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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당신은 지금이 순간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화면 속 글자, 주변의 사물 혹은 창밖에 풍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그 세상은 정말 당신밖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음악]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화엄경 십지품에 나오는 이 한 구절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본질을 꿰뚫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은 훌륭한 화가와 같아서 온갖 세상을 그려낸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깊은 가르침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느 날 아침 당신은 눈을 뜹니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새 소리가 들립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출근길 지하철은 여전히 분비지만 오늘따라 사람들의 얼굴이 평온해 보입니다. 회사에 도착해서 동료가 건네는 인사도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다음날 [음악] 같은 시간에 눈을 뜹니다. 같은 햇살, 같은 새소리인데 마음이 무겁습니다. 어젯밤 꾼 꿈 때문인지 뭔가 불안합니다. 지하철 안 사람들의 표정이 피곤하고 지쳐 보입니다. 동료의 인사도 건성으로 들립니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요? 세상이 달라진 걸까요? 아니면 당신의 마음이 달라진 걸까요?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마음이 그것을 다르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같은 비가 내려도 어떤 이에게는 축복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재앙이 됩니다. 농부는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보며 기뻐하지만 소풍을 계획했던 아이는 [음악] 비를 보며 실망합니다. 비는 그저 비일 뿐입니다. 그것을 축복으로 만드는 것도 재앙으로 만드는 것도 마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불행한 이유는 가난하기 때문이다. 외롭기 때문이다. 인정받지 못하기 [음악] 때문이다. 만약 돈이 많아진다면, 좋은 사람을 만난다면, 성공한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깥 세상을 바꾸기 [음악] 위해 온 힘을 다합니다. 더 많이 벌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원하던 것을 얻어도 행복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잠깐의 기쁨 뒤에 또 다른 갈망이 찾아옵니다. 이것을 얻으면 저것이 필요하고 저것을 얻으면 또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일찍이 간파하셨습니다. [음악] 룸빈이 동산에서 태어나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자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름다운 궁전,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있었습니다. 야소다라는 사랑스러운 부인과 라홀라라는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자는 궁을 나섰습니다. 사문 유관이라 부르는 사건입니다. 동문에서는 늙은 노인을, 남문에서는 병든 환자를, 서문에서는 죽은 이의 장례 행렬을 보셨습니다. 북문에서는 평온한 얼굴의 수행자를 만나셨습니다. 그 순간 왕자는 깨달으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늙음과 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바깥 세상의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왕자는 왕궁을 떠났습니다. 29의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셨습니다. 6년간의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첫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는 존재한다. 고의 원인이 있다. 고의 소멸이 있다.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다. 이것이 사성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고통의 원인을 어디서 찾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가난이나 질병이나 외로움 같은 외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가래. 즉 끝없는 욕망과 집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과 집착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합니다. 이것을 얻고 싶고 저것을 피하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것에는 집착하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마음은 평화를 잃고 세상은 투쟁의 장이 됩니다.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심여야 공화사 능화 종종물. 마음은 훌륭한 화가와 같아서 온갖 세상을 그려낸다. 마음이라는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음악]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살았습니다. 형은 항상 불평이 많았고 동생은 항상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음악] 큰 홍수가 마을을 덮쳤습니다. 집도 농사도 모두 물에 잠겼습니다. 형은 하늘을 원망하며 말했습니다. 왜 하필 우리 마을에 이런 재앙이 내린 것인가? 이제 우리는 끝났다. 동생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습니다. 형님, [음악]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손과 발이 있고 [음악]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두 형제는 같은 재앙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형은 절망 속에 빠졌고 동생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요? 홍수는 똑같았습니다. 마음이 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 사물과 사건과 사람들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입니다. 그것들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같은 말 한마디도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 상처가 되기도 하고 격려가 되기도 합니다. 같은 일을 겪어도 [음악]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좌절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깥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수행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하고 번뇌를 일으키는 패턴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조금씩 변화시켜 [음악] 나가는 일입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불리와 고통은 무시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가난과 전쟁과 질병도 마음의 문제일 뿐입니까? 