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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zip] 행복은 한 순간이다 "법정스님의 인생 법문 모음집"

BBS 인생법문2:40:12

Transcription

설들 잘 쓰셨습니까?

네.

복도 많이 받으셨어요?

네.

복을 누가 줘요? 복을 누가 줘서 봤습니까? 그래이 복이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에요. 왜냐면은 새 인사 하고 싶은 인사도 많을 텐데 복 많이 받으십시오. 또 이렇게 해서 인사하게 누가 주는 놈이 있건 없건간에 복을 받으라는 그 간절한 소망 자체가 좋아요.

또 복이 어 인간을 형상하는데 아주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부처님 자신도 석가문의 부처님 자신도 당신이 부처가 되기까지는 복의 힘이라는 이런 얘기를 뭐 경전에 여러분들 하거든 복의 힘으로서 나는 부처가 됐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뭐 이제 참선해 가지고 한 소씩 하면은 부처가 되는 줄 알았는데 복을 많이 지어 가지고 그 힘으로 복의 힘으로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 상당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이제 하루하루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그 잠재력 그 에너지가 순간순간 소모되는 거예요. 우리가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순간순간 소모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소모하는가? 아, 이게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루하루 우리가 사는 일 자체가 복스럽고 복을 짓는 일이라면은 그건 잘 사는 일이에요. 그런데 하루하루 사는 일이 순간순간 사는 일이 복을 까먹고 복을 더는 그런 일이라면 그건 잘못 사는 삶입니다. 그 하루에 살면서 우리가 그런 결산을 하십시오. 뭐 9시 텔레비 뉴스 보기 전에 내가 하루 진짜 복을 짓고 살았는지 복을 들고 살았는지 스스로 자기 삶을 점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새 이제 복 많이 받으십시오.이 소리는 이제 다른 표현을 하자면 복 많이 지으십시오. 뭐 이런 표현입니다. 오늘 여기 이제 나오시기까지 이제 많은 그런 그 어 인연들이 있어요. 뭐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이 자리에서 만났다는 것은이 단순한 인연이 아닙니다. 여러 상황들이 얽히고 설켜 가지고 오늘 이렇게이 자리에서 이런 모임을 갖게 됐어요.

아침들 드시고 오셨죠? 아침 빵을 자셨건 무슨 뭐 밥을 자셨건 단순한 밥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관계된 밥이라고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김치라든가 상치라든가 무우가 그 종자가 어디서 들어오는 줄 아세요? 우리나라에서 종자를 만들잖아요. 수직 안 맞으니까. 실내산 종자예요. 저도 작년 가을에 씨앗을 살아갔다가 깜짝 놀랬다니까. 시앗 봉지 한글로 써서 그 무심이 그냥 그렇게 지났는데 가만히 들여다 보니까 이게 신뢰산 원산이에요. 원산지가 진례산으로 돼 있어요. 무도 그렇고 배추도 그러고 그 경제성이 맞지 않아서 우리나라에서 그런 거 안 만든다네. 뭐 이제 핸드폰 같은 거 만들어라고 그런 여가 없대요.

이게 세계화라는게 바로 이런 겁니다. 온 지구가 하나의 시장으로 되고 있어요. 물론 이것은 미국의 입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우리가 이제 그렇게 이제 진산 김치에다가 이제 뭐 깍두기에다 먹고 여기 왔어요. 뭘로 옵니까? 물론 걸어서 오신 분들도 있으면 되게 차를 타고 오잖아요. 차는 또 많은 과정을 거쳐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자동차 공장에서 차를 만들 때 또 이제 놓임이 적다고 이제 머리에다 어 붉은 띠를 두르고 이제 노동 쟁이도 하고 파업도 하고 그러면서 만들어 내잖아요. 또 타이아는 타이어들로 그렇고 또 만들어 가정 움직이지 않으니까 또 이제 중독에서 기름이 나오잖아요. 또 기름을 원유를 실다가 또 정의 공장에서 정유를 해 가지고 또 주유소를 통해서 또 자꾸 오르기만 하는 그런 그 휘발류라든가 경유를 또 넣어야 되고 또 우리가이 절에 들어오는데 거기 맨발로 올 수 있습니까? 신발. 신발은 또 누가 만듭니까? 그 가죽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등등 이와 같이 우리 일상 생활을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어떤 어 자신으로 생각할 때 내 한 몸이 아니라니까요. 온 세상에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많은 인연들이 여러 가지 조건과 상황들이 우리 만남을 이룬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뭐 잘못 생각한다든가 함부로 행동하게 되면은 내 일신에 그치지 않고 세계 많은 곳곳에 그런 영향을 끼치게 돼요. 한 사람이 잘 살면은 그런 잘 사는 기운이 이웃에게 좋은 긍정적으로 뻗칩니다. 한 사람이 잘못 살면은 그 그 사람을 위해서 많은 그런 그 온 세상이 지금 거들고 있는데 그 사람이 잘못 살면은 또 그 여러 곳에 나쁜 기운을 퍼뜨리게 돼요. 이게이 세상의 구조예요.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때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홀로 독립된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얘가 없어요.

에 지난 90일 겨울 안거 지난 90일 안거 기간에 생긴 일 중에서 가장 놀랍고 두려웠던 일은 잘 아시다시피 지진 회일입니다. 보통 지진이라든가 해일 소식은 들었지만 한 순간에 그렇게 20만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그런 그 끔찍한 재난은 일찍이 우리가 상상을 못 했습니다. 이건 전치구 재난이에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뭐이 없고 뭐 어째서 계획이 불성이 없다는 거 이런 화두는 성에 차지 않아요. 진짜 왜 이런 끔찍한 재난이 이런 이게 화두가 되지 않을 수 없어요. 모든 인류에게. 어 최근에 들으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의 희생이 적었대요.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이 가긴 했는데 적었대요. 그것은 여행사적이라네요.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끔찍한 재난입니다. 이와 같은 재난이 어째서 일어나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우리 화두가 돼야 돼요. 또 이런 일이 한 번으로도 그치지 않고 앞으로 이제 그 전문가들 말하면은 언제 어디서 다시 또 이보다 더한 것이 일어날지 예치할 수 없다는 거예요.

지난 20세기를 대표한 한 영적인 지도자는 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뭐 아메리카 인디안이에요. 영적인 지도자.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물질적인 추구만 너무 집이 물질적인 추구이만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다. 현대사의 모든 문제는 사람들이 물질적인 추구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건 탐욕이에요.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을 두고 한 얘기예요. 탐욕이란 무언가 자기 목세 만족하지 않고 남의 목세까지도 가로치는 겁니다. 이게 탐욕. 지나친 욕심을 탐욕이라 그래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탐욕이라니까요. 물질적인 추구에 너무 지금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들 일상 생활이 그렇습니다.

이 지구 자원은 물론 한정되 있습니다. 지금 인류가 필요로 한 필요로 한 범위 안에서는 모자르지 않아요. 근데 탐욕의 영어 사람들이 탐욕스럽게 부르면은 이건 지구 몇 개를 가지고도 이건 감당낼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들 자신은 만족할 줄을 모르잖아요. 만족할 줄을 모른다고.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하거나 고모할 줄을 모릅니다. 보다 크고 많은 것만을 많은 것만을 원해요. 그러기 때문에 늘 갈증 상태입니다. 마치 물 속에 있으면서도 목말 하는 그런 그 격이에요. 인간이 물질적인 추구만 너무 집착하다는 거예요.

어 다시 그 지도대의 말입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물질적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자신과 하나를 이루었다는가? 살아 있는이 세상에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이 나와 하나를 이루었다는 그런 그 사실을 자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자신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남의 형편도 배례할 줄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남을 아프게 하면은 내 자신도 아파요. 이웃을 기쁘피가 하면은 우리 집도 따라서 기뻐집니다. 이게 이제 매알이에요.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한 뿌리에서 커다란 생명체라는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이 가지입니다. 우리들은이 지구의 자식들이에요.

그 영적인 지도자는 이와 같이 충고합니다. 날로 늘어가는 전쟁과 폭력 그리고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자연 재해 등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것은 단 한 가지 길은 날로 늘어가는 전쟁과 폭력 그리고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자연 죄 등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보다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과 보다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과 과 정신적인 추구에 있다. 보다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과 정신적인 추구를 통해서 그런 재난으로부터 극복할 수 있다는 뭐 간단한 소리예요. 원래 진리는 이와 같이 간단 명료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은 덜 쓰고 덜 버리면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덜 쓰고 덜 버리면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지난 연말에 있었던 이와 같은 끔찍한 재난이 언제 어디서 또 일어날지은 예치가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 살아가는이 지구는 단순한 흙이나 돌덩어리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이런 사실을 우리가 늘 명심해야 됩니다. 지구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고 인간은 그 지체에 진하지 않아요. 또 한 그 인디안의 그 뭐 그런 천둥이라는 이런 영적인 사람은 또 이런 얘기를 합니다. 돼지는 지금 병들어 있다. 우리가 지금 기대고 있는이 돼지 지금에 병들이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대지를 잘못 대해 왔기 때문이다. 뭐지 않은 장례 큰 자연애가 닥칠 것이다. 폐지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크게 뒤흔들 것이다. 벌써 이게 수십년 전에 한 얘기예요. 1950년대이 한 소리입니다. 돼지는 지금 병들어 있다. 인간들이 돼지를 잘못해왔기 때문이다. 뭐지않는 미래에 큰 자연 제가 닥칠 것이다. 대지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크게 뒤힘들 것이다. 돼지를 못 살게 하니 물터를 물커터를 털어낼 거라는 거예요. 마치 그 이제 짐승들에도이나 물컷들이 있으면 털을 내듯이이 지구에 서식하고 있는 물것들이 하도 못해구니까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크게 뒤 흔들 거라는 거예요.

전체와 개체의 상관 관계를 명심해야 됩니다. 석가무리가 깨달은 가르침의 근무도이 전체와 개체 상관 관계예요. 뭐 연기법이라는게 바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뭐 불교의 기본적인 사상 아닙니까? 연기법. 그 나 혼자만 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억히고 설히고 아까도 허두에 얘기했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순간순간 살아나가는데 온 지구가 지금 다 협력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이제 복되게 복을지면 산다면 그 협력의 바람 협력이 아주 더 비신이납니다. 우리가 잘못 산다면은 복을 들면서 산다면은 뭐처럼 그 온 지구의 힘을 힘이 소멸되게 돼요. 이런 상관 관계 속에 산다는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잘 살고 못 사는 거 무슨 얼굴이 많고 수입이 많고 주위가 높고 흙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둘러 싸우고 있는 그 전체와 개체의 이런 상관을 통해서 우리가 잘 살 수도 있고 모 못 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오늘이 정을 대벌론 겨울 안 그 해제입니다. 해제란 맺은 것을 푼다는 이런 뜻이에요. 결제하는 거 맺는 거고 해제는 푸는 겁니다. 또한 맺친 것을 푸는 날이기도 해요. 맺은 것만 푸는 날이 아니고 우리가 마음에 어떤 맺친 것 맺친 것을 푸는 날이기도 합니다. 외친 것을 풀어야 홀가해져요. 얽힘에서 벗어나려면은 맺음과 맺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됩니다.

