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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탐욕을 어떻게 끊으셨는가 | 부처님 가르침 | 부처님 말씀

부처의말1:15:06

Transcription

당신은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아름다운 외모 혹은 더 큰 사랑을 원하시나요?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무언가를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이 갈망은 때로는 희망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삶의 원동력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 갈망이야말로 우리 고통의 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00년 전 카필라바스트 궁전에서 한 왕자가 이 진실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시기 전 세상 모든 욕망이 충족된 삶을 사셨습니다. 아름다운 궁전, 맛있는 음식, 화려한 옷,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까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 모든 것 속에서 깊은 공허함을 느끼셨습니다. 욕망이 채워질 때마다 더 큰 욕망이 그 자리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가래, 즉 목마름의 사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가래는 마치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고 더 마시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잠깐입니다. 그 만족감이 사라지면 우리는 다시 허전함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전법륜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래는 다시 태어남을 이끌고 기쁨과 탐욕을 동반하며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찾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해 발생인 집성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가래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첫째는 욕계,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입니다.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소리, 향기로운 냄새, 부드러운 감촉, 매력적인 모습. 이 모든 것이 욕계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고 그 즐거움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욕계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켜면 끝없는 자극이 쏟아지고 광고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사라고 속삭입니다. 소셜 미디어는 다른 사람의 화려한 삶을 보여주며 우리 안에 부러움과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사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지만 그 행복은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둘째는 유계, 존재에 대한 집착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고 싶어하고 지금의 나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며 젊음과 건강과 생명을 붙잡으려 합니다. 유계는 또한 미래에 대한 집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일도 내년도 10년 후에도 나라는 존재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이 집착은 우리를 끊임없는 불안 속에 가둡니다. 변화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임에도 우리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무유계, 존재하지 않으려는 욕망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로는 삶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건 역시 가래의 한 형태입니다. 존재에 대한 집착이 뒤집힌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 가지 가래가 모두 무명, 즉 진리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영원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또한 무아의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나라고 부르는 이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모여서 잠시 만들어진 현상임을 모릅니다. 색, 수, 상, 행, 식이 다섯 가지가 모여 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육체와 감각과 생각과 의지와 의식이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고 지금이 순간의 나도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하지 않는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나의 것, 나의 욕망, 나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마치 물거품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물거품은 잠깐 반짝이다가 곧 사라집니다. 욕망이 주는 만족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 잠깐 기쁘지만 그 기쁨은 금방 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새로운 물거품을 쫓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윤회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우리는 욕망의 윤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얻으면 잠시 만족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원합니다. 이 순환은 끝이 없습니다. 마치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우리는 계속 달리지만 제자리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윤회의 사슬을 12연기로 설명하셨습니다. 무명으로 인해 행이 생기고 행으로 인해 식이 생기고 식으로 인해 명색이 생기고 명색으로 인해 육입이 생기고 육입으로 인해 촉이 생기고 촉으로 인해 수가 생기고 수로 인해 애가 생기고 애로 인해 취가 생기고 취로 인해 유가 생기고 유로 인해 생이 생기고 생으로 인해 노사가 생깁니다. 이 12개의 고리가 서로 연결되어 고통의 사슬을 만듭니다. 그중에서도 애, 즉 가래는 가장 중요한 고리입니다. 가래가 있기 때문에 취, 즉 집착이 생기고 집착이 있기 때문에 유, 즉 존재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그것이 다시 생과 노사로 이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슬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래를 끊으면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래를 끊을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욕망을 억압하려고 합니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사고 싶은 것을 참고 하고 싶은 것을 참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단순한 억압이 해답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억압된 욕망은 더 강하게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방법은 관찰입니다.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이 욕망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욕망이 충족되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렇게 욕망을 관찰하다 보면 욕망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욕망은 실체가 없는 마음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욕망의 대상을 바르게 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 좋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셨습니다. 신체를 관찰하면 그것이 32가지 부정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머리카락, 털, 손톱, 이빨,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신장, 심장, 간, 막, 비장, 폐, 창자, 장막, 윗속에 음식물, 대변, 뇌, 담즙, 가래, 고름, 피, 땅, 기름, 눈물, 침, 콧물, 관절, 오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집착하는 육체의 실상입니다.

