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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언제쯤 괜찮아질까? 이 고통이 지나가면, 이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나도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우리는 괜찮아지는 나를 기다립니다. 마치 비가 그치면 하늘이 맑아지듯 고통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으며 하루하루를 견딥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시간이 흐르면 정말로 괜찮아지던가요? 돌이켜 보면 어떤 고통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때때로 불쑥 올라오곤 합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비슷한 상황 앞에서 다시 얼굴을 드러내고, 극복했다고 믿었던 슬픔이 어느 날 문득 가슴을 짓누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괜찮게 바라보는 것이라는,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이미 말씀하신 그 깊은 가르침에 대해서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 가장 먼저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가르침이 바로 사성제, 네 가지 거룩한 진리였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진리는 이것이었습니다. 삶은 고통이다.
이 말을 처음 들으면 참으로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삶이 고통이라니, 그것은 너무 비관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고통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관과는 전혀 다릅니다. 부처님께서는 삶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신 것입니다. 태어남이 고통이고, 늙어감이 고통이며, 병이 고통이고, 죽음이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이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것이 고통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이것은 비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용기 있는 직시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려 합니다. 혹은 고통을 빨리 없애려 합니다. 슬프면 슬픔을 잊으려 하고, 불안하면 불안을 떨쳐내려 합니다. 외로우면 무언가로 빈자리를 채우려 하고, 화가 나면 분노를 어딘가에 쏟아내려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피하면 피할수록 고통은 더 끈질기게 따라옵니다. 없애려 하면 할수록 고통은 더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왜 그럴까요? 부처님께서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인 집재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고통의 원인은 가래, 곧 목마른 갈망입니다. 괜찮아지고 싶다는 마음. 이 고통이 사라져야 한다는 마음. 지금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 이 모든 것이 가래입니다. 고통을 없애려는 마음이 또 하나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그 발버둥 자체가 고통의 늪을 더 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것과 같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찾아와 하소연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농사를 짓는 사람인데 어떤 해에는 가뭄이 들어 수학을 망치고, 어떤 해에는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잃습니다. 아내와는 자주 다투고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대의 고통을 없애 줄 수 없다."
그 사람은 놀라서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온갖 고통을 해결해 주신다고 들었는데, 왜 저의 고통은 해결해 주실 수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83가지 고통을 가지고 있다. 어떤 고통은 사라져도 다른 고통이 찾아온다. 그것이 삶이다. 그러나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84번째 고통이다. 84번째 고통이란 고통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고통이다."
이 가르침 안에 오늘 이야기하려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괴로운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닙니다.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조급함.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는 원망. 이것들이 84번째 고통입니다. 그리고 이 84번째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깊은 수렁으로 밀어넣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오는 날, 비 자체는 고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비가 오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비는 고통이 됩니다.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비가 오면 우리는 비를 원망합니다. 하지만 비는 그저 내리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의도가 없습니다. 비를 고통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우리 마음의 반응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입니다. 고통의 뿌리는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고통의 뿌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의 반응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떤 길을 제시하셨을까요? 고통에 반응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감정을 느끼지 말라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감정을 억누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감정을 관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념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라.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물라.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물라.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라."
이 이 가르침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없애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관찰하라고 하셨습니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라는 말씀의 깊이를 헤아려 보십시오. 슬픔이 올 때 슬픔을 없애려 하지 말고 슬픔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 때 분노를 억누르지 말고 분노를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불안이 올 때 불안에서 도망치지 말고 불안을 가만히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 기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수행의 길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관찰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감정과 나 사이에 아주 작은 공간이 생깁니다. 평소에 우리는 감정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슬플 때 나는 슬픔 그 자체가 됩니다. 화가 날 때 나는 분노 그 자체가 됩니다. 불안할 때 나는 불안 그 자체가 됩니다. 감정이 곧 나이고 나는 곧 감정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흔들리면 내 존재 전체가 흔들립니다.
그런데 관찰하는 순간 미세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 지금 슬픔이 올라오고 있구나 하고 바라보는 순간, 슬픔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슬픔에 완전히 삼켜지지는 않게 됩니다. 아, 지금 분노가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분노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지만 분노에 이끌려 행동하지는 않게 됩니다.
이 이 작은 공간, 감정과 나 사이의 이 한 뼘의 거리가 바로 수행의 시작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관찰이란 바로 이 공간을 여는 것입니다.
현대에 많은 사람들이 괜찮아지고 싶어 합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꾸중을 들으면 빨리 이 기분을 털어내고 괜찮아지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면 빨리 이 슬픔을 잊고 괜찮아지고 싶어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엄습하면 어떻게든 확신을 얻어서 괜찮아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찾아나섭니다. 어떤이는 끊임없이 일에 몰두하며 감정을 묻어 버립니다. 어떤이는 쾌락을 통해 고통을 잠시 잊으려 합니다. 어떤이는 위로해 줄 사람을 끝없이 찾아다닙니다. 어떤이는 자기 개발서를 읽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공통된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은 제거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전제 자체를 뒤집으셨습니다. 고통을 제거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이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고성제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삶이 고통이라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을 알라는 가르침입니다. 고통이 무엇인지 알라.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알라. 고통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라. 이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이었습니다.
