한국 정부는 예매가 게 의식을 하면서 일본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재산 요구권 을 포기하라 왔고 요구를 하고 있습니까.

그 다음의 세 번째는 한국을 에 대 1 강화 조약이 전국으로 어인 정할까. 이렇게 네 번째는 한국과 일본간의 회 수역을 명백히 할 것. 요것은 그 45년 부터 50 1년까지 남매가 도 라인이라고 해서 열었고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임의적으로 끈 그 맥아더가 이니 있습니다. 따라서 샘 프란시스의 꼭 강화 조약 의 성립이 구의 맥아더 라인 은 자동적으로 폐기 될 것이고 그리고 자동 투구를 폐기 된 경우에 이 한국의 의 수혁과 일본의 의 수역을 어 내가 더 라인 을 대신해서 그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그것을 긋자 하고 요구를 하는데 일본은 잘 어 뭐 여러가지 많은 그 일본은 뭐 상당히 0 2 9 그해 양국 간이까 다른 모든 나라들과 어 이런 그 의 수역을 그 그는 문제가 있고 복잡한 가운데 이 협상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이 52년 1월 달에 그 유명한 이성남 라인 평화선 을 꺾고 그 안에 독도를 편영 시키고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이 일이죠. 그 다음에 다섯 번째는 일본은 대마도 파랑도 및 일본 회 의 독도에 대한 요거를 포기할까. 이상 3 도는 일요일 전쟁 중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기 전에 는 한국 소유였다. 잃어야 그때 여러 연구자가 적 지적하고 있듯이 이 요구는 한국 정부로서는 사과의 성급하게 재기를 한 것이었고 국제적 신뢰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대마도 와 조선 정부 이전시 9세 까지 조선 정부 간의 관계에 있어서 뭐 여러가지 그 대마도가 조선 정부에 종속적인 지위에 있을 거 같고 이야기할 만한 여러 가지 그 정도를 있습니다만 아 그걸 근거로 해서 대마도를 조선 흉터가 고 이야기하기에는 여러가지 무리한 재미있고 미국은 어이 한국 정부의 주장을 상당히 빽 불합리한 것으로 아예 목사를 하거나 언론의 보도도 하지 말도록 5 요구를 에 조치를 취했습니다. 바랑 거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섬입니다. 제주도 남쪽 1 150 키로 아 그 일본 나가기 사이에 어떤 섬이 있다 하는 것은 한국이 노력이나 하나의 전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회는 막 그것을 이유도 라 해서 수면 아래 헤맨 아래 사업의 다에 있는 에바 2 암초 입니다. 그 바이 암초를 지금은 파랑 돌아가셔서 거기다가 이어도 랄 이름을 붙이고 해양 기지를 지금 한국 사회가 건설에 돕고 있습니다. 만 원래는 섬이 안 있죠. 한국인들에게 나 하나의 전설과 같이 내려오는 섬이 얻습니다. 한국 정부가 가락으로 요구를 했을 때 국회 사업에는 그 섬이 어디 있는지를 찾느라고 허 바탕 소람 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어 주미 한국 대표부 에게 파랑도 가 어디나 물었을 때 누구도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해 내에 있는 독도 2 독도에 대해서는 일본과 입장이 처음에 하기에 다른 것이죠. 그러나 미국은 이 파랑도 붐 아니라 더욱 뜨거워 지는것 갈아도 어 주미 한국 대표부 의 입장을 타진 했을 때 당시의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독도 어딘지 잘 몰랐습니다. 아 결과적으로 이 모든 여군은 미국에서 무시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데요. 어쨌든 한국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에 전 성 국 의 일원으로서 참가하기 를 3막 엣지 많은 그것이 기각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일본과 의 그 협상할 문제들을 국제적으로 어 문제가 있다는 걸 국제적으로 공인된 은 가운데 양국 간의 협상이 이제껏 이어 전개될 에 그러한 그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은 이 회담은 바다를 아시는대로 조경호 시민 연이율 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죽음에 65년 나 13 년까지 나 10 어육 15년간 13년간 3 계획 의 역사상 외우 가장 질이 지리하게 에 서로 팽팽한 입장이 맞섰던 번외 감 부속 여담을 다 합해서 1000번 이사 2000의 이상의 그 각종 회담이 열렸던 그러한 그 측 하늘 회담이 52년 이유로부터 시작되죠. 52년 2월부터 시작된 회담은 두 달도 못 가서 갤러리 되었습니다. 주요 쟁점은 역시 평화 선과 청구권 문제 입니다. 일본은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투 백 오십 년 1월 달에 발표한 평화선 독도를 포함한 한국인의 그 정관 어구 역을 부정을 했습니다. 더구나 독도에 편입에 대해서는 일본인 입장에서는 일본의 영토를 치며 했다해서 성령이 어 일본은 격앙 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요구한 일본의 재기한 청구 글에 대해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 이었구요. 똑같은 입장으로 제 2차 회담 이 53년 4월에 열렸습니다. 많은 또 어 이렇게 아 갤러리 되고 어 말았습니다.