그것은 일체유심조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비를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음악] 그 자비도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먼저 평화롭지 않다면 [음악] 진정으로 남을 도울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번뇌로 가득하다면 남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것도 번뇌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의지처이니 남이 어찌 의지처가 되겠는가?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는 무상의 세계에서 [음악]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깨어 있는 자기 마음뿐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음악]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이해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훨씬 더 깊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마음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것입니다.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같은 세상도 전혀 다르게 경험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당신이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지나가면서 어깨를 부딪혔습니다. 만약 [음악] 당신이 그날 화가 나 있는 상태라면 즉시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왜 앞을 보고 다니지 않아? 사과도 없이 그냥 가버려. 하지만 만약 [음악] 당신이 평온한 상태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지. 급한 일이 있었나 보다. 사건은 똑같습니다. 어깨를 [음악] 부딪힌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태에 따라 하나는 하루 종일 기분을 망치는 큰 사건이 되고 다른 하나는 금방 잊혀지는 작은 일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세상 자체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방식이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화를 내게 만드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내 안에 화입니다. 슬프게 만드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내 안에 슬픔입니다. 외부 조건은 방아쇠일뿐 총알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장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알아차림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관찰하는 것입니다. 화가 났는가? 슬픈가? 불안한가? 집착하고 있는가?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그저 관찰합니다. 아, 지금 나는 화가 났구나. 아, 지금 나는 [음악] 불안해하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과 나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생깁니다. 나는 화가 아니라 화를 느끼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는 불안이 아니라 불안을 관찰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두 번째는 놓아버림입니다. 집착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되 [음악]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나머지는 인연에 [음악] 맡기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통해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법칙입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조건들이 맞아 떨어질 때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집착이 조금씩 느슨해집니다.
세 번째는 자비입니다. 자신과 남에게 친절한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에게 너무 가혹합니다. 실수하면 자책하고 부족하면 자신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신 안에도 깨달을 수 있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음악]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마음을 남에게도 확장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나처럼 행복하기를 원하고 [음악]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때 용서와 이해가 일어납니다.
[음악] 어느 선사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깨닫기 전에는 이렇게 봅니다. 그러다가 수행하면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것을 압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음악] 그리고 진정으로 깨달은 후에는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음악] 이때의 앎은 처음과 다릅니다. 산을 보지만 산에 집착하지 않고 물을 보지만 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도 그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동시에 압니다.
우리는 지금이 순간에도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지금이 순간에도 당신의 마음은 세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읽으면 불안한 세상이 펼쳐지고 [음악] 평화로운 마음으로 읽으면 평화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선택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음악]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왕자든 거지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청정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번뇌의 구름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음악] 구름을 걷어내면 본래의 맑은 하늘이 드러납니다. 오늘이 순간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마음을 관찰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화가 날 때 잠시 멈추고 숨을 한번 크게 쉬십시오. 아, 지금 나는 화가 났구나라고 알아차리십시오. 슬플 때 그 슬픔을 있는 그대로 느껴 보십시오. 밀어내지 말고 부정하지 말고 그냥 느껴 보십시오. 그러면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 감정이 영원할 것 같았는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은 무상합니다. 화도 슬픔도 불안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구름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사라집니다.