아는 것과 겪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고통을 수없이 겪지만, 고통을 제대로 아는 일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슬픔이 올 때 우리는 슬픔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슬픔이 올 때 이 슬픔이 몸에 어디에서 느껴지는지, 가슴이 조이는 듯한 이 느낌은 어떤 형태인지, 이 슬픔은 언제 시작되었고 무엇이 이 슬픔을 불러일으켰는지 이렇게 바라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찰의 부재입니다.
관찰이 없기에 우리는 같은 고통을 반복해서 겪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감정에 휘말리고, 같은 반응을 되풀이하며 같은 괴로움 속에서 빙글빙글 돕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윤회라고도 합니다. 윤회란 반드시 다음 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삶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습니다. 같은 감정에 수레바퀴처럼 돌고 또 도는 것. 이것이 일상 속의 윤회입니다. 그리고 이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것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괜찮아지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괜찮아지는 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그런 괜찮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고통은 찾아옵니다. 그것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망할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고통을 피하는 길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길입니다. 고통이 있는 그대로, 그 고통과 함께하되 그 고통에 삼켜지지 않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의 시작이며, 괜찮게 바라보는 삶의 첫걸음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를 이루신 그 밤을 떠올려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마라의 유혹과 공격 앞에서 도망치지 않으셨습니다. 마라가 보낸 온갖 두려움과 욕망의 화살 앞에서 눈을 감지도, 자리를 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만 고요히 앉아 바라보셨습니다. 두려움이 오면 두려움이 왔구나 하고 바라보시고, 욕망이 오면 욕망이 왔구나 하고 바라보셨습니다. 그 바라봄 앞에서 마라의 화살은 꽃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전설이 아닙니다. 이것은 수행의 본질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고통과 유혹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유혹을 꿰뚫어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보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힘을 잃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하게 보이던 그림자가 빛을 비추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바라보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까요? 그것은 우리가 바라봄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반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좋은 것은 움켜지고, 싫은 것은 밀어내라고 배웠습니다. 성공하면 기뻐하고, 실패하면 좌절하라고 배웠습니다. 칭찬을 받으면 자만하고, 비난을 받으면 위축되라고 배웠습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라고, 반응하기 전에 잠시 멈추라고,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라고 말해 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2500년 전의 가르침이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가르침입니다. 괜찮아지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다만 괜찮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을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바라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바라보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한 발짝 떨어져서 보라는 뜻이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분노가 치밀어 오르거나 슬픔이 밀려올 때, 한 발짝 떨어져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라봄의 수행을 단순한 이론으로 치부하고 맙니다. 좋은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라봄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 존재로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이 이 한 문장이 관찰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라는 말은 어떤 감정에도, 어떤 생각에도, 어떤 상황에도 마음을 고정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슬픔이 왔을 때 슬픔에 머물지 않고, 기쁨이 왔을 때 기쁨에 머물지 않으며, 분노가 왔을 때 분노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느끼되 머물지 않는 것. 이것이 금강경이 전하는 지혜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풀어 보겠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구름은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흘러갑니다. 어떤 구름은 크고 어둡고, 어떤 구름은 작고 하얗습니다. 어떤 구름은 비를 품고 있고, 어떤 구름은 금빛 햇살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은 어떤 구름이 지나가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억구름이 온다고 하늘이 절망하지 않고, 흰구름이 온다고 하늘이 들뜨지 않습니다. 하늘은 다만 거기 있으면서 모든 구름이 지나가도록 허락할 뿐입니다.
바라봄이란 바로 이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온갖 감정의 구름이 떠다닙니다. 슬픔의 구름, 분노의 구름, 불안의 구름, 외로움의 구름, 두려움의 구름. 이 구름들은 끊임없이 찾아오고 또 떠나갑니다. 문제는 우리가 구름을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슬픔의 구름이 오면 그 구름을 꽉 움켜지고 놓지 않습니다. 왜 이런 슬픔이 왔을까? 언제 이 슬픔이 끝날까? 이 슬픔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며 슬픔의 구름에 온 존재를 묶어 버립니다. 혹은 슬픔의 구름을 억지로 밀어내려 합니다.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돼. 나는 강해야 해. 슬퍼할 시간이 없어. 하며 구름을 손으로 흩어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구름은 손으로 잡을 수도, 손으로 밀어낼 수도 없습니다. 구름은 그저 지나가게 두어야 합니다. 바라보면서 지나가게 두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관찰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바라본다고 해서 고통이 줄어드느냐고 말입니다. 매우 당연한 질문이고,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라본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라봄의 목적은 고통을 없애는데 있지 않습니다. 바라봄의 목적은 고통과 나의 관계를 바꾸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통이 오면 자동적으로 반응해 왔습니다. 슬프면 눈물이 나고,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불안하면 안절부절 못하고, 외로우면 누군가에게 매달렸습니다. 이 반응은 너무나 자동적이어서 마치 감정과 반응 사이에 아무런 틈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감정이 곧 반응이고, 반응이 곧 나인 것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관찰은 이 자동적인 흐름에 아주 작은 쐐기를 박는 것입니다. 감정과 반응 사이에 잠깐의 틈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 지금 화가 올라오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그 찰나에 우리는 더 이상 분노 그 자체가 아니게 됩니다. 분노를 바라보고 있는 자가 됩니다. 이 전환이 아주 미세해 보이지만, 실은 엄청난 변화의 시작입니다. 분노를 바라보고 있는 자는 분노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분노를 바라보고 있는 자는 분노 때문에 후회할 말을 쏟아내지 않습니다. 분노를 바라보고 있는 자는 분노가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과정을 고요히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의 시작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감정의 자동 반응에서 벗어나는 것, 자극과 반응 사이에 자유의 공간을 여는 것. 이것이 곧 일상 속의 해탈입니다.