2 한국 정부가 일본에 대해서 요구안 어떤 대일 청구권 1 이 보여드리는 자료와 아까 같습니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고서적 미술품 기타 국보 그리고 지금과 지은 금과 은 금가 원을 돌려 달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근데 어 여기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나중에 일본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고수 즉 미술 푼 지타 국군은 방안에 여지가 있지만은 미간이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과 지연은 엉 가끔은 조선 의 합법적으로 그 특별 해결을 통해 섬 인간으로부터 매입한 상업적 거리였다 이걸 돌려줄 이루었다. 두번째 난 1945년 8월 9일 현재 일본 정부에 대해 조선총독부 채 5 그리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채 되거나 송금된 그 금은 또 그리고 한국에 본사 또는 주사무소 가 있는 법인의 제 1번 제 4 그래서 한국에 본사를 둔 회사의 일본 지사의 재 사 자 이런것들이 이런 것을 다 한국 정부의 받나 봐 라 했을 때 너 일본 정부는 아 한국 정부가 이런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범 내에서 설치된 1번에 지방 기구로서 그 조선총독부 와 일본 정부 간의 거래에 대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어떠한 요구를 할 권리가 없고 또 운학 일본 회사와 본사 간에 이루어진 거리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정부는 아 어떤 권리를 할 어떠한 요구를 할 걸려 가 없고 그리고 어 미 군정이 일본인 그저 기업의 그 재산을 몰수한 것도 한국에 있는 것에만 하다 가지 예 일본에 있는 아 그 회사의 지사의 까지 미치는 일은 아 니가 뭐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이거 거절을 합니까. 5번 한국 법인 또는 자연인이 보유한 일본 국채 공채 아 등등 p 징 요안 의 미숙의 기타 청구권 어 이것을 받나 봐 라 한국 보기 뻔자 연인의 일본 법인의 주식 또는 기회가 될것. 일본 정부는 이것을 좋다 이거는 뭐 협상의 대상의 로 보다는 일종의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최근 관계인데 이런 것에 대해서는 어 자료가 확인되는 대로 청산 할 일이다 하는 이제 이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1 2 3 4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강하게 부적 하는 통에 해가면 배상 진행되지 않고 이 청구권이 대해서는 너무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 주로 평화선 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여 다가 대담이 이길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3차 회담 1 에 이루어지는데요. 이 53년 10월 달에 다시 3차 미국의 강력한 종용 에 대해서 한국가구 일본이 빨리 국회를 정상화 하는 것이 좋 않은 그 미국의 입장에 따라서 다시 그 3차 회담 이 열리는데 여기서 다시 청구권 문제가 재개합니다. 한국이 청구권 문제를 제기를 하니까 일본 논 한국 2009 것만 있는게 아니다 일본도 청구권이 있다 이렇게 해서 제가 저 좀 전에 소개한 한국의 놓곤 재산을 이야기를 하면서 아 역 청구권을 제기를 합니다. 그래서 논쟁이 아주 뜬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 9부 다시는 개인의 에 자기 4권으로 사귄 있 아이런천재 위에서 헝 구간 일본이 아니었더라면 표시 외에 편입될 수 이 어 모른다 그 다음에 일본의 한국 정치는 한국인에게 유리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예시 한국인들을 한국 대표를 개장이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을 전해 들은 한국 정부가 국민들을 극도로 흥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양국간에 회담은 중단이 되고 다시 그 회담이 열리는 것은 물에 오는 딘 조금의 58 년 4월 달이나 되어서야. 그래서 제 4차 감히 이 14 따왔고 어 하겠습니다. 어 그 사이에 양국 간의 관계는 극도로 아까 되었습니다.