화엄경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법유심.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다. 이 우주의 모든 현상, 모든 존재가 마음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보는 세상은 당신의 마음이 비추는 거울입니다. 거울이 더러우면 세상도 더러워 보이고 거울이 맑으면 세상도 맑아 보입니다. 그러니 거울을 닦으십시오. 마음을 닦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그 진리는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니 [음악] 혼란과 불안이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더욱 절실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바깥 세상에서 답을 찾으려 합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인정을 얻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이미 있습니다. 일체유심조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고 일상에서 실천할 때 우리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아도 우리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조건이 완벽하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화와 행복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마음이 어떤 세상을 그려낼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잠시 멈춰서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숨을 쉴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으로 시작하십시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은 [음악] 명확합니다.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면 [음악] 세상이 바뀝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천국을 만들 수도 있고 지옥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지금이 순간 [음악]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요?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까요? [음악]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경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인도의 위대한 불교 사상가들은 이 질문에 천년 [음악] 넘게 골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의식의 구조를 밝혀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식 불교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해신밀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래 야식 감심이 전 선악업종자. 아래 야식은 심이 깊고 미세하여 선악의 업종자를 저장하는 창고와 같다. 우리의 의식은 단순한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라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처럼 말입니다. 수면 위로 보이는 파도가 있고 그 아래 [음악] 깊은 곳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흐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의식하는 마음은 파도입니다. 하지만 [음악] 그 파도를 움직이는 것은 깊은 곳의 해류입니다.
불교에서는 의식을 여덟 가지로 나눕니다. 팔식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안식, 귀로 듣는 이식, 코로 냄새 맡는 비식, 혀로 [음악] 맛보는 설식, 몸으로 느끼는 신식, 그리고 생각하는 의식입니다. 이것을 육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의식 작용이 [음악] 여기에 해당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안식이 [음악] 작동합니다. 침대 시계가 보이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보입니다. 귀를 기울이면 이식이 [음악] 작동합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 새 소리가 들립니다.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면 설식이 작동합니다. 쓴맛과 향이 느껴집니다. 이 모든 것이 육식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더 깊은 층위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것이 일곱 번째 식인 말라식이고 여덟 번째 식인 아뢰야식입니다. 말라식은 자의식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감각이 여기서 나옵니다. 끊임없이 나, 내 것,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이 몸이 나이고 이 [음악] 생각이 나이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믿는 마음입니다. 말라식은 항상 아뢰야식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마치 거울 앞에 선 사람이 거울 속 모습을 진짜 자신이라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누군가 자기를 무시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즉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해. 내 자존심이 상해. 나는 [음악]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야. 이 모든 반응은 말라식에서 나옵니다. 나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손상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재법무아. 모든 법에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헛된 환상입니다. 즉 색수상행식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일시적으로 모여 있을 뿐입니다. 마치 파도가 물의 한 형태일 뿐 독립적인 실체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 아뢰야식이 있습니다. 아뢰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저장소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한 모든 것, 생각한 모든 것, 행동한 모든 것이 여기에 저장됩니다. [음악] 그것을 종자라고 부릅니다. 마치 창고에 쌓인 씨앗들처럼 아뢰야식에는 무수한 업의 종자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선한 업의 종자도 있고 악한 업의 종자도 있습니다. 기쁨의 종자도 있고 슬픔의 종자도 있습니다. 이 종자들은 단순히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맞으면 싹을 틔웁니다. 그것을 현행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경험은 아뢰야식의 공포의 종자로 저장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사람은 그 일을 잊고 삽니다. 의식적으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개를 만났습니다. 순간 이유 없는 불안과 공포가 밀려옵니다. 왜 그럴까요?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던 종자가 조건을 만나 현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습관도 이렇게 형성됩니다. 어떤 행동을 반복하면 [음악] 그것이 아뢰야식의 종자로 쌓입니다. 그리고 그 종자가 강해지면 우리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그렇게 행동하게 됩니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는 습관, 화가 났을 때 소리를 지르는 습관, 불안할 때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 이 이 모든 것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의 작용입니다.
무착보살과 세친보살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사세기경 인도에서 활동한 위대한 불교학자들입니다. 무착 보살은 어느 날 미륵 보살을 만나 유식의 가르침을 [음악]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동생 세친에게 이 [음악]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처음에 세친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형님, 아뢰야식이라는 것이 정말 있습니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무착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동생아, 씨앗을 본 적이 있느냐? 씨앗은 [음악] 땅속 깊이 묻혀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 봄이 되면 싹이 돋아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 꽃과 열매를 보고 우리는 씨앗이 있었음을 안다. 아뢰야식도 그러하다.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모든 경험과 행동이 거기서 나온다.