에 오늘 푸는 날 매칭을 푸는 날을 맞이해서 이렇게 한번 되돌아 보십시오. 내 마음에 뭔가 맺친 것이 있다면은이 푸는 날를 계기로 해서 다 풀어 버렸어요. 그래야 자유로워져요. 내가 부자여하고 내 마음이 상쾌하지 않는 것은 그런 그 안에 찌꺼기 어떤 삶의 찌꺼기 같은 거 맺친 것 이런 부스러이 있기 때문에 그런다니까요. 그걸 홀로 털어 버려야 돼요. 해가 바뀐다는 건 뭡니까? 묵은 해를 청산한다는 건 뭡니까? 묵은 업까지도 청산이 돼야 돼요. 그래야 새 업을 받아들이지. 선빵에 다니면서 아주 착실하게 정진한다는 한 불자가 화두 대신 수년 전에 누가 자기에게 서운하게 했다는 그런 어두운 생각에 만약 갇혀서 있다면은 그는 더 물을 것도 없이 불행한 사람이에요.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각자 살펴보세요. 우리가 이제 신앙생활 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마음의 어두운 구석을 지니고 있다는 거. 남에 대한 원망이라든가 서운한 생각이라든가 이런 걸 우리가 지니고 산다면은 우리들 스스로가 지금 불행한 삶이에요. 그럼 복받은 삶이 아닙니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물질적인 결핍이나 어떤 신체적인 계함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늪에 갇혀서 그 해날 줄 모르데 있어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인데 거기에 갇혀 가지고 해날 줄 모른다고 과거에 갇혀 있기 때문에 현재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것은 순간순간 바로 지금이 자리에서 이렇게 사는 건데 과거의 늪에 갇혀 가지고 해날 줄 모른다니까요. 그건 벗어나야 돼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 과거에 주제하지 마세요. 이런 뜻이라고. 왜냐면 우리가 사는 것은 과거에 살지 않습니다. 지금이 자리에서 너 언제 어디서나 지금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고 일단 지나가면 전생 사 가지고 다시 뇌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럼 불행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와 미래가 소멸이 되지. 현재가 없으면 미래가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마음에 맺친 것이 있다면은 오늘 푸나를 맞이해서 헐 풀어 보십시오. 그래야 꼽히고 세우는 화창한 새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래 이만 마치겠습니다. 예. 새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이제 부처님 오신 날이라 그러죠. 오신 날 지금 부처님만이 오신 날이 아니라 꽃도 오고 입도 오고 새들도 함께 오십니다.이 출생일이나 탄생이라고 하지 않고 오신날이라는데 불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보통 아무게 생일, 아무게 탄생일 뭐 그렇게 호칭하는데 그렇게 부르는데에 부처님 오시는 날이라고 오신 날이라고 이렇게 이름을 붙인다는 그 의미가 있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만난 인연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전혀 인도 낮도 모르든 생판 남길이 오늘이 있어서 이렇게 만난 겁니다.이 한 사람 그 삶의 영향력이라는 이런 겁니다. 오늘이 없었다면은 이런 절도 없었고 이런 자리도 마련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어 화창한 봄날 초연날 이런 모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럼 오신날이라고 하니 어디서 왔을까요? 부처님은 어디서 왔습니까? 흔히 이제 전설적인 이야기로는 도설천 도설에서 이제 뭐 도설천 내원궁에서 오셨다고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건 고대 인도 사람들이 생각에 착한 사람들이 태어나 기쁨을 누리는 곳 여기 도설이라고 봅니다.이 말은 다시에 지족이란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어 절에 가면 이제 산에 높은 곳에 도소람이라는 암자 이름이 들어 있어요. 다음자 도설함이 도설에서 온 말인데이 말을 다른 또 어 의혹을 하자면 의혹을 하자면은 뜻으로 옮기자면은 지조감이라 그럽니다. 도소함 도소함은 음으로서 이제 범에서 나온 음으로서 투시다 대봐으로서 옮겨놓은 거고 기조가면 뜻으로 옮기는 겁니다. 그럼 어떤 것이 가장 높은 경진인가? 만족할 줄로 아는 것. 지족. 되게 이제 지족감이나 도서함이 가장 높은데 있어요. 암자 높은데 있는데 어떤 것이 높은 것인가? 만족할 줄 아는 것. 지족. 만족할 줄 아는 것이 가장 높은 경제라는 이런 소식입니다.

여기에서 말한 어디서 왔는가는 어떤 장소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어디서 오느냐 할 때 뭐 집에서 옵니다. 뭐 사무실에서 옵니다. 어디 일터에서 옵니다. 어 교도에서도 방금 어 나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이제 어디에서 왔다는 장소를 얘기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선문답에서 말한 어디서 오느냐는 것은 그 출발한 장소가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이 어디서 오셨는지 또 꽃과 입들과 새들은 또 어디서 왔는지 곰곰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에 에 석가 열래 보통 석가 열래 열래 하지 않습니까? 열래란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에 도달한 사람.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란는 뜻입니다. 다른 표현을 하자면 수행을 완성한 사람. 뭐 깨달은 사람 이런 뜻이에요. 진리에 도달한 사 도달한 사람. 다른 하나는 진리에서 온 사람. 진리를 따라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보인 사람. 대성불교적인 표현으로 하자면은 중생을 구제하러 오신 사람. 이런 뜻입니다. 진리에 도달한 사람. 진리에서 온 사람.

이 사람에게는 별명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에게도 열 가지 그런 별명이 있습니다. 이걸 이제 열호 뭐 열래 10포라고 그러죠. 열에는 총이고 열 가지 별칭은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에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 열 가지예요. 이것은 부처님의 덕을 길에서 부른는 이름입니다. 응공. 응공이라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공양받을 자격이 있는 분. 어, 다른 표현으로 하지만 아라한이라 그래. 아라한 아라한 사람들부터 존경받고 공양받을 자격이 있는 분. 나한전을 다른 표현으로 하려면 응진전. 응전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건 어 응공에서 온 말입니다. 다음으로는 이제 정변지 바르게 온전하게 진리를 깨달은 분 또 이런 다른 표현으로 등 정각 정등각이라고 얘기합니다. 어 세 번째가 명행족 지혜와 행이 갖추어진 어른 또는 은행이 온전한 분 이런 뜻이에요. 영행족, 선서 잘 가는 사람 미혹의 세계를 잘 넘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분 어 다시 말하면 생사에서 벗어난 사람이라 이런 뜻입니다. 선서는 세관해. 세관과 출제한 일을 잘 아시는 분. 무상사.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 뭐 그 이상이 없는 분이란 뜻이에요. 무상사. 선비사자. 다음이 이제 조어장부. 중생을 잘 조복하여 해탈로 이끄는 분. 천인사, 천상과 인간의 스승, 불 깨달은 사람 뭐 혹은 눈 뜬 사람 세존, 수많은 덕을 갖추 세상에서 존경 존 경받는 분.

이 이 열 가지가 이제 열의 10호인데 위에서 열 가지 호칭은 앞에서도 얘기했다시피 부처님의 그 덕 덕을 나타낸 이름입니다. 부처님 자신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후세 사람들이 부처님의 덕을 길어서 열 가지 어 별칭으로서이 얘기합니다. 열라는 말은 총이에요. 우리가 한 세상 살아오면서 우리들 자신의 덕을 기리는 별명을 몇 개쯤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가령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 이런 말 흔히 하지 않습니까? 아주 착하지 착한 사람을 법 없이 살아갈 사람이라 그러거든. 뭐 우리 동네의 뭐 어 별이라든가 혹은 달리라든가 뭐 민족의 태양이라든가 이런 소리들 하지요. 또 우리 집안의 꽃 또 이제 부정적인 의미로서는 이제 놀부 같은 놈 또 구두세 살살이 뭐 능구렁이 뭐 이런 그 별칭도 있지 않습니까? 좋은 친구는 아닙니다. 그런 별명들이 다 있어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의해서 이웃에서 그렇게 저절로 불러 주는 겁니다. 무슨 관상적인가 장면가 불러놓 이름이 아니고 여러 입에서 자연반적으로 그렇게 불려진 것이 이름이 된 거예요.

이 다 다시 물어봅시다. 부처님은 어디서 오셨는가? 또 무엇는가? 어, 이런 물음을 남의 물음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각자 자기 자신의 일로 물어야 됩니다. 이게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 자신의 일이에요. 나는 어디서 왔는가? 무엇이 세상에 왔는가? 시시로 물어야 됩니다.이 물음 속에 부처님이 오신 뜻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에 자비심은 곧 열래다. 이런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흔히 우리가 많이 들었 듣습니다. 자비심은 곧 부채다. 열방경 이제 범행품에 열방경 범행품에 뭐 청정품 범행품에 이런 규제이 있습니다. 모든 보살과 열에는 자비심이 근본이다. 모든 보살과 열에는 자비심이 근본이다. 모살이 자비심을 기르면 끝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 누가 무엇이 온갖 선행의 근본이냐고 묻거든 자비심이라고 대답하라. 자비심은 진실에서 헛되지 않고 착한 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진실한 생각이 곧 잡비심이고 자비심은 곧 열래다. 이것은 어떤 제자의 물음에 부처님 자신이 이렇게 대답한 거예요. 열방경 범역풍에 나오는 법문입니다. 모든 보살과 열리는 자비심이 끈이다. 보살이 자비심을 기르면 끝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 누가 무엇이 온갖 선행의 근본이냐고 묻거든 자비심이라고 대답하라. 자비심은 진실에서 헛되지 않고 착한 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진실한 생각이 곧 자비심이고 자비심이 곧 열래다. 부처님이라든가 열애를 거창에 생각하지 말고 자비심이라는 거예요. 부처님이 어디서 오셨는지는 그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이 어디서 오셨는가 하는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도설천이 아니라 자비심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 그리고 무엇가는 그 자비심을 실현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절에 나오시면서 가끔 그 물으세요. 뭐 교회 가서도 물으시고 나는 어디서 왔는가? 또 무엇하러 왔는가? 이런 물음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그 초파이니까 절에 가서 불켜고 절하고 어 그치면은 별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불교를 가르쳐서 경제 종교 학자들은 구도의 종교라고 그래요. 구도 연결는 거예요. 물음을 통해서 잠든 자를 읽게 옵니다. 깨달음이란 뭡니까? 어느날 갑자기 새벽 별을 보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만이 깨달음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새롭게 알아차리는 거예요. 무명의 구름에서 벗어나 맑은 하늘을 스스로 체험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런 물음을 지녀야 됩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무엇 왔는가? 이런 물음을 지녀야 됩니다.

우리들 자신 신앙생활 하는 불자로서 자비심을 얼마만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자비심을 일상 생활에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우리들 자신이 몇 점짜리 불자인지 그 점수가 매겨집니다. 스님이 됐건 일반 신도가 됐건 불교의 귀한지가 오래 됐건 몇 안 됐건간에 그건 물을 필요가 없어요. 내가 부처님 제자로서 과연 자비심을 얼마만큼 지니고 있느냐 또 그 자비심을 일상 생활 이유되게 어떻게 내가 실천하고 있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각자 정검호에 보십시오. 나는 몇 점짜리 불자인가? 스스로 점검을 해 보세요.

이 어지러운 세상,이 살벌한 세상,이 막된 세상 그 어떤 힘으로도 구할 길이 없습니다. 자비신만이 사랑만이 우리들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이웃을 구하고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들이 한길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의해서 자비에 의해서 구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스스로도 구원받고 이웃도 구원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핵무기로서 세상을 제압하고 구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핵보의 국가들의 그 오만이 지구 생명체를 위협하고 있는 이런 그 오만은 전체를 내다보지 못해 들었습니다. 핵무이 가지고 뻐이는 것은 하나님 무지한 소행이에요. 무명이 무지가 생사 윤회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하직한 뒤 한생에서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끔 저도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살만큼 살다가이 세상을 하지할 때 내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본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은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가 됩니다. 본인 스스로가 평가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남은 사람들에 대해서 평가가 됩니다. 그가 살아 생전 얼마나 많이 이웃에게 또는 세상의 자비심을 베풀었는가 선행을 했는가 덕형을 쌓는가에 의해서 평가가 돼요. 뭐 관의 못을 박아 봐야 뭐 안다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들은이 풍진의 세상을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착하게 살면은 이웃에게 큰 덕을 나눕니다. 내 자신이 자기가 살지 못할 때는 이웃에게 근심 걱정 피해를 끼쳐요.이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세요. 남을 의식하지고 처마다 자기밖에 모른다고요. 자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세상이 이게 시끄럽습니다. 자기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자기밖에 몰라도 상관이 없는데 함께 어울려 살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방을 폐리해야 돼요. 가정이건 사회건 국가건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을 베리해야 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세상은 바람직한 세상이 아닙니다. 결국 한 생에서 무엇이 남습니까?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어떤 덕을 베풀렸는지 어떤 선행을 했는지 이것만이 자산으로서 남습니다. 그밖에는 다 허무한 겁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자비심이 곧 열리란 말을 거듭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자신은 어디서 왔는지 무엇하러이 세상에 왔는지 거듭거듭 물을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물음을 지니고 있으면 결코 헛된 길을 밟지 않습니다.

에 부처님 오신 날 두루 복받으십시오.