1955년에 어 일본의 새롭게 성립한 그 가지 아마 내각 인가요. 그 내각은 미국으로부터 좀 아 자주 동의하자 이래서 공상 건가 의 외교를 강화를 합니다. 그래서 절은 중국과 특히 그 소리에 마에 수교를 맺고 그 교육을 확대를 하고 또 북한과의 그저 어유 광견 5 믿을 움직임을 보이고 합니다. 그의 반말해서 이승만 정부는 대단히 개장을 해서 일본과의 교역을 중단하라고 인적 교류 자체도 폐쇄를 해야할 됐습니다. 57년 에 되면은 일본의 새롭게 승리 판 귀신 애가 귀신 회복은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는 과 같은 어 입장에서 에 구보다 에바를 취소를 하고 그리고 일본이 한국의 갖고 있다는 그 재산 청구권을 그 포기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양국 간의 국회를 정상화 시킬 수 있는 회담이 계속될 수 있는 여지를 아 듣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58년 4월 대를 다시 하늘을 회담이 제 4자 회담이 열렸습니다. 많은 이때는 또 재일교포 북 총 문제가 아 나라를 결격 없음 그래서 결국은 아 회담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죽음의 50원을 되면은 어 일본의 일본 다시 일본에는 약 70만 정도의 우리 한국인들이 외국인의 자격으로서 애국은 으로 그 자기 등록된 가운데서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 대해서 1954년부터 북한은 적극적으로 4 빚이 조국이라는 살기 조국으로 귀환 한다는 그와 같은 거 공작을 을 거쳐 1955년 을 되면은 일본 공산당 조선노동당 에 합작 하에서 아 이름과 조총 년이 승리 블 하죠. 그래서 이 쪼 청년의 적극적인 어떤 그 사상 0 세워 또 여러 가지 정치적 공세 또는 검정 공세 를 통해서 약을 10만명의 쟁 좋고 들이 에 북한을 살 귀족 이라 해서 그들의 일본인 쳐도 데리고 북한으로 건너가 기 시작을 합니다. 이렇게 되자 어 이승만 정부는 개선이 개장을 해고 어 그렇게 해서 일본 정부를 것이 말한 가운데 하늘을 회담은 사실상 충당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삶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 하자 에 끝내 1번가의 국교 정상화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다음 어 우리 이후 승리 파는 정부의 역사적 과제로 남겨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근데 이와 같은 그 한을 회담에 과정 이 쉬게 이렇게 관철되지 이 안았던 되는 역시 그 이승만 대통령의 그 1번에 대한 근본적인 의 신 불신 아 이런것이 에 깔려 있습니다. 1954년 5월 달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문제에 대해서 아 자 이 구보다 발언 이후에 아 양국간에 회담이 파탄이 난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 문제에 대한 다 말을 바꿔야 합니까. 이때 한국정부는 계산이 국제적으로 미묘한 위치 있었습니다. 제네바에서 는 전에 발 회담이 1녀 가지고 한국의 차 한국전쟁의 6.25 전쟁에 참전한 16개 국가 그리고 중국 소련 북한 대표 저리 모여 가지고 한국에 자유 한국의 평화통일 문제를 국제적으로 논의하는 회담 1리 고어 있었습니다. 한국의 독립을 취소하고 유행 감시 하에서 다시 남북한의 총선거를 실시하자 하는 그와 같은 것 즉 국회 적었던 건너 니가 토론회 되고 있었고 한국 정부는 남북한의 청순 2장 거냐 나만의 총 순간에 이미 이루어졌다 북한에서 만 자유롭게 청 성도를 유행없이 해서 하라 자 이렇게 주장을 봤고 또 북한 중국 소련 은 유행 값이 안이 아니라 줌 중립국 감시의 가게에서 성도를 해야 된다 그 주장을 했고 또 브 중봉에 주 원래는 남북한의 어떤 거죠 재 정당 간 최의 그쳐 임시 위원회를 구성 을 하자 이렇게 아 임시 위원회는 어데 5회 구성을 갖고 하자 그때 그 회담에 창조한 편은 대장간이 어떻게 2부가 1 때인데 5대 5로 대등한 구성으로 양국의 정치 예 대표 위원회를 구성 한단 말이야 이렇게 논쟁을 불리고 있는 이 그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충 서 다시 이 대한민국 이 지소 될지도 모른다 하는 그런 위기 속에서 국내 정치 를 탐색할 필요가 있었고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내놓은 것은 국가의 정체를 변동 하기 위해서는 국회에 막힘 하면 위험하다 그래서 국민투표 저를 실시하자 국민투표 제를 규정한 헌법 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이제 정치적 국내정치 개를 향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면서 이 중단되고 있는 일부 문제를 다시 걸어놔서 이때부터는 국내에 존재하고 있는 7 8월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합니다. 