세친은 깊이 사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유식 30송이라는 위대한 논설을 저술했습니다. 겨우 30개의 계송으로 의식의 모든 구조를 설명한 놀라운 작품입니다. 후대의 현장 스님이 이것을 [음악] 중국어로 번역하고 해설하여 성유식론이라는 방대한 책을 만들었습니다.
현장 스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경의롭습니다. 당나라 시대 그는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인도로 떠났습니다. 나라에서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음악] 그는 몰래 국경을 넘었습니다. 사막을 건너고 산을 넘어 17년 동안 인도 전역을 순례했습니다. 날란다 대학에서 가장 뛰어난 스승들에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수백 권의 경전과 논설를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황제가 성대하게 맞이했고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현장 스님의 진짜 위대함은 그다음에 있습니다. 그는 남은 생애를 오로지 번역과 연구에 바쳤습니다. 1300여 권의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유식 사상을 중국에 전하고 법상종을 세웠습니다.
유식 [음악] 사상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세상은 객관적 실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의식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눈앞에 꽃을 봅니다. 우리는 꽃이 저기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식 사상에 따르면 그 꽃의 경험은 우리 의식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안식이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고 의식이 그것을 꽃이라고 인식하고 과거의 경험, 아뢰야식의 종자에 기반해서 아름답다 [음악] 또는 별로다라고 판단합니다. 그 모든 과정이 우리 의식 안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음악]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유식을 오해한 것입니다. 유식은 세상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이 순수하게 객관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의식이라는 필터를 통과합니다. 그 필터는 우리의 과거 경험, [음악] 습관, 욕망, 두려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같은 영화를 봐도 사람마다 다른 감상을 합니다. 누군가는 감동받고 [음악] 누군가는 지루해합니다. 영화 자체는 똑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아뢰야식이 다르기 때문에 경험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랑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로맨스 영화를 보며 슬퍼할 수 있고 행복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같은 영화를 보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식과 아뢰야식의 관계입니다. 육식은 현재 순간의 경험을 담당하고 [음악] 아뢰야식은 과거의 모든 경험을 저장합니다. 그리고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음악] 육식의 경험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순수하게 지금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축적된 경험을 통해 지금을 [음악] 경험합니다.
말라식은 이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나를 만들어냅니다. 아뢰야식의 흐름을 나라고 착각하고 육식의 경험을 내 경험이라고 집착합니다. 이것은 내가 본 것이다. 내가 느낀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고 말입니다. 단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강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강물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이 순간의 물은 다음 순간의 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한강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영원히 같은 강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나도 그렇습니다. 순간순간 변하고 흐르는 의식의 흐름에 나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입니다. 10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요? 몸의 세포는 대부분 바뀌었습니다. 생각도 달라졌고 좋아하는 것도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아뢰야식의 연속성 때문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종자로 저장되어 현재의 영향을 미치고 현재의 경험이 다시 종자로 저장되어 [음악] 미래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연속성의 환상이 만들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구조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을까요? 첫째,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거나 불안해지거나 슬퍼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 상황 때문이 아닙니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과거의 종자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아, 이것은 내 안에 오래된 패턴이구나. 나는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어.
둘째, 좋은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은 아뢰야식의 종자로 저장됩니다. 선한 생각을 하면 선한 종자가 쌓이고 악한 생각을 하면 악한 종자가 쌓입니다. 자비로운 행동을 반복하면 [음악] 자비의 종자가 강해지고 분노의 행동을 반복하면 분노의 종자가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좋은 종자를 심어야 합니다. 매일 감사하는 마음을 내고 남을 돕고 지혜로운 책을 읽고 명상하는 것. 이 이 모든 것이 아뢰야식의 좋은 종자를 심는 일입니다.
셋째, 나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음악] 말라식이 끊임없이 나, 내 것이라고 집착하지만 그것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명상 수행을 통해 마음을 관찰하면 [음악]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음악] 감정이 왔다가 가고 감각이 생겼다가 없어집니다. 그 어디에도 고정된 나는 없습니다. 단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만 있을 뿐입니다.