선불교의 큰 스승이신 육조혜능 대사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혜능 대사께서 아직 깨닫기 전, 절에서 방앗간 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오조홍인 대사께서 제자들에게 게송을 지어 올리라 하셨을 때, 수자인 신수 스님께서는 이렇게 쓰셨습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에 받침되라. 늘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이 이 게송은 수행의 중요한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여 마음을 깨끗이 유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혜능 대사께서는 전혀 다른 게송을 지으셨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도 받침대가 없나니,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묻으리요."
이 두 게송의 차이를 깊이 들여다 보십시오. 신수 스님의 게송은 마음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통을 없애야 한다는 관점과 통합니다. 마음에 번뇌가 생기면 닦아내고, 또 생기면 또 닦아내는 끝없는 노력입니다. 반면 혜능 대사의 게송은 본래 먼지가 묻을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통찰입니다. 마음의 본성 자체가 본래 청정하다는 것. 번뇌와 고통은 마음의 본질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떠도는 구름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찰의 궁극적 지점입니다.
관찰을 통해 우리가 최종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고통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슬픔이 아무리 깊어도 슬픔은 내가 아닙니다. 분노가 아무리 거세도 분노는 내가 아닙니다. 불안이 아무리 크게 덮쳐와도 불안은 내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떠도는 구름일 뿐이고, 그 구름 너머에는 언제나 광활한 하늘이 있습니다. 관찰이란 그 하늘을 기억해내는 일입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일상에서 관찰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마음이 무겁다면, 그 무거움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아, 오늘은 마음이 무겁구나 하고 가만히 느껴 보는 것입니다. 왜 무거운지 분석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떻게 하면 가벼워질지 방법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출근길에 누군가와 부딪혀 짜증이 올라온다면, 그 짜증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아, 지금 짜증이 올라오고 있구나. 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도 바라보십시오. 아,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이 있구나. 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어색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 같은 낯선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우리는 평생 감정에 즉각 반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감정을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관찰의 수행을 윗빠사나라고 부르셨습니다. 윗빠사나란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판단하지 않고 본다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판단 없이, 옳다 그르다 하는 평가 없이,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의 절반 이상은 사실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에 대한 판단 때문입니다. 슬프다는 감정 자체보다, 슬퍼하면 안 되는데 하는 판단이 더 큰 고통을 만듭니다. 화가 난다는 감정 자체보다, 화를 내면 안 되는데 하는 자책이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불안하다는 감정 자체보다,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한 사람일까 하는 자기 비난이 더 무거운 짐이 됩니다.
관찰은 이 판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슬프면 슬픈 것입니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불안하면 불안한 것입니다. 거기에 좋다 나쁘다를 붙이지 않는 것, 그것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연기법의 가르침도 이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은 어떤 인연이 모여서 일어난 것이고, 그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분노도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서 생겨난 것이고, 그 조건이 변하면 자연스럽게 흩어집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면 감정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어떤 감정이 오더라도, 아, 이것도 인연 따라 온 것이구나.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갈 것이다. 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 바라봄 안에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고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신뢰.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의 진리에 대한 신뢰. 내가 억지로 바꾸지 않아도 인연 따라 흘러갈 것이라는 신뢰입니다. 이 신뢰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 앞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고통에 허둥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통 앞에서도 고요할 수 있습니다.
유식 사상에서는 이것을 더욱 정밀하게 설명합니다. 유식 사상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바깥 세계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바깥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 마음의 방식이 고통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같은 비가 내려도 농부는 기뻐하고, 소풍을 준비한 사람은 슬퍼합니다. 비는 하나인데 마음이 둘인 것입니다. 같은 이별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세상이 무너진 듯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새로운 시작의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이별은 하나인데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유식 사상은 이것을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이 깨달음이 관찰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마음이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바깥을 바꾸려는 노력에서 안을 살피는 수행으로 시선이 전환되는 것입니다. 직장 상사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느낄 때, 관찰의 수행자는 상사를 바꾸려 하기 전에 먼저 자기 마음을 바라봅니다. 지금 이 힘들다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상사의 어떤 말이 나의 어떤 상처를 건드린 것인가? 이 이 반응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고 안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깥을 탓하는 삶에서 안을 살피는 삶으로의 전환이며, 이 전환이야말로 수행의 가장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당한 일에 맞서는 것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다만 맞서기 전에 먼저 자기 마음의 상태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분노에 이끌려 맞서는 것과, 분노를 알아차린 뒤에 지혜롭게 대응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기 때문입니다.