그때부터는 친일 용봉 세력 이라는 말에 나옵니다. 이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용 보험 세력 인데 공산주의 세련 만이 아니라 신일 세력도 우리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54년 55 년에 걸쳐서 친일파에 대해 아니 성한 의 그 비판 공격적인 비판이 면 이어지는데요. 잡지 소개 아마 가벼웠습니다. 일본은 예선이 한국을 다시 평탄한 목적을 변치 왔고 우리 한국은 보도하고 있다 을사조약 정리 7 제약 1905년 l 사 줘야 겠죠 보어 곡은 어찌하고 외교권을 박탈한 의 45g 야 천기 7조 역은 1910 년에 에 베드 징 것으로서 일본인을 한국 정부의 차원으로 임명하는 과 같은 줘야 됩니다. 우리 이전 정부가 관계로 서명 당한 약조를 폐기 해야 되는데 일본이 이어 하지 않고 있다 그 조약은 무효다 라는 것은 다 심어서 일제의 조선 집에는 문화였다 불법적인 지배했다 이제 이와 같은 주장을 이제 이승만이 하고 있습니다만 아 그러나 어 일본 안 아이미 이미 샌프란시스코에 초장에 서적 우리 100 문제다 하는 입장에서 전혀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또 한국 재산의 85% 가 일본 소유라고 주장하고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제가 조금 전에 그 일본어 그렇죠 나름의 그 근거를 소개를 했지요. 그러면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그 불법적인 지배 에 비해 비상을 비해 배상을 용어 가지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문화 유산이 되는 고적 서책 미술 국보 그리고 금 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업적 그리 배상해야 내라 한나라가 화폐를 발행하는 기본이 되는 것인 게 그런 것은 설령 사업적 글이라 하더라도 되돌 보내는 옳다 자 이런 주장을 하는데 일본이 듣지 않는다. 그리고 맥아더 라인 이 폐기되고 나서 어 뭐가 선을 그걸 필요가 있었는데 일본이 협상 와 에어 있지 않으니까 내가 아 평화선 을 그 얻는데 일본이 그걸 인정하고 있지 이 않다 자 그 다음에 다섯번째 여섯번째 는 1번째 물건을 밀반입 하고 그 돈으로 치밀 배를 내세워서 정권을 도모한다 7 배를 일본의 모아놓고 꼬리 국권을 하셨다 일본의 해군은 정부가 허락한다면 한국을 정보 가겠다고 한다. 이 이승만 대통령이 이승만 라인 평화선 을 밟혀서 독도를 그 자국의 영예의 포함 시키자 일본이 경향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해군은 아 말로는 잘 되지 않으니까 결국은 와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그 저 이야기를 하고 또 그 지지하는 여름도 어 당시의 있었습니다. 54년 55년 도 이런 게 20만대 통일 번에 사정을 면밀하게 밥을 하면서 저희 일본이 언젠간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 와서 한국에 책을 배들과 협 짝을 해서 한국을 다시 그의 부족 영토로 삼으려고 하는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서 일본 문제에 대한 담화를 이렇게 발표를 할 뿐만 아니라 곧 이어서 는 에어 2배 54년 5월 달에는 제 3대 국회의원 선거 있었습니다. 이제 3대 국회 선거에서 이런 사람들을 국회의원을 보고 낫는다 해서 그거 없거든 한두번이 아니고 무료 앨범 살인가 얘들 차인가 성 나 국민 담아 를 발표합니다. 7 8월 국회의원으로 뽑아 않는다 내가 볼 때 이런 사람들은 친일파가 첫째 기원해 7 바라 하더라도 은 살아 행동에서 애국정신을 명백히 드러내며 는 7 8 다 우리는 그 과거 행적을 문제에서 7 8을 어 과거의 r 뭐니 아무리 일본의 꼬가 대장을 역임 했더라도 우리의 그 배열에 참여 아서 공격을 쌓으며 는 이미 7일 파나 아니다 상당히 전향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요전에 일정한 참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왕에 책 일파가 아니라도 두드러진 714 적이 없더라도 일본의 아 슴을 알면서도 최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당시 야당 미국 땅 가운데 나는 일본과 그렇게 다툴 것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니까 국회를 빨리 정상화 하는 