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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변화가 곧 깨달음이다 | 부처님 말씀

부처의말1:14:00

Transcription

[음악]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눈앞에 펼쳐진 화면을 보고, 귀가에 들리는 소리를 듣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음악] 하지만 우리는 정작 이 모든 일이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 이미 [음악] 우리 마음의 깊은 구조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80여덟 가지 의식의 세계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식론이라는 심오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세상을 만들어내며, 결국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함께 탐구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매일 명상을 하고 경전을 [음악] 읽지만 여전히 번뇌가 일어납니다. 분노도 생기고, 집착도 생기고, 어리석은 생각도 떠오릅니다. 도대체 이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스승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네. 하지만 그대는 지금 마음의 표면만 보고 있을 뿐, 깊은 바다 밑을 보지 못하고 있네. 그 깊은 곳에 모든 답이 있다네."

>> [음악] >>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유식론은 바로 이 마음의 [음악] 깊은 구조를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유식. 오직 식(識)만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 보이는 세계, 들리는 소리, 느껴지는 감정, 떠오르는 생각. 이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밖에 객관적인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이 변화하고 전환되면서 세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식전변(識轉變)이라고 합니다. 의식이 변화하여 세상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여덟 가지 층으로 나누어 설명하셨습니다. 첫째부터 다섯째까지는 전오식(前五識), 즉 다섯 가지 감각 의식입니다. 눈으로 보는 안식(眼識), 귀로 듣는 이식(耳識), 코로 냄새 맡는 비식(鼻識), 혀로 맛보는 설식(舌識),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신식(身識)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작동하는 이 [음악] 다섯 가지 의식은 외부 세계와 직접 접촉하며 색깔과 형태, 소리, 향기, 맛, 촉감을 경험하게 합니다.

여섯째는 의식(意識)입니다. 의식은 전오식이 받아들인 정보를 종합하고 판단하며 생각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고 [음악]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음악] 모든 정신 활동이 바로 이 의식의 작용입니다. 의식은 마치 왕처럼 전오식이 가져온 정보를 받아 결정을 내립니다.

하지만 의식 역시 표면의 마음일 뿐입니다. 일곱째는 말라식(末那識)입니다. 말라식은 자아의식, 즉 '나'라는 생각의 뿌리입니다. 우리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가졌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생각하는 [음악] 모든 자아 집착이 바로 말라식에서 나옵니다. 말라식은 끊임없이 나를 확인하고, 나를 지키려 하며, 나와 남을 구분합니다. 이 말라식의 작용이 바로 모든 번뇌의 근원입니다. 탐욕도, 분노도, 질투도, 교만도 모두 '나'라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여덟째는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아뢰야식은 장식(藏識), 즉 저장하는 의식이라는 뜻입니다. 아뢰야식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며,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것, 행한 모든 것, 생각한 모든 것이 종자(種子)로 저장되어 있는 창고와 같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전생부터 지금까지 쌓인 무수한 업(業)의 종자들이 아뢰야식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해신밀경(解深密經)에서 부처님께서는 [음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법(諸法)은 오직 식일 뿐이니, 능히 아는 자도 식이요, 알려지는 대상도 식이이며, 이 모든 것이 다만 마음의 변화일 뿐입니다." 이 말씀은 [음악]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이 결국 의식의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음악] 내가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제자가 현장(玄奘) 스님께 물었습니다. "스님,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이 산과 강, 해와 달도 모두 [음악] 마음이 만든 것입니까?" 현장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네. 그대가 산을 본다고 할 때, 그 산은 그대 눈에 막막(Looking)에 맺힌 빛의 패턴일 뿐이네. 그 빛의 패턴을 의식이 해석하여 '산'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네. 다른 중생은 같은 장소를 다르게 볼 수 있네. 물고기에게 물은 집이지만, 아기에게 물은 불덩이로 보이고, 천신에게 물은 유리 바닥으로 보인다네. 같은 대상이 의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네." 이것이 바로 유식론의 핵심입니다. 세상은 우리 밖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이 변화하고 전환되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식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로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현행(現行)하기 때문입니다. 종자 현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뢰야식 속에 잠들어 있던 종자가 조건을 만나면 싹을 틔워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음악] 예를 들어, 여러분이 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불편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에 비슷한 얼굴이나 말투를 가진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아뢰야식의 종자로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종자가 지금 이 사람을 만나는 조건을 만나 현행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앞에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 투영된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훈습(熏習)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종자가 되고, 그 종자는 다시 현행하여 새로운 경험을 만들고, 그 경험은 또다시 훈습되어 종자가 됩니다. 마치 끝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음악] 이것이 바로 윤회(輪廻)의 메커니즘입니다. 업을 짓고, 업의 종자가 저장되고, 종자가 현행하여 과보(果報)를 받고, 다시 업을 짓는 순환입니다.