조주 스님의 유명한 화두가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무."
이 이 한 글자 '무'라는 대답 속에 깊은 가르침이 숨어 있습니다. '무'란 단순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있다와 없다라는 분별 자체를 넘어서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으로 나누고, 좋은 감정은 붙잡고 나쁜 감정은 밀어내는 것이 분별입니다. 관찰은 이 분별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감정이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감정은 그저 감정일 뿐입니다. 흘러왔다가 흘러가는 마음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감정이 오더라도 괜찮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괜찮게 바라본다는 것은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을 충분히 느끼되,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에게 자리를 내어 주되, 감정이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손님처럼 맞이하는 것. 이것이 괜찮게 바라보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맞이합니다. 차를 내어 줍니다.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나 손님이 집의 주인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손님은 떠나갑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이라는 손님이 찾아오면 맞이하십시오. 그 슬픔을 충분히 느끼십시오. 그러나 슬픔이 당신의 주인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슬픔도 떠나갈 것입니다. 분노라는 손님이 찾아오면 알아차리십시오. 그 분노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분노가 당신을 끌고 다니게 두지는 마십시오. 때가 되면 분노도 고요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이 말하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삶입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을 온전히 경험하는 삶입니다. 어떤 감정에도 집착하지 않게, 모든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삶입니다. 이 이 삶은 차갑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삶이야말로 가장 따뜻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자신을 탓하지 않는 것, 화내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불안해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자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자비는 남에게 베푸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모든 감정을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자비이며, 바라봄의 수행이 궁극적으로 이끄는 경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바라봄의 수행은 좌선을 하거나 명상을 할 때만 가능한 것일까요? 절에 가서 고요히 앉아 있을 때만, 향을 피우고 눈을 감았을 때만 관찰이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관찰은 삶의 모든 순간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걸을 때 걷고 있음을 알고, 앉을 때 앉아 있음을 알며, 밥을 먹을 때 밥을 먹고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하신 수행의 모습이었습니다.
법구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모든 법의 앞에 서고, 마음이 으뜸이며,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이 이 가르침은 우리의 일상 전체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마음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도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아니,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일상에서야말로 진정한 수행이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장회의 선사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이 말씀은 수행이 일상의 노동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밭을 갈면서도 수행할 수 있고, 빨래를 하면서도 깨달을 수 있으며, 밥을 지으면서도 돌을 닦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가르침은 더 없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움직이며 해야 할 일에 쫓기고, 이루어야 할 목표에 시달립니다. 따로 시간을 내어 명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포기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환경이 허락하지 않아서 수행을 미루고 또 미룹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행을 위해 특별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수행의 시간이고, 지금 이 자리가 수행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서서 흔들리는 몸의 감각을 느껴 보십시오. 발바닥에 전해지는 진동, 손잡이를 잡은 손의 감촉,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 순간 지하철 안은 명상의 공간이 됩니다.
직장에서 회의를 할 때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동료의 말에 짜증이 올라올 때, 그 짜증을 알아차리십시오. 상사의 지적에 마음이 위축될 때, 그 위축됨을 바라보십시오. 성과에 대한 불안이 밀려올 때, 그 불안의 모양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관찰하는 것보다 못한 수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관찰이야말로 가장 살아 있는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좌선 중에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비교적 쉬울 수 있지만, 삶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관찰의 눈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이 세상 모든 곳에 부처가 계시다고 가르칩니다. 한 톨의 티끌 속에도 온 세계가 담겨 있고, 한순간 속에도 영겁의 시간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관찰의 수행에 비추어 보면, 아무리 사소한 순간이라도 그 순간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그 안에서 깨달음의 씨앗이 싹틀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물이 손에 닿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 밥을 먹으면서 한 숟가락의 밥알이 입안에서 씹히는 감각을 느끼는 것. 걸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발이 땅에 닿는 감촉을 아는 것. 이 이 모든 사소한 알아차림이 수행이며, 깨달음의 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관찰의 수행이 일상에서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정직해야 합니다.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슬프면서 슬프지 않은 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화가 나면서 화가 나지 않은 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는 역할에 맞추어 자기 감정을 숨기고 왜곡합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고, 울고 싶은데 참고, 힘든데 힘들지 않은 척합니다. 이렇게 자기 감정을 속이는 것은 관찰의 정반대입니다. 관찰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인데, 자기 감정을 숨기고 왜곡하면 볼 것 자체가 가려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첫걸음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이것이 수행의 첫걸음입니다. 지금 나는 슬프다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화가 난다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외롭다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두렵다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이 인정 위에 관찰이 시작됩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관찰할 수 없습니다. 없는 척하는 것을 바라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직이 수행의 토대이며, 이 토대 위에서 관찰이라는 수행의 집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더 드리고 싶습니다. 관찰의 수행은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늘 지혜와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지혜가 자기 마음을 바라보는 눈이라면, 자비는 그 눈으로 타인의 마음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라면, 저 사람도 나와 같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자비입니다.