에 에 7세기이 대성불교의이 큰 스승인 시안티데바라는 분이 있습니다. 시안티데바 뭐 인도분인데이 한물은 적천이 고요적자 하늘천자 적천이라 그럽니다.이 티데바 어 스님의 그 법문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또한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형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이익에 헌신한다. 그대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어 여기서 지적한 남이라는 것은 전혀 어 나하고 상관이 없는 타인이 아니라 또 다른 내 자신입니다. 보다 큰 어 자기 자신이에요.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이익에 남을 남의 이익에 헌신한다. 그대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에 그는 어떻게 보살행을 할 것인가를 두고 입보리 행론이라는 그런 그 저수를 남겼습니다. 입보리 행론. 원래 그 산디데바 이분은 어 남인도 남쪽 인도 남인도 한 왕국의 그 왕자였습니다. 어느 날 꿈에 문수보살을 챙겨 돼요. 그 문수보살로부터 왕의 자리는 지옥과 같다. 왕의 자리는 지옥과 같다는 이런 말을 듣고 왕이 계승에 회의를 느낍니다. 어 마침내 왕위를에 계승하게 된 될 전날 밤 왕궁을 몰래 빠져나와서 어 나란다사에 가서 어 출거하게 돼요. 그 인도 그 불교 역사를 보면은 뭐 부처님을 비롯해서 왕자들이 가끔 그렇게 이제 어 왕의 계승권을 버리고 출하는 그런 사례가 들어 있는데이 티데바의 경우도 어 마찬가지입니다.

이 입보리 행론에 보면은이 보리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마음 즉 발보리심이에요. 보리심을 일으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버리심을 실천하는 마음이다. 하나는 발 버리심이고 다른 하나는 행 버리심입니다. 버리심이라고 할 때 자비심이죠. 말하잖아. 자비심 막연한 어 막연이 그제 자비심이 아니라 하나는 발보리심 하나는 버리심을 일으키는 거고 하나는 그 버리심을 행하는 거라는 겁니다.

5월 뭐 계좌 여왕이 그죠? 이달 들어서 길상 사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연급서 뭐 이런 큰 집회가 열립니다. 오은 그 결제 하 결제날들이라서이 올 사람만 뜨기들은 오지 않고 올 사람들만 이제 오는 그런 날입니다.이 절의 그 전속 배우인 저도 그때마다 키를 해요. 지겹지 않으세요? 오늘마다 1일까지 뭐 연속궁도 아닌데 3회 연속에서 계속해서 출연을 한다니까 오늘 아침 나오면서 이게 무슨 짓이지? 뭐 중놀릇이 이런 건가? 뭐 이런 그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이 절이 절이 일이 많아요. 크고 작은 절들이 일이 많다고 뭐 일을 벌려야지 절이 되는 모양인지 알 수 없지만은 조용히 좀 어 있고 싶은데 가만히 있도록 놔두지 않잖아요. 이게 사바세기 구조입니다.

이 이 기상사 같은 경우는 어 큰 생사를 실마다 그 보연의 보살님들과 간음의 보살님들 또 거사인데이 거사님들이이 수가 많습니다. 그중에도 후원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보살님들의 노고가 너무 큽니다. 흔히 그 생사 대사를 말하는데 그보다 저 절실하고 현실적인 문제는 식사 대사예요. 먹는게 큽니다. 큰 일이에요. 식사 대사가 곧 생사 대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저도 혼자 사면서 혼자 살면서 제일 그 머리 먹고 큰 일이 먹는 일이에요. 이게 적은 일이 아니라니까요. 뭐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식구들을 위해서, 대중들을 위해서 수고를 해야 돼요. 아무도 없이. 이걸 어떤 그 어 뭐 신학자들은 그림자 노동이라 그래요. 그림자 노동. 뒤에서 그림자처럼 묵묵히 일하는 그런 노동이라는 거예요.

이 말 없이 실하는 내색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 살아 있는 보살의 실체를 어 대한듯한 그런 느낌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입으로만 말로만 뭐 보살이 어떻고 부처가 어떻고 떠 버리지만 실제 후월에서 그렇게 많은 대중들의 음식을 준비하는 분들은 묵묵히 스스로가 보살림을 그렇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종교가 무엇인지 불교의 본질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뭐 잘 아시다시피 종교의 본질은 공한 이론에 결코 있지 않습니다. 무슨 팔만 대장기건 조사 의로건 다 공한 이론이 불과합니다. 내가 그 소리가 그 소리예요. 불교는 발 보리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발 보리심으로부터 출발해서 행 버리심으로 보리심으로 회양해요. 개체에서 출발해서 전체 이르는 길입니다. 배움의 과정을 세 가지로 나누는데 문사들을 문자 생각 사자 닭을 숫자 어떤 가르침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생각하면서 몸소 그렇게 실천하는 것 몸소 그렇게 닦아가는 것이 배움의 과정이에요. 금이 곧 그러 실천이 곧 행보리심 보리심을 행하는 겁니다. 다끌 수자 행할 행자 수행이라는 건 뭡니까? 한마디로 해서 보살 행위예요.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제 수행이고 보살행위입니다. 한마디로 불교의 수행은 행버리심이고 바로 이것이 보살행입 보살 행위입니다. 행의 궁극적인 종점이 곧 깨달음이에요. 그래서 신해행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믿고 또 이해하고 그렇게 행하고 그 행의 결과가 깨달음에 이른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깨닫고 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완성이 곧 깨달음임을 명심해야 됩니다. 깨닫고 나서 뭐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완성이 곧 깨달음입니다. 그러니까 행속에 이미 깨달음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과일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에 뭐 상징적인 이야기지만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보십시오. 보살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보면은 사람 몸만 받는게 아니 짐승 몸을 받고 뭐 여러 가지 윤회를 하면서 이웃을 위해서 중생계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는가 하는 보살행의 이야기들이에요. 뭐 과거 뭐 인행시 요즘은 그런 그 문서들을 보기가 어려운데 50년 전희들이 처음 절에 들어왔을 때 절에서 놔도는 책이 팔상 혹은 십지 인행 팔상과 이제 십지 인행 녹이에요. 이것은 무슨 소린가 하면은 부처님의 전생이 전생에 어떤 보살을 했든가 보심을 어떻게 행했든가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그런 내용들이 내용들을 이루어졌습니다. 처음 절에 들어온 사람들은 믿기지 않아요. 그 수숫자도 그렇고 또 너무나 어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이야기지죠. 깨닫고 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결과가 깨달음에 이른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부처님의 일생을 어 팔상 여덟 가지로 나누는 그런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모셔놓은 데를 팔상전이라 그래요. 그래 부처님의에 일생을 여덟 그림으로 이제 그려놓 거예요. 전통적으로 이제 부처님의 생애를 얘기할 때 8상으로 나눕니다. 근데 가장 중요한 사건인 성도상이 없다고. 부처님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성도상이 없어요. 뭐 잘 나아시다시피 첫째에 도설 내일상 뭐 도설에서 이제 흰키를 타고 이제 엄마 태몽에 들어가잖아요. 도설의 이상 미람강 강생사 룸비니에서 이제 탄생하죠. 4월 초파일 또 생로병사 유라는 사은 육관상에 있고 다음이 이제에 유성 출가 어 왕궁을 넘어서 출가한 상입니다. 그다음에 설산 수도상이에요. 설 수도상 다음이 수화마상 보리수활에서 이제 어 여러이 악마들을 한곡받는 그런 그 수행상이죠. 수화 항마상 다음에 반드시 성도상이 나와야 되는데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할때 성도상이 없어요. 바로 수화 항마상 다음이 녹건 종보상 노양원에서 설법하는 것 중생을 교하는 그 일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열반 뭐 쌍님 열반상이 나오지 않습니까? 어째서 가장 중요한 그 사건이 성도상에 빠졌을까? 이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행과 그 항마소 설산소상 혹은 뭐 수학마상 수행과 그 항마 속에 이미 깨달음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로 성도상을 넣을 필요가 없는 거죠. 왜냐하면 본래 성불이기 때문에 본래 성불인데 왜 닦는가? 세삼스럽게 닦지 않은 오염되기 때문에 흔히들 내가 아직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남을 제도할 수 있는가 이런 소리를 선가해서 흔히 합니다. 내가 아직 눈을 뜨지 못했는데 어떻게 남을 눈가 이런 가설에 속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영원히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기심이기 때문에 자기만을 생각이기 때문에 지장보살의 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다 건진 다음에 내가 성불하겠다. 이런 원을 세웠지요. 한 중생이라도 고통받는 중생 있는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이런 서원이에요. 지장보살는 그와 같은 선원 안에 이미 깨달음이 씨앗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장보살 같은 분을 비증보살 비증보살 징 징하이 징하지 않는 보살 성부를 원하지 않는 보살이라고 해서 비중보살이라고 그래요.

종교학자들은 불교를 뭐 깨달음의 종교라고 얘기합니다. 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가? 어느 날 갑자기 옵니까? 힘이 없는 행의 축적이 마침내 눈을 뜨게 하는 겁니다. 이건 꽃이 피어난 소식과 같아요. 꽃이 어느날 갑자기 피지 않습니다. 그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 그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 안으로 꽃을 이루기 위해서 무한한 노력들을 하지 않습니까? 꽃망울이 맺쳤다가도 한참 있다가 핀다고 갑자기 피는게 아닙니다. 한숨 꽃이 피기까지는 그와 같이 무한한 인구의 노력이 따릅니다. 한 인간이 형성되기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아침에 갑자기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우는 무한한 정진이 필요한 거죠. 또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본래 성불 본래 다 갖추어진 거예요. 그건 왜 세삼스럽게 갖추기서 노력하는가? 닥지 않으면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닦지 않으면 드러나잖아요. 어 불교 이제 수행 차례를 흔히 신해 행정이라 그럽니다. 믿고 이해하고 행하고 또 증한다. 여기서 행증은 행의 완성. 물론 완성이란 있을 수 없는 건데 충생계가 다 해야 완성이 있을 수 있지 한 중생으로 있는 하나는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이상이지 행의 구경이 곧 깨다림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소린가 하면 수행의 끝이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다시 처음 얘기던 티데바의 법문을 같이이 암송해 보시. 어 저를 따라서 한번 하십시오. 소리 내서.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런 무슨 소용이 >>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이게 고 >>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이익에 헌신한다. >> 지혜로운 사람은 나의 이익에 헌신한다. >> 스스로 그 차이를 봐라. >>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에 내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인지 혹은 지혜로운 사람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그런 소식입니다. 어 이번 여름 안거 기간에 어떤 내가 어떤 보살행을 할 것인지 각자 오늘이 자리에서 원들을 세우십시오. 어떤 목표를 설정해야 돼요. 크고 작은간에 사소한 가정적인 일이건 대사회적인 일이건 혹은 이웃을 위한 일이건 오늘이 자리에서 결제날 안 그거 결제날 각자 그 원을 세우세요. 내가이 석달 여름 석달 동안 어 어떤에 보리행을 할 것인가 어떻게 보리심을 행할 것인가 원들을 각자 세우십시오. 자기 자신이 생에서 두고 두고 기억할 만한 그런 여름이 여름을 스스로 우리가 만들어 가야 됩니다. 그런 좋은 여름이 되기를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

더이속에 잘들 지내셨습니까?

네.

왜 더가 오지요? 어 그래요.이 더위도 이거 한 때입니다.이 비 계이고 나면은이 선해질 거예요. 이런 더위도 우리가 지금 살아 있기 때문에 느껴요. 우리가 살아 있지 않는다면은 이런 더를 혹은 추위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어 따라서 이런 더이라는 것은이 계절적인 변화라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에게 베푸는 우주가 우주의 일종의 선물이라고 우주의 어떤 은혜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날씨가 더워야 벼가 잘라요. 변농사가 됩니다. 고원 다해야 변농사가 되지 고원 다하지 않고는 우리가 쌀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도 다 더울만큼 더웠어요. 물론 이제 지구 원나 뭐 이런 것 때문에 요즘은 더욱 그런게 심해지 심해지고 있지만 옛날에도 덜만큼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제이 뭐 신문 방송 뭐 신자들이 돼 가지고 거기서 오늘 뭐 불쾌수가 얼마다. 또 오저 금년대에서 가장 무슨 시원한 날이다. 뭐 이런 보도를 하기 때문에 미리 미리 우리가 이제 더위를 앞당께서 초대하게 돼요. 그래 더위를 타지요.