원효(元曉) 스님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지만, [음악] 무명(無明)의 바람에 흔들려 파도가 일어나듯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아뢰야식은 본래 청정한 바다와 같지만, 무명이라는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듯 번뇌가 [음악] 일어납니다. 하지만 파도가 잦아들면 다시 고유한 바다가 드러나듯, 무명이 사라지면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무명의 바람을 잠재울 수 있습니까? 첫 번째 단계는 마음의 작용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화가 난다면, "아, 지금 내 안에서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면, "지금 욕망이라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구나" [음악] 하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관찰하면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내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화'라는 감정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볼 뿐입니다.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욕망'이라는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볼 뿐입니다. 고정된 '나'라는 주체가 없고, 단지 의식의 흐름만이 있을 뿐입니다.

무착(無着) 보살은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능히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모두 의식의 변화일 뿐이니, 이 둘이 본래 하나임을 알면 능소치공(能所治空), 주체와 객체가 모두 공(空)함을 깨닫게 [음악] 된다고." 내가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보는 '나'도 의식이고, 보이는 세상도 의식입니다. 둘은 본래 하나의 의식 작용일 뿐입니다.

옛날 한 선승(禪僧)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어리석은 자는 손가락을 보고, 지혜로운 [음악] 자는 달을 본다고 하지. 그렇다면 [음악] 손가락도 보지 않고, 달도 보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제자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답했습니다. "손가락과 달이 본래 다르지 않은 자입니다." 선승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본래 하나임을 아는 자네."

우리가 팔식(八識)을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마음의 구조를 아는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서, 그 작동 방식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의식이 변화하면 세상이 변화합니다. 의식이 전환되면 번뇌가 지혜로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전식지(轉識成智), 의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불행이 환경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 때문에, 이 상황 때문에, 운이 나빠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식론은 가르칩니다. 불행의 원인은 >> [음악] >> 밖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 아뢰야식에 저장된 번뇌의 종자에 있다고. 그 종자를 정화하지 않는 한, 환경을 바꾸어도 같은 불행이 반복됩니다. 반대로 마음속 종자를 정화하면, 같은 환경에서도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음악] 어려운 상황이 수행의 기회로 보이고, 미운 사람이 자비를 배울 수 있는 스승으로 보입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 의식이 변화했기 때문에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성철(性徹)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음악] 하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산은 산이 아니고, [음악] 물은 물이 아닌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처음에는 보이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봅니다. 하지만 수행이 깊어지면, [음악] 산도 물도 모두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마침내 [음악] 완전히 깨달으면,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산과 물은 처음의 산과 물과 다릅니다. 집착 없이,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산과 물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수행은 바로 이 과정입니다. 먼저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고, 그다음 그 작용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탐구하고, [음악] 마침내 그 뿌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음악] 전오식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관찰하고, 의식이 판단하고 분별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말라식이 '나'라고 집착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아뢰야식 속 종자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티베트의 한 스님은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네. 먼지가 쌓이면 사물이 제대로 비치지 않지만, [음악] 먼지를 닦아내면 다시 맑게 비추네. 하지만 [음악] 진정한 수행자는 거울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하네. 한 번 닦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음악] 깨어서 마음을 살펴야 하네." 이것이 바로 유식론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매 순간 [음악] 마음을 관찰하고 정화하는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앉아서 명상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에 내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화가 날 때, 욕심이 날 때, 어리석은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뿌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놓아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용수(龍樹) 보살은 중론(中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음악] "인연으로 생긴 것은 공(空)하고, 공한 것은 가명(假名)일 뿐이며, 이것이 중도(中道)라고." 우리 마음도 인연으로 생긴 것입니다. 과거의 업과 현재의 조건이 만나 [음악] 지금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므로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아무리 >> [음악] >> 깊은 번뇌도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을 관찰해 보십시오.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어떤 감정이 느껴집니까? 그것을 판단하지 말고, 좋다, 나쁘다 평가하지 말고, 단지 있는 그대로 지켜보십시오. 그렇게 지켜보는 순간, 여러분은 [음악] 이미 팔식의 작용을 관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오식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의식이 그것을 인식하고, 말라식이 '나'라고 생각하고, 아뢰야식에서 과거의 종자가 올라오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찰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놀라운 통찰이 일어납니다. 생각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은 그저 지나가는 구름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감정이 나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은 그저 일어났다 사라지는 파도와 같다는 [음악] 것을 알게 됩니다. '나'라고 집착했던 것도 사실은 의식의 흐름일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법장(法藏) 스님은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고, [음악] 한 생각 속에 삼천 세계(三千世界)가 있다고." 우리 마음 하나하나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번뇌의 종자도 들어 있지만, 깨달음의 종자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어떤 종자를 키울 것인가는 [음악] 우리의 선택입니다. 매 순간 깨어서 선한 종자를 심고, 악한 종자를 정화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오늘 우리는 팔식의 구조를 배웠습니다. 전오식,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이라는 여덟 겹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진정한 배움은 이 지식을 삶에 적용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마음을 관찰해 보십시오.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아, 지금 안식이 작용하고 있구나." 무언가를 판단할 때, "지금 의식이 분별하고 있구나." '나'라고 생각할 때, "지금 말라식이 집착하고 있구나." 익숙한 패턴이 반복될 때,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행하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의 의식은 [음악] 이미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까? 왜 매번 다짐하면서도 똑같은 패턴에 빠집니까? "화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화를 내고, "집착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집착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다시 후회할 일을 저지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 아뢰야식과 말라식이라는 두 층위에 숨어 있는 뿌리 때문입니다. 표면의 마음을 아무리 다스려도, 깊은 곳에 뿌리를 보지 못하면 [음악]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 뿌리를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능가경(楞伽經)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음악] 말씀하셨습니다. "아뢰야식은 깊고 미세하여 모든 종자가 폭류(瀑流)처럼 흘러갑니다. 범부(凡夫)들에게는 이것을 설하지 않으니, 그들이 자아(自我)하고 집착할까 두려워서입니다." 이 이 말씀은 아뢰야식이 얼마나 깊고 [음악] 미묘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음악] 작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아뢰야식입니다.