음식을 관찰하면 그것이 결국 몸속에서 변화하여 배설물이 됨을 알게 됩니다. 재산을 관찰하면 그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임을 알게 됩니다. 명예를 관찰하면 그것이 사람들의 일시적인 생각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욕망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가래가 점점 약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여실지견, 즉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환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영원함을 믿고 행복을 쫓아갑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무상한 것은 무상한 것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스러운 것으로, 나가 아닌 것은 나가 아닌 것으로 바르게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욕망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 궁전 밖으로 나가셨을 때 네 가지 광경을 보셨습니다. 늙은 이, 병든 이, 죽은 이, 그리고 수행자였습니다. 이 네 가지 광경이 부처님께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아무리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워도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진리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수행자를 통해 확인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날 밤 궁전을 떠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 그리고 왕위까지 모두 버리고 출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버렸을까요? 부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충족되는 삶이 행복한 삶이 아니라 욕망에서 자유로운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출가 후 부처님께서는 여섯 해 동안 극심한 고행을 하셨습니다. 하루에 쌀 한 톨만 드시며 육체를 괴롭히셨습니다. 몸은 뼈와 가죽만 남았고 앉아 있기도 힘들 정도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이 고행도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행 역시 욕망의 다른 형태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집착이고 고통을 추구하는 것도 집착입니다. 둘 다 극단이며 진리는 그 중간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행을 버리시고 음식을 드셨습니다. 함께 수행하던 다섯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수행을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수행으로 나아가신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그날 밤 부처님께서는 가래의 본질을 깊이 관찰하셨습니다. 욕망이 어디에서 오는지, 욕망이 어떻게 고통을 만드는지, 욕망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를 관찰하셨습니다.

첫째 밤에 부처님께서는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셨습니다. 수없이 많은 생을 거슬러 올라가며 생과 사의 무한한 반복을 보셨습니다. 그 모든 생에서 가래가 고통을 만들었음을 보셨습니다.

둘째 밤에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업에 따라 태어나고 죽는 것을 보셨습니다. 선한 업을 지은이는 좋은 곳에 태어나고 악한 업을 지은이는 나쁜 곳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업의 뿌리에 가래가 있음을 보셨습니다.

셋째 밤에 부처님께서는 12연기의 법칙을 깨달으셨습니다. 무명으로부터 시작되어 노사에 이르는 고통의 사슬을, 그리고 그 사슬을 끊는 방법을 완전히 이해하셨습니다.

새벽이 밝아올 때 부처님께서는 새별을 보시며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가래가 사라지고 모든 번뇌가 소멸되고 완전한 자유를 얻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수한 생을 윤회하며 집짓는 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오 집 짓는 자여, 나는 너를 보았노라.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들보는 부러졌고 집에 마루대는 무너졌으며 마음은 무위에 이르러 가래의 소멸을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집짓는 자란 가래를 의미합니다. 가래가 번뇌의 집을 짓고 그 집 안에서 우리는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가래를 완전히 보셨고 그것을 소멸시키셨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가래를 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무언가를 원할 때 그 욕망을 관찰해 보십시오. 이 욕망은 진짜 필요인가? 아니면 그냥 가래인가? 이것을 얻으면 정말 행복해질까? 아니면 잠시 만족하다가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될까? 이렇게 관찰하는 순간 욕망의 힘은 약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도를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쾌락에 빠지지도 말고 고행에 빠지지도 말고 중간의 길을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되 집착하지 말고 즐거움을 누리되 탐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래를 끊는 지혜입니다.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본질을 보면 욕망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밧줄을 뱀으로 착각했다가 빛을 비추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이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가래가 고통의 원인이며 가래를 끊으면 고통이 사라진다는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의 핵심입니다. 고성제는 삶이 고통임을 아는 것이고 집성제는 그 고통의 원인이 가래임을 아는 것이고 멸성제는 가래를 끊으면 고통이 사라짐을 아는 것이고 도성제는 가래를 끊는 길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집성제를 배우고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 즉 가래를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래는 우리를 윤회의 사슬에 묶어 두는 족쇄입니다. 하지만 이 족쇄는 우리 스스로 채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풀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보여 주신 것처럼 가래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어떤 욕망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 욕망을 비난하지 말고 억누르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수행의 시작입니다.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붓다는 깨어 있는 사람, 욕망의 환상에서 깨어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지금이 순간 깨어날 수 있습니다. 가래의 족쇄를 끊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멀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마음을 바르게 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보리수 아래 깨달음을 향한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좌에 앉아 깊은 선정에 드셨습니다. 그때 욕계의 집배자, 마왕 마라가 나타났습니다. 마라는 욕망과 죽음과 번뇌의 화신입니다. 마라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수행의 길에서 마주하는 내면의 싸움을 상징합니다. 마라가 부처님께 던진 유혹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탐욕과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마라는 먼저 부처님께 왕위로 돌아가라고 유혹했습니다. "당신은 왕족으로 태어났으니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궁전으로 돌아가면 온 세상이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속삭였습니다. 권력, 명예, 재산, 모든 것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입니다. 우리도 수행의 길에서 이런 유혹을 만납니다.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더 안정적인 길로 가라는 속삭임. 명상보다는 돈을 벌고 지위를 얻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생각. 영적인 추구는 여유가 생긴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합리화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미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왕국도 깨달음만큼 가치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일시적이고 명예는 더 없으며 재산은 죽을 때 가져갈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한 곳에 있습니다.