어 옛날에 그 스님들 법문을 보면은 더위를 피하려면은 더위 자체가 되래요. 추위를 피하려면은 추위 자체가 되래요. 이런 소리는 무슨 소린가 하면은 우리가 더고 추고 느끼는 것은 한가한 사람들이에요. 일에 밥아서 열중한 사람들은 더을 모릅니다. 추위를 모릅니다. 모든 것은 한 때입니다.이 머지 않아서 선들선들이 가을바람이 또 부어옵니다. 산내는 요즘 그 마타리꽃 모란 좁사 같은 그 마타리 꽃이 피기 시작해요. 마타리 꽃이 이제 피기 시작하면은 어김없이이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어옵니다.

오늘이 이제 여름 안 그 해제 날입니다. 어 지난 90일 동안에 안 거를 어떻게 보내 왔는지 각자 한번 살펴보십시오. 내가 90일 동안 아무로서 아무게 엄마로서 혹은 무슨 절에다니는 불자로서 어떤 업을 익히면서 살아왔는지 한번 점검해 보세요. 스스로 점수를 내게 봐 보여야 됩니다. 내가 지난 90일 거 몇 점짜리에 수행을 했는가 스스로 점수를 먹어요. 법의 나이를 보태를 만한 그런 그 정진을 했는지 아닌지도 한번 살펴야 됩니다. 그 여름 안을 마치게 되면은 스님들 이제 법납 법의 나이에요. 육신의 나이가 아니고 법의 나이입니다. 법의 나이를 법의 나이가 하나씩 쌓이게 돼요. 그것은 스님들만이 아니고 정진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나이 말고 내가 진짜 아 불자로서 수행자로서 법의 나이가 얼마만큼 축적됐는지 한번 되돌아봐야 됩니다.

이 당대 때 스님으로 운문서사는 분이 운문서 아주 큰 스님입니다. 음문선사 어 9세기 후반에서부터 10세기 초반까지 살다 가신 분인데 뭐 이분이 운문 광록이라

해서 어룩도 전해지고 어 많은 영향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그런 큰 스이에요. 이분이 이제 오늘 같은 그런 보름날 법회에서 이렇게에 말씀합니다.

"오늘 이전의 일은 더 묻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럼 오늘 이후에 오늘 이후 일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보라는 겁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사는 그만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그 물음이에요.

대중에서 아무 말이 없자 스님 자신이 말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니라."

"날마다 좋은 날이라. 1일시 호일. 날마다 좋은 날." 듣기 좋은 소리죠. 이 험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좋은 날이란 귀합니다. 또 좋은 날이 우리들을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그 좋은 날을 만들어 가야 돼요.

혹시 언찮은 일이 있더라도 그 나름에 까닭이 다 있을 거예요. 그 나름에 다 의미가 있다고. "왜 우리 집안에 내 신변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걸 돌이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면 그만한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그 이유를 알게 되면은 한 생각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언찮은 날이 언찮지 않는 날로 바뀔 수 있어요.

내 인생의 의미를 보다 알차게 하기 위해서 "이런 일이 내게 닥쳤구나." 이렇게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 화낼 일이 없습니다. 어,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이런 일도 겪는다고 생각을 한다면은 역겨울 것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상사를 이렇게 한 생각 돌이켜서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면은 언찮은 날도 좋은 날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좋은 날이 어디 있어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스스로가 순간순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좋은 날을 만들어 가야 됩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벗어나서 이제 표를 내지 않습니까? 표 받는 아가씨들이 가끔 "좋은 하루 되세요." 이런 인사를 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사람들은 하루에도 이제 수없이 그렇게 전해지겠지만 듣는 쪽에선 참 고마운 말이에요. 좋은 하루 되라는 거예요. 물론 이런 표현은 이제 서양에서 "Have a nice day." 뭐 이런 것이 이제 우리 말을 옮겨져서 그렇게 됐겠지만 어떻게 됐건간에 좋은 인사예요. 좋은 하루 되라는 거예요.

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중에서 텐트 아래 또 법당에 앉아서 이렇게 지금 현재 이렇게 살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은 우리에게 가난함도 부자도 사랑도 미움도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많고 적은 것에 대한 근심 걱정도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만은 우리에게 아무 걱정심이 없잖아요. 지금 우리는 이 순간 이렇게 살고 있다니까요. 아무 분별 없이 아무 걱정 근심 없이 빗소리의 길을 기울이면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돼요. 우리 생사라는 게 뭡니까? 호흡이에요. 숨을 한번 내쉬다 들이마시지 못하면 그냥 굳어지잖아요. 순간순간 우리가 숨을 쉬면서 산다는 게 아주 그 귀중한 일이에요. 무심히 지나치고 말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일찍이 우리와 같이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은 이 숨을 제대로 못 쉬어서 우리하고 다른 세상에 지금 살고 있잖아요. 순간순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걱정임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그 순간보다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해서 또는 아직 오지 않는 이 다음에 대해서 벌써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아무 걱정심이 없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언제 어디서나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알차게 살 수 있어야 됩니다.

좌선은 선방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좌선은 모든 불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예요. 부처님의 앉아 있는 모습이에요. 또 모든 불자들의 기본적인 수행입니다. 자세라는 게 이와 같은 좌선은 세삼스럽게 깨닫기 위한 수행이 아닙니다. 세삼스럽게 깨닫기 위한 수행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커다란 기쁨의 법문이에요. 커다란 기쁨의 본문이라고. 아무 잠념 없이 이렇게 부처님처럼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자체가 커다란 기쁨의 법문이라니까요. 기쁨의 법문이에요. 때 묻지 않는 청정 법신의 모습이에요.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좌선을 하는 것은 세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 좌선하는 것은 아닙니다. 좌선 그 자체가 커다란 기쁨의 법문이에요. 기쁨의 법문이에요. 그럼 왜 여기서 정진하려고 하는가? 세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을 본래의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좌선합니다. 수행을 합니다. 닦지 않고는 오염되기 때문에 나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향상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은 퇴보합니다. 물들어요. 오염됩니다. 세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 본래의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정진하는 겁니다.

지난 제 경험에 의하면은 뭐 적분이 아니겠죠. 가장 보람 있고 즐거웠던 시간을 들려면은 조속으로 아침 저녁으로 개울소리에 길을 기울이면서 묵묵히 앉아 있던 그 시간이에요. 책 보고 무슨 밖에 나가서 일하고 하는 시간은 겉단이에요. 곁다리에요.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뭐 개울 가니까 개울소리에 길을 맡기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 그때가 진짜 기뻐요. 이것은 선열 위식 선의 기쁨으로서 이제 밥을 삼으라는 거예요. 선열식이에요.

불자들은 그런 수행을 꼭 안거 기간만이 아니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건 기본적인 불자의 자세예요. 그런 자기 충전을 통해서 이 험난한 세상을 무난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자기 충전의 시간이 없으면은 늘 중생 노름 여기에 팔리고 저기에 휩쓸리고 갈팡질팡하게 돼요. 자기 충전의 시간은 곧 자기 중심의 시간이에요.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을 될 수 있으면 많이 가질수록 좋습니다.

노후 대책을 세우셨어요. 노후 대책. 신문을 보면은 뭐 몇 억이 있어야 뭐 노후 대책 어 무슨 뭐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 뭐 이런 소리도 하거든요. 이런 숫자에 속지 마세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데 무슨 노후 대책이야? 그때까지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면 나와도 해요. 살아 있는 인생은 숫자 노름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인생은 숫자 노름이 아니에요. 일 없는 사람들이 돈 많은 사람들이 뭐 노후 대책 몇십억 가지고 어디 가서 어쩌고 뭐 이런 소리 하는데 그런데 속지 마세요. 그런 돈도 없지만은 그 사회 현상을 보면 그런 맹점들이 많아요. 그 자기 중심이 없는 사람들, 자기 탐구 없는 사람들 그런데 팔려서 살잖아요. 아이고 나는 몇억가 아니라 뭐 몇천만도 없는데 이거 어떻게 노후를 지내냐 그래서 밤잠들을 못 자고 그러잖아요. 그 순간을 살 줄 안다면은 많이 많은 많은 돈이 없어도 노후를 제대로 보낼 수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이런 망상에서 벗어나야 돼요. 돈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근데 우리는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그렇게 잘못 생각들 하지 않습니까? 그럼 돈 많은 사람 안 죽어야 되는데 돈 많은 사람도 죽잖아요.

요즘 세상에서는 입만 열면 없이 하나같이 경제 경제 경제 타령합니다. 뭐 정치꾼들만이 아니고 기업 소시민 할 것 없이 다 이제 경제 타령하지 않아요.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데 경제적인 문제는 필수적입니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럼 경제가 다인가? 가진 것만큼 우리는 행복한가? 스스로 물어보세요. 10년, 20년 전에 비해서 우린 가진 것이 훨씬 많아요. 소득도 많고 건강 상태도 좋고 그만큼 그런 마음의 안정이라든가 평안한가 이 말이에요.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더 행복할까요? 행복의 문제는 이 소유하고 그렇게 밀착되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우리보다 훨씬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물질적으로는 우리보다 가난할지라도 우리보다 훨씬 더 밝고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 경제 경제 타령 하니까 모두가 이제 뭐 중동 신용을 하고 거기 움츠어들 보는데 그나저서 벗어나야 됩니다. 늘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은 거기서 헤어날 길이 없어요. 우리가 10년 20년 전 연탄 되고 쌀 몇 대박까지 가지고 고맙게 생각하던 시절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많이 빠졌지만은 그때만큼 그렇게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행복해 할 줄도 모르고 만족할 줄도 모릅니다.

뭐 여행해 본 사람들 알겠지만 저기 히말라야 근처 네팔 같은 데 산동네가 보면은 진짜 뭐 우리보다 우리하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너무 가난하게 살아요. 뭐 네팔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그러지. 그런데 그 사람들 눈빛 보면 눈이 그렇게 맑더라고. 그렇게 친절하고 그렇게 밝아요. 우리보다 훨씬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활기차게 건강하게 밝게 살아요. 우리가 참으로 걱정해야 할 일은 경제보다는 날로 황폐되어 가는 인간성이에요. 진짜 우리가 걱정해야 될 것은 경제 수치 이런 것이 아니라 날로 그 형편 없어지는 아주 황폐해 가는 인간성이라니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지 않아요. 걸핏하면 죽이고 돈 몇 푼에 그냥 남을 죽이고도 태연하게 생각하고 갈수록 이 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경제보다도 황폐되어 가는 인간성이에요. 내 자신의 문제예요. 우리들 자신의 문제라니까요. 황폐된 인간들에게는 많이 가질수록 더 해롭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환경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모자라고 아쉬운 것을 채우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길 줄도 알아야 돼요. 우리가 즐긴다는 것 많은 것만 가지고 즐기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좋더라고 사소한 것 가지고도 얼마든지 우리가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 선인들의 안빈낙도 왜 정신이 있지 않습니까? 안빈낙도. 넉넉지 못한 생활 환경에서도 찌들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는 그런 인생관. 그게 우리 선인들이 지녔던 처세훈이에요.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는 훨씬 값어치 있습니다. 맑은 가난.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청빈. 이것은 넘치는 부보다도 훨씬 귀한 거예요. 고귀하고 값진 겁니다. 우리가 살 줄을 알면 적게 가지고도 얼마든지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살 줄 모르게 되면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무가치하게 인생을 낭비하게 돼요.

노후에 대한 불안을 미리 가을해서 쓰지 마십시오. 한가한 사님이 그런 거 걱정하는 거예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을 맑은 정신을 지니고 인생을 관조하면서 구경하듯이 그렇게 살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지혜롭고 초초한 노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야 현장경이라는 경이 야 현장이 중부 경전에 중부 중앙에 나오는 경전 가운데 하나인데 야 경장 야 현자경. 하룻밤 현자 야 현장에서 이렇게 이제 법문합니다.

"과거를 따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 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과거를 따라가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 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는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있을 때 그의 안색은 생기에 빛난다."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는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있을 때 그의 안색은 생기에 빛난다."

"분수 바깥 것을 탐내어 구하고 지나간 과거사를 슬퍼할 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꺾인 갈대처럼 시든다."

뭐 이런 그 법문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과거를 따라가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 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는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있을 때 그의 안색은 생기에 빛난다. 분수 바깥 것을 탐내지 탐내어 구하고 지나간 과거사를 슬퍼할 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꺾인 갈대처럼 시든다."

이루십시오. 예. 이만 마치겠습니다. 날씨도 추운데 무슨 행사 있다고 해서 이렇게 오시느라고 고생 많이 되셨겠습니다. 절에 무슨 일이 많아서 어 늘 뭐 모임이 있습니다. 올 한해도 저물어 갑니다. 저도 오늘 나오면서 지난 한 해를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 스스로 제 삶의 자취를 되돌아봤습니다. 과연 잘 산 한 해였는지 이 잘 못 산 한 해였는지 되돌아봤습니다.