한 수행자가 깊은 산 속에서 10년을 수행했습니다. 명상도 깊어지고, 경전도 많이 읽고, 이제는 어느 정도 깨달음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을 내려와 마을에 [음악] 갔습니다. 시장 거리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세게 부딪혔습니다. 그 순간, 10년 수행이 물거품이 되듯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수행자는 [음악] 자신에게 놀라며 생각했습니다. "10년을 수행했는데, [음악] 왜 아직도 이런 분노가 일어나는가?"

그날 밤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분명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스승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산에서 수행한 것은 의식의 표면을 다스린 것이네. 하지만 깊은 곳 아뢰야식에는 여전히 분노의 종자가 남아 있네. 그 종자가 조건을 만나 순식간에 현행한 것이네. 표면의 물결을 잠재울 수는 있지만, 바다 깊은 곳의 해류를 바꾸는 것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네. 진정한 수행은 바로 이 깊은 종자를 정화하는 것이네."

아뢰야식은 우리 마음에 가장 [음악] 깊은 저장소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무수한 전생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 행한 모든 것, 생각한 모든 것이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종자가 심어지고, 악한 행위를 하면 악한 종자가 심어집니다. 자비로운 생각을 하면 자비의 종자가 심어지고, 분노하면 분노의 종자가 심어집니다. 이 종자들은 사라지지 않고, 조건을 만나면 언제든지 싹을 틔워 현실이 됩니다.

채친(叉親) 보살은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숙(異熟)이라는 것은 선악의 업이 익어서 과보를 낳는 것이니, 아뢰야식이 바로 이숙식(異熟識)이라고."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것은 과거에 심은 종자가 익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 느끼는 [음악] 행복도, 고통도, 만나는 사람도, 겪는 상황도 모두 과거 업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음악]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미래의 종자를 심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훈습과 [음악] 현행의 순환입니다.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행하여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이 다시 아뢰야식을 훈습하여 새로운 종자를 만들고, 그 종자가 또다시 현행합니다. 마치 씨앗이 싹을 틔워 나무가 되고, 나무가 다시 씨앗을 만들어 떨어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이 순환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경험이 아뢰야식의 깊은 상처의 종자로 저장됩니다. [음악] 누군가를 만나도 그 종자가 현행하여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먼저 거리를 두고, 마음을 닫고, 방어적으로 행동합니다. 상대방은 그런 태도에 실망하여 떠나갑니다. [음악] 결국 사랑받지 못한다는 경험이 반복되고, 그 경험은 다시 아뢰야식을 훈습하여 상처의 종자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것이 바로 업의 메커니즘입니다. 업은 단순히 과거의 행위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업이 현재를 만들고, 현재의 업이 미래를 만듭니다.