관찰의 수행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자비가 흘러나옵니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의 고통을 깊이 바라본 사람은 타인의 고통도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쉽게 상처받는지를 아는 사람은 타인도 그만큼 쉽게 상처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얼마나 외로울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타인의 외로움에도 마음이 열립니다. 내가 얼마나 두려울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타인의 두려움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관찰에서 피어나는 자비입니다. 억지로 베푸는 친절이 아니라, 깊은 이해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따뜻함입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보살의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보살은 자기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가 함께 깨달을 때까지, 모든 존재의 고통에 함께하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 보살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보살의 길은 거창한 희생이나 대단한 결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바라보는 것, 그래서 내 고통을 이해하는 것. 그 이해를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에도 마음을 여는 것. 이 작은 실천에서 보살의 길이 시작됩니다.
길을 걷다가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저 사람도 나처럼 무언가와 싸우고 있겠구나. 저 사람도 나처럼 괜찮아지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고 있겠구나 하고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곧 자비이고, 그 자비가 곧 수행입니다.
관찰의 수행은 이렇게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여 세상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내 마음을 바라보는 연습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힘이 되고,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힘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씨앗이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수행은 나만의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모든 존재의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괜찮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오늘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괜찮아지기를 기다리며 많은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고통이 사라지는 나를 꿈꾸며 언젠가는 모든 것이 좋아질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수행의 본질이며, 우리 모두가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에 어떤 감정이 있든, 그것을 밀어내려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아무리 무겁든, 그 무거움을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다만 바라보십시오.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시오. 아, 지금 이런 마음이 있구나. 하고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그 바라봄 안에서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고통은 여전히 거기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면,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고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괜찮게 바라보는 삶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보여 주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마라의 화살이 꽃이 된 것은 마라가 사라져서가 아닙니다.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괜찮게 바라보는 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눈. 판단 없이 감정을 맞이하는 눈. 이 눈을 갖추는 것이 수행의 전부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실 때, 한 가지만 기억해 주십시오. 괜찮아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괜찮지 않은 지금을 괜찮게 바라보는 연습을 해 보십시오. 그것이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건네신 가장 따뜻한 초대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에 무엇이 있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 주십시오. 그 바라봄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바라봄이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 바라봄이 당신의 삶을 수행으로 바꾸어 줄 것입니다. 관찰이 곧 수행이고, 수행이 곧 삶이며, 삶이 곧 깨달음의 길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전제 자체를 뒤집으셨습니다. 고통을 제거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이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고성제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삶이 고통이라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을 알라는 가르침입니다. 고통이 무엇인지 알라.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알라. 고통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라. 이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이었습니다.
아는 것과 겪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고통을 수없이 겪지만 고통을 제대로 아는 일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슬픔이 올 때 우리는 슬픔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슬픔이 올 때 이 슬픔이 몸에 어디에서 느껴지는지, 가슴이 조이는 듯한 이 느낌은 어떤 형태인지, 이 슬픔은 언제 시작되었고 무엇이 이 슬픔을 불러일으켰는지 이렇게 바라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찰의 부재입니다. 그리고 관찰이 없기에 우리는 같은 고통을 반복해서 겪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감정에 휘말리고 같은 반응을 되풀이하며 같은 괴로움 속에서 빙글빙글 돕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윤회라고도 합니다. 윤회란 반드시 다음 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삶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습니다. 같은 감정에 수레바퀴 돌 듯이 돌고 또 도는 것. 이것이 일상 속의 윤회입니다.