우리가 이 사는 세상은 극락세계도 천당도 아닙니다. 이 사바 세계. 뭐 인도 말에서 온 말인데 사바 세계. 사바사바 해서 적당히 살아간다는 세상이 아니고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야 하는 그런 세상이란 뜻입니다. 참고 견디면서 어 살아가야 할 세상. 그래서 한문은 이제 가민 세계라고 그러는데.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라는 그런 말이 있어요. 실감납니다.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라요. 그러나 이런 말에 팔리지 마세요. 사실은 세월은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어 그 속에 생활 속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물이 현상이 가고 오고 그렇습니다. 어 뭐 철학자들 표현을 얘기하면은 시간 자체는 존재예요. 그저 있는 겁니다. 이것이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 속에 사는 우리들 자신이 오고 가고 변해 가는 겁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더럽다는 것은 시간 자체가 세월이 더럽는 게 아닙니다. 그 세월 속에서 사는 우리들 자신이에 예식할 수 없는 세상을 살기 때문에 늘 한결 같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더럽다는 거죠. 우리들을 한 생애 중에서 한 해가 이와 같이 빠져나갑니다. 해가 바뀌면은 어린 사람들은 한 살이 보태져요. 그러나 나이든 사람들은 그 한 살이 줄어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세월은 흘러가는 물과 같아서 한 번 지나가면은 되찾을 수가 없습니다.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우리가 잘 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선방에 가면은 그런 표지가 있습니다. "생사 사대 무상신속." 생사 사대 무상. 무상신속.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게 바로 생사예요. 나고 죽는 일. 한 순간도 재정신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종잡을 수 없고 이게 바로 생사입니다. 이와 같은 생사가 너무나 크다는 거예요. 우리 삶에서. 그 생사 속에서 무엇이 받쳐지고 있는가는 무상. 무상이 신속하다는 겁니다. 한 순간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거예요. 늘 변한다는 거예요. 어, 그런 상황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가 한 생각 잘못 먹으면은 엉뚱한 길로 비틀어 나가고 또 한 생각 바로 정신을 차리면은 바른 길에 들을 수 있습니다. 순간을 후회 없이 잘 살아야 돼요. 아무렇게나 살아서 안 됩니다. 왜냐하면은 한번 지나가 버린 세월은 다시 되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들은 그 이야기입니다. 택시를 타고 길상 가자고 하니까 그 기사님이 "아 그 부자절이요." 그러더라. 네. "아 그 부자절이요." 부자절이라는 이 말이 제게는 한동안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 저를 8년 전에 처음 만들 때는 어 교회하고 절이고 할 것 없이 요즘은 너무 흥청망청하기 때문에 너무 과소비하고 너무 넘치고 지나치기 때문에 좀 가난한 절이 됐으면 좋겠다는 이런 소망을 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밖에서 보기에 물론 일부겠지만은 이 부잣절이란 말이 들리는 걸 보고 어 상당히 저는 어 착잡했습니다.

8년 전, 8년 전에 이 요정은 대원각을 이제 절로 만들 때 신문 방송에서 얼마나 또 시끄럽게 떠들었습니까? 시가 뭐 몇억원짜리 몇십억짜리 뭐 땅이 몇천평이고 이래 가지고 그때 이 어떤 신문에서 이제 몇천 몇억이라는 이런 숫자가 나와 가지고 이제 부자 절로서 그렇게 인상이 됐던가 봐요. 한동안 여기저기서 저한테 편지가 많이 왔어요. 그 내용이 뭐냐면 도와달라는 거예요. 마치 이 절이 내 개인 소유인 것처럼 여기저서 도와달라고 편지가 와서 제가 아주 공경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지금 비심도 5, 6억 정도라고 5억 되던 판이거든.

부자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우리가 흔히 이제 다 부자 되고 싶어 하잖아요. 국어 사전에 보면은 살림이 넉넉한 사람 부자를 이제 정의하기를 "살림이 넉넉한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 이렇게 아주 간단 명료하게 나와요. 뭐 사전이란 게 다 그런 건데이 물론 우리가 이제 농사 짓고 살던 농경사에서 뭐 이루어진 그런 속담입니다.

이 부자라는 항목의 속담집을 보면은 이런 게 나옵니다. "부자가 더 무섭다." 부자가 더 무섭다. 이런 말 하거든. 요즘도 하고 있잖아요. 부자가 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부자가 너무 더 인색하다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색하다는 거예요.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것이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것이 있다. 그만치 축적된 것이 있기 때문에 요즘 말로 하자면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멀쩡하다. 뭐 그런 소리예요.

또 이제 "부자에게도 한이 있다." 부자라고 해서 아무 걱정심이 없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 나름에 그렇게 부자가 되기까지 모두 한들이 많이 맺혔겠죠. 어떤 의미에서는 가난을 면하기 위해서 그냥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그렇게 이제 긁어 모아 가지고 부자가 될 수도 있었죠.

또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부자가 하나면 새 동네가 망한다." 나이 속담에 깜짝 놀랐어요. 부자가 하나면은 동네 셋이 망한다는 거예요. 물론 이것은 이제 농경사에서 이루어진 속담입니다. 어 그러니까 여기서 옛날에 무슨 다른 것도 이제 대지주들 있지 않습니까? 지주들. 지주도 이제 이 아주 우리 뭐 그런 조선조 말기 또 일제 시대도 그런 뭐 나쁜 지주들이 있어 가지고 얼마나 많이 수탈 했습니까? 소작인들을. 뭐 큰 소리도 나오지만은 "부자가 하나면 새 동네가 망한다." 그 인근에서 다 이제 수탈을 당했다는 거예요.

이런 그 부자에 대한 속담을 제가 찾아보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이 오늘날 재벌과 옛날 부자는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이게 끝이 없어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경전에 보면 탐욕이 바로 생사 윤회의 근본이라는 거예요. 탐욕이라는 지나친 욕심. 분에 넘치는 욕심이에요. 자기 그릇보다도 더 많이 채우려고 하는 그런 욕구. 이게 없는 겁니다. 얼마만큼 만족할까? 만족할 줄을 몰라요. 이건 있는 사람뿐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을 몰라요.

그러면 우리가 가진 것만큼 행복한가? 행복은 물론 상관이 있겠지만 꼭 가진 것에 의해서만 행복이 추구되는 것 아닙니다. 행복은 결코 밖에서 오는 거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향기처럼 울어나는 거죠. 똑같은 여건 속에서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행복을 누리면서 살고 어떤 사람은 불만 속에서 사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가진 것만큼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모두 없이 다 부자가 되고 싶어요. 그건 아주 본능적인 소망이에요. 다 이제 여유 있게 잘 살고 싶다. 잘 살고 싶어요.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이제 뭐 그 길을 쓴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또 요즘 그 세계화라는 게 뭡니까? 뭐 미국이라든가 강대국에서 자기들이 온 그 세계를 시장화시키겠다는 이런 뜻에서 더 이제 부자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루어진 새로운 경제적인 침략이죠. 일종의 침략 전략이에요.

우리 사회에서도 있었고 뭐 세상에도 다 널리 알려진 일인데 졸부들. 졸부. 정당한 노력에 의해서 자기가 재화를 모으지 않고 갑작스럽게 어떤 투기를 한다든가 갑작스럽게 이제 부자가 된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갑작스런 부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자기 분수 바깥 것이기 때문에요. 자기 그릇을 세울 만한 것을 지녀야 되는데 자기 그릇은 컵밖에 안 되는데 큰 동이를 채우려고 하니까 넘치는 거죠. 갑작스런 부. 그것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자면 뭐 로또 복권이라는 거 있죠. 여러분들도 가끔 이제 사서 뭐 허탕 치고 했겠지만은 하루아침에 몇십억짜리 복권이 당첨된 사람이 있다고 하면은 아무개네. 다들 얼마나 부러워해요. 아이고 나도 가서 그때 좀 하나 살 걸. 하루아침에 복권 몇 장 샀는데 거기 몇십억이 당첨됐어요. 그러나 그 당사자는 그날부터 불행합니다. 그건 뻔한 일이에요. 그 당사자는 그날부터 불행해진다고. 그것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다 드러난 사실이에요. 그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됩니다. 단절돼요. 또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의미를 잃게 됩니다. 갑자기 많은 돈이 생기니까 지금까지 착실하게 빚을 갚으면서 차곡차곡 그 노력하면서 살아왔던 그런 삶의 질서의 교란이 생겨요. 삶의 의미를 잃게 돼요. 또 가까운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멀어집니다. 자녀들 온전히 믿겠어요. 이 많은 돈을 어떻게 간수하고 어떻게 쓸까 하고 자녀들 제대로 못 믿을 거예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횡재를 만나면 반드시 횡액을 당하게 돼요. 이게 인과관계예요. 횡재. 일종의 그 복권 당첨은 그 횡재예요. 불러 소득이니까. 횡재를 만나면 횡액을 당하기 쉽고 액운을 또 불러들이는 게 쉽단 말이에요. 물질은 그런 겁니다. 돈이라는 것은 혼자만 오는 게 아니에요. 꼭 거기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같이 따라와요.

오래 전에 이것도 제가 들은 이야기예요. 어떤 스님이 기도를 해 가지고 복권이 당첨됐다네. 그러니까 한 20년 복권 그때도 복권 있었는지 뭐 전라북도 어떤 절이에요. 복권이 당첨되니까 갑자기 이제 확실하게 뭐 기도도 하고 이런 스님이 당첨되니까 이거 어쩔 줄 몰라 가지고 거기서 이제 한 몸집 떼서 자기 은사 스님 차를 하나 사드렸어요. 그리고 자기도 이제 차를 하나 사고 그때부터 생각이 달라진 거예요. 돈이 갑자기 생기니까. 그래서 와 가지고 그 아래 동네 어떤 처녀하고 눈이 맞아 가지고 뭐 결혼까지 했다네. 그 후로 또 들은 이야기가 여기서 택시 기사 하고 있대요. 택시 기사. 난데없는 횡재면은 반드시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가난은 결코 미덕이 아닙니다. 우리가 맑은 가난을 내세운 것은 지나친 그 탐욕 자기 분수를 지키는 거 지나친 낭비 흥청망청에서 벗어나서 맑고 초초한 가질 만큼만 갖자는 뜻은 가난 청빈을 얘기하는 것이지 가난 자체는 결코 미덕이 아닙니다. 우리 잘 살아야 돼요. 할 수만 있으면 다 같이 부자로 살아야 됩니다. 근데 세상은 가진 사람보다도 안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이 훨씬 많아요. 또 구조적으로 가진 사람들 때문에 같이 가져야 될 사람들이 자기 몫도 빼앗기는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그런 부자인가? 가진 것이 많건 적건 덕을 닦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덕이란 뭡니까? 이웃에 대한 배려예요. 이웃과 나누어 가지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화는 원천적으로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닌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 사망 살다 죽을 때 내가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단지 어떤 인연에 의해서 내게 어떤 우주의 그런 죄와 선물이 내게 지금 잠시 맡겨지는 거예요. 그것을 바르게 관리할 줄 알면은 그 인연이 되고 오래 지속되고 그걸 바르게 그런 소식을 모르고 바르게 관리하지 못하고 흥청망청 탕진하게 되면은 곧 그건 회수예요. 검찰이라 경찰이 뭐 합니까?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 지금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럼 부조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무슨 물질이 생겼다고 할 때 이걸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라니까요. 단지 내게 맡겨진 거라고. 설사 내 어떤 정당 소득이라 하더라도 이건 내게 맡겨진 거예요. 본래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바르게 쓰면은 덕을 닦게 되는 거고 이것을 잘못 쓰게 되면은 복을 감하게 돼요. 가진 것이 많건 덕을 닦으면서 사람이 사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어려운 이웃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고 또한 부자입니다.

모든 것은 한 때예요. 무상하다는 말은 그 소리입니다. 모든 건 한 때예요. 늘 지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늘 부자라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 가난하다고 해서 계속 가난한 법은 없어요. 무상하다는 거, 변한다는 것은 어떤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그만 의지적인 노력, 상조적인 노력을 통해서 축적할 수도 있고 또 그냥 흥청망청 있던 것도 다 이제 하루아침에 날려 버릴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한 때예요.