하지만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선택으로 새로운 종자를 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과거에 나쁜 종자가 현행하더라도,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다른 종자를 심을 수 있습니다. 티베트의 [음악] 아디샤(Atiśa) 존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독을 먹으면 고통스럽지만, 독을 약으로 바꿀 수도 있다"고. 번뇌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 그것에 휩쓸리면 더 깊은 번뇌의 종자를 심게 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음악] 지혜롭게 대응하면 오히려 깨달음의 기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화가 날 때, 그 화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관찰하고 그 뿌리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뢰야식과 함께 작용하는 말라식은 무엇입니까? 말라식은 자아의식, 즉 '나'라는 생각의 뿌리입니다. 말라식은 끊임없이 아뢰야식을 자아로 착각하고 집착합니다. 아뢰야식은 단지 종자들이 저장된 창고일 뿐인데, 말라식은 그것을 '나'라고 여깁니다. 이것을 아직(我)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고 합니다.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소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무명에는 [음악] 금본(根本) 무명과 지말(枝末) 무명이 있으니, 금본 무명은 아뢰야식을 일으키고, 지말 무명은 [음악] 말라식의 집착을 일으킨다고." [음악] 우리가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보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무명 때문이고, [음악] 그 무명이 아뢰야식이라는 저장 의식을 만들고, 다시 말라식이라는 자아 집착을 만들어냅니다.

말라식은 잠들 때도, 깨어 있을 때도, 명상할 때도 끊임없이 작동합니다. 의식이 사라진 깊은 잠에서도 말라식은 계속 '나'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의 내가 오늘도 이어져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말라식은 마치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며 모든 경험에 '나'라는 색깔을 입힙니다. [음악]

한 선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잠들기 전에 너와, 깨어난 후에 [음악] 너는 같은 자인가? 다른 자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같은 사람입니다." 선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깊은 잠에서 꿈도 꾸지 않고 아무 의식도 없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 제자가 말문이 막혔습니다. 선승이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도 말라식은 작동하고 있었네. 그대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네."

말라식에는 네 가지 번뇌가 항상 함께합니다. 첫째는 아견(我見). '나'라는 견해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음악] 나는 이런 성격이다. 나는 이런 능력을 가졌다"는 고정된 자상을 만듭니다. 둘째는 아애(我愛).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호하고, 나를 아끼고, 나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셋째는 아만(我慢). 나에 대한 교만입니다. [음악] "나는 남보다 낫다. 나는 특별하다"는 생각입니다. 넷째는 아치(我癡). 나에 대한 어리석음입니다. '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근본적인 무명입니다. 이 이 네 가지 번뇌가 모든 다른 번뇌의 뿌리가 됩니다. '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의 것을 원하는 탐욕이 생깁니다. 나를 방해하는 것에 대해 분노가 생깁니다. [음악] 나와 남을 구분하기 때문에 질투와 경쟁심이 생깁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칩니다.

도신(道信)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일체 번뇌의 뿌리는 '나'라는 생각이다. 나라는 생각을 끊으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하지만 어떻게 '나'라는 생각을 끊을 수 있습니까? 억지로 "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집착일 [음악] 뿐입니다. 진정한 방법은 나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몸입니까? 하지만 몸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릴 때의 몸과 지금의 몸은 [음악] 완전히 다릅니다. 세포는 매일 죽고 새로 생깁니다. 그렇다면 어느 몸이 진짜 '나'입니까? 내 생각입니까? 하지만 [음악] 생각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릴 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도 다릅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은 계속 [음악] 바뀝니다. 그렇다면 어느 생각이 진짜 '나'입니까? 내 감정입니까? 하지만 감정도 시시각각 변합니다. [음악] 기쁨이 슬픔이 되고, 사랑이 미움이 되고, 평온이 불안이 됩니다. 내 기억입니까? 하지만 [음악] 기억도 불완전하고 왜곡됩니다.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기도 하고, 없었던 일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나'입니까?