그리고 이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것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괜찮아지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괜찮아지는 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그런 괜찮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고통은 찾아옵니다. 그것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망할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고통을 피하는 길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길입니다. 고통이 있는 그대로 그 고통과 함께하되 그 고통에 삼켜지지 않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의 시작이며 괜찮게 바라보는 삶의 첫걸음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를 이루신 그 밤을 떠올려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마라의 유혹과 공격 앞에서 도망치지 않으셨습니다. 마라가 보낸 온갖 두려움과 욕망의 화살 앞에서 눈을 감지도 자리를 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만 고요히 앉아 바라보셨습니다. 두려움이 오면 두려움이 왔구나 하고 바라보시고 욕망이 오면 욕망이 왔구나 하고 바라보셨습니다. 그 바라봄 앞에서 마라의 화살은 꽃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전설이 아닙니다. 이것은 수행의 본질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고통과 유혹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유혹을 꿰뚫어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보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힘을 잃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하게 보이던 그림자가 빛을 비추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바라보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까요? 그것은 우리가 바라봄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반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좋은 것은 움켜지고 싫은 것은 밀어내라고 배웠습니다. 성공하면 기뻐하고 실패하면 좌절하라고 배웠습니다. 칭찬을 받으면 자만하고 비난을 받으면 위축되라고 배웠습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라고 반응하기 전에 잠시 멈추라고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라고 말해 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2500년 전의 가르침이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가르침입니다. 괜찮아지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다만 괜찮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을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바라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바라보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한 발짝 떨어져서 보라는 뜻이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분노가 치밀어 오르거나 슬픔이 밀려올 때 한 발짝 떨어져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라봄의 수행을 단순한 이론으로 치부하고 맙니다. 좋은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라봄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 존재로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이 한 문장이 관찰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라는 말은 어떤 감정에도, 어떤 생각에도, 어떤 상황에도 마음을 고정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슬픔이 왔을 때 슬픔에 머물지 않고 기쁨이 왔을 때 기쁨에 머물지 않으며 분노가 왔을 때 분노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느끼되 머물지 않는 것. 이것이 금강경이 전하는 지혜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풀어 보겠습니다.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구름은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흘러갑니다. 어떤 구름은 크고 어둡고 어떤 구름은 작고 하였습니다. 어떤 구름은 비를 품고 있고 어떤 구름은 금빛 햇살을 먹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은 어떤 구름이 지나가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먹구름이 온다고 하늘이 절망하지 않고 흰구름이 온다고 하늘이 들뜨지 않습니다. 하늘은 다만 거기 있으면서 모든 구름이 지나가도록 허락할 뿐입니다. 바라봄이란 바로 이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온갖 감정의 구름이 떠다닙니다. 슬픔의 구름, 분노의 구름, 불안의 구름, 외로움의 구름, 두려움의 구름. 이 구름들은 끊임없이 찾아오고 또 떠나갑니다. 문제는 우리가 구름을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슬픔의 구름이 오면 그 구름을 꽉 움켜지고 놓지 않습니다. 왜 이런 슬픔이 왔을까? 언제 이 슬픔이 끝날까? 이 슬픔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며 슬픔의 구름에 온 존재를 묶어 버립니다. 혹은 슬픔의 구름을 억지로 밀어내려 합니다.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돼. 나는 강해야 해. 슬퍼할 시간이 없어. 하며 구름을 손으로 흩어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구름은 손으로 잡을 수도 손으로 밀어낼 수도 없습니다. 구름은 그저 지나가게 두어야 합니다. 바라보면서 지나가게 두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관찰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바라본다고 해서 고통이 줄어드느냐고 말입니다. 매우 당연한 질문이고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라본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라봄의 목적은 고통을 없애는데 있지 않습니다. 바라봄의 목적은 고통과 나의 관계를 바꾸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통이 오면 자동적으로 반응해 왔습니다. 슬프면 눈물이 나고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불안하면 안절부절 못 하고 외로우면 누군가에게 매달렸습니다. 이 반응은 너무나 자동적이어서 마치 감정과 반응 사이에 아무런 틈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감정이 곧 반응이고 반응이 곧 나인 것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관찰은 이 자동적인 흐름에 아주 작은 쐐기를 박는 것입니다. 감정과 반응 사이에 잠깐의 틈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 지금 화가 올라오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그 찰나에 우리는 더 이상 분노 그 자체가 아니게 됩니다. 분노를 바라보고 있는 자가 됩니다. 이 전환이 아주 미세해 보이지만 실은 엄청난 변화의 시작입니다. 분노를 바라보고 있는 자는 분노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분노를 바라보고 있는 자는 분노 때문에 후회할 말을 쏟아내지 않습니다. 분노를 바라보고 있는 자는 분노가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과정을 고요히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의 시작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감정의 자동 반응에서 벗어나는 것, 자극과 반응 사이에 자유의 공간을 여는 것. 이것이 곧 일상 속의 해탈입니다.
선불교의 큰 스승이신 육조혜능 대사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혜능 대사께서 아직 깨닫기 전 절에서 방앗간 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오조홍인 대사께서 제자들에게 게송을 지어 올리라 하셨을 때 수좌인 신수 스님께서는 이렇게 쓰셨습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에 받침되라. 늘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이 게송은 수행의 중요한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하여 마음을 깨끗이 유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혜능 대사께서는 전혀 다른 게송을 지으셨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도 받침대가 없나니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묻으리요."
이 두 게송의 차이를 깊이 들여다 보십시오. 신수 스님의 게송은 마음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통을 없애야 한다는 관점과 통합니다. 마음에 번뇌가 생기면 닦아내고 또 생기면 또 닦아내는 끝없는 노력입니다. 반면 혜능 대사의 게송은 본래 먼지가 묻을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통찰입니다. 마음의 본성 자체가 본래 청정하다는 것. 번뇌와 고통은 마음의 본질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떠도는 구름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찰의 궁극적 지점입니다. 관찰을 통해 우리가 최종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고통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슬픔이 아무리 깊어도 슬픔은 내가 아닙니다. 분노가 아무리 거세도 분노는 내가 아닙니다. 불안이 아무리 크게 덮쳐와도 불안은 내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떠도는 구름일 뿐이고 그 구름 너머에는 언제나 광활한 하늘이 있습니다. 관찰이란 그 하늘을 기억해내는 일입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일상에서 관찰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마음이 무겁다면 그 무거움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아, 오늘은 마음이 무겁구나 하고 가만히 느껴보는 것입니다. 왜 무거운지 분석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떻게 하면 가벼워질지 방법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붉은 길에 누군가와 부딪혀 짜증이 올라온다면 그 짜증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아, 지금 짜증이 올라오고 있구나. 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도 바라보십시오. 아,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이 있구나 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어색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 같은 낯선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우리는 평생 감정에 즉각 반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감정을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관찰의 수행을 윗빠사나라 부르셨습니다. 윗빠사나란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판단하지 않고 본다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판단 없이 옳다 그르다 하는 평가 없이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의 절반 이상은 사실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에 대한 판단 때문입니다. 슬프다는 감정 자체보다 슬퍼하면 안 되는데 하는 판단이 더 큰 고통을 만듭니다. 화가 난다는 감정 자체보다 화를 내면 안 되는데 하는 자책이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불안하다는 감정 자체보다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한 사람일까 하는 자기 비난이 더 무거운 짐이 됩니다.