우리가 이 살만큼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무엇이 남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남의 일이 아닙니다. 각자 우리 일이에요.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언젠가 이제 다 명이 다 하면 이제 호출 당하죠. 그때 무엇이 남아요? 집이 남습니까? 무슨 자식이 남습니까? 누가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건 내 것이 아니에요. 나와 상관이 없어요. 홀로 있는 자기 자신. 내게 무엇이 남는가? 그 많은 많은 것 지식이 됐건 또 무슨 재산이 됐건 또 뭐 그거밖에 다른 뭐 저하가 됐건 간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 무엇을 가져가는가? 평소에 지은 업. 이 업이라는 것은 나쁜 업이 아닙니다. 좋은 업도 되고 악업도 되고 그래요. 평소에 지은 업자처럼 그림자처럼 따라가요. 우리가 사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이 몸도 버리고 가잖아요. 그 무엇이 따라가는가? 내가 평소 하루하루 그리고 살면서 닦은 그 업. 그 선업이 됐건 불선업이 됐건 업이 그림자처럼 따라가요. 그래서 인도 사람들 표현을 하면 이 다음 생에 바로 그것이 이제 이 다음 생을 이룬다는 거예요.

뭐든지 갑작스럽게 생긴 게 아닙니다. 그렇게 차곡 쌓여서 되는 거예요. 과들이 뭐 세 살짜리가 네 살짜리가 이제 뭐 작곡을 하고 뭐 연주하고 한다는 것은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전생에 쌓은 그런 영향이 어떤 계획에 그렇게 싸게 트는 거예요. 비교적 여유로서 이제 여기 스님들이 높은 개념이 우들 그려 이 금생에 처음이 머리 깎고 절에 들어온 사람들 여기 정착이 안 됩니다. 한 2, 30명 있으면 다 이제 택시 운전사가 되 뭐 다 나가 버려요. 몇 생 몇 생이 길에서 이제 다닌 사람들은 죽어도 떠나지 않는다니까요. 업이 그런 거예요. 업이.

중 모집한다는 광고 보신 분 있습니까? 부처님 당시부터 중 모집한다는 거 없어요. 신학 대학에서는 신학생들을 모집합니다. 그래서 이제 사제도 만들고 목사도 만들고 그래요. 동대는 그건이 승리를 만드는 데가 아닙니다. 그 종단에 사는 일반 교육 기관이에요. 누구라 누가 오라고 하지도 않는데 제발로 때가 되면 걸어서 온다니까. 한 생각 내 가지고 그것도 한 생각 내 일으키게 되면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한 시간 바빠요. 한 시간 바쁘다고. 그게 무슨 소식이에요? 다 전생 익히는 소식입니다. 그건 수행자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익히 타시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루하루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행위를 하느냐, 어떤 말을 하느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곧 이 다음의 나를 형성한다니까요. 누가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가 순간순간 살면서 이 다음에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어요.

길상사를 일부에서 이제 부자절이라고 한다니 과연 부자절 소리를 들을 만한가 반성해야 됩니다. 여기 사는 스님들과 또 이제 여기 다니는 신도들이 함께 반성해야 합니다. 과연 길상사가 부자 부자절이라고 부를 만한 그런 절인가? 어려운 이웃들을 보살피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그리고 청정한 수행과 올바른 교화로서 많이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그런 보살이 될 때 그때 비로소 길상스러운 이름 그대로 길상스러운 부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이 부자가 되기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기를 저는 바랍니다. 잘 사십시오. 부자 부럽지 않게 잘 사십시오. 예.

좋은 날씨입니다. 그동안에 잘들 지내셨습니까? 네. 네. 대답들은 잘하는데 진짜 잘 지냈는지 잘못 지냈는지 스스로 이제 판단해야 됩니다. 이 날씨가 이렇게 화창하면은 우리 마음도 아주 화창해져요. 왜냐하면은 이 몸 자체가 우리들 자체가 이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 대자연의 상태에 따라서 그 작은 자연도 그렇게 공감합니다. 지금 온 천지간에 이 꽃이에요. 봄기운이 지금 사방에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이 이런 때 이제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꽃 멀미를 알아요. 이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서 어 봄을 이룹니다. 꽃이 없는 봄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꽃이 없는 봄이 온다고 할 때 그건 봄일 수가 없죠.

에 그런데 미래 우리 환경 학자들은 미래에 이 다음 세기에는 가서는 봄에 꽃을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거래요. 지금 이렇게 이제 지구가 환경이 훼손되고 있는 이런 상태로 계속 지속되면은 봄이 와도 어디서도 꽃을 볼 수 없는 그런 때가 올 겁니다. 꽃을 보면은 남녀노소 가릴 거 없이 카메라맨이건 카메라맨 아니건 다 좋아합니다. 꽃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 없어요. 만약 꽃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에 우리가 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에 이 꽃다운 그런 요소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세삼스럽게 이 삶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돼요. 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가 지금 오늘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기 때문에 이런 꽃의 아름다움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무엇인가 쫓기는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요. 모든 사람들이 꽃을 보고 다 아름다워 하는데 무엇인가 쫓기는 사람들은 꽃이 피는지 많은지 새잎이 돋아나는지 많은지 전혀 관심 밖입니다. 사람은 무엇에 쫓겨서 살아서 안 됩니다. 그것은 자주적인 삶이 아닙니다.

예. 밥이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늘 시간에 쫓기게 마련이에요. 뭐 출퇴근 시간 혹은 회의 시간 또 법에 나오느라고 서두는 그런 시간 또 누구를 만나는 시간 일어나야 할 시간 뭐 약속 시간 등등 거의 시간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럼 시간이라 뭡니까? 그것은 사람이 그어 놓은 금이에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금 같은 것입니다. 라인이에요. 물리적인 시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공동 생활에서는 그런 물리적인 시간은 필요합니다. 만약 제멋대로 주택을 하거나 제멋대로 시간을 지키지 않고 놀아한다면 큰 공동체에서 큰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분명히 필요하고 존재해야 됩니다.

그러나 심리적인 시간은 그 성질이 달라요. 물리적인 시간과 심리적인 시간 그 성질이 다릅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이 심리적인 시간에 의해서 부추김을 당겨요. 혼자 가만히 있는데 전혀 어떤 물리적인 시간에 상관없이 혼자 가만히 있는데 혼자 속으로 불안해했다가 두려워했다가 그런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시간을 감당 못 해서 그런 겁니다. 사람은 이 심리적인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이건 타율적이에요. 외부적인 겁니다. 어 심리적인 시간은 이 자주적이죠. 뭐 잘 아시다시피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있습니다. 시계가 시간을 만드는 건 결코 아닙니다.

흔히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이런 말 하지 않습니까? 뭐 그래서 세월이 뭐 약이겠죠.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죠. 그런 말 속지 마십시오. 시간 자체는 무슨 일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거기에는 이제 망각이 있을 뿐이에요. 모진 마음을 먹었다가도 세월이 지나가면 스스로 풀립니다. 망각이 되는 거예요.

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기 아프리카를 탐험한 유럽인들이 겪은 경험담이에요. 이 이야기는 회교 신비주의 수도자인 그 수피 우화에도 실려 있습니다. 한 탐험가가 밀림을 뚫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는 짐을 운반해 줄 세 사람의 원주민을 고용했어요. 많은 짐을 가지고 가야 되기 때문에 혼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또 길 안내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원주민 세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그 탐험가가 그들은 사흘 동안 충분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서둘러서 밀림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가기만 합니다. 이 사흘째 되던 날 짐꾼들은 자리에 주저앉아서 더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길을 잘 가다가 갑자기 짐꾼들이 주저앉아 가지고 움직이려고 하지 않으니까 이 탐험가가 잘 화를 내요. 뭐 세상 사람들 미개인들한테 화를 잘 내듯이 미개인이 아니라 원주민이에요. 원주민 문명에 오염되지 않는 원주민입니다.

탐험가는 화를 내면서 예정된 날짜 시간에 그 목적지까지 꼭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어서 가자고 아주 재촉을 해요. 그렇지만 원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옷박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지만 짐꾼들은 전혀 여정 여집부동이에요. 그래서 탐험가는 그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붙들고 그럼 이유를 한번 말해 보아라. 너희들이 이렇게 이제 잘 오다가 왜 이제 주저앉아 가지고 다시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 이유를 한번 말해 보라고 하니까 어 그가 한 말이에요.

"우리는 이곳까지 제대로 쉬지도 않고 너무 빨리 왔어요. 이제 우리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곳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렇게 이제 대답을 합니다. 쫓기듯이 사흘 동안서 계속 왔기 때문에 영혼이 분리된 거예요. 그래서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곳에 기다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들 탐험가가 이끄는 대로 허둥대면서 쫓기듯 길을 헤쳐 오느라고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지 않았던 겁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은 정신없이 쫓겨왔던 겁니다.

어 이 이야기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속도와 효율성만을 내세우다가 영혼을 상실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속도와 효율성만을 내세우다가 영혼을 상실해 버린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속도는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거나 뭐없이 서두를 때 또는 재촉을 당할 때 스트레스를 받아요. 또 너무 빨리 움직일 때 우리는 안정을 잃습니다. 정세가 불안정해진다고. 뭐 그런 경험들 다 있겠죠. 저도 가끔 겪습니다. 제한 속도 100km로 달려야 할 구간을 140km나 150km로 달리게 되면은 연료만 많이 소모된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정서를 이루게 돼요. 그 자기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서 들뜨게 된다고. 그리고 피로가 가중됩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겁니다. 그래서 번번하는 게 사고들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이 속도라는 그런 거예요. 속도와 효율성은 아주 냉혹한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재정신을 차리지 못해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이제 어떤 직장이든지 마감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뭐 신문 마감, 방송 마감 시간이라는 게 마감 시간이라는 게 아주 비인간적인 거예요. 원서 제출 마감 시간. 뭐 아우성 아우성이지 않습니까? 차분히 생각하면서 일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데 사람이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감성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차분히 생각하면서 행동할 그런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한데 계속 쫓기다 보면은 엉뚱한 대로 또 나갑니다.

아프리카 그 원주민들의 표현대로 모든 무슨 일에나 영혼이 따르지 않으면 불행해집니다. 밥이 서두르는 사람 재정신이 없잖아요. 뭐 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삽니다. 이 풍진 세상을 왜 우리가 삽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 한마디로 하자면은 불행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이 세상인데 카드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길러 준 어머니를 살해하는 이 막된 세상에서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이런 세상이에요. 어떤 한 집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개연성이 있는 그런 세상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안정감을 잃고 재정신을 잃고 밥이 쫓기면서 살기 때문에 온전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그런 여유가 없는 겁니다.

무엇보다 먼저 마음의 안정을 이루어야 된다. 기본적인 거예요. 마음의 안정이 없으면은 모든 것이 됩니다. 마음이 안정되어야 사람의 도리를 생각할 수 있고 주위의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같이 바라는 행복은 온갖 생각을 다 내려놓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데서 그 싹이 듭니다. 복잡한 생각, 미운 생각, 고운 생각 다 이제 부려놓고 그 무심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돼요. 그래야 그 안에서 행복의 싹이 듭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 다음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이 다음에 뭐 이것저것 다 일 해 마치고 어디 시골에 조용히 내려가서 집이나 한 채 지어 가지고 그때부터 이제 무슨 행복을 마련할 거라고 이런 설계들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 다음에 이룰 그런 목표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이 순간이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되돌아보세요. 한 순간 행복을 누렸던 그때는 한 순간이었어요.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있어요.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때가 우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늘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이 다음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언제 어디서건 바로 그 순간에 행복을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기회에 어떤 특정한 시간에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안 됩니다.

흔히들 원하던 것들을 얻는 것을 행복이라고 알고 있어요. 뭐 자동차를 가지고 싶은 사람들은 자동차 또 어떤 가구 또 어디 가서 또 이제 5월 달에 뭐 있다 그러니까 한 자리 하고 싶은 그런 권력 또 이제 자기 짝을 갖고 싶은 사람 이런 욕망을 이루면은 행복해 하고 이런 욕망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은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어 원하던

것을 막상 갖게 되면은 한동안은 흥타고 느대할지 모르지만은 뭐지 하나 시드리집니다. 다 그 우리가 겪은 일이에요. 뭐지나 그렇게 소중하던 것이 그 소중하던 물건이 뭐지나 휘드려진다니까요. 거기 있는지 많은지 쳐다도 안 보게 돼요.