해능(慧能) 스님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오온(五蘊) 즉 몸과 감수(感受), 생각, 의지, 의식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임시로 모여 있을 뿐입니다. 이 이 다섯 가지가 모이면 '나'라고 부르고, 흩어지면 '나'는 사라집니다. 마치 파도가 일어나면 파도라고 부르지만, 파도가 사라지면 다시 [음악] 바다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는 바다와 별개의 실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집착을 놓을 수 있습니까? 첫째, 무상(無常)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내 몸도 변하고, 내 생각도 변하고, 내 감정도 변하고, 내 상황도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깊이 관찰하면, 변하는 것을 '나'라고 집착할 수 [음악]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 무아(無我)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지만, [음악] 사실은 조건들이 모여 일이 일어날 뿐입니다. 내가 생각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생각이 일어날 뿐입니다. 내가 화낸다고 하지만, 사실은 '화'라는 감정이 일어날 뿐입니다. 주체가 없고, [음악] 단지 현상의 흐름만 있을 뿐입니다.

용수 보살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업을 짓는 자도 없고, 업의 과보를 받는 자도 없으며, 단지 오온이 이어질 뿐이라고."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업을 짓는 것이 아니라, 조건들이 모여 업이 일어나고, 그 업의 종자가 다시 조건을 만나 과보가 나타날 뿐입니다. 그 사이에 '나'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한 노스님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강물이 흐르고 있네.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같은가, 다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다릅니다. 물은 계속 흘러가니까요." 노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한강'이라고 부르는가?" 제자가 깨달았습니다. "강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음악] 계속 흐르는 물의 흐름에 붙인 이름일 뿐입니다." 노스님이 미소 지었습니다. "그렇네. '나'라는 것도 마찬가지네. 오온이라는 흐름에 붙인 이름일 뿐이네."

아뢰야식과 말라식을 이해하는 것은 [음악]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고통받는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왜 자유롭지 못한지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고통의 뿌리는 밖에 있지 [음악] 않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종자와 집착해 있습니다. 그 뿌리를 보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뿌리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뢰야식은 너무 깊고 미묘해서 의식적으로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말라식은 너무 근본적이어서 그것을 관찰하는 주체조차 말라식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점진적인 수행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첫째, 계율(戒律)을 지켜 나쁜 종자를 심지 않는 것입니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욕설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업을 짓지 않으면 악한 종자가 아뢰야식에 저장되지 않고, 그러면 미래의 악한 과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둘째, 선업(善業)을 지어 좋은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보시를 하고, 지혜를 공부하고, 선정을 닦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업을 지으면 선한 종자가 아뢰야식에 저장됩니다.

셋째, 마음을 관찰하여 종자가 현행하는 과정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하고, 어떤 종자가 어떤 조건에서 현행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음악]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종자가 현행하더라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넷째, 무아(無我)를 깊이 통찰하여 말라식의 집착을 녹이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음을 깊이 깨달으면, 말라식의 작용이 자연스럽게 약해집니다. 나를 지킬 필요가 없어지고, 나의 것을 원할 필요가 없어지고, 나와 남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진늘(眞訥) 스님은 수심결(修心訣)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노점수(頓悟漸修), 단번에 깨닫되 점차 닦아야 한다고." '나'라는 것이 없다는 진리는 단번에 깨달을 수 있지만, 아뢰야식에 쌓인 무수한 습기(習氣)를 정화하는 것은 오랜 수행이 필요합니다. 마치 거울의 본성은 본래 맑지만, 오랜 세월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수행은 바로 이 과정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아뢰야식의 종자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랜 습관, 깊은 상처, [음악] 무의식적인 패턴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의 빛으로 그것들을 비추면 점차 정화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듯, 지혜의 빛으로 무명을 비추면 무명이 사라집니다.

지금이 순간 여러분의 아뢰야식에는 무수한 종자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선한 종자도 있고, 악한 종자도 있습니다. 번뇌의 종자도 있고, 지혜의 종자도 있습니다. 어떤 종자를 키울 것인가는 지금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화가 날 때 화를 키우면 분노의 종자가 강해지지만, 화를 알아차리고 자비로 대응하면 자비의 종자가 강해집니다.

마조(馬祖) 스님은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돌아오고, 특별한 경지를 추구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라고.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라고." 하지만 이것은 무심고(無心地)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깨어서 [음악] 알아차리며 사는 것입니다. 먹을 때 먹는 줄 알고, 잘 때 자는 줄 알고, 화낼 때 화내는 줄 알고, 탐할 때 탐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 있으면,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행하더라도 그것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말라식이 '나'라고 집착하더라도, 그 집착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 그 자체가 이미 [음악] 자유의 시작입니다. 깨어 있음 그 자체가 이미 해탈(解脫)의 문입니다.