마라는 첫 번째 유혹이 실패하자 두려움으로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라는 자신의 군대를 불러 모았습니다. 온갖 무시무시한 모습의 악귀와 괴물들이 부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칼과 창과 화살로 부처님을 공격했습니다. 불을 내뿜고 번개를 떨어뜨리고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하늘이 무너질 듯한 괴음이 울려 퍼지고 땅이 흔들렸습니다. 이것은 두려움의 상징입니다. 수행의 길에서 우리는 수많은 두려움을 만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고독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두렵고 수행이 헛된 일이 될까 봐 두렵고 모든 것을 이를까 봐 두렵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마라의 군대가 쏜 화살은 꽃비가 되어 부처님 발 아래 떨어졌습니다. 악귀들의 무기는 부처님께 닿기도 전에 사라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셨고 그 자비 앞에서 모든 두려움은 힘을 잃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두려움의 본질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두려움은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마라는 다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이번에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마라는 자신의 세 딸을 보냈습니다. 가래, 혐오, 탐욕이라는 이름의 세 딸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했습니다. 천상의 선녀처럼 우아하고 봄꽃처럼 화사하고 달빛처럼 부드러웠습니다. 그녀들은 부처님 주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온갖 유혹적인 자태를 보였습니다. "당신은 아직 젊고 인생을 즐길 시간이 충분하지 않느냐?"고 속삭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깨달음은 늙어서 추구해도 늦지 않으니 지금은 삶을 즐기라"고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감각적 욕망의 유혹입니다.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가장 강력한 욕망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쾌락에 대한 갈망, 사랑받고 싶은 갈망입니다. 수행자라 해도 이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출가 전에는 이 욕망의 세계에 사셨습니다. 아름다운 아내 야소다라와 사랑하는 아들 라훌라가 있었습니다. 궁전에는 수많은 신녀들이 있었고 온갖 즐거움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 허무함을 아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라의 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의 진짜 모습을 보셨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는 일시적인 환상이며 그 안에는 늙음과 병과 죽음이 숨어 있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음은 잠깐이고 아름다움은 더 없으며 모든 감각의 즐거움은 고통의 씨앗을 품고 있다. 당신들의 유혹은 무명한 자에게나 통할 뿐 진리를 본 자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 순간 마라의 딸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변했습니다. 젊은 모습이 늙은 모습으로, 건강한 모습이 병든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그녀들은 부끄러워하며 물러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억압이 아니라 통찰입니다. 욕망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 매력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상하고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고통을 가져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정관이라는 수행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름답게 보이는 육체를 관찰하여 그 안에 실상을 보는 수행입니다. 피부 아래에는 살과 뼈와 내장이 있고 그것들은 계속 변하고 썩어갑니다. 이것을 보면 맹목적인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혐오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육체를 혐오하는 것도 집착의 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중도는 집착도 혐오도 아닌 평정심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라는 모든 유혹이 실패하자 마지막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마라는 부처님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누가 증명할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나에게는 나를 따르는 무수한 군대가 있어 내 권위를 증명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혼자이니 당신의 자격을 증명할 증인이 없지 않느냐?"고 비웃었습니다. 이것은 의심의 공격입니다. 수행의 길에서 가장 교묘하고 위험한 장애물입니다. 내가 정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자격이 있는가? 나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가? 이런 의심들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때로는 스승에 대한 의심, 가르침에 대한 의심, 수행법에 대한 의심도 일어납니다. 이 의심은 우리를 멈추게 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부처님께서는 침착하게 오른손을 들어 땅을 가리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항마지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지의 여신을 증인으로 불러내셨습니다. "나는 무수한 전생에 걸쳐 공덕을 쌓았고 자비와 지혜를 닦았으며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을 얻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지여, 당신이 나의 증인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그 순간 대지의 여신이 나타나 증언했습니다. "제가 증인입니다. 이분은 무수한 생을 거쳐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를 완성하셨습니다. 이분은 깨달음을 얻을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대지가 흔들리며 마라의 군대는 사라졌습니다. 마라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전합니다. 우리의 수행을 증명할 증인은 바로 우리 자신의 행위입니다. 매일매일 쌓아온 선한 행동, 매순간에 깨어 있음, 끊임없는 정진이 우리의 증인입니다. 남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지가 알고 하늘이 알고 우리 자신이 압니다. 의심이 일어날 때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됩니다.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얼마나 성장했는가. 이것이 우리의 증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라를 물리친 후 더 깊은 선정에 들어가셨습니다. 초저녁에는 숙명통을 얻으셨습니다. 과거에 무수한 생을 기억하시고 윤회의 실상을 보셨습니다. 한밤 중에는 천안통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중생이 업에 따라 생사를 반복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새벽녘에는 12연기를 완전히 깨달으시고 모든 번뇌가 소멸하는 누진통을 얻으셨습니다. 새별이 떠오를 때 부처님께서는 완전한 깨달음, 즉 삼막보리를 성취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욕망의 군대를 마치 코끼리가 흙으로 만든 오두막을 부수듯 깨뜨렸노라. 나는 게으르지 않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수행하여 번뇌가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리라." 이것은 승리의 선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라라는 외부의 적을 물리친 승리가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완전히 극복한 승리입니다. 마라는 실제로 부처님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마라는 부처님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번뇌들의 상징입니다. 권력에 대한 미련, 안전에 대한 욕구, 쾌락에 대한 갈망, 자기 의심, 이 모든 것이 마라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도 수행의 길에서 마라를 만납니다. 명상을 하다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차라리 재미있는 것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마라의 속삭임입니다. 중요한 결심을 하려 할 때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이것도 마라의 목소리입니다. 좋은 일을 하려 할 때 갑자기 의심이 생깁니다. "내가 이걸 할 자격이 있나? 나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 아닌데." 이건 역시 마라의 방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라를 적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라를 알아차리고 마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평정심으로 대하셨습니다. 분노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태도입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 그것과 싸우지 마십시오. 번뇌를 억압하려 하지 마십시오. 다만 알아차리십시오. "지금 탐욕이 일어났구나." "지금 성냄이 일어났구나." "지금 의심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번뇌의 힘은 약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마라를 여러 번 만나셨습니다. 한번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생각을 하시자 마라가 나타나 지금 열반에 드시라고 제촉했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은 이미 완성되었으니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물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아직 가르쳐야 할 제자들이 많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5년 후 내 제자들이 충분히 성숙하고 가르침이 널리 퍼졌을 때 열반에 들겠노라. 지금은 아니다." 마라는 또 실패했습니다. 또 한 번은 부처님의 제자 중 한 명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마라가 그 제자의 마음에 들어가 부처님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즉시 알아차리시고 제자에게 마라의 속임수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마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마라를 완전히 알아차릴 수 있게 되고 마라에게 더 이상 속지 않게 될 뿐입니다. 우리의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한다고 해서 욕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욕망이 일어날 때 즉시 알아차릴 수 있게 되고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마라를 물리치는 것은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가 아닙니다. 매일매일 매 순간에 깨어 있음입니다. 부처님께서 마라에게 승리하신 것은 초인적인 힘 때문이 아닙니다. 완전한 깨어 있음, 흔들림없는 평정심, 진리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키울 수 있습니다. 명상을 통해 깨어 있는 마음을 기르고 계율을 통해 평정심을 닫고 경전을 통해 진리를 이해합니다.