그것은 모두 더덮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럽니다. 늘 변화하기 때문에 그래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늘 변할 수 있는 그런이 더덮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냐? 삶의 부수적인 것인지 번질일 수가 없어요. 번질은 표현할 수 없습니다. 부수적인 것은 상황에 따라서 늘 편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자동차라든가 무슨 가구라든가 어떤 권력이라든가 등등 이런 것들은 다 삶의 어떤 부수쟁입니다. 이게 본질이 본질이 아니에요. 부수적인 것과 번질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번질적인 것에는 우리가 가치를 부여해야 되지만은 부수적인 것은 그렇게 가치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요구하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지는 거예요. 행복을 우리가 요구하고 추구한다고 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선물이에요. 추구하거나 요구하게 되면은 행복은 우리를 비켜갑니다. 지금이 차나는 봄날에이 순간을 우리가 사람게 살 수 있다면이 안에 행복은 깃들이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무엇에 쫓기도 살아서 안 됩니다. 영혼히 미쳐 따라올 수 없도록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안정된 마음, 차분한 마음으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은미하면서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갖고야 합니다. 나무들만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저마다 자신의 기장을 마음껏 드러낸다면 그때 그곳에서 향기로운 그런 삶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력을 묶혀두지 말고 마음껏 발휘해서 세상에 조화를 이루야 됩니다. 행복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이 순간의 삶에 있다는 사실을 거듭 명심하기 바랍니다. 어이 눈부신 봄날 활짝 문려 꽃들한데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더 구체적으로 들으면서 오늘 하루이 자리에서 마음껏 행복을 누리십시오.

가을은 모든 것이 투명합니다. 햇살이 투명하고 공기가 투명하고 바람결, 물, 나무들 다 투명해요. 어 산에서 사는 저희들 같은 경우는 귀가 굉장히 밝아져요. 방 안에 앉아 있으면서도 어 낙엽이 구르는 소리 또 풀씨가 어이어서 터지는 소리 또 다람쥐들이 겨우 사례를 위해서 어 부지런히 뭐 열매를 물고 가는 이런 소리까지도 다 들려요. 가을은 이렇게이 투명한 계절입니다.

오늘 제가 이제 여기 나오면서 어 문득 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이 출발 지점에서 정점까지 많이 보이는 그런 길이라면 어떻게 될까? 강원데서 길상까지 아주 직선으로 전혀 어 거리킬게 없이 직선으로 빵이 뚫린 길이라면은 어떻게 될까? 뭐 이런 길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지만은 그런 길이 만약 있다면은 질려서 운전할 맛이 없을 거예요. 얼마나 무료하겠습니까? 졸리거나 사고 나기 마련입니다. 우리 그 서해한 고속도로에서 한동안 사우가 제일 많이 났다네. 그 제가 한번 어 목포까지 한번 그 길을가 봤는데 다른 고속도로에 비해서 직선이 많아요. 곡선이 별로 없더라고. 또 초기제 계통시는 시설들이 별로 갖춰지 않아서 굉장히 무료하고 그래서 그 길에서 사고가 많았대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앞나를 미리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 우리가 살아가는 겁니다.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앞나를 예측할 수 있다면은 빤히 바라볼 수 있다면은 살맛이 안 날 겁니다. 앞날을 흔히 알 수 있다면은 살맛이 안 나요. 모르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겁니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앞나를 헌히 알 수 있는 인생 사람이는 더 불안하고 마음이 쓰여서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여기 직선과 곡선의 어떤 상징이 있어요. 직선과 곡선의 상징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빚어 놓은 문명은 직선입니다. 그러나 벌레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곡선이에요. 나무들 보십시오. 나뭇가지들. 또 강물 흐르는 강물을 보십시오. 산맥을 보십시오. 해와 달을 보십시오. 다 곡선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만들어 집이라든가 또 그밖에 다른 구정류 같은 뭐 거의 직선입니다. 직선은 조급하고 냉혹하고 비정합니다. 그러나 곡선은 여유가 있고 인정이 있고 운치가 있어요. 이와 같은 곡선의 묘미에서 삶의 지혜를 터져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얘기하려고 하는 그 주제는 주로 곡선의 미움에 대해서 얘기할 겁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만을 위해서 그 과정을 소홀리한다면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 거예요. 흔히 우리가 차를 타고 어디로 간다고 할 때 어떤 집에 몇 시에 도착한다는 이런 그 예정을 가지고 가면서 많은 도중을 거치면서도 도중을 거의 관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시간 맞춰서 목적지까지 가려는 이런 그 의식 때문에 어 도중에 보이는 사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들이 없어요. 목표 지점보다는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와 같은 과정이 곧 우리들의 일상이고 순간순간의 삶이에요.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삶은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이 순간입니다. 바로 지금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됩니다. 순간순간의 쌓임이 세월을 이루고 한 생애를 이룹니다.

얼마 전에 이제 신문을 보니까 우리나라의 그 자살율 통계가 나왔어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해에 12,명이이 자살한대요. 특히 이제 2, 30대가 많답니다. 하루 평균 32권이에요. 교통 사고 사망자 23명보다 더 많습니다. 물론 자살하는 그 당사자에게는 죽을 만한 그런 이유가 있겠지요. 허락받은 세월을 그냥 반납하고 도중해서 뛰어내릴 만한 그 이유가 그 당사자한테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목숨을 끊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은 혼자서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친지들과 이웃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겨요. 현대인들은 특히이 젊은이들은 무엇이든지 그 자리에서 해결을 보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려고 해요. 참고 기다릴 줄을 몰라요. 사각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모든 것을 직석에서 확인하는 그런 조급한 습관 때문에 이런 현상이 오지 않는가 이런 생각도 듭니다. 참고 기다릴 줄 몰라요. 우리 전 세대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참고 기다릴 줄 알았어요. 참고 기다림을 통해서 이루어놓은 삶의 축적이 오늘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이제 오늘날에 여전에 비해서 여유 여유롭게 사는 것은 우리 선인들이 참고 기다리면서 갖꾸어 놓은 그런 열매들이에요.

사랑을 하더라도 서로가 길들일 수 있는 그런게 그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 자리에서 사랑이 익습니까? 세월을 동반하지 않고는 사랑이 성숙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움터서 꼽히고 열배 맺기까지는 봄, 여름 가을이 받쳐 줘야 됩니다. 어떻게 뿌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까? 뜸들릴 시간들이 필요해요.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은 특히 젊은 세대들은 모든 것을 즉석에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뜸들릴 시간이 없어요. 이것은 뭐 우스 소리만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 보면은 고속도로 휴교소 뭐 어디 할 것 없이 뭐 반찬도 이제 중국거 중국에서 뭐 나비가 뭐 묻혀 가지고 내놓다는데 밥들이면 뜸이 안 들어요. 뜸드리는 밥 먹기 참이 어렵더라고. 물론 이제 음식점에서는 오래 낮으면 이제 퍼지니까 어 그렇게 덜 익은 상태에서 내놓은지 몰라도 제가 뜸들이지 않는 밥을 먹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조급한 현대에 알맞는 이게 이제 밥이구나. 참고 기다릴 줄 모르고 모든 것을 직속에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신비스 사람까지도 바로 그 자리에서 뭐 끝장을내는 겁니다.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살려고 하면은 그 길이 막힙니다. 여럿시에 어울려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남의 처지를 살피게 돼요. 관계의 이웃을 고려하게 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고 닦아야 되요. 사람은 혼자 살지 않습니다.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듯이 관계 속에서 형 인간이 거듭거득 형성되는 것이지 가족이건 친구 혹은 직장이건 홀로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의 이웃을 고려해야 돼요. 어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은 직선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서 곡선적인 사고로 전환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보다 앞서 살다간 우리 선인들의 느긋한 생활 대도를 오늘 우리들은 배워야 됩니다. 목표를 향해 줄곧 달려가지만 않고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가다가 여기저기 눈을 팔면서 어정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길을 잃고 헤멜 수도 있어야 돼요. 이건 삶의 기술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데도 기술이 살아가는데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목표를 향해서 줄고 돌진하기보다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우회로 가다가 여기저기 볼 만한 거 있으면 눈을 팔면서 어정거리기도 하고 또 길을 잃고 헤멜 수도 있어야 돼요. 이게 인생입니다. 이런 삶의 기술이 필요해요. 여기 곡선의 묘미가 있습니다. 아 요같은 삶의 기술 일종 지혜죠. 삶의 지혜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게 되고 또한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이 아량이 생깁니다. 어 그래서 인생으로서 그 저력이 쌓이는 겁니다.

오늘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 자신도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누군들 한두 번은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어디 있겠습니까? 다 몇 번씩 죽고 싶었 어 그만 생활 하지하고 싶었 때가 다 있었어요. 그러나 그때그때 뒤고 일어서서 오늘 여기까지 와서 토명한이 가을을 앞에 선 겁니다. 자살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업으로 인해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린 그 업으로 인해서 이다음 세상에서도 참고 이겨내지 못하고 도중에 뛰어내릴 업의 힘력이 쌓이게 돼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것은 자살만이 아닙니다. 모든 행위가 그렇다고 어떤 행위가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현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연세적인 파장을 일으켜요. 그걸 업력이라 그럽니다. 업력 거듭 말씀드립니다. 무엇든지 빨리 단박에 이루려고 서들지 마십시오. 인생이 제대로 성숙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안으로 여물이들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곧 업이 됩니다. 카르마 업이 돼요.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는 겁니다. 그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아요. 이것이 바로 업의 파장입니다. 업의 매알이에요. 이런 업이 인과관계의 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과 관계의 배는 반드시 이런 업이 작용하고 있어요. 착한 너 업이건 착하지 않는 업이건 인과관계의 그런 그 고리를이 업이 이루고 있습니다.

요즘 같은 전 지구적인 재앙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자연 현상이 우연히 오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의 한 매알이에요. 개인이 지은 업을 별 업이라 하고 여럿이 함께 지은 업을 공업이라고 그럽니다. 불교 영어로서 개 별업 공업. 요즘 같은 그 전치구적인 재앙은 오만한 인류에 오만한 공업에서 온 거예요. 한정된 지구 자원으로 앞을 다소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를 하는 이런 그릇된 생활 습관을 누가 말릴 수 있습니까? 아무도 이거 말릴 수 없습니다. 서로가 앞으로 다 경하듯이 많이 만들어서 많이 소비하면서 또 내다 버리잖아요.이 악수라는 고리를 누가 끊습니까? 여기저기서 지진과 해일과 태풍이이 글리와서 잦은 이유를 우리는 생각해야 돼요. 명상가들이이 공통적으로 얘기합니다. 어만한 인류의 공업에 이와 같은 공업에 대한 어떤 경고의 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예요. 갈수록 이런 현상이 심할 거라는 거예요. 이제 다람사라에서 이제 청정 스님이 어제 오셨는데 이번에 그 박시산 그쪽 지진인 때 다람사라 거기도 그냥 멀리 떨어졌는데도 막 집이 흔들리고 한 5분 동안 뭐 선반에 있는 것이 다 쏟아지고 그래서 혼났어요. 뭐 다른 피는 없었는데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곧 업이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 씨앗이 부러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말 한 마디 걸음 하나 걸음 한 걸음 또 이제이 어떤 생각을 갖느냐 이것이 그 당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끝없는 파장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현재 우리 자신은 이게 업보시에요. 현재 각자 몸무의 얼마 또 이제 어떤 건강 상태 어떤 지능 어떤 감성 이것은 지금까지 축적해 온 하나의 결과입니다. 하나의 업의 결과라고 좋건 좋지 않건간에 내가 그렇게 그런 행위를 위해서 그 결과를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누가 그렇게 한 거 아닙니다. 흔히이 덜된 아이들이 부모 타서 하지 않아요. 반죽을 잘못해 가지고이 모양 이꼴로 만들어 놨다고. 그건 자기 업의 얼굴이에요. 업의 꼴이라고. 단지이 세상에 나올 인연이 돼서 그 부모를 충동시켜 가지고 그렇게 이제 그 집을 거쳐서 나온 것이지 누가 그렇게 빚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얼굴은 자기가 만드는 거예요.