우리는 [음악] 지금까지 마음의 구조를 배우고 번뇌의 뿌리를 탐구했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이 의식을 변화시킬 것인가? 어떻게 번뇌로 가득한 의식을 지혜로운 의식으로 전환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전식지(轉識成智), 의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부처님께서는 [음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끊어지면, 식이 전환되어 사지(四智)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식지이니, 의식의 변화가 곧 깨달음입니다."

한 수행자가 20년을 수행했습니다. [음악] 온갖 경전을 공부하고, 수많은 스승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깨달음은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한 노스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 저는 팔식을 공부하고 유식론을 배우고, 번뇌의 뿌리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번뇌는 일어나고, 의식은 변하지 않습니다. [음악]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의식이 전환됩니까?"

노스님은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를 보게. 겨울 내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던 나무가 봄이 되자 [음악] 꽃을 피웠네. 누가 꽃을 피우라고 가르쳤는가? 나무는 단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음악] 자연스럽게 변화했을 뿐이네. 의식의 전환도 마찬가지네.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고, 조건을 갖추면 자연스럽게 전환되네."

전식지는 팔식이 사지(四智)로 전환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지란 네 가지 지혜입니다. 첫째,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아뢰야식이 전환된 지혜입니다. 큰 원경(圓鏡)처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지혜입니다. 둘째, 평등성지(平等性智)는 말라식이 전환된 지혜입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보는 지혜입니다. [음악] 셋째, 묘관찰지(妙觀察智)는 의식이 전환된 지혜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미묘한 관찰의 지혜입니다. 넷째, 성소작지(成所作智)는 전오식이 전환된 지혜입니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성취하는 지혜입니다. 이 네 가지 지혜는 단계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음악] 방에 불을 켜면 모든 구석이 한꺼번에 밝아지듯, 깨달음의 순간 모든 지혜가 함께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 지혜를 완전히 성숙시키고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은 오랜 수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소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문(門) 하나의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나는 지녀문(持 ?, 본래 청정한 마음의 본성)이고, 하나는 생멸문(生滅門, 번뇌로 물든 현상의 마음)이라고." 이 둘은 별개가 아니라 같은 마음의 두 측면입니다. 마치 파도와 바다가 별개가 아니듯, 번뇌와 깨달음도 별개가 아닙니다. 파도가 잠잠해지면 바다가 드러나듯, 번뇌가 정화되면 [음악]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번뇌를 정화할 것입니까? 첫째, 이장(二障)을 끊어야 합니다. 이장이란 두 가지 장애입니다. 번뇌장은 탐진치(貪瞋癡)로 인한 장애이고, 소지장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명의 장애입니다. 번뇌장은 우리를 윤회에 묶어두고, 소지장은 [음악] 깨달음을 가립니다. 이 이 두 장애를 끊지 않고서는 의식이 전환될 수 없습니다.

번뇌장을 [음악] 끊는 첫걸음은 계율입니다. 살생하지 않고, [음악] 도둑질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오계(五戒)를 지키는 것입니다. 계율은 단순한 금지가 아니라, 새로운 종자를 심지 않기 위한 보호막입니다. 악업을 짓지 않으면 악한 종자가 아뢰야식에 저장되지 않고, 그러면 미래의 악한 과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둘째는 선정(禪定)입니다. 선정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음악] 번뇌의 파도를 잠재우는 수행입니다. 호흡을 관찰하고,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고, 생각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마음을 안정시킵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의식의 깊은 층위가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번뇌들, 무의식적인 패턴들, 깊이 박힌 습관들이 선정 속에서 하나씩 드러납니다. [음악]

지혜(智異) 대사는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지관쌍수(止觀雙修), 고요함과 관찰을 함께 닦아야 한다고." 고요함만 닦으면 무기공(無記空)에 빠지고, 관찰만 하면 산란해집니다. 고요함 속에서 관찰하고, 관찰하면서도 고요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를 여는 열쇠입니다.

셋째는 지혜(智慧)입니다. 경전을 공부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법을 사유하여 지혜를 개발합니다.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연기법(緣起法)을 깊이 통찰합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을 알고, 집착하면 [음악] 고통이 된다는 고를 알고, 고정된 자는 없다는 무아를 알고,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연기를 알면, 번뇌가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용수 보살은 중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연으로 생긴 법을 나는 공이라 하고, 또한 가명이라 하며, 이것이 [음악] 중도의 뜻이라고."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어 공합니다. 공하지만 현상으로는 나타남으로 가명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공하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음악] 있다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이 중도의 지혜로 세상을 보면, 집착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습니다. 좋은 것이 나타나도 집착하지 않고, 나쁜 것이 나타나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중도를 체득하면 소지장이 끊어집니다.