말라식은 폭포와 [음악] 같다고 합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물줄기처럼 보이지만 [음악] 가까이 가면 물방울들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 순간의 물방울과 다음 순간의 물방울은 다릅니다. 하지만 [음악] 연속성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의 폭포라고 인식합니다. 우리의 의식도 그렇습니다. 찰나찰나 생멸하지만 그 흐름의 연속성 속에서 나라는 착각이 생깁니다.
유식 사상을 공부하던 어느 수행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아뢰야식을 직접 볼 수 있습니까? 스승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언제나 물속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뢰야식을 직접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작용을 통해 그것이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유식팔식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작동 원리를 밝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는 실천적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왜 반복적으로 같은 실수를 하는지, 왜 나쁜 습관을 [음악] 끊기 어려운지, 왜 과거의 상처가 현재를 지배하는지. 이 모든 것이 아뢰야식의 종자 작용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희망이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새로운 종자를 심을 수 있고 나쁜 종자를 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을 훈습이라고 합니다. 향을 옷에 가까이 두면 향기가 배듯이 좋은 생각과 행동을 [음악] 반복하면 마음에 그것이 배어듭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것도 바로 이 원리입니다. 6년간의 수행을 통해 번뇌의 종자를 소멸시키고 지혜와 자비의 종자를 키우셨습니다. 마침내 아뢰야식이 완전히 청정해졌을 때 그것을 대원경지라고 부릅니다. 큰 둥근 거울처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지혜입니다. 더 이상 번뇌의 종자가 없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음악] 매일 조금씩 마음을 관찰하고 좋은 종자를 심어가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납니다. 화를 내는 횟수가 줄어들고 불안해하는 시간이 짧아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늘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팔식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첫걸음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지, 왜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 왜 특정 상황에서 불편한지. 이 모든 것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의 작용입니다. 그것을 알면 자기 자신을 탓하거나 남을 원망하는 대신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 보십시오. 어떤 생각이 자주 일어나는지, 어떤 감정이 반복되는지, 어떤 상황에서 편안하고 어떤 상황에서 불편한지. 그것들은 모두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좋은 종자를 심어 보십시오. 아침에 일어나 감사의 마음을 내고 하루 동안 자비의 마음으로 남을 대하고 저녁에 하루를 돌아보며 반성하십시오. 이 이 작은 실천들이 쌓여서 당신의 아뢰야식을 조금씩 변화시킬 것입니다. 의식의 깊은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종자에 지배당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미래의 종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식 불교가 우리에게 전하는 해방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제 의식의 구조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덟 가지 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뢰야식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번뇌의 마음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가?
성유식론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종자생 현행 현행훈 종자. 종자가 현행을 낳고 현행이 다시 [음악] 종자를 훈습한다. 이 짧은 여덟 글자 속에 변화의 모든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종자와 현행의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는 조건이 맞으면 현행으로 나타납니다. 현행이란 지금이 순간 드러나는 생각, 감정, [음악] 행동을 말합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모든 것, 생각하는 모든 것이 현행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현행이 다시 아뢰야식에 새로운 종자로 저장되는 것입니다. 마치 거울이 서로를 비추듯 종자와 현행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부모님께 [음악] 자주 야단을 맞았습니다. 너는 왜 이것도 제대로 못 하니? 넌 정말 쓸모없구나. 이런 말들을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그 경험들이 아뢰야식에 나는 [음악] 부족한 사람이다라는 종자로 저장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는 어른이 되어 회사에서 일합니다. 어느 날 상사가 업무에 대해 피드백을 줍니다. 이 이 부분은 [음악] 다시 수정해 주세요. 객관적으로 보면 평범한 피드백입니다. 하지만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작동합니다. 순간 [음악] 나는 역시 못난 사람이야. 나는 제대로 하는 게 없어라는 생각과 함께 자괴감이 밀려옵니다. 이것이 현행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옵니다. 만약 그가 이 자괴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음악] 자신을 계속 비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맞아. 나는 정말 못난 사람이야. 항상 실수만 해. 이런 생각을 반복하면 그것이 다시 아뢰야식의 종자로 저장됩니다. 기존에 나는 부족하다는 종자가 더욱 [음악] 강화됩니다. 그러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 종자는 더 빠르고 강하게 현행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악순환입니다.