관찰은 이 판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슬프면 슬픈 것입니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불안하면 불안한 것입니다. 거기에 좋다 나쁘다를 붙이지 않는 것, 그것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연기법의 가르침도 이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은 어떤 인연이 모여서 일어난 것이고 그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분노도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서 생겨난 것이고 그 조건이 변하면 자연스럽게 흩어집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면 감정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어떤 감정이 오더라도 아, 이것도 인연 따라온 것이구나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갈 것이다 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 바라봄 안에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고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신뢰.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의 진리에 대한 신뢰. 내가 억지로 바꾸지 않아도 인연 따라 흘러갈 것이라는 신뢰입니다. 이 신뢰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 앞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고통에 허둥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통 앞에서도 고요할 수 있습니다.
유식 사상에서는 이것을 더욱 정밀하게 설명합니다. 유식 사상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바깥 세계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바깥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 마음의 방식이 고통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같은 비가 내려도 농부는 기뻐하고 소풍을 준비한 사람은 슬퍼합니다. 비는 하나인데 마음이 둘인 것입니다. 같은 이별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세상이 무너진 듯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새로운 시작의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이별은 하나인데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유식 사상은 이것을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이 깨달음이 관찰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마음이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바깥을 바꾸려는 노력에서 안을 살피는 수행으로 시선이 전환되는 것입니다. 직장 상사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느낄 때 관찰의 수행자는 상사를 바꾸려 하기 전에 먼저 자기 마음을 바라봅니다. 지금 이 힘들다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상사의 어떤 말이 나의 어떤 상처를 건드린 것인가? 이 반응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고 안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깥을 탓하는 삶에서 안을 살피는 삶으로의 전환이며 이 전환이야말로 수행의 가장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당한 일에 맞서는 것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다만 맞서기 전에 먼저 자기 마음의 상태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분노에 이끌려 맞서는 것과 분노를 알아차린 뒤에 지혜롭게 대응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기 때문입니다.
조주 스님의 유명한 화두가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무(無)." 한 글자 '무'라는 대답 속에 깊은 가르침이 숨어 있습니다. '무'는 단순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있다와 없다라는 분별 자체를 넘어서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으로 나누고 좋은 감정은 붙잡고 나쁜 감정은 밀어내는 것이 분별입니다. 관찰은 이 분별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감정에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감정은 그저 감정일 뿐입니다. 흘러왔다가 흘러가는 마음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감정이 오더라도 괜찮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괜찮게 바라본다는 것은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을 충분히 느끼되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감정에게 자리를 내어주되 감정이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손님처럼 맞이하는 것. 이것이 괜찮게 바라보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맞이합니다. 차를 내어 줍니다.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나 손님이 집의 주인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손님은 떠나갑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이라는 손님이 찾아오면 맞이하십시오. 그 슬픔을 충분히 느끼십시오. 그러나 슬픔이 당신의 주인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슬픔도 떠나갈 것입니다. 분노라는 손님이 찾아오면 알아차리십시오. 그 분노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분노가 당신을 끌고 다니게 두지는 마십시오. 때가 되면 분노도 고요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이 말하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삶입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을 온전히 경험하는 삶입니다. 어떤 감정에도 집착하지 않게 모든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삶입니다. 이 삶은 차갑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삶이야말로 가장 따뜻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자신을 탓하지 않는 것, 화내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불안해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자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자비는 남에게 베푸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모든 감정을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자비이며 바라봄의 수행이 궁극적으로 이끄는 경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바라봄의 수행은 좌선을 하거나 명상을 할 때만 가능한 것일까요? 절에 가서 고요히 앉아 있을 때만 향을 피우고 눈을 감았을 때만 관찰이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관찰은 삶의 모든 순간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걸을 때 걷고 있음을 알고 앉을 때 앉아 있음을 알며 밥을 먹을 때 밥을 먹고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하신 수행의 모습이었습니다.