전 지구조인 이런 그 재앙 앞에서 우리가 그런 그 어 재앙을 늪서 벗어나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현재와 같은 반자회적인 그런 생활 습관부터 고쳐야 돼요.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타고 다니는 것 얼마나 반자연적인 행위입니까? 집도 그렇고 뭐 우리가 거치는 옷도 그렇고 반 자연적 자연의 배반 자연을 등진 그런 모양이라고 해요. 그리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따라야 돼요. 자연의 질서를 따라야 됩니다. 사람은 뭡니까? 큰 자연 가운데 한 개체예요. 대자연 속에서 한 개체예요. 개체이기 때문에 그 대자연의 흐름에 따라야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생명을 종교하게 여겨야 돼요. 자신의 목숨이건 남의 목숨이건 짐승의 목숨이건 또 식물의 목숨이건 살아 있는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생각을 갖지 않으면은 지구가 편할이 없어요.

이 청명한 가을날에 뭐 이런 말을 꺼내기가 대단히 성그릇 없습니다. 그렇지만이 땅의 현실이기 때문에 부득이 제가 이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국부인과 집계 위하면은 연간 낙태 시술이 35만 건이래요. 35만 건. 우리나라만 그렇습니다. 북한도 아니고 남한만. 하루에 1천명의 어린 생명들이 살아야 되는 거예요. 이건 놀라운 일이에요. 여와선 현상은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일 거라고.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이렇게 이제 무차님이 살아당겠어요. 물론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이 있고 뭐 건강이 안 좋다든가 또 이제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은 그렇지 않는 경우가 허한 거예요. 생명을 넘어 이제 경시한 근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그럼 낙태로서 모든 것이 깨끗이 끝날 수 있는가? 그건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업이라니까요. 비유하자면은 멀리서 어렵게 어렵게 찾아온 손님을 방이 비다고 해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해서 사교 사교육비가 많이 든다고 해서 그냥 도중에 걷어 차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생명들이 그도 거체이고 도중 화당해 그대로 그대로 많으냐 그거예요.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그 집에 의존해서 그 엄마한테 그 아빠한테 의존해서 나오려고 하는데 도중에 그걸 이제 거절차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니까. 낙태 수술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어 제가 직접 목격한 사실인데 22여년 전에 제가 불리 살 때 한해 겨울인데 어떤 사람이 둘이 찾아왔어요. 뭐 대전에서 왔대요. 한 사람을 보자마자 그 얼굴을 보자 썸뜩하더라고. 이로 인사해서 알고 보니까 뭐 그 전에 나한테 이제 편지를 했는데 한번 찾아온다고 해서 온 사람 보니까 의사예요.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처음 보자마자 그 얼굴이 아주 썸뜩하더라고. 모르긴 해도 낙태 시술 같은 걸 많이 한 그런 거 봐 볼 거예요. 수사관들 얼굴은 얼굴이 아주 살기 등등하잖아요. 또 얼마 전에 이제 뉴스에 뭐 신문에도 넣오고 그랬는데 정보 차장인가?이 사람 얼굴 보세요. 아주 험널하게 생겼잖아요. 그 업의 얼굴이라니까. 업의 얼굴이에요. 우리들 자신이 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의지해서이 세상에 나 나오려고 하는 어린 생명을 버리지 말아야 됩니다. 그것은 마치 잘하는 새싹을 물님이 꺾는 것 같아요. 괴로 가지고는 자기 자신의 싹을 꺾는 거예요. 나를 의지해서 내 도움을 필요하는 어린 생명을 꺾는 것은 큰 죄업이 됩니다. 죄업이 된다고 해요. 업이란 두고 두고 연세적인 그런 파장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이란 꽃이 만발하고 단풍이 고게 물든 세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돕고 보살피면서 살아가는 인정이 넘치는 그런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끝으로 제가 잘 아는 집안 이야기를 꺼낼래요. 내가 이제 너무이 부정적인 얘기들만 해서 언제나니까이 좋은 가을날에 허뭇한 얘기를 하렵니다. 내일 모래가 60이 되는 한 님인데 그사님인데 그 집안은 아내와 다 키운 아들딸 대학 다 어 마친 아들딸을 둔 아주 어여한 가장입니다. 어 또 그 교사님은 고등학교 때 아주 수석으로 졸업 그 학교에서 수석으로 졸업해요. 그리고 모두가 선망하는 소위 인류 대학을 나온 사람입니다. 60년대부터 우리나라 이제 오기년 계획 일으켜 가지고 해외로 많이 진출했지 않습니까? 이때 이제 대기업에 해외 진출 때 이제 한 그룹에 입사하예요. 그래서 그 그룹에서 30년 동안 착실하게 근무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이제 중견 기업의이 전무 이사로 제지가 돼요. 그러다가 그 IMF라는 거 있었잖아요. IMF 근무하던 회사의 임원으로서 보증을 섰다가 잘 그것이 잘못되어서 무일푼으로 직장에서 그냥 털려놨어요. 이런 경우는 한두 사람의 예가 아닙니다. 평생 그 집장에서 애쓰고 아무 탈없이 잘 지냈는데 그 임원들은 아마 의무적으로 그 뭐 보증을 해야 되는가 봐요. 이게 어떻게 잘못돼 가지고 재판 결과 폐소돼 가지고 그냥 무일품으로 털털고 퇴직을 하게 됐어요. 부인 명의로 된 얼마 안 되는 재산만 남는 거예요. 그게 이제 30년 직장 생활의 전부 전부 거예요. 60이 다 된 이분이 새로 이제 취업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어렵지 않습니까? 어떻게 좋을지 아주 앞날이 막막하더라는 거예요. 그 지난 1월 2월은 뭐 산에 많이 다녔대요. 할 일이 없어. 그래서 산을 얼루 내리면서 자기가 생각했다네요. 내가 할 수 있는지 과연 무엇일까? 곰 공부 생각해 봐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라는 거예요. 하나는 공부하는 일이고 하나는 운전하는 일이었어요. 늘 하던 거니까이 나이에 공부하는 공부하기는 그렇고 운전 기사나 되어 볼까 이런 그 생각이 불쑥 나더래요. 어디서 들으니까 3년만 택시 운전을 하면은 개인 택시 면허가 나온대요. 거기에는 뭐 정년 제도가 없답니다. 또 건강만 하락하면은 자식들 다 이제 키워놓은 키워 놨으니까 자기 부부끼리 뭐 살 기 열릴 거라는 생각이 들더래요. 그 어느날 자기 부인에게 택시 기사를 한번 해보기 하니까 부인이 깜짝 놀래더래요. 지금 여기 오신 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빠가 한번 멀쩡한 직장에서 어 전무사로 근무하다가 떨려나 가지고 뭐 놀다가 갑자기 택시기사 한번 해 볼까 하면 모두 깜짝 놀랄 거예요. 그 자존심이면 체면 말이 되겠어요? 작심만 그 치서 바로 일급 운전 면허를 면허로 경신하고 택시 운전 기사 뭐 교육도 받고 자격증을 땄어요. 그래서 드디어 이제 핸들을지고 이제 영업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가 처음 차를 몰고 나가던 날 불안한 아내에게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그렇게 이제 얘기 했대요. 25년 무사고 운전사이니까 걱경하지 말라고 말이. 그리고 위로하고 나갔대요. 그날 그 집 안 주인이는 그 신경이 어떻겠어요? 아빠가 귀가할 때까지 얼마나 마음이 조마저마했겠습니까? 평생 육체 노동이라고는 모르고 회사에 경영만 하던 사람이 12시간이나 된 고된 운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뭐 초조하고 불안했겠지요. 그런데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의 모습을 보니까 어느데 봐도 밝고 아주 활기차 보였대요. 밤 늦게 오는데 하루 12시간 건물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남편이 하는 말이 내가 무뚝뚝하고 어색해서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는데 막상 부딪쳐 보니까 뭐 재미있더라고. 품돈이지만 그날에 이제 산악품도 다 채우고 돈도 남았다고 그렇게 이제 자랑하면서 자는 아이들을 깨 깨우더래요. 얘들아 일어나 아빠가 기분으로 통닭 어 맥주 산다. 그래 이제 이렇게 시작을 했대요.

이렇게 해서 시작한지가 어느지 6개월이 넘었답니다. 그 집 그 부인의 이야기예요. 지난 6개월 동안 저희 집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결혼 생활 만 28년 동안 요즘처럼 화기 애하는 분위기는 일찍이 없던 것 같습니다. 아빠라는 존재는 이일벌레 도움 기계로 상징되고 가족에게는 무관심의 극시였다는 인식이 이제는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 집안 얘기만 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은 어느 관도 없잖아요. 뭐 안전히 다녀오시고 이런 뭐 인사도사 없잖아요. 이런 아빠를 두고 자식들은 존경스럽고 안스럽게 여기면서 엄마 대신 이것저것 챙긴 것을 볼 때마다 엄마 가슴이 뭉크해질 때가 많다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투입으로 치면은 회사 다닐 때 뭐 절반 1분의도 이제 안 되지만 힘든 기색 없이 꿋꿋하게 살아가는 아빠의 모습에 온 가족이 고마워한답니다. 그래 이제 아침 일찍 이제이 운전하 나가는 모든 가족들이 현관에 나와서 아무 탈없이이 조심에 잘 다녀오라고 그렇게 인사들 한대요. 그전에 직장에 다닐 때는 너 누가 컵이도 안 보이든 식구들이 이제는 다 이제 아빠 잘 다녀오시라고 그렇게 인사도 안대요. 하루에 4, 50명의 손님을 대하다 보면은 세상 돌아가는 델별 얘기를 다 듣게 된대요. 그들 삶의 모습을 접할 때마다 새삼, 내 아내, 내 아이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는 거예요. 뭐이 소리 저 들어오면 세상이 뻔하지 않아요. 얼마나 험악한 세상인지 얼마나 덜된 세상인지를 너무나 아는데 우리 집 그래도 이제 우리 집 식구인 신들이 그래도 이제 참 고마운 존재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네요. 몸은 좀 고대고 어 회사 다닐 때처럼 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몸은 좀 고대되지만은 회사 다니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스트레스 받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가끔가다도 아주 보람 있는 일도 생겨서 재미 있대요. 때로는 친절한 기사 양반이라고 하면서 이게 명암까지 달라고 그런다네요. 아직 명암을 안 찍었대요.에 에 그분은이 노인들을 보면은 어머니 생각이 나서 잘해 드리고 싶고 아이들을 보면은 자식 같은 생각으로 아주 살하게 대해지더래요. 그분 그 심경이에요. 이런 생각이 사람을 안으로 여물르게 합니다.

여기 한 인생의 길에도 곡선에 묘미가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좋아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그 어떤 명예와 부보다도 갑진 삶이고 축복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체면 때문에 아이고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 운전대를 잡겠느냐 남의 눈을 의식하고 그런 생각 갖게 되면은 더 이상 인생은 없습니다. 모든 털털 털어버 전생일로 미루고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에게 주어진 현재 상황 안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길이도 열립니다. 이것이 인생이에요. 이게 곡선의 묘미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 집 주부의 이야기예요. 가정의 행복이란 화목과 작은 사랑의 나눔에 있음을 요즘에 이러 세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뭐 야 가정이라는게 뭐 대단한게 아니고 화목하 화목과 작은 나의 사랑의 나눔을 통해서 서로가 가족들 위하고 염려하고 일찍이 없이니까 그런 것이 바로 이제 인생의 낙귀고 가정의 행복이라는 것을 세삼스럽게 요즘에 와서 느끼게 된다는 거예요. 이 회사에 다니면서 좋은 자리 있을 땐 전혀 그런 생각이 없고 돈 벌레고 그냥 돈 벌는 기계로만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집안이 어렵게 돼서 아빠가 새로운 직장을 통해서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그게 결속이 되고 가정이 늘 화목하고 늘 확인해야 한다는 거예요. 결혼 생활 24년 동안 전혀 그런 걸 느끼지 못하다 이제 와서 그런 기쁨을 느낀다는 말을 제가 들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삶은 지나가는 과거나 미래가 오지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이 순간이에요. 바로 지금이 순간을 우리가 살 줄 알아야 돼요. 순간순간 그날 그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업을 익히면서 사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달라집니다. 또 내 개인의 삶만 달라진 것이 아니고 나와 관계된 이웃 가족들이 삶도 달라져요. 누가 나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나를 만들고 우리 집안을 만들어 갑니다. 어,이 가을에 다들 보다 투명하고 따뜻하고 어지르고 설량한 이웃이 되기를 빌면서 오늘 제 이야기를 만치겠습니다. 습니다.