마라가 나타날 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라는 우리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마라를 통해 우리는 아직 남아 있는 집착을 발견하고 더 깊이 수행할 기회를 얻습니다. 티베트 불교의 위대한 스승 밀라파는 동굴에서 수행할 때 수많은 악마를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워하고 쫓아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밀라파는 악마들을 손님으로 맞이했습니다. "오십시오. 당신들은 나의 스승입니다. 당신들을 통해 나는 더 깊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악마들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라를 대하는 지혜입니다. 거부하지도 말고 받아들이지도 말고 다만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마라를 물리치신 후 7일 동안 그 자리에 앉아 해탈의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또 7일 동안은 서서 보리수를 바라보며 감사를 표하셨습니다. 또 7일 동안은 걸으며 해탈의 길을 되새기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승리를 혼자만 누리지 않으셨습니다. 45년 동안 가르침을 펼치시며 모든 중생이 마라를 물리치고 해탈할 수 있도록 이끄셨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부터 마라를 알아차리는 연습을 시작하십시오. 욕망이 일어날 때 "아, 이것이 마라구나" 하고 알아차리십시오. 두려움이 밀려올 때 "아, 마라가 또 왔구나" 하고 미소 지으십시오. 의심이 생길 때 "아, 마라의 마지막 공격이로구나" 하고 평정심을 유지하십시오. 이렇게 매순간 깨어 있으면 우리도 마라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내면의 번뇌를 극복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멀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이 마음을 바르게 지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후 부처님께서는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이 진리가 너무나 깊고 미묘하여 과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탐욕에 빠진 중생들이 욕망을 끊는 길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셨습니다. 하지만 범천이 나타나 간청했습니다. "세상에는 눈에 먼지가 조금만 낀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위해 가르침을 펼쳐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자비심으로 가르침을 펼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먼저 찾아가신 것은 함께 고행했던 다섯 비구들이었습니다. 녹야원에서 부처님께서는 첫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전법륜,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셨습니다. 고가 있고 고의 원인인 집이 있고 고의 소멸인 멸이 있고 고의 소멸로 가는 길인 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팔정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팔정도는 탐욕을 끊고 해탈로 나아가는 여덟 가지 바른 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률이 아닙니다. 우리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수행법입니다.