번뇌장과 소지장이 끊어지면 의식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가장 먼저 전환되는 것은 의식입니다. 의식이 전환되면 묘관찰지를 얻습니다. 사물을 볼 때 더 이상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봅니다. [음악] 꽃을 보면 단지 꽃으로 보고, 갖고 싶어 하지도 않고, 시들까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단지 그 사람으로 보고, 좋고 싫음으로 재단하지 않습니다.

전오식도 전환됩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음악] 때, 코로 맡을 때, 혀로 맛볼 때, 몸으로 느낄 때 [음악] 더 이상 번뇌로 물들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집착하지 않고, 추한 것을 보아도 혐오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리를 들어도 탐내지 않고, 나쁜 소리를 들어도 화내지 않습니다. 감각 경험이 그대로 청정한 지혜의 작용이 됩니다. 이것이 성소작지입니다. [음악]

해능 스님은 육조단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번뇌가 곧 보리(菩提)요, 생사(生死)가 곧 열반(涅槃)이라고." 번뇌와 보리가 별개가 아니라, 번뇌를 바르게 보면 그것이 곧 보리라는 뜻입니다. 생사와 열반이 별개가 아니라, 생사의 본성을 깨달으면 그것이 곧 열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번뇌를 그대로 두라는 말이 아니라, 번뇌의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말라식도 전환됩니다. '나'라는 집착이 사라지면 평등성지를 얻습니다. 모든 존재를 나와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합니다. 나의 행복만큼 남의 행복도 중요하고, 나의 고통만큼 남의 고통도 안타깝습니다. 이것이 자비의 뿌리입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으면 [음악] 남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고,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입니다.

보살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음악] 너무나 커서 보살의 마음에 큰 슬픔이 일었습니다. 보살은 서원을 세웠습니다. "지옥이 다 비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음악]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음악] 혼자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이것이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서원입니다. 이런 자비심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평등성지에서 나옵니다.

마침내 아뢰야식도 전환됩니다. 아뢰야식이 전환되면 대원경지를 얻습니다. 큰 원경처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왜곡도 없고, 편견도 없고, 집착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봅니다. 과거의 업장, 깊은 상처, 무의식적인 패턴이 모든 것이 정화되어 [음악] 청정한 거울이 됩니다.

무착 보살은 육가사지론(六科四智論)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전의성(轉依性)과 후득지(後得智),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가 있다고." 근본지는 깨달음의 순간 [음악] 모든 분별이 사라지고 진여(眞如)를 직접 체험하는 지혜입니다. 후득지는 깨달음 이후 일상으로 돌아와 그 지혜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근본지에서는 분별이 사라지지만, 후득지에서는 지혜로운 분별을 합니다. 어떤 행위가 중생에게 이로운지, 어떤 말이 [음악] 적절한지, 어떤 방편이 효과적인지를 지혜롭게 판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삶입니다. 깨달음을 [음악] 얻었다고 산속에 숨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와 중생을 이롭게 합니다. 번뇌가 정화되었다고 [음악] 감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감각으로 아름다움을 즐기고 예술을 창조합니다. 집착이 사라졌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넓은 사랑으로 모든 존재를 품습니다.

임재(臨濟)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이것은 부처와 조사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부처와 조사에 대한 집착조차 놓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집착, 수행에 대한 집착, 심지어 해탈에 대한 집착까지도 놓아야 합니다. 모든 집착이 사라질 때 진정한 자유가 옵니다.

의식의 전환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돈후(頓悟) 단번의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 그 깨달음을 삶 속에서 완전히 체화하는 것은 점수(漸修) 점진적인 수행을 필요로 합니다. 진(眞) 스님의 말씀처럼, 깨달음은 단번에 얻어도 닦음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수행자가 깨달음의 경험을 했습니다. 명상 중에 갑자기 모든 것이 환히 밝아지고, 나와 세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음악] 모든 것이 하나로 느껴졌습니다. 그 황홀한 경험에 기뻐하며 스승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는 [음악] 깨달았습니다." 스승이 물었습니다. "그래, 좋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수행자가 당황하며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평범합니다." 스승이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 평범함 속에서도 깨달음이 살아 있는가? 일상의 모든 순간에 그 지혜가 작용하는가?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네."