하지만 다른 선택도 가능합니다. 만약 그가 알아차림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 지금 나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구나. 이것은 어렸을 때 형성된 오래된 패턴이야. 상사의 피드백은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를 개선하자는 것이었어. 이렇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자비의 마음을 냅니다. 괜찮아.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이런 생각과 태도가 다시 아뢰야식의 종자로 저장됩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실수는 성장의 기회다라는 새로운 종자가 심어집니다. 이것이 선순환입니다. 이것이 바로 훈습입니다. 훈은 향기를 피운다는 뜻이고 습은 익힌다는 뜻입니다. 마치 옷장에 향을 두면 옷의 향기가 배듯이 좋은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면 마음에 그것이 [음악] 베어듭니다. 향나무 옆에 있는 나무는 저절로 향기를 품게 됩니다. 선한 사람 곁에 있으면 선한 마음이 생기고 지혜로운 가르침을 자주 접하면 지혜가 자랍니다. 이것이 모두 훈습의 원리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안굴리말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손가락 목걸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그는 살인자였습니다. 스승의 [음악]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 천 명을 죽이면 해탈한다고 믿었습니다. [음악] 이미 999명을 죽이고 [음악]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녔습니다. 마지막 한 명만 더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아뢰야식에는 살인과 폭력의 종자가 가득했습니다. 분노, 증오, 광기의 종자들이 끊임없이 현행으로 드러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음악]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을 마지막 희생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칼을 들고 부처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력으로 달려가는데 천천히 걷는 부처님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굴리말라는 소리쳤습니다. 멈춰라. 부처님께서 돌아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미 멈추었다. 멈추지 못한 것은 너다. 그 순간 안굴리말라는 멈췄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눈빛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흔들렸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중생을 해치지 않겠다고 멈추었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증오에서, 폭력 속에서, 고통 속에서 달리고 있다.
안굴리말라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출가를 청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라 비구여. 그 한마디로 안굴리말라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 후는 철저하게 수행했습니다. 과거에 악업을 참회하고 자비의 마음을 닦았습니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돌을 던졌습니다. 저 살인마가 감히. 하지만 그는 참았습니다. 모욕을 받아도 맞아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음악] 자신의 업보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매일 명상했습니다. 자비관을 수행했습니다.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말뿐이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음악] 분노와 죄책감이 끌어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매일 매순간 자비의 마음을 내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것이 현행이 되었고 그 현행이 아뢰야식에 새로운 종자를 심었습니다. 살인과 폭력의 종자는 점점 약해지고 자비와 참회의 종자가 점점 강해졌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그는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습니다. 999명을 죽인 살인자가 [음악]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악인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의 업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순간 무엇을 선택하느냐이다. 안굴리말라는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걸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 있어도 변화는 가능합니다. 아무리 오래된 습관이라도 바꿀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음악] 새로운 종자를 받아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종자를 심느냐입니다.
성유식론에서는 전의를 말합니다. 의지처를 전환한다는 뜻입니다. [음악] 번뇌의 식을 지혜의 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팔식을 사지로 전환합니다. 전팔식성사대원경지. 여덟 가지 식을 전환하여 네 가지 큰 지혜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첫째, 아뢰야식을 대원경지로 전환합니다. 큰 둥근 거울의 지혜입니다. 번뇌로 흐렸던 아뢰야식이 완전히 청정해져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왜곡도 없고 집착도 없고 혐오도 없습니다. [음악] 단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반영합니다.