것이 우리에게 되게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저는 사람들이 7일 팔아 일본의 야심을 알면서도 친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친일파가 일본에 가서 국권을 손상 정부 비박 않은 자들 해방 이후에도 40 년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 을 했습니다. 45년 48 년까지 4 연간 만 명 정도가 한국에서는 살 수 없다 해서 경제적인 이유로 사회적인 혼란 의 염증을 두어 가지고 또 일본에 남기고 온 군 의 인연도 있고 해서 일본으로 많이 검색하는 데 그 가운데는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서 건너간 공산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이 공산주의자들의 일본에 가서 강하게 반기 인력을 해서 일본 공산당 당시 는 그 공산주의자들은 그 일본 공산당이 지도하에 얘기 쓰는데요. 이 일본 공산당 그리고 55년 2 이후에는 북한의 조선 노동당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국 정보를 지속적으로 비방하는 그와 같은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55 년도에 승리 번 저 청년이 바로 그런 것이죠. 그리고 사상적으로 온 그들이 강세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지원해서 여러가지 금전적으로도 어우 3 1 어떤 명령을 보였구요. 이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일본에서 남았어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이게 7일 파 로서 대한민국 반 국가 세례 일 가능성이 있다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어요.

2번째 물품을 반입 에서 재력을 쌓아서 정치 선도하는 작가를 일본 2부 강하여 한국이 경쟁하여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족과 재산을 일본에 두고 언어와 행동 더 생활 범죄를 일본의 모양 하려고 뿜는 저단 여전히 일본 시절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회가 올라 줄었고 경제적으로 p 파악하고 하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또 나라들은 부유한 계층은 부유한 계층 도로 일본식 에그 생활 스타일을 그대로 꼬집을 하고 뭐 일본 노래를 부르고 1번으로 말을 하고 많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과 같은 사람들이 칠판 대의를 7 8을 이제 총선거가 시행될 때 국회의원으로 출 때 슬슬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라 이와 같은 그 이야기.

1957 미래 면은 아 이승만 의 일본 하 점차 일본의 극이 시내 가기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구보다 발언을 취소하고 또 한국에 대한 어 청구권을 포기를 함으로써 새로운 회담이 열리게 될 때 그 한국정부의 대일 이식을 종합한 물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세 이승만 대통령의 일본이 이 시기 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일본은 평화의 호 국가로서 위장하고 있다. 민주국가와 공산국가 의 대립을 통해서 힘을 축적하고 있다. 일본이 과연 평화의 호 민주국가의 냐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5 45 14년 55 년에 걸쳐서 공상 국가와의 재 접촉을 하고 있는 것 이거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일본은 위장한 채 미국의 자본 을 끌어들이고 아시아 의 자원 시작 그리고 일본의 기술로 아시아의 경제 개발을 주도 해서 이를 아시아 0 0 권으로 새로운 제국의 건수를 추구하고 있다. 근데 미국은 그것도 모르고 일본의 부엉 을 지원하고 있다. 자기네 미국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일본의 해야 20 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마라 고 어 이승만 대통령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미국 이것을 못 알아 듣고 있다. 미국은 공상 건을 봉쇄하는 태평양 안보라인 의 전략적 인기 지로서 퇴근이 종료시 에 하고 있었습니다. 