진정한 전식지는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일상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감사함이 일어납니다. 밥을 먹을 때 모든 인연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집니다. 일을 할 때 그 일 자체가 수행이 됩니다. [음악]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 속에서 부처를 봅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을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원효 스님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출가 수행자로 엄격한 계율을 지키다가, 깨달음 이후에는 [음악]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솔거(率土)로 변장하여 노래하고 춤추며 거리를 다녔습니다. 술집에도 가고, 창녀촌에도 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청정했습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중생과 함께하며 법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이 전환된 자의 자유입니다.

백장(百丈) 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노년에도 밭을 갈고 나무를 하며 수행했습니다. 제자들이 말렸지만 스님은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수행과 노동이 별개가 아니라, 모든 행위가 수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성취하는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먼저 의식 전환의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깊은 번뇌도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랜 습관도 조건이 바뀌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희망입니다. [음악] 둘째,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번뇌가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선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을 키워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깊어질수록 의식의 전환이 빨라집니다. 셋째, [음악] 계정의 사막(戒定慧)을 실천해야 합니다. 계율로 악업을 짓지 않고, 선정으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지혜로 진리를 통찰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조화롭게 발전할 때 의식이 전환됩니다. 넷째, 자비심을 키워야 합니다. 나만의 해탈을 구하지 않고, 모든 중생과 함께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자비심이 깊어질수록 아집(我執)이 약해지고, 평등성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다섯째, [음악]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의식의 전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빠르게 진전하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때로는 제자리걸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수행하면 어느 순간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법구경(法句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올방울이 떨어져 항아리를 채우듯, 작은 노력이 쌓여 큰 성취를 이룬다고." 매일 조금씩 수행하고, 매 순간 조금씩 [음악] 깨어 있고, 매번 조금씩 자비를 베풀면, 그것이 쌓여 의식의 전환을 이룹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하십시오. 호흡을 관찰하십시오.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알아차리십시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지켜보십시오.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을 느껴 보십시오. 판단하지 말고, 평가하지 말고, 단지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그리고 일상으로 나가십시오. 걸을 때 걷는 줄 알고, 먹을 때 먹는 줄 알고, 일할 [음악] 때 일하는 줄 알고, 쉴 때 쉬는 줄 아십시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에게 온전히 [음악] 집중하십시오. 말을 할 때 자비로운 말을 하십시오. 행동을 할 때 이로운 행동을 하십시오.

성철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이 자리에서 깨어 있는 것이 바로 수행이고, 바로 깨달음이라고. 특별한 어디를 가야 하고, 특별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깨어 있으면 된다고." 의식의 전화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이 말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의식은 [음악]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작용을 알아차리는 순간 [음악] 이미 전환이 시작됩니다. 번뇌를 번뇌로 보는 순간, 번뇌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집착을 집착으로 보는 순간, 집착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옛날 한 선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음악] 선승이 말했습니다. "물하고 문은 없다는 [음악] 뜻입니다." 이 화두는 무슨 뜻입니까? 개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은 이치로는 맞습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음악] 있으니까요. 하지만 선승은 '무(無)'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이론을 넘어선 직접적인 체험을 가르칩니다. [음악] 불성이 있다 없다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직접 불성을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팔전변(八轉變)도 마찬가지입니다. 팔식의 구조를 이해하고, 번뇌의 뿌리를 탐구하고, 전환의 원리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의식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아는 것과 직접 아는 것은 다릅니다. 물에 대해 100번 듣는 [음악] 것보다 한 모음 마시는 것이 낫습니다.

경어(鏡虛)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두(話頭)를 들되, 의심 덩어리가 되라고. 온몸이 하나의 의심이 되고, 온 마음이 하나의 화두가 되어 걸을 때도, 앉을 때도 화두와 함께하라고. 그렇게 의심이 깊어지고 깊어지면, 어느 순간 타파(打破)가 일어나고 의식이 완전히 전환된다고."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긴 여정을 함께했습니다. 팔식의 구조를 배우고, 아뢰야식과 말라식의 작용을 탐구하고, 전식지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진정한 배움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이 이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고, 매 순간 수행하고, 의식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믿고, 법을 믿고, 스스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으라고.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오늘부터 한 걸음씩 나아가십시오.

의식의 변화가 [음악] 곧 깨달음입니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전환될 때, 여러분의 삶이 변화할 것이고, 그 변화는 [음악] 주변 사람들에게도 퍼져 나갈 것입니다. 한 사람의 깨달음이 세상을 밝힙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 빛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음악]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念誦)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음악]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