둘째, 말라식을 평등성지로 전환합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던 말라식이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지혜로 바뀝니다. 나도 남도 모두 같은 불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고 귀하고 천함이 없습니다. 이 지혜가 생기면 자비가 저절로 일어납니다.
셋째, 의식을 묘관찰지로 전환합니다. 분별하던 의식이 모든 것을 미묘하게 관찰하는 지혜가 됩니다. 사물의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꿰뚫어 봅니다. 연기법을 이해하고 무상과 무아를 직관합니다.
넷째, 오식 [음악] 안이비설신을 성소작지로 전환합니다. 감각을 통해 집착하고 혐오하던 다섯 가지 식이, 중생을 [음악] 이롭게 하는 일을 성취하는 지혜가 됩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중생 구제의 방편이 됩니다.
이 네 가지 지혜는 한 순간에 얻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수행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지금이 순간입니다. 지금이 순간의 선택이 미래의 나를 만듭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첫째, 알아차림을 기릅니다. 팔정도의 하나인 정념입니다. 지금이 순간 내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합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가? [음악]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가? 어떤 욕구가 일어나는가? 판단하지 않고 [음악] 그저 있는 그대로 봅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변화가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의식하지 못한 패턴은 자동으로 반복되지만 의식한 패턴은 선택이 [음악]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선택적으로 반응합니다. 자동 반응이 아니라 의식적 대응을 합니다. 화가 치밀어 올 때 즉시 화를 내는 대신 잠시 멈춥니다. 세 번 숨을 깊게 쉽니다. 지금 나는 화가 났다. 그런데 이 [음악] 화를 표현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이렇게 자문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잠시 멈추면 다른 선택이 가능해집니다.
셋째, 좋은 습관을 만듭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감사의 마음을 냅니다. 오늘도 숨을 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루 중간중간 자신의 마음을 점검합니다. 지금 나는 평화로운가 아니면 긴장하고 있는가? 저녁에는 하루를 돌아봅니다. 잘한 일은 스스로를 격려하고 부족한 일은 내일 더 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넷째, 좋은 환경을 만듭니다. 훈습은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분노하는 사람들과 있으면 분노가 생기고 [음악] 평화로운 사람들과 있으면 평화가 생깁니다. 지혜로운 책을 읽고 좋은 법문을 듣고 수행하는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절에 가거나 명상 센터에 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 곳에 고유한 분위기가 마음에 [음악] 좋은 종자를 심어 줍니다.
다섯째, 참회와 발언을 합니다. 과거에 잘못된 행동을 참회합니다. 제가 과거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은 악업을 참회합니다. 참회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를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언합니다. 앞으로는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발언은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히 하면 그쪽으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중국 선종의 육조해능 스님은 그를 몰랐습니다. 난방 사람이라 사투리도 심했습니다. 어느 날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감동하여 오조홍인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홍인 스님이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구하러 왔느냐? 해능이 대답했습니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홍인 스님이 말했습니다. 너는 난방 사람이고 오랑캐인데 [음악]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해능이 대답했습니다. 사람에게 남과 북이 있지만 불성에는 남과 북이 없습니다.
홍인 스님은 해능을 [음악]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절에 다른 승려들이 시기할까 봐 방앗간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해능은 묵묵히 여덟 개월 동안 방앗간을 찧었습니다. 몸은 고됐지만 마음은 항상 맑았습니다. 일하면서도 수행했습니다. 방앗간을 찧는 그 순간순간이 수행이었습니다. 어느 날 홍인 스님이 제자들에게 깨달음의 계송을 짓게 했습니다. 가장 뛰어난 수제자 신수가 계송을 지었습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대라. 부지런히 닦고 닦아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 모두가 훌륭한 계송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점수, 점진적 수행의 방법입니다. 끊임없이 마음을 닦아 번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해능은 그를 몰랐지만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자신의 계송을 벽에 적게 했습니다. [음악] 우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 밝은 거울도 대가 아니라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네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 이것은 돈오반박. 깨달음의 방법입니다. 본래 우리 마음은 청정하니 바꿀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홍인 스님은 해능의 계송을 보고 깊이 깨달은 것을 알았습니다. 한밤중에 해능을 불러 법을 전하고 육조의 자리를 물려 주었습니다. 빨리 남쪽으로 가거라. 제자들이 시기하여 해칠지도 모른다. 해능은 밤을 틈타 떠났습니다. 그리고 15년 동안 산속에 숨어 수행했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수행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는 점진적으로 나쁜 종자를 제거하고 좋은 종자를 심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본래 청정한 마음을 단박에 깨닫는 길입니다. 두 길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완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점진적 수행이 필요합니다. 매일 조금씩 좋은 종자를 심고 [음악] 나쁜 종자를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본래 우리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일시적으로 번뇌의 구름에 가려진 것뿐입니다. 구름을 걷어내면 [음악] 본래의 맑은 하늘이 드러납니다.