법구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모든 법의 앞에 서고 마음이 으뜸이며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일상 전체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마음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도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아니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일상에서야말로 진정한 수행이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장회의 선사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이 말씀은 수행이 일상의 노동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밭을 갈면서도 수행할 수 있고 빨래를 하면서도 깨달을 수 있으며 밥을 지으면서도 돌을 닦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가르침은 더 없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움직이며 해야 할 일에 쫓기고 이루어야 할 목표에 시달립니다. 따로 시간을 내어 명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포기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환경이 허락하지 않아서 수행을 미루고 또 미룹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행을 위해 특별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수행의 시간이고 지금 이 자리가 수행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서서 흔들리는 몸의 감각을 느껴 보십시오. 발바닥에 전해지는 진동, 손잡이를 잡은 손의 감촉,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 순간 지하철 안은 명상의 공간이 됩니다. 직장에서 회의를 할 때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동료의 말에 짜증이 올라올 때 그 짜증을 알아차리십시오. 상사의 지적에 마음이 위축될 때 그 위축됨을 바라보십시오. 성과에 대한 불안이 밀려올 때 그 불안의 모양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관찰하는 것보다 못한 수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관찰이야말로 가장 살아 있는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좌선 중에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비교적 쉬울 수 있지만 삶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관찰의 눈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이 세상 모든 곳에 부처가 계시다고 가르칩니다. 한 톨의 티끌 속에도 온 세계가 담겨 있고 한순간 속에도 영겁의 시간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관찰의 수행에 비추어 보면 아무리 사소한 순간이라도 그 순간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그 안에서 깨달음의 씨앗이 싹틀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물이 손에 닿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 밥을 먹으면서 한 숟가락의 밥알이 입안에서 씹히는 감각을 느끼는 것. 걸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발이 땅에 닿는 감촉을 아는 것. 이 모든 사소한 알아차림이 수행이며 깨달음의 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관찰의 수행이 일상에서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정직해야 합니다.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슬프면서 슬프지 않은 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화가 나면서 화가 나지 않은 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는 역할에 맞추어 자기 감정을 숨기고 왜곡합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고 울고 싶은데 참으며 힘든데 힘들지 않은 척합니다. 이렇게 자기 감정을 속이는 것은 관찰의 정반대입니다. 관찰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인데 자기 감정을 숨기고 왜곡하면 볼 것 자체가 가려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첫걸음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이것이 수행의 첫걸음입니다. 지금 나는 슬프다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화가 난다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외롭다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두렵다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인정 위에 관찰이 시작됩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관찰할 수 없습니다. 없는 척하는 것을 바라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직이 수행의 토대이며 이 토대 위에서 관찰이라는 수행의 집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더 드리고 싶습니다. 관찰의 수행은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늘 지혜와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지혜가 자기 마음을 바라보는 눈이라면 자비는 그 눈으로 타인의 마음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라면 저 사람도 나와 같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자비입니다.
관찰의 수행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자비가 흘러나옵니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의 고통을 깊이 바라본 사람은 타인의 고통도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쉽게 상처받는지를 아는 사람은 타인도 그만큼 쉽게 상처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얼마나 외로울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타인의 외로움에도 마음이 열립니다. 내가 얼마나 두려울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타인의 두려움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관찰에서 피어나는 자비입니다. 억지로 베푸는 친절이 아니라 깊은 이해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따뜻함입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보살의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보살은 자기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가 함께 깨달을 때까지 모든 존재의 고통에 함께하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 보살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보살의 길은 거창한 희생이나 대단한 결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바라보는 것, 그래서 내 고통을 이해하는 것. 그 이해를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에도 마음을 여는 것. 이 작은 실천에서 보살의 길이 시작됩니다. 길을 걷다가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저 사람도 나처럼 무언가와 싸우고 있겠구나. 저 사람도 나처럼 괜찮아지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고 있겠구나 하고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곧 자비이고 그 자비가 곧 수행입니다.
관찰의 수행은 이렇게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여 세상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내 마음을 바라보는 연습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힘이 되고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힘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씨앗이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수행은 나만의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모든 존재의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괜찮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오늘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괜찮아지기를 기다리며 많은 시간을 흘려 보냅니다. 고통이 사라지는 나를 꿈꾸며 언젠가는 모든 것이 좋아질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수행의 본질이며 우리 모두가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에 어떤 감정이 있든 그것을 밀어내려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아무리 무겁든 그 무거움을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다만 바라보십시오.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시오. 아, 지금 이런 마음이 있구나. 하고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그 바라봄 안에서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고통은 여전히 거기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면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고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괜찮게 바라보는 삶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보여 주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마라의 화살이 꽃이 된 것은 마라가 사라져서가 아닙니다.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괜찮게 바라보는 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눈. 판단 없이 감정을 맞이하는 눈. 이 눈을 갖추는 것이 수행의 전부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실 때 한 가지만 기억해 주십시오. 괜찮아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괜찮지 않은 지금을 괜찮게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십시오. 그것이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건네신 가장 따뜻한 초대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에 무엇이 있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 주십시오. 그 바라봄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 바라봄이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 바라봄이 당신의 삶을 수행으로 바꾸어 줄 것입니다. 관찰이 곧 수행이고 수행이 곧 삶이며 삶이 곧 깨달음의 길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송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