팔정도의 첫 번째는 정견, 바른 견해입니다. 정견은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삶에는 고통이 있다는 것. 그 고통의 원인이 가래라는 것. 가래를 끊으면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정견은 또한 업과 윤회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에는 결과가 따르며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악한 행위는 악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정견은 연기의 법칙을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원인과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집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견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잘못된 견해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견해, 명예를 얻으면 만족할 것이라는 견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견해.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견해입니다. 정견을 가지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사유해야 합니다. 경전을 읽고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경험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정사유, 바른 생각입니다. 정사유는 세 가지로 나뉩니다. 출리사,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입니다. 무진사, 성냄이 없는 자비로운 생각입니다. 무회사,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삶을 만듭니다.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며 마음이 주인이고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더러운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따라오고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따라온다." 우리는 하루에 수만 가지 생각을 합니다. 그중 얼마나 많은 생각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나오는지 돌아보십시오. 저 사람이 가진 것이 부럽다.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 나는 부족하다. 이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정사유는 이런 생각을 알아차리고 바른 생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부러움 대신 기쁨으로, 성냄 대신 이해로, 자기 비하 대신 자비로 바꾸는 것입니다. 명상은 정사유를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고요히 앉아 마음을 관찰하면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로운 생각은 놓아 버리고 이로운 생각을 키울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정어, 바른 말입니다. 정어는 네 가지를 피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고,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쓸데없는 잡담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를 생각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진실인가? 이것이 필요한가? 이것이 친절한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할 때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정어는 더욱 중요합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말은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거둘 수 없으며 그 영향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화가 났을 때 우리는 쉽게 거친 말을 내뱉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우리 자신에게도 해로운 업을 만듭니다. 정어를 실천하려면 말하기 전에 잠시 멈추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이 말이 정말 필요한가? 이 말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 말을 했을 때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침묵도 때로는 정어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불필요한 말을 하는 것보다 나을 때가 많습니다.

네 번째는 정업, 바른 행동입니다. 정업은 세 가지를 피하는 것입니다. 살생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고, 사음(음행)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율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정업은 단순히 나쁜 것을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보호하고, 베풀고,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생명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작은 벌레 하나도 함부로 죽이지 않고 가능한 한 모든 생명을 보호합니다. 이것은 자비심의 실천입니다.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넓게 해석하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기를 하거나 남을 속여 돈을 벌거나 불공정한 거래를 하는 것 모두 도둑질에 해당합니다. 사음(음행)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적인 행위를 절제하고 책임감 있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의 배우자와 관계를 맺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성을 탐욕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계율을 어기도록 유혹합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남을 짓밟고,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쾌락을 위해 절제를 잃습니다. 하지만 정업을 실천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단기적인 이익보다 장기적인 행복을, 자기만의 이익보다 모두의 이익을 생각합니다. 정업은 우리 삶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양심의 가책이 없고 선한 행동을 했기에 마음이 편안합니다.