종자생 현행 현행훈 종자입니다. 이 순환의 고리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나쁜 순환의 고리를 끊고 좋은 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한 번에 완벽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매순간 의식적으로 선택하면 [음악] 조금씩 변화합니다. 오늘의 작은 선택이 내일의 나를 만들고 내일의 선택이 다음 달의 나를 만들고 그것이 쌓여서 1년 후 10년 후의 나를 만듭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의지처이니 남이 어찌 의지처가 되겠는가?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수행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직접 해야 합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 안에는 이미 [음악] 깨달을 수 있는 본성이 있습니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습니다. 당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지금이 순간부터 의식적으로 좋은 종자를 심기 시작하십시오. 화가 날 때 잠시 멈추고 숨을 쉬십시오. 슬플 때 그 슬픔을 있는 그대로 느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을 볼 때 그들도 나처럼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침에 감사하고 저녁에 반성하십시오. 작은 실천들이 쌓이면 [음악] 거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안굴리말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999명을 죽인 살인자도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해능 스님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르는 방앗간꾼이 육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변화하기로, 수행하기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이 바로 그 선택의 순간입니다. 과거에 어떤 종자가 쌓였든 지금부터 새로운 종자를 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단 하루만이라도 의식적으로 살아보십시오. 알아차리며 살아보십시오.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아보십시오. 그리고 내일도 모래도 계속하십시오.
전팔식성사대원경지입니다. 여덟 가지 식을 전환하여 네 가지 큰 지혜를 이룬다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순간 [음악] 당신의 선택 속에 있습니다. 번뇌의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놓아 버리는 것. 그것이 이미 전의의 시작입니다. 작은 시작이지만 그것이 쌓이면 깨달음에 이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진리는 이것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는 것.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렇다고
해서 영원히 이런 것이 아닙니다. 변할 수 있고 [음악]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종자를 바꾸면 현행이 바뀌고 [음악] 현행을 바꾸면 종자가 바뀝니다. 이 순환 속에서 당신은 조금씩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까워집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마음의 구조가 여덟 가지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배웠습니다.
이제 아는 것을 실천할 차례입니다.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앎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밤 잠들기 전 오늘 하루를 돌아보십시오. 어떤 종자를 심었습니까? 분노의 종자입니까? 자비의 종자입니까? 집착의 종자입니까? [음악] 놓아버림의 종자입니까?
그리고 내일 아침 눈을 뜰 때 다짐하십시오. 오늘은 의식적으로 좋은 종자를 심겠다고 말입니다.
길은 뭡니다. [음악] 하지만 첫걸음을 떼지 않으면 영원히 도착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그 한 걸음을 지금 떼십시오.
지금이 순간 당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좋은 선택을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을 향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듭니다. 팔의 구조를 이해하고 종자와 현행의 순환을 알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음악] 지혜를 일상에서 실천하십시오. 매순간 알아차리고 매순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조금씩 하지만 [음악] 확실하게 당신의 마음은 평화로워질 것이고 당신의 삶은 변화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길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길을 걷는 모든 이들에게 [음악] 평안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밝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암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