당초 2차 대전 이후에는 어 일본을 일본의 그 즉 0 업력을 해체한다 않았고 어떤 방침이 얻습니다 많은 냉전이 cm 냉전이 냉전시대에 돌입하면서 부터 일본의 경제적 부어 따라서 군사적 어떤 그 부흥을 미국은 지지를 하고 이 아시아 야 어 1 1 미국의 동아시아 아하 태평양에 에 전략의 기지로서 일본을 대가리 중시를 합니다. 중실하고 미국의 이와 같은 정책의 홈에서 한국도 일본과 빨리 협조를 해서 구결을 정상화 아 할 것을 요구 를 하고 있었던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근데 이승만 대통령 그게 대해서 각 에반 볼을 하죠. 일본이란 나라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이것은 이승만 의 오래된 일본 인식입니다. 1941년에 그 가스가 쓴 재편 인사이드 9 체 서에 에 그가 생각했던 일본은 스스로를 신의 나를 5 야마토의 제국으로 아시아를 지도 할 권리가 있는 그러한 우수한 민족이고 나라라는 그와 같은 전체주의적 이 인식의 사회 줄 평 있는 나라다. 그런 일본을 미국이 뭘 잘 모르고 어 지지를 했다가 결국 언어 태평양전쟁을 불로 이렇게 따 하는 그와 같은 그 41 년 단기 있었으 일본 인식을 그대로 고집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 공산권 을 봉쇄할 아시아 집 깐 안보 체제 가 필요 악 아 근데 이집 깐 남 보 체제는 대공 산 안보 체제 일부만 제가 대 1번 땅을 시스템이 해야 하다 이런 주장을 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일본과 미국의 에 정치 저자들은 조금 죄는 말씀드린대로 병리적 이다. 비2 성징이 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글 이슈 하고 있지 못하다 아주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게 평가를 했고 그 점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저도 이 이승만 일본인 시기 에 그대로 다 정당하다고 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2차 대전 이후에 일본은 아 근본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뀐 1 문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이해를 이승만은 교정이 부정을 하면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에서 일본을 국제적으로 고리키 길로 고 노력을 했습니다만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나 한국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이와 같은 외교적 어떤 그 실패를 초래하기도 행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이승만 대통령이 이런 이야기를 계속 했을까 는 것은 결국은 한국 좀 전에 말씀드린 들어 한국의 내셔날 아이덴티티 한국에는 나라가 도대체 뭐냐 또 한국 국민은 어떻게 해서 스스로 자기를 통합 하느냐 내쇼날 인 태그 레이션 이 문제의 있었어 옷이 있는데 이 단계에 있어서는 이성만 의 이와 같은 일본 이식과 일본 외교 가 그 유일한 뭐 율하 다기 보다는 그거 뒤에는 다른 것을 쉽게 에 작기 곤란한 그와 같은 대한 이 아니었을까 그런 그런 생각을 에 하게 됩니다. 열려서 미국의 요구에 따라서 1953년 54 전 단기에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하고 일본과 경제 관계를 트고 했더라면 은 하고 을 어떻게 됐을까 결국은 일본에 종속된 은 어떤 그러한 부속 경제로 어 그렇게 떨어지고 말았을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 일본에서는 물론 북한을 습도 공산주의 이 세례 국회 공산주의 세력의 공세는 제자리 에 강하게 에 하고 의 경북의 가해지고 있었고 과연 그랬을 때 일본의 부속 적인 경제 체제로 떨어졌을 때 이 나라가 얼마나 이후 오랫동안 장기적으로 자기 생명력을 보존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어떤 의미에서는 실외 차기 고 외국 2대 볼 때는 병리적 2까지 1 그와 같은 일본에 대한 강한 불신과 경계는 그 시대 나름의 역사 정 역할이 있었고 그것은 결국은 한국이란 나라에 거쳐 자기 정체성 한국인들에게 그대는 누구일까 그대로 일본인이 대상 일본인이 아닙니다. 한국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뭔가 어떠한 정체성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의 안정적인 정치 시스템으로 통합 될 것인가 하는 그 문제에 대해 한 당대 의 유일한 해답이 아니었을까.