다섯 번째는 정명, 바른 생활입니다. 정명은 바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 직업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무기를 거래하는 일, 생명을 거래하는 일, 고기를 파는 일, 술을 파는 일, 독약을 파는 일입니다. 이것들은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치거나 사람들의 번뇌를 증가시키는 일들입니다. 현대에는 이보다 더 많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가? 내가 만드는 제품이나 제공하는 서비스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유익한가? 아니면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는가? 정명은 단순히 직업의 선택만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하는 방식도 중요합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남을 속이지 않고 공정하게 거래하는 것이 정명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가자들에게 네 가지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정당한 노력으로 얻고, 땀을 흘려 얻고, 정직하게 거래에서 얻고, 법에 따라 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재산을 네 부분으로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한 부분은 생활비로 쓰고, 한 부분은 사업에 재투자하고, 한 부분은 비상시를 위해 저축하고, 한 부분은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명의 지혜입니다. 탐욕스럽게 모으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무책임하게 낭비하는 것도 아닌 균형 잡힌 삶입니다.

여섯 번째는 정정진, 바른 노력입니다. 정정진은 네 가지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악을 끊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을 일으키고, 이미 일어난 선을 더욱 키우는 것입니다. 수행은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도 6년의 고행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하지만 정정진은 맹목적인 노력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노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검은고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검은고의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적당한 긴장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듭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열심히 해서 지치면 안 되고 너무 게을러서 진전이 없어도 안 됩니다. 지속 가능한 노력,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열심히 수행하다가 금방 포기합니다. 하루에 2시간씩 명상하겠다고 결심했다가 사흘 만에 그만둡니다. 이것은 정정진이 아닙니다. 정정진은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10분이라도 빠짐없이 하는 것이 가끔 두 시간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정정진은 또한 올바른 방향으로의 노력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못된 방향이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견이 먼저 필요한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른 방향으로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정정진입니다.

일곱 번째는 정념, 바른 알아차림입니다. 정념은 사념처로 수행합니다. 몸을 몸으로 관찰하고, 느낌을 느낌으로 관찰하고, 마음을 마음으로 관찰하고, 법을 법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정념은 지금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지금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깨어 있지 않습니다. 걸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먹으면서 스마트폰을 보고, 대화하면서 딴 생각을 합니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정념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걸을 때는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먹을 때는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생각할 때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정념을 기르는 가장 기본적인 수행은 호흡 관찰입니다.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숨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숨이 나가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단순한 수행이지만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호흡을 관찰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에서 벗어나 지금이 순간에 머물 수 있습니다. 정념은 또한 감정을 다루는 지혜를 줍니다. 화가 날 때 우리는 보통 그 화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정념이 있으면 "지금 화가 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화와 나 사이에 공간이 생깁니다. 화가 나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나는 화를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슬픔도 불안도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차리면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여덟 번째는 정정, 바른 선정입니다. 정정은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선정, 사선을 가르치셨습니다. 초선은 생각과 고찰이 있으면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상태입니다. 이선은 생각과 고찰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상태입니다. 삼선은 기쁨이 사라지고 즐거움과 평정심만 있는 상태입니다. 사선은 즐거움도 사라지고 완전한 평정심만 있는 상태입니다. 선정은 마음의 힘을 기르는 수행입니다. 흩어진 마음을 모으고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약한 마음을 강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선정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선정은 지혜를 얻기 위한 도구입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실상을 관찰할 때 진리가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정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산속에 들어가 몇 년씩 수행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정은 일상에서도 기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일에 완전히 집중할 때 그것이 바로 선정의 시작입니다. 책을 읽을 때 완전히 몰입하거나, 일을 할 때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하거나, 명상할 때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선정을 기르는 수행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의 집중력을 흩어놓습니다. 수많은 알림과 광고와 자극이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끕니다. 멀티태스킹이 미덕처럼 여겨지고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비효율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음을 약하게 만듭니다. 정정은 이런 흐름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한 가지에 집중하고 깊이 들어가고 고요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팔정도를 동시에 수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팔정도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가 다른 것을 돕습니다. 정견이 있으면 정사유가 생기고, 정사유가 있으면 정어가 나오고, 정어를 실천하면 정업이 따릅니다. 정업과 정명으로 생활을 바르게 하면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을 수행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됩니다. 그리고 정념과 정정이 깊어지면 정견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팔정도의 상호작용입니다. 하나씩 따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중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쾌락에 탐하는 극단과 고행에 빠지는 극단 사이의 중간 길입니다. 억압하지도 않고 방종하지도 않는 균형의 길입니다. 탐욕을 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되 집착하지 않는 것, 즐거움을 누리되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평생 음식을 드시고 옷을 입으시고 잠을 주무셨습니다. 하지만 음식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옷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편안함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필요한만큼만 받아들이시고 나머지는 놓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팔정도를 삼학으로 정리하셨습니다. 계, 정, 혜입니다. 정어, 정업, 정명이 계에 해당하고, 정정진, 정념, 정정이 정에 해당하고, 정견, 정사유가 혜에 해당합니다. 계는 토대입니다. 다른 생활이 없으면 마음을 닦을 수 없습니다. 나쁜 행동을 하면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불안하고, 불안한 마음으로는 선정에 들 수 없습니다. 정은 과정입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깊이 관찰할 때 진리가 보입니다. 찬란한 마음으로는 무상, 꼭 무아의 실상을 볼 수 없습니다. 혜는 결과입니다. 바른 견해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면 집착이 사라지고 자유로워집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를 지탱합니다. 계가 정을 낳고, 정이 혜를 낳고, 혜가 다시 계를 완성합니다.

부처님께서 팔정도를 가르치신 후 다섯 비구 중 한 명인 교진여가 깨달았습니다. 교진여는 법안을 얻었습니다. 무릇 일어나는 성질을 가진 것은 모두 소멸하는 성질을 가졌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의 진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교진여가 알았구나. 교진여가 알았구나." 그래서 그에게 아야 교진여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아는 자, 교진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첫 번째 아라한의 탄생입니다. 아라한은 번뇌를 완전히 끊고 해탈을 이룬 성자입니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완전한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곧이어 다른 비구들도 차례로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이제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과 다섯 비구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너희도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가서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가르침을 펼치라. 한길로 두 사람이 가지 말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가르침을 설하라." 이것이 바로 전도선언입니다. 불교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팔정도는 이후 45년 동안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제자들에게 팔정도를 가르치셨고 그들은 팔정도를 실천하여 해탈을 얻었습니다. 왕족도 천민도 남자도 여자도 젊은이도 노인도 모두 팔정도를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탐욕이 사라진 이는 평안하며, 성냄이 사라진 이는 두려움이 없고, 어리석음이 사라진 이는 미혹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열반이라고 하셨습니다. 열반은 죽음 후에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 번뇌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완전히 사라진 마음. 그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이 팔정도가 바로 성스러운 길이며, 이 길 외에는 청정한 지혜를 얻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길로 나아가면 마라를 속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팔정도는 2600년 전 인도에서만 통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정견으로 세상을 바르게 보고, 정사유로 마음을 정화하고, 정어로 관계를 치유하고, 정업으로 삶을 정직하게 살고, 정명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정정진으로 꾸준히 나아가고, 정념으로 깨어 있고, 정정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었습니다. 정진하라는 것은 바로 팔정도를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매일 조금씩, 한 걸음씩 이 길을 걸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당장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탐욕을 키우는 방향이 아니라 탐욕을 줄여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번뇌를 증가시키는 삶이 아니라 번뇌를 감소시키는 삶을 사는 것.

것입니다. 고통을 만드는 행동이 아니라 행복을 가져오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팔 정도 중 한 가지만이라도 실천해 보십시오.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화내지 않거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거나, 10분이라도 명상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실천이 쌓이면 우리 삶은 변화합니다. 부처님께서 보여 주신 것처럼 탐욕을 끊고 해탈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멀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팔 정도를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2600년 전 보리수 아래에서 얻으신 깨달음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래의 본질을 보고 마라를 물리치고 팔정도를 걸어 해탈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함께하시고, 수많은 조사들이 함께하시고, 전 세계의 수행자들이 함께 걷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도 그 길에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무미타불 관세음보살.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아미타불과 자비의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이 염성 한마디가 마음을 맑히고 삶을 부드럽게 합니다.

댓글에 나무암아미타불 관세음보살를 한번 남겨 보세요. 당신의 그 한마디가 복덕의 씨앗이 되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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