이승만 대통령의 이와 같은 일본 자세는 미국하고 자세 와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어 지사 중 9월달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서 아주 중대 연구를 바라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미국은 아주 불쾌해 구요 아주 불쾌 해서 아예 그냥 철수 까지로 어항 국에서 하겠다는 이야기가 2gb 미국 정부 일각에서 여론이 일고 미국 안전 뭐 nsc 에서 안전 보장에 의해서 이 문제가 다뤄 지기도 했습니다만 은 그 대신에 아 미국은 아 마 더 이상 여기에 대해서 어떤거 불쾌한 감정을 숨기고 어항 국 경보를 어떤 달리기로 하는 것을 결찰 봅니다. 많은 이승만 대통령 딸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경제 부흥 위원들을 주 겠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완전히 주던지 아니면 일본의 다 줘 버리라 받지 않겠다. 그렇게 자꾸 미국이 한국의 원주를 주는데 그 중에 일정 부분을 일본 물건을 구입하라고 요구를 하는 겁니다. 주는 사람이 용어로 하니까 하니까 물리치기 가 곤란하죠. 일본은 일본 대로 미국의 대 한국 원조 정책은 일본과의 긴밀한 그 협조하여 서일본 불 건을 구매 하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미국 정부의 강하게 요구를 하고 있을 거에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댐이 준비해 경고를 발행합니다. 원조 안 받겠다 차례 줄려면 일본을 주라. 그렇게 지난 7 8 년과 미국이 한국의 경제 부위에서 많은 금전을 허비해서 나 이루어 놓은 것이었다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비료 시멘트 전기 이런 사업은 하나도 착수 하지 않고 또 착수 도 못 하게 하고 일본 물건을 사다가 우리에게 주고 있다 사람의 원도 안 받겠다 뭐 갈테면 가라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아이 적으나 대통령 1 우리는 항구 건 우리에게 군사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다른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심리적으로 한국어 대단히 우리에게 중요하며 우리가 한국에서 실패할 수는 없다 란 아쿠아 같은 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심리적으로 미국은 한국의 뒷다리가 묶여있는 p 셈입니다. 그 뒷다리를 묻고 심리적인 정치적으로 부담감을 갖게 만든 것 그런 역사 지 관계를 형성한 주역이 바로 어 이승만이 다하고 제가 이 강의에서 쭉 주장을 해 왔습니다만 이승만은 미국의 한국 정책의 헛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헛점을 이용해서 미국에 대해서 공갈 협박을 않은데 미국으로서는 불쾌하지 많은 그 효 공갈 협박이 갖고 있는 미국 80평 어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자주하면 이야기입니다 많은 입에다 카르 볼 고딩 뛰기를 하는 식으로 미국의 덤벼드는 이승만이 결국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내셔날 인터레스트 국가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일본에는 다시 종속될 수 없다는 일본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직접적으로 교수 파고 연결 하고 해서 일본으로부터 는 완전히 독립한 그러한 어떤 신세 구글 만들려고 하는 그와 같은 이승만 의 전략적인 어떤 거 계산을 미국은 이해를 하숙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거듭된 권가 을과 협박을 그릇에 내서 미국은 이해하고 한국을 도와줬던 겁니다. 연간 2억 3억 달러 그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더 큰 규모의 아주 제 10구간 이루 어졌다 자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군사 원주가 있었습니다 하루 어 1960년까지 하 35달러 에그 경제 원조가 있었는데 군사 원조를 합하는 그보다 두 배는 더 될겁니다. 이런 것 대량의 원조를 하고 게 행할 수밖에 없을 땐 듯이 바로 미국이고 또 미국의 미국 들어 그런 의미에서 나 일본의 다시는 종속되지 않으려고 하는 각가지 명분과 어떤 그 강한 어떤 것 줘 상대방을 설득하기 힘든 즉 지적 그 외교 를 통해서 일본으로부터 자립 하려고 하는 한국의 입장을 미국은 이해를 했던 것이고 그러한 한에서 1950년대에 그침 아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 내지 군사 원조는 계속 을 쓰 이루어지고 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서 여행을 하겠습니다. 병리적 이다 고집불통 이다 비정 증이 다 고갈 해버릴 삼간다 이와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1950년 대에 그친 일본과 미국에 대한 외교 정책은 잘 괴산 된 국가 정체성 국민통합을 위한 담대히 늘어서는 동시대에 조건으로서 다른 대안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찾았다가는 국가의 정체성과 국민 통합의 심각한 손상이 발생할 수 있는 그와 같으니 승마가 램의 매우 합리적인 외교적인 추구 이었고 또 선거 애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의상 왕권 고집불통 애 하면서 게 대해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으 [음악] 아 5 woo 5 we 아 으 a a 아 아 아 5 we 오 오 오 [음악] 으